삼인행 필유아사 (三人行必有我師)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세상만물이 다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타당한 말이 아닌가 한다. 사물마다 본보기가 되고 가르침을 준다는 이 말은 일찍이 공자님도 언급한 바가 있다. ‘삼인행즉필유아사(三人行則必有我師)’라고 했던 것이다.
함께 동행 하는 3인 중에는 반드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을 생각하면 아울러 자연스레 어떤 성어가 떠오른다. 바로 타산지석(他山之石)과 반면교사(反面敎師)가 그것이다.
물론 두 말의 뜻은 다르다. 타산지석은 나와는 별개의 하찮은 것이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도록 인격수양을 한다는 말이고, 반면교사는 남의 잘못한 것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음을 이른다. 하나 큰 테두리에서 보면 오십보백보가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고사가 있다. 공자님이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진나라 땅을 지나는 도중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구멍이 아홉 개가 뚫린 구술을 하나 선물 받았다. 그 구멍에 실을 꿰어 보았다. 그러나 잘 꿰지기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포기하고 인근 뽕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낙을 만나 그에게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물어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꿸 수가 있나요?"
그러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생각을 조용히 해보세요(密爾思之, 思之密爾.)”
그 말에, 공자님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꿀을 구하여 구멍에다 바른 다음 개미허리에 실을 묶어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쉽게 꿰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그 지혜의 전함을 공자천주(孔子穿珠)라고 한다. 이 말은 훗날 모르는 것을 남에게 물어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의 하문불치(下問不恥)의 뜻으로 많이 인용이 된다.
유사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온다.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 공작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런데 이것은 난생 처음 보는 새일 뿐 아니라 먹이를 무엇을 줘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새들이 먹음직한 것을 주어봤으나 도무지 먹지를 않아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였다. 임금님이 안타까운 나머지 대신들에게 물었다.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아는 방법이 없겠소?”
한 대신이 답했다.
“혹시 황희정승부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그때는 황희정승은 이미 세상을 뜨고 없을 때였다. 대신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나라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묘책을 잘 내어놓아 수습을 하곤 했던 것을 생각하고, 그것은 모든 면에 박학다식한 것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거미 불알을 먹여보시지요.”
언제가 황희정승으로부터 공작은 거미불알을 먹고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알려주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공작이 거미의 머리와 다리를 떼어내고 잘 먹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혜를 널리 구하면 해결할 방법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고사성어처럼 3인행 필유아사의 교훈을 전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기막힌 지혜를 구한 일화는 또 있다. 어느 농부가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면서 말을 듣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끙끙대는 것이 안타까워 보여서 물었다.
“혹시 소가 남다른 버릇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농부는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소는 전에 두 마리가 쟁기를 끄는 겨리 소였다. 평소에 두 마리가 끌다가 혼자 끄니 어색하기도 하고 힘이 들어 쟁기질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놈을 부릴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농부는 정색하며 물었다.
“전에 함께 했던 소는 이 누렁이 말고 어떤 털 색깔이었는지요?”
“검둥이었지요.”
“그럼 이렇게 해보세요. 부리면서 이랴 누렁아 이랴 검둥아 하고 번 갈아서 불러보세요.”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하니 신기하게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번 갈라 부리는 소리에 저 혼자서 일을 하지 않고 동무와 함께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농부는 우연히 나그네를 만나 지혜를 빌어 나머지 밭갈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세상을 살다보면 만나는 사람, 만나는 사물이 모두 깨우쳐주는 스승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미처 모르던 것을 깨닫는 것도 배울 점이고, 잘못된 현상을 보고 경계를 삼는 것도 배울 점이 아닌가 한다. 그럼으로 배운다는 그 자체로써도 마음의 양식을 삼을 만하고 그로인해 실제 얻음을 얻고자 하는 태도도 중요하지 않는가 한다. (2013)
첫댓글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승이 아닌 것이 없군요!
남의 잘못을 보고 느끼고 마음의 양식을 삼는 것은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도 한편쯤 오렬보고 싶어서 써밨습니다. 오후에는 재향군인회에서 개최한 관광포텔 안보강연회에 다녀왔습니다.
삼인 가운데 누군가가 자신의 반면교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단 저 만의 심정은 아닐 듯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배울점은 배울점 대로 실망하여 고칠점은 고칠점 대로 교훈과 반성의 기회로 삼으면 자기 인격이 그만큼 높여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남문학 발표
'세상만물이 다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은 경지에 이른 선생님이니까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들은 짐승이나 나무나 풀이나 나름의 새존전략을 갖추고 있지요.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신비롭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