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의 생애와 시
마리 롤랑생 (Marie Laurencin 1883~1956)
Mother and child 1928
1885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여류화가로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강습을 받다가 화가를 지망, 처음에는 페르디낭 융베르의 소묘 연구소에서배운 후 아카데믹한 사실기법(寫實技法)을 배움과 동시에 G. 브라크의 인정을 받았고, 1907년에는 앙데팡전에 출품하였다. P.R. 피카소와 알게 된 후에는 그를 통하여 시인 G. 아폴리네르와 만났다. 그녀는 초기 큐비즘 작가들의 옹호자였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매력적인 프랑스여성으로서, 그 후 현대미술사에서 그녀 자신의 확고한 발판을 굳히려 애를 썼다. 아폴리네르와의 연애는 5년간 이어졌는데, 그것은 로랑생의 예술적 전개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로랑생은 샤갈처럼 가장 진보적인 모더니즘, 심지어 다다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나, 독학으로 투영시킨 개인적인 신화나 소박한 신화를 약간 원시적 로코코 방법으로 구가할 것을 택했다. 로랑생의 작품은 그 미묘한 정신과 서정적 단순성, 그리고 장미빛 색채로 인해 부정할 수 없는 매력과 장식적인 호소력을 띄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순수한 지구력의 징표를 계속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에대한 실마리는 로랑생 자신이 '내 그림들은 내가 내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사랑 이야기이다' 라고 말했을 때 이미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는 글을 썼으며, 그녀는 당시 가장 전위적인 이 회화운동 한가운데서 전통적인 화법으로부터 탈피, 입체파적인 화풍을 전개하였다. 둘의 관계는 앙리 루소의 초상화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시인과의 사랑이 파탄되자 독일인 남작과 결혼, 에스파냐와 독일로 옮겨다니면서 살다가 결국 파리로 되돌아와서 죽었다. 1921년에는 남작과도 이혼,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장미빛과 청색·회색을 기조(基調)로 여성적 세계만을 계속 그렸다. 그림 이외에도 로랑생은 러시아 발레단이 1924년에 무대에 올린 풀랑스의 <암사슴들>을 위해 무대장치를 디자인했고, <이상한 나라에서의 엘리스의 모험>등 약 삼십권 가량의 책의 삽화도 그렸다.
마리 로랑생은 역시 한 시대를 대표한 화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건 반드시 금세기 미술사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에꼬르 드 파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화가들이 활약하는 다채로운 재능의 범람속에서 여성이 가진 우아한 감각과 서정을 남김 없이 회화로 표현해 매력넘치는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로랑생은 약간의 꽃이나 풍경을 빼면 일관해서 파리의 여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녀가 그리는 여성상은 극히 간략화 되어 있지만 입체파 회화에서 보듯 부분이 잘게 분해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현실 이미지에 충실하다. 우아하며 품위 있는 프랑스적 색조와 꿈꾸는 듯한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 우수를 띤 특유한 표정이 보는 이으 마음을 사로 잡고는 놔 주지 않는다. 그러나 로랑생의 예술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분홍, 보라, 파랑, 회색 등의 옅은 색조에 떠도는 웬지 모르게 느껴지는 서정과 지성이다. 그리고 때로 애수를 띠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에도 생생한 감각이 맥 뛰고 있다. 로랑생은 여성에게만 있는 특유한 세계, 자기의 감각적인 세계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다. 로랑생이 유명해진 것은 초상화가로서의 재능 때문이다. 그 작품도 연극이나 발레의 무대 장치, 수많은 삽화제작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초상화 장르에 들어간다. 각각의 개성이 다른 상대방을 모델로 그 개개의 특징을 포착하면서 그 어느 것에서도 망설임 없이 로랑생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이한 영상세계가 전개되는 것은 특필이라고 말할 만하다. 그려진 모델은 어느 새 로랑생이 사는 꿈으 세계의 일부로 변모되어 버리는 것이다. 처음 화단에 나타나 50여년 동안 로랑생의 세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러한 세계를 세월과 함께 넓히며 계속 그려 왔다.
마리 로랑생은 1883년 10월 31일 어머니 '롤리느 = 메라니 로랑생'의 따로 파리의 샤브로르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가 페론느에서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파리의 세무 감사관을 지낸 알르레드 투레였으나 아버지는 사생아인 마리를 따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인복을 짓거나 자수를 생업으로 했는데 투레의 원조도 받아 마리는 약간 부르죠아적인 환경에서 자가 양가의 자녀가 다니는 '리세 라마르티느'에서 수업을 받는다. 어머니으 직업상 마리 주변에는 늘 아름다운 명주실이나 고급스런 레이스, 단추, 여러 가지 양재용의 장식천이 널려 있었다. 어린마리에게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암코양이 '프시케트'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딸에게 독서와 음악적 소양을 길러 주었다. 마리는 이야기에 나오는 <애첩>이란 말에 가슴이 뛰고 기르랑다이오와 보티첼리 시를 지었다. '사생아'라는 성장과정, 우아하고 기품이 있지만 차가운 성격을 지닌 어머니와 둘 만의 호젓한 생활, 소녀시절의 마리 마음은 견딜 수 없이 고독한 슬픔을 띤 것이 틀림없다. 그런 가운데 시나 아름다운 색의 명주실에서 그녀으 갖가지 꿈과 공상이 짜여져서 그런 것들이 일찍부터 마리의 미의 원점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시인 아뽈리네르는 우제느 몽포르가 주재하는 '레 마르쥬'지'에 '루이즈 라랑느'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1931년 프랑시스 프랑크가 그 루이즈 라랑느의 세 편의 시에 곡을 붙였는데 이중 두 편<선물>과<어제>는 당시 아뽈리네르오 가까운 사이었던 로랑생이 소녀시절에 쓴 것이다. '소중한 선물' 그것은 마음' 이라고 하는 내용의 시에는 여성적인 뛰어난 정감이 배어 나와 있다.
선 물 만약 당신이 원하신다면 드리겠어요. 나의 아침을, 나의 명랑한 아침을. 당신이 사랑하는 빛나는 머리털 나의 푸른 눈도 기꺼이 곁들여. 그리고 원하신다면 황금의 눈도 당신께 드리겠어요. 아침 태양에 눈 뜰 때 들리는 소리 모두를. |
어제 어제, 그 건 내가 오랫동안 쓴 색 낡은 모자. 어제, 그 건 이젠 유행 지난 초라한 옷. 어제, 그 건 지금 텅 빈 아름다운 수도원의 기숙사. 그리고 젊은 아가씨들 교실의 장미빛 멜랑꼬리. 어제, 그 건 정할 수 없는 내 마음. 일년, 또 일년! 어제는 이미 오늘 밤이 되면 그림자일 뿐. 내 방 안에서 내게 바싹 다가온 그림자. |
리세 재학중에 회화에 관심을 가진 마리는 문학 공부를 하라고 권하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도자기에 그림 그려 넣는 강습에 다니다가 이윽고 화가가 될 결심을 하여 1904년 아카데미 앙베르에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그녀는 이 그림 학교에서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배우지만 가난한 미술학도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모델 섭외에 따른 어려움이 필요없는 자화상을 많이 그려 거기서 자기자신을 찾아 냈다. 앙베르에 다니기 시작한 로랑생은 거기서 '조르쥬 브라크'와 알 게 되고 브라크를 통해 당시 몽마르뜨의 아뜨리에 아파트<바트 라보와르>에 사는 피카소, 나아가 앙리 루소, 앙드레 사르몽, 막스 자콥, 프랑시소 카르코등 많은 젊은 예술가와 시인들과의 교류를 갖는다. 운명적인 사건은 24살의 봄(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아뽈리네르를 만난 것이다. 둘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을 통해 시인은 무명의 미술학도였던 로랑생을 전적으로 특이한 여류화가로 키우게 된다. 아뽈리네르는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에 대해 "마리 로랑생은 회화라는 중요한 예술에서 완전한 여성적인 미학을 표현 할 수 있었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후 1912년에 이별을 고할 때까지 둘의 파란 많은 관계는 5년간 계속되는데 로랑생은 시인이며 입체파의 이론적 옹호자인 아뽈리네르의 연인으르 알려져 그는 물론 그와 함께 어울리는 재능 풍부한 예술가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녀를 잘 아는 시인 프랑시스 카르코는 입체파 탄생 전후의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의 유쾌한 교유 에피소드를 쓴 회상기<몽마르뜨에서 카르췌라탕으로(파리예술가의 방랑기)>안에서 "마리 로랑생을 알고 있으면서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애정을 갖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그녀야말로 우리들의 여자친구 가운데 제일 활달하고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라고 썼는데 그들은 모두가 로랑생의 요정 같은 분위기를 사랑새서 서로 자기의 여동생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복 받은 예술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녀는 재빨리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화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세워 나갔다. 마리와 아뽈리네르를 결합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뽈리네르는 1880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신고서에는 마리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이름이 없었다. 둘은 사랑이 끝난 후에도 아뽈리네르가 죽을 때까지 편지 왕래를 계속했는데 이 처럼 깊은 인연으로 맺어지게 된 이유는 둘이 공통된 불행한 출생과 무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분홍색과 청색과 흰색의 연한 색조를 사랑한 파리 여성인 로랑생에게 있어서 아뽈리네르는, 사랑해야할 천재 특유의 그 재능으로 인한 격렬함과 아집으로, 인생의 반려자로 서는 사귈 수 없는 일면을 드러냈을 것이다. 둘의 사랑이 파국을 맞는 때는 아뽈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는 너무나도 유명한데 같은 무렵(1912년 경) 로랑생은 <입체파의 집>을 위한 장식그림으로 '처녀의 초상' '젊은 여자의 얼굴' '모자 쓴 부인'을 그리고 있었다. 시리즈인 이 작품들은 입체파의 작품 전시실 '입체파의 입'에 출품된 것으로 로랑생과 입체파와의 관계를 증명하는 중요한 작품이지만 회색을 띤 청색이 아플 만큼 슬픔을 자아내어 그녀의 마음에 자리잡은 아픔을 엿볼 수 있다.
1913년 어머니를 잃고 천애의 고아가 된 마리는 그 해 가을, 독일의 귀족이며 화가인 오토 폰 벳첸과 알 게 되어 다음 해 6월에 결혼, 신혼여행 중인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을 맞느다. 결혼으로 인하여 독일 국적을 갖게 된 마리는 적국인 프랑스에 머물 수 없게 되자 남편과 함께 스페인에 망명한다. 화가로서의 지위를 쌓아 영광의 자리를 막 차지한 마리에게 7년간의 망명생활은 실로 매서운 것이었다. 그런 로랑생을 지탱시켜 준 것은 과거의 추억과 파리에서으 여자친구인 '니꼴 구르'와의 사랑이었다. 니꼴은 파리에서 로랑생이 애타게 기다리던 뉴스와 여러 가지 선물을 갖고 왔다. 로랑생은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그녀를 그림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서로의 에로틱한 사랑을 원하게 된다. '비둘기와 두 사람의 여자' '백조와 젊은 여자들'이란 2점의 그림은 둘의 요염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1915년에는 젊은 날의 시인 掘口大學과 마드리드에서 알 게 되고 이윽고 1919년에는 스위스에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만나 후에 열렬한 편지 왕래를 하게 된다. 7년에 걸친 망명생활 동안 로랑생은 시를 짓고 그림을 몇 점 그렸다. '숲속에서''고양이와 여자''종려나무 옆의 처녀'등은 그 중 대작이다. '종려나무 옆의 처녀'는 태어나 자란 파리를 떠나 친한 친구들과 헤어진 고뇌의 세월 동안 그려진 작품으로서 흥미롭다. 흰색을 중앙에 놓은 화면에 진홍빛의 꽃, 분홍과 청색의 색조는 변함이 없으나 그녀의 그림으로서는 드물 게 꼼꼼하게 그려 넣은 식물의 녹색 배경이 망명생활의 쓸쓸함을 상징하는 듯이 어두워, 한 여자의 고독과 슬픔을 돋보이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의 스타일을 확립했다고는 하지만 입체파의 영향도 얼마만큼 남아 있는 듯이 보인다. 아뽈리네르가 소르본느대학 언어기록소에서 "미라보 다리" "마리" "나그네"의 3편의 자작시를 낭독하고 녹음한 것은 로랑생이 결혼하기 1개월 전, 아뽈리네르가 입대하기 반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다음 해(1915) 8월, 친구인 여류작가 루이즈 폴 카뷔에를 통해 로랑생에게 아뽈리네르의 소시집1권이 부쳐져 왔다.
머무르지 않는 숄을 두른 왕녀여
가거라, 가, 나의 무지개.
가 버리는게 좋아, 매혹적인 색이여.
그것이 너의 본성.
그리고 무지개는 쫓겼다.
너 대신에 북풍을 타고,
무지개를 빛내는 것이 쫓겼다.
깃발 하나가 날아 갔다.
같은 해 8월 아뽈리네르는 '마드레느' 라는 여성과 약혼을 한다. 약혼까지 하면서 그래도 로랑생에 대한 미련을 끊어 버릴 수가 없었을까. 이 시 중에 나오는 '매혹적인 색' 이라든지 '머무르니 않는 숄을 두른 왕녀' 라는 시구에서 확실하게 로랑생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전쟁에서의 프랑스 국기의 색, 이 격렬하고도 선명한 색채는 로랑생의 그림의 색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정도로 로랑생에 대한 사랑은 슬픔과 무거움을 동반하여 전장의 아뽈리네르를 괴로움으로 고뇌하게 했다. 1921년, 이혼하고서야 마리가 겨우 파리에 돌아왔을 때 아뽈리네르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남편과 헤어져 실의에 빠진 마리였지만 니꼴 구르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으 격려와 도움에 힘 입어 점차 명랑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림세계에서의 마리의 재 출발은 반드시 좋은 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오랜 부재로 인해 파리에서의 그녀의 작품가격은 꽤 내려가 전에는 제법 좋은 값으로 그림을 사주었던 화상 '폴 로잔베르'까지도 처음에는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3월에는 파리에서 최초의 개인전이 개최되어 화단에 다시 꽃 필 수 있었다. 그 무렵의 작품에는 아직 '여자 친구들'의 요염함에 대한 어렴풋한 어두운 기억들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23년 무렵이 되면서 '파리 양식' 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스페인 시절에 있었던 어렴풋하나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날카로움은 없어지고 물건의 형태는 어느정도 막연해졌지만 색채는 밝아 화사함을 보여 주게 된다. 비평가들은 마리가 망명시절의 예리함을 상실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현대미술로의 길을 똑바로 걸어가고 있던 예전의 입체주의 사람들과 격렬한 다다이스트들에 비한다면 로랑생의 그림은 이미 시대를 앞서가는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 이후로 확실히 로랑생은 창조성을 잃었다. 초기의 이지적인 작풍은 모습을 감추고 엷은 색조의 감미로운 그림이 되풀이되어 그려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로랑생의 작품은 지금까지의 화가들과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장콕도, 레몽 라디게등의 문학의 천재들이며 사티 이베르 같은 당시의 신진 음악가들, 구르고 남작부인, 카스트리스 공작부인 등의 상류 지식사회의 사람들이었다. 로랑생은 예전에 입체파의 사람들과 전위운동을 어렵사리 해 온 체험과 파스텔조의 엷은 색채표현이 갖는 미묘한 매력을 하나로 연결시킨 초상화가로서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24년 디아기레흐에 의한 발레 '암사슴'(대본=장 콕또, 음악=프랑시스 프랑스)의 의상을 담당하여 대호평을 얻자, 로랑생에게 계속 무대 일의 의뢰가 왔다. 이것을 계기로 로랑생은 인테리어 디자인, 무대 예술,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응용미술 분야에까지 활약의 범위를 넓혀간다. 앙드레 지도의 '사랑의 시도', 자끄 드 라크르테르의 '스페인에서 온 편지' 루이스 캐롤의'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서린 맨스필드의 '원유회' 등의 삽화본과 300점이 넘는 판화 제작, 특히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 그려진 요정적인 유년기의 세계, 또 가장 호평을 받았다는 맨스필드의 '원유회'에 그려진 소녀들의 모습, 거기에는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아이에 대한 집념과 전 생애를 통해 변함이 없었던 소녀시절에 대한 향수가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도 어느새 조용히 죽음이 찾아 오고 있었다. 1956년 6월 8일, 73살이었다. 후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 금세기 최대의 여류작가 '마르그리뜨 유르스나르'는 이 때 다음과 같은 감미로운 조시(1956)를 바쳐 애도의 뜻을 표했다.
죽음의 천사가 당신에게 인사하네.
마리, 우아함 넘치는 넋이여
아폴로가 하늘에서 당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네.
여름이 가고 그리고 겨울이 가고
숲속의 암사슴이 모습을 감췄네
흰옷, 장미빛 옷, 푸른 옷
천 명의 천사가 하늘나라로 당신을 맞으로 와 있어요.
"Valentine 1924" 로랑생은
유르스나르의 초상화를 세 번에 걸쳐 그린 일이 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불행히도
현재 1951년에 그려진 1점을 제외하고는 소재불명이다.1955년 6월 30일 로랑생이
죽기 약 1년 전에 그녀를 방문하 神原泰는 로랑생에 대한 추억을 그리워하는 듯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그녀는 아파트 7층에 살고 있었는데 1층에서 7층까지
예쁜 보라색의 융단이 깔려 있었다오. 그 보라색은 내게 보낸 마리으 편지지와 같아서
융단도 편지지도 그녀가 특별히 만든 것이라는 걸 알았지요. 그녀는 아름다운 백발과
푸른 눈에 여우같이 밑첩하고 나긋나긋한 손을 가진, 그녀가 즐겨 그린 주제와 흡사했소.
그리고 꾀꼬리 같이 높은 음의 목소리로 끊일 새 없이 계속 조잘거려요. 그건 뭐
잘도 얘기를 하지요. 네게 얘기할 시간 같은 건 주지 않지요. 그녀의 집에는 방이
몇 개 있는데 보통 그림을 사러오는 사람은 첫 번째 방에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
같았어요. 그 방에는 예쁜 그림이 15점 정도 걸려 있었어요. 모두 대단히 달콤하고
예쁘기만 한 깊이가 없는 그림이오. 나는 그녀의 근작이 시시하다는 일본에서의 평판을
떠올렸소. 그리고 1952년 7월에 파리의 화랑에서 열린 로랑생의 근작전을 보러 가
느낀 실망을 상기 했다오. 그렇지만 맨 마지막에 안내해 준 소파 등이 놓여져 있던
휴식하는 방은 멋있었어요. 그녀는 장롱에서 소중한 물건이라도 다루듯이 그림을
꺼냈는데 그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갇힌 여자(1917)'로 내 화집에도 들어 있는 작품인데
그런 그림은 팔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건
지금은 파리에서 손에 넣을 수도 없는 내 귀한 책이고 좋은 그림이 많이 그려져 있다.'고
하면서 '밤의 수첩'과 '암사슴'을 꺼내 왔어요. 그녀는 애지중지 '밤의 수첩'을 잠시
쓰다듬고 있었는데 이윽고 슬프게도 즐거웠던 추억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한 숨을
내쉬며 그 속에 빠져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었소. 내가 옆에 있다는 건 까맣게
잊어 버린 게요. 나는 그렇게 열중하여 자기 책에 푹빠져 있는 로랑생을 봤을 때,
그리고 그 귀한 책을 장롱속에 숨겨 둔 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로랑생이 예술과
그 본질을 안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