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간혹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문익점의 목화 전래 이야기도 그의 행적을 추앙하다 보니 과장되어 있다.
三憂堂 文益漸은 충혜왕 1년 (1331년) 현재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로 목화 재배의 시배지다. 본관은 남평이며 태어날 때 왼쪽 어깨에 노란 점이 있어 어릴 때 이름을 익점이라 하였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전했다는 이야기는 태조실록 1398년 6우ㅝㄹ 13일자 졸기에 처음 등장한다.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 조정에 갔다가 돌아올때 길가의 목면을 보고 그 씨 10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1364년 갑진년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 고을 사람
典客令(고려 때 벼슬로 예조에 속함)으로 퇴직한 장인되는 정천익에게 이를 심게하였더니 다만 1개만 살게 되었다. 장천익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개가 되었다."
그런데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는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가 보태져 붓뚜껑, 주머니, 상투 등에 몰래 숨겨왔다는 일화로 과장된다. 그의 사후 400여년이 지난 1819년 남평 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 실기"에 처음 실린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목화전래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형태로 전승되어 온 것은 문익점을 민생복리를 위해 노력하는 사대부의 귀감으로 여겼고 이런 행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는 1353년 공민왕 9년 과거에 급제 후 김해부사, 승진 후 좌정언이 된후 서장관으로 원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이 때 친원파가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을 폐위시키려고 하자 이에 저항하였으며 그 결과 남쪽 운남성으로 유배를 가 2년만에 풀려나 돌아올때 목화씨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장인 정천익으로 하여금 심어 기르게 하였고 그의 손자 문래.문영이 실 뽑는 기계를 만들었고 베 짜는 법을 개랼한다. 물ㄹ레와 무명은 그의 손자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조선조 임금들은 문익점을 높이 평가했다. 태조 이성계는 문익점을 '의로운 선비'라 칭송하고 정종은 장례에 예물을 올리고 제전을 하였으며 태종은 不遷之廟를 건립함과 동시에 토지 100결과 노비 70명을 내려주고 道川書院을 세운다. 세종은 문익점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세조는 富民侯에 봉한다.
고려에 퉁성하면서 조선에 따를지 않았던 그를 우대하는 것은 조선왕조에도 많은 충신이 생기도록 바라는 뜻이였을 것이다.
富民侯- 백성을 부자되게 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전남 보성에 가면 富民侯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