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
고려 인종(仁宗, 1122~1146) 때 최고 권력자였던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 등이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될 것이라는 도참설(圖讖說)을 내세워 인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고자 일으켰던 반란이다.
성종(成宗, 981~997) 때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의 기틀을 다진 고려는 문종(文宗, 1046~1083) 때를 거치면서 문벌귀족(門閥貴族) 중심의 사회로 자리 잡았다. 문벌귀족들은 혼인을 통하여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혼인의 대상이 되는 가문의 정치·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신의 가문을 높일 수 있고, 정치적인 출세도 손 쉽게 이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왕실과의 혼인은 문벌귀족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정권을 장악하는 지름길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점하는 명문세족(名門世族)들이 등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인주(仁州 또는 慶源; 지금의 인천) 이씨였다.
인주 이씨는 문종 때 이자연(李子淵)이 세 딸들을 문종의 후비(后妃)로 보낸 이래 인종(仁宗, 1122~1146) 때까지 7대 80여 년 동안 외척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들은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 관계를 맺어 후비·귀인(貴人)을 거의 독점적으로 들였다. 따라서 그 당시의 왕자나 왕녀도 거의 그들의 외손이었다. 인주 이씨 세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자겸(李資謙)이었다.
그의 둘째 딸이 예종(睿宗, 1105~1122)의 왕후로 들어가 원자(元子; 인종)를 낳으면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1122년 4월 예종이 죽은 후 자기 집에서 성장한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정권을 오로지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 식읍5,000호 식실봉700호(協謨安社功臣 守太師 中書令 邵城侯 食邑五千戶 食實封七百戶)를 책봉받아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 세력을 다졌다.
그해 12월 한안인(韓安仁)·문공인(文公仁; 文公美) 등이 인종의 숙부인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를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자, 이를 사전에 알아차린 이자겸 일파는 여기에 가담하였거나 동조한 반대파 50여 명을 살해하거나 유배시켰다. 이어서 1124년(인종 2) 2월에는 이자겸 일파를 꺼리는 최홍재(崔弘宰) 등을 제거하였다. 이로써 확고하게 권력 기반을 구축한 이자겸은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8,000호 식실봉2,000호(亮節翼命功臣 中書令 領門下尙書都省事 判吏兵部·西京留守事 朝鮮國公 食邑八千戶 食實封二千戶)를 책봉 받고, 숭덕부(崇德府)를 세워 독자적으로 요속(僚屬)을 두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자제와 친족들을 요직에 앉히고, 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을 수좌(首座)로 삼는 등 불교세력과도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국왕인 인종도 이자겸에 대하여 조서(詔書)에 이름을 쓰지 않고, 경(卿)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정도였다.
한편 다른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이면 자신의 실권이 축소될 것을 우려하여 그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강제로 왕비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자겸은 자신의 숭덕부에 소속된 요속인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송(宋)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게 하는 등 국왕이나 다름 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자신을 국가의 중대한 일을 관장하는 직책의 의미를 가진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사정이 여기까지 이르자 인종도 그를 멀리 하기 시작하였다. 인종의 이러한 심정을 알아차린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金粲)과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이 1126년(인종 4) 2월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과 오탁(吳卓)·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장군(將軍) 고석(高碩) 등과 함께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고자 하는 뜻을 인종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인종은 김찬을 이자겸의 6촌 형제인 평장사(平章事) 이수(李壽)와 이자겸의 처남인 전 평장사(前平章事) 김인존(金仁存)에게 보내 의논하도록 했다. 그들은 계획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하였으나, 이자겸 일파의 세력이 막강하므로 신중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면서 거사를 늦출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김찬 등의 주장을 좇았다. 그리하여 최탁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병부상서(兵部尙書) 척준신(拓俊臣; 척준경의 아우)과 내시 척순(拓純; 척준경의 아들) 등을 죽인 다음 시체를 궁궐 밖으로 내던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 등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먼저 재추(宰樞)와 백료(百寮)들을 자신의 집으로 소집하여 문의하였으나, 모두 허둥댈 뿐이었다. 이에 척준경이 일이 급하므로 앉아서 기다릴 수만 없다고 하면서, 시랑(侍郞) 최식(崔湜) 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넘어가 신봉문(神鳳門) 밖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자 지녹연·최탁 등은 상대의 병력이 크게 집결한 것으로 오해하고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그저 활을 가지고 성문 위에서 지키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의장(義莊)이 현화사(玄化寺)의 승려 300명을 인솔하고 궁성 밖에 도착하였다. 이에 인종은 신봉문에 나와서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내탕(內帑)의 은폐(銀幣)를 나누어 주고는 무기를 버리도록 선유(宣諭)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활을 쏘면서 공격하였고, 이자겸은 주모자를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마침내 척준경 등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오탁·최탁 등 반대파의 주모자들을 죽이고, 지녹연·김찬 등을 유배시켰다. 결국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려던 이 거사는 이자겸 일파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오히려 궁궐이 거의 대부분 소실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어 이자겸은 인종을 자신의 집인 중흥택(重興宅)에 연금시키고는 행동과 음식까지 통제하였다. 이로써 이자겸 일파의 권력 기반은 한층 강화되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인종은 한때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기려고 하며 그에게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러나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의논이 두려워 감히 응낙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수(李壽)가 '임금께서 조서(詔書)를 내렸다고 해도 이공(李公)이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느냐'고 힐책하자, 이자겸은 눈물을 흘리면서 조서를 반납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이자겸은 당시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이른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떡에 독약을 넣어 인종을 두 차례나 독살하고자 했으나, 이자겸의 넷째 딸인 왕비의 도움으로 인종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이자겸 일파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인종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척준경에게 이자겸이 신의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바칠 것을 권유했다. 이에 척준경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인종은 충성을 당부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런데 이 무렵 이지언(李之彦; 이자겸의 아들)의 남자 종이 척준경의 남자 종에게 척준경이 왕궁에 화살을 쏘고 궁궐을 불태운 죄를 힐난했는데, 이 내용이 척준경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최사전이 척준경을 찾아가 회유하자, 그는 거사의 결행을 약속하고 인종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이어서 인종이 이자겸의 제거를 당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고, 또 김부일(金富佾)를 보내 거사를 독촉하였다. 이에 척준경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의 가족들을 체포하였다. 그때가 1126년(인종 4) 5월이었다. 인종은 이자겸과 그의 아내 최씨(崔氏), 그리고 아들 이지윤(李之允)을 영광(靈光)으로 귀양을 보냈다. 물론 이자겸의 다른 아들들과 측근들도 각각 다른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와 함께 인종의 왕비였던 이자겸의 셋째·넷째 딸들도 모두 폐비되고 말았다.
이자겸은 1126년(인종 4) 12월에 유배지 영광에서 죽었으며, 이자겸을 제거한 척준경은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에 책봉되면서 한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이듬해 3월에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었다가 1127년(인종 5)에 곡주(谷州)로 옮겨 살게 하였다. 그 뒤 1130년(인종 8)에 인종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으며, 1144년(인종 22)에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를 제수받았으나, 수십일[數旬] 만에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
이로써 이른바 이자겸의 난으로 인한 혼란은 막을 내렸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자겸 일파는 몰락하고, 왕정(王政)이 복고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또한 정치적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문벌귀족들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문벌귀족사회의 동요는 뒤이어 발생한 이른바 ‘묘청(妙淸)의 난’을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으며, 마침내 1170년(의종 24)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의 발발로 문벌귀족사회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