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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치산 사단병력 버티던 천연요새"
1. 대 상 산 : 백아산(810m) - 전남 화순군
2. 산행시간 : 4시간(우천시에도 산행 합니다)
3. 출발시간 : 2009년 4월 19일 일요일 08시(07시 50분 집결)
4. 출발장소 : 순천 기적의도서관앞(금당 동명초등학교정문)
광양읍 승차 07시 40분(광양로타리 국민은행 앞)
5. 산행코스 : 백아산 자연휴양림 - 팔각정 - 문바위삼거리 - 백아산 -
천불봉 - 마당바위 - 절터바위 - 상여바위 - 원리
6. 준비물 : 회비 20,000원
중식,간식,식수등
7. 개념도
동쪽 멀리로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지리산을 지아비인양 모시고 서쪽 곁에 우뚝 솟은 무등산을 형인양 응석부리며 기대고 선 백아산. 그 두 산이 이루는 회랑을 타고 남북으로 시원한 조망을 틔우는 백아산은 전남 내륙의 조망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백아산은 화순군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북면에 위치해 있어 그저 평범한 산으로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산이 주위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절호의 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산에 올라보면 곧 알게 된다. 공비들이 이 산을 차지하고 활동을 펼쳤을 만큼 사방 수십 리에 걸쳐 거침이 없다.
1949년 여순사건 당시 공비소탕작전에서 아군이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1개 중대 병력을 잃을 정도로 견고했다. 6.25가 발발하고 퇴로를 차단당한 빨치산들은 이곳에 전남도당사령부를 차리고 1년이상 버티던 곳이다. 이 지역 빨치산은 군경합동작전에 오키나와 미공군 전폭기의 공중폭격지원을 받고서야 탈환할 수 있었던 천연요새다.
“하얀 거위”라는 뜻의 이름대로 백아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온통 하얀 바위가 옹골차게 사면을 꽉 채우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특이한 석회암지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흰 거위가 노닐었다는 뜻에서 '희어산'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8. 코스가이드
백아산 산행은 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북면 소재지인 이천리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휴양림에서 시작해 본다. 휴양림 관리사무소 왼쪽에 자리잡은 산막지구를 지나면 숲에 덮인 너른 계곡으로 들어서게 된다. 길은 조금씩 왼쪽으로 틀면서 백아산 남릉의 고개로 오른다(관리사무소에서 15분 거리). 이후 줄곧 남릉을 따라 오르게 된다.
고개에서 나무계단이 놓인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암릉이 나타나는데 이 암릉의 뿌리를 돌아 오르도록 길이 나 있어 보기보다 힘이 든다. 이 암릉을 따라 약 45분 오르면 팔각정이 나온다. 관리사무소 오른쪽 능선을 타고 오르면 바로 이 팔각정으로 올라선다(약 30분 거리). 팔각정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지리산, 서쪽으로 무등산, 남쪽으로 모후산과 조계산이 두루 보인다. 팔각정 이후 문바위로 빠지는 삼거리까지는 비교적 순한 능선길로 이어진다(30분 거리). 문바위쪽 능선을 타고 내려서면 다시 휴양림에 자동차를 두고 올랐다면 정상을 다녀와서 이 문바위 코스로 하산하는 것이 편리하다.
문바위 삼거리서부터 정상까지는 팔각정~삼거리보다는 조금 거칠다. 그러나 염려할 정도는 아니고, 정상에 다가갈수록 가파라지다가 바위지대가 나타나면서 곧이어 정상에 닿는다(삼거리에서 30분 거리). 정상에서는 팔각정에서 본 조망이 북쪽 조망이 더 터진다. 그리고 백아산의 트레이드마크인 바당바위와 이어지는 암릉이 뻗어내린 모습도 보인다.
마당바위로 내려서는 길은 바위지대를 피해 도는 길이 잘 나 있다. 천불봉 서쪽을 지나 마당바위 직전 억새밭에 내려서는 데에는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오른쪽 넓은 개활지 가운데에 샘터가 있고, 반대편 능선에는 주름이 많이 진 바위벽이 보인다. 이 바위주름들이 자아낸 형상이 천불상 같다 하여 천불봉이라 부른다.
마당바위는 사방이 벽으로 형성돼 있어 언뜻 보기에는 오르는 길이 없어 보이지만, 동벽의 틈새로 철사다리가 놓여 있으므로 이 사다리를 이용해 오른다.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다시 한번 가슴 뚫리는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마당바위 북쪽으로 이어지는 절터바위~상여바위(마당바위에서는 보이지 않음) 암릉이 섬뜩하기조차 하고, 석양에 실루엣으로 들어오는 무등산의 위용에 다시 한 번 명산임을 되새기게 한다.
마당바위에서 다시 철사다리를 타고 내려서서 아산목장쪽 비학봉 능선을 따라 약 40분 정도 내려서면 15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 닿는데 바로 이곳이 백아산 관광목장이다.
9. 주변의 명소
가. 물염정
중종 명종대에 성균관 전적 및 구례 풍기군수를 역임한 홍주송씨 물염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정자이다 후에 외손 금성나씨 나무송(羅茂松) 나무춘(羅茂春)형제 에게 물려주었다. 수차례의 중수와 함께 1966년, 1981년 에 중수하였다. 건물구조는 정면3칸, 측면 3칸 대청형으 단층팔작지붕 끌기와 건물이다. 화순 적벽에서 3㎞상류 에 위치하고 있으며, 병풍처럼 둘러 있는 기암괴석과 노송 , 그리고 계곡과 단애의 운치를 정자위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선경속의 신선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나. 적벽 - 중국 적벽보다 아름다운 화순 적벽
동복천 상류인 청량천에는 약7km에 걸쳐 크고 작은 수많은 수려한 절벽 경관이 발달해 있다. 동복댐 상류에 있는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창랑리,몰염적벽등 4개의 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노루목 적벽은 수려한 경관과 웅장함, 그리고 주병의 적절한 자연경관의 조화로 예부터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흔히 화순 적벽이라함은 이 노루목(장항)적벽을 말한다. 1519년 기묘사화후 동복에 칩거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물염적벽은 규모나 풍치 면에서 노루목적벽에 미치지 못하지만 건너편 언덕의 송순정이 건립한 물염정이 있어 휴식지로는 안성맞춤이다. 보산적벽은 노루목에서 서쪽으로 600m 거리에 있는 보산리의 북쪽 계류가 모여 이루어졌다. 청량적벽은 높이 40m에 길이가 100m가량 이어진 적벽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지금은 동복댐이 들어서 적벽의 절반이 물에 잠기게 돼 옛적벽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긴다.
다. 김병연 - 김병연(金炳淵)이 삿갓을 쓰고 방랑시인이 된 내력
조선 순조 11년(1811년) 신미년에 홍경래(1780-1812)는 서북인(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들의 행악에 분개가 폭발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교묘한 수단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민심의 불평 불만을 잘 선동해서 조직한 그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 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어 버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다.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 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김익순에게는 물론 그 가문에도 큰 치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법의 심판은 냉혹하여서, 이듬해 2월에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난리 때 형 병하(炳夏)는 여덟 살, 병연은 여섯 살, 아우 병호(炳湖)는 젖먹이였다.
마침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에 김성수(金聖秀)라는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조정의 벌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두려워하던 멸족(滅族)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병하, 병연 형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였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 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는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 때 신주를 모시기는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一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일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농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장군도리농서락 열사공명도말고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계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선천자고대장읍 비저가산선수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가릉노리양명정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혼귀남무반악비 골매서산방백이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라. 화순 동복 남덕원비 - 지방유형문화재 제209호(1999.2.26.지정)
동복에 있었던 남덕원은 독상리 제궁동 입구 금계산 기슭에 있었던 역원으로 인근 한천리에 검부역이 생기면서 폐지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검부역이 언제 설치되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남덕원의 폐지연대도 추정이 불가능하다.
남덕원비는 전체 높이는 320cm, 폭은 130cm, 두께는 위 14cm·아래 23cm이다. 비석은 거친 사암질 자연석이고 비문은 8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문 내용 중 심지헌 이란 인물이 있어 확인 결과 그는 동복현감을 지냈는데 1666년 9월에 부임하여 1668년 7월에 이임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비석의 건립연대 또한 무신년 3월인데 이임하기 전 심지헌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을 쓰고 전각글씨를 새긴 사람은 광산김씨 김진도인데 그가 누구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남덕원비의 문화재적 가치는 역원에 대한 유일한 비이며 동복현의 역사와 관련시켜 살펴 보면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7세기에 새겨진 행서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17세기에 이러한 거친 자연석에 행서가 남아 있는 경우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교통시설이자 공공기관이었던 역원과 관련있는 원비로서는 유일하며 건립연대가 확인된 점 등 조선시대 제도사, 사회사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마. 화순 백아산 아천동굴 - 기념물 제24호(1976.9.30.지정)
종유굴은 석회암 속의 층면에 따라 흐르는 지하수의 용해작용에 의하여 생긴 동굴이다. 이 동굴은 화순군 북면 백아산 산록에 있는 종유굴로서 수리마을에서 백아산 휴양림으로 가는 길가 산중턱에 있다. 전남지역에서 유일한 석회석 동굴로 1973년 한국동굴학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굴의 형성은 약 2억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동굴의 길이는 80m이고 입구직경은 겨우 5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출입이 불편하다. 그러나 중간쯤 통과하면 굴곡이 심하지 않고 광장 직경이 약 4m나 되어 종유석주가 늘어져 있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본 동굴을 나와 그 밑으로 내려 오면 또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의 입구 직경은 60cm이고 그 길이는 75m이며 동굴내에 천연폭포가 10여m 높이에서 떨어지고 있다. 현재 동굴 보호를 위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다.
참석 하실분은 꼬리말에 메모나 전화예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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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산악회 (010-3330-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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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은 백아산인데 , 설명은 망운산이네요. 어떤 산을 가는지요? 백아산이면 참석하고 싶은데..............
PC작업중 자판 고장으로 수정을 못하고 늦게 수정하였습니다. 백아산 가구요. 그날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