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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북경에 가다
수양대군의 묘호는 세조다. 묘호란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죽은 뒤에 얻은 이름 세조가 《세종실록》에 있다. 따라서 세조가 등장하는 세종 24년(1442)부터 세종 32년(1450)까지의 《세종실록》은 세조 사후에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단종실록》은 처음부터 수양대군의 죽은 이름인 세조가 나온다. 《단종실록》은 수양대군 사후에 편찬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의 후반부와 《단종실록》의 역사는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단종은 문종 즉위년(1450) 7월 20일에 왕세손에서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왕세자로 책봉된 지 약 1년 10개월이 지난 1452년 5월 14일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6대 왕이 되었다.
단종 즉위년(1452) 5월 21일에 문종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을 가지고 명에 갔던 조선의 김세민・유수강이 3개월 20일 만인 9월 10일에 서울에 돌아왔다. 그들이 서울에 도착하기 20일 전 명나라 사신 진둔・이관이 조서를 가지고 서울에 왔다. 조서는 경태제가 아들 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정통제의 아들 견심은 기왕으로 봉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왕실과 명나라 황실 사정은 맞물려 매우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5월 초2일에 짐의 장자 견제(見濟)를 책봉(冊封)하여 황태자로 삼았다. 대본(大本)이 이미 바르고 이륜(彝倫)이 또한 밝아졌으니, 친친(親親)의 정의(情誼)가 더욱 마땅히 돈독할 것이다. 태상황제(太上皇帝)의 장자 견심(見深)은 특별히 다시 기왕(沂王)으로 봉하여, 국가를 보호하고 종사를 위안(衛安)하게 한다. 중외에 포고하여 다 듣고 알게 하라.”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8월 22일
이때는 1449년 오이라트족에게 사로잡혔던 정통제가 1450년 명나라 조정에 송환되었으나 경태제에 의해 유폐 중이었다. 황제 자리를 빼앗은 경태제가 이복형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고 남궁에 유폐한 것이다. 정통제가 유폐된 상태에서 경태제는 형의 아들 주견심은 기왕으로 하고 자기 아들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한 것이다. 경태제 아들 주견제의 황태자 책봉을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진둔・이관은 단종 즉위년(1452) 8월 27일에 서울을 떠났다. 이때도 세조가 모화관에서 사신들을 전송하였다고 《단종실록》은 전한다.
세조는 단종이 상왕으로 있던 세조 1년(1455) 7월 26일에 그의 아들 이장(李暲・1438~1457)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때 왕세자빈 인수대비는 한확의 딸이었다. 세조는 철저하게 경태제가 했던 일을 따라 했다. 하지만 경태제는 황제였던 이복형 정통제와 조카 기왕을 살려두었지만, 세조는 왕이었던 조카 단종을 죽였다. 단종의 죽음은 ‘탈문의 변’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탈문의 변’이란 경태제가 병이 위중하자 대장 석형(石亨)과 태감 조길상(曹吉祥)이 유폐 중인 정통제를 다시 황제로 복위시킨 것을 말한다. 《세조실록》을 보면 세조 2년(1456)까지 명의 연호가 경태(景泰)이던 것이 세조 3년(1457) 1월 1일부터 천순(天順)으로 바뀌었다. 정통제 주기준의 황제 복위는 조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경태제 때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탈문의 변’ 이후 단종 때문에 불안하여 밤잠을 설쳤을 것이고, 마침내 세조와 그의 추종 세력은 영월에서 귀양살이하던 단종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다시 영(瓔) 등의 금방(禁防)을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세조 3년(1457) 10월 21일
1452년 5월 14일에 문종은 승하하고 5월 18일에 단종이 즉위하였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 7월 30일에 태어났으니 만 11세가 채 되기 전에 조선의 왕이 된 것이다. 이로부터 5개월이 지난 윤9월 17일 단종의 즉위를 승인하는 명나라 조・칙을 가지고 중국 사신 김유와 김흥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공순이란 문종의 시호도 가져왔다. 이에 대한 사은사로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다. 수양대군이 고명 사은사로 명에 간 것은 단종의 등극을 허락한 경태제의 고명 때문이었다. 고명이란 중국의 황제가 제후나 5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주던 임명장이다.
그 고명(誥命)은 이러하였다. “(…) 어찌하여 (문종이) 향국(享國)한 지 얼마 아니 되어 갑자기 고종(告終)을 아뢰는가? 응당히 계승자(繼承者)가 있어서 그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너【휘.】는 이【휘.】의 적자(嫡子)로서 이미 어질고 또 장성하니 전하여 이음이 오직 마땅하므로 이에 특별히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는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윤9월 17일
① 수양대군은 중국 사신 김유・김흥에 대한 전별연을 그의 사저에서 베풀었다. 사헌부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지만, 단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숙부(叔父)라는 높은 신분이면서 나라를 위하여 북경(北京)에 가니, 나도 또한 도성 문밖에서 전송하고자 한다. 지금은 졸곡(卒哭)도 이미 지나서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도 허용하였는데, 어찌 다만 이 일만 금하겠는가?”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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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즉위에는 명나라에서 윤봉과 정선이 왔고 이에 대한 사은사로 좌의정이던 황보인이 명에 다녀왔다. 그런데 단종의 고명 사은사로 수양대군이 결정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단종실록》을 보면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결정되기 전 의논이 분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승지 강맹경은 사은사로 가기를 청하는 수양대군을 추천하면서, 불가하다면 김종서를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단종은 부마(駙馬)를 사은사로 하자고 했지만 강맹경은 부마는 병이 나서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단종실록》에 부마의 이름이 없지만,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鄭悰 ・?~1461)이 단종이 말하는 부마일 것이다. 좌의정이던 김종서는 70세로 늙었지만 가겠다고 하였다. 늙은 게 문제라면 다른 사람을 임시로 의정부 대신으로 임명하여 보내자고 하였다. 그러나 단종은 수양대군을 고명 사은사로 결정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으로 어린 임금은 혈육을 더 중히 여겼는지 모른다.
② 수양대군은 수행원이 엄청 많았다. 다른 종친이 중국 조정에 갔을 때는 30여 명 정도의 수행원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50여 명이나 되는 수행원을 데리고 갔다. 이 문제를 사간원 좌헌납 조원희(趙元禧・?~?)가 지적하였지만, 단종은 허락하였다.
“예전에 혜령군(惠寧君) 이정(李𧘿)과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이 중국 조정에 갈 때 데리고 가는 사람이 불과 38인이었는데, 이제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수종자(隨從者)는 50여 인에 이릅니다. 이제 중국 사신과 본국 사신의 왕래가 잦아서 연도(沿道) 인민들이 매우 피곤하니, 청컨대 적당히 감하소서.”(…)“혜령군과 공녕군이 북경(北京)에 갈 때에 사람 수가 적은 것은 그때에는 방물(方物)이 없었고 바치는 말[馬]도 적었기 때문이었으니, 지금 대군(大君)의 행차(行次)는 이 예(例)로 논할 수 없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9월 30일
수양대군은 많은 조선의 토산물과 말을 가지고 명나라에 갔다. 명 황제 경태제를 비롯한 조정 실세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한 토산물과 말이었을 것이다.
어린 왕과 야수의 대결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온 수행원들은 뒤에 모두 승진하였다. 이를 지적한 사간원에 근무하던 황보공(皇甫恭・?~?)의 상서를 보자.
지난번에 수양대군이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왔으나, 별로 포상할 만한 일이 있지 아니하였는데도 그 종사관(從事官)에게 시행(時行)이면 품계를 올리고 전함(前銜)이면 직임을 제수하여서 상전(賞典)을 보였습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이 개국한 이래로 왕자가 중국 북경(北京)에 입조하였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따라간 사람이 공로도 없는데 특별히 관직을 더한 것을 신 등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4월 11일
숙부로 대우하는 어린 임금과는 달리 수양대군은 이처럼 왕권에 대한 야욕을 이루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수양대군보다 한 살 적은 안평대군도 수양대군의 야욕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기에 왕권에 대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대립관계는 수양대군 측에서 만들어낸 허구로 본다. 안평대군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명 사은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형 수양대군을 마중 가다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였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정이한(鄭而漢)이 승정원(承政院)에 글을 보내어 아뢰기를,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이달 14일에 순안(順安)의 노상(路上)에서 말에서 떨어져 가마[輿]를 타고 본현(本縣)에 돌아와서 약을 먹으며 조섭(調攝)한 지 15일 만에 기체(氣體)가 평상시와 같게 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마침 요통(腰痛)으로 인하여 수양대군과 함께 일시에 환경(還京)할 수 없었습니다.”
《단종실록》 단종 1년(1453) 2월 17일
수양대군은 집안 어른으로 대우하던 아랫사람들을 무참히도 많이 죽였다. 만약에 대군이 형의 야욕을 미리 알았거나 왕권에 욕심이 있었다면 명에서 돌아오는 수양대군을 죽였을 것이다. 단종 또한 수양의 야욕을 일찍 알았다면 어떤 트집을 잡아서라도 사약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 동생인 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에 맞서 황보인・김종서 등과 힘을 합쳐 단종을 보호하려다가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 한충희,《朝鮮의 覇王 太宗》,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4, 324쪽.
단종 2년(1454)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영의정일 때 중국 사신 고보・정통이 조선에 왔다. 그들은 단종 비 송씨를 정순왕후로 책봉하는 조서・칙서・고명을 지니고 조선에 온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신 고보와 정통은 임금인 단종보다 수양대군이 먼저였다. 그들에게 조선 국왕은 이미 수양대군이었다.
세조가 다례를 마치고 나오니 사신이 신숙주에게 말하기를, “수양군(首陽君)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니, 내가 내일 그 집에 가서 보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세조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대인(大人)을 청하실 것입니다. 대인께서 왕궁에 가시지 않고, 먼저 제집에 오시려 하심은 실로 미안(未安)합니다.” 하니, 고보가 말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단종실록》 단종 3년(1455) 4월 23일
③ 명나라 사신 정통・고보가 수양대군의 엄청난 환대와 선물을 받으며 조선에 있을 때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단종은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에게 선위하였고, 고보・정통은 1455년 7월 7일 서울을 떠났다.
수양대군이 단종 비를 정한 것은 왕위 찬탈 과정의 가장 핵심적인 계획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에 이 계획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서 조선인 환관들과 야합하여 비밀리에 세운 것이라면 모골이 송연하다.
김유・김흥・고보・정통 모두 조선에서 보낸 명 황실의 내시였다. 이들도 중국인 예겸과 사마순도 형의 황위를 찬탈한 경태제가 보낸 중국 사신들이다. 따라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돕거나 방관할 인물들이 아니겠는가? 임금이 되자마자 수양대군은 고보・정통의 조상에게까지 관작을 추증하였다.
고보(高黼)・정통(鄭通)에게 삼대(三代) 관작(官爵)을 추증하였다.
《세조실록》 세조 1년(1455) 윤6월 24일
그리고 세조는 고보와 정통이 조선을 떠나기 전 그들에게 각기 전토 1결을 하사하였다. 당시 1등전 1결의 넓이는 9,859.7㎡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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