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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에게 말한 비유들
첫째 비유
너희의 도시는 이 도시에서* 멀리 있다. 그런데 너희는 살아야 할 도시를 알면서도, 어찌하여 이곳에다 땅, 값비싼 세간, 집, 쓸데없는 방을 마련하느냐? 이 도시에서 이러한 것들을 마련하는 이는 자신의 도시로 돌아 갈 수 없다. 어리석고 의심하는 불쌍한 사람아, 너는 이 모든 것이 남의 것이고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50,1-3]
▣ 헤르마스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반세속화를 두 주인, 두 종류의 법과 함께 초대 그리스도교의 “두 나라론”으로 확대 한다. 그리스도인이 부유해지면 그는 남의 재산이나 다른 사람, 곧 이 도시의 주인에게 종속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표현이 황제, 곧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관청 — 따라서 순교의 가능성을 암시하는지 ― 또는 마귀를 가리키는지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마귀가 헤르마스에게 하느님의 적대자라는 것은 명백하다.
너희는 주님을 섬기고 그분을 마음에 모시도록 애써라. 주님의 계명들과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일들을 하여라. 하느님을 신뢰하여라. 네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면 그분은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50,7]
☑ 주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저마다 제 능력에 따라 땅 대신에 곤궁한 영혼들을 사고* 과부들과 고아들을 보살피며(야고 1,27 참조) 그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부와 모든 소유물을 이러한 땅과 집을 위하여 사용하여라* 이를 위하여, 곧 너희가 주님께 이러한 봉사를 하도록 그분은 너희를 부유하게 만드셨다. 네가 네 도시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 찾을 이러한 땅과 재산과 집을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이러한 사치는 좋고 즐거우며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닌 기쁨이 뒤따른다. [50,8-10]
▣ 목자는 8절에서 일반적인 투자 대신에 완전히 다른 투자를 하도록 권한다. 맨 먼저 곤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몸값올 주고 구출하는 것이 언급된다. 헤르마스는 곤궁한 영혼, 과부, 고아들을 돕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쌓아두어야 하는 땅, 집, 자산 가치로 여긴다.
☑ 지상에서 선행은 하늘나라에 차곡차곡 쌓인다.
이교인의 사치를 좇지 마라. 그것은 하느님의 종인 너희에게 해롭다. 오히려 너희가 기뻐할 수 있는 너희 자신의 사치를 추구하여라. 돈을 위조하지 말고* 남의 것을 손대거나 탐내지도 마라.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은 악하다. 네 임무를 다하여라. 그러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50,10-11]
▣ 물질의 소유에 관한 주제에서 도둑질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돈을 위조하지 마라 경고는 뜻밖의 내용이다.
둘째 비유
부유한 이는 재물을 가지고는 있으나 부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기에 가난하다. 그가 주님께 드리는 청원기도와 찬양기도는 매우 보잘것없다. 그가 바치는 기도는 약하고 보잘것없으며 효력이 없다. 그래서 부유한 이는 가난한 이에게 의지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을 대주고 가난한 이를 위하여 일하면, 하느님께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가난한 이의 청원기도와 찬양기도는 풍요롭고, 그의 청원기도는 하느님께 큰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유한 이는 망설이지 않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가난한 이를 돌보아 준다.* 부유한 이에게 도움을 받은 가난한 이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을 돌보아 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다. 부유한 이는 자신의 삶에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끊임없이 가난한 이를 위하여 열심히 애쓴다. 그는 가난한 이의 청원기도가 주님께 잘 받아들여지고 풍요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한다. 곧, 가난한 이는 자신의 풍요로운 기도로 임무를 행한다. 그는 주님에게서 받은 기도를, 자신을 돌보아 준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 돌려드린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이는 주님에게서 받은 부를 망설이지 않고 가난한 이에게 준다. 이 행위는 훌륭하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 부유한 이가 자신이 가진 부의 의미를 이해하고, 주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올바로 봉사하였기 때문이다. [51,5-7]
▣ 헤르마스는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올바른 상호작용을 밝히고. 많은 부자들이 있었던 로마 교회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며 부자들의 가난과 가난한 이들의 부에 관하여 계속 서술한다. 가난한 그리스도인들과 부자 그리스도인들이 평등하고 갈등 없이 지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을 보면 「목자」는 확실히 초대 그리스도교 사회비판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사회비판은 가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성과 관계가 있다. 비유에서는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의 운명을 부당한 것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도 부유한 이들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면 자신들에게 부족한 부를 채우고, 거꾸로 부유한 이들도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면 자신들의 영혼에 부족한 것을 채운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는 의로운 일에 서로 기여한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버림받지 않을 것이고 생명의 책에 기록될 것이다. 부유하면서도 주님께서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복되다. 이를 아는 이는 선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51,8-10]
▣ 가난한 이들은 가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다. 곧, 이들은 물질적으로 구체적이고 필요한 어느 것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 부(=기도)를 지니고 있다. 이 구절에서 사회적 장벽을 넘어 서로 도와 주라는 권고가 실제로 적용된다. 교회 안에서 다루기 힘든 사회문제에 관한 비유에서 헤르마스의 권고는 9-10절에서 약속과 축복의 문체로 요약되고 종결된다. 축복의 말은 부자가 아니라 부자의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
셋째 비유
이 세상에서는 의인들도 죄인들도 구별되지 않고 서로 비슷하다. 이 세상은 의인들에게 겨울이고 그들은 죄인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구별되지 않는다.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모두 비슷하고 어느 것이 시들고 산 것인지 구별되지 않듯이, 이 세상에서 의인들과 죄인들도 이와같이 구별되지 않고 모두 비슷하다. [52,2-3]
☑ 하지만 이 세상이 지나면 의인과 죄인의 처지는 갈라질 것이다.
넷째 비유
네가 본 시든 나무들은 이교인들과 죄인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시들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으로 드러나고 말라죽은 나무처럼 태워질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저지른 악행은 드러날 것이다. 죄인들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으니 태워질 것이고, 이교인들은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을 알지 못하였으니 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 여름에 네 열매가 드러나도록 열매를 맺어라. 사업을 많이 벌이지 마라. 그러면 너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사업을 많이 벌이는 이들은 사업으로 매우 바빠 주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죄를 많이 짓는다. [53,4-5]
▣ 이교인과 죄인들을 태워버린다는 표현은 그들이 거부한 것에 대한 종말론적 벌이다.
다섯째 비유
나는 너희가 단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단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른 단식이 무엇인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54,3]
▣ 윤리와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하는 단식은 거부된다. 곧, 단식은 「목자」에서 의로움과 관계가 있으며, 악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느님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단식하여라. 네 삶에서 결코 악을 행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라.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고(마태 19,17 참조.) 그분의 규정들에 따라 살아라. 어떤 악한 욕망도 네 마음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어라. 네가 이것들을 행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모든 악한 행위를 자제한다면 너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이를 행한다면 너는 주님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올바른 단식을 행하는 것이다. [54,4-5]
주님의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너는 그분의 마음에 들 것이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들 가운데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 이외의 다른 선을 행한다면 너는 더 큰 영광을 얻을 것이고, 네가 그분의 계명 만을 지키려 했던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하느님의 계명들도 지키고 이러한 봉사들도 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 계명에 따라 그것을 지킨다면 너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56,2-3]
☑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그것은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너는 단식을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나쁜 말과 악한 욕망을 조심하고, 이 세상의 모든 헛된 것에서 네 마음을 깨끗이 하여라. 네가 이를 지킨다면 그 단식은 완전할 것이다. [56,5-6]
☑ 진정한 단식은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망을 끊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포도밭을 만드셨고, 곧 백성을 창조하셨고 그 백성을 당신의 아들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이다. 아들은 백성 하나하나를 보호하도록 천사들에게 맡겼고, 그 자신은 크나큰 수고와 많은 노고로* 온 힘을 다하여 그들의 죄를 깨끗이하였다. 그 누구도 노고와 고생 없이는 포도밭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깨끗이한 다음,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법을* 그들에게 주면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모든 권능을 받았으므로, 백성의 주인임을 너는 알고 있다. [59,2-4]
▣ 하느님 아들의 수고와 노고에 관한 언급은 하느님 아들의 수난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법올 전해주는 사람이라는 사고는 유다교뿐만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교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너의 이 육체가 덧없는 것이라고 해서 네가 그것을 함부로 더럽게 굴려도 된다는 생각이 네 마음에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네가 네 육체를 더럽히면 거룩한 영도 더럽히는 것이다. 네가 네 육체를 더럽히면 너는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60,2]
▣ 「목자」의 인간학에서 인간의 육체성은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육체는 인간 전체이고, 영은 하느님을 통해 선을 행하는 인간의 능력이며 육체와 영은 서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 육체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쳐서는 안된다.
무지 때문에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만이 고칠 능력이 있으시다. 그분은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조심하여라. 네가 앞으로 네 육체도 영도 더럽히지 않는다면, 매우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네가 이전에 지은 죄들을 고쳐주실 것이다. 육체와 영은 짝을 이루고 있어 하나만 더러워질 수 없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을 깨끗이 지켜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 것이다. [60,3-4]
여섯째 비유
너는 계명들을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된다. 주님을 믿고 계명들에 따라 살아라. 나는 너를 계명들로 강하게 할 것이다. [61,2]
이 계명들은 회개하려는 이들에게 유익하다. 그들이 계명들에 따라 살지 않으면 그들의 회개는 헛되다. [61,3]
☑ 회개만으로는 부족하다. 회개에 따른 실천, 곧 계명을 지켜야 한다.
너희가 회개하기 위해서는 너희를 허물어뜨리는 이 세상의 악들을 내버려야 한다. [61,4]
악을 즐기면서 행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은 방종이다. 자신의 격정을 충족시키는 성마른 사람은 방종하다. 간통한 자, 술꾼, 비방자, 거짓말쟁이, 탐욕자, 강도, 이와 비슷한 짓을 행하는 이는 자신의 병적인 욕망을 만족시킨다. 곧, 그들은 이렇게 행동하여 방종하다. 이러한 모든 방종은 하느님의 종들에게 해롭다. 그러므로 벌과 고통을 받는 이들은 이렇게 즐겼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65,5-6]
☑ 세상에 살면서 악을 즐기면 행했던 사람은 죽은 후 그 댓가를 받는다.
여덟째 비유
평지, 산, 온 땅을 그늘지게 한 이 나무는 온 세상에 주어진 하느님의 법이다?* 이 법은 땅 끝까지 선포된 하느님의 아들이다.*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백성들은 설교를 듣고 그분을 믿는 이들이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천사는 미카엘이다.* 그는 이 백성을 지배하는 권세를 지녔으며 그들을 다스린다. [69,2-3]
▣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를 뜻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가 법이라는 표현은 초대 그리스도교에서 전혀 이목올 끄는 표현이 아니며 2세기와 3세기 초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 구절에서 미카엘과 하느님의 아들을 동일시한 내용을 「목자」의 다른 구절에서는 찾을 수 없다.
관을 쓴 이들은 마귀와 싸워 그를 무찌른 이들이다. 이들은 법 때문에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였지만 푸르고 곁가지들이 나 있는 막대기들을 돌려준 이들도 법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다.* 그들은 고난을 받지는 않았어도 그들의 법을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푸른 막대기들을 받은 그대로 돌려준 이들은 매우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주님의 계명들을 지킨* 성인들과 의인들이다. [69,6-8]
▣ 당시에는 순교자와 고백자를 가리키는 낱말이 없었기 때문에 “고난올 받은 이들”과 “괴로움을 겪은 이들”은 「목자」에서 이들에게 일시적으로 사용된 전문용어이다. 피의 증인(=순교자)들은 당시의 로마 교회에서 고백자들과 구분되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이들과 온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려는 이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셨다. 이와 달리 주님께서는 위선으로 회개하려는 이들의 간계와 사악함을 보시고 그들이 다시는 그분의 법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그들에게는 회개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72,2]
▣ 목자는 헤르마스의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성향을 아시며, 이에 따라 그분은 인간에게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답변한다.
☑ 위선은 하느님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마르고 벌레가 갉아먹은 막대기들을 지닌 사람들은 교회의 배교자이고 배반자이며 자신들의 죄로 주님을 모독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72,4]
▣ 이 구절의 “부끄러워하다”는 적의에 찬 세상에서 겪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부끄러움에 반대되는 표현이 “하느님의 이름을 기꺼이 견디다”이다. ‘멀어졌다’의 직역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죽었다”이다
☑ 박해시대에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을 부끄러워한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
죄인들의 회개는 생명을 뜻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72,6]
생명은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계명에는 첫째 자리나 영예에 관한 것은 없고 인내와 사람의 겸손에 관한 것이 있다. 따라서 주님의 생명은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죽음은 다툼과 불법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73,6]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그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의 행위 때문에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회개할 수 있도록 나를 보내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부름받은 이들이 구원받기를 참을성있게원하신다.* [77,1]
▣ 하느님께서는 부름받은 이들(= 세례받은 이들) 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보편 구원의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과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이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6,1.3 참조).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회개의 천사인 목자를 보내셨고. 목자는 헤르마스에게 이 소식을 널리 알리게 하고 죄인들이 회심하도록 이끌었다.
☑ 하느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애타게 기다리신다.
온 마음으로 회개하고, 앞에서 말한 그들의 악행에서 자신들을 깨끗이 하고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이는 누구나, 그들이 계명을 의심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전에 지은 죄를 주님에게서 치유받고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죄를 더 짓고 이 세상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할 것이다.* 너는 내 계명에 따라 살아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 계명에 따라 살고 올바르게 행하는 이도 모두 하느님을 위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77,3-4]
▣ 더이상 죄를 짓지 말아아 하는 필연성과 이전에 지은 죄는 용서받지만 앞으로 짓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확언이 상황의 심각성을 더욱 분명히한다. 여기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첨가된다.
아홉째 비유
네가 현명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히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하여라. 너는 네 뒤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없으며 네 앞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다. 네가 볼 수 없는 것들은 내버려 두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라. 네가 보는 것들을 잘 알려 하고 나머지 것들에는 마음을 쓰지 마라. [79,6]
☑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기 능력껏 살면 된다. 그것이 지혜다.
하느님 아들의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곧, 네가 어떤 도시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도시 주위가 온통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문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 도시에 있는 문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네가 그 도시로 들어갈 수 있겠느냐? [89,4-5]
▣ 하느님의 아들을 “이름”으로 둘러 말하는 것은 헤르마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 아들의 이름”은 하느님께 적용된 “주님의 이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명칭은 아들에게 적용된다.
네가 그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시로 들어갈 수 없듯이, 사람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분 아들의 이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89,5]
▣ 마르 9,47:10,23-25; 마태 5,20:7,21:18,3; 요한 3,5 참조
문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주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분께 갈 수 없을 것이다. (요한 14,6 참조) [89,6]
내가 탑은 무엇을 뜻합니까”하고 묻자, 그가 “이 탑은 교회이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처녀들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영이다. 거룩한 영들이 사람에게 자신들의 옷을 입히지 않는다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 있을 수 없다. 네가 거룩한 영들의 옷을 입지 않고 이름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처녀들은 하느님 아들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네가 이름은 지니나 그분의 능력을 지니지 않는다면 너는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지니는 것이다.” [90,1-2]
▣ 많은 이방인이 처음에는 교회에 속하기에 부적합하고. 교회에 속한 이들 가운데 상당한 사람이 그릇된 삶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을 포기하여 구원과 교회에서 다시 배제된다. 헤르마스는 탑 또는 하느님의 교회 또는 하느님 아들의 백성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교회에서 내쫓기고 내던져져 버려지면 교회는 깨끗해진 이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모서리들에 서있는 가장 강한 처녀들의 이름을 들어 보아라. 첫째는 믿음, 둘째는 절제, 셋째는 권능, 넷째는 인내라고 한다.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다른 처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진실, 결백, 순수, 즐거움, 진리, 이해, 일치, 사랑이다. 이러한 이름들과 하느님 아들의 이름을 지닌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92,1-2]
검은 옷을 입은 여인들의 이름을 들어보아라. 이들 가운데서도 네 여인이 가장 강하다. 첫째는 불신, 둘째는 무절제, 셋째는 불복종, 넷째는 기만이라고 한다. 이를 뒤따르는 것들은 슬픔, 악, 방탕, 성마름, 거짓, 어리석음, 비방, 미움이다. 이러한 이름을 지닌* 하느님의 종은 하느님 나라를 볼 것이나 그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92,3]
▣ “이름을 지니다”라는 표현은 믿음을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 세례를 받았으나 악습을 끊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선생님, 돌들이 왜 깊은 곳에서 올라와 이 영들을 지닌 뒤 탑 안에 놓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물을 통하여 올라와야 한다. 그들이 죽음이었던 이전 생활을 버리지 않으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93,1-3]
▣ 목자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곧 그리스도교 이전에 죽은 이들에게도 세례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확언한다. 이들의 이전의 삶은 죽어 있는 것이다. 이는 세례로만 없앨 수 있으며 윤리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의로운 이들의 첫 세대. 하느님의 예언자, 봉사자들은 매우 완전하였다. 그럼에도 헤르마스는 죽은 이들에 관해서 엄격한 세례론을 펼친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이는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한 벌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을 안 사람은 더이상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 따라서 선을 행해야 하는 사람이 악을 행한다면, 그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너는 생각하지 않느냐?* 이때문에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한 이들은 죽음으로 단죄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위대한 행위들을 보고도 악을 행하는 이들은 두 배로 벌을 받고 영원히 죽게 된다. 하느님의 교회는 이와같이 깨끗해져야 한다. [95,1-2]
▣ 세례 뒤 지은 중죄가 세례 전에 지은 죄보다 훨씬 무겁다는 견해(2베드 2,20-22 참조)는 사도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하느님을 알고도 죄를 짓는다면 그 벌은 더 무겁다.
부자들은 하느님의 종들이 그들에게 행여나 구걸할까봐 그들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맨발로 엉겅퀴 위를 걷는 것이 어렵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마르 10.23-24 참조) [97,2-3]
☑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
많은 식물의 윗부분은 푸르나 뿌리 부분은 말라 있었고, 더러는 태양이 내리쬐어 말라버린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의심하고 마음이 아니라 입술로만 주님을 섬긴다.* 이때문에 그들의 가장 깊은 곳은말라 죽었고 힘이 없으며, 그들의 말만 살아 있고 그들의 행동방식은 죽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의심하는 이들과 비슷하다. 의심하는 이들은 푸르지도 말라 죽지도 않으며,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태양이 이러한 식물들에 내리쬐면 그것들이 말라 죽듯이* 의심하는 이들도 환난에 관하여 들으면 그들의 비겁함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살 수도죽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들도 곧바로 회개한다면 생명을 얻을 수 있으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여인들에게 이미 넘겨진 것이다. [98,1-4]
▣ 식물의 윗부분은 푸르나 뿌리 부분은 말라 있었다는 비현실적 묘사는, 외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마음속 깊이 있는 의심이 얼마나 나쁜지를 나타낸다.헤르마스는 의심을 죄에 빠지기 쉽고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마음의 상태로 여긴다. “내리쬐는 태양’은 박해 때 믿음을 시험하는 가혹한 시련을 나타내는 비유이며, 이때 의심하는 이들은 내리쬐는 태양에 식물이 말라 죽듯이 성장하지 못한다.
식물들이 푸르나 돌이 많은 다섯째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그들은 신실하지만 가르치기 힘들고, 오만한데다 자만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이렇게 제멋대로 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바보 같은 우둔함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스스로 현인이라 자랑하고 어리석은 주제에 교사인 양 행동하였다. 이러한 교만때문에 자신을 높이는 많은 사람이 공허한 웃음거리가 된다. 제멋대로 구는 것과 공허한 자부심은 위험한 악마이기(루가 18,14 참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버려졌으나, 더러는 회개하고 올바로 믿었으며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혜를 지닌 이들에게 복종하였다. [99,1-3]
▣ 자만과 오만과 무지에 대한 비난은,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논쟁과 일치한다. 헤르마스는 늘 죄와 회개의 준비 여부에 따라 그리스도인을 구분 한다. 이 경우 그는 되풀이하여 허구로 기술한다. 이 때문에 이 교사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과 교사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로마 공동체의 오만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크고 작은 틈들과 틈 사이에 시들은 식물들이 있는 여섯째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작은 틈들에 속한 이들은 서로에게 뭔가 얽힌 감정이 있고 서로 비방하기 때문에 믿음이 시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회개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내 계명을 들으면 회개할 것이다. 그들의 비방은 미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회개할 것이다. [100,1-2]
▣ 헤르마스는 틈을 부정적 요소로. 매끄러운 면과 네모난 돌과 반듯한 모서리는 탑-건설에서 이상적 요소로 서술한다. 돌에 있는 금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되거나 다투거나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는 은유였다. 식물이 시든 것으로 상징화되듯이 신자들은 공동체에서 일어난 분열의 결과로 믿음을 잃게 된다.
☑ 헤르마스는 언제나 회개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러나 큰 틈들에 속한 이들은 그칠 줄 모르면서 서로를 비방하고 격노하여 서로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탑에서 내던져지고 탑을 세우는데 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생명을 얻기가 어렵다. [100,3]
☑ 서로를 비방하고, 격노하며 원한을 품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힘들다.
만물을 통치하시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권한을 가지신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자비로우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고 죄로 가득찬 사람이 ― 다른 사람을 파멸하거나 구원할 수 없듯이 ― 어찌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품을 수 있겠느냐? [100,4]
☑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말아야 한다.
식물들이 푸르고 꽃이 활짝 피었으며, 온 산이 울창하고 온갖 종류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이 그 산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으며, 그들이 먹으면 먹을수록 식물들이 더 잘 자란 일곱째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그들은 늘 진실하고 순진무구하고 복되었으며, 서로에게 뭔가 얽힌 감정이 없고, 늘 하느님의 종들과 함께 기뻐하였다. 그들은 이 처녀들의 거룩한 영을 지니고 늘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겼으며, 비방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수고의 열매를 모든 사람에게 주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진실함과 어린이 같은 순진무구함을 보시고 그들이 행한 수고의 열매를 늘리시고* 그들의 행동방식 때문에 그들을 축복하셨다. [101,1-3]
▣ 꽃이 활짝 피어 있는 식물 세계와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사는 동물 세계로 펼쳐지는 일 곱째 산은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비유이다. 이들은 순진무구하고 진실하며. 화목하고 부를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 경건한 이들의 진실함과 순진무구함을 보시고 그들이 행한 수고의 열매를 늘리신다는 것은 동물들이 먹으면 먹을수록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비유를 뜻하는 것이며, 더 많은 사회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늘어난 소유물은 「목자」에서 더 많은 나눔의 가능성과 의무를 뜻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은 이웃에 대한 나눔의 의무가 있다.
많은 샘이 있었고, 주님의 모든 피조물이 그 샘에서 물을 마신 여덟째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그들은 온 세상에 주님을 전파하고, 주님의 말씀을 거룩하고 순수하게 가르쳤으며, 악한 욕망 때문에 아무것도 유용하지 않았고 그들이 받은 거룩한 영에 따라 늘 의롭고 진실하게 산 사도들과 교사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천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102,1-2]
▣ 여덟째 산에서 모든 피조물이 마시는 샘들은 생기를 북돋우는 하느님 말씀이 전세계에 널리 전해져 인간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표상이다.
황량하고 사람들을 파멸하는 뱀들과 짐승들이 있던 아홉째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흠이 있는 이들은 그들의 봉사직을 잘못 수행하고 과부들과 고아들의* 생활비를 빼앗았으며, 봉사하라고 받은 봉사직을 이용하여 부유해진 봉사자들이다.* 그들이 이러한 욕심을 계속 지닌다면 그들은 죽은 것이고 그들에게는 생명을 얻을 희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개심하여 그들의 봉사직을 순수하게 행한다면 그들은 생명을 얻을 수 있다. [103,1-2]
▣ 과부들과 고아들을 등한시하는 것을 주교가 지은 죄로 여기는 반면. 비유 27.2에서는 주교들이 이들을 등한시하지 않고 돌보아준 점이 입증된다. 나쁜 봉사자들은 그들의 직무를 잘못 수행함으로써 비난받는다. 봉사자들은 주교의 협력자이며, 비유 27.2에 따르면 특히 과부들을 돌보아 주었다.
열두째 흰 산에는 다음과 같은 신자들이 속한다. 그들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와 같이 어떤 악도 마음에 일어나지 않고 악이 무엇인지 모르며 늘 순진무구하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계명들을 더 럽히지 않았고, 그의 일생 동안 순진무구한 생각을 계속 지녔기 때문에 확실히 하느님 나라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106,1-2]
▣ 헤르마스는 순진무구함을 둘러 말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도교의 전승(마태 18.10;1 베드 2,1-2)을 참조하였다. 헤르마스와 초대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례를 받은 뒤 죄를 짓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 둥글고 흰 돌들에 대하여 들어 보아라. 이 모든 돌은 흰 산에서 나왔다. 그 돌들이 왜 둥근지도 들어 보아라. 그들은 재산 때문에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고, 그 재산이 돌의 색을 흐리게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입에서는 악한 말이 나오지 않으메* 의롭고 참된 것만* 나왔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계속 선할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재물을 잘라내도록 명하셨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애게 하지는 않으셨다. 이는 그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선한 부류에 속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하여 살 것이다. 이때문에 그들은 조금 잘리어 이 탑 건물 안에 놓였다.*[107,4-5]
▣ 헤르마스는 둥근 돌들(곧. 순진무구하지만 부유하고 불완전한 이들)도 횐 산에서 나왔다고 확언한다. 헤르마스는 이들의 결점이 매우 작다고 말한다. 이들은 부를 제외한 모든 점에서는 거의 흠잡을 데 없으며 품행이 방정하다.
부자들은 헤르마스처럼 탑에 쓸모있는 돌이 되기 위하여 모든 재산이 아 니라 일부틀 잘라내야 한다. 모든 재산을 잘라내지 않는 것은 남아 있는 부로 선올 행하기 위해서이다. 이로써 헤르마스는 부자들에게 부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고자 한다. 부의 목적은 가난한 이들을 아낌없이 돕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둥근 채로 있고 탑 건물에 맞지 않은 다른 돌들, 그들은 아직 인장을 받지 않아 그들의 옛 자리로 옮겨졌다. 그들은 매우 둥글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공허한 재물들과 더불어 이 세상은 그들에게서 잘려야만 한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알맞을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만 한다. [108,1-2]
☑ 재물에 대한 애착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너희는 순수하게 살아라. 모욕받은 것을 잊고 악의를 품지 말며, 혹독하게 당한 모욕을 떠올리지 마라. 하나의 영이 되고, 너희 가운데 일어난 이러한 악한 분열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그 분열들을 없애라.*[108,4]
▣ 이 구절에서 세례받은 이들이 일상적인 덕을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헤르마스는 그리스도교 도덕관의 중심이 되는 덕을 순수한 마음을 지니는 것으로 여긴다. 헤르마스의 주된 관심사는 세례를 받은 뒤 더이상 죄 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목자들 자신이 길을 잃는다면 그들은 양들의 주인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양들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목자가 자신의 양들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말로 말미암아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108,6]
☑ 성직자가 죄악에 빠져버린다면 더 큰 책망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사신다. 평화는 그분에게 소중하다. 그분은, 싸움을 좋아하고 악의로 파멸된 사람들을 매우 멀리하신다. [109,2]
열째 비유
네가 모든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보호받고 모든 선한 행위와 말로써 네 뜻을 이루고 모든 의로운 덕을 쌓고 싶다면, 그가 너에게 준 계명에 따라 살아라. 그러면 모든 악을 극복할 것이다.* 네가 목자의 계명을 지켰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쾌락을 굴복시키고 모든 선행으로써 네 뜻을 이룰 것이다. [111,2]
▣ 박해와 연관된 괴로움, 고통과 같은 표현으로 목자가 무엇으로부터 헤르마스를 지키는지를 암시한다.
모든 사람을 궁핍에서 구해 내야 한다. 곤궁하고, 일상생활에서 궁핍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크나큰 고통과 핍박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을 핍박 상태에서 구해 내는 이는 모두 큰 기쁨을 얻는다. 이러한 궁핍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이는 죄수가 겪는 고문처럼 고통을 받고 몹시 괴로워한다. 견딜 수 없는 이러한 불행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살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의 불행을 잘 알면서도 그를 구해 내지 않는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사람의 피에 책임을 져야 한다. [114,2-3]
▣ 헤르마스는 「목자」에서 종종 그리고 다양하게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와 이웃 사랑에 대한 주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구절 에서 "곤궁”과 “궁핍”은 먼저 물질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르마스는 혹독한 궁핍이 자살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웃의 불행을 방치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첫댓글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로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