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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칼 바르트의 유비의 신학
I. 신앙의 유비의 성경·신학적 배경
플라톤(Platon)의 이원론에 따르면, 볼 수 있는 가지계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 계상이기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는 유비를 매개로 인식가능하다. 플라톤은 태양, 곧 좋음의 이데아를 그것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analogon)2)이라 했다. 이데아의 세 계를 유비를 통해 인식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유비를 『형이상학』 제4권에서 있는 것과 그 여러가지 뜻과 관련하여 분석한다.“있는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해지지만,” 모두 한 가지 원리에 관계 맺어 “있 다”고말해진다.3)
이러한철학적인의미의유비이론이신학에서는어떻게수용되 거나 비판되고 있는가? 먼저 신앙의 유비의 성경의 근원을 찾아보고 그것을 교회 사가 어떻게 수용 발전시키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32-1968), I/2, 540. 이하KD 약자표기함
2) Platon, Platonis Opera, J. Burnet, Oxford Classical Texts, vol. 4. (1902), 박종현 역주, 『국가』 (서 울: 서광사, 1902),508b.
3) Aristoteles,Metaphysica,김진성역주,『형이상학』(서울:이제이북스,2007),1003a32ff
1.'신앙의 유비'의 성경 사용
'신앙의 유비’라는 말이 「로마서」 12장 6절에 한 번 사용되지만 우리말 성경은 avnalogi,n th„õ pi,stewõ를 ‘믿음의 분수’라 옮기고 있다.4) 이것은 「로마서」 12장 3절 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me,tron pi,stewõ )이라는 말과 같은 연관 속에서 이해해 왔 다.
발터 카이저(Walter C. Kaiser)는 「로마서」 제 12장 6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믿음’이 주어의 의미인지(F. F. Bruce, John Murray, C. E. B. Cranfield) 아니면 객관 대상의 의미인지 결정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5)
왜냐하면 그것이 전자의 의미로만 사용되었다면, 이 낱말과 신앙의 유비가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 렇게 되면, “예언자들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신앙에 의해 판단해야만 한다는 제안 에어떤의미도주지못하며...이것은모든애매한그리고심지어거짓가르침의 문을 열어준 꼴이다.”6)
카이저는 그것을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해석학의 원리로 보았고 따라서 해석학적 절차를 지배하는 해석 표준이 텍스트 안에 있다는 것 을의미한다고본다.7)
그러나 그는 그러한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성경 자체일뿐 이라 제한한다. 즉 교회에게 위임된 권위나 교회 공의회 또는 신조나 신앙고백까지 도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카이저가 이해한 그대로, 교회사는 신앙의 유비를 해석 표준으로 수용하는가?
4) 아날로그 a,nalogi,a, proportio를 번역할 때, 유추 또는 유비로 번역해 왔다. 유비란 ‘사물 상호 간에 대응하여 존재하는 동등성 또는 동일성’의 의미로 유추를 ‘같은 종류의 것 또는 비슷한 것에 기초하여 다른 사물을 미루어 추측하는 일’의 의미로 사용하여 ‘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다’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것을 뜻 한다. 라틴어 proportio가 수학에서 비례 또는 비율의 의미로 사용되었듯이, 비례하는 항목들 이 또는 관계들이 같음 또는 비슷함을 나타냈다. 외견상 비슷하거나, 사람 또는 사물의 생김 새나 성질이 서로 비슷할 때 ‘닮았다’고 말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아날로그는 유사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5) Walter C. Kaiser, Jr., “Hermeneutics And The Theological Task,” Trinity Journal 12:1 (Spring 1991), 8.
6) ErnstKäsemann,CommentaryonRomans(GrandRapids:Eerdmans,1980),341;Kaiser,“Herme- neutics And The Theological Task,"8에서 인용.
7) Kaiser, “Hermeneutics And The Theological Task,” 13.
2. 신앙의 유비의 신학적 전개
이레니우스(Irenäus von Lyon)는 『이단반박』8)에서 신앙의 유비를 성경을 해석 할 때에 발생하는 이단을 판정하는 표준으로 사용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도의 가 르침인 성경을 특별한 지식을 가진 선택된 자들만이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보 았지만 이레니우스는 성경의 가장 기본 내용이 모든 이들에게 자명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경의 자명성을 해석의 근간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증거를‘모든 교회가 믿음의 준칙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추론한다.
“우리는 이제 지구 끝 어디든 전 세계에서 교회를 찾아볼 수 있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나님, 성부, 전능자, 그리고 하늘과 땅, 바다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를 믿는 신앙을 사도와 그들의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 리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 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섭리와 재림, 그리 고 동정녀 탄생, 그분의 고통,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심, 성부의 영광을 받으 시면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과 성령을 믿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모든 인류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불가시적 성부에 따라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와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는 무릎을 꿇을 것이고 모든 입들이 그분에게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심판하 실 것이다.”9)
터툴리안(Tertullian)은 『갈라디아』 제 6장 16절의 표준(kano,n) 개념을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에 적용하여 이것이 신앙의 표준이고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이라 한다. 그의 저서 『이단자 규정』 제 12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식을 정당하게 추구 하고자할때,신앙의표준안에서행해야지그것을벗어나면안된다. “신앙의표 준을 훼손시키지 않고 탐구의 대상”10)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애써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신앙의 유비를 존재 유비와 대조하여 사용하면서, 사도신경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준(regula)이라 옮긴다. 그는 성경 의 자구를 해석할 때에 그것이 과연 신앙의 진리와 부합하는지를 판가름하는 “신 앙의 기준(regula fidei)”11)을 텍스트 비평으로 보완적으로 대체한다. 쉰들러에 의하 면,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비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특히 “삼위일체 적 유비, 하나님의 형상성 그리고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12)를 중시해 야 한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로고스와 유비 관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 목이 중요한데, 특히 『그리스도교 교양』 제 1권 13장 성육신을 위한 유비를 인용하 면 다음과 같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길 말고 달리 오실 수 있었는 가?우리가말을할때와비슷하다.마음에품은것이듣는사람의머리에신체 의귀를통해들어가게하기위해,마음에품은말이 ‘소리가된다.’ 그리고이야 기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똑같이 소리로 바뀌지는 않고 온전히 남아 있으며, 음성의 형태를 취하여 귀에 전달되면서도 (생각은) 변질의 결함을 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변한 것이 아 니고 사람[살]이 되셨다.”
예수가 말씀으로 오셨지만, 단순히 몸만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가진 완전한 인 간으로 오셨다. 성육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포함한다. 이 동일 관계는 대 칭적이다. 즉 만약 ‘x가 y와 같다면(x=y), y는 x와 같다(y=x). 그러나 사람이 되심으 로 비대칭적이 되었다. 만약 예수(x)가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다면(y) 사람의 육체를 입으신 것(y)이 사람이 되신 예수(x) 그 경우는 아닌 것이다. 말(x)이 생각을 표현(y)하지만, 생각이 나의 말을 표현한 경우는 아닌 경우와 같다.
안셀무스(Anselms)는 『프로스로기온』에서 credo ut intelliegiam, 곧 신앙 경험 속에 주어진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 사이의 상응성에 주목한다. 그는 신의 존재 를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논증’(unum argumentum)을 하나님을 ‘어떤 것 보다 더 큰 것은 생각될 수 없는 것’(id, quo nihil maius cogitari potest)”으로 정의함 으로써 논증한다. 그러나 이 존재가 사유 속의 존재일 뿐인지 아니면 실재하는지 검증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가울리 노의 섬’이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것의 탁월성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안셀 무스의 증명의 유비를 애매한 것으로 비판한다. 칸트(Immanuel Kant)도 존재는 성 질이 아니라는 논거에 기초해 안셀무스의 논증을 반박한다. 칸트의 비판을 수용하 고 있는 페어베이엔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가지는 문제점을 가장 적나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성 자체를 의심할 수 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신 이념을 그 이념을 가장 깊게, 고유하게 촉발하는 힘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성 자체는 그 스스 로를그것을오직설명할수있는근거인실재하는신의현존에로방향을틀어 야만한다.그렇게되면그것은더이상 ‘존재론적인’ 논증이될수없고,단순히 사유된 존재에서 실재 존재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 만, 자신의 고유한 구조를 해명하는 현실 안에서의 걸음일 뿐이다.”13)
루터(Martin Luther)는 해석학의 원리를 “신앙의 유비”라 불렀다. 그에게 그 것은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로 나타난다. “성경은 구절과 그 사 이를 고려하여 스스로를 해석하는 그리고 신앙의 기준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 는 것이 바로 성경의 속성이다.”14) 루터학자 플라키우스는 『성경 열쇠』 Key to the Scriptures(1567)에서 루터가 신앙의 유비 원리를 어떻게 성경을 위한 열쇠로 보았는지를 설명한다.15)
“성경에 대한 모든 이해와 자세한 설명은 신앙과 일치 속에 존재한다. 그러 한 [일치]는 다시 말하면, 올바른 신앙의 규례이거나 한계로, 즉 우리는 어떤 것, 즉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의해서나 아니면 그런 공격이 없는 폭풍우의 심연 속 으로 장애물을 넘어 밀치고 들어갈 수 없다(롬 12:6). 성경에 대해 관심가지고 말해진모든것혹은성경의토대위에서말해진모든것은교리문답서가선언 하는모든것과일치해야만하거나신앙의조항에의해가르쳐진모든것과일 치해야만 한다.”16)
루터는 창세기 강의에서 신앙의 유비를 해석을 위한 기본규칙이라 말한다.17)그는 이사야 강의서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언급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 의유비의참증인이라고소개한다.18)
왜냐하면아우구스티누스가신앙의기준이 라 부른 신앙의 유비는 자구적 해석을 하다가 구두점과 발음에서 유래하는 모호함 여부를 판정할 때 신앙의 진리와 부합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 이다. 즉 그것을 성경에서 발견된 신앙기준에 따라 해석했느냐로 결정하게 했기 때 문이다.19)
루터가신앙의유비를적용하는것은성경의명백한신앙진술과연관되 어있는것으로본다.20) 루터가성경의신앙진술규례에적용한것은“신앙과영의 규례”(regula fidei et spriritus)21)에 적용한 것을 뜻한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서 정의와 거룩함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율법으로부터는)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분노나 곤궁이 밀려오지만, 그러나 평화와 자비가 근거하게 된 다.”22) 이것이바로루터에게는신앙의유비이고그에상응하는신앙규례가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상응하는 해석학적 기본규칙인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 제 1권 프랑스 왕 프랑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2쪽)에서 신앙의 유비를 성경 해석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모든 예언을 ‘믿음의 정도에 맞게’(롬 12:6) 예언해야 한다고 말했 는데, 여기에서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 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해석이 이 신앙의 규칙에 따라 평가된다면 승리는 분명 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인하면서, 믿음을 강건하게 하는 최선의 방 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임을 말한다.
“우리가 제시한 교훈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권위 에 근거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때부터 그 의 몸이 유한하며, 또한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있다고 가르친 것은 아리스토텔 레스가 아니라 성령이시다.”23)
칼빈은 사도신경에 따라 신앙의 유비를 이해한다.
“신앙의 유비는 사도신경에서 보듯이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공리이다.”24)
지금까지 신앙의 유비가 성경해석의 원리로 작용되었음을 살폈다.25)
‘성경의 모든 이해와 해석은 신앙의 유비와 일치해야 한다.’(Omnis intellectus ac expositio Scripturae sit analogia fidei.) 유비 이론의 가장 큰 변환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8) Irenäus von Lyon, Adversus haereses V/Gegen die Häresien V., einleitung von Norbert Brox und übersetzt von Norbert Brox (Freiburg : Herder, 2000).
9) Irenäus, Adversus haereses, 1.10.1.
10) 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 On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trans. Peter Holmes, in The Ante-Nicene Fathers, ed. Alexander Roberts and James Donaldson (Grand Rapids: Eerdmans,1976), 249.
11) Aurelius Augustinus, De civitate Dei 10, 23; De doctrina christiana 3.2
12) Alfred Schindler, Wort und Analogie in Augustins Trinitätslehre (Tübingen: Mohr, 1965), 136.
13) Hans Jürgen Verweyen, Nach Gott fragen. Anselms Gottesbegriff als Anleitung (Essen: Ludgerus 1978), 66. (Christliche Strukturen in der modernen Welt. Hg. v. Wilhelm Plöger; 23.)
14) C. C. Briggs, Biblical Study (New York: Scribner’s, 1884), 332.
15) Daniel P. Fuller, “Biblical Theology and the Analogy of Faith,” International Journal of frontier Missions vol. 14:2 (Apr.-June 1997), 65-74, 66.
16) Fuller, “Biblical Theology and the Analogy of Faith,” 66.
17) Martin Luther, WA 42, 638, 35-37 (Genesisvorlesung, 1535-1545): Sed Pauli regula servanda erat, qui Analogiam fidei in Prophetia servandam esse praecipit: haec enim aedificat et vere ad Ecclesiam pertinet.
18) Martin Luther, WA 25, 88, I-4 (Jesajavorlesung, 1532/34).
19) AureliusAugustinus,Dedoctrinachristiana,성염역주,『그리스도교교양』(분도출판사:1989),3,2,2-5.
20) Martin Luther, WA 14, 561, 20-25 (Deuteronomiumauslegung, 1525): Quod tunc fit, si iuxta praescriptum Ro. 12 prophetia fuerit analogia fidei, scilicet ut certam praesumas alicubi positam in scripturis sententiam literali sensu tractatam.
21) Martin Luther, WA 2, 615, 7.
22) 위의책,WA2,614,39-615,4.
23) John Calvin, Institutio Christiae Religionis, 고영민 옮김, 『기독교강요』 (서울: 기독교문사,2007). IV, 17, 26.
24) 위의책,IV,17,32.
25) ‘신앙의 유비’라는 개념을 블로쉐(Henri Blocher)는 네 가지로 요약 정리한다.
첫째, 일차적으로 Georg Sohnius가 1585년경에 롬 12:6절은 해석이 신앙의 유비여야 함을 사도가 말했다 고 주해한다. 이것은 해석의 원리로 작동한다. 둘째, 루터에게서 성경의 명료성이 주장되면 서 신앙의 유비가 중시된다. 셋째, 칼빈은, 롬 12장 3절과 6절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우리 에게 모든 성경 해석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점검하라고 명하”거나 “바울은 성경의 모든 해 석이 믿음의 유비에 일치해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Calvin, Instutuies, 4, 16, 4; 4, 17, 32.넷째, 개신교는 이제 성경전체 유비 analogia totius Scripturae의 원리를 지키고 있다. Henri Blocher, “The ‘Analogy of Faith’ in the Study of Scripture,” Scottish Bulletin of Evangelical Theology5 (1987), 17-38.
II.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의 존재 유비
가톨릭의 신 인식론은 창조와 언약, 자연과 은총, 이성과 신앙의 이중 질서(duplex ordo)에 기초한다. 은총의 절대적 우위성은 자연의 상대적 우위성을 긍정 하지 않고는 인정될 수 없다. 이중 질서는 자연과 은총의 조화 또는 유비를 함축한 다. 토마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부여된 계시 진리와 자연에 근거한 이성적 진리가 모순되지 않고 상호 보충적일 수 있다. 그는 유한한 인식능력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유비의 기능 에 주목한다. 요아힘 피오레의 삼위일체 신학에 반대하여 채택된 1215년 제 4차 라 테라노 공의회의 법규 DH 806는 존재 유비의 출처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유사성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차이는 훨씬 더 크다.”(inter creatorem et creaturam non potest tanta similitudo notari, quin inter eos maior sit dissimilitudo notanda.)26)이 법규에 근거해 토마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역동적인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엄청난 차이(비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 다. 그때에, 피조물에게 사용하는 낱말과 하나님께 사용하는 낱말이 일의적이라면, 하나님의 초월성이 위협을 받으므로 범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반면에, 피조물에 게 사용하는 단어와 하나님께 사용 하는 단어가 다의적이라면, 하나님께 대한 진술 이 불가능해 불가지론에 빠지게 된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면서 하나님을 진술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스피노자처럼 실체로서 하나님과 그 양태로서의 인간 사이 의 ‘존재의 일의성’을 인정하거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신 인식이 가능 하다’고 주장해야 하는데 토마스는 그러지도 않는다.
그는 『자연의 원리들』에서는 유비를 의속적 유비와 비례적 유비로 나누어 설명 한다. 『진리론』 제 2문제 11절이나 『권능론』 제 7문제 7절에서는 비례의 유비와 비 례성의 유비를 세분한다. 그러나 『신학대전』에서는 ‘다의 일에 대한 유비’와 ‘하나 의 다른 것에 대한 유비’를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신학대전』 제1부 13문제에서 감 각적 경험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자인 하나님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유비가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의속적 유비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했듯이, ‘건강 하다’고말할때건강한얼굴색이나음식그리고약등은건강또는건강한몸의표 식 또는 원인 아니면 영향과 연관되어 있다. 반면에 비례적 유비란 관계의 유사성, 즉 실체의 질료가 실체에 대해 질료의 의미로(in ratione materiae) 관계하는 것처럼 양의 질료 역시 양과 그렇게 관계한다는 바로 그 점에서, 다만 비례에 의해 일치하 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같은 낱말이나 개념이 관계된 여러 사물들 즉, 유비된 여러 사물들에 내재하기 때문에 비례적 유사성에 의해 그 사물들에 서술될 때 성립한다. 토마스는 육체적인 시각과 정신적인 통찰을 뜻하는 ‘시각’ 개념으로 설명한다. “두 번째 방식에 따라 무엇인가가 유비로 진술된다. 마치 예를 들면 ‘보다(visus)’라는 단어가 육체적인 봄과 오성의 봄으로 말해진 것처럼,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정신으로도 통찰(intellectus)하기 때문이다.”27)
박승찬28)은 『진리론』 2, 1129)을 통해 토마스가 비례의 대상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관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비례를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비례성의 유비를 유비 개념의 핵심적인 사용 처인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서가 아니라 행위 이론 및 윤리신학에 적용하고 있다고 정리한다. 박승찬은 토마스의 유비 사용을 “인간의 언어의 한계를 주목하게 하고, 하나님께 부과되는 명칭들의 부적합한 사용이나 해석을 통해서 생겨날 수 있는 위 험을 피하는 것”30)이라고 한다.
토마스의 존재 유비를 고찰할 때, 그가 ‘존재자는 유가 아니므로 일의적으로가 아니라 유비적으로 빈술된다’는 점과 ‘존재는 종이 아니다’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신과 인간의 존재 차이를 무시했다는 비판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유비를 말할 때는 비례되고 있는 것이 수적으로 동일한 것인 지, 종적으로 그렇다는 것인지 유적 동일성을 가진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나누어 봐 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남은 문제, 곧 유비 자체가 가지는 인식론의 한계는 이것이 다. 유비는 일의성도 다의성도 완전하게 포함하지 못하지 않는가? 즉 유비로는 존 재의 보편성도 존재의 진정한 개체성도 결국 파악하지 못하지 않는가?
바르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
26) Heinrich Denzing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Kompendium der Glaubensbekenntnisse und kirchlichen Lehrentscheidungen. Lateinisch- deutsch, übers. u. hg. v. P. Hünermann (Freiburg i. Br. 42. Auflag. 2009), Nr. 432. 이미 아우구 스티누스가 강론 52.16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만약 당신이 말하고자 한 것을 당신이 파 악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다면, 당신은 하나님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이해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어떤 방식 을 통해서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너의 생각이 너를 속이는 것이다. 당신 이 그것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지만 만약 그것이 그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 것에 관해 당신이 말하고자 원 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Si enim quod vis dicere, si cepisti, non est Deus: si comprehen- dere potuisti, aliud pro Deo comprehendisti. Si quasi comprehendere potuisti, cogitatione tua te decepisti. Hoc ergo non est, si comprehendisti: si autem hoc est, non comprehendisti. Quid ergo vis loqui, quod comprehendere non potuisti? [Augustine, Sermo 52.16]
27) ThomasvonAquin,VonderWahrheit.Deveritateq.2a.11.(QuaestioI).Lateinisch-deutsch(ed.Le- onina), ausgewählt, übersetzt und hrsg. von Albert Zimmermann, (Hamburg, 1986). (= Philoso- phische Bibliothek; Bd. 384).
28) 박승찬,“유비개념의다양한분류에대한비판적성찰.토마스토마스에대한카예타누스의 해석을 중심으로,” 『중세철학』 11 (2005), 115-70. 다음 논문들도 참조해야 한다. 서병창, “토 마스 아퀴나스의 유비와 비유,” 『해석학연구』 11 (2003), 101-25; 유지황, “존재와 유비: 토마 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이해를 중심으로,” 『철학탐구』 20 (2006), 5-38.
29) “(1”)그러므로첫번째방식에따라유비적으로서술되는것에서는유비를통해서어떤것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대상들 사이에 특정한 관계 determinata habitudo가 존재해야만 한다.
어떤 것이 이 유비의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서술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피 조물도 신적인 완전성을 확정지을 수 있는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그러나 유비의 다른 방식에 따라서는 유비를 통해서 어떤 것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상 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관계도 규정될 필요가 없다. 이 방식에 따라서 한 명칭이 하나님과 피 조물에 대해서 유비적으로 진술되는 것은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는다.” Ver 2, 11.
30) 박승찬,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비개념에 대한 재조명,” 『신학과 철학』 1 (1999), 212.
III.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
바르트는 존재 유비론이 가지는 ‘피조물의 자기 신격화’를 거부한다. 물론 존재 유비론의 성경의 전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형상(창 1:26)론 이다. 이 관계는 나와 당신의 관계로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 있는 인간을 말할 수 있 는가능성을가진다.31)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의 신의 형상성이라는 것이 인간 스스로에게 속하는 성질32)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신의 존재와 신의 본질이피조물의존재와본질로접근가능하게될수있는”33) 존재유비란있을수없 다고 보아서 신앙의 유비를 제안한다.
바르트는 신앙의 유비의 가장 큰 특징을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 하나님 을 통해서 인간이 인식됨으로 바뀔 수 있음”34)으로 본다. 그 일은 신앙 안에서 일어 난다.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신 인식은 “물론 인간의 다양한 능력들, [그것이] 타고 났든 자라면서 가진 것이든 간에, 인간의 다양한 능력들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것 들아래서는하나님의말씀을위한능력이어느것하나도일어나지않는다.”35) 바 르트는 신앙의 유비가 가지는 긍정적인 속성을 인정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 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 곧 자연 이성 때문이 아 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믿는 신앙 때문에 가능하 게 된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그것은 “능력 없는 자들의 능력, 인간학적으로는 결 코이해할수없는기적,그러나실재적인능력,곧신앙속에서이미현실화된것 으로서”36) 다시살아난다.그가설명한것처럼,인간의신인식이아니라,하나님 이 인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인간이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 은 분명 재인식이다. 재인식이란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유비다.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재인식, 즉 신앙의 유비가 참인 이유는 무엇 인가?
신앙의 유비가 결국 인식됨의 인식(Erkenntnis des Erkannten)이라면, 그것 은왜타당하고존재유비역시인식됨의인식이라할수있는데도존재유비는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인식됨의 인식』이라는 책을 쓴 독일의 해석학자 로디는 인식됨의 인식을 이해 된 것에 대한 의견 일치(Verständigung über Verstandenes)라 했다. 다시 말하면, 이 미 말해진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이미 알고 있거나 보았던 것을 다시 한 번 고찰하 거나 살펴봄으로써 이해된 것에 관한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 한 신 인식을 위해서는 행위된 것의 행위, 판단된 것의 판단(actum agere, judicatum judicare)도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의 본 래의 뜻의 은폐와 계시가 공존하기 때문에 곧바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고, 말씀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의미가 작용하는 수행(Vollzug), 곧 그 말씀의 의미를 우리 삶에 서 실행하는 차원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되물어야 하는 것은 말씀의 의미가 실증주의적인 의미의 객관적일 수 없고, 신앙의 전 제하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왜 보편적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기 때문 이다. 말씀의 의미의 보편적인 의미 자체를 부정하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러 한 보편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할 것이나, 인간의 이해 가 유한하며 궁극에야 모든 이해가 완성된다는 종말론적인 신 인식에 기초하면, 그 것 또한 불완전한 이해일 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31) 박봉랑, “칼 바르트의 신앙-신앙의 유추,” 『기독교사상』 43호 (1961), 10-20.
32) Barth, KD III/1, 206.
33) Barth, KD II/1, 83.
34) Barth, KD I/1, 257.
35) 위의책,250,313.
36) 위의책,254.
IV. 바르트의 유비 신학에 대한 이해 및 여러 반응
바르트 역시 신앙의 유비를 성경 해석의 원리로 보았으나, 토마스와는 달리 재 인식으로서의 유비가 신앙과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유비 신학에 대한 이해 및 대응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프르지와라(E. Przywara), 죙엔(G. Söhngen), 발타사(H. U. von Balthasar) 등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의 신학자들과 판넨베르크(W. Pannenberg)는 존재 유비의 필요성을 여전히 역설한다. 그에 반해 융엘(Eberhard Jüngel)은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를 더욱 발전시킨다.
1. 존재유비 대 신앙의 유비: 바르트와 프르지와라
바르트가 존재유비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자연신학을 거절했기 때문인가? 판 넨베르크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펠만(Horst Georg Pöhlmann)은 다르게 보았 다.“그[바르트]의신학전반의기본경향,”37) 곧현실적활동성자체를중시했기때 문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헤를레는 『존재와 은총』에서 바르트 신학의 “전 제”, 곧 “신학 체계의 논리 정연한 귀결”38) 때문에 존재유비를 거부했다고 본다. 그는 바르트가 현실적인 활동성을 강조하다보니 존재유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신 존재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의 투쟁,”39) 곧 신 없이도 인간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자연인간”40) 이념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바르트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절대 바꿔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존재 우위성을 놓치지 않 고자 했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의 유비를 적그리스도의 창안물이라고 여기며 우리가 그 때문에 가 톨릭 신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41)라는 바르트의 말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 켰다. 존재유비를 바르트가 오해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프르지와라나 발타자그리고게르츠(B.Gertz)42) 등의비판에대해융엘은그들이바르트의말을 오해했다고 말한다.43) 프르지와라와 바르트의 논쟁을 지켜본 발타자와 죙엔처럼 신앙의 유비가 존재의 유비보다 우선하며 신앙의 유비가 존재의 유비를 포함한다 고 해야 하는가? 이들도 신앙의 유비를 언급하지만, 바르트와는 달리 그들은 그것 을 내적 의속에 근거한 비례 유비로 규정한다. 죙엔 역시 바르트처럼 계시 사건 속 에서 신과 인간 사이에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 요구한다. 계시 사건 속 에서 신과 인간의 차이가 평준화되고 만다면, 신과 인간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차 이가 피조물 속에서 확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프르지와라를 인용하면서 존재유비의 특성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 한다.44) “그것[로마가톨릭신앙]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연속적인 현존 관계 속에서 인식할 수 있고, 이 계시성 속에서 재인식 할 수 있다. 그것은 존재 유비를 긍정하는데, 즉 피조물과 하나님의 유사성이 일 어나는 것을 타락한 세계 안에서도 따라서 세속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과 신적인 사물들에도 적용하는 가능성”45)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와 불트만 은 세속적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존재를 “순수행위, 즉 자기 자신과 함께 그리고 자 기 자신으로 부터만 그리고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통찰되는, 인간학적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적인 행위”로 기술하지만, 교회는 바르트가 이해하기로는, 하나 님의 자유로운 행위가 발생하는 기관이다. 즉 교회는 “순수 행위, 곧 자유 행위이 지 연속-현전하는 관계가 아니다. 은총도 인격적인 사랑을 주신(Zuwendung) 사 건이지 사물에 옮겨놓은 상태가 아니다.”46) 프르지와라의 주장은 바르트처럼 하 나님의 순수 행위만이 아니라, 양쪽의 속성을 가지는 하나님 이해가 더 필요하 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르지와라의 실재론, 곧 “자연에 반하는 영의 시성(諡聖,Kanonisierung)”47)을 반영하고 있다. 바르트도 하나님 말씀 개념의 인격화를 결코“탈언어화”48)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이들 사이의 문제점은 프 르지와라의 바르트에 대한 이해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르지와라는 바르트 가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의 범신론적인 상관신학을 거부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위로의 신학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아래로 신학을 주창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본질 속에 진짜로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에게로 떠오르는 자 연 방식과 신으로부터 가라앉은 그것의 초자연적 본질 사이의 관계의 특별한 구체 성 속에서 가능”49)함을 논증한다. 물론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계시 의 대화’로” 함께 있지만, 프르지와라가 보기에는 그것마저도 “인간이 하나님의 본 질속으로끌려올라갔을”50) 뿐이라는것이다.그러나바르트는그것이오해일뿐 이며, 자기는 상관신학을 거부한다고 재반박한다. 왜냐하면 상관관계 도식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관성을 깊게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자유를 훼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논란은 이것이다. 존재 유비가 하나님 인식의 직접성과 간접성 의 논란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37) Horst Georg Pöhlmann, Analogia entis oder Analogia fidei. Die Frage der Analogie bei Karl Barth(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5), 116.
38) Wilfreid Härle, Sein und Gnade. Die Ontologie in Karl Barths kirchlicher Dogmatik (De Gruyter, 1975), 80.
39) 위의책,181.
40) Barth, KD II/1, 93이하.
41) Barth, KD I/1, VII.
42)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D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2. Aufl. (Olten: Jo-hannes, 1962), 175ff; B. Gertz, Glaubenswelt als Analogie. Die theologische Analogie-Lehre Erich Przywaras und ihr Ort in der Auseinandersetzungen um die analogia fidei, 1969, 251 ff.
43) 정승훈의 다음의 문장은 재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승훈의 지적에 의하면, 융엘도 바르 트가 존재 유비를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에버하르트 융엘 역시 바 르트의 존재의 유비에 대한 이해가 존재의 유비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진단한다.” 정승훈, 『칼 바르트와 동시대성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321 이 하. 그러나 융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 많이 인용되었지만 올바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바 르트 자신의 표명은 그러한 이해가 계획대로 진척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원문 은 이렇다: Die Bemerkung wurde viel zitiert, doch wenig verstanden. Ihrem Verständnis standen freilich Äußerungen von Barth selbst so sehr im Wege, daß auch in der Schule Barths die Wand- lung seiner Auffassungen verborgen blieb, die gerade durch seine Entdeckung der Analogie des Glaubens als Bedingung der Möglichkeit rechter Rede von Gott bewirkt worden war.\
44) 프르지와라와바르트는유비에대한이해차이로논쟁한다.프르지와라는바르트의초월신학 이 인간의 정신 속에 신의 초월성이 내재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의 자기실현(쉘러) 속에 신적 직관이 갇힐 수 있음을 목도한 그는 새로운 길을 찾 는다. 그래서 그는 1932년 『존재유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그 리고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스(Dionysius Areopagitas)나 독일 신비가들의 생각을 따라 피조물은 창조주와 유사성을 가지며 이 유사성은 신과 피조물 사이의 엄청난 차이(비유사성) 를 포함하기 때문에, 존재유비를 신과 피조물의 관계를 규정하는 ‘형식원리’로 본다. 프르지 와라는모든철학이나신학은이러한존재유비의틀아래있다는점과그것을통해모든인 식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45) Barth, KD I/1, 40.
46) 위의책,41.
47) 위의책,139.
48) 위의책,143.
49) Erich Przywara, Analogia entis, Metaphysik I (München, 1932), 146.
50) Barth, KD I/1, 178.
2.관계유비와존재유비:바르트와죙엔
관계의유비는『교회교의학』제3권에서집중적으로논의된다.51) 『교회교의 학』 제III권은 창조교리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학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론적으로 고찰하면서 신앙의 유비를 관계의 유비로 새롭게 이해한다. 하 나님의 존재 자체 내에 있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과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 사이에있는관계성사이에는유비가있다는것이다.52) 그래서그는예수그리스도 안에 정초하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의 비례 유비를 인정하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의 존재론적 혹은 의속의 유비는 부정한다. 하나님은 내재적 삼위일체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 내재적 삼위일체 관계가 모든 다른 관계의 근거이다. 그로부터 신과 피조물과의 관계가 유비 관계로 규정된다.
죙엔은 바르트가 존재 유비를 신학적인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철학적인 원리 로만 이해한 것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존재유비가 형이상학보다 신학적으로 사용될 때 존재 유비는 늘 신앙의 유비에 부속’53)함을 언명한다. 신앙의 유비 자체 가 이미 존재유비를 함축하고 있으며 신앙의 유비를 개신교의 원리로만 보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존재유비가 신앙의 유비 속에서”54) 궁극적으로 타당한 이 유는 ‘계시가 존재 유비를 통해서 해석되지 않는다’는 바르트의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것이 오직 신앙의 유비를 통해서만 해석되어야 하지만, 신앙의 유비가 전적으로 존재 유비와 대립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 보다는 신앙의 유비는 존재 유비를 전제하며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 유비는 신앙의 유비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유효하다는 죙엔의 사상을 읽 은 바르트는 존재 유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로마-천주교의 존재유비설이라면, 내가 존재유비를 적그리스도의 창안물이라 했던 나의 이 전 말을 취소했어야만 했었다.”55) 그러나 바르트는 죙엔의 주장, 곧 ‘존재 유비가 신앙유비에 부속’하며 ‘존재유비는 신앙유비를 전제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정하지 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신앙의 신학적 유비론을 끝까지 견지한다. 바르트는 로마 가톨릭 신학은 하나님 계시에 근거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신지식을 사용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바르트는 결코 존재 유비에 대 립하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본다. 바르트의 신 인식에 대한 기본 입장은 다 음 문장이 대표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만 인식된다.”56)
51) Barth, KD III/1, 218–20; III/2, 226 ff., 390 ff.
52) Barth, KD III/2, 262. 김재진은 관계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계약 파트너의 상응관계임을 명시한다. 김재진,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전이의 해석학,” 정기철 편, 『신학 해석학』(서울: 한들출판사, 1997), 47-77, 71.
53) Gottlieb Söhngen, Analogia Fidei: Gottähnlichkeit, 136.
54) Gottlieb Söhngen, Analogia Fidei: Die Einheit, 191, 207-208.
55) Gottlieb Söhngen, Catholica, 3,4 (1934), 208; Barth, KD II/1, 89.
56) Barth, KD II/1, 200.
3.존재유비대관계유비:발타자대바르트
바르트에 대한 비판은 발타자의 바르트에 대한 연구저서에서도 나타난다. 발 타자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제 3권에 집중한다. 주로 바르트의 신학적 인식론에 이의를제기한다.57) 발타자는바르트의입장을자유개신교주의와가톨릭주의사 이의중간에있는것으로본다.58) 그러나발타자는바르트가프르즈와라에의해제 안된 존재 유비를 가톨릭의 형식 구조로 잘못 일치시키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발타자의 입장에 따르면, 바르트가 인용한 프르지와라나 죙엔에 대한 거부는 잘못된 것이며 바르트는 그들의 노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프 르지와라의 칭의론과 바르트의 칭의론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프르지와라가 말하는 존재 유비는 바르트 안에서 칸트의 불안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하나님의 이념을 경험으로 기술할 수 없다고 했다. 왜 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직관적으로 표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를 그렇 게 직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비록 그 세계가 높은 오성과 의지의 일이더라도, 나는 실제로 그 이상을 말할 수 없다. 내가 시계나 배와 같은 것들과 관계하는 그 이 상을말할수없다.”59) 그러나하나님은현상방식에따라인식되어야만한다.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경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체험된 이성 사용의 한계가 있는 신에 대한 담론은 유비에 따른 인식 규칙을 따른다.”60)
바르트는 칸트의 유비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계시를 통 해 칭의론을 펼쳤다. 이것의 중요성을 발타자도 인식했기 때문에 신앙의 유비 안 에 존재 유비를 위치시켰다. 그렇다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교회교의학』에서 바르트가 입장을 바꿔 존재 유비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존 재의 유비에 대한 수납”61)이라는 바르트의 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케시(Johnson L. Keith)는 『바르트와 존재유비』62)라는 책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에서 바르트가 존재 유비를 거부했을 때 그가 그것을 오해하 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존재 유비를 비판하던 태도를 중단한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 물론 바르트가 존재 유비에 대해 반응할 때 여러 전개 상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그가 초기부터 지녔던 근본 입장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보기 보다 는 그것을 더욱 철저화하고 심화시켜 진정한 기독교의 대화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 학자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가톨릭의 경향은 철학적인 유비가 유일하신 매개자인 그리스도에 참 가자로 여겨지는 것에 부담감을 표하고 있다. 개신교 신학도 바르트의 입장을 마 냥 개신교의 대표되는 입장으로 표명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 중심의 존 재 유비가 가톨릭 신학 전체에 스며있는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 나오 고도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이 문제 때문에 계속 논쟁하기를 원하고 분리된 채 로남아있기를원하는경향이있다는데문제가있다.63)
존재유비는 피조물과 창조자 사이의 틈을 연결하려고 했다. 개신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의 수수께끼를 깨 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최근의 가톨릭의 유비신학에 대한 새로운 전개는 하나 님의 신비의 수수께끼를 되살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는 이런 차원이다. 인 간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만 하나님은 멀리 물러가 계시기 때문에 세상의 비밀이고 수수께끼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융엘은 종말론적인 강림의 유비를 대안으로 제시 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이 세상에 최대한 가깝게 계시기 때문에, 즉 십자가에 서 그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융엘을 논의할 때 자세하 게 논의될 것이다.
57) 위의책,XVIII.
58) 위의책,XVIII.
59) Immanuel Kant, “Prolegomena zu einer jeden kü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treten können,” Immanuel Kant: Werke in zwölf Bänden, Band 5 (Frankfurt am Main, 1977), A 175.
60) 위의책,A176.
61) Barth, KD II/1, 89. assumptio von analogia entis durch Jesus Christus.
62) Johnson L. Keith, Karl Barth and the Analogia Entis (T&t Clark Ltd, 2010).
63) 이종성도같은맥락의지적을하면서바르트가신앙의유비와관계의유비의윤리를신인식문제에적용했으나아직도해결되지못한점이있는것같다고말한다. “첫째로,신인간 의관계라는면에서볼때에관계유비는우리의현실의일면을이해하는데에는많은도움 이 된다. 그러나, 그 윤리를 신 지식의 구체적인 내용에 적용시킬 때 그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 이 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해서 신의 속성을(가명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과 같이 신의 존재와 속성은 분리될 수 없다고 이해 하더라도)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둘째로, 만약 우리의 신에 관한 모든 말이 유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의인론(anthropomorphism)이 아니면 이신론에 빠지지나 않을 까 생각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존재유비와 관계유비를 엄밀히 분리 하는대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존재유비를 로마천주교에서 오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우 리가그런오용의위험성을막을수만있다면양자를분리하지않는것이신의본질을이해 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종성, “바르트신학에 있어서의 Analogia Entis와Analogia Fidei와 Analogia Relationis의 개념,” 『신학논단』 8 (1964.10), 64-65.
4.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W. Pannenberg)는 『유비와 계시』라는 책에서64) 신 인식론에서 유 비 개념이 계시와 어떻게 관계하는지 해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유비로만 하나님 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성 속에서 자 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물론 간접적으로만 만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 로 형성된 언어들을 변형함으로써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과 피조물 사 이의 유비 주장과는 차이가 난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의 유비론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의성과 다의성을 구별하고서 유비 진술은 일의적 핵심을 가져야만 한다 고 주장한다. 유비를 제 3의 매개로만 보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그는 유비를 알지 못한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규정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즉 영광송의 구조(E. Schlink)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영광송에서는 찬미자가 그의 인간의 말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거나 그의 말들을 새롭게 그리고 의미에 타당하게 맞출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외재 의속 유비에 반대하여 의속 유비를 정당한 것으로 본다.65)
첫째,예수그리스도안의계시는인간에게하나님이말씀하심(말걸어옴,Anrede)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유비의 말로 상응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유비의 존재근거요 인식근거라면 그것은 바로 신학의 전통이 남겨준삼위일체흔적이다.66)
셋째,이 삼위일체 흔적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인식 가능하다. 이것에서 책임있는 유비의 말(일의적/다의적)이 유효하게 된다.
판넨베르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외재 의속 유비를 철저하게 수행하면서 도 유비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유비의 개념을 통해 표식되어야만 하 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중단되다.” 그 다음 내재 의속을 어떤 의미에서든 말하는 것이 피할 수 없다면,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유비란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 적 연합의 객관화” 즉 “그것의 존재론적 구조 속의 존재유비”이다. 판넨베르크의 바르트 유비론 비판의 근간에는 바르트가 복음을 “만남의 은혜신비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의 만남특성을 향한 바 르트의 의도는 유비개념이 바르트의 교의학의 조직적인 구조가 아직 사로잡혀 있 는유비개념을깰때만이파악될수있다.”67)
판넨베르크의 질문, 곧 바르트의 관계유비가 존재관계의 유비로써 특정한 존 재론적 구조를 갖게 된다는 비판에 대해 융엘이 답한다. 여러 상응 관계들을 통해 인간의 존재는 “유비의 존존재 근거이면서 인식근거이다”68)는 것이다. 융엘이 해 석하기로는, 바르트는 “존재자와 존재론적으로 구조화된 존재의 의미에서 자연의 개념을” 사용했으며, “유비의 현상은 역시 존재론적 중요성을 가진다.”69) 융엘은 약속과 창조의 관계를 그 예로 든다. “창조는 약속을 통해 가능한 가능성이다. 그를 위해서는 내적 근거는 외적 근거를 가능하게 하고 내적 근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서는내적근거를가능하게한다.”70) 약속과창조는하나님자신의본질에근거한 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유비적이다.”71) 관계 유비를 융엘처럼 “하나님 자신의 신비안으로흘러들어가는”72) 유비로이해할것인지또는판넨베르크처럼“만남의 은혜신비로만” 이해할 것인지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 자신과 인간의 말과의 상응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고, 비로소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말과 하나님 자신을 통한 자신의 충족 사이의 이러한 시간차이는 유비개념을 통해 더 이상 진술할 수없다.”73)
64) Wolfhart Pannenberg, Analogie und Offenbarung : eine kritische Untersuchung zur Geschichte des Analogiebegriffs in der Lehre von der Gotteserkenntni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7).
65) WolfhartPannenberg,“ZurBedeutungdesAnalogiegedankensbeiKarlBarth.EineAuseinander- setzung mit Urs von Balthasar,”ThLZ 78 (1953), 17–24, 22.
66) Eberhard Jüngel, “Die Mögl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em Grunde der Analogie,”EvTh 22 (1962), 539.
67) Pannenberg, “Zur Bedeutung des Analogiegedankens bei K. Barth,” 24.
68) Jüngel, “Die Mögl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em Grunde der Analogie,” 538.
69) 위의책,542.
70) 위의책,544.
71) 위의책,545.
72) 위의책,548.
73) Wolfhart Pannenberg,“Analogie und Doxologie"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I (Göt- 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7)201
5. 융엘
융엘(EberhardJüngel)은유비를“존재론적인언어현상”74) 으로이해한다.하나 님이 말씀하면 인간은 응답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신의 형상인 것이다. 따라 서 신학적 인간학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긍정(예)을 언어 현상으로 이해했 던 것이다. 그는 『세계의 비밀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저서에서 신 사유 가능성을 재 검토하면서 근대의 신 사유 속에서는 신 인식을 구성할 수 없고, 신 사유가능성은 강림의 유비 속에서 재구성 가능하다고 제안한다. 말씀이 바로 사유 가능성의 처소 로 인식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 속에서만, 다시 말하면 역사 속에 하나님 이 계시하심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존재의 통일이 언표되기 때문이다. 이 러한 관계사건, 즉 언어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강림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인간 에게 도래하심이 결정적인 사건으로 언표되는 강림의 유비가 중요하다.”75)
융엘의 강림유비는 유비의 속성이 가지는 것처럼, 신과 세계의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신과 세계의 관계 자체가 언어 특히 관계의 사건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함축 하고 있다. 신과 세계의 관계는 바르트에게서는 신앙의 관계다. 신앙의 유비란 따 라서 신을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 는 언어 사건이라는 것이 융엘이 이해한 바이다. 이 관계로서, 즉 유비로서 신과 인 간을 엄밀하게 분리하기 보다는 상응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상응성을 올바 른 읽을 수 있는 길은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신앙의 유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 유비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미 전제하고 있으며 인 간은 말씀을 통해 열려진 관계에 상응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융엘은 하나님의 강 림을 이 세계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심이라 했다. 이 강림의 유비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바르트가 존재유비를 ‘적그리스도의 창안물’로 보았던 이유는 존재유비를 지 키려고 하면 할수록 계시를 잃게 되기 때문이지만, 신앙의 유비는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76)을 열어 준다.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 거는 계시이다. 융엘은 삼위일체 흔적이야말로 해석학적인 문제라고 했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해석이다. 전적 타자로서의 신을 사유하는데, 존재 유비보다 더 좋 은 방식은 없다는 주장을 프르지와라가 주장하지만, 융엘이 보기에 그것은 “복음 에 맞는 신학”77)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융엘이 보기에 복음에 합당한 유비이 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강림의 유비”78)로 이것은 그에 따르면, 인간에 게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가장 최종적인 사건이다. 유비의 형식 구조를 따지는 것은 유비로 신을 말하는 “해석학적인 가능성”79)을 따지는 것이다. 융엘이 보기에 이러 한 해석학적인 가능성은 어떤 특정한 사건을 전제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이라는 신앙고백처럼 인간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그리스도론적 명제가 바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해석학의 근본명제”, 곧 복음에 합당한 유비론을 위한 단초인 것이다.80)
74) Jüngel, “Die Mögl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em Grunde der Analogie,” 555. Anm. 54.
75) Eberhard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Tübingen: J. C. B. Mohr, 1992), 389.
76) Eberhard Jüngel, Gotes Sein ist im Werden (Tübingen: J. C. B. Mohr, 1986), 23. 77)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388.
78) 위의책,389.
79) 위의책,390.
80) 위의책,394.
V. 결 론: 해석학적 원리로서의 유비신학의 문제점
바르트가 비판한 대로 존재 유비가 계시에 기초하지 않은 신 인식론이라면, 필자 또한 존재 유비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르트의 오해였다는 여러 사람의 비판이 정당하다면, 존재 유비는 거부될 필요가 없다. 토마스가 ‘존재는 유비가 아니다’고 분명하게 말했는데도, 토마스가 창조자를 피조물과의 유사성 속에서 인식하 려고 했다는 비난을 계속할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에, 존재 유비나 신앙의 유비는 결국 직접적인 신 인식이 아닌 간접적인 신 인식 이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인식 이다. 재인식이 계시와 신앙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생각이라면, 유비 자체가 가지는 속성(비례, 의속, 관계)이나 기능에 주목한 사람이 토마스이다. 따라 서 이러한 차이 때문에 우리가 논란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비 자체가 가지는 신 인식의 한계나 문제점, 곧 존재의 보편성도 그리고 존재의 진정한 개체성 도 결국 파악하지 못하지 않느냐?는 점을 놓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재인식의 정당성, 곧 바르트의 방식대로 설명하자면, 계시와 신앙 속에 서 인식되는 하나님을 우리가 참으로 올바로 알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것의 참 거짓 여부를 판가름할 성경 해석의 기준으로서의 신앙의 유비는 해석자에 의해 결정되느냐는 것이다. 계시를 부정한 신 인식은 무조건 거부되어야 하지만, 계시가 내리면 무조건 신 인식이 가능한가?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신앙에 의한 신 인식은 더 논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신앙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 한 이해는 천지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에서 우리에게 오면, 우 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을 반드시 포함하는가? 인간의 인식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이성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 인지 확정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으로 일어나 인간이 믿음으로 받아 들일수있게드러난것이중요한가?아니면둘다함께일어나야하는가?계시신 학과 자연신학의 논쟁으로 다시금 빠지게 되어야 하는가?
필자가 바르트의 유비신학을 옹호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이성보다는 계시와 신앙에 근거한 신 인식 가능성을 말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가 신앙의 유비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인식이 하나님을 통해서 인간이 인식됨으로 바뀔 수 있음”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필자에게 더 설명이 필요하다. 이 문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데 초점을 두는가? 아니면 인간의 인식이 올바르게 위치하게 되는 필연성을 언급하고 있는가? 만약 그것이 전자의 의미라 면, 계시의 등장 여부로 또 다시금 토론을 해야 할 것이고, 후자라면 다음과 같은 문 제들을 더 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이 올바르게 위치하게 되려면, 해 석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적 인식론만이 아니라, 현대 인식론의 방향에서 엿볼 수 있 듯이, 인식의 사회성과 정치 경제적 연관성 그리고 무엇보다 생태학적 또는 윤리적 인식론 등과도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라도 바르트 이후에 신학계 는 내적 삼위일체 진술의 필연성의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인간 자신을 말하기 위 해서 인간을 말하는 것이 필연적이냐 묻듯이, 신을 진술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 자신을 말하는 것이 실제로 필연적이냐는 문제제기였다. 푹스도 이 점에서 이것 이 바로 해석학의 문제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러한 “해석학의 중 요한 단초”81)를 해명하려고 애썼다.
필자의 해결책은 유비신학을 전공한 황덕형의 제안처럼, “성령론적 해석학”82)이라 생각한다. 성령론적 해석학이란 신의 계시를 “방법론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 는 그 진술을 통하여 규범적으로 현실을 해명하고 그 현실을 재구성 해내게 하는 성령의 역사”83)로, 성령만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는 취지이다. 따라서 황덕형은 바르트의 해석학의 정초화를 물으려면, “해석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바르트 신학의 본래적인 의도가 해석학의 이념을 넘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84)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의‘성 령론적 해석학’이 어떻게 개진될 것인지 기다리고 있다.
82) 황덕형,『삼자적임재.성령론적신학방법론서설』(서울:한들출판사,2000),13.83) 위의책,32.
84) 위의책,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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