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상모교회는
구미시에서도 모범적으로 성장하는 예장 합동 교단의 교회입니다.
구미는 행정구역상 예전엔 선산군에 속했었는데,
선산군에서의 기독교 복음 전파는 1900년 부해리 선교사가
설립한 괴평교회를 통해 가장 먼저 전해졌고
상모교회는 1901년에 두 번째로 설립되었습니다.
특히나 구미상모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달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은 초기 성도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첫 번째 성도는 동학교도였던 정인백이란 분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기인
1890년경부터 동학도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동학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고향 선산을 떠나
서울로 잠입하여 은신하면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서울 정동에서 사역하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 후 고향으로 내려와 친동생과 육촌동생 등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작은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고
1901년 3월 13일 자신의 사랑방에 10명이 모여 정식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상모교회의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상모교회는 설립 2년 만에 30여명의 성도들로 성장하였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은 작은 시골 교회의 면모를 벗기가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구미시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시의 규모도 커지고 인구가 급속도로 유입되면서
상모교회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교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교회 100년사>가 쓰인 2004년 당시
집사 이상의 제직만 1,400명 정도인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변 여건이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모두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교회가 들어서기도 할 뿐더러 기존의 교회들도 모두 전도에 힘을 쏟기 마련입니다.
쓰임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잘 빚어져 온 그릇이 주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상모교회는 오랜 세월 그렇게 빚어져온 그릇이었습니다.
이런 구미상모교회의 역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습니다.
<구미상모교회 100년사> 104p에 소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8년 상모동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상모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녔다.
한성도 장로는 박대통령과 죽마교우였으며
대구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정규선 목사
그리고 상모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던
김삼수 목사 등이 함께 주일학교를 다닌 것이다.
한성도 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며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을 회상하는 말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15-6세까지는 주일을 거르는 법이 없이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고
웅변과 동화 구연에 재능이 있어서 칠곡선산지구 교회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는 맡아 놓고 1등을 하였으며
동화대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하여서
입상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구 사범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교회를 잘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비교적 착실하게 교회생활을 했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 그 후의 삶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주의 뜻대로 살았다면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구미상모교회 100년사> 104p 내용
상모교회와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이
어린 시절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1966년 상모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낡아
재건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예배당은 1928년에 건축한 와가 18평의 작은 예배당으로 목조 건물에 흙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그나마도 6.25 전쟁 시 폭격으로 기둥이 기울어져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재건축을 하여야 하나 어려운 농촌교회의 실정이라
예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당회의 결의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부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10개월이나 지나도 연락이 없다가
1967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고향을 방문한 뒤
교회에 들러 교회 상황에 대해 직접 들었다합니다.
그리고는 “교회가 이렇게 낡았습니까?
목사님 이번에는 나무로 짓지 말고 석조로 잘 지으십시오.
도와드리지요.”라고 했다합니다.
이후 구미상모교회는 건평 70평의 2층 콘크리트 예배당을 총공사비 240만원으로 건축하였는데,
이중 100만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헌금한 것이었습니다.
구미 상모교회의 역사에는 또 한분이 눈에 띕니다.
초대 장로가 되시는 정인명 장로입니다.
이분은 초대교인 10인 중에 한분이시며
1926년 초대 장로로 장립하여 헌신하신 분입니다.
또한 교회 100년사 편찬위원장이신 정기현 장로의 조부 되는 분으로 소천하시기 전에
교회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가셨습니다.
생전에 손자 되는 정기현 장로를 불러놓고
자신하는 말을 잘 받아 적어
구미상모교회의 역사가 되게 하라고 하셨다합니다.
그 기록지가 구미상모교회의 연역지가 되었습니다.
1926년 이후는 당회록이 있어 역사 파악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이전의 역사는 정인명 장로가 남기고 가신
교회 연역지가 없었다면
많은 부분이 빈 공간으로 남겨질 뻔 하였다합니다.
100년사의 역사를 빈틈없이 채우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기억에만 의지하다보면
쉽게 잊혀지고 되살린 기억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주의 일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게 전해 주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자신이 직접 주의 복음 전하는 방법은 기록만이 가능합니다.
한 교회가 교회답게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주의 쓰임을 받게 됩니다.
학업과 세상사 풍파에 휩쓸려 믿음이 흐트러진 안타까움은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도
주의 일에 분명히 쓰임 받은 사람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디딤돌 삼아 구미상모교회를 포함한
한국 교회 전체가 도약하도록 하셨습니다.
반면에 일생을 묵묵히 주의 일에 순종하며
주의 신실한 종의 길을 걷고는
그것을 후손에게까지 전해주는 분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며
주님의 열심으로 주님의 일을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