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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일정 >
- 07 : 30 압구정역 출발
- 07 : 50 동천 간이 정류장 출발
- 07 : 50∼10 : 30 문경 새재 도착 (도립공원, 옛길 박물관)
- 11 : 00∼13 : 00 ❶ 문경새재 제1관문 답사
➋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관람 (단체 입장료 : 1,500원 개인 부담)
➋ 문경 새재 제2관문 답사
- 13 : 00∼14 : 00 <점심 식사> 문경 식당(054- 571-3044, *메뉴 : 약돌 돼지구이· 더덕 구이)
- 14 : 00∼15 : 30 문경시 출발∼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도착
➌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관람
- 15 : 30∼16 : 00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출발~충주 탄금대 도착
- 16 : 00∼17 : 00 ➍ 충주 탄금대 답사
- 17 : 00~ 19 : 00 충주 탄금대 출발~서울 이동 및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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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문경시·충북 충주시 국가유산 답사
◇ 문경 새재(鳥嶺)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156 (상초리 산 42-8) (명승 제32호)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나는 새도 쉬어간다’라는 험준한 고개
문경 새재는 험준한 고개여서 ‘나는 새도 쉬어간다’라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로 불렸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새재가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고개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경상도를 잇는 길에는 죽령(689m) 외에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 계립령(鷄立嶺 : 520m)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늦게 개통된 ‘새길’이었다. 이화령(548m)은 새재 옆으로 일본 강점기에 닦은 ‘신작로’이다. 다른 고개들도 그렇지만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많은 설화가 남겨진 문경 새재는 3국시대 이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문경과 괴산, 충주를 연결하는 국도가 개통된 지금은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졌지만, 새재 옛길은 도립공원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조령산과 주흘산을 넘어가는 이 길은 임진왜란 이후에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세 관문(關門)으로 가로막혔다. 임진왜란 당시 관문 하나 없이 무방비로 충주까지 왜군을 통과시켜 한양을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했던 새재 길은 이후 굳건한 성벽을 쌓아 방비하였다. 그러나 이곳을 통과하려 했던 외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 되고 말았다.
새재 길은 경상도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중요한 통로였다. 영남과 충남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던 제 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 3관문인 조령관까지의 6.5㎞ 길은 산책을 즐기듯 걷기에 그만이다.
이 고갯길이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라고 전한다. 박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에 문경을 순시하다가 무너진 성벽 위로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차량통행금지를 명령했다고 전한다.
◇ 옛길박물관 :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44
-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 길 위의 역사, 고개의 문화
옛길박물관은 1997년에 설립된 문경새재박물관을 확충하여 2009년 4월에 재개관한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문경시 지역의 민속자료와 향토역사 유물을 수집ㆍ전시ㆍ연구하는 외에 ‘옛길’이라는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더하여 박물관의 위상을 높였다.
6,000여 점의 소장품 중에 선조 4년(1571) 문경 대승사에서 간행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1701년 봉암사의 정원대사(淨源大師)가 집필한 『선원제전집도서과문(禪源諸詮集都序科文)』, 조선 후기 유곡역 관련 고문서들, 문경 지역 무덤 출토 복식유물인 「금선단 치마」,「중치막」 등이 소장되어 있다.
실내 전시실은 1, 2층으로 나뉘어 있다. 1층 전시실에는 문경 관문, 영남대로, 문경 전투, 경상감사 도임행차(到任行次) 외에 문경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 등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 이치(李治)가 그린 「옥소 권섭(玉所權燮) 영정」(1724년), 「선조 어필(宣祖御筆)」과 홍인걸(洪仁傑)의 투구, 주두업(周斗業)의 「묘지(墓誌)」, 평산신씨 묘와 전주최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류 등 문경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조선 후기의 유곡역 고문서와 권섭의 『유행록(流行錄)』을 중심으로 전통시대의 길과 사람들에 대해 재현해 놓았다.
야외 전시장에는 금학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해 이 지역의 옹기 1,500여 점, 연자방아, 장독대, 솟대, 서낭당 등이 전시되어 있다.
◇ 문경 새재 오픈세트장 :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1037
- 고려시대 배경의 세트장을 허물고, 조선시대 모습으로 새로 조경한 세트장
문경 새재 오픈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사극 대하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하여 2000년 2월 23일에 문경새재 제 1관문 뒤의 용사골에 건립한 것이다.
당시 공사비 32억 원을 투입하여 65,755㎡(약 2만 평)의 부지에 왕궁 2동,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기타 13동으로 건립한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촬영장이었다.
이곳에 드라마 세트장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문경시의 가은이 후백제 견훤의 출생지이고, 주변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촬영한 드라마로는 드라마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 시대, 대조영, 근초고왕, 성균관 스캔들, 제중원, 추노, 명가, 천추태후, 인수대비, 광개토태왕, 해를 품은 달, 공주의 남자, 전우치, 대왕의 꿈의 촬영 주 무대가 되었다.
영화는 스캔들, 낭만자객, 활, 미녀 삼총사, 관상, 광해, 나는 왕이로소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 전우치 등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문경 새재 오픈세트장은 문경시의 제작지원으로 지난날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을 허물고, 새로운 조선시대 모습으로 2008년에 준공한 것이다.
공사비는 75억 원을 투입하였으며, 규모는 70,000㎡(2만 1천 평) 부지에 경복궁의 광화문, 동궁, 서운관, 궐내 각사 외에 양반집 등 103동을 건립하였으며, 기존 초가집 22동과 기와집 5동을 합하여 130동의 세트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 입장료 : 개인 2,000원, 단체 1,500원
◇ 문경 새재 제 1관문 – 주흘관(主屹關) :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555(사적 제147호)
- 조선시대 영남과 서울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문경 새재의 제1관문
주흘관은 문경 새재 중의 첫 번째 관문(關門)으로 세 관문 중에서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 관문은 임진왜란 이후 설치의 필요성에 따라 많은 논란 끝에 1708년(숙종 34)에 석성과 함께 세워졌다.
제 1관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다. 중앙에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이 있으며, 좌우에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의 석성을 축조했다.
주흘관 뒤편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홍예문 위에 문루를 세운 이 문은 3개의 관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며, 성문 오른쪽 성벽에는 축성 당시의 감독과 공사 명세를 알리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水口)도 있다.
*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주흘산 주흘관 [主屹山 主屹關] (두산백과)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 문경 새재 제 2관문 – 조곡관(鳥谷關):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 42-36(사적 제147호)
- ‘영남 제2관’,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두 번째 관문
해발 380m의 조곡관은 제 1관문 주흘관에서 북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외적이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곳에 자리 잡은 이 조곡관은 문경 새재의 세 관문 중에서 맨 처음에 세워졌다.
조곡관은 문경 새재 관문 중의 두 번째 관문으로 임진왜란 이후 관문 설치의 필요성이 논의되던 중, 1594년(선조 27)에 충주 수문장 신충원(辛忠元)이 축성한 중성이었다.
후일 숙종 때에 와서 성곽을 개축하고, 관방(關防)을 설치할 때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다.
조곡관 성벽의 길이는 500m 정도인데, 주흘관이나 제 3관문 조령관(鳥嶺關)이 있는 자리에 비해 계곡이 좁고,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 그 후 조동문(조곡관)은 화재로 홍예문(虹霓門)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조곡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중앙의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고, 좌우에 높이 4.5m, 폭 3.3m, 길이 73m의 석성을 축조하였다. 문루 뒤쪽에는 ‘영남 제2관’(嶺南第二關)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석성은 조선 선조 때인 1594년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이 축성한 중성이었는데, 숙종 때 이를 고쳐 쌓고, 조동문을 설치하였다. 조선말 1907년에 훼손된 것을 1975년에 복원하면서 이름을 바꿔 조곡관이라 하였다.
제 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 3관문인 조령관까지는 총 6.5km 거리로 걸어서 왕복 4시간 정도 걸린다. 길이 완만하고 나무가 우거져 있어 걷기가 좋다.
제 1관문과 2관문 사이에는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숙식 시설(조령원)과 소임을 마치고 떠나는 관찰사가 신임 관찰사에게 관인(官印)을 건네주었던 교귀정도 복원되어 있다.
이 길은 이곳저곳 암벽에 시인 묵객(墨客)들의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선 후기에 한글로 글씨를 새긴 ‘산불됴심’도 남아있다.
제 2관문부터는 전일 조령을 오가던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옛길 300m 정도가 남아있다.
*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주흘산 조곡관 (두산백과)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280-11
(국보 제205호)
- 5세기경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
이 비석의 공식 명칭은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이지만, 일반적으로 신라 때 충주의 옛 지명에서 비롯된 ‘중원 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석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은 예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돌로만 여겨 별다른 보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석에 새겨진 글이 심하게 훼손된 채 1979년 충주 지역 문화재 애호가들이 모인 예성(蘂城) 동호회가 당시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현재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立石)마을에서 발견하고, 이를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확인하였다.
이 비는 국보 지정 후에 보호각을 지어 안치하였지만, 산성비와 새똥 등으로 훼손이 점점 심해지자 인근(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 2319)에 ‘고구려비 전시관’을 건축한 뒤 고구려비 원본을 전시관 안으로 옮겼다.
높이 203cm, 폭 55cm, 두께 33cm의 충주 고구려비는,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고, 앞면과 좌측면 일부의 내용만 확인된다.
비문의 글자는 앞면에 23자씩 10줄, 좌측면에 23자씩 7줄로 528자를 새겼다. 우측면에는 6줄, 뒷면에 9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고구려비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한 5세기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왕을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등의 표현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외에 고모루성(古牟婁城), 대사자(大使者) 등 당시의 지명과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중원 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의 남진(南進)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은 중국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등 매우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비석은 한반도의 중부 지역인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 높게 평가된다.
고구려비의 우측면과 좌측면에 마모되어 몇 글자만 판독할 수 있지만, 전면에는 많은 글자가 판독되어 번역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조왕공(祖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 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충주 고구려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나무위키)
◇ 충주 탄금대(彈琴臺) : 충주시 칠금동 산1-1번지(명승 제42호)
- 신라의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남한강이 휘감아 도는 경치가 뛰어난 명승지
충주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 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으로 국가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충주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 한국의 3대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자 그 오묘한 음률에 젖어 들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마을을 이루자 이곳을 탄금대(彈琴臺)라고 명명했다.
충주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서행장)군과 맞서 싸우다 패전하자 투신한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명소이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5만 명의 왜군이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방면을 지키게 된다.
신립 장군은 이 당시 지형을 정찰한 뒤 조령에 진지를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우리 군사들의 훈련이 부족해 사지(死地)에 몰아넣지 않으면 투지를 드높일 수 없다고 판단, 4월 28일 새벽에 8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다.
그러나 신립 장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천추의 한을 품고 남한강에 투신자살, 패장의 불명예를 쓰고 만다.
탄금정 정자에서 북쪽으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열두 대’라는 층암절벽이 기다린다. 왜군과의 격전 당시 신립 장군이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면서 활줄을 강물에 식히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해서 ‘열두 대’라고 불린다.
탄금공원 한편에는 충혼탑이 하나 서 있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충주 출신 전몰장병과 경찰관, 군무원, 노무자 2,838인의 넋을 추모하고자 1956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들을 추모하는 향사(享祀)를 지낸다.
이곳은 남한강이 절벽을 따라 휘감아 돌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탄금대에서 조망되는 남한강과 계명산, 남산 및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 지대가 그림같이 펼쳐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