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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나무에 서린 한
조 승 만
이별이란 말은 따로 갈라서서 헤어진다는 말이다, 회자정리라는 말도 있듯이 만나면 반드시 이별을 하는 것이 불변의 이치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별하지 않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영혼이라도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는 걸까?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랑하는 부모형제 가족과의 이별은 마음에 남아 죽을 때까지도 잊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별은 아픔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특히 사랑하는 자녀와의 이별은 더욱 더 큰 아픔을 준다. 6. 25전쟁 통에 생이별한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확인도 않 되고 소식도 없는 나의 삼촌을 생각하면서 그동안 나의 아버지의 살아 계실 때의 말씀을 회상해 본다. 일본으로 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조선인들이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노예보다도 못한 수치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독립군의 활동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의 공격에 일본은 항복한다. 해방이 되었지만 곧 바로 3. 8도선 이북을 소련군이 점령하고 남한은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여 각각 5년간 신탁통치한 후에 자유선거를 통하여 독립정부를 탄생시킨다는 강대국의 계획이었는데, 이는 2개의 정부가 탄생되는 민족분단 비극의 근원이 되었다. 북한은 해방된 지 5년 동안 남한을 침공하여 점령할 것을 목표로 전쟁준비에 몰두하여 소련군 탱크를 앞세우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일으켜 3.8선을 넘어 불과 몇 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게 된다. 이 전쟁 통에 우리가족은 삼촌과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남한의 국군은 열세하여 후퇴를 계속하고 낙동강 이북이 인민군 점령 하에 놓이게 되는 1950년 8월경이었다고 한다. 낮에는 미군들의 폭격으로 북한 인민군은 활동을 거의 안하고 밤에만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마을별로 매일 밤 주민들을 공회당으로 모이게 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홍성읍 대교리에는 천주교 공소를 비롯하여 몇 채의 좋은 기와집이 있었는데 인민군이 마을의 인민위원회 공회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거기서 인민군대의 의용군에 나갈 대상자를 선별하는 작업도 하였다고 들었다. 여름밤에 마을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밤에 와서 우리 삼촌을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4명이나 끌려 나갔다고 한다. 홍성군내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홍성초등학교에 집결시켜 조양문을 통하여 홍성역으로 도보로 이동하는데 아버지는 홍성역전까지 계속 뒤따라가면서 동생이 전쟁터에 가면 낙동강 전선으로 배치되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눈치를 살펴서 도망가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도망하느냐며 대열에서 이탈하면 죽을까 봐 그대로 끌려갔다고 한다. 홍성역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국군과 인민군이 총을 겨누며 같은 민족끼리 죽이고 죽는 전선으로 가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용군에 끌려 나간 사람들 중에는 조치원역쯤에서 기차가 섰을 때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어둠을 타고 무작정 논으로 산으로 탈출을 하여 공주를 넘어 며칠을 걸어서 홍성으로 다시 와서 친척집 벽장에 숨어 있었는데, 인민위원회 위원들에게 적발되어 다시 잡혀 갈까 봐 발짝 소리만 들어도 두근두근 거려서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달 여를 버티니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탈환을 하고 인민군이 물러가니 집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분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세무서에 말단 사환으로 취직을 하여 나중에는 승승장구하여 세무서 과장까지 승진을 하고 재물도 많이 모았다고 한다. 또 귀환자 중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교장선생님까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쟁터에서도 생과 사는 운명에 달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만약에 인천상륙작전이 없었고 인민군 치하였다면 탈영병이므로 끌려가서 모두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쟁 중 인민군이 점령할 당시는 좌익세력이 판을 쳐 우익 사람들을 대창으로 서슴없이 죽이는 일까지 있었고, 국군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에서 보복하느라 좌익 사람들을 마찬가지 방법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남북 간의 이념대립으로 극심한 대립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해 맞이할 일이 아닌가? 이렇게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원인을 살펴본다면 조선말기 왕권은 쇠약하고 남인북인 노론소론의 정치판도로 사분오열로 흩어져서 정쟁을 일삼고 싸움만하다가 국력은 약화되고 역사적으로 유교사상에 지나치게 젖어 세상물정을 모르고 맹목적인 형식주의에 치우친 구한말 무능한 대원군의 쇄국정치 탓일까? 대국이라고 청나라만 맹신한 잘못일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선에 개입한 미국과 소련 탓일까?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이란 말인가? 이렇게 역사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으로 조국이 분단된 현실에 처절한 한숨과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우리 집에는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20여 년간이나, 그러니까 내 나이 십대 후반까지 매달 매주 수시로 경찰서 정보형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들랑거렸던 기억이 난다. 너희 삼촌한테 연락이 오느냐? 집에 다녀 간적은 있느냐는 등 나의 삼촌에 대하여 우리 집 식구들 모두에게 유도심문으로 탐문을 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도 정보 수집을 위하여 주기적으로 우리 집 동정을 물어 보기도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의 삼촌이 북한에서 넘어와 고향집에 와서 남파 간첩으로 행동을 할 거라는 심증을 가지고 경찰서에서는 정보활동을 한 것으로 추측이 가기도 한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이구동성으로 말씀을 해주셨다. 너의 삼촌은 유난히 효심이 강하고 착하며 얼굴도 잘 생기고 키가 훤칠할 뿐 아니라 성격이 좋고 총명하였으며 어려서 부터 공부를 잘하여 우수생 이었으므로 북한에 살아 있다면 반드시 고향집 어머니와 형제 동생 가족을 찾아서 돌아 올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삼촌이 인민군대의 의용군에 징집되어 나가기 전 홍성군청에 다닐 적에 삼촌이 직접 집 앞에 측백나무 2그루를 심었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지금 새마을 운동이 한창 진행되어 마을이 변한다고 해도 너의 삼촌은 자기가 심은 저 상록수 나무를 보고 반드시 찾아올 거다." 라고 굳게 믿고 살아 오셨으며 매일 밤마다 잠자리에 눕기 전에는 항상 삼촌의 이름 석 자를 섧게도 부르면서 애타는 모정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측백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 "저 나무에 내 아들이 찾아왔나 보구나. 오늘 따라 왜 저렇게 측백나무가 흔들리지?" 하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생각하며 서글피 울기도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 아들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저 측백나무만은 베어내지 말라고 유언의 말씀을 하시고 돌아 가셨다. 그러나 새마을 사업 등으로 초가집도 기와집으로 지붕개량사업을 하다 보니 동네가 너무 변하였으며 우리 집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는데 구석기 시대에서 나 볼 수 있는 건물이었기에 70년대 말 정부에서 권장하는 주택개량사업으로 집 앞의 나무를 모두 베어 내어야만 농촌주택을 지을 수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상록수는 온데간데없이 베어졌고 그 이후로도 삼촌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전해오지 안 했다. 삼촌이 심은 두 그루의 상록수를 베어내서 고향집이 어디가 어딘지 몰라 찾지 못해서 못 돌아 왔을까? 그래서 그런지 그 이후로도 한 번도 생사에 대하여 소식조차 없었고 알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과 유일하게 탈출하여 살아 돌아온 아저씨의 말씀을 들어보니 우리 동네에서 함께 의용군에 끌려간 사람 4명중 자기 한사람만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용하게도 살아남고 전선으로 끌려간 나머지는 국군과 인민군 피아가 치열하게 싸웠던 낙동강 전투에서 왜 끌려 왔는지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젊은 청춘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얘기만 전해 주었다. 70년대 중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신원증명을 발급받아 제출하게 되는데 나의 신원증명서 란에는 "숙부가 6.25 당시 인민군으로 활약한 바 있음" 하고 써 있었다. 억울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북한의 인민군이 쳐들어 와서 우리 동네가 인민군 치하에 있을 때 아무런 죄 없이 인민위원회에서 동네청년들을 야밤에 인민군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끌려간 것이 조카에게 까지 죄가 된다는 말인가? 신원증명서를 보고 불합격하면 어쩌나 하였지만 공무원시험에는 합격하여 임용하는 데는 커다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80년대 언젠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한창 진행되었던 일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 어느 가수가 불렀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의 노래가 아직도 애처롭게 귓가에 들린다. 요즘에 상영된 영화 "국제시장" 에서도 이산가족의 슬픔을 보는 한 장면의 모습도 있었지만 우리 집에서도 그 당시 TV 방송을 보면서 아버지 형제들은 한없이 눈물을 흘리시고 나도 덩달아 눈물을 훔치던 생각이 난다. 이제는 그분들이 모두 다 저 세상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 세상에 영혼이 있다면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삼촌과 다시 만나서 만남의 기쁨을 누리고 계실까? 그리고 그분들이 가끔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맴돌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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