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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蘇東坡 云하되 富不親兮貧不疎는 此是人間大丈夫요 富則進兮貧則退는
(소동파 운 부불친혜빈불소 차시인간대장부 부즉진혜빈즉퇴
此是人間眞小輩니라
차시인간진소배)
소동파가 이르길 “부유하다고 친하지 않으며 가난하다고 멀리 하지 않음은 이것이 바로 세상의 대장부라 할 것이요, 부유하면 나아가고 가난하면 물러남은 이는 곧 세상의 진짜 소인배(小人輩)이니라.”고 하였다.
⋇ 兮(어조사 혜) : 문장이나 운문의 어구(語句) 중간 혹은 끝에 붙여 일시 어세(語勢)를 조정하여 다시 발양하는데 쓰임.
⋇ 不疎(불소) : 멀리 하지 않음.
⋇ 人間(인간) : 사람이 사는 세상. 속세.
(해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가진 재산에 의하기 보다는 학식과 인품에 대하여 평가되어야 하나 세상사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학식이 높고 인품을 갖추고 있더라도 가난하거나 직위가 낮거나 할 때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처럼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특히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모든 것이 가진 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대우 받는 시대에 있어서는. 그래서 일확천금의 꿈을 펼치기 위한 부적절한 행태가 난무하며, 그 심리를 이용한 각종 사기행각과 도박(경마 등 포함) 그리고 부동산 투기와 밀수 등 한탕주의가 요동을 친다. 경제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는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부의 재분배에 대한 논란이 심화된다. 그래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유산으로 상속이 되는 현상이 벌어지며 젊은이들에게 성공이란 희망을 빼앗아 버리는 역기능은 사회적인 문제로 활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사회의 발전은 새로운 부를 창조해 나간다. 지식기반사회인 21세기의 새로운 부는 창조와 IT와의 결합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가 결합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며 눈부신 변신을 하고 있다. 또한 관광분야도 각 국가의 문화산업과 결합하여 특색 있는 종합적인(음식, 숙박, 문화체험, 쇼핑 등) 사업으로 활성화되며 외국인 유치에 경쟁적인 활동을 보이는 추세이다. 빼어난 자연경관이나 유서 깊은 문화유산으로 승부를 걸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국가의 경쟁력도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발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선진국에서 추락하는 비극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매일 지면을 강타하는 유럽의 경제위기와 미국의 대국입지가 흔들리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보여 진다.
가난과 입지의 관계는 매우 미묘한 양상을 보인다. 입신출세하여 청렴한 까닭에 부유하지 못 하더라도 흠이 되지 않고 오히려 추앙받을 처세로 존중 받지만 그렇지 못 하면 무능하고 재주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대장부라면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주머니가 두둑해야 말이 서고 당당해 진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 하듯이 물마시고 이를 쑤시는 허풍은 남 보기에도 안쓰러울 뿐이다. 가난이 죄는 아니고, 가난이 잘못은 아닌데도 당당하지 못하게 되어 눈치 보이고 비굴해 지는 심정은 어쩔 수 없는 일반적 현상이다. 유머 코너에서 나온 예를 보면 “십대는 어느 대학에 입학하였는가? 에 따라, 이십대는 어느 직장에 취직 하였는가? 에, 삼십대에는 누구와 결혼하였는가? 에 따라”어깨를 우쭐거리게 하는 희비와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부유함에도 겸손하고, 가난함에도 당당하며 나아갈 때는 나아가고, 물러설 때는 과감히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대개의 경우를 보면 그 반대인 모양새를 보인다. 사람은 배우면 배울수록 겸손과 도리를 알게 되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속이 꽉 찰수록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세상이치처럼 자기의 위치에 맞는 분수와 도리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부는 인격이 아니다. 머무르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이 재물이요, 배워서 갖춘 지식은 누가 빼어 갈수도 없는 진정한 재산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당당해도 좋다. 기죽을 필요가 무에 있는가.
三年不蜚不鳴(삼년불비불명)
- 새가 삼년간을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큰일을 하기 위하여 침착하게 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임. - ※ 蜚(바퀴, 곤충 비)는 飛(비)와 통용됨.
춘추시대 五覇(오패)의 한사람인 楚(초)나라 莊王(장왕)이 제위에 오른 지 삼년간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酒色(주색)에만 빠져 있으므로 충신 伍擧(오거)가 왕에게 수수께끼로 “삼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새가 무슨 새이겠나이까?(有鳥在于阜 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 : 유조재우부 삼년불비불명 시하조야?).”하고 물은 데서 연유함. 그러자 장왕은 3년 동안 날지 않았지만, 한번 날면 하늘에 오를 것이요. 또 3년이나 울지 않았지만 한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 게 할 것이요.(此鳥不飛卽己 一飛沖天 不鳴卽己 一鳴驚人 : 차조불비즉기 일비충천 불명즉기 일명경인)라고 답했다고 함.(출전 史記)
相避情神(상피정신)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편찬시킨 “歷代兵要(역대병요)”가 완성된 것은 端宗(단종) 때 들어서의 일이다. 이때 편찬을 책임 맡은 총재관이 후에 쿠데타로 정권을 약탈한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이 편찬에 공이 큰 학사들에게 벼슬을 한 品階(품계)씩 올려 주는 賞(상)을 내리자, 후에 死六臣(사육신) 가운데 한 분이 되는 河緯地(하위지)만이 그 상 받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을 내려 아랫사람의 벼슬을 좌우하는 것은 높은 벼슬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임금의 至親(지친)인 大君(대군)은 벼슬할 수도 또 벼슬을 주무를 수도 없다는 국법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위지는 그 길로 벼슬을 던지고 낙향하고 있다. 임금은 親系(친계) 母系(모계) 妻系(처계) 그리고 아들 사위 등 지친-외척들에게 권한을 좌우하는 벼슬-곧 實職(실직)을 주지 않음으로써 권력의 정치오염방지가 제도화돼 있었던 것이다. ※ 緯(씨 위).
비단 왕족뿐이 아니다. 조선조의 법전인 “大典會通(대전회통)”의 吏典(이전)에 보면 모든 상하 官員(관원)은 친척 또는 연척 관계가 있는 자가 더불어 벼슬하게 됐을 때는 어느 한 쪽이 이를 기피, 벼슬을 하지 않는 “相避(상피)”가 제도화돼 있다. 그 상피 한계는 폭이 넓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나 親系(친계) 母系(모계) 妻系(처계)로 4촌 이내면 더불어 벼슬하지 못하게 돼 있다. 심지어 豫備大權(예비대권)을 지닌 世子(세자)를 가르치고 뒷바라지한 관서의 벼슬아치들은 세자가 임금이 된 연후에는 상피를 했으며, 임금의 장인이나 사위(駙馬 : 부마)가 무슨 건의를 해도 臺官(대관)의 논박을 받고 있다. 親分(친분)을 타고 흐르는 권력의 漏水(누수)를 무자비하게 봉쇄했음을 알 수가 있다.
柳命觀(유명관)의 아들 柳季聞(유계문)이 京畿觀察使(경기관찰사)로 배명을 받자 相避(상피)를 이유로 사직서를 올렸다. 곧 “觀察使(관찰사)”라는 벼슬이름에 아버지 이름인 “柳命觀(유명관)”의 “觀(관)”자가 들었으니 그 벼슬에는 상피하는 것이 도리라는 논리다. 아버지가 이 소문을 듣고 “柳命觀(유명관)”을 “柳命寬(유명관)”으로 개명한 후에야 관찰사에 부임하고 있으니 대단하다. 언뜻 보기에 너무나 姑息的(고식적)인 판단 같지만 효도와 상피정신이 어느만큼 삼엄했는가의 본보기랄 수 있겠다.
한말의 우리나라 國運(국운)은 바로 이 相避制度(상피제도)의 해이와 상피정신의 증발에서 기울기 시작했다 해도 대과가 없다. 바로 외척인 안동 김씨가 상피제도를 유린, 권좌를 차지하면서 3代(대) 60년에 걸친 세도정치를 하더니 다시 외척인 여흥 민씨가 상피제도를 유린, 권좌를 차지하면서 傾國(경국)의 회오리를 거세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곧 국운과 상피제도는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근간 한 경제단체장 자리를 둔 相避(상피)문제가 거론되었기로 거울삼아 사실을 더듬어 본 것이다.(이규태 코너 1991년)
17. 遵禮篇(준례편)
17-1. 子曰 居家有禮故로 長幼辨하고 閨門有禮故로 三族和하고 朝廷有禮故
(자왈 거가유례고 장유변 규문유례고 삼족화 조정유례고
로 官爵序하고 田獵有禮故로 戎事閑하고 軍旅有禮故로 武功成이니라
관작서 전렵유례고 융사한 군려유례고 무공성)
공자가 말씀하시길 “집안에 거처하면서 예가 있기 때문에 어른과 어린이의 분별이 있고, 규문에 예가 있기 때문에 부부. 부자. 형제 곧 삼족이 화목하고, 조정에 예가 있기 때문에 벼슬의 차례가 있고, 사냥하는데 예가 있기 때문에 군사(軍事)일이 숙달되고, 군대에 예가 있기 때문에 무공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 居家(거가) : 집안에 거처함.
⋇ 辨(분별할 변) : 분별하다.
⋇ 閨門(규문) : 부녀가 거처하는 안방.
⋇ 田獵(전렵) : 사냥.
⋇ 戎事閑(오랑캐 융. 무기 융. 사한) : 전쟁에 관한 일에 숙달함.
⋇ 軍旅(군. 군사 려. 무리 려) : 군대
(해설)
가정이건 사회이건 조직이건 사람과 사람 간에는 지켜야 할 예절과 규율이 있어야 혼란과 이탈을 막고 존중과 질서가 유지된다. 만약에 그러한 것이 없다면 혼란과 무질서로 인한 폐해로 화목하고 평온을 유지하기가 어려우며 늘 분쟁과 다툼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게 되리라. 가정에는 가정대로 장유유서와, 부부유별, 부자유친 등의 지켜져야 할 예가 있고, 조직에는 상명하달의 令(영)이 제대로 지켜져야 엄정하고 질서 있는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잘 낫다고 제멋대로 하고, 똑똑하다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지켜야 할 마지노선을 넘는 권력의 남용과 불의는 개인은 물론 조직의 위상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독소가 된다. 각자의 위치에 맞는 처신을 하여야 하는 권리와 의무가 주어지는데, 그것을 망각하거나 꼼수를 부리거나 궤변을 맹신하거나 자기의 편의와 입장에 맞도록 해석하고 행동하거나 집단행동 등으로 의사표시를 행하는 돌발사태도 몸담고 있는 조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엄정 하여야 할 규율과 질서를 파괴하는 역효과만 초래하기 때문이다. 화목한 가정과 강성한 국가는 그러한 예와 규율이 잘 지켜지며, 신상필벌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다.
禮(예)란 말 그대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도리이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오랜 관습 속에 만들어진 진리이다. 지켜짐으로 서로가 편안하고 서로의 권리가 존중되며 양보와 배려로 끈끈하고 튼튼한 결속력을 자랑하게 된다.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의식과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하여도 보이지 않게 연결된 무형의 고리는 그 무엇으로도 자르거나 깨뜨릴 수 없는 가장 견고하고 질긴 속성을 지니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공고해 지는 특성을 지닌다. 자발적이며 스스로 느끼고 행하는 가운데 쌓여진 내공은 눈빛 하나, 몸짓 하나로도 상대방의 의중과 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억지 춘향 격으로 끌려가지만 용광로에서 모든 것들이 녹아 하나로 융합되듯 어느 순간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존재로 눈부신 탄생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이란 혈연의 정도 그러하지만 그렇게 마음과 몸으로 일체감이 형성된 존재의 강함과 결속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과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한 무한의 파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가진 것이 많아 지켜야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약해진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지킬 것이 많아지는 예절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번거롭고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처럼 입안에서 뱅뱅 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예절이 생겨나고 번거롭고 맞지 않는 예절은 사장된다. 즉 예절도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근본에 깔려있는 철학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 형태와 행하는 방식에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본위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도덕률과 인권사상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살아가며 꼭 지켜야 할 필수 항목만 엄선된 까닭이다.
塞翁之馬(새옹지마)
-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란 뜻.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어느 것이 화가 되고, 어느 것이 복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 -
북쪽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이 기르던 말이 胡地(호지)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오히려 다행스런 결과가 될는지 누가 아느냐고 대답하였다. 과연 몇 달 만에 그 말이 한 필의 駿馬(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 행운을 치하했는데, 노인은 도리어 불행이 될는지 누가 아느냐며 불안해했다. 얼마 후에 노인의 아들이 승마를 즐기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불행을 위문하게 되었는데, 행복이 될는지 누가 아느냐는 것이 노인의 대답이었다. 그런 지 일 년 만에 호인이 침입해와 젊은이들이 싸움터로 불려나가 거의 죽었으나 노인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여서 전쟁에 나가지 않아 죽음을 면했다고 함(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日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禍乎 家富良馬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政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 保 故福之爲禍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 근새상지인 유선술자 마무고망이입호 인개조지 기부왈 차하거불위복호 거수일 기마장호준마이귀 인개하지 기부왈 차하거불위화호 가부양마기자호기 타이절기비 인개조지 기부왈 차하거불위복호 거일년 호인대입새 정장자인현이전 근새지인 사자십구 차독이파지고 부자 보 고복지위화 화불가극 심불가측야).(출전 淮南子 人間訓)
原典(원전)은 원나라 승려 熙晦機(희회기)의 시에 나옴(人間萬事塞翁馬 推枕軒中聽雨眠 : 인간만사새옹마 추침헌중청우면 - 인간만사는 새옹의 말과 같다. 추침헌 가운데에서 빗소리 들으며 누워 있다.)
※ 駿(준마 준), 遽(갑자기 거), 墮(떨어질 타), 髀(넙적다리 비), 弦(활시위 현), 跛(절뚝발이 파), 晦(그믐 회), 軒(추녀 헌).
秋風辭(추풍사) - 漢武帝(한무제) -
“上이 行幸河東하야 祠后土하고 顧視帝京欣然하야 中流에 與群臣飮燕할세 上이 歡甚하여 乃自作秋風辭하니 曰 秋風起兮여 白雲飛하니 草木黃落兮여 鴈南歸로다 蘭有秀兮여 菊有芳하니 懷佳人兮여 不能忘이로다 泛樓船兮여 濟汾河하니 橫中流兮여 揚素波로다 簫鼓鳴兮여 發棹歌하니 歡樂極兮여 哀情多로다 少壯幾時兮여 柰老何오 : 상 행행하동 사후토 고시제경흔연 중류 여군신음연 상 환심 내자작추풍사 왈 추풍기혜 백운비 초목황낙혜 안남귀 난유수혜 국유방 회가인혜 불능망 범누선혜 제분하 횡중류혜 양소파 소고명혜 발도가 환락극혜 애정다 소장기시혜 내노하.”
- 임금께서 하동에 납시어 토지신에 제사 지내고 長安(장안)을 돌아보며 기뻐하여 江(강)의 중간쯤에서 군신들과 더불어 주연을 벌렸다. 임금께서 기쁨이 넘쳐 곧 추풍사를 自作(자작)하여 이르기를 가을바람이 일어남이여 흰 구름이 날리니 초목이 누렇게 떨어짐이여 기러기가 남쪽으로 돌아가는구나. 난초에 빼어난 꽃이 있음이여 국화에 꽃다움이 있으니 아름다운 사람 생각함을 잊을 수가 없도다. 다락배를 띄움이여 汾河(분하)를 건너니 강물 가운데 흰 물결을 날리도다. 피리소리 북소리 울림이여 뱃노래를 부르니 기쁨과 즐거움이 극진하여 슬픈 생각이 많도다. 젊음이 얼마이겠는가? 늙는 것을 어찌 하리오! (출전 古文眞寶)
※ 鴈(기러기 안), 芳(꽃다울 방), 汾(클 분), 揚(오를 양), 簫(퉁소 소), 棹(노 도).
17-2. 子曰 君子가 有勇而無禮면 爲亂하고 小人이 有勇而無禮면 爲盜니라
(자왈 군자 유용이무례 위란 소인 유용이무례 위도)
공자가 말씀하시길 “군자가 용맹만 있고 예가 없으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소인이 용맹만 있고 예가 없으면 도둑이 되다.”고 하였다.
⋇ 爲亂(위란) : 세상을 어지럽게 함. 반란을 일으킴.
(해설)
예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본분이다. 이를 모른다면 禽獸(금수)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어린아이도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사람을 따른다. 사람이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지녔기에 호불호와 선악의 구별, 그리고 행복과 불행을 감지하는 능력을 지니며 판단할 줄 아는 한편, 반대로 그것을 남용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철저하게 이용하는 사람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 경계선이 모호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반인들이 판단하는 상식의 한계를 벗어나면 무언가 확실하지는 않아도 잘못된 행동이요, 예의도 과하면 非禮(비례)가 되듯이 부족해서도, 넘쳐서도 안 되는 것이다. 자유와 방종과의 차이점처럼 엄정한 가치와 구속력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반복적인 훈련과 교육을 통하여 몸에 배이도록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되는 것이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기본에 충실 하라, 스포츠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필수불가결하며 누구나 지켜야할 보편타당성을 지닌 규범이면서 법적인 구속도 받지 않는 예의가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인간적인 성숙과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하기 때문이며, 또한 가장 기본인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어찌 더 큰 일을 제대로 수행해 낼 것이냐는 우려와 걱정스러운 시각이 담겨지기에(다른 시각으로는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호의적이기 보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그 범위가 넓어지기에 더하며, 파괴력이 강할수록 그 후유증은 오래 지속된다. 속이 꽉 들어차지도 않은 채 포장만 그럴 듯하게 하여 세상을 미혹시킨 사례를 역사 속에서 많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선택하였기에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고 희생물로서의 가치만 부여할 뿐 이었다. 명분도 없고, 비전도 없이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한다는 유희 같은 장단에 놀아나게 되는 한판의 드라마 같은 예가 부지기수로 많았음을 익히 알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상이 뒤숭숭해 지면 고개를 드는 邪敎(사교)를 들 수 있겠다.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교묘한 주술과 같은 교리와 현란하고 미혹에 빠뜨리는 장면과 분위기를 조성하며, 모든 행위에 전원 참석하는 유대감으로 얽매이게 만들어 이탈하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는 등으로 세를 불린다.
“소인이 용맹만 있고 예가 없으면 도둑이 된다.” 사리분별의 능력과 시시각각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감정의 조절을 못하기 때문이다. 수치와 잘못, 용기와 만용의 몰이해, 분노건 염치건 자신이 하면 정의와 용기로 착각하는 심각한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 성난 황소와 같이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는 무모함을 보이게 된다. 브레이크 없는 전차라 했던가, 혈기 방장한 젊은 시절에 잘못하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다.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 오십 걸음과 백 걸음이란 뜻으로 조금 차이는 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
王道政治(왕도정치)를 주장하던 孟子(맹자)는 魏(위)나라 惠王(혜왕)이 이웃 나라보다 자기 백성이 늘지 않는다며 고견을 묻자, “왕이 전투를 좋아하시니 전투를 가지고 비유하겠습니다(王好戰 請以戰喩 : 왕호전 청이전유). 북을 쳐서 병기와 칼날이 이미 맞붙었거든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며 패주하되(塡然鼓之 兵刃旣接 棄甲曳兵而走 : 전연고지 병인기접 기갑예병이주) 100보쯤 도망가다 멈추었고, 또 한 병졸은 50보쯤 도망가다 멈추어서는 100보 도망간 자를 보며 비웃었습니다. 어떻습니까?(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 笑百步 則如何? : 혹백보이후지 혹오십보이후지 이오십보 소백보 즉여하?). 불가하니, 50보나 100보나 도망친 것에는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 : 불가 직불백보이 시역주야). 왕께서 이를 아신다면 백성들이 이웃나라보다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소서(王如知此 則無望民之多於隣國也 : 왕여지차 즉무망민지다어린국야).”라고 말하였다고 함. (출전 孟子) ※ 塡(메울, 채울 전) 여기서는 북소리, 曳(끌 예).
微服(미복)
세종대왕은 경복궁 경희루 인근에 3칸짜리 누추한 초가집을 짓게 하여 백성이 괴로운 일을 당할 때마다 이 초가집에 거처함으로써 고통을 공감하였다. 이를테면 날이 몹시 가문다든지 장마가 길어진다든지 어느 고을 백성들이 홍수로 집을 떠내려 보내고 노숙을 한다든지 하면 寢殿(침전)을 피해 이 대궐 속의 오두막살이를 했던 것이다. 언젠가 비가 쏟아져 그 오두막살이 집을 드나들기에 땅이 너무 질었던 것 같다. 시종들이 임금이 나아가는 길에 氈布(전포)를 깔았던 것이다. 임금님은 여염집에 무슨 전포를 깔더란 말이냐고 호통 쳐 거두게 하고 대신 짚을 깔고 걸었다 한다. ※ 氈(모전 전).
이렇게 백성의 고통을 더불어 느끼고, 또 민심을 손수 살피며 원망을 직접 듣는 방편으로 微服(미복)이라는 게 있다. 곧 신분을 숨기고자 여염의 백성처럼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며 민정-민심을 살펴 수렴하는 정치방편이다.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치는 堯(요)나라의 요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린 정치수단이 바로 微服(미복)정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복정치로 盛代(성대)를 이룬 분은 成宗(성종)이다. 해진 갓을 쓴 老先生(노선생) 행색을 하고 泮宮(반궁=成均館)에 찾아 들어 조정에 대한 서생들의 숨김없는 비판 듣기를 곧 잘하였다. 밤에 미복을 하고 골목길을 거니는데 어떤 사람이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베어 자기 집 문 앞에 옮겨 세우는 것을 보았다.
수십 년 동안 과거에 낙방한 한 서생이 까치가 집 앞 나무에 집을 지으면 급제한다기에 궁여지책으로 하는 짓임을 알았다. 이것저것 살펴보니 그동안 시험관들이 급제를 두고 부패했음을 알고 정화를 하는 한편 이 노서생에게 급제의 길을 터주었던 것이다.
미복할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로지 몸종 하나만을 데리고 민정을 살폈음은 물론이다. 비단 임금뿐 아니라 黃喜(황희), 孟思誠(맹사성), 許稠(허조) 같은 이름난 재상들의 미복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미복한 황희정승은 성균관 서생들이 자신을 욕한 것을 듣고 함께 스스로를 욕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보탬도 꾸밈도 없는 진정한 民情(민정)이나 民怨민원)은 철저히 미복에서 살펴지고, 또 들을 수 있는 법이다. ※ 泮(학교 반).
한데 요즈음 장관들은 관계부하들을 줄줄이 이끌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보도되게끔 미리 손을 써놓고서 시장에 가 물가를 물어보고, 산에 가 쓰레기를 주우며, 만원버스나 만원전철을 타는 등의 남보라는 행사로 일관시키고 있다. 명분은 미복정치를 따른 건데 실제로는 “…척”하는 전시효과만을 노리는데 예외가 없다.
비천한 옷차림으로 숨어 다님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 미복이다. 미복이 아무도 몰라야 하는 것이 생명이다. 이제 展示(전시)정치에는 식상해 있다. 아름답던 미복정신을 오염시키는 그런 전시행위는 이제 그만들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규태 코너 1991년)
자료출처-http://cafe.daum.net/sungho52
박광순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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