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북공정 핵심은 간도?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고구려 빼앗기'로 축소해서 생각하지 말라. 중국이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하는 '동북아전략기획서'다."
국내 전문가가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동북공정의 본질이다. 이는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www.chinaborderland.com)에 실려 있는 동북공정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북지구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로 중대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부 국가의 연구자와 기관'이 역사 사실을 왜곡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잘못된 이론을 선전하고 혼란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동북변경에 대한 연구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일부 국가들의 연구자와 기관'은 남북한을 지칭한다. 동북공정의 주요 작업은 ▲고대중국영토연구 ▲동북지방사연구 ▲동북민족사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연구 ▲중-조(中-朝)관계사연구 ▲중국 동북변경 및 러 시아 원동지구의 정치-경제 관계사연구 ▲동북변경의 사회안전전략연구 ▲조선반도 형세 변화 및 이의 동북 지역 안정에 미치는 영향연구 등이다. 한마디로 동북 지역에 대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고구려 전문가인 김용만씨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고구려 역사가 아니다. 고구려사는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라며 "중국은 남북통일 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동북공정은 한민족의 동북 지방 유입 역사와 현황에 주목한다. 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조선반도 형세 변화의 동북 지역 안정에 대한 충격'이라는 문건은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는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에 큰 충격파를 줄 수 있다"며 "연구의 주안점은 첫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조선반도의 동란과 난민들의 동향, 둘째 현재 길림성 중-조 국경의 현황"이라고 명시했다.
한민족 간도 유입역사 중점 연구
19세기 후반과 일제 시대를 거치며 많은 조선 사람이 만주에 들어갔고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한반도 유사시 또다시 많은 북한 난민이 동북 지역으로 들어오고 이 지역이 '한민족 근거지화'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한 국내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 동북 지역에 조선족이 1백만 명 이상, 탈북자가 수십만 명이 있다.
만약 남한 주도로 남북통일이 이뤄지면 북한 공산당 및 군부의 강경 세력들은 '무기'를 들고 동북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2003년 중국이 조-중 국경지대의 수비병력을 인민해방군 15만 명으로 교체한 것도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은 일제 시대 때 만주가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던 것처럼 남북통일 뒤 이 지역이 한민족의 또다른 근거지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일부 전문가는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함으로써, 유사시 북한 지역에 대한 연고권까지 내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근본적 동기를 알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 은 "중국 역사를 보면 소수민족이 한족(漢族)을 지배한 역사가 3분의 1이 넘는다"며 "이 때문에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5호16국-요-금-원-청 등 북방 이민족이 끊임없이 한족을 지배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중원을 공격했을 때 그들의 인구는 3백만 명에 병사 수는 16만~20만 명에 불과했다. 당시 한족의 인구는 1억5천만 명(1850년대는 4억3천만 명) 정도였다. 3백만 명의 만주족이 100배가 넘는 한족을 267년간이나 지배했다.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중국 정부
[중국정부백서]에 의하면 1995년 중국 전체 인구는 12억7백78만 명이다. 이 가운데 55개 소수민족은 1억8백46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8.98%다. 1998년 현재 자치구-자치주 등 155개의 중국 소수민족 자치 지역이 중국 전체 면적 9백60만㎢의 64%에 이른다.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소수민족의 집중 거주 지역이 중국 면적의 3분의 2나 된다.
역사상 이들 지역을 한족 왕조가 확실하게 장악한 적은 없다. 중국 서부 신쟝위구르 자치구만 해도 1755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준가리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중국 영역에 들어왔다. 티베트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만주로 알려진 요녕-길림-흑룡강의 동북 3성도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하면서 현재의 중국 영역에 들어갔다. 만주족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고 한족에 왕조가 멸망당한 뒤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1860년대까지 만주 지역에 한족들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령(封禁令)'을 내렸다.
1812년 동북 3성의 인구는 1백70만 명이었다. 30년 뒤에는 3백만 명, 봉금정책이 풀린 1897년에도 7백만 명에 불과했다. 1997년에는 1억6백97만 명으로 100년간 1억 명이 늘었다. 그동안 한족이 많이 이주했고 이들의 출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즉 만주 지역이 한족들의 확실한 거주지가 된 것은 100년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은 2백만 명의 인구로 중국 밖에 모국이 있고 어느 정도 국력이 있다. 중국 정부는 이를 대단히 두려워한다.
중국 정부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운다. 중국은 한족을 비롯한 56개 민족이 있지만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족을 중심으로 한 다수민족이 '통일'(大一統)을 견지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시각과 함께한다. 그들에게는 청나라-원나라 등 이민족이 세운 나라도 모두 '중화민족 왕조'이다. 칭기즈칸도 '중화민족'이다.
그러나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한 실례로 근대 중국을 연 1911년의 '신해혁명'만 해도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흥하게 한다'는 한족의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결국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위구르족-티베트족-몽골족-조선족-대만 등의 독립을 막으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간도 문제로만 가도 중국 정부는 대단히 곤혹스럽다. 간도는 1909년 일제가 간도협약을 통해 만주철도부설권-푸쉰 채광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 넘겼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당사자인 대한제국이 배제된 채 맺어졌다. 따라서 통일 한국이 간도협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다시 영토획정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김태경〈오마이뉴스 국제부 기자〉gauzari@ohmynews.com
"청산리 큰 바위 밑에 내 유품이 있으니 광복하면 반드시 찾아오라."
간도관리사로 우리 영토와 간도 이주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간도협약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의병장 이범윤. 그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며 남긴 유언이다. 〈뉴스메이커〉는 이범윤의 후손을 만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범윤의 행적을 취재했다.
아직도 일부 백과사전에는 이범윤의 사망연대가 미상으로 기록돼 있다. 사망한 장소 또한 명확지 않다. 서울 동작 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이범윤의 묘비에도 '노령신한촌에서 영면'이라고 적혀 있다. 이범윤이 국내에서 사망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하다는 원칙적인 반박이 있을 뿐이다.
이범윤의 손녀 이규순씨(71)는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것이 또렷하다"며 "1938년 만주에서 온 독립투사와 함께 아버님(이억종. 1958년 사망)이 직접 가서 할아버님을 모셔왔다"고 기억한다. 돌아올 당시 이범윤은 노환이 깊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정신도 맑지 못했다. 다만 가끔 정신이 돌아올 때면 "청산리에 전투가 많았는데 내 손으로 제일 처음 (고지를) 정복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범윤이 간도에 처음 발을 딛게 된 것은 1902년 5월 22일 고종황제에게서 '간도시찰사'의 명을 받고서다. 그해 6월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은 1년간 조선인 인구 등을 조사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범윤은 1만3천여명의 호적부를 작성해 52책에 담은 뒤, 양국 지도에 기재된 부분을 채집하여 〈북여요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를 정부에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 양태진 소장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북간도 지역 호적부 등의 원본은 이범윤이 훗날 항일무장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남아 있을 개연성이 크다"고 추측했다. 1997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국립극동문서보관소에서 이범윤의 편지와 유품 등을 발굴한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는 "이범윤의 간도관리사 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청 위협으로부터 조선인 보호
1903년 이범윤은 '간도시찰사'에서 '간도관리사'로 직무를 바꾸게 된다. 간도지역을 우리 영토로 인식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고종황제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에 임명하면서 권능을 상징하는 유척과 마패를 함께 내렸다. 이후 시찰활동에 전념하던 이범윤은 청나라 관리들의 폭정에 맞설 수 있게 교민보호관을 설치하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한다. 하지만 이는 묵살당했고 이범윤은 스스로 장정들을 모집해 충의군을 꾸린다. 이런 점에서 간도 연구가 김득황 박사는 "스스로 '사포대'로 불린 충의군까지 조직해 청나라의 위협에서 간도 주민을 보호한 의인"으로 그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한다. 청나라와 벌인 감계담판에서 목숨을 걸고 영토를 지켜낸 이가 이중하라면, 간도 거주민의 안위를 직접 챙긴 인물이 간도관리사 이범윤이라는 설명이다.
[북여요람] 원본 보관 됐을지도...
1905년 계속되는 청나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정부는 이범윤에게 소환명령을 내린다. 간도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범윤은 이에 불복하고 국외망명을 결심한다. 스스로 조직한 충의군 '사포대'를 이끌고 두만강 건너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이범윤은 이동휘 등과 국내진입을 계획하는가 하면 대한의군부를 조직해 청산리대첩에도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이범윤은 이 시기에도 고종황제가 하사한 마패를 사용하며 간도관리사로서 위엄을 갖췄다. 이범윤의 손자 이규대씨(59)는 "할아버님이 사용하던 마패와 유품을 청산리 바위 밑에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했다. 선문대학교 정제우 초빙교수는 "유품을 청산리에 묻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며 "그렇다면 그 시점은 국권을 잃어버 린 1910년 전후가 아니면, 1925년 간도지역에서 신민회 창립에 관여하던 시기일 것이다"고 말했다. 신민회 참의원 원장에 선임되지만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했고 이때 이범윤의 나이가 70세에 이르렀기 때문에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북여요람〉의 원본도 같이 보관했을지 모른다.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은 예전에 이범윤의 측근이던 김홍일 장군에게서 "이범윤 선생은 항상 등에 큰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녔는데 귀한 것이라며 절대 내려놓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아마도 호적보나 지적보 아닐까 한다"는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고국에 돌아올 때는 빈손이었으니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당시 청산리에 함께 보관하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이다.
1940년 10월 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39번지에서, 이범윤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일본 형사들의 감시 탓에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장례는 조용히 치렀다. 민족을 위해 일생을 투신한 애국지사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1968년 이범윤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하지만 이는 허묘다. 이범윤의 유해는 장례를 치르고 화장됐으며 자손들도 수습된 곳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선산이 있는데도 화장을 하게 된 것은 당시 생활이 어려워 상여를 꾸밀 여유도 없었지만 독립운동가라는 게 알려지면 자손들에게 그 화가 미칠까 걱정했기 때문 아니겠느냐"며 이규대씨는 말끝을 흐렸다. 이범윤은 해방된 강토에도 편히 쉴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
6척 장신에 기골장대했던 이범윤
아직까지 이범윤의 사진은 발견된 것이 없다. 아마도 만주와 연해주 곳곳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했고 유품도 청산리 어느 곳엔가 묻어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범윤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규순씨는 "할아버님은 고령에도 눈썹이 짙고 검었는데 흰눈썹이 양쪽에 하나씩 길게 났고, 양미간 약간 위쪽에 새끼손톱만한 사마귀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규대씨는 "6척 장신에 기골이 장대했으며, 간도에서 산삼을 드신 후에 눈이 붉어져 '홍안장군'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이범윤이 간도관리사로 있을 때 청나라 관헌들은 그를 맹호 이상으로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범윤이 귀국한 뒤 그의 가족은 숨소리도 못내고 살았다. 일본 형사들이 집 주변을 항상 감시했다. 그들은 가끔 집 밖에 나온 어린 규순씨를 붙잡고 이것저것 추궁도 했다. 어리지만 분별이 있던 그녀는 한번도 할아버지의 일을 말한 적이 없고, 그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이범윤은 죽을 때까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국내에서 지낼 수 있었다.
당시 이범윤의 가족과 후손은 미곡상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이규순씨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아버님을 불러 유공자로 대우하겠다고 제의했으나, 할아버지를 팔아 살지는 않겠다며 거절한 일도 있다고 했다. 이규대씨는 "국가에서 학비를 면제해주지 않았으면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할 정도"였다고 회상하며 "할아버님 영향으로 큰형은 한국전쟁 때 군에 들어가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국가에 봉사했고, 나도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대령으로 예편했다"고 했다.
[간도를 되찾자]중국 1870년대 이후 이주 집중 연구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조선인은 언제부터 간도 지역에서 살았는가."
이는 간도 문제의 논란 중 매우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것이다. 조선인 이주와 관련해 중국 조선족 학자들은 중국에 거주하는 박씨 성의 연원을 검토하여 고구려 시기까지 소급하기도 한다. 철령 이씨의 14세기 이주설도 있고 명-청 시기 전후로 조선인이 이주했다는 15~17세기 초엽 이주설과 근대 이주설 등이 있다.
중국의 '의도'가 있는 연구
그러나 중국인이 하는 연구는 대체로 1870년대 이전 간도 지역에서의 조선인 활동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1870년대 특히 1880년대 이후 조선 정부의 과중한 세금, 조선의 기근과 생활 곤란 등으로 인해 조선인이 대량으로 불법 '월경'하여 동북 지역에 토지를 개간한 점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중국이 실시했던 사회 조사와 역사문헌에는 1845년부터 시작하여 점차 이주한 조선인이 현재 조선족으로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모순을 드러냈다. 그러나 1831년 임강 부근 모아산 북방지구에 조선 사람이 이주한 기록이 있다. 1845년 및 1849년에 이주한 조선인은 고려문-고려성-조선보자(朝鮮堡子) 등의 마을을 형성하였고 1850년대에 두만강 이북 해란강 유역과 혼춘 일대 조선인이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는 등의 기록은 수없이 많다. 단순히 1800년대의 근대 이주만 보더라도 조선인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온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주가 먼저 있고, 이주한 사람이 많아진 후에 역사에 기록되는 것으로 판단해본다면 조선인의 동북 지역 개간 및 이주는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 이주를 조선에서 중국 동북 지역으로의 이주로만 보는 시각은 분명히 문제가 있으며 근대 이주를 1870∼80년대부터라고 한정하는 것도 문제다. 조선인은 동북 지역과 조선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면서 역사를 형성하고 계승하였던 것이지 단지 조선에만 있다가 중국으로 이주해간 것이 아니다. 고대사로부터 역사의 맥을 따져본다면 동북 지역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럼에도 논의의 초점을 근대에 한정하여 조선에서 중국으로 불법 이주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이래 동북 지역에 조선인이 거주한 것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추론하면, 조선인은 오래 전부터 동북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거주하였고 청조가 봉금령을 내렸을 때 이주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인 듯하지만 그때도 이주-개간-정착은 부단히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인의 근대 이주 시기를 1870년 전후로 규정하는 중국의 시각은 한편으로는 '의도'가 있는 연구 결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족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조선인의 근대 이주에 치중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09년 조선과 중국 간에 명확한 국경선이 형성되기 이전 상황에 영토 주권 문제는 누가 거주하였고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므로 한-중 양국의 조선인 이주시기 논란은 종식되지 않고 있다.
박선영〈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
[간도를 되찾자]연길 지역을 간도로 해석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간도문제'는 간도가 도대체 어디냐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할 정도로 간도의 위치와 범위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중국에서 간도라 할 때는 남만주(南滿洲) 지역을 광범위하게 말할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한국과 '자연적인 변경'인 두만강을 강조하여 두만강 북안(北岸) 일대 혹은 구체적으로 연길(延吉)지역을 일컫는다. 아무리 축소해서 해석해도 간도 지역은 광활하다. 전략적 중요성 또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를 중국도 인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중국의 쾅시민(匡熙民)은 〈연길청 영토문제의 해결〉(1909년)에서 중국이
잃어버린 땅을 연길 지역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쾅시민은 "중국은 29평방리(平方里-평방단위)의 홍콩을 잃어 광동(廣東)이 위기에 처하였고, 200방리의 교주만(膠州灣)을 잃어 산동(山東)이 위기에 처하였으며, 10평방리의 위해위 (威海衛)를 잃어 산동(山東)과 직예(直隸)가 위기에 처하였고, 동서로 약 100리 땅인 대련과 여순을 잃어 심양과 직예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길은 이러한 곳보다 1,000여 배가 더 크며 전략상으로도 다른 여러 곳에 비해 더욱 중요한데 어떻게 이런 지역을 상실할 수 있는가"라면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국에서 말하는 광의의 간도는 광활한 중국 동북지역, 소위 만주를 지칭한다. 압록강과 두만강너머 조선-청 간의 중립지대(봉금지대)로 마치 주인 없는 섬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간도를 서간도와 동간도로 나누기도 하는데 동-서간도의 범주에 대해 합일된 견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서간도는 압록강 대안과 송화강 상류 지방인 백두산 일대를 가리킨다. 동간도는 두만강 건너 노야령 산맥과 흑산령 산맥 안의 포이합통하, 해란하, 알야하 유역의 분지를 지칭하며 더 넓게는 그 서쪽의 송화강 동쪽으로 혼동강(混東江)과 목단령(牧丹嶺) 산맥 사이를 말한다. 동간도 동부 지역을 일명 북간도라고도 하였다.
간도의 범주는 시대에 따라 인식을 달리하는데 최남선은 백두산정계비 등을 돌아보고 저술한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중국의 위압적인 자세와 우리의 퇴영( )하는 자세가 어느새 압록강 지역을 관습상의 국경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 내용에 의해 압록강을 조-청의 서쪽 경계로 삼기로 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만강 일대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백두산정계비에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는데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인지 여부가 논쟁의 초점이 되기 때문이다. 협의의 간도는 송화강 일대를 의미한다. 20세기 초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은 토문강 아래와 두만강 이서 지역을 간도라고 칭하였다.
한국은 중국 동북지역을 지칭
역사적으로 간도의 범주에 대해 한국과 중국 간에 인식 차이가 분명하지만 현재 소위 간도문제로 인식되는 간도는 연변 일대로 한정되어 있다. 그 이유는 간도문제가 중국과 일본의 간도협약(1909년)으로 일단락되었고 간도협약 당시 간도는 연길-화룡-왕청-혼춘현과 안도현 일부를 포함한 연변 일대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청의 국경문제라고 볼 수 있는 간도의 범주는 시간의 흐름, 인식의 차이 또 국가 권력의 강약에 따라 결국 연변 일대로 한정되었다. 우리는 간도가 왜 연변지역으로 한정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변화상과 그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선영〈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
[간도를 되찾자]산-강 이름 우리 말 많아 친숙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새벽 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다보면은 고국이 천리런가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북방 정서를 노래한 파인 김동환의 '송화강의 뱃노래' 앞부분이다. 송화강은 우리 민족의 강이다. 동명왕 신화에 나오는 하천의 신 하백이, 해모수와 통정한 딸 유하를 버린 청하가 이 강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드넓은 만주땅 굽이굽이 1,972㎞를 흘러 흑룡강(러시아 지명 아무르강)과 합류한다.
송화강은 한족식 한자 지명 같지만 천하(天河)라는 뜻을 가진 여진말 '송알라울라'를 한자로 음역, 훈역한 것이다.
송알라는 송화로 음역, 울라는 강으로 훈역됐다. 1654년에 만주에 침입한 러시아 차르군을 물리치기 위해 만주로 갔던 조선군의 한 장령은 송가라(宋加羅)라고 적었다. 물론 이 말들의 뿌리는 고구려어와 발해어에 있다.
용정과 해란강 이름을 우리 동포들이 지은 것에 비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의 지명에는 중국 냄새가 강하다. 청나라 조정이 봉금지역으로 비워두었던 간도를 다시 장악하기 위한 통치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청나라 사람들은 연집강(烟集崗), 연길강(烟吉崗)이라 불렀다. 그러나 여기도 지타소(芝陀所), 지단성(芝丹城), 국자가(局子街)라는 우리말 지명이 있었다. 지타소와 지단성은 송화강처럼 고대어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연길을 관통해 흐르는 큰 강을 푸르하통하(布爾合通河)라고 부르는데 버드나무가 무성하다는 뜻의 여진말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화룡(和龍)은 용정에서 백두산이나 청산리 대첩지로 갈 때 거쳐 가는 지역이다. 화룡은 지형이 용이 어우러진 형상이라 하여 근세에 우리 유민들이 지은 것이다. 화룡지방은 마을, 작은 산, 시내, 언덕 이름이 거의 우리식이다.
두만강의 중국식 지명 도문(圖們)은 숫자 만(萬)을 뜻하는 여진말 '투먼'과, 강의 원류를 뜻하는 '써친'을 훈역한 것이다. 우리식 지명 두만강도 어원이 같을 것으로 보인다. 즉 '만물의 근원'을 나타내는 고대어가 그렇게 훈역된 것으로 짐작한다.
이렇게 간도의 지명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 곳을 여행할 때 낯설지 않은 이유에는 산천경계가 비슷하고 우리 동포가 많이 산다는 것도 있지만 지명이 주는 익숙함도 큰 몫을 차지한다.
큰 지명은 대개 여진말에 어원을 두고 있지만 마을, 산, 강, 언덕, 둑 등의 이름에는 우리말이 많다. 이런 세부 지명은 근세의 선착민이 만든 것일 테니 그 곳 주인이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간도를 되찾자]서간도 지역도 우리 땅이었다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집안현 일대가 구한말까지 우리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돼 있었다."
광무 6년(1902년, 고종 39년) 조사된 변계호적안(邊界戶籍案)을 보면 중앙 정부의 힘이 어떻게 서간도에 미치고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변계호적안이 작성된 지역은 모아산면-간도면-신별면 등의 8개 면으로 당시 이 지역에 정착한 이주민의 본래 고향과 연령분포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호적안에 나오는 지명을 당시 중국 명칭과 대조해서 지도에 표시를 해보면, 조사가 이뤄진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서간도 일대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표시한 국경선은 청나라 강희제가 프랑스 측량전문가인 레지에게 지시해 만든 지도의 이른바 '레지선'과 거의 일치한다. 서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청나라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 변계호적안의 작성자는 '관리변민사무 서상무'이다. 서상무는 1897년 서변계관리사로 임명돼 서간도 일대에 파견되기도 했다.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이 호적안이 궁내부의 관할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부가 서간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에는 1902년 (정부에서 서간도) 관내에 향약을 설치하고 의정부 참찬 이용태를 향약장에, 서상무를 부향약장에 임명하여 사무를 관장케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서간도 지역의 주민을 관장하기 위한 관리를 중앙에서 직접 파견함으로써 실제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레지선과 거의 일치 '주목'
서간도를 우리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는 실마리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사 지역의 단위가 우리나라 고유의 행정구역인 '면(面)'으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국제대학원 최장근 박사는 "보통 중국은 '현(縣)'이란 고유의 행정구역을 사용하는데 이를 면으로 표기한 것은 이 지역이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청나라의 주장과 관계없이 우리나라의 영토가 서간도에까지 이르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번계호적안의 영인본을 출간한 양태진 박사도 서문에서 이 책을 "무엇보다 국제법상 영유권 분쟁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변계호적안은 일부만 발견됐기 때문에 서간도 전체의 상황을 가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보다 1년 후인 1903년 5월, 유지시찰단으로 압록강 대안지역을 조사한 양지달과 김상흡 등이 남긴 호적조사의 기록을 보면 서간 도 일대의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간도 지역에는 모두 32개의 면이 편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집안현 일대에는 대황면-구룡면-신상면 등 모두 7개의 면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고구려의 옛 영토와 역사적으로 멀어진 것이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우리 고유 명칭 '면(面)'으로 표기
그럼에도 서간도 지역이 영토분쟁에 있어서 거론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천대학교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서간도를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려면 우선 백두산 정계비와 그에 따른 국경획정의 효력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질 당시의 정황을 보면 합법적인 국제협약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국제협약은 양 당사국의 완전 합의를 통해 성립되는데, 청나라가 정계비의 위치와 비문의 내용을 임의로 정한 점 등은 합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후에도 서간도가 우리의 실질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점도 당시의 국경인식이 정계비의 효력 자체를 부정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간도 연구가 이일걸 박사는 "강희제의 명을 받아 레지가 지도를 완성한 것은 1718년으로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의 일이지만, 실제 만주지역의 측량을 하던 때는 1708년 무렵이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의도적으로 서간도 지역을 배제하기 위한 모종의 작업을 했을 정황은 충분하다"며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백두산 정계비를 통한 국경선 획정 때 의도적으로 서간도를 빼기 위한 사전작업이 미리 진행됐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다.
청은 1677년 강희제의 명을 받은 무묵눌이 백두산을 답사한 것을 비롯해 1684년과 1710년 등 모두 세차례 백두산 일대를 탐사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움직임들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서간도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 대한제국이 백두산 정계비를 국경 획정의 유일한 근거로 여겼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1909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협약이 맺어지면서 서간도에 대한 대한제국의 영향력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
[간도를 되찾자]간도는 조선 의도가 담긴 지명?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중국에서는 간도라는 지명은 조선과 일본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든 명칭이라고 보아 이를 사용하지 않고 주로 연길이라고 한다. 따라서 간도의 유래도 창작설 내지는 날조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 생각하는 간도의 유래는 첫째, 1903년 간도 관리사로 파견됐던 이범윤이 만들었다는 설이다. 길림 지역 연길, 화룡현 일대에 조선인이 월경하면서 그 지역을 간토(墾土)라고 했는데 1881년 조선인들이 함경도 종성 북쪽 두만강의 섬을 개간한 후 간도(間島)라고 했다. 간도와 간토는 발음이 비슷해 점차 간도로 불리게 됐다. 이범윤은 가강(假江)-강통(江通)이라 부르던 것을 간도라고 보고했다. 중국에서는 이 지방을 연길(延吉)이라고 하는데 연기 같 은 것이 항상 끼어 있다 해서 연집강이라고 불리다가 연길로 변한 것으로 봤다.
둘째, 일본인 날조설이다. 이 지역은 자연조건-지형-지리-정치변화로 인해 일찍이 간도(墾島)-강동(江東)-간동(干東)-북간도(北間島)-간도성(間島省) 등으로 불렸다.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두만강 대안 지역과 그 북쪽을 간도라 부르면서 간도 명칭이 공식화됐다고 이해했다.
셋째, 조선인 창작설이다. 대만 중앙연구원의 장촌우(張存武)는, 1877년 지방관이 종성과 온성 사이 두만강 가운데 땅을 개간토록 허용해 간도라 불렀는데, 후에 종성-회령-무산-온성 4읍의 백성들이 간도 이북지역으로 개간해 나가면서 그 부근 지역을 전부 간도라 불렀다고 했다. 이는 조선인이 해란강(海蘭河) 혹은 포이합도하(布爾哈圖河)를 토문강 혹은 분계강으로 이해해 간도설이 나왔으나 이것은 단지 전설에 속할 뿐이라고 했다.
중국인들 일본인 날조설 주장도
그러나 한국에서 이해하는 간도는 중국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역사적인 의미가 훨씬 크다. 한국에서는 간도를 '墾島' '艮土' '閑土' '間島' 등으로 불렀다. 간도라는 명칭은 1388년 명조가 동북 지방을 평정한 후 동만주 지방에 눌간도사를 설치해 그 산하에 여러 위(衛)를 두고 다스린 데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지만 대체로 다음 설이 유력하다.
첫째, 언어학적으로 신주(神州) 또는 신향(神鄕)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감터에서 연유한다. 고구려 수도였던 환도(丸都)도 이런 뜻과 관련이 깊다. 둘째, 조선 태조의 고조부 목조가 원으로부터 벼슬을 받아 다스리던 두만강 북쪽지역 알동(斡東)에서 간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셋째, 1885년감계사 이중하의 보고에 의하면, 간도 또는 간토라는 것은 샛섬 또는 샛땅이라는 뜻으로 두만강 중간에 있는 섬을 그렇게 불렀으나 온성-경원-경흥 대안지역도 간도라 불러 이 지역 전체를 간도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넷째, 간도 또는 간토라는 말은 개간한 땅이라는 뜻으로 써왔고 간도(艮島)라는 말은 축인(丑寅) 방향에 있는 땅, 즉 동북지방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섯째, 조선사람 손으로 개간했기 때문에 간도(墾島)라 하며 또 한국 영토에서 가장 북쪽에 있다고 해서 간토(艮土)-곤토(坤土)라고 표현했다.
박선영〈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
간도를 되찾자]백두산 일대가 우리 땅인 까닭
장지연은 [대한강역고]에서 백두산의 다른 명칭 불함-태백-개마-종태-백산-장백-가이민상견 등을 소개했다. 우리는 지금 백두산을 공식지명으로 쓰지만, 중세 이전에는 태백산이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강림해 신시를 열었다'고 했다.
중국의 공식지명은 장백산이다. 여진말 '궤리만(長) 싸엔(白) 아린(山)'을 훈차했다. 지난날 고구려와 발해인들이 불러왔던 명칭을 물려받은 것이다. 단군신화의 태백산도 '가이민(太) 상견(白) 아린(山)'이라는 여진말로 계승되었다.
백두산은 주몽신화와 누루하치신화 속의 장소가 될 만큼 신비로운 영산(靈山)이다. 공교롭게도 두 신화는 비슷한 이 야기를 담고 있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채색 구름에 싸여 지상으로 내려왔다. 성 북쪽에 청하(淸河)가 있고 그곳에 하백(河白)의 딸 유화-훤화-위화가 있었는데, 해모수는 유화와 통정하고는 결혼하겠다고 하백에게 간청하였다.
하백은 그에게 신변력이 있음을 확인하고 술을 권했다. 그가 술에 취하자 그와 유화를 함께 가죽가마에 넣어 하늘로 올리려고 했다. 술에서 깬 해모수는 놀라 혼자 승천해버렸다. 하백은 딸을 꾸짖고 태백산 물에다 버렸다. 그녀는 금와왕에게 발견되어 알을 낳았고 거기서 주몽이 태어났다." (이규보의 서사시 [동명왕] 요약)
"장백산 동쪽에 부쿠리산이 있고 거기 불후리라는 천지(天池)가 있었다. 천녀 셋이 하강하여 목욕했는데 까치가 붉은 열매를 물어다 제일 어린 천녀 부쿠륜의 옷에 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먹고 잉태하여 귀천하지 못하고 부쿠리융순이라는 아기를 낳았다. 그는 성장한 뒤 어머니의 분부에 따라 삼성(三姓) 지방에 가서 선언했다. '내게 복종하라. 나는 천녀의 아들이고 성은 아이친쪼러(愛親覺羅), 이름은 부쿠리융순이다.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은 그대들을 평정하기 위해서다.' 그는 난을 평정하고 국호를 만주(滿洲)라 하였다. 누르하치는 그 후손이다." ([청조실록]의 누르하치 신화 요약)
누르하치신화는 아무래도 단군신화 일부와 주몽신화 대부분을 계승한 듯하다. 주몽신화에는 백두산의 옛 지명 태백산이, 누루하치신화에는 장백산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천녀 부쿠륜은 주몽신화의 유화와 거의 같다. 다르다면 주몽 쪽은 큰언니이고 여진족은 막내동생이라는 것이다. 목욕한 곳은 고구려 쪽이 청하(靑河)이고 청나라는 불후리이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뒤 심양에 도읍해 국호를 청(淸)으로 고쳤다. 청 왕조는 백두산 일대를 왕조의 신성한 발상지라 하여 봉금(封禁) 지역으로 선포하고 비워 두었다. 그러자 조선인들이 진출해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다시 확보했고 그것은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간도를 우리 땅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 아는 것처럼 만주족은 한족 문화에 압도되어 자기 문화와 언어를 잃어버리고 민족도 거의 소멸되어버렸다.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간도를 되찾자]"주장하지 않는 역사는 우리 것이 아니다"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한국교과서연구소 임상선 연구실장의 인터넷 아이디는 '안개바다'이다. 안개바다는 발해의 한자를 풀어 쓴 우리식 이름이라고 한다. 임 실장은 발해연구에 매달리고 있는 몇 안 되는 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발해는 아직도 '수수께끼의 왕국'이라고 불립니다. 학자들조차 어려운 주제라고 여겨 연구를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해 드넓은 북방 영토를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마지막 왕국 발해. 그렇기 때문에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가 발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쉽게도 거의 없다.
그는 인터넷으로 국회도서관에서 박사학위논문을 검색한 결과를 내밀었다. 고대사 부문에서 발해 연구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인지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이었다. 신라사 논문이 68편, 고구려사가 17편인 데 반해 발해사는 고작 6편으 로 가장 저조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주변국의 연구성과를 보면 더욱 놀랍다. 일본만 해도 발해를 주제로 한 연구논문이 우리나라의 3배에 이르고, 러시아도 우리나라보다 활발한 연구를 펼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발해는 우리에게 여전히 비밀이 가득한 고대 왕국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사람들이 저에게 왜 발해를 연구하는지 묻는데, 저는 한 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신라는 왜 연구하고, 고려나 조선은 왜 연구합니까."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 발해를 연구하는 것은 학자로서 지극히 당연하다는 그의 반어적 표현이었다. 물론 그가 발해를 연구하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삼국통일 이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다. 그러나 발해 이후 계승관계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이 미개척 연구 분야로 남아 있었고, 이런 점이 그의 학문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발해연구 도전해볼 가치 있어"
발해 연구와 더불어 요즘 그는 일본 교과서에 나타난 우리 역사를 검증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왜곡된 역사교육이 미치는 악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예로 들었다. "아직까지 중국 사람 대부분은 고구려를 한국의 역사로 여깁니다. 그동안 그렇게 서술된 교과서로 배워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발해가 당나라의 영역으로 표시된 일본 역사교과서를 펼쳐보이며 말을 이었다. "주장하지 않는 역사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를 국제 사회에 당당하게 주장할 때 비로소 역사는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는 사이버발해박물관(http://palhae. nacool.net)과 교과서문제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textstudy)도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에 익숙한 지금 세대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함으로써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요즘도 발해의 민족과 주민 구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는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토론하는 학술모임을 준비 중이다. 젊은 학자들이 발해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갖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발해는 조금만 연구하면 '대가' 소리를 듣습니다. 그만큼 연구가 미흡하다는 우스갯소리이지만 다르게 보면 연구해야 할 분야가 많이 있어 학자로서 도전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
[간도를 되찾자]토지비옥, 광석 풍부 '황금땅' /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중국이 동북프로젝트를 통해 간도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간도 지역이 경제적인 보고이기 때문이다. 북으로는 송화(松花)강까지, 남으로는 조선 연안까지,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무역권이 미치고 있어 산업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간도는 조선의 북방 지역 주민에게 생명과 연결되는 중요한 곳이다. 두만강 남쪽은 산세가 험준하고 토지도 척박하지만 간도는 토지가 비옥했다.
이 지역은 황금땅으로 불렸다. 장백산맥 계곡 도처에 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황금물이 흘러나온다고 하여 여진을 금원(金源)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청조에서는 금이라는 뜻을 가진 애신(愛新)을 성씨로 삼는 자가 많았다. 백두산 동쪽에 위치한 간도에 금광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은-석탄-구리-철광 등 광석도 풍부했다. 삼림이 울창하여 수렵도 흥성할 수 있고 물줄기가 종횡으로 뻗어 있어 어업이나 농업에도 적당한 지역이다. 1907년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의 간도탐사보고서에서도 간도는 토지가 평탄하고 금광이 매우 풍부하며 목축에도 알맞은 지역으로 러-일전쟁 때 러시아군의 물자 공급지였다고 소개돼 있다.
중요한 교통 요충지로도 인식
따라서 간도에 근거지를 두고 선박과 철도 등의 편리함을 이용하여 무한한 보고를 개발한다면, 비용-노력이 적게 들면서 경제적인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최근 점차 부각되는 동북의 위상이 맞물리면서 중국은 서부대개발과 버금가는 동북대개발을 위해 2003년 말 74억달러의 투자를 공언하고 적극적인 개발에 힘쓰고 있다.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간도는 중요한 교통로로도 인식되는 곳이다. 해안과 만몽대륙을 결합하는 간도는 바다와 육지에서 방사선형인 교통선로의 집약지이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 접경까지 연결되는 1,380㎞의 동부변경철도를 연내에 착공할 계획이다. 이 철도는 이미 건설된 동북3성 지역의 11개 철도와 연결됨으로써 이곳은 그야말로 교통상의 중요 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다.
간도의 중요성은 중국으로 하여금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더 나아가 미래에도 간도를 상실하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중국이 동북프로젝트를 통해 간도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중간의 국경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여 간도영유권 문제를 종식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간도연구의 중요성 및 시급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동북의 사태가 비단 중국의 영토권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동아시아의 평화와 질서에 중대한 위험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증명되고 있다. 중국이 학술연구까지 동원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간도 문제가 현안이 아니라는 안이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
박선영〈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