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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1:31-35 “31.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생소한 지명이 나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입니다. 이 말은 ‘무덤들’이라는 뜻의 ‘키브롯’(קברות)과 ‘그 탐욕’이라는 뜻의 ‘핫타아와’(התאוה)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명은 “그 탐욕의 무덤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지어지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한 지 두 달 14일 만에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장막을 치고 머물게 됐습니다. 그리고 10개월 19일이 지난 후에 가나안땅으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3일을 행군할 즈음에 이스라엘백성들 중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아마도 사막 한 복판을 사흘 동안 행군하자니 너무 힘이 들어 원망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원망하며 행군 끝자락에 따라오고 있던 사람들을 불로 태우셨습니다. 백성이 두려워하자 모세가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서 불이 꺼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그곳 이름을 ‘불사름’이라는 뜻의 ‘다베라’라고 지어서 불렀습니다.
다베라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스라엘백성이 또 원망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먹는 음식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계속 만나만 먹어서 싫증이 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애굽에서 먹던 음식들이 먹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고기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대로 고기를 먹게 해 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서 이스라엘백성이 진치고 있는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진영사방 하룻길 되는 지면 위에 메추라기를 두 규빗 쯤 내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룻길은 32km정도 되고, 두 규빗은 1m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방으로 32km이니까 1,024k인데, 서울시의 면적이 605k 정도니까 약 서울시의 1.7배정도의 면적입니다. 그 넓은 면적에 1m정도로 메추라기가 쌓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백성이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고기가 지천에 널렸습니다. 정신없이 가져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기를 먹는 동안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 때 욕심을 부린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그곳에 묻고,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불렀습니다. “그 탐욕의 무덤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이스라엘백성의 잘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잘못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이 사건의 교훈을 삼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도 교훈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 탐욕
말씀드린 대로 기브롯 핫다아와란 말은 그 탐욕의 무덤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냥 탐욕이 아니고, ‘그’란 정관사를 붙여놓았습니다. 이 탐욕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탐욕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진영 밖 온 지면에 메추라기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고기가 널려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경쟁하듯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낮과 밤 그리고 다음날 낮까지 메추라기를 모았습니다.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한 호멜은 220리터입니다. 그러니까 적게 모은 사람이 2,200리터, 120말이나 모았습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먹으려고 그것을 햇볕에 말려두려고 땅에 펴놓았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당시 이스라엘백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고기를 보았습니다. 모아다 먹고 싶은 만큼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언제 먹을 수 있을까를 몰라서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모아서 저장해놓고, 앞으로 두고두고 먹으려고 육포로 만들려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런 일이 너무도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사람들 아마 우리도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다면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큰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너무 하신 것 아닐까요?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민 11:20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메추라기고기를 앞으로 한 달 동안 신물이 나도록 먹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백성은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을 먹었습니다. 약속대로 안식일을 제외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먹을 것 외에는 거두어드릴 필요도 없고, 앞으로 두고두고 먹으려고 저장해 둘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은 이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고기를 보는 순간 말씀이고 뭐고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고기를 먹으려는 마음에, 고기를 더 먹으려는 마음에, 모두가 덤벼들어 고기를 모을 때 남보다 더 모으려는 마음에 말씀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의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말씀을 향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약 1: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는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말씀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탐욕이 생기자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 말씀을 어겨서 죄를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이 갖는 치명적인 문제점입니다.
고려시대 이야기입니다. 우정이 깊은 세 친구가 여행 중에 금덩어리를 하나 주었습니다. 세 사람은 팔아서 똑같이 나누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축하하는 뜻으로 술 한잔하기로 했습니다. 셋 중의 한 사람이 인근 주막으로 술을 받으러 갔습니다. 술은 받아오던 중에 탐욕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을 죽일 생각으로 술에 독을 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의 마음에도 탐욕이 생겼습니다. 술을 사가지고 오면 함께 그를 죽이고 금을 둘이만 나누기로 했습니다. 술을 받으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이 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에 받아온 술을 벌컥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함께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의 또 다른 문제가 이것입니다. 바로 자기중심적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게 만들고, 이기적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 22:3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구약의 계명을 두 가지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요약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첫째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은 신 6:5 말씀이고, 둘째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은 레 19:18 말씀입니다. 이 두 말씀은 지금 이스라엘백성이 시내광야에서 듣고 지키겠다고 약속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시내광야를 떠난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탐욕에 눈이 멀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탐욕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이스라엘백성을 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탐욕이 말씀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또 탐욕이 자기중심적이 되게 만들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라는 말에서 핫다아와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정관사 ‘하’(ה)와 탐욕이라는 뜻이 ‘타아와’(התאו)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번역해 보면 ‘그 탐욕’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정관사가 붙은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차이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정관사를 붙여 그 나무라고 하면 일반 나무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그 나무를 말합니다. 그 날, 그 선지자, 그 메시아, 그 하늘...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이나 사람이 그 무엇인가를 특정할 때 정관사를 붙여서 구분합니다.
여기에 일반 탐욕이 아니고, 그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하신 탐욕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문제 삼고 계신 탐욕을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탐욕을 많이 부렸지만 지금 이 탐욕은 하나님께서 특정하게 주목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행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해서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바나바를 칭찬하고, 교회 안에서 그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탐욕이 생겼습니다. 자기들도 그런 인기를 얻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다 바친 것은 아니고 일부는 감추고 일부는 바쳤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이 부부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너무 심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헌금했는데 라고 동정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했다고 그 자리에서 죽게 한 것은 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첫 번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고 정결하고 거룩한 공동체에 탐욕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칫 정결함과 거룩함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정말 심각한 위기입니다. 바로 그 탐욕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시내 광야에서 거룩해진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처음 탐욕이 찾아들었습니다. 거룩함이 무너질 위기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그 탐욕이 찾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심령 속에 탐욕이 자리 잡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그 탐욕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탐욕이 생겨나는 것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자리하고 있는 탐욕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탐욕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제 가나안땅으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행군을 시작한지 3일 만에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사막을 걸으며 겪은 견디기 힘든 고생 때문에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이 원망 때문에 다베라에서 사람들이 불에 타죽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원망하지 말자고 교훈을 되새기면서 그곳을 이름을 다베라라고 지어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행군을 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원망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먹는 것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백성의 출애굽과정을 성경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과정만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많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또 이 과정만큼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많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사건,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사건, 반석에서 물이 나온 사건,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사건 등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 또 이 과정만큼 원망이 많이 기록된 곳도 없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원망’이라는 말이 전부 37번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무려 20번이 이 출애굽과정에 나옵니다. 그 수천년이나 되는 기나긴 성경의 역사 가운데 불과 40년 밖에 안 되는 이 짧은 기간의 기록에 원망이라는 말이 절반 넘게 나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가장 감사제목이 많은 시기에 가장 원망이 많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뇌과학에서는 우리의 뇌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3-4배 정도 더 잘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과거의 나쁜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이스라엘백성은 당장 눈앞에 놓여있는 고달픈 삶의 환경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이미 행군해오면서 겪었던 광야에서의 고생이 더 많이 기억나게 됐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겪고 있는 고달픈 현실문제에 집중하다보니 감사보다는 원망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고난을 당할 때 고난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영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원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닥친 고난만 바라보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를 하지 못하고 원망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이 다가올 때 영적인 위기라는 사실을 직감해야 합니다.
다시 뇌 과학의 연구 결과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말로는 우리 뇌는 원망할 때와 감사할 때 각각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원망할 때는 우리 뇌가 굳어지면서 부정감정처리회로와 연결되고, 반대로 감사할 때는 유연해지면서 긍정감정처리회로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할 때는 욕심, 불신, 미움으로 발전하고, 감사할 때는 사랑, 나눔, 믿음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이스라엘백성은 원망하다가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굳어진 마음에 자기만을 생각하게 되고,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을 막으려면 정말 중요한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야 말로 탐욕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백신인 것입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뉴스앵커인 데보라 노빌이 쓴 [감사의 힘, 0.3초의 기적]이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몇 년 전 개인적인 일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길을 잃게 했고, 삶의 파도들이 나에게 몰아치는데 새벽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았고, 독서도 무용지물이었다. 오로지 나 혼자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때 부정적인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두 눈을 감고 회피하기 보다는 ‘감사합니다’라고 마법의 주문을 되뇌었다. 오직 감사합니다만 외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평온해졌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어떤 지극한 평화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이 감사의 비밀이었다. 삶의 파도들이 몰아쳐도 오직 감사합니다만 외칠 수 있다면, 그 0.3초의 되뇌임만으로도 신기하게 나의 마음은 잔잔해졌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그 자체로 힘이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를 외치기만 해도, 그 0.3초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심령 속에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 파동이 상처받고 손상된 우리의 뇌를 회복시키고, 우리의 심령이 새 힘을 얻게 해줍니다.
성경은 셀 수 없이 많은 곳에서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 평범한 범사에도 감사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난 가운데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가 그 자체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감사가 우리를 회복시키고, 심령에 새 힘을 얻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감사합니다!”를 외쳐보십시오. 평상시에 “주님 감사합니다”를 외쳐보십시오. 특히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주님 감사합니다”를 외쳐보십시오. 우리를 원망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자족한 마음을 갖게 해서 우리를 탐욕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바로 이 감사가 우리를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을 넘어가게 해 줄 것입니다.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사시고 탐욕을 잘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상도중앙교회 박봉수위임목사님 설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