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사상과 이념을 달리하는 정치꾼 패거리들이 역사를 왜곡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혼돈하게 하여 팩트를 조작 하므로
인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깨닫고 거듭나야하는 국민이 아닌, 국가의 발전의 저해로 반복되는 누를 범하는 인간이 변화
되지 못히는 안타까움으로, 올바른 역사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 4.3사건의 배경
제주도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은 남제주 대정 출신으로 본명은 이승진 이다.
가명의 김달삼은 장인 강문석이 명하였다. 강문석은 해방 이전부터 공산당에 투신하여 박헌영의 오른팔로 남로당
중앙위원 선전부장으로 활동 하는 등 좌익의 거물이다. 김달삼은 1925년생으로 4.3무장봉기 당시 23세였다.
어려서 대구로 이주해 소학교를 다녔고, 도꾜 주오대에서 유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
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 해방을 맞았다.
귀국후 대구에 거주하던 김달삼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에 가담하여, 검거망이 좁혀오자 고향 제주로 잠입하여
대정중학교 교사로 역사와 공민을 가르쳤다. 1947년 3.1절 기념식이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는데, 일부청년이
가두시위를 하여, 기마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3.10총파업을 주도해 관공서 및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파업을 하는
유례없는 성과를 얻었다.
이를 기획 주도한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차세대 리더로 떠올랐다.
1948년 2월 남로당이 주도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극우 세력의 좌익 탄압이 거세졌다. 무장투쟁을 주장한 김달삼.이덕구 등 20대
강경파는 40대 온건파로 부터 주도권을 넘겨 받았다. 김달삼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1948년 4월 3일 새벽2시 한라산 오름마다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이를 신호로 인민유격대 350여명이 제주도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지서,서북청년회 숙소,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습격하여,경찰4명,우익인사 8명,유격대
2명이 사망했다. 이후 한라산으로 들어간 유격대는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경찰지서,관공서 습격,경찰.우익인사테러.김달삼은
살해,협조를 거부하는 양민 납치.살해,전선.통신선 절단,도로 파괴 등을 자행 하다가 날이 밝으면 아지트로 돌아갔다.
제주읍을 제외한 제주도 전역이 밤에는 유격대,낮에는 미군정과 경찰이 지배하는끔찍한 상황에 빠졌다.
남로당의 목표인 '단독선거 반대'는 대성공 이었다. 유격대는 양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산으로 끌고가 격리
하였고,총선 당일까지 투표소 습격.방화,폭팔물 폭파,경찰.공무원 살해 등 방해 난동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제주도 지역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갑구와 을구가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당선자를 내지못한 선거구는 북제주 갑.을구 뿐이었다. 김달삼은 남한 전역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지하 선거를 통하여,남한 전역에서 선출된1080명은 1948년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서 남조선인민
대표자회의를 열어 최종적으로 360명을 대의원을 선출했다.
김달삼 일행은 비밀리에 한라산으로 내려와 배편으로 목포로 가서 38선을 넘어 해주로 향했다.
김달삼은 주석단 선거에서 박헌영.홍명희.김원봉.허헌.이승엽 등 내로라는 좌익인사 34명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 되었다.
김달삼은 대의원 투표에 앞서 연설 하기를 4월3일 오후2시를기해 산사람(인민군) 들이 총궐기했습니다.
지금까지 지서습격 31회,경관 100명이상 살해,독촉,서부청년단 기타 반동 400명이상 살해, 지서 소각 5곳,전선절단 893건,
그 밖에 무기 다수를 노획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를 외쳤다. 이후김달삼은 평양 인근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 교육을 받았다.
1949년 3월 태백산지구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300여명의 대원과 함께 남파되었다.
안동.영덕 방면으로 침투한 김달삼 부대는 민간인과 국군 탈주병을 규합해 600명이 넘는 대부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국군의 거듭된 소탕 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몰렸다. 김달삼은 북상해 월북을 도모 하다가 1950년 3월 강원도 정선군
반론산에서 사살 되었다. 빨치산 수괴의 처단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의 지명을 `김달삼모가지잘린골` 로 변경 되었다.
그후 이덕구가 유격대 사령관 자리를 이어 받았다.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10월 23일 이덕구는 50여
곳에 봉화를 올리고 인공기를 계양하고는 이튼날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게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4개월 동안 유격대와 진압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고,진압군의 `초토화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학살 되었다.
4.3 사건으로 2만5천에서 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86%, 유격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4% 이다.
◈ 평가
발단이, 공산주의자들이 자유만주주의를 파기하고저 광란을 일으켜 파생된 일인데, 아직까지 지금도 남한에 사상과 이념을
달리 하는 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음에도, 척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운 심정이다.
우리의 국민성은 유혈 사태로만 해결이 되어야 하는가? (4.3사건, 6.25 등)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들 이라면, 공산주의를 배척 할 수있는 능력 또한 갖추어야 되지않는가?
양식과, 상식과, 지식이 없는것인지, 너무 붉게 물들어 있어 그런지, 민주주의의 초석을 세운 이승만 대통령을 부정하는
자격을 갖추지도 못한 청치인들이 있다는것이, 미래를 어둡게만 하고있다.
하늘이시여! 이 나라가 새롭게 거듭나게 하여 주옵소서... 끝.
첫댓글 냉정하게 재평가해야 할 사건입니다. 좌익들의 선동에 희생된 사람들입니다. 요즘 세태와 클로즈업 되어 가슴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