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출 26장 1-17, 31-32
설교제목 : 덮개 만들기
마음의 고삐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본격적인 무더위의 한복판인 초복입니다. 습하고 뜨거운 열기로 쉬이 피로해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백신접종으로 코로나의 극복에 대한 기대가 불안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조금은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이 탄식으로 변해가는 듯 합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방역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지면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활동적인 젊은이들의 감염이 늘고 있다는 것이 우려스럽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고되지만, 집단 면역이 형성되기까지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미카엘 마이어의 “달아나는 아탈란타”(Michael Maier, Atalanta Fugiens, Emblem. 28, 1618), 도판 28번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도판의 제목은 “발한실 속의 왕the King of the Sweatbox room”입니다. 왕관을 쓴 벌거벗은 왕은 땀을 내어 치료하는 사우나실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왕은 자신 안에 있는 불순물, 병을 제거하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아래에서 열이 가해지는 사각 용기 속에 있습니다. 늙은 왕을 사각용기에 가두고 열을 가하여 왕의 재생을 돕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의 상황은 일종의 낡은 집단의식을 벌거벗기고 가두어서 욕망을 제거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일 것입니다. 뜨거운 열을 견디지 못하거나 답답함을 못 참고 조급하여 뛰쳐나가면 결코 새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융은 “욥에의 회답”에서 굉장히 대담한 이야기를 던지고 있습니다.
“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인간이 가진 것은 무엇인가? 전능하신 분에 견주어 인간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방어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반성을 기초하여 좀 더 날카로운 의식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은 생존하기 위하여 항상 그가 무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신에게는 이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을 주저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 자신을 반성하도록 하는 견디기 어려운 방해물과 싸울 일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C.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CW 11, para.579.]
인간이 가진 자기반성에 기초한 예리한 의식성은 생존과 적응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유한함과 약함을 인식하며, 자기 반성을 통하여 내 자신과 집단을 살피는 일을 철저하게 해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자기 반성에 기초한 의식성으로 이 코로나의 상황을 더 깊이 숙고해갔으면 좋겠습니다.
덮개 만들기
오늘 본문은 전체 성막 중에 성막 덮개와 성소와 지성소를 가릴 수 있는 휘장 제작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열 폭으로 성막을 만들어라(1a)”고 하면서 자세한 제작과정을 일러주십니다. 성막은 오늘날로 치자면, 텐트의 모형을 닮아 있습니다. 성막을 만들어서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의 기물을 넣어두었습니다. 성막은 네 겹의 덮개로 제작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덮개 천은 실이고, 두 번째 덮개는 염소털(7)이고 세 번째 덮개는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14)이고, 네 번째 덮개는 돌고래 또는 해달 가죽(14)입니다.
먼저 주목해보아야 할 식양 중에 성막의 첫 번째 덮개 천입니다.
“그 천은, 가늘게 꼰 모시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아 짠 것이라야 한다(1b)”
첫 번째 덮개 천 제작은 네 가지 색실을 필요로 합니다. 흰색, 청색, 자주색, 붉은색입니다. 네 가지 색은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전체성이 담겨진 조화로움을 의미합니다. 파랑과 빨강은 대극이며 그것을 결합하면 자주색톤이 나타나고, 순수하고 순결하며, 모든 색을 연합하여 하나로 모으는 흰색의 결합은 그 자체로 전체성을 담은 색의 연합니다. 전체 삶의 다양한 감정적 측면이 동원이 될 때 비로소 덮개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네가지 색을 정교하게 수놓아 짜는 것은 숙련된 자가 정성을 담아 씨줄과 날줄을 결합하는 창조적인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막의 덮개는 기성품을 가지고 조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숙련된 기술로 천을 만들어 수를 놓는 창조적인 과정의 결정체가 첫 번째 덮개입니다.
남의 인생을 자기 인생처럼 기성품처럼 사는 삶의 태도는 결코 성막의 덮개를 제작할 수 없습니다. 가장 안쪽의 성막 덮개는 조화롭게 전체성을 담아낸 창조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가야만 하는 개성화의 길을 닮아 있습니다. 이런 개성화의 길은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서 만들어내지는 여정이고, 각자 개체로서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고유의 길을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의 감정이나 일방적 색, 또는 자아의 욕망과 자아 중심적인 삶은 결코 성막덮개를 제작할 수 없음을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나머지 세 가지 덮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동물의 털이나 가죽입니다. 이 덮개 제작을 위해서는 희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희생을 통하여 남겨진 털이나 가죽이 덮개가 됩니다. 동물적 충동과 본능을 극복하고 난 후, 그것에 남겨진 가죽은 의식화의 소산이며, 이것이 바로 덮개 역할을 합니다. 심리적으로 동물적 충동성을 조정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비로소 문명화, 의식화가 진행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창 3:21). 여기서 가죽 옷도 일종의 비슷한 맥락일 수 있습니다. 본능이 추동하는대로 이끌리는 삶은 인간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상태만이 아닙니다. 단테가 신곡의 지옥편에서 노래하듯, 오늘날 어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꿈틀거리는 사자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권력본능, 표범의 성적 유혹과 매력하는 본능성, 암늑대의 교활함과 사기, 기만의 이기성의 본능은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 강박의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지난 주에 길가는 여대생의 가슴을 만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팔짱 끼고 그 여성을 바라보고 난 후 도망가는 그런 인간들은 충동성에 지배당한 자들입니다.) 옛 어른들은 인면수심이라고 했습니다. 짐승의 탈을 쓰고 자기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동물화된 인간, 충동성에 노예가 된 인간입니다. 또한 붉게 물들인 양 가죽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든 덮개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덮개는 위로부터 오는, 옆으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것들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낯선 것들이 침투하려 할 때 이 네 겹의 덮개는 성소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덮개를 가지고 있으신가요? 먼저 위의 세 개의 덮개는 동물적 충동성을 희생하고 그 본능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만이 지닐 수 있습니다. 제일 안쪽 덮개는 조화롭게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창조적으로 삶을 엮어낼 수 있는 자만이 지닐 수 있습니다. 네 겹의 덮개로 우리 내면의 성소를 지어가고, 온갖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정신적인 것들로부터 보호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촉꽂이
성막은 널빤지를 세워서 덮개를 덮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런 성막은 한편으로 천막으로, 다른 한편으로 견고한 골격을 갖춘 혼합적 건축물이었습니다. 이런 특이한 건축방식은 제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유목민족에게는 천막은 흔한 요소이지만 나무로 가벽처럼 골격을 세우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널빤지가 길이는 열 자, 너비는 한 자 반으로 동쪽면을 제외하고 삼면에 20개씩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널빤지와 널빤지 사이를 잇기 위해 촉꽂이를 만들어서 세워야 합니다. 여기에서 ‘촉’이란 영어성경에는 돌기(Projection)으로 번역했는데 히브리 원어로는 ‘손’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벽을 세우기 위해서는 일종의 ‘손’으로 연결하여 세워집니다. ‘손’ 바로 관계, 연합, 작업, 행위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널빤지 밑에서 손이 제대로 기능할 때 성막이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지향해가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촉’과 더불어 은받침( )이 있습니다. 촉과 은받침이 결합하여 널빤지를 지지하고 골격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수용적이고 포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두가지 상태가 맞물릴 때 벽은 든든하게 설 수 있습니다. 대극의 연합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방향의 일방성을 가지고서는 성소의 벽을 세울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촉과 은받침의 기능을 서로 연합할 때 든든하게 인생의 구조물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휘장
다음은 휘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휘장도 첫 번째 성막 덮개와 같은 방식으로 네가지 색실로 천사들의 모양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만들어야 합니다.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일종의 커튼, 가리개입니다. 휘장을 통하여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고 경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함부로 접근하거나 보는 것을 차단하거나 그 거룩함에 접근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합니다. 그래서 이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민족의 전체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속죄일에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휘장은 인간의 경박스러움과 무례함, 부지중 실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가리개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경계와 분별을 짓게 하는 보호장치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면 삶은 중심을 잃게 되고 질서가 무너지고 경박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7장 5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말합니다. 기득권과 제사장들의 종교권력의 전유물의 성소의 경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찢어짐으로 지성소와 성소가 차별적으로 구분되었던 특권적 지배구조가 철폐되고 유한하고 흠 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경계와 분별이 긍정적으로 기능하느냐? 부정적으로 기능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와 정체를 바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와 거룩한 것 사이를 보호하고 경계짓기 위하여 휘장을 잘 두르고 그 내면의 성막을 잘 지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