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yadream@naver.com
경남 김해 출생, 육군사관학교(31기)
동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원광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제9공수 특전여단장, 육군 부사관 학교장, 극동대 초빙교수,
대전대 대우교수, 한림대, 삼육대, 용인대 등 강사,
월간 『군사저널』 편집위원, 『경남투데이』 논설위원,
21C 안보전략 연구원 수석부원장,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김해시 협의회 회장
대통령표창(1998), 보국포장(2002), 보국훈장 천수장(2008)
‘백남경 수필아카데미’에서 공부 중
저서 『구국 경찰론』, 『내고향 진례, 그리고 삶』, 『서뫼의 전설』 등 다수
<수상 소감>
송유창
농사를 지으며 저를 키워주신 부모님의 삶을 더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손』은 아버님의 일생에 관한 글입니다. 아버지 삶의 무게와 자식으로서 못다 한 효에 대한 자책을 적어보았습니다. 그 아쉬움과 사무침을 전부 다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단면이나마 글로 표현하고 나니 회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글로 기록함으로써 못다 한 자식의 도리를 메꾸어보려 합니다. 등단이라는 이 기쁜 소식을 아버님과 어머님의 영전에 가장 먼저 바치고 싶습니다.
저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34년간 국가에 헌신한 군 생활과 가족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글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국가에 오직 충성하고 임무 완수에 최선을 다하는 장교들의 국가관과 사명감의 원천이 무엇이며, 내면적 애환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위관 장교로서 ‘10·26, 12·12사태’를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흥미 위주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歪曲)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자전적 에세이’로 유연하게 적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武)로 평생을 국가에 바친 사람이, 문(文)을 깨우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글마다 ‘주제, 형상화, 연결성, 구조, 화소, 사유….’ 같은 것들이 늘 뒷골을 눌렀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지식 하나 없이 그냥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 쑥스러운 책 『내고향 진례, 그리고 삶』을 놓고 백남경 선생님과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비문학과 문학의 차이, 수필이 놓인 자리, 수필의 특징, 문학적 감수성과 그 전환에 대해 알기 쉽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백남경 수필 아카데미’에서 열띤 합평을 하며 함께 공부한 문우님들께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아울러 지난 2년간 ‘수로 문학회’에서 수필강의를 해주신 곽흥렬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겨우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당당하게 걸음마를 해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글쓰기, 하루하루와 순간순간, 삶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항상 멀리서 무언의 응원을 해준 아내와 딸, 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의 손
송유창
아버님처럼 농사일 한번 해보겠다며 귀촌한 지 3년째다. 헛간 벽에 걸린 말라빠진 코뚜레를 볼 때마다 생전의 아버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농사일 경험이 없어 보들보들하던 내 손이 가을이 되면서 조금씩 트기 시작한다. 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지와 인지, 중지 손톱 양 끝이 갈라지면서 좀처럼 붙지 않고 아프다. 낫질이나 화목을 조금 하고 나면 튼 곳이 더 파져서 밤잠을 설치게 된다. 시중에 나오는 핸드크림을 아무리 듬뿍 발라도 별 효과가 없다.
육군 중위 때 모처럼 휴가를 얻어 아버님이 계시는 시골집에 왔다. 집안 아저씨가 중매를 서겠다며 여러 번 서울 근무지로 연락을 해와서 처녀 몇 사람과 맞선을 보기로 하였다. 아버님을 모시고 아저씨와 함께 부산역 앞 모 호텔로 갔다. 부산에서 꽤 괜찮은 학벌에 집안 좋은 신붓감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 상대였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먼저 인사를 나누고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차 나르는 아가씨가 아버님 앞에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아버님은 손을 내밀어 설탕을 집으셨다. 그 순간 처녀 측의 어머니가 아버님의 튼 손을 보고 움찔하고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본 나는 오히려 태연하게 아버님 커피잔에 설탕을 넣어드렸다. 처녀 어머니의 다른 표정은 더 없었지만, 아버님 손의 가치를 몰라주는 처녀 측이 나는 무척 섭섭했다.
총각 아버지가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이미 하였을 테고, ‘총각 보러 왔지, 아버지를 보러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회지에 살면서 농촌을 이해하는 처녀를 만났으면 하였던 나는, 아버님이 농부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 손이 우리 5남매를 반듯하게 키웠으며, 나 또한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가 되지 않았던가. 그날 맞선은 호텔 문을 나서면서 내가 일방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나머지 맞선 계획도 없었던 일로 했다. 사실 나의 결혼 조건은 나보다 아버님의 심중(心中)이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수포가 되고 말았다. 그날 맞선이 아버님과 함께 선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겉만 보고 속에 든 진면목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처녀 측의 실망 때문에 나는 몹시 큰 상처를 받아서였다.
아버님은 40여 년 넘게 농사를 지으셨으며, 그러다 보니 손은 사시사철 성할 때가 없었다. 어릴 때 나는 ‘아버님의 손은 원래부터 그런가 보다’ 하고 자랐다. 손가락 마디엔 굳은살이 박였으며, 튼 마디는 병아리 입만큼 벌어졌고 옆으로는 잔주름이 수없이 그어져 있었다. 그런 손으로 한겨울에도 쉬지 않고 나무를 하거나 이응을 엮고는 하셨다. 그런 아버님의 삶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필시 보잘것없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우리가 하루하루에 자신의 노력을 다하듯, 아버님 또한 그 시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셨던 분이다. 불가항력, 외면하지 못하는 시대 상황, 부조리, 끝없는 가난, 구사일생…. 아버님은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을 당해 파푸아뉴기니 라바울 일본군 해군비행장 공사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미군의 폭격이 무시로 이어지는 전시 상황에서 오사카에서 석 달간 군용선을 타고 라바울까지 가셔야 했다. 생사를 다투는 전투 현장에서 수많은 한인 동료의 죽음을 지켜만 보다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고향으로 돌아온 건 구사일생이었다. 파피용 같은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삶이었다. 그래서 선조의 삶을 논함에 있어 감히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거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도 인생살이는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그날 맞선 사건은 내 결혼이 더 늦어지는 한 이유가 되었다. 이후 휴가를 자주 얻지 못한 나의 사정도 있었지만, 아버님은 그다음 해 가을에 인근 모 대학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시다 시골집에서 돌아가셨다. 내 결혼도 못 보셨을 뿐만 아니라 손자·손녀의 얼굴도 모른 채 쉰여섯의 나이에 먼 곳으로 떠나셨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은 겹겹이 쌓인다. 부부인연이 칠천 억겁이라는데, 부자간의 천륜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은하계의 별똥이 지구에 떨어져 운석으로 나타나는 확률보다 더 희소할 것 같다. 그 천륜이 남태평양을 넘게 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부자간의 이런 소중함을 아버님 생전에 나는 왜 몰랐을까. 내 손이 트면서 비로소 아버님의 손을 기억하는 자식이다. 만약 농사일을 흉내 내지 않았더라면, 그 고통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지 모른다. 더욱이 아버님 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임에도 불구하고, 전방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임종 시 아버님의 튼 손 한 번 잡아 드리지 못하고 그냥 가시게 하였다.
<심사평>
심사위원 / 백남경
송유창 선생의 글은 고향을 찾아가고 추억을 음미하는 내용이 많다. 그 중심에는 생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글은 못다 한 효에 대한 자책과 본향을 찾아가는 뿌리 의식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군으로 전역한 뒤 고향집에 내려와 손수 농사를 짓는 것, 이것 하나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퇴행적 횡보가 아니라 근본을 중요시하는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에 신인상 당선작으로 선정된 「아버님의 손」은 그 가운데 한 작품이다.
수필 문학은 화자가 걸어온 길을 언어로 기록(표현)하고, 이를 해석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걸어온 길은 경험이자 곧 삶이다. 이것은 기억이란 저장장치에서 저장물로 보관된다. 이를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어 해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주관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실을 해석해서 의미화하는 능력이 송유창 선생은 천부적일 만큼 탁월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일상의 대화에서도 충효 정신이 못 말릴 정도로 투철하다. 특히 효는 부모에 대한 최선의 사랑이자 인륜의 근본으로, 시대에 의해 변해서는 안 되는 가치다. 그럼에도 그는 작품에서 교훈성이나 윤리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실의 해석과 관련, 이를테면 맞선을 보기 위해 부산에 갔을 때 처녀 쪽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튼 손을 보고 실망하는 모습에 퇴짜를 놓게 되었는데, 그 이유(해석)가 명쾌하고 날카롭다. “겉만 보고 속에 든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처녀 측의 실망감 때문에…”라고 서술했다. 사실과 상황에 대한 촌철살인의 해석이다. 화자는 농부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 손이 5남매를 반듯하게 키웠으며, 화자 또한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아버지의 손’은 ‘아버지의 삶’이다. 아버지의 손에 대한 화자의 사무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을 당해 파푸아뉴기니 라바울 일제 해군비행장 공사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미군의 폭격이 무시로 이어지고 생사를 다투는 전시 상황에서 수많은 한인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다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야말로 파피용 같은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삶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는다. “선대의 삶을 논함에 있어 감히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거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도 인생살이는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루하루에 자신의 노력을 다하듯, 아버님 또한 그 시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셨던 분이다. 불가항력, 외면하지 못하는 시대 상황, 부조리, 끝없는 가난, 구사일생….
나이가 들수록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은 겹겹이 쌓인다. 부부인연이 칠천 억겁이라는데, 부자간의 천륜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은하계의 별똥이 지구에 떨어져 운석으로 나타나는 확률보다 더 희소할 것 같다. 그 천륜이 남태평양을 넘게 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부자간의 이런 소중함을 아버님 생전에 나는 왜 몰랐을까. 내 손이 트면서 비로소 아버님의 손을 기억하는 자식이다. 만약 농사일을 흉내 내지 않았더라면, 그 고통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지 모른다. 더욱이 아버님 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힘임에도 불구하고, 전방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임종 시 아버님의 튼 손 한 번 잡아 드리지 못하고 그냥 가시게 하였다.
그러나 그날 맞선 사건은 결과적으로 화자의 결혼이 더 늦어지는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아버지는 손주의 얼굴은커녕 화자의 결혼식조차 보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했다. 그때 아버지의 춘추는 쉰여섯. 더욱이 화자는 전방에서 근무한 탓에, 제대로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해서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기만 하면, 장군이 아니라 이등병처럼 작아진다.
이와 같이 화자가 경험에 대한 탁월한 해석 능력을 갖고 있는 건, 남다른 삶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학교 때까지 자연과 함께했던 시골의 삶, 서울에서의 고교생활, 그 사이에서의 문화 차이와 충격, 규율과 질서에 엄격한 육사생도 시절, 오랜 육군 장교 생활을 통한 통찰과 지혜가 그의 수필을 관통하고 있다. 그의 글이 주제가 선명하고 깊이 공감을 주는 이유다. 이는 수필이 주제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이다. 또 한 가지 빠트릴 수 없는 건, 언제 어디에 있었든 세월이 얼마나 흘렀든, 그의 근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칠순에 접어들었음에도 그의 감수성은 동심 그대로이다. 당선작 외 나머지 응모작 「동급생 누나」, 「공의소 가는 길」, 「하얀 고무신」에서도 맛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인생관과 감수성이 문장마다 섬세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의 기억 창고에 온갖 재미있는 소재들로 가득할 것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창작 방법도, 그동안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내서인지 작품의 구성, 형상화, 필력이 뛰어나다. 구성과 형상화는 작품의 문학성과 예술성을 결정한다. 그의 추체험을 따라가다 보면 숭고미에 빠져든다. 형상화와 주제를 동시에 구현해 내는 조절 능력도 갖추었다. 이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요소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다. 게다가 그는 안보와 군사전문가다. 부단히 기량을 발휘하여 독자들에게 지식과 정보는 물론 재미, 공감, 감동을 선사해 주리리라 믿는다. 등단을 축하드리며, 『에세이스트』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다.
백남경 nkback6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