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풍경
- 김행숙의 근작시들
장석주(시인 · 문학평론가)
1. 소녀들
김행숙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와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이 그것이다. 그의 시에는 소년과 소녀들, 여자들, 그리고 귀신들이 어울린다. 소년과 소녀들은 다 자라지 못한 욕망 안에서 어리둥절해하고, 여자들은 엄마와 언니들일텐데 그들은 미용실 같은 곳에서 잡담을 하며 조금씩 음탕한 모습을 드러낸다(「사춘기 1」 『사춘기』). 귀신들은 이
소년과 소녀들, 여자들이 거울이라는 문턱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도망갔을 때의 다른 이름이다(「귀신 이야기1」『사춘기』), 소녀들의 시간이 현재고, 여자들의 시간이 소녀의 미래라면, 귀신들은 소녀의 현재 속에서 공전하는 미래다. 이 시세계의 주인공들은 그 무엇도 되지 않고 늘 “무엇에 대한 직전面前"(「폭풍 속으로」 『사춘기)에만 머문다.
김행숙 시의 자리는 이상의 「오감도」와 이성복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사이에 걸쳐진 어디쯤일 것이다. 이상이 「오감도」 연작시에서 자연과 사회를 지우고 들어앉힌 것은 욕망의 가역반응可逆反應이다. "13인의 아해들"이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하는 풍경은 분열증적 욕망에 대한 불가해한 조응이다. 이상은 식민지로 전락한 국가의 폐쇄회로와 같은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분열증적 욕망을 드러내 보였다. 막힌 골목을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들"은 현실이란 환상극장에서 무수한 '나'로 분열하는 연기를 하는 자아의 표상이다. 이성복이
군부 독재의 뒤안길에 폐품처럼 나뒹굴며 그 고통과 치욕의 견딤에 대하여 노래할 때 그 이면에는 현실로써 살아지지 못한 욕망의 던적스러움이 파열하듯 드러난다.
이성복의 초기시에는 자연은 지워져 있고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는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 시인은 그 “병든 사회"를 "유곽" 이라고 뭉뚱그려 명명하지만 그 “유곽"의 타락한 풍속에 날선 비판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황지우 시는 냉소와 야유로써 낮은 수준의 사회비판을 자주 드러내지만 이성복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대신에 이성복은 병든 세계 속에서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데 저 혼자 아파하는 자아를, 그 자아가 겪는 고통과 치욕에 대해 노래한다. 이상과 이성복은 법과 관습과 제도들, 그것들이 만드는 기성의 윤리에서 반윤리의 세계로 도망간다. 이때 반윤리는 패륜이 아니다. 그것은 기성의 윤리가 찾아내지 못한 윤리에 대한 특이점을 말한다는 맥락에서 새로운 윤리의 발견이다.
거대 서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김행숙의 시들은 이상과 이성복과 같은 시적 혈통임을 드러낸다. 이상과 이성복이 그랬듯이 김행숙의 시에서도 자연과 사회는 상상력에 어떤 촉매도 되지 못한다. 시인이 도덕적 당위에 대한 강박이나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과 무관한 자리에서 놀고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 사회를 지우고 그 자리에 “불가사의에 흡수되는 시간 / 거대한 고양이" ( 「고양이군의 25시」「이별의 능력』)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품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이 되기 이전
의,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 품은 풍경에서 발화된 이야기를 품는다. 사춘기 소녀의 눈에 비친 세계는 낯선 기미들로 가득 차 있다. 김행숙의 시들이 낯선 기미들로 가득 차있는 이 세계에 자아의 뿌리를 내리고 노래할 때 세계는 혼돈 그 자체다. 혼돈은 질서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이다. 질서가 나아간 끝 간 데를 혼돈이 차지한다. 혼돈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질서이며, 질서의 소용돌이일 것이다. 질서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질서로 나아간다. 김행숙의 시들은 이 혼돈 속에서 제 마음이 나아간 자취를 따라간다. 이 소녀의 마음이 품은 풍경들은 “무릎이
반짝일 때 /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이별의 능력)라고 할 때의 "둥근 입술"과 “투명해지는 한쪽 귀 등과 같은 환유의 고리들로 이어지며 사랑스런 느낌으로 충만한 "다정합의 세제"인 것이다.
김행숙의 시는 눈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사춘기 소녀들이 만드는 여성 서사에 동화적 판타지를 겹친다. 「다음날」에는 “드디어 내 발은 어디에도 닿지 않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이 소녀는 “빛보다 빠른 버스"를 타고 공중을 날아다닌다(「이별의 능력』), 소녀들의 눈에 비친 이 세계에는 아무것도 확정적인 것은 없다. 세계의 불확정성은 실은 '나'의 무의식과 욕망의 불확정성이 세계에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와 세계는 동시에 기이하고 모호하다.
2. 미용실과 유령 간호사와 틈들의 세계
여기 김행숙의 신작시 다섯 편이 있다. 2009년도 노작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작품들이다. 이 시들은 낯설고 아름답다. 김행숙 시의 낯선 발화를 따라가면, 독자들은 '나'의 자아를 여러 개로 쪼개는 거울의 방인 “미용실"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 “오늘 새벽에 나는 네 꿈의 표면에서 땀을 닦아 주는 천사야" 라고 속삭이는 “유령 간호사" (「유령 간호사), 그리고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은빛 칼처럼 빛이 쑥 올라오는 틈새가 있다." (어두운 부분)에서 슬쩍 보여주는 “틈”들로 이루어진 기이한 상상의 세계와 만난다.
이 기이한 상상을 통하여 시인은 한없이 애매해지는 자아에 대하여 말한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머리의 위치 또한,
목을 구부려 인사를 합니다. 목을 한껏 젖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인자를 한 후 곧장 밤하늘이나 천장을 향했다며, 그것은 목의 한 가지 동선을 보여줄 뿐, 그리고 또 한 번 내 마음이 내 마음을 구슬려 목의 자취를 뒤쫓았다는 뜻
입니다. 부끄러워서 황급히 옷을 주워 입듯이.
당신과 눈을 맞추지 않으려면 목은 어느 방향을 피하여 또 한 번 멈춰야 할까요.
밤하늘은 난해하지 않습니까. 목의 형태 또한,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
목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문득, 세상에서 가장 긴 식도를 갖고 싶다고 쓴 어떤 미식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식도가 길면 긴 만큼 음식이 주는 황홀은 천천히 가라앉을까요, 천천히 떠나는 풍경은 고통을 가늘게 늘리는 걸까요. 마침내 부러질 때까지 기쁨의 하얀 뼈를 조심조심 깎는 중일까요.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요.
소용없어요, 목의 길이를 조절해 봤자. 외투 속으로 목을 없애 봤자. 그래도 춥고,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떠나듯이, 다리를 움직여서 당신을 또 한 번 찾았듯이.
- 목의 위치 전문
「목의 위치」는 김행숙 시의 낯선 발화법을 잘 보여 준다. 김행숙은 목의 형태와 위치 변화를 관찰하며 그것을 빌어 연애의 현존에 대해 쓰는데, 실로 김행숙만이 쓸 수 있는 이상한 연애시다. 시인은 "나는 애매하지 않습니까. 당신에 대하여."라고 적는다. 그것이 애매한 것은 욕망의 대상인 '당신'이 곧 '나'의 욕망의 주체인 까닭이다.
'나'의 욕망 속에서 '나'는 결여되어 있고, 타자인 '당
신'과 '당신'의 욕망이 그 결여를 채우고 있다. '나'의 욕망함에는 욕망의 존재인 '나'는 없고(이미 '나'는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저편'으로 가 버린다), 그 결여 속에는 당신의 욕망함만이 있다. 자, 시의 문면을 따라가 보자. 시인은 머리의 위치는 기이하다고 쓴다. 이는 머리의 위치가 곧 목의 형태와 위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목의형태, 위치, 길이는 어떻게 바꾸어 보든 애매하다. 그 애매성은 세계에 대한 '나'의 애매성이다. 물론 목을 구부려 당신에게 인사를 할 수도 있고, 목을 뒤로 젖혀 밤하늘이나 천장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보여 주는 마음의 풍경과 내 마음의 지향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목을 외투 속으로 숨겨 보았자, 추위는 그
대로 남고, 커다란 덩치를 숨길 수도 없다. “목을 움직여서 나는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쓸 때 시인은 목과 관련된 욕망이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목이 제 안에 숨기고 있는 "긴 식도"는 미식의 황홀에 대한 숨은 욕망 의 은유로 읽힌다. "긴 식도" 란 실은 안 보이는 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늘 목의 위치( '나'라는 존재의 위치)와 마음의 지향('나'의 욕망함) 사이에는 틈(타자의 욕망함)이 있는데, 이 틈을 시인은 애매하다고 쓰는 것이다.
3. 거울 앞에서 분화하는 소녀들
빨강과 검정 사이에서 너의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랍니다. 눈이 가장 밝은 사람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순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 머리카락은 한 달 후에 자라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에 대하여.... 너의 눈빛에 대하여..….… 나의 마음에 대하여.……… 어느 날 한 달 후에 알게 되는 것들. 나는 그럴 줄 몰랐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는 너처럼 너는 나처럼 거울의 혼동이 가득한 곳. 세상의 모든 미용실은 기이합니다. 14세기의 가위가 전승되는 곳에서 도구들은 발전의 발전을 하였습니다. 미용실에서 지구인이 외계인인 척하며 걸어 나오고 외계인이 지구인인 척하며 걸어 나서・・・・・… 우리는 하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둘이다. 우리는 셋이다. 우리는 넷이다. 우리는 다섯이다.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침묵으로 돌아갔습니다. 각각의 침대에 누웠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 성기를 감추듯이 머리카락을 감춘 여인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투쟁하는 이야기를 밤새 읽었습니다. 아침이 밝자 소설의 문장처럼 나는 너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못 읽었어요. 나는 못 읽었어요. 어쨌든! 나는 읽었어요. 머리의 반쪽은 비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머리카락은 시간처럼 시간처럼 끝없이 자라는가. 왜 머리카락은 정치적인가. 마침내 누가 내 머리카락을 해석하는가. 수
-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전문
분명하게 해석되지 않는 기이하고 모호한 세계 앞에서 소녀들은 의문을 품은 채 머뭇거린다.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에서는 "머리카락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왜 머리카락은 끝없이 자라는가"라고 묻는다. 세계가 해석되지 않음으로 내 마음의 지향이 애매해지기 때문에 이런 물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머리카락이란 무엇인가」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얘기이다. 김행숙은 이 평범한 소재를 전혀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든 미용실들"은 "기이하다. 미용실은 사방이 거울로 장식된 실내다. 거울, 환영적 동일성을 생산하는 기계들! 미
용실은 거울이 만드는 불가해한 비밀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엄마와 언니들의 수다가 꽃피고, 그 수다 속에서 여성―되기 서사가 수태된다. 또 한편으로 미용실은 거울과 가위 같은 도구들의 세상이다. 도구들은 “발전의 발전"을 하며 진화하는 것들의 표상이다. “미용실에서 지구인이 외계인인 척하며 걸어 나오고 외계인이 지구인인 척하며 걸어 나와서∙∙∙∙∙∙ 우리는 하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둘이다. 우리는 셋이다. 우리는 넷이다. 우리는 다섯이다. 그렇게 말해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침묵으로 돌아갔습니다. 각각의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곳은 "거울의 혼동이 가득한 곳"
이다. 거울의 혼동? 거울은 무수한 '나'를 복제한다. 하나인 '나'를 작게 쪼개서 둘로, 셋으로, 넷으로, 다섯으로 만든다. 거울은 하나인 '나'를 무수한 '나'로 복제하고 분화하는 기이한 물건인 것이다. 거울의 효과는 자기와 이미지의 분리인데, 이로 인해 자아의 소외와 파편화가 일어난다. 이렇듯 거울은 '나'를 둘러싼 견고한 자기동일성의 신화를 해체함으로써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거울로 이루어진 미용실은 거울을 통해 "파편화된 신체 "이미지의 확장" (라캉)이 일어나는 장소이고, 다시 그 거울을 통해 질서의 세계에서 무질서의 세계로 탈주하는 문턱이다. 그 문턱을 넘어서면 일상과는 분명하게 다른 환상계가 펼쳐진다.
4. 욕망은 욕망의 징후다
'나'는 주체적 삶을 살아내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타
자의 욕망이 만드는 관계망 안에서 '나'의 위치를 세워야만 한다. 그런데 타자의 욕망은 늘 모호하고 예측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제 욕망이 타자의 욕망함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바로보지 않음으로써, 즉 타자의 욕망이 만드는 관계망 안에서 작동하는 제 욕망을 보지 못함으로써 제 욕망 안에서 길을 잃은 자의 비극을 보여 준다. 모든 '나'는 타자, 이 수수께끼 같은 '당신'의 욕망 앞에서 '나'를 결여한 채 외재화한다. 김행숙은 이 비극의 외재화를 이렇게 시로 쓴다.
지구가 돌아왔으므로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
그렇다면 좋겠어
나는 최초의 인간들이 떨면서 기다리던 봄처럼
1년 후에
또 시작하고 싶어
반복하고
그렇지만 네게 욕하지 않을 거야.
식물을 기르고
분갈이를 해줄 거야.
죽이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화분의 둘레를 알아?
네 질문은 언제나 난센스 퀴즈 같다
공원에 가자
산책로의 끝에서 내가 상상한 답을 들려줄게
같이 웃자
시장에 같이 가자
반복하고
반복해
1년 후에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지구를 또 비추는 햇빛은
또 찡그리는 너의 이마 위에도
그렇지만 나는 웃으며
꽁치 한 마리를 네 눈앞에서 시계추처럼 흔들지
그렇지만 너는
1년 후에는 외국에 공부하러 갈 거라고 말하지
-1년 후에 전문
<1년 후에>는 시간의 경과가 가져오는 변화를 따라간다. 1년 후는 '나'와 '당신'의 근미래다. 그 근미래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의 반복이다. 1년이 지나면 지구는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이마에 닿는 햇볕은 따뜻해진다. 봄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식물을 기르고 분갈이를 해주고, 나는 당신과 함께 시장에 간다. 겉으로 보기에 시간의 순환과 함께 모든 일들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그 반복에는 어긋나는 틈들이 생긴다. 당신은 1년후에는 외국에 공부하러 갈 거라고"말한다. 이 예기치못한 타자의 욕망이 드러내는 수수께끼 앞에서 '나의 욕망은 어긋나고 여지없이 '나'의 바깥으로 나뒹굴어진다. '나'의 나-됨은 '나'의 욕망함에 의해 구축되는 것일 텐데, 그것 안에 '나'를 결여함으로써 '나'의 나됨은 한없이 미루어진다. 거꾸로 보자면 내가 타자의 욕망에 의해 소외되듯이 타자들 역시 나의 욕망에 의해 소외
를 경험할 것이다. 라캉의 언표가 정곡을 찔렀듯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곳에 '나'는 없다. 거기에는 욕망의 타자인 '너'도 없다. 다만 뜬금없이 던진 '너'의 물음, 즉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화분의 둘레를 알아?" 라는 말만 메아리로 떠돈다. 아울러 '나'가 사라진 현실에는 타자의 욕망에서 밀려난 '나'라는 기표들이 "난센스 퀴즈" 처럼 떠돈다. 1년 후에, 우리는 함께 웃고, 먹고, 걷고, 그리고 각자의 길로 헤어질 것이다.
5. 나의 욕망함은 곧 너의 욕망함이다
랄랄라 나는 너만 보호하네. 너는 천사의 그런 속삭임을 듣고 싶다.
너는 지금 무척 아프고 헛것을 보고 있으니까. 헛소리를 하며 공중에 손을 휘휘젓고 있으니까. 너는 계속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다. 꿈속에서도 그렇군.
오늘 새벽에 나는 네 꿈의 표면에서 땀을 닦아 주는 천사야. 그것은 오래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이야. 땀이나 눈물 같은 것으로 손수건을 흥건하게 적시는 그런 일들.
그런 손수건을 쥐고 있으면 절대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너의 땀. 그리고 너의 눈물. 참 신기하게도 내 것과 똑같은 맛이 난다.
얼음주머니를 너의 뜨거운 이마 위에 올려놓고 나는 소곤거린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는 네가 아주 가까운 데 있다는 걸 뜻한다.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들을 수 없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조심하고 싶다.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발걸음 같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너만 보호하네.
나는 보일 듯 말 듯, 들릴 듯 말 듯, 나는 티를 내지 않는다.
너는 축 늘어졌구나, 그것은 쉬기에 좋은 자세야. 다시는 서서 걸어다니지 않을 것처럼, 다시는 노동을 구하지 않을 것처럼. 너는 달콤해진다. 설탕물이 끓듯이.
왜 너의 쉬는 시간은 검은 사탕이 될 때까지 펄펄 끓어야 하는지. 나는 젖은 손수건을 쥐고서 검은 사탕은 총알을 닮았군,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를 생각하면 항상 이상해진다.
그래도 나는 날개를 접고 생각한다. 이크, 이렇게 오래 머물다간 날개가 쓸모없어져 버리겠군.
- 유령 간호사 전문
우리는 욕망의 존재로서 산다. 우리가 이 거칠고 야만스러운 삶을 견디며 살아내게 하는 힘은 대부분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나 자신의 그것과 타자의 그것이 뒤섞인 욕망이다. 온전히 내 욕망은 아니다. 오히려 내 욕망보다는 타자의 욕망을 훔쳐서, 마치 그것이 오래 전부터 내 것인 양 여기며 산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람은 제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사는 것이다. “너의 땀. 그리고 너의 눈물. 참 신기하게도 내 것과 똑같은 맛이 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키스를 하고 싶은 순간은 내 안에 결여된 타자를 향한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며, 동시에 내 존재 저편에 있는 타자의 욕망함을 방임함으로
써 그 욕망을 훔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파블로 네루다, 젊음」)은 타자의 욕망이 만든 격동을 내 욕망 안에서 승인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을 점유하는 행위다. 키스가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면 그렇게 달콤했을 리가 없다. 이렇듯 키스는 내 욕망을 빌어 타자의 욕망을 살아내는 것이다. 김행숙은 이 키스를 "두개의 목이 서로의 얼굴을 바꿔 앉을 때 / 내 얼굴이 너의 목에서 돋아나왔을 때" ('숲속의 키스」 『이별의 능력』)이
루어지는 것이라고 쓴다. 시인이 꿈꾸는 “다정함의 세계" 란 키스들로 가득 찬 세계일 것이다. 김행숙의 소녀들은 겉으로는 순진하고 발랄하지만 속으로는 발칙하다.
어른이 되기 전의 순진함을 내면화하고 있으면서도 제 욕망이 타자의 욕망과 연루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자로 부르면 저는 여자로서 몰입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타자의 욕망을 빌어서 가까스로 나-됨의 삶을 세울 수밖에 없는, 존재의 하염없음을 드러내며, “제 꿈을 휘저으세요.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습니다.”(「호르몬그래피」 「이별의 능력』)라고 할 때 꿈과 무의식에 있는 내용물조차 타자의 담론과 타자의 낯선 욕망이 만든 것임을 고백하게 한다. 아마도 그런 연유에서 라캉은 사람의 무의식에는 “타자의 담론”이 들끓는다고 말
했을 것이다. 김행숙의 시적 상상력은 욕망의 풍경들을 발화점으로 삼는다. 우리가 그 풍경에서 읽는 것은 기이하고 모호한 세계 안에 있는 순진하면서도 발칙한 모순형용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소녀들의 욕망함이다. 아니 그 욕망함에 숨은 타자의 무의식과 낯선 욕망함들이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누구도 노래하지 않은 그 미답의 영역에 대한 노래를, 메아리도 없는 노래를 홀로 불러온 김행숙의 노고에 대해 이번 노작문학상의 수상이 작게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수상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