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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15. 연합의 비밀
2021. 4. 16. 이현래 목사
지난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해도 해도 끝이 없으나 오늘 한 번 더 하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섬기는 기독교회가 뭔가 좀 잘 안 되었다. 뭔지 모르지만 바람직한 것이 못 되어 있다는 것은 다 인식을 할 것이다.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신약의 최종 목표, 아니면 구약과 성경 전체의 최종 목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가 그것이다.
칼빈은 구원론에서 최종 목표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싹 빼먹어서 어디 가고 없다. 거의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연합을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하면 루터와 칼빈이다. 루터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깃발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의로워지겠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다는 그 조건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긴다는 것과 의롭게 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 죄가 없다는 것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봐준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다. 결국, 의롭다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봐준다는 말이다. 이신득의, 이 사상이 루터로 시작되어 칼빈에 와서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개신교는 목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으로 세상에서의 구원의 전부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내세관을 가졌다. 우리 육신이 있는 동안에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뿐이지만 내세에 가면 우리가 의롭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 때문에 의로울 수 없으니까 육신을 벗으면 의롭게 된다고 일반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막혀서 진전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육신이다. 그런데 예수를 누구로 보는가? 성육신하는 분으로 보는 것은 다 맞는데, 아예 하늘에서부터 성육신하여 내려온 것처럼 그렇게 잘못 생각한다. 사람으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말을 하려면 상당히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선천적으로, 선재적으로 신성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 사람으로서 성육신 했다고 하면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삼위일체의 교리도 핵심도 결국 예수님의 선재성, 신성을 가졌다는 것, 신성을 아예 선제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을 확립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예수와 우리가 어떻게 연합을 하겠는가? 불가능하다.
거룩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룩하게 되고 그 다음의 연합인데 거룩하게 됨이라는 목표가 알고 보면 결국은 신성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말이 신성하게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니까 거룩하게 되려면 하나님과 거의 같아야 한다.
이것이 천주교에 오면서 수도원도 되고 수녀원도 되고 이런 것이 많이 되었다. 왜냐하면 육신과 세상, 이것이 우리를 속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려고 그 고생을 하는 것이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주상성자라는 말이 있는데, 돌기둥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평생을 사는 것이다. 얼마나 고생스럽겠는가? 심지어는 오금이 썩어 구더기가 났다는데 그것을 견디는 것이 보통 일이겠는가 그 한 사람뿐이 아니고 그런 일이 굉장히 많다.
불교에도 그런 일이 있다. 수도를 하기 위해 육신을 어떤 것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엄청나다. 석가모니도 그랬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 그랬다가 ‘이것이 아니다.’ 하고 우유 한잔 먹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석가의 고행 상이 있다. 뼈만 남은 상이다. 그때 당시를 말하는 것이 고행 상인데 우유를 먹고 다시 수도했다는 말이 나온다.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종교가 거의 다 일반이다. 육신과 세상이 우리의 거룩한 생활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을 정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절에 가니 스님이 그런 얘기를 했다. 절에 가면 대부분 달마상이 있다. 아주 흉측하게 생긴 얼굴이다. 왜 그렇게 흉측하게 얼굴이 생겼는가? 원래 그런 얼굴이 아닌데 9년 면벽을 했다. 9년간 벽만 보는 수양이다. 아무것도 안 보고 벽만 보고하는 수양을 하고 도를 얻어 나오는 길이었다. 어디 오다 보니 큰 호수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멱을 감고 있는데 뒤에서 악어가 잡아먹으려고 쫓아 가길래 그 사람을 구제하려고 자기 몸을 잠시 벗어 놓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 사람을 구제해서 나오니까 어떤 사람이 흉측한 얼굴을 놔두고 자기 얼굴을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몸은 옷처럼 입었다 벗었다 한다고 한다. 자기 몸을 벗어 놓고 갔다 와보니 자기 몸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얼굴이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것이 9년 면벽의 결과이다. 그만큼 수도를 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어려운 수도를 해서 도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육신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을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성결의 생활, 거룩한 생활을 하려니까 기독교도 당연히 그런 길로 갔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게 되는가? 그게 안 된다. 끝도 갓도 없다.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하게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 다음 단계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가능하겠는가? 거룩한 생활이 돼야, 거룩이 돼야 그 다음에 연합이 될 텐데 거룩에서 안 된다.
믿음은 그냥 공짜로 받았다고 하자.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하자. 그러나 거룩은 공짜로 받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칼빈은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말을 썼다. 성령의 도우심이면 안 될 것이 있겠는가? 다 된다. 그러면 사역이 필요하지도 않고 사람이 필요치 않다. 성령이 하실 일이면 사람이 하겠는가.
거룩하게 되는 것도 내 힘이 들어가야 되고, 그 다음에 연합에 이르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자격이 내 힘으로 갖춰지겠는가? 결국은 또다시 벽이 부딪히니까 이 문제도 결국 성령으로 맡긴다.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말인데 맞는 말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될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멸망당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결론에 오게 된다. 멸망 받을 자와 구원 얻을 자가 갈라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은 우리 창조자이고 더군다나 아버지라고 여긴다면 더군다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아들이 열 명 있는데 다섯 명은 합격했는데 다섯 명은 불합격했다. 열 처녀의 비유도 그런 것이다. 다섯 명은 준비가 다 되었는데 다섯 명은 준비가 안 되어서 떨어졌다. 성경에도 그런 것이 많아 나온다.
이런 수준에 있는 것이 기독교였다. 종교개혁도 왜 일어났는가? 천주교에서 잉여공덕설, 공덕으로 구원을 받고 또 공덕이 남으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것에 대해 루터가 논박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단으로 정죄했기 때문에 이것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도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었으면 그렇게 크게 확산 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유럽의 여러 제후들은 로마 교황청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제후가 되려면 교황의 서품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이 모두 천주교인이기 때문이다. 제후들이 모두 가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런데 점점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제후들의 힘이 세지니까 그것이 불편했다. 독립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거기서 제일 먼저 빠져나간 것이 영국이다. 종교개혁 이전에 벌써 영국은 빠져나갔다. 헨리 8세의 결혼이 문제가 되어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영국에서 대주교를 세워서 새로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성공회다. 그것은 영국 교회고 영국의 국교이다. 그리고 상당히 시간이 흐른 후에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영국이 제일 먼저 뛰쳐나간 것이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일본도 그렇게 된다.
그런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만을 가지고 버티려니까 이것이 안 된다. 우리가 그렇게 해왔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들을 때 참 좋았는데 뭐가 되는 것이 없다. 그것만 가지고 사람이 변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새로운 세계가 오는가? 그것도 아니다.
결국 문제는 칼빈이 제시했던 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셈이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고 세상에 전파했다. 전부 다 천당에 갈지 안 갈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천당이 좋다 하더라도 갈지 안 갈지 모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것이 구원파 사건이다. 그때 당시에 한국의 기독교인치고 누구든지 나는 내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다, 나는 천당에 갈 확신이 있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나에게 물어봐도 그랬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만 아실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구원파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성경 구절을 내놓고 죄를 다 사하지 않았느냐?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다 없어지지 않았느냐? 이렇게 하니까 죄 문제로 아주 고민하던 사람들이 해방을 받았다. 나는 죄 문제로 고민을 안 해봤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도 저런가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발이 땅에 닿는지 모르고 6개월을 돌아다녔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까 진동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때 극동 방송에서 권*찬 목사가 새벽에 은혜의 아침이라는 성경강해를 했다. 하도 그래서 한번 들어봤다. 그때 고린도전서인가를 했다. 그리고 서울 교육회관에서 특별집회를 한다고 해서 가봤는데 나는 들어봐도 그 말이 그 말인데 죄 문제로 고민하던 사람들은 해방이 됐다.
그래서 제일 손해를 많이 본 것이 장로교회다. 물론 장로교가 많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대변동이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장로교는 두 번 큰 변혁을 일으켰는데, 순복음교회가 일어나서 한번 큰 손상을 입었고, 구원파가 일어나서 또 손상을 입었다. 두 번 당하고도 원체 세력이 크니까 남았다. 작은 것 같으면 없어졌을 것이다. 두 번 당하고도 더 열심히 해서 더 커지고 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답이 없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교회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 개인이 뭔가 확실한 답이 마지막에 없다. 평생 나는 예수 외에 다른 것은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이 따라온 형제들이 다 있는데 내가 설교라고 해 본 것이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니까 예수님과 나는 무슨 관계인가? 이렇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것이 나와 별로 관계가 안 된다. 그 죽으심이 관계가 안 된다. 성경에서는 대부분 대속에 대해 말한다. 구약에서 제물이 나를 대신한 것처럼 신약에 와서 예수의 죽으심이 나를 대신한 것이라고 이렇게 대속을 말하는데, 나는 그 대속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어떻게 내 죄를 대속하는가? 그리고 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나가 대신 속죄를 받아야 하는가? 이것을 모르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마지막까지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찾다가 어찌하다 보니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갈 데는 거기 밖에 없었다. 내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예수와 연합이 되겠는가? 아니면 믿음의 한계가 극복되어서 예수하고 연합이 되겠는가? 내가 언제 성결의 생활에 이르러서 예수하고 연합이 되겠는가? 이것 자체가 나한테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슨 죄가 그렇게 없다.
심지어는 부흥회 참석할 때마다 그 얘기가 나온다. 첫째 날 회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 민망했다. 옆에서는 가슴을 치고 울고 통곡하는데 통곡할 일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젖 먹을 때 일부터 생각해보라는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젖 먹을 때 엄마 젖꼭지를 물었다고 지옥 갈 일인가? 그런 일도 없지만 있어도 모르고 나는 그것이 숙제였다. 다른 사람은 별로 숙제로 생각하지 않는 문제인데 내가 별났는지 숙제가 되었다.
결국 우리에게 전해진 예수, 우리가 알았던 예수에게는 내가 설 자리가 없다. 그분을 섬기기도 바쁘고 따라가기도 바쁘고 그분을 본받는다는 자체도 나한테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켐피스)’라는 책이 있는데 다 들어봐도 내게 해당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의지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못하는 사람이다. 태어나기를 약하게 태어났고 병도 들었고 그래서 어려운 그것을 못 하는 사람이다. 내 의지를 동원해서 하는 일을 못 하는 사람이다. 금식기도 한번을 못 해봤다.
C.C.C.에서 3일 동안 금식하는 날이 있었는데 못 견디겠더라. 속이 아프니까 밥을 안 먹으면 속이 아플 뿐만 아니라 한 끼만 굶어도 기운이 다 빠진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이 된다. 왜? 어려서부터 그렇다. 한 끼만 안 먹어도 손이 떨리고 몸이 떨리는데 어떻게 금식을 하겠는가? 결국 내가 C.C.C.에서 밀려난 것도 금식기도에 참여를 못 해서 밀려났다.
그해 겨울방학에 김*곤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선포했다. 왜냐하면, 내년에 2만 명 학생집회를 하자고 선포를 했는데 2만 명을 모집하려니까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늘 하시는 말씀이 강을 건너려면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주장해왔던 분이다. 도저히 길이 없으니까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간사들을 모두 불렀다. 나는 아예 금식기도라고는 내 생에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못 갔다. 또 내가 안 가니까 재승 형제도 안 갔다. 그래서 대구에서는 안 갔다.
그런데 그 집회에서 C.C.C.에서 큰 변란이 일어났다. 엑스플로 74를 통해서 한 오십 명에서 육십 명이 되는 간사가 새로 들어왔다. 이것은 C.C.C.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공채를 하지 않는다. 거기서 학생을 양성해서 간사를 쓰지 외부 간사를 쓰지 않는데 그때 홍*길 목사 일행이 이탈했기 때문에 엑스플로74라는 큰 집회를 앞두고 중요한 사람들이 이탈했다. 그래서 김 목사님이 할 수 없이 급하게 광고를 해서 우리가 들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하지만 벽을 넘어야 하므로 금식기도를 선포했다. 금식기도를 갔던 사람들이 자기가 직접 신앙에 고민이 있어서 금식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단체적으로 부름을 받아서 금식기도를 갔으니 제대로 되겠는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어느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막상 하려고 했다. 어디나 그런 사람이 다 있지만 소위 터줏대감이라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C.C.C.가 순수성을 잃었다. 엑스플로를 하느라 외부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순수성이 없어졌으니 이것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거기서 정해진 것이 살생부이다. 이번에 제거하고 순수한 사람들만 남기자. 이렇게 되었는데 그중에 나와 재승 형제도 포함되어 있어서 밀려난 것이다. 나는 금식기도를 못 해서 밀려났다. 그때 금식기도를 한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전혀 후회가 없지만 금식기도를 못 하니까 밀려난 것이다.
그때 서울에 올라가니 난리다. 갑자기 30명을 감원했으니까 어찌 되겠는가? C.C.C.간사는 아무 보장이 없다. 처음에 들어가니까 우리는 Campus crusade이다. 이것은 직장이 아니다.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서 들어오라면 들어오고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김 목사님이 그 얘기를 당당하게 했다. 나는 그 말씀이 아주 권세 있게 들렸다. 왜냐하면 나는 4년 동안 기독교 교단에서 권위와의 전쟁을 하다 나왔다. 그런데 그때 김 목사님에게 그 말을 들을 때는 너무 권세가 있고 너무 당당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할 정도로 김 목사님을 따르게 되었다. 너무 권세가 있었다. 거기서 나가라 하면 나가는 것이다. 이의가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그리고 아무 보장도 없다.
그때 그것이 결정되어 금식기도를 하기 전에 간사들이 그 문제를 제안했다. 우리는 젊은 청춘을 여기 바쳤는데 중간에 갑자기 그만두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직장을 그만두고 일하던 사람들에게 나이 좀 들었는데 그만두라고 하면 어디로 가겠는가? 누가 밥을 주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보장해달라고 간사들이 요청했는데 김 목사님이 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여섯 시간을 해명을 하고 다 들어주기로 하고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이 사정을 내가 안 갔는데 어떻게 아는가? 충주에 있는 장*호 형제가 참여를 해서 그 사정을 자세히 알았다. 중간쯤 하다가 이 형제는 뛰쳐나갔다. 그런데 또 한사람 김*현 형제가 있는데 이 형제가 갑자기 C.C.C.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약간 거짓말도 들어 있는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병원에 전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전도되어 C.C.C.에 들어왔는데 그때 굉장했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대강당에 나와서 간증하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C.C.C.에서 사방 학교를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그런 사람인데 그 집회에 참석을 했는데 이제 이방인으로 들어온 사람인데 금식기도를 하겠는가? 그래서 금식기도 하는 동안에 김 목사님 방에서 김 목사님을 수발들도록 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아는데 이상하게 우리 교회에 왔다. 그래서 상세히 안다. 누가 뭐라고 했는지 어찌 되었는지 김 목사님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했는지도 다 알게 되었다.
김 목사님이 나를 알게 되는 기회가 있어서 살생부가 들어오니 이 목사는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얘기를 하여 할 수 없이 승낙을 했다는 말을 그 형제가 말을 했다. 그래서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C.C.C.를 나왔는데 그때 안 나왔으면 여러분을 못 만난다. 나는 어디로 절대로 떠날 사람이 아니다. 또 떠날 데도 없고 그런 능력도 없고 C.C.C.가 좋았기 때문에 나는 딴 데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C.C.C.에서 나가라고 해서 나오게 된 것이 오늘 대구교회가 된 것이다. 내가 교회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내가 교회를 나올 때 다시는 교회를 들어가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왔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조가 마땅치 못하고 어느 교회를 가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C.C.C.는 전도기관이니까 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웠다. 그런데 내가 교회를 또 하겠는가? C.C.C.에 오던 학생들 중에 몇 사람이 따라 나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모임을 가지면서 오늘 교회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못 있었다.
있게 된 원인은 재승 형제 때문이 첫째이고, 두 번째가 학생들 때문이다. 내가 재승 형제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승 형제도 대구가 객지이다. 갑자기 그만두라고 하니 어쩌겠는가? 나는 그때 집이 충북 제천에 있었다. 주말마다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인데 재승 형제가 거취를 결정해야 나도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재승 형제 거취가 결정될 때까지는 대구에 있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 이 교회가 된 것이다. 대구교회가 있게 된 원초적인 기초는 재승 형제에게 있다. 그때 학생들은 자취하고 하숙하는데 내가 있을 데가 없었다. 당연히 제천에 집이 있으니 그리 갈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못 갔다. 그래서 대구교회가 되었다.
모이다 보니까 자꾸 사람이 모이고 지금 현재 자리까지 오기까지 이사를 열 번했다. 나는 교회 짓는 것은 엄두도 못 하고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를 지으려면 얼마나 고생하는가? 교회 짓다가 분열되고 싸우고 별일이 다 있다. 그런 일은 질색이라 생각도 안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교회를 짓는데 40년이 걸렸다. 오죽하면 40년이 걸렸겠는가? 저것도 형제들 속에서 이 말이 나와서 지은 것이지 내가 한 번도 교회 짓자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장소는 여러분이 알아서 해라. 나는 내 할 말 하면 그만이니까 탁자 하나 있으면 되고, 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와서 들으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정말 집 짓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왜? 집을 지으면 좋지만 그 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감당할 자신이 없이 해놓고 중간에 가서 1층 세워놓고 부흥회하고, 2층 세워놓고 부흥회하여 집을 짓지 못할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못된다. 그런 사람은 대단하다. 몇 년씩 걸려 짓는다. 1층 짓고 부흥회 하고, 2층 올려놓고 돈이 없으면 부흥회하여 짓는다. 건축 경기가 좋을 때는 건축가들이 교회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진력난다고 한다. 그리고 입은 많아서 오는 사람마다 말을 댄다. 장로마다 와서 이러니저러니 하니까 일도 안 되고 돈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짓던 곳은 원체 일이 없어서 대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말이 곁길로 나갔다.
교회가 숙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숙제를 가지고 있다. 칼빈이 이것을 제안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근본이다. 신약이라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지금 해석하기를 선재적으로 됐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도 안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오는 혜택이 없다. 그것은 연합이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라고 말했으니까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말을 생각하면 참 신비로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는가? 이제 연합을 알고나서보니까 하나님이 원래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과 연합을 하도록 지었다. 원래가 사람과 연합해야 하나님도 일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은 손이 없고 발이 없으니까 손이 있고 발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땅 위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가지려면 반드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갈망은 사람과의 연합이다. 많은 것이 있지만 유일한 희망은, 갈망은 사람을 얻어서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육신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승리다. 완전한 승리이다. 창조의 완성이다. 그런데 예수님만 성육신 하고 말면 어쩌겠는가? 그러면 나라가 되겠는가? 안 된다. 성육신을 신비로운 것으로 말해 버렸기 때문에 이 성육신이 무효가 되었다. 아무 효과가 없다. 원래는 예수와 한다는 말이 아니고 당신이 지으신 사람과 연합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나라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원래 지어질 때 여자로 말하면 시집가도록 지어졌다. 시집을 가야 아기를 낳도록 지어졌다. 시집을 안가고 혼자 살려면 어렵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집을 안가면 아기를 못 낳는다. 아무리 못난 여자도 시집가면 아기를 낳고, 아무리 잘난 여자도 시집을 안가면 아기를 못 낳는다. 이것이 창세기 2장 마지막에 나온 말이다.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 중요한 것을 빼버렸다.
어떻게 사람과 하나님이고 연합을 하는가? 이미 벌써 그렇게 돼 버렸기 때문에 그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을 못하면 창조자체가 다 아무것도 안되고 마는 것이다
사탄이 왜 선악과를 먹였는가? 분열하게 하려고, 연합하지 못하게 하려고 먹인 것이다. 악한 일을 못하게 하려고 먹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그것이 목표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어디로 가는가? 바벨론으로, 바벨탑으로 간다. 그래서 흙으로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인데 흙을 이겨서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무엇인가? 흩어졌다는 것이다. 서로 흩어져서 언어를, 말을 못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끼리도 말을 못 알아듣는데 하나님과의 사이에 말을 알아듣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럴 때는 칼빈의 절대 은총론이 맞다. 절대 은총으로 우리가 말을 듣지 사람 속에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안에 영이 있으니까 듣는다는데 그러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영으로 나팔 불면 되는 것을 뭐가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그것을 하지 못하겠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기능이 없다. 전적으로 은혜다. 칼빈주의의 대 원칙이 전적인 은혜다. 바르트도 그렇다. 그 위에 신학이 세워져 있다. 전적인 은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전적인 은혜다. 우리에게 뭐가 있어서가 아니고 전적인 은혜다. 그렇다면 거룩하게 되는 것도 전적인 은혜다. 연합도 전적인 은혜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전적인 은혜가 언제 오느냐다. 언제 사람에게 와서 그게 가능해지겠는가? 어떤 개인이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가 되겠는가? 어떤 개인이 혼자 예수 같은 사람이 나와서 될 수는 있겠지만 온 인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안 된다.
기독교인들이 잘못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길이 잘못되어서 안 된다. 다 잘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목숨을 버리고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전체 인구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70억 인구가운데 몇 명이 되겠는가? 30억 인구의 몇 명이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 목적이 달성되겠는가?
이 비밀이 해결이 안 되면 아무리 믿고 선교하고 다 해도 헛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헛일이다. 농사지었는데 기껏 지었는데 마지막에 열매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쭉정이만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나를 거두었더라도 열매가 있어야 되는데, 씨 하나 심어서 씨 하나 거둔다면 말이 되겠는가? 어느 생명이든지 하나 심어서 하나 열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물에 속하여 있는 식물도 씨 하나 심어서 하나 열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없어진다.
지금 인구가 불어나지 않아서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둘만 낳아서 잘 키우자 했는데 둘만 낳으면 본전이다. 본전인데 교통사고로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밑진 것이다. 그러니까 인구가 점점 줄어진다.
5.16 혁명 이후에 그 계산을 잘못했다. 사람이 많으니까 먹을 것이 없으니까 인구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피임, 산아제한을 공공연히 인정했다. 당시에 산부인과가 인기가 제일 많았다. 왜냐하면 돈을 제일 많이 벌었다. 그 돈이 대부분 낙태수술이다. 당시의 여자들 중에 낙태수술을 안 해 본 사람이 거의 없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했다. 왜냐하면 한참 경제가 발전을 하니까 일을 해야 되는데 아이들이 많으면 일을 못한다.
지금 인구가 줄어서 초등학생이 1/3도 안 된다. 내가 아는 소아과 병원이 처음에 들어갔을 때 있던 사람에 비해서 나중에 가니까 인구가 1/3로 주니까 소아과 환자가 1/3으로 줄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지금 학급수를 늘려서 80명 콩나물 학교가 이제는 20명에서 15명으로 줄어서 유지하고 있다. 아주 학교는 이상적이다. 한 학급에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이 있으니까 아주 이상적이다.
그런데 인구가 줄면 경제발전이 안 된다고 한다. 적당한 인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큰 문제가 인구문제이다. 선진국일수록 다 그렇다. 선진국은 인구가 줄고 아프리카 같은 곳은 인구가 늘어난다. 미국도 흑인은 무작정 낳으니까 흑인들은 늘어나고 백인들은 줄었다.
하나님도 큰일이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나님 노릇을 하겠는가? 생각해봐라.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 하나님이 사람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 나라도 자연히 줄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기계화되고 과학적으로 되더라도 인구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없어질 수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애기를 안 낳을 수가 없다. 천하장사도 안 된다. 그것은 사탄이 없앨 수가 없다. 지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없애 버릴 수가 있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없앨 수가 없다. 그래서 한 가지 희망은 그것밖에 없다.
유럽에 가니까 벌써 20년 전에 아들이 있는데 결혼을 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아버지가 하는 말이 살아보고 한다는 것이다. 결혼은 하지 않고 일 년 간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미국도 그렇다고 한다. 살아보고 결혼을 하는 추세를 갖고 있다. 지식은 옳으면 옳을수록 의심이 생긴다. 배운 사람들이 그런다. 안 배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배울수록 사람에 대해 신뢰가 가지 않는다.
살아보고 살만 하면 결혼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어찌되겠는가? 우리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서 백일기도를 하고 낳았다고 한다. 나는 백일동안 기도하고 낳은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애기 더 낳을까봐 잘라버린다.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더라면 낙태되어 버렸을지 알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라도 낳으려고 하는 때에 있었으니까 재수 좋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절대로 필요하신 분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괴롭고 어려우니까 도움을 받으려고 하나님이 필요한 이유이다. 원시종교부터 시작해서 고급종교에 이르기까지 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고 자기 생존에 관계된 문제이다. 하나님이 생존하시려면 산 자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냥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갈망은 절대적 갈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여자들은 결혼할 때, 여자들이 신경을 써야 된다. 잘못하면 안 되니까 남자가 괜찮은지, 돈벌이는 제대로 하는지, 앞으로 바람을 안 피울지, 이런 것을 여자 입장에서는 다 계산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어디 혼자 갖다 놓아도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무인도에 둘이 놓아두면 금방 애기 소리가 난다. 그것이 남자들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고르고 있다. 어느 하나님이 좋은가 고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느 인간 이런 게 없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심히 좋다고 했던 것이 인간을 놓고 악하면 인간이 무지무지 악하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인간을 만들어 놓고 심히 좋다고 했겠는가? 또 사탄이 와서 이래저래 유혹하면 넘어가는 인간을 놓고 심히 좋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이 원체 가난하니까 심히 좋은 것이다. 가난이 반찬이라고 인간이면 다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인간이면 다 된다. 그렇게 가난한 분이다. 인간이면 된다. 그래서 인간을 찾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것은 하나님이 먼저 찾은 것이지 사람이 찾은 것이 아니다. 동산을 나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것도 무엇 때문에 왔는가? 제사 드리려고 왔다. 제사는 왜 드리는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 보려고 지낸 것이 제사이다. 그래서 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찾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배필을 찾는 것이다. 연합할 자를 찾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남자들을 놔둬보라. 어디에 여자가 있는가 하고 눈이 빨개서 돌아다닌다. 그래서 해군 기지가 있는 곳에 창녀촌이 있다고 한다. 바다에서 15일간 떠 있다가 오면 눈에 뵈는 게 여자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항구에 가면 전부 창녀촌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에 떠 있다 보니까 민간인을 약탈한다고 한다.
남자는 동물이나 마찬가지이다. 여자들이 남자가 미우면 동물이라고 한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남자는 동물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는 그런 얘기를 한번 들어보았다. 여기 남자들이 대부분이고 여자가 몇 명 없는데 경험이 있으니 알 것이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조금 싫으면 동물이라고 짐승 같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다.
사람도 하나님에게 조금만 하나님이 잘못하면 그게 하나님이냐? 그렇게 된다. 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안 믿는다고 한다. 신은 죽었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인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쫒아 다닌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이야기, 집을 빠져 나간 아내를 찾으러 보리 한 말 가지고 쫒아 다니는 호세아 이야기, 이런 것이 다 하나님 얘기이다. 데려다 놓으면, 돈 주고 찾아다 놓으면, 또 나가고 또 돈 주고 찾아 놓으면 또 달아나버리는 이것이 호세야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를 묘사한 말이다.
사람은 불리하면 안 온다. 자기가 배고파야 오는 것이지 안 그러면 오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도 보면 배고프고 굶주리고 배척받은 사람들이 왔지 배부른 놈들은 아무도 온 사람이 없다. 오죽하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겠는가? 니고데모도 어렵게 찾아온 길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몰래 밤에 찾아왔을 때는 정말 얼마나 심각하면 찾아왔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번이 한 말이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해버리겠는가? 결국 니고데모는 끝까지 예수를 잘 모르고, 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위성처럼 예수 주변을 돌던 사람이다. 한 번도 예수에게 접근해 보지를 못했다. 자기 체면이 있으니까 또 결사적으로 대들 일이 없다.
이방 여자는 그런데 내 아이가 죽게 되었으니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했는가?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을 구하려고 왔지 이방인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고 아주 퉁명스럽고 냉정하게 말한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마15:27) 이런 사람이 예수께 왔던 것이다. 잘나고 넉넉한 사람이 온 것이 아니다. 전부 그런 사람이 왔다.
예수님은 시험을 하려고 사랑의 도전을 한 것이다. 거기서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같이 앉아서 먹던 유대인들도 할 말이 없다. 만약 그렇게 시험하지 않고 이 여자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사람들이 모두 뭐라 하겠는가? 이는 죄인의 친구다, 저런 여자를 받아준다고 비난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이 여자를 시험하니까 이 여자가 ‘옳습니다. 우리는 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내 아이가 죽어가고 있으니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보고 뭐라 하겠는가? 할 말이 없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예수께 온 사람은 이렇게 온 사람들이 진짜로 온 사람들이다. 배불러서 문화생활 좀 하려고 온 사람이 기독교인이 잘 안 된다. 여러분 목회 해보시면 알 것이다.
누가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가? 봐보라. 정말 가난하지 않으면 찾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으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막다른 골목이 아닐 때까지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아야 믿지 했다. 몇 년 동안 책도 읽어보고 만나서 친구랑 얘기도 해보고 여러 가지 해보았다. 아무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들대로는 설명한다고 하는데 그 설명이 나에게 이해 안 되었다. 내가 막다른 길에 딱 서니까, 내일을 모른다는 막다른 길에 딱 서니까 그때 내가 하나님이 인정이 되었다.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지금도 모른다. 그래도 인정이 되었다. 아! 나는 내일도 모르는 인생이구나. 나는 피조물이구나. 이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었다.
지금도 하나님 아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모른다고 한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발의 피지 아는 것이겠는가? 일부 조금 경험으로 아는 것뿐이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모른다. 경험한 것만 내가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경험했다고 해서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 다음에 가면 그 경우에 경험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전에는 이러니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나도 이번에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 전에는 내가 기도하기 전에 다 이루어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 앞으로 가면서 다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몸이 이런데 내가 기도해도 왜 기도해도 안 들어 줍니까?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옛날 같으면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싹 고쳐줄 것이 아닌가.
내가 결핵환자로 결핵병원에 입원했는데 결핵균이 마구 나오던 사람인데 두 달 만에 아무약도 못 먹고 누웠다가 검사를 하니까 결핵균이 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기도했는가? 아니다. 한마디도 기도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기도 할 줄도 모른다. 그런데 두 달 만에 균이 없어졌다. 병원에서 의심을 해서 몇 번을 검사를 했다. 또 검사하고 또 검사해도 균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병원에서 균이 없으니까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집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나왔다.
그때 하나님을 내가 그런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으면 지금도 그러면 된다. 그때보다 훨씬 쉬울 것 같다. 하나님이 일하기에는 그때 내가 결핵환자에서 고침 받을 때보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 숨통 열어주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런데 대답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전에 그랬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넜으니까 이번에 건너게 해주겠지 한다고 하면 안 된다. 이번에 홍해를 건너게 해줄지 안 건너게 해줄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경험으로 밖에 모르는데 그 경험마저도 내 것이라고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보았자 백날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여러분 찾아다녀보라 있는가? 찾아다니면 엉망진창 다른 것을 만난다.
예수를 만나냐 된다. 왜?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니까 이 사람을 만나야 내가 진짜지 하나님을 만나봤자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밤에 왔다느니 꿈에 왔다느니 음성을 들었느니 하는데 다 속은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것을 알아보려고 애를 많이 썼다. 음성 한번 들어보고 흔적이라도 봐보려고 했는데 안 되었다. 나는 안 되는구나 하고 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 서울에서 몇 년간 그러고 돌아다녔다. 삼각산 주위로 돌아다녔는데 안 되었다.
만날 자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게 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있다. 항상 그 자리에 가면 있는데 그 사람은 놔두고 딴 것을 만나려고 하는가? 그것은 싫으니까 안 만나고 번쩍번쩍하는 것만 만나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 예수가 만나지겠는가? 예수는 제자리에 딱 있는 분이다. 누구나 보면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왜 다른 예수를 찾는가? 그 예수는 빼놓고 다른 예수를 찾으려니까 예수가 만나지겠는가? 그러고 하나님 만나러 다닌다. 그런다고 제대로 하나님이 만나지겠는가? 그러면 속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예수나 하나님은 속는 것이다.
내가 일반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겠는가? 여러분이 다 목회자니까 마음 놓고 하는 것이다. 교회 가면 별 사람이 다 있다. 정말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있다. 없는 것이 아니다. 안수하면 병 낫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다 보았다. 그런데 나는 안 되었다. 다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된다. 그래서 쫒아 다니다 안 되니까 아니 하나님이 참 이상하네, 저런 사람에게는 다 해주는데 나는 왜 안 해주지,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도 혹시 그런 것 하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못한다. 똑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하는데 어떤 사람은 못 하는 것이니까 모든 사람이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야 될 곳이 딱 한군데다. 누구라도, 방언을 하든지 못하든지, 은사가 있든지 없든지, 잘났든지 못났든지 간에 사람이면 거기를 가야 된다. 그래야 내가 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못 내려오는 분도 만나지 못하는데 어디 가서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생각해보라. 만나지겠는가? 예수는 꼼짝 못하고 있다. 도망가고 싶어도 못 도망가고 있다. 하나님은 숨어 버리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찾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것이다. 쉽고 당연하기 때문에 다 피해 가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러기 싫으니까,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되기 싫으니까, 그런 분을 내 주님으로 하기 싫기 때문이다.
왜 예수의 신격화가 일어났는가? 세상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주님은, 내가 섬기는 자는, 내가 따르는 자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나가서 해보라. 나가서 나는 이런 사람을 따르고 있다고 말을 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당당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된다.
바울이 말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라고 말했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겠는가? 제대로 말하려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알고 보니까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너무 당당한 일이다. 거짓말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내가 모르는 얘기를 할 필요가 없는 얘기이다.
전에는 내가 성경에 있기 때문에 몰라도 했던 얘기이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판에 그것이 얼마나 애매모호한 일인가? 그래도 성경에 있으니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이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성경에 있던지 없더니 상관이 없다. 그렇게 담대해진다
그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그런데 나로 감춰지겠는가? 내가 그런 사람인데 나를 감춰놓고 사랑의 하나님 어쩌고저쩌고 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자신감이 없으니까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보았다. 예수같이 사랑할 수가 없다.
따먹지도 못하는 감 쳐다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기는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 맨날 사랑, 사랑하고 사랑 타령하고 노래나 부르는 것이 낫다. 유행가 가사를 보면 전부 사랑 얘기이다. 유행가 부르는 게 낫다. 내가 못하는 것은 안 해야 한다. 내가 감당 못할 것은 말도 안해야 한다. 성경에 아무리 있더라도 안해야 된다. 내가 성경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벌 받을 일은 없다. 내가 몰라서 안하는데 어쩌겠는가? 절대로 그것은 죄가 아니다. 내가 몰라서 안하는데 그것이 죄인가? 알고도 안하면 죄지만 몰라서 안하는데 왜 죄겠는가? 만약 그것이 잘못이라면 하나님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알려줘야 아는 것인데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배짱 좋은 영감인줄 몰랐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것을 말 안 해도 죄가 안 된다. 왜? 하나님이 나한테 알려줘야 내가 알지 내 스스로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죄가 안 된다. 오히려 안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된다. 모르는 얘기는 아예 안 해도 된다. 교회에서 안 해도 된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된다. 나는 안 가봐서 모른다고 하면 되지 가보지도 않은 것을 가본 체 하면 안 된다. 어떤 분이 묻길래 나는 안 가봐서 모른다고 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은총, 절대 주권을 생각해 보라. 그분이 알려주지 않으면 그분을 모른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분의 책임이지 내 책임인가? 생각해보라. 하나님 내가 당신을 모르는 것은 맞는 것입니까? 틀린 것입니까? 이렇게 물어 보라. 그래야 하나님이 대답을 해줄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모르겠다. 그것은 내 죄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려고 한 그것이 죄다. 경거망동하게 내가 피조물이 되어서 조물주를 알려고 하는 그것이 내 잘못이지 모르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결론은 결국 나도 모른다로 끝났다. 몇 년 동안 헤매다가 결론은 무엇으로 끝났는가?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니까 내 초라한 인간 이 자체가 확 드러났다.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니까 내가 드러났다. 초라하지만 드러났다. 아! 나는 피조물이구나. 내 뜻대로 할 수 없구나! 나는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리가 좁아졌는데 어찌 그렇게 편안한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그때 나는 너무 평안했다. 아무것도 없어졌는데 평안했다. 이것이 진실의 평안이다. 나는 그동안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온 구천을 헤매고 돌아다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그런데 모른다는 자리에 와보니 너무 편하고 시원하다. 무거운 짐이 다 없어졌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님에게 가면 뭘 쉬게 해주는가? 제한된 자리에 가면 내가 쉬게 된다.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까 쉬게 되는 것이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경험해 보면 된다.
예수와 연합! 왜 연합이 되나? ‘나’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늘이다. 오늘이 그날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그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다. 그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다. 너무 쉽게 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기도가 우리 안에 있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너무 쉬운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이것보다 쉬운 것이 없다.
예수를 내 안에 모시려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참 모시기 어려운 사람이다. 여러분 해보셨겠지만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 한번 모시고 다녀보라. 아침에 마음먹었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예수를 내 마음에 떠나지 않게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했다. 하루만 봐주세요. 오후에 와서 보니까 말짱 도루묵이다. 언제 내가 예수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다 잊어먹고 돌아다니다 와서 허탈했다. 새벽기도하며 기도했는데 저녁에 오니까 허탈하다. 아무것도 없다. 뭘 생각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뭘 생각해서 피똥 싸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있다. 뭐가 자기 맘대로 안 되면 피똥 싸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 안타깝지만 할 수 없다. 네 팔자다. 네 팔자가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누가 너 보러 피똥 싸라고 하더냐? 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동정이 가지 않는다. 힘이 좋으니까 저러지 힘이 없으면 저러지 못할 것인데, 힘이 좋으니까 피똥 쌀 데까지 하고 있지 나는 힘이 없으니까 도저히 못하겠다. 기어코 고집피우면 해보라 한다. 안될 것은 피똥을 싸도 안 된다. 될 것은 그냥 있어도 된다.
예수와의 연합은 너무 쉬운 것이다. ‘내가 그 안에’ 이것은 너무 쉽다. 그를 내안에 그러려면 어렵다. 그런데 내가 그 안에 보면 내가 그 안에 있다. 내가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를 한 치도 빗겨갈 수 없다. 그것을 내가 벗어나면 다 거짓말이다. 다른데 있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사람이 진실해지는 것도 양심을 닦아서 진실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알면 그것이 진실이다.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거짓말 못하고 거품도 없어지고 다 편하다.
예수와의 연합! 로마서 6장은 연합이다. ‘함께’! 함께 죽고 함께 산다.
옛날에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랐다. 어떻게 내가 예수와 함께 죽는가? 함께 죽으면 함께 산다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와 함께 죽는가? 순교하는 것인가? 순교하는 것도 함께 죽는 것이 아니다. 순교한다고 해서 함께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충성이다. 귀한 일이지만 함께 죽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같은 모양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너무 확실한 말이다.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나는 지금 내세를 생각하지 않는다.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 어떻게 하겠는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 내가 없는 내세를 만들겠는가? 지난번에 몇 시간 죽어 있어보니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몇 시간인가 죽어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 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은 천당 갔다 왔다는데 나는 천당은커녕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만일 그것을 증거 하게 하려면 그때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내가 지금 보고 온 얘기를 하지 않겠는가? 보고 온 얘기를 할 얘기가 없다. 죽은 후에 본 것이 없으니까 할 얘기가 없다. 어떤 사람은 가보고 어떻다고 하는데 나는 모르겠다. 그 사람이 안 되어봐서 나는 모르겠다. 나는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은 해도 나는 내가 안 봤으니까 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내가 본 것이 아니니까 죄가 아니다. 안 본 것을 봤다 하면 그것이 죄지 안본 것을 안 봤다고 하는데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무례한 분이겠는가?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지 만세 반석이다.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잠도 자도 괜찮고 시장에 갔다 와도 괜찮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 가도 불안하고 잠을 자도 불안하다. 혹시 내가 예수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내가 시장에 갔다 예수 잊어버리면 어쩌나? 나는 옛날에 시장에 가면 뭐를 많이 본다. 뭐가 있는지 간판은 뭐가 붙었는지 어디가면 뭐 사는 데가 있는지 자세히 보고 다닌다. 그러니까 언제 예수 생각을 하겠는가?
영호 형제 고물상에 가도 그냥 안 간다. 자세히 본다. 뭐 쓸 만한 것이 없는가 하고 지세히 본다. 한번은 어디 가니까 약탕기가 나왔다. 나는 약탕기를 많이 쓰니까 약탕기는 고장 날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얼마냐 하니까 500원이라고 해서 사와서 몇 년을 썼다. 500원짜리 약탕기를 사서 몇 년을 썼으니까 얼마나 재미있는가. 고물상에 가면 쓸 만한 것이 너무 많다. 재미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에게는 쓸 것이 없으니까 내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다 내버린 것이다. 그 예수를 다 내버렸다. 아무 용맹 없는 예수를 내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고 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거기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우리 인생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죽지도 않고 어떻게 다시 나겠는가? 죽어야 다시 난다.
칼빈은 분명히 말했다. 우리의 마지막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말했다. 여기 장로교 신학을 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일부러 내가 얘기하는 것이다. 딴 사람은 이렇게 명백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다. 자기도 연합이 안 되었지만 원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칼빈도 아주 성서적인 사람이다. 성서에 엇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이 신학 공부하려는 형제들에게 칼빈부터 하라고 했다. 칼빈부터 하고 나서 다른 것을 해야 하지 그것을 모르고 다른 것부터 하면 엉망이고 안 된다. 칼빈과 바르트 사이에는 시대적인 차이가 많다. 그래도 맞다. 칼빈은 1509년생인데 바르트는 1886년생이다. 300년 이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칼빈을 모르고 바르트 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래서 칼빈부터 공부 해보라고 한다. 그 이후에 신학자들이 칼빈이 한 말을 기초로 해서 이렇게 해석해보고 저렇게 해석해본다. 본질은 모르고 해석만 보면 아무것도 안 된다. 뭐가 근본인지 모른다.
역사도 역사라는 사실을 알고, 그 다음에 해석을 봐야지 사실을 모르고 해석을 보면 헛일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역사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불쌍하다. 언젠가 100년이 지나고 나면 지금 공부한 어떤 사람이 해석한 역사를 가지고 진짜 역사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역사를 전혀 다른 각도로 해석해서 가르친다. 그것이 사실처럼 되어 버린다. 이것이 무서운 일이다.
칼빈이 천재는 천재다. 모든 근본적인 것을 다 얘기해 놓았다. 아주 철두철미하게 빠지지 않고 다 말해놓았다. 단지 그것을 자기가 다 몰랐다는 것이지 원론은 다 정리해놓았다. 그때까지 기독교 역사가 말해온 그것을 아주 명백하게 말해 놓았다.
내가 하는 말은 이상한 말이다. 자기화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여러분이 해보라. 나와 똑같이 해보려고 해도 안 된다. 지식은 공부하면 된다. 책 보면 된다. 내가 지식으로 한 말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한 얘기는 자기가 안 되면 못한다. 자기가 그렇게 되어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질문하라고 한다. 질문하면 더 좋다. 내가 지식을 배워서인가?
예수 한 사람을 알면 모든 것을 다 안다. 모든 사람을 다 알게 된다. 아주 신기한 분이다. 아무리 다른 것을 많이 알아도 예수 그 사람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른다.
성경을 몇 백독, 천 독을 했다는 사람이 있는데, 만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그 한 사람 예수를 모르면 다 헛일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증거)하는 것이니라.”(요5:39)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너무 맞는 말이다. 성경 연구하는 사람이 얼마인가? 성경 연구한다고 사람이 많이 모여보라. 막상 그분에게는 안 가려고 한다.
여러분이 와서 들어주니 감사하고 좋다. 여러분이 아니면 아무도 안 들어 준다. 더군다나 신학을 한 여러분이 들어준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다. 이것은 신학 책에 없는 얘기이다. 들어주고 있다는 것 지체도 기적이고, 나는 여러분을 만난 것이 너무 감사한 일이다.
오늘은 짧게 하려고 결심하고 나왔는데도 잘 안 된다. 나는 의지력이 약한 것 같다. 뭘 해보면 내 의지로 잘 안 되고, 내 의지로 뭘 해놓으면 잘한다고 했는데, 뒤로 보면 잘 안 된다. 하나님께서 네 마음대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다. 정말 나는 꼭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내게 꼭 어려움이 온다. 가만히 있어서 된 일은 너무 쉽다. 하나님 하시는 일은 구경하면 제일 쉽다고 했다. 내 얘기다. 나는 쫓아다니면 안 될 사람이다.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면 봐야 되지 쫓아다니면 안 될 사람이다. 내가 재미있는 이유다. 내가 쫓아다니면서 했으면 여러분이 쫓아오려면 힘들다. 내가 공짜로 본 것이니까 재미있게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복음은 절대로, 절대로 내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행하는 것이다. 나는 구경하고 보고 전한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