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년 (인조 7년)~1711년 (숙종 37년)자 雲路, 호 藥泉, 美齋, 시호 文忠
일반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약천은 의령 남씨 문중의 대표적 인물이다. 약천이 영의정을 지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가 문장과 덕망 그리고 뛰어나 업적으로 당대를 풍미해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약천은 ‘장희빈’ 등 TV드라마서도 자주 등장했는데, 극의 특성상 그의 진면목보다는 당파의 격류에 휩쓸린 왜곡된 이미지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 왜 그렇게 연출해 시청자를 오도하고 약천의 명예를 실추시켰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조차 판이하게 평가한 점을 고려하면 진실캐기가 간단치 않다.
여기 약천이 세상을 떠난 뒤 동일 상황에서 내려진 상반된 두 평가가 있다.
벼슬을 그만둔 봉조하(奉朝賀) 남구만이 졸(卒)하니 83세였다.(...)
그는 성품이 편협하고 강퍅하며 패려하고 궂고 뽐내는 행동을 좋아하므로 세상에서 입을 모아 강개(剛介)한 선비라 했다. (...)
만년에 서자(庶子)를 위하여 돈벌이를 했는데 비루하고 외잡(猥雜)한 일이 많아서 천한 종실로부터 모욕을 받기에 이르렀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비웃었다. /숙종실록 37년 3월 17일
봉조하 남구만이 졸(卒)하였다.(...)
성품이 강개하고 독실하여 백련금(百鍊金)과 같았으며, 체구는 작고 못생겼으나 정기(精氣)는 쇠나 바위를 뚫을 만하였다.
세 조정을 섬기면서 크나 큰 절의가 우뚝하였고 직언으로 명성이 높았다.(...)
세상에서 남구만을 논하는 비유하기를 "곧고 굳은 절조와 두루 다스린 재주와 능력은 이원익, 최명길과 상대할 만하다" 고 하였다. / 숙종실록 보유 37년 3월 17일
숙종실록의 졸기(卒記)는 이보다 더할 수 없이 형편없는 인물이다. 조선이라는 국가에서 어떻게 이러한 인물이 문과에 급제할 수 있었고, 또 벼슬길에 나아가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그런데 실상을 다르다.
혼란한 시대, 특히 파당간의 이해관계가 극심한 시대를 살았던 그는 줄곧 굳은 절조를 바탕으로 두루 원만하게 일을 처리했다.
숙종수정실록에서는 약천을 논하면서 이원익, 최명길과 비교해서도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평가한 점이 주목된다.
물론 엄연히 이들 두 실록의 기술 태도에는 파당적인 앙금이 없지 않았을 것이기에 얼른 후자의 격찬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 후기 대학자요 정치가며 실학파의 거두로서 고결한 인격까지 겸비했던 다산 정약용의 평가를 보면 약천을 제대로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화(黨禍)가 일어난 이래 묘당(廟堂)에 단정히 앉아서 중심을 잡아 저울질하던 이는 입심과 지론(持論)이 대부분 편파적으로 기울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약천 남구만 상공만은 그렇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된 때부터 그 배격하고 구제하는 것에 있어서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 / 다산집(茶山集), 해미남상국사당기(海美南相國祠堂記)
다산이 약천을 이처럼 절절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수정실록의 인물 평가가 온당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 다산은 시로도 상공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꽃 지고 꾀꼬리 우는 한 채의 옛집에서(花落鶯啼一畝宮)
약천 옹의 남긴 그 자취 고스란히 느꼈네(七分省識藥泉翁)
그러나 약천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한 편의 시조로 인해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하느니.
이 시조는 청구영언이라는 시조집에 실려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약천의 문집에는 시조가 아니라 번방곡(飜方曲)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번방곡이란 우리나라의 노래를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약천이 수차에 걸친 유배생활을 통해 그의 탁월한 문장 솜씨와 애민의식으로 백성들이 즐겨 부르던 시조를 한문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東方明否 鸕鴣已鳴
飯牛兒胡爲眠在房
山外有田壟畝闊
今猶不起何時耕
동방명부 노고이명
반우아호위면재방
산외유전롱무활
금유불기하시경 / 약천집(藥泉集) 1권
그런데 이 시조의 창작공간은 간단하지 않다. 너무 유명해서일까, 창작지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엇갈린다.
먼저 이 시조를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에서 썼다는 주장이다.
이곳은 약천의 고향으로, 79세 때 서울 광나루를 떠나 정착한 용인 비파담(琵琶潭)은 용인팔경 중 제7경에 해당한다.
그래서 종중에서는 사각형의 돌에다 시조를 새긴 시가비(詩歌碑)를 이곳에 건립했다.
다음은 약천의 생가인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속칭 ‘거북이마을’ 약천초당(藥泉草堂)에서 지었다는 설이다. 이곳에도 시조비가 있으며 고어체로 새긴 시조비가 있다.
마지막으로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심곡리이다.
'사래긴밭(장밭)'이라는 비를 세워 이곳이 창작지라고 내세우고 있다.
1994년엔 동해휴게소에 시조비도 건립됐다.
뿐만 아니라 2005년 6월에는 제3회 남구만 시조 알리기 전국 남녀 시조경창대회를 여는 등 동해시는 적극적으로 약천 현창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약천이라는 걸출한 역사 인물을 두고 고향인 경기도 용인시와 유배지인 강원도 동해시에서 선의의 주도권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약천의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본과 모현면 갈담리 파담마을 남춘희(南春熙, 文忠公派 宗中 總務理事)가 관리하고 있는 3본이 있다.
원래 초상화는 여러 본이 있었으나 충청도 해미의 영당과 동해시 심곡마을에 봉안했던 영정은 실전되었다.
다만 1999년 서원 훼철과 함께 실전한 영정을 지방 사림(士林)들이 다시 모시고자 종중에 청한 바, 종중에서는 화가에게 영정을 다시 그리게 하여 이를 현지 사당으로 봉송했다 한다.
약천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초부리 산 1-5번지에 있다.
정경부인 동래 정씨와 합장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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