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해인사(伽倻山海印寺)
- 사적 제504호.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法孫)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등 두 승려가 왕와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하였다. 애장왕 3년(802).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해인(海印)이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다.
또한 석가모니불의 정각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 참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 마음이 명경지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한다.
이런 여실한 세계가 곧 부처의 깨달은 모습이며, 중생의 본 모습이다. 이것이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해인사 홈 페이지 '연혁'에서 내용을 정리함)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다.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초창을 시작하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 귀의(歸依)를 받았다는 뜻)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
이로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고 법보사찰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었지만 장격각만 온전히 보전되었다.
(다음-한국문화대백과사전 내용 정리)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워낙 유명하여 그 내용을 내가 이곳에 적을 까닭이 없다.
해인사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문화재 또한 엄청 많이 있기에 일일이 촬영하고 기록할 수 없다.
해인사는 오랜만에 들린 곳이다. 1992년경인가 확실한 기억은 없다. 가야산은 여러 번 산행을 하였다.
요즘 가야산 산행은 백운동지구에서 원점회귀로 한다. 만물상이 큰 볼거리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관람료도 산악회에선 부담일 수도 있다.
거창 미곡공장 지게차 A/S를 하고 넘어오는 길에 해인사를 들렸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야산 산행을 위해 들렸다.
당시엔 백운동지구가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이고 만물상은 비탐방로였다.
해인사 구경하다가 고교동기를 만났다. 10년만에 보는 친구였다.
내 기억 속의 해인사와 이번 탐방 때의 해인사는 느낌이 다르다.
한 바퀴 돌고나니 내 기억 속의 해인사가 지금의 해인사와 일치한다.
10월 30일(토), 날이 매우 흐렸다. 오후엔 빗방울도 떨어졌다.
보현암, 금강굴(금강암)..삼선암..해인사 경내..용탑선원..홍제암..귀로난야..원당암..금선암..약수암..국일암..성보박물관..주차장.
주차장~고불암~법기암~도솔암~길상암 / 차로 다님.
10월 31일(일), 날이 맑음. 오후 2시 이후 흰구름이 많아짐.
해인사 경내..용탑선원(용탑암)..홍제암..원당암..지족암..희랑대..백련암..주차장.
주차장~홍련암~청량사
해인사 산내 암자(홈페이지, 16 암자)
고불암, 보현암, 금강암(금강굴), 삼선암, 용탑암(용탑선원), 홍제암, 원당암, 금선암, 약수암, 국일암, 길상암, 지족암, 희랑대,
백련암, 고운암, 청량사.
이 중에 고운암은 들리지 못했다.
법기암은 해인사 말사, 내가 들렸던 도솔암과 홍련암은 개인 소유인 모양이다.
몇 차례 걸쳐서 해인사 경내와 산내 암자 사진을 올릴 것이다.
"해인사1, 해인사2" 로 나누어 올리며 겹치는 장면도 있을 것이다.
용탑암, 홍제암, 원당암도 겹치는 장면이 있을 수 있다. 암자는 2~3곳 묶어서 올릴 예정이다.
용성조사 사적비(용성이란 승려의 행적이다.)
선재카페
붉은 단풍은 여심을 놓아주지 않는다.
여러 승려의 비와 승탑, 뒤편에 퇴옹 성철의 탑이 있다.
혜암대종사 비명과 승탑
동곡당 일타대율사(좌측 네모난 부도), 금성당 도견대종사(가운데), 원융대선사(우)
영암당 임성대선사(좌), 동광당 명진대선사(우)
고봉선사(우), 경하율사(좌)
퇴옹당 성철대선사 사리탑
비림(碑林)
길상탑/보물 제1242호
반야사지 원경왕사비/보물 제128호
반야사지(가야면 야천리(倻川里) 탑동(塔洞)마을)에 있던 것을 1968년 현재 이 자리로 옮기고 비각을 세움.
<비문 내용>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고 고려 문종 4년(1050)에 태어나 영통사의 경덕국사와 대각국사에게 사사,
대각국사를 따라 중국 송에 갔다가 선종 3년(1086)에 귀국, 숙종9년(1104)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 9년(1114)에 오공 통혜의 법호를 이어받았다.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예종 14년(1119)에 70세로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식이 짓고 이원부가 글씨를 썼다.
(어느 카페엔 김부식 형인 김부일이 비문을 지었다고 나온다.)
일주문(홍하문)
사천왕문(봉황문)
사천왕상, 조작품 대신 그림이다. 문에는 금강역사가 그려져 있다.
국사단(局司壇)
가야산 수호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를 봉안한 전각.
국사단에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이건 글쎄요.
해탈문 /해동원종대가람-불이문
구광루
범종각
보경당
구광루 우측 문이다. 즉 동문東門(입문入門인 셈이다.)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석등
관음전, 이 뒤에 정수당. 출입금지.
궁현당, 이 뒤로적묵당, 조사전 등이 있으나 출입금지.
응진전
명부전
대비로전
대적광전-비로자나불
장경판전/국보 제52호
대장경판/국보 제32호,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법보전
독성각
범종각
구광루 좌측 문이다.-즉 서문西門(출문出門인 셈이다.)
청화당-주지실로 사용 중
수다라, 이곳도 카페.
응정각(팔만대장경연구원/앞), 청백당(원주실),,, 이 뒤로 율학승가대학원, 해인총림선원 등이 있다. 출입금지.
김영환장군 공적비, 김영환장군 덕에 해인사는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6.25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