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
공미
밖에 나갔다 함께 들어 왔는데,
기가 막힌 딱 한 마디
빨리 밥 도!
쌀 씻고 밥 안쳐야지예
그케도 무턱대고
밥 도!
속에서 천불은 치밀어오르는데,
베란다 너머 어스름은 짙어
그 좋던 벚꽃 구경은 온데 간데 없고
고픈 배는 브레이크도 없나
밥 도!
강남설비
안자숙
밤이든 낮이든 상관없어요
망설이지 마세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기회를 잡으세요
딱 한 번뿐입니다
그래 살다가 한번쯤 필요할지도 모르지
지금은 아니지만 알 수 없잖아
가까운 나중에라도
그가 속삭이며 건네준 명함을
못 이기는 척 받아 쥐었다
24시간 대기 중입니다
답답한 당신을 위해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순간 사업 실패한 옆집 남자가 떠올랐다
꽉 막혔으리라,
그의 아내도 여러 곳 막혔으리라
명함 뒤쪽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
당신의 답답한 마음까지
뻥 뚫어드립니다
비렁길은 울지 않는다
육현숙
제비꽃 잠 깨는 노송 사이로
금오도 비렁길, 바다 품은 산자락
아름다운 둘레길 자박자박 걷는다
산은 수평선 끌고 와 들숨을 쉬고
고기 잡는 배 편해지는 내 마음
눈부시게 푸른 갯벌 하늘에 닿는다
빨간 동백꽃 통째로 누워
흥건히 바닥에 젖던 그 핏빛 물때
떠난 임 그리던 눈물의 고향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만 하다 고꾸라진
가슴에 피멍 든 그 동백꽃 엄마
* (비렁길은 울지 않는다)는 2024년 매일신문시니어 시 부문 당선작.
흰빛소리, 운흥
조정명.
지금 흰빛 아우성이다 봄비 며칠, 최정산에 쏟아지는 흰빛소리 계곡에 가득하다 피어오르는 희뿌연 안개구름에 절집 한 채 숨어있고 버섯구름 닮은 질문만 이백 가지, 항아리에 물 붓듯 대답이 쏟아진다*
모퉁이 돌자 디디던 길 홀연히 사라진다 채근한 일도 없는데 저리 각중에 가버리다니 이 편 저 편 경계는 사라지고 타다만 숯이 된 마음
돌계단 올라서니 불쑥 솟는 산벚나무 두 그루 대답처럼 검은 둥치에 흰 꽃구름 한 덩이 얹혀 있고 수천수만 가지 질문 던져보지만 깨침은 근처에도 못 가고 왕왕거리는 참벌 소리에 하늘만 쳐다본다
처마 끝 풍경소리 딴청부리고 곤줄박이 자진모리로 울어대는 다저녁의 절집, 흰빛은 운흥雲興의 소리다 난분분 떨어지는 꽃잎에 눈코입 다 뭉개진 부처의 얼굴, 가던 길 멈추고 선문답 질문을 어루만진다
*운흥이백문 병사이천답(雲興二百問 甁瀉二千答), 『화엄경』의 한 구절.
** (흰빛소리, 운흥)은 2024년 매일신문시니어 시 부문 당선작.
상사화
서철수
그대 아련한 비밀의 성性에서
아름다운 꽃대 올리는 일이다
오롯이 일렁이는 은파를 건너
꽹과리처럼 두드린 쿵쾅대는 심장
한바탕 흥겨운 마파람의 외침
눈빛에 투영된 앳된 모습
그녀 그림자를 빼어 닮은 선물
어스름 달빛에 내뿜는 푸념
청홍 색색 풀어내는
아, 황홀한 초야의 밤이여!
넌지시 끌어당기는 그 속내
아물거리는 촛불은 사위어 가고
스리살살 앙가슴 파고드는
벗겨진 전선에 스친 움찔한 전율
복사꽃잎에 앉은 그리움의 시 한 줄
새벽 잠결 잔조롬히 실눈뜨고
뒤엉킨 성벽性癖 단번에 허물어
굳센 경주마로 질주하리
관심법
김창봉
새해 첫날
일 년간 내 보란 듯
새로운 연 깃털처럼 벽에 걸려 있다
몸과 마음 벽이 세운 일정
주시하며 살란다
빼곡이 출근하는 날 몸 바쁠 테고
어쩌다 쉬는 날 집 빠져나갈 궁리로
생각 바빠지겠다
달별로 짜여진 행동지침
출근하는 날과 쉬는 날, 제삿날,
빨간 마누라 생일날, 결혼기념일…
쳐다보니 머리 아프다
원초적 반항심에
거꾸로 걸어 두고 출근했다
퇴근해 보니 바로 걸려 있고
마누라, 나와 벽 번갈아 쳐다본다
요즘 반월당 불교대학 다니더니
궁예의 미륵 관심법 터득했나 보다
팔거천 더불어
전영귀
그때는 그랬었지 어둑한 산책길에
고라니 누룩배암 저도나도 깜짝 놀라
가슴팍 쓸어내리던 삼십 년 전 풋새댁
갈댓잎 서걱서걱 마른 몸 부비는 밤
조각달 살풋 내려 잠투정 볼멘 아기
밤 냇가 짓궂은 수달 노를 저어 재웠지
오계산 발원하여 금호강 큰집까지
천년 얼 깃들어 튼실한 젖줄이여
사십 리 굽이굽이길 설을리 없겠냐만
너른 강에 몸 풀어 달성습지 다다르면
담비 삯 수리부엉 대구의 세렝게티
맹꽁이 노랫소리에 쉬어감도 좋아라
팔거천 물길 따라 동서로 마주보다
이태원 로데오 길 빗장 푸는 어울마당
새날빛 윤슬 더불어 나 흐르는 까닭이라
늙은 배우
이난희
그를 죽여 나를 없애야 하는,
그래서 나는 그가 아니어야 하는,
나인 것은 아무것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그러나 그때부터 그는 진짜 내가 되어야 하는,
삶의 들판을 지나면서 놓쳐버렸던 그의
그 표정 그 눈빛 하나를 찾아내는,
그때 그 감정을 기필코 토해내는,
그 얕거나 깊은 들숨 날숨을 다시 쉬는,
먼 미래의 나를 소환해 그 앞에 앉혀야 하는,
연기演技하다가 연기煙氣처럼 가뭇없이 사라지는,
파과破果처럼 시들다 죽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