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73〉“진리에 관한 일은 절 크기와 상관없다”
佛法 설함에 ‘명한다’ 있을 수 없어
큰 절 주지는 대중에게서 추대돼야
일본의 선종 가운데 큰 종파는 조동종으로, 도오겐(1200~1253)에 의해 개산되었다. 13세기 중반 도오겐이 선풍을 떨치는 무렵, 일본 막부의 최고 실력자였던 호오죠오 도끼요리는 선사를 매우 존경하였다. 도끼요리는 영평사(永平寺)에 상주하고 있는 도오겐에게 가마꾸라(鎌倉)에 와서 설법해줄 것을 요청했다. 선사는 그의 성의에 마지못해 가마꾸라로 가서 선을 설해주었다.
도끼요리는 건장사(建長寺)라는 절을 지어 선사에게 그곳에 머물러 줄 것을 요청했지만 도오겐은 청을 거절하고 당신이 머물던 영평사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도오겐에게 ‘영평사에 땅 2천평을 보시하고 싶다’고 하자, 선사는 단호히 거절하고 사찰로 돌아왔다. 그런데 제자인 겜묘오(玄明)가 땅 문서를 대신 받아왔다. 겜묘오가 선사에게 땅문서를 스승에게 건네자, 선사는 땅문서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말했다.
“이렇게 재물을 받는 것은 수행자로서 청정한 모습이 아니다. 수행자는 결코 명리를 탐해서는 안된다. 불교를 망하게 하는 데는 외도가 아니라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다. 그대는 사자의 몸속에 있는 벌레와 같다.… 그대 마음에 한번 물들어 버린 명리(名利)의 더러움은 마치 국 속에 들어간 기름처럼 제거될 수 없다. 그렇게 땅에 욕심이 나면 자네가 가지고 가거라. 나는 그대 같은 사람과 함께 머물 수 없다.”
도오겐은 제자를 산문 밖으로 쫓아내고, 그 스님이 앉아 좌선하던 자리에 7척이나 흙을 파내었다. 또 한분의 청정 승려가 있는데, 소납이 존경하는 선사 가운데 한분이다. 일본의 하쿠인(白隱, 1685∼1768)인데, 선사는 무심한 도인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하쿠인이 어느 작은 암자의 주지로 있을 때이다. 가끔 본사로부터 부당한 일을 겪었는데, 무심히 넘기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본사로부터 개인 의사는 묻지도 않고, ‘하쿠인을 대법회 법사로 임명한다’는 공문서를 받았다.
하쿠인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관한 일은 절의 크기와 상관없다. 불법을 설하는 일에 ‘명한다’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결국 하쿠인은 초청을 거절했고, 대법회 법사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그대들은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말사의 주지가 되지 말라.”
도오겐과 하쿠인은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출가 수행자 모습이다. 이런 당연한 수행자가 왜 오늘날 청정 수행자로 귀감이 될까? 한 마디로 답을 하면 현재의 승려들의 삶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십이장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문이 되어 수행코자 하는 사람은 세속의 모든 재물을 버리고 남에게 빌어 얻는 것으로서 만족해야 한다. 하루 한끼 식사하고,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자되 절대 두 밤을 머물지 말라. 애착과 탐욕은 마음을 어리석게 만들고 수행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 때문이다.”
경전 내용은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를 강조하지만, 이 점은 일종의 계율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는 초기불교 수행자들처럼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 요건으로 강조한 무소유 정신까지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옛날 어른들로부터 춥고 배고파야 공부할 마음을 낸다고 하였다. 그만큼 물질적 풍요는 수행의 빈약함을 불러옴이요, 육체적인 고통은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상살이는 점점 편리해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롭다보니 사찰이 비대해짐이요, 도량이 점점 커질수록 수행자의 명예 추구도 함께 비례하고 있다. 큰 절 주지는 덕과 지혜를 갖추어 대중으로부터 추대되어야 하건만 덕과 지혜가 부족한데 인위적으로 되려고 하니, 자꾸 갈등과 분란이 일어나고 있다.미천한 비구니도 알고 있는데…?!.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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