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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과일향♡
김학중목사/화려한 포장의 불편한 진실 (막 12:41-44)
현대는 ‘디자인의 시대’입니다.
동일한 기능을 가진 제품들이라도 어떠한 모양, 색감, 재질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제품들의 가치는 매우 달라지게 됩니다.
동일한 공간이라도 인테리어의 설계에 따라 공간의 활용도와 느낌이 달라지고,
동일한 매장이라도 제품을 진열하고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고,
동일한 의복과 액세서리라도, 코디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들을 착용한 사람의 인상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현대 기업들은 ‘디자인 사고(thinking)’, ‘디자인 경영’,
‘디자인 심리학’, ‘디자인 혁신’ 같은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의 개념은 공간이나 제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디자인하기 위하여 명품으로 치장도 하고, 성형수술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과 자격을 디자인하기 위하여 각종 스펙을 쌓습니다.
비록 외모 가꾸기와 스펙 쌓기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도,
인간의 ‘겉포장’, 즉 ‘대외적인 이미지’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의 활용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디자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단지 이미지일 뿐,
실제 내용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각 사람의 겉포장이 그 사람의 진정한 실체를 다 보여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디자인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즉, 이 사람들은 신앙의 알맹이보다는 겉포장에 치중했던 사람들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1. 겉포장이 내용물을 보장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성경의 ‘첫째 계명’을 놓고 토론하던 서기관이 물러가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영적으로는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첫째, 비록 당시의 서기관들은 성경을 보급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던
성경 전문가들이었지만, 그들의 성경지식은 허점투성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당시의 서기관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윗의 자손’의 의미를 족보상의 혈통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은 그리스도보다 족보상 서열이 한참 높은 조상이 됩니다.
따라서 다윗의 권위가 그리스도의 권위보다 한참 높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권위가 다윗의 권위보다 훨씬 높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근거를 다윗이 지은 시편 110:1절에서 찾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당시의 서기관들을 자신들을 꽤나 유식하고 똑똑한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돌팔이 선생이 엉터리 지식을 마구 유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강사들이 몰린다는 서울의 강남지역에 사기꾼들이 판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강남의 유명 영어학원의 강사들 중에는 학력위조는 물론이고,
심지어 강력범죄 전력을 가진 원어민 강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지난 2011년에는, 살인미수혐의로 10여 년간 도피생활을 하던
미국의 조직폭력배 한 명이 강남에서 영어전문학원을 차린 후,
수 년 동안 버젓이 명문대출신 행세를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과연 이런 무자격 영어강사들에게서 학생들이 올바른 영어를 배울 수가 있었을까요?
돌팔이 선생의 밑에서 훌륭한 지성인들이 배출될 것을 기대하기가 힘들 듯,
영적으로 무지한 서기관들에게서 배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깨닫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당시 서기관들의 ‘화려한 지식포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둘째, 당시 서기관들의 ‘경건한 모습’은 자신들의 추악한 죄와 탐욕을 감추기 위한 교묘한 위장술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어디서든 거드름을 피우며 고상한 척하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라고 지목하신 과부들을 등쳐 ‘벼룩의 간을 빼먹는’ 악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중동사회는 아직도 철저한 남성중심사회입니다.
최근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이 수시로 폭행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가족과 이웃들에 의해 잔혹한 살해까지 당하지만,
법도 정부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중동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과격한 이슬람교 때문이 아닙니다.
그 지역 남성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철저히 남성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데, 하물며 2천 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 당시에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 홀로 가정을 지켜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서기관들은 이 불쌍한 여성들을 협박하거나 교묘하게 속여서,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악랄했던 서기관들이 기도시간만 되면 180도 변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길게 기도함으로써 자신들의 ‘고상한 신앙’을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장황한 기도로 자신들을 포장할수록
오히려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마가복음 12:40).
한마디로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유식하고 경건했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사악한 ‘빛 좋은 개살구’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서기관들은 ‘괘씸죄’에 걸려 하나님으로부터 가중처벌을 받게 될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어떤가요?
2. 내용물의 가치는 순도(純度)로 결정된다.
서기관들의 영적 문제점들을 지적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당시의 성전에는 입구가 나팔모양으로 된 13개의 헌금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오며 이 헌금함 속에 자신의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돈은 모두 금, 은, 구리 등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동전이었으므로,
헌금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주변사람들에게도 잘 들렸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이 많은 헌금 동전들을 헌금함에 쏟아 부으면
‘촤르르 …’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묵직한 동전들이 헌금함에 쏟아지는 소리가,
부자들의 귓가에는 자신들을 향한 주변 사람들의 떠들썩한 박수갈채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헌금이 헌금함에 떨어질 때에 들리는,
얇은 동전의 초라한 소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민망하고 부끄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켜보시던 헌금함 앞에 한 가난한 과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백 원에 불과한 얇은 동전 두 닢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던 말씀을 잘 기억해보십시오.
이 과부가 왜 이토록 가난하게 되었겠습니까?
바로 당시의 존경 받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 때문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가난한 과부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보나마나 이 가난한 과부의 초라함과 궁색함을 비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에 대하여 상식을 깨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마가복음 12:43).
아마도 그 순간 제자들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선생님,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 과부는 겨우 몇 백 원 동전밖에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그 엄청난 동전 소리는 저쪽 부자의 헌금함에서 났던 소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셈법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마가복음 12:44).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평가방식은 상대평가인 동시에 순도(純度)평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대평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상대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성취도를 고려하여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입수능고사를 보면 ‘원점수’가 있고 ‘표준점수’가 있습니다.
원점수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정답을 맞추었느냐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표준점수는 자신의 원점수가 다른 수험생들의 점수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우수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해 수능이 쉬워서 만점 맞은 사람이 많으면,
1 문제만 틀려도 표준점수는 확 떨어집니다.
이 때, 원점수는 ‘절대평가’ 점수인 반면, 표준점수는 ‘상대평가’ 점수입니다.
두 번째 상대평가는 각 사람의 특수한 형편을 고려하여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둑시합에서는 실력이 높은 고수가 실력이 낮은 하수에게
바둑돌 몇 개를 미리 바둑판에 올려놓을 수 있는 특권을 줍니다.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지원자들의 수능점수만 보지 않고,
각 지원자들의 개별적인 가정환경과 학업성취도, 그리고 미래발전가능성 등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동등한 환경에서 공정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불리한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유리한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상대평가입니다.
예수님의 상대평가는 두 번째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의 몇 백 원짜리 동전을 액면 그대로 보지 않으시고,
과부의 궁핍한 생활을 기준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지난 2012년 초에는, 어린 시절부터 야채상, 군밤장사, 파출부 등을 하며 평생 모은 재산 1억 8천만 원을 기부한 73세의 한 할머니가
언론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들의 기부금을 수조 원대의 재산을 가진 대기업 회장의 수십 억 기부금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액면 가치로는 대기업 회장의 기부금이 더 많을지라도,
그 기부금 속에 담긴 가치로는 이 할머니들의 기부금이 더 값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여 평가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순도평가이기도 합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은 것은
단순히 매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헌금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마가복음 12:44)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장 전 재산을 털어 헌금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모든’과 ‘전부’입니다.
이것은 앞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가복음 12:30) 사랑하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 과부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신앙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금이라고 다 같은 금이 아닙니다.
금 제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순도입니다.
보통 금의 순도는 14 K, 18K, 24K 등으로 표현되는데,
14K는 58.5%, 18K는 75%, 24K에는 99.99%의 금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부피의 금이라도 14K의 금과 24K의 금 제품 사이에는
커다란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표면에만 금을 살짝 입힌 금도금 제품과 실제 금 제품의 사이의 가치 차이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순도와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마치 가짜 참기름이 냄새는 그럴 듯한데 속에는 불순물이 잔뜩 든 것처럼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듯하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요구와 적당히 타협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삽니다.
이것은 마치 서기관들이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척하며 길게 기도하면서도,
뒤에서는 불쌍한 과부들을 등치며 사는 사악한 협잡꾼에 불과했던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마치 오늘 말씀의 가난한 과부와 같이 겉으로는 볼품없고 가치 없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순도 100%의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겠습니까?
겉포장은 화려하지만 속에는 불순물로 가득한 가치 없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겉포장은 좀 투박해도 순도 100%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평가는 상대평가이자 순도평가입니다.
3. 가치 잃은 상품은 폐기처분 대상이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외형적인 화려함보다는 내면의 상태가 중요함을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도 외형적인 규모와 화려함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나서시자,
그 곁의 제자 한 명이 그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와 ~, 예수님, 이 성전 좀 보십시오. 대단하지 않습니까?’라고 감탄하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죽이려던 헤롯 대왕이 확장공사를 시작한 이래, 무려 50년 가까이 공사 중이었습니다.
50년 가까이 짓고 있었던 만큼,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 성전을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가복음 13:2).
한마디로 그 웅장한 성전이 순식간에 박살 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 후 약 40년 뒤인 기원후 70년에,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의 다른 신들과 비교할 때,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매우 특이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전을 스스로 부수고 깨뜨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황금으로 지은 성전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약 600년 후, 헤롯 대왕과 그 후손들이 확장하던 성전도 박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의 성전을 거듭하여 스스로 부수고 깨뜨리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든 간에, 하나님에게는 성전 건물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그 성전에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그릇’일 뿐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 곳에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이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가짜 예배자들’이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와 그 성전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허름하고 초라한 곳이라도,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곳에 함께 하시며, 그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채워주십니다.
결국 성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하게 되면,
그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해도 폐기처분 될 쓰레기로 취급 당하게 됩니다.
무슨 일에든 우리가 핵심가치를 놓치게 되면,
우리는 ‘주객전도(主客顚倒)’, 즉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최근(2013.2) 『채식의 배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수십 년을 채식주의자로 살았던 저자가 발견한 채식주의의 허구를 폭로한 책입니다.
동물의 권리, 환경보존, 건강한 삶 등을 위해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살았던 저자가 마침내 발견한 진실은,
채식주의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는 측면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맹목적인 채식주의 뒤에는 거대한 식품산업의 탐욕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결국 저자는 원래의 목적과 핵심가치를 잊어버린 ‘채식주의를 위한 채식주의’는 무지와 맹신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 뒷부분과 3장 앞부분에서, 우리는 안식일 논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당시 안식일 제도의 근본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안식일 제도의 핵심가치를 잃어버린 결과,
안식일 제도의 본래적 가치가 퇴색되고 변질된 것입니다.
원래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던 안식일이 변질되어
거꾸로 사람이 안식일의 규정준수를 위해 고통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을 고통과 슬픔에 빠뜨렸다는 뜻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성전이 성전을 위해 존재하지 않듯,
교회도 교회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가치를 놓치면,
교회의 각종 조직과 사역은 무의미하다 못해, 심지어 주변에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교회의 핵심가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겉포장만 화려한 사람이나 단체를 찾으시지 않습니다.
겉포장은 그 속에 가치 있는 내용물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화려한 겉포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들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