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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서기실의 암호 [태영호]
■ 모택동, 김일성에게 “조선은 핵무기 꿈도 꾸지 말라”
북한은 6.25전쟁 중이던 1953년 3월 [원자력 평화적 협정]을 소련과 체결하고 1950년대 말에 이미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핵 연구소를 만들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보유국이 된다. 김일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1975년 4월 18일 베이징에서 모택동과 회담을 갖게 된 김일성은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워자탄 개발에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가?” 모택동은 동석한 관료에게 얼마가 들었는지 김일성에게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20억 달러가 들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백주(배갈)까지 겸한 화기애애한 자리였지만 모택동은 냉종하게 말했다. “조선은 핵무기를 가질 꿈도 꾸지 말라. 중국이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하면서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경제가 악화되어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다. 조선처럼 작고 경제가 취약한 나라에서 핵무기를 만들면 경제를 다 말아먹고 인민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러면 사회주의 자체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
■ 후계자 김정은 대장동지 이름으로 부상
나는 스위스에서 김정일의 자녀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녀가 몇 명인지도 몰랐고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내가 본 김정일의 아들은 김정남 뿐이었다. 스위스 유학을 끝내고 1990년대 초 북한으로 돌아온 김정남은 저녁이면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고 고려호텔에 오곤 했다.
김정남이 결정적으로 김정일의 눈 밖에 난 것은 위조여권 사건 때문이다.
더구나 김정남의 생모가 성혜림이라는 사실 정도는 북한에서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성혜림은 북한에서 아주 유명한 배우였다. 월북 작가 이기영 선생의 맏며느리이기도 하다. 내가 평양외국어학원에 재학 중이던 1974년과 1975년, 같은 학급이었던 이차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기영 선생의 손자였다.(279p)
이차돌의 부친 이종혁은 당시 프랑스 유네스코 주재 북한 대표였다. 현재는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겸 남조선 문제연구소 소장이다. 이차돌은 이기영 선생 댁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그 집에 김정남의 이부동복 누나인 이옥돌이 있었다. 한 번씩 놀러가거나 공부하러 가면 이옥돌은 과일을 깎아주면서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안 보이기에 이차돌에게 물었더니 남조선혁명가양성소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옥돌의 미모가 출중해 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덴마크에 근무하던 1997년, 이한영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보도됐을 때 나는 그때서야 성혜림이 김정일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옥돌의 근황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인 외교관을 따라 핀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로 옮겨 다니며 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 볼 때 나도 김정남은 후계자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김정철이 후계자로 지목될 줄 알았다.
■ 금세 돌아온 공포정치, 인민군 총참모장 처형
2012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김정은은 당의 내부 규율과 강부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모든 간부와 당원의 일거일동을 당 조직에 사전에 철저히 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산수 갑산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당 중앙이 다 들을 수 있는 보고체계를 세우라’는 것이 그의 지시였다. 이에 따라 외무성 국장급부터는 하루 전날 당위원회에 다음날 자기 일정을 사전에 알려야 했고, 외무성 당위원회는 부상급 이상 고위 간부의 구체적인 행적을 매일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보고해야 했다.
김정은 체제의 실세로 평가받던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은 사석에서 김정은을 험담한 것이 도청에 걸려 숙청됐다고 전해진다. 집권 추기 김정은의 개혁개방 행보에 대해 리영호는 장군님(김정일)은 개혁개방을 하면 잘 살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안했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숙청후 리영호는 혁명화 사업을 받다가 처형됐다고 한다.
2012년 말, 금수산 기년궁전에 대한 대대적인 재건설(리모델링)부터였다. 궁전앞 광장을 화단식으로 바꾸기로 했는데 각 기관마다 작업 구역이 할당됐다. 3m 깊이로 흙을 파내고 그 흙을 구워 다시 까는 작업이었다. 흙을 구운 것은 벌레를 박멸하기 위해서다. 국가산업미술지도부는 직업 기한을 지키기 어려워지자 1.5m만 파고 흙을 덮었다가 발각됐다. 국장 한 명이 김정은의 명령에 따라 총살됐다.
■ 김정은 공포정치엔 어머니 콤플렉스도 한몫
김정은은 후계자 확정 후에도 자신의 생년과 학력, 생모 등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고영희는 김정일과 사이에서 김정철(1981년생), 김정은, 김여정(1987년생)을 낳았다. 김정일의 아들이 정철, 정은 형제와, 성혜림 소생의 김정남(1971년생) 셋뿐임을 놓고 보면 어깨를 펴고 살만도 했다. 하지만 고영희는 재일교포 출신이다. 1962년 제일교포 북송사업 때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이 일본군 협력자로 활동했다는 한국 언론보도가 있는 것을 보면 북한 내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고영희가 김일성의 며느리, 김정일의 부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일성의 인정을 받은, 김정일의 정식 부인은 김영숙이었다. 북한에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1980년 대 말까지 김영숙이 딸들(설송, 춘송)을 데리고 명절이면 만경대 김일성 가문 어른에게 인사르 다녔다고 한다. 말하자면 고영희는 김일성의 며누리로 대우받지 못하는 설음을 겪었다. 김정일도 고영희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고영희는 2004년 5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2011.12)이후인 2012년 6월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고영희의 묘를 성역화하고 중앙기관의 간부들을 참배시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선군조선의 어머님’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김정은은 고영희 묘의 성역화 사업과 함께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님>이라는 선전용 기록영화까지 제작해 2012년 3월 극소수의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 간부들은 영화가 공개되면 북한 사회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 장성택 처형은 런던서 인터넷판(노동신문)보고 알아
나는 김정은이 김정남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2017년 1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그 예측을 피력한 적이 있다. 이 강연이 있은지 한 달도 안 돼 김정남은 말레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당했다.
자신의 생모가 김정일의 공식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김정은은 심리적 불안감까지 느끼는 듯하다.
김정일은 1970년대말 만수대 예술단을 대상으로 현지지도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무용수 고영희가 갑자기 예술단에서 사라졌는데 이때는 간부들도 고영희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김정은이 자신의 생모를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고영희의 존재가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에야 고영희와 함께 현지지도를 다녔다. 하지만 고영희의 모습은 북한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정은 집권 후 갑작스런 고영희의 등장은 김영숙의 초라한 처지와 대비되며 더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또한 고영희는 리설주를 연상케 한다. 둘 다 예술단 출신이며 하루아침에 최고 권력자의 여자가 됐다.
12월 9일 저녁 갑자기 현학봉 대사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인터넷에 난 노동신문을 보라고 했다. 모니터에는 12월 8일 진행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장성택 등 반당분자들을 숙청했다는 기사와 함께 장성택이 체포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 숙청을 부른 또 다른 이유
장성택은 김정은의 권력 승계 과정을 도와주면서도 김정남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다. 김정남이 해외에서 돈을 보내달라고 하면 심복을 시켜 은밀히 보내주었다. 보위부는 이를 포착하고 김정은에게 보고했다. 장성택이 자신과 김정남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김정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제로 장성택을 날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2013년 가을 김정은은 평안남도 온천군에 있는 온천비행장을 현지지도 했다.
지휘관들은 온천비행장 근처의 54부 산하 남포수산기지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수산기지에서 벌어들이는 달러로 공군의 부식비용을 개선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김정은은 자신의 직위인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수산기지를 공군사령부에 넘겨주라고 지시한다.
평양에서 이 사실을 보고받은 54부장 장수길은 난감했다. 수산기지를 공군에 넘겨주게 되면 54부는 해산물을 보내줄 수 없어 중국측과의 계약이 파기된다. 아파트 10만채 건설에도 차질이 생긴다. 장수길은 현지에 내려가 지배인으로부터 상황을 상세히 보고받은 후 조금만 기다리라. 내가 평양에 올라가 뒤집겠다. 하고는 현지를 떠났다. 장수길은 뒤집겠다는 단어 하나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김정은은 장수길을 당장 체포하고 진상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평양에 올라온 장수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당행정부 리룡하 1부부장과 함께 장성택을 찾아갔다. 두 사람이 들고 온 제의서를 본 장성택은 이럴 수도 저럴수도 없었다.
얼마 후 장수길은 보위사령부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다.
장수길을 족친 보위사령부는 장수길과 리룡하, 장성택이 무슨 정변 음모라도 꾸민 것처럼 확대해석해 김정은에게 보고했다. 장성택에게 쌓였던 김정은의 분노가 결국 폭발했다.
■ 어릴 때부터 고모부에 원한 쌓여
장성택은 김정일의 동복 여동생인 김경희의 남편이다. 김정은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김정은 아이 때부터 고모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고영희는 정철, 정은 형제 중의 하나가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결국 온 가족이 숙청당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일성 생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이것을 누가 막았겠는가. 김경희와 장성택이었을 것이다.
김정일 생전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고영희의 존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고영희와 그 자녀들이 김일성 앞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은 김정일이 그들을 숨겨온 것도 이유가 되지만 김경희가 완강히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영희와 김경희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본처 김영숙을 두고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김정남을 낳은 김정일에게 김일성은 집안 망신이라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성혜림에게는 전 남편 이평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옥돌이라는 딸도 있었다. 장성택은 이 사실을 김정일에게 상기시키며 수령님에게 고영희 모자를 절대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고영희는 장성택 부부에게 원한을 품게 됐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김정은에게 전해졌다.
※성혜림: 이기영 장남 리평과 결혼(1960―딸, 이옥돌) →이혼(1967)→김정일과 동거(1967―김정남 득남(1971). 김정일이 김영숙과 공식 결혼(1974) 이후 심한 우울증으로 러시아에서 요양 생활하다가 사망(2002).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미국으로 망명(1996년)하여 살고 잇으며, 그 아들 이한영은 한국으로 망명(1982)후 1997년 분당에 살다가 공작원에 피살.
김정은 또한 할아버지 김일성과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손자 신세가 된 것에 분통이 터졌다.
나의 베이징외국어대학 동창 가운데 조성규라는 친구가 있다. 부인 이름이 전은영이다. 그 부친은 장성택의 매형이며 쿠바 대사 출신인 전영진이다.
■ 장성택이 구해 준 황장엽 맏며느리 결국 수용소로
조성규, 전은영 부부와 그 가족들은 수용소행을 면치 못했다. 조성규의 마지막 직책은 관광총국 부총국장이었다. 전은영의 언니인 전혜영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장성택의 조카이기도 한 전혜영은 황장엽 선생의 맏며느리였다. 황장엽 선생의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갈 때 전혜영만 장성택이 구원해 주었다. 그 후 재가 했는데 이번에는 장성택의 조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갔다. 전혜영, 전은영 자매의 부친이 쿠바 대사를 하다 끌려간 전영진이다.
김용순과 김양건은 목격자가 단 한 사람도 없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북한에서 한국과 사업을 한다는 것은 한 발은 저승에 걸어놓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외무성만은 내가 입직한 1988년 이후에 김영남, 백남순, 박의춘, 리수영, 리용호 순으로 외교부장이 별 잡음 없이 교체되었다. 1부상 또한 강석주에서 김계관으로 큰 탈 없이 이어졌다.
■ 간부들에게 경제개혁 방안을 물을 때 조심해야 한다.
■ 2018년을 핵 보유 위한 평화환경 조성 시기로 설정
김정일 시대에도 감행하지 못했던 노동당 7차 대회는 36년 만에 열린 당 대회라는 의미도 있지만 북한의 위험한 핵 질주가 가속화되는 기점이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재천명하면서 2013년 3월 김정은이 제시한 핵, 경제병진노선의 항구화를 선언했다.
당 제7차 대회에서 제시한 국가 핵무력 완성을 위한 외교부문 전사들의 과업이 토의되었다. 당 대회에서 외무상으로 선출된 리용호의 사회로 진행된 회의의 의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핵무력 완성기간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대북 제재는 어느 정도까지 심화될 것인가.’ ‘핵 보유국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정을 거쳐야 하는가.’ 회의에서 대사들은 대북제재가 장기화되면 북한 경제가 입을 피해가 막대할 것이므로 단기간에 핵무력을 완성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적절한 시기는 2016년 하반기부터 2017년 말까지로 보았다. 근거는 이렇게 제시했다. “2016년 말에 미국 대선이 진행된다. 미국의 새 행정부가 모든 정책 라인의 인선 작업을 마무리하려면 2017년 중순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이 해 하반기에는 남조선이 대선 국면에 진입한다. 남조선의 새 정부가 출범하는 2018년 초까지는 한국과 미국의 정책 협의가 용이하지 않다. 결국 2016년 말부터 2017년 말까지는 남조선과 미국의 정치적 공백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까지 미국은 조선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 명천 태서방
나는 1962년 7월 25일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태형길은 1935년 생이다.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황곡리에서 출생했다. 나의 친가는 명태의 어원이 된 ‘명천의 태서방’ 집안인 셈이다. 명천의 태서방이 물고기를 잡아 왕에게 진상한 데서 ‘명태’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다. ■ 핵심 빨치산 출신 가문에 장가를 가다 오혜선의 부친은 인민군 중우장 오기수였다. ㄷ아시 김일성정치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집은 24시간 무장보초가 서는 독집(독채)이었고 김일성정치대학 구내에 있었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요란한데 오기수는 오백룡의 조카였다. 오백룡은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사람이다. 오백룡의 장남 오금철은 공군사령관, 차남 오철산은 애군 정치위원이었다. 오기수의 사촌형제가 공군과 해군의 수장이었다는 예기가 된다. 마치 오백룡 가문이 북한군을 틀어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였다. 나는 그리 내키지 않아 동호의 제안을 거절했다. 부모님도 좀 더 평범한 집 처녀가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하고 동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 아내는 아직 대학 졸업반에 다니고 있었다. 두 집 어른들은 우선 약혼식을 올리자고 했다. 첫 선을 본지 한 달 만에 약혼을 했고 이 해 10월 17일 ㄱ려혼식을 올렸다. 우리 부부는 결혼 전인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 조선청년학생대표단 성원으로 참가했다. 한국에서 임수경이 참가한 그 축전이다.
[Review]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일은 서로 포를 쏘고 이긴 편이 그곳에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서로에게 너무나 큰 손실이 생긴다. 그래서 70년 가까이 서로 으름장만 놓고 있다. 결국 통일은 처음부터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었다. 저절로 한쪽이 썩어 지도록 해서 그곳에 새로운 곡식을 심는 것이다. 문제는 대상이 썩기 어려운 플라스틱이라서 고민일 뿐이다.
휴전선 155마일(248km)에는 백만이 넘는 남북한 젊은 청년들이 눈에 불을 뿜고 대치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서로가 지칠 만도 한데 갈수록 기세는 거세기만 하다. 집안싸움은 이웃에서도 말릴 수 없는 일이다. 물 구경 불구경이 재미있다지만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 주변국에서는 은근히 부추기는 형국이다. 그래서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어름마 타령’만 하다가 지난해 북한이 수소폭탄을 터트리고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을 보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 형국이다. 지금은 미국이 초강수로 회초리를 들었지만, 진짜 회초리로 때릴 것 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또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핵과 미사일이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한 2016년, 어떻게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문제로 긴 토론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때는 미국 대선이 혼미하고 한국도 좌파세력이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는 형국이라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미국에서는 오바마처럼 약간 유순한 민주당이 정권을 이을 확률이 높았고, 한국 역시 보수 세력이 10년 가까이 유지했기 때문에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북한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처음 일 년간은 한미 간 서로 엇박자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간파하고 그 기간을 마지막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2017년도에 미사일도 뻥뻥 쏘아 올리고 또 핵실험도 제 맘대로 해서 핵 완성을 전 세계에 알린 후, 2018년도에 뒷수습을 하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이 대통령 탄핵으로 일정이 앞당겨지고 좌파세력이 정권을 잡는 바람에 그들에게는 오히려 순풍에 돛 단 격이 되었고, 미국은 뜻밖에 트럼프라는 강한 상대를 맞게 되어 상황이 달라졌다. 달라진 상황이 그들에게 악재인지 호재인지 모르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들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한국의 도움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통일이 되면 북한의 핵이 다 우리 것인데 무얼 그리 까다롭게 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가 부둥켜안고 형님 아우 하는 그런 화해통일이 이루어질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1950년대 말 육이오 전쟁 직후부터 핵무기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련에 구걸하다시피 기술을 배우려 했지만 뜻대로 잘 안되자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중국이 먼저 핵을 개발했고, 1970년대 모택동을 방문한 김일성은 핵 완성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모택동은 거만스럽게 조선은 꿈도 꾸지 마라, 우리도 그걸 개발하느라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고 했겠다. 김일성이 다시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물어보자 옆에 있는 관리에게 알려 주라고 했단다. 그러자 그가 무려 20억 달러가 들었다고 하자 모택동은 아마 그 돈을 투자하려면 조선은 다 굶어 죽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고민을 안고 돌아가서 결국 인민이 굶어 죽어도 핵을 만들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북한 경제는 남한을 앞지르는 형국이고 그들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남한은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루며 하늘과 땅 차이로 북한을 앞질렀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북한은 그놈의 핵을 개발하느라 모든 가산을 탕진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오늘의 핵은 그런 것이다. 굶어가며 만들었고 경제를 이토록 뒤떨어지게 한 원흉인 셈이다. 그들은 이제 그 목표를 이루었으니 경제에 치중하면 금방 따라잡을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 같다.
핵을 담보로 미국과 흥정하면 돈은 얼마든지 들어올 것이고, 그 돈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그때 가서 슬슬 큰소리치면서 남한을 위협하고 송두리째 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들의 통일 목표는 오로지 적화통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화해통일이 아니고 협박에 의한 일방적인 공산주의식 계급폭력혁명, 무력통일이다. 핵은 미국을 위협해서 돈을 얻어내고 후에는 남한을 위협할 무기이다. 그때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는 안이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6.25를 겪은 세대들에게는 그 끔찍함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평창 올림픽에 왔던 구십의 노구(老軀) 김영남은 연실 눈물을 흘렸다. 반면 젊은 김여정은 모나리자처럼 야릇한 미소만 날리고 있었다. 그들의 두 표정 사이에 모든 문제도 있고 해결책도 있다.
객기를 부리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 있다. 술 취한 미치광이는 말릴 필요도 없다 그냥 외면하면 된다. 그러면 혼자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제풀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냉정한 것 같지만 통일은 그 길밖에 없다. 스스로 넘어지도록 하고 후에 들어가서 곡식을 새로 심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플라스틱도 이제는 썩을 때가 된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책을 이제야 읽게 되면서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북에서 볼 때는 배신자요, 남아있는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그분은 왜 탈북을 선택했을까? 탈북 후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이곳 생활을 하며 지금 가족들이 느끼게 될 고충도 클 것이다. 영국에서 탈북을 생각할 때 아내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면 무엇으로 생계를 꾸려야 할지 고민하며 빵 장사라도 해보겠다고 열심히 빵 관련 책을 사 모았다는 대목에서는 인간적인 연민의 정으로 가슴이 울컥했다. 우리가 북한을 알면 그분만큼 알겠는가. 통일에 대한 그분의 주장은 확고하다. 이제 북한 스스로 붕괴하는 통일만이 유일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통일만큼 절실한 문제는 없다. 이 책은 얼마 전에 14만 부가 팔렸다는 기사를 보았다. 모두가 보아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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