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은 변할 수 있는가
빌레몬서 1:8~19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만나 전도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한 오네시모라는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본래 소아시아 골로새 시에 살고 있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 곁에서 종으로 일하다가 그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젊은이로서 남의 집에 종살이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맡긴 일을 수행하다가 그만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돈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는지, 이 편지를 통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골로새에서 머나먼 곳인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오네시모는 경제적인 손해를 그의 옛 주인 빌레몬에게 끼쳤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 대신에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말할 정도가 된 것을 보면,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해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 바울을 감옥에서 만나 진실한 신자가 된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돕는 심복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12절에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난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심복’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스프랑크논’으로서, 내장 곧 가슴, 간장, 허파 등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상징적으로 마음, 감정, 애정, 소중한 사람, 자신처럼 소중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창자, 심정, 심장, 마음, 심복”이라는 뜻으로 성경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됩니다. 이 빌레몬서에서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이 이 편지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종으로 살 때에는 무익하고 손해를 끼치고 사람을 배신하는 무익한 종이었는데, 어떻게 사도 바울을 만나서는 완전히 달라져서 사도 바울의 구원 복음 전도 사역에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 사도의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증거된 복음이 오네시모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증거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됨으로써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런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한다.”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말씀은 반은 맞는 말입니다. 인간이 변할 수 없다는 말씀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3:23 말씀에 이르기를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망가졌음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선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적 부패, 전적인 무능력, 스스로 자기 개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어 버린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점에서 예외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로마서 3:10~12 말씀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박에 빠진 사람이 그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자기 손가락을 자르는 대단한 결의를 보였지만, 그의 손가락을 다 자른 후에도 그의 남은 발가락을 가지고 도박장에 나서 화투를 쥐더라는 말이 전해져오지 않습니까? 인간은 이처럼 철저히 죄에 매여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음주 중독이나 도벽 중독이나 폭력 사범이나 연쇄 성폭행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약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가가 아무리 비싸게 주어진다 해도 또 다시 넘어지고 또 다시 자빠지고 더 깊은 중독과 더 깊은 나락으로 다시 굴러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절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염두에는 두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굴복해버린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는 말씀을 체험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 속에 있었던 모든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여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내세관을 갖게 되는 전적인 변신을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전해 듣고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오네시모는 지난 날의 과오를 철저히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에,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심복이 되어 그를 돕고 이제 사도 바울이 주는 편지를 가지고 옛 주인 빌레몬에게 가는 것도 두려움없이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옛 주인 빌레몬에게 가면 빌레몬이 자기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처벌할 수도 있습니다. 그를 감옥에 집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한량없는 인애를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자비를 뼈저리게 알기에 주인 빌레몬이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용기를 냅니다. 주 안에서 용서받은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온 믿음, 소망, 사랑이 그 마음 속에 충만하기 때문에, 옛 주인 빌레몬에게 주는 사도 바울의 편지 한 통을 품고 돌아가 그 주인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을 기대를 갖고 기꺼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인 빌레몬 역시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자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가는 것입니다. 설령 자기를 주인이 용서해주지 않는다 하여도 그 모든 벌을 다 기꺼이 받고자 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기에, 오네시모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달라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이 완전히 한 사람을 바꾼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한 사람을 완전히 영원히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은 결코 바꿔 쓸 수 없다.”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의 생각과 입술에서 써서는 안되는 말인 것입니다.
도리어 성경을 보면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을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을 얻는 길을 묻습니다. 그런데 그는 큰 부자였고 일찍 세상의 지위를 차지한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좀먹는 것이 재물에 대한 애착감인 것을 아시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시고자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누가복음 18:22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나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늘에 보화가 주어질 것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둘 다 큰 복인데도 그 부자 청년은 이 땅의 재물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컸기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주님을 등지고 돌아갑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누가복음 18:24,25)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당시 유대인들은 과거 자기들의 믿음의 선조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다윗 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큰 부자였기 때문에, 부자들은 모두 당연히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입견에 불과하고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온전히 자기를 내려놓고 순복하는 신앙의 자세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부자였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예수님께 반문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 10:27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결심과 노력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시대의 풍조에 끌려다니며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기질과 체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망령한 행실의 집요한 압박을 결코 스스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교육으로도 안 되고, 수양으로도 안 되고, 마인드콘트롤 훈련으로도 안됩니다. 상담으로도 안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는 가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나는 거듭남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는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바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극적인 변화의 실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서 사람의 본정신을 잃어버리고 쇠고랑과 쇠사슬을 여러번 끊고 달아나 무덤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기 몸을 깨진 돌로 긁어대 피를 흘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찾아와 그의 몸에 집 짓고 살던 수많은 귀신들 군대 귀신들을 내쫓아버리자, 그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정신이 온전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차분하게 듣는 사람으로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 그 지역 데가볼리 지역을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함으로 후일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 전도를 하실 때에 데가볼리 지방의 큰 부흥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불쏘시개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극적인 변화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역시 일곱 귀신들려서 완전히 미친 여자가 되어서 집안에 박혀 있었거나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처지가 되어 어린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돌 맞는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여인을 만나 일곱 귀신을 내쫓아주시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 제자 중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는 지극히 복스러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돈 욕심이 가득하여 민족을 배반하고 동족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세리들 중에 으뜸이 되어 여리고 성에 있는 세관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삭개오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마음 속에 희망을 갖게 되었을 때 마침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즉시 거리로 달려나가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뵙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약점이 있었던 삭개오가 사람들 틈에서 끼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자, 꾀를 내어 예수님이 지나가실 거리에 서 있는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다 큰 어른이요 여리고 성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중년의 키 작은 사람 삭개오는 어린아이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바라보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다만 멀리서만 지켜 보면서 삭개오는 그 동안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참 좋으신 분이다. 저런 분의 말씀을 자주 들어보며 그 말씀대로 살면 좋겠는데, 나는 죄인이어서 지옥에나 떨어지겠지.”
라고 하면서 죄책감과 좌절감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주도적으로 찾아와주시고 그의 삶에 들어오시니 삭개오는 놀랍게 반응합니다. 그는 크게 즐거워하며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모시고 들어가 큰 잔치를 벌여 대접하고 식사 도중에 서서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일 전에 누가 삭개오의 목에 칼을 들이댄들 그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삭개오가 그 동안 어떻게 해서 모은 재산입니까? 그것은 삭개오에게 생명 같은 것일텐데 그가 어떻게 하룻만에 변하여 자기 재산을 반이나 구제하며 네 배로 속여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자발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그 심령에 임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난 기적인 것입니다.
찬송가 305장의 작시자 존 뉴톤의 경우 하나만 보아도 그러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험하게 자라나 배를 타고 지내면서 온갖 못된 욕설을 배웠습니다. 그의 입은 온갖 더러운 욕설, 악한 욕설만이 하루 종일 쏟아져나오는 쓰레기 통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악해져서 나중에는 저 아프리카 흑인들을 붙잡아서 영국이나 저 신대륙에 갖다 팔고 돈을 받아 챙기는 노예 상인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수많은 흑인들을 체포하여 끌고 가 대서양을 건너 팔아넘기는 일을 했던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모는 배에 엄청난 폭풍을 불어닥쳐서 마침내 그는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회개하며 살려달라고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폭풍 속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후 존 뉴톤은 영국에 도착하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몸부림치면서 청교도 지도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영적인 훈련을 받아 주의 종이 되어 복음을 전하며 받은 은혜를 가지고 수많은 찬송시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많은 찬송시 중에 한 편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결코 바꿔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고쳐 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은 안 변한다. 사람은 고쳐 쓸 존재가 아니다”라는 말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극악한 사람도 복음 안에서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져서 더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요 그를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가져오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음 진리의 은혜 가운데 굳게 섭시다. 성령으로 충만합시다. 그리하여 오늘날 절망과 포기와 좌절의 언어들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그들에게 숨을 쉬게 해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살리고 고치고 실패와 죄로 얼룩진 삶의 족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힘을 주셨던 것처럼,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새롭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에 사람들을 살려내는 사명을 감당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죄에 매여 죽어가는 자들을 살려내고, 저주 아래 신음하는 자들도 살려내고, 수많은 삶의 고통과 근심 아래 눌린 자들도 살려내고, 온갖 정신적 압박 가운데 시달리는 자들도 살려내고, 과거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눌린 자들도 살려내는 데 있어서 능력 있는 촉매제가 됩시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의 복음,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바뀌어질 수 없는 운명을 바꾸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사람은 스스로는 변할 수 없지만, 복음 안에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나 우리에게 속한 사랑하는 자녀나 형제나 이웃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버립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만지시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읍시다. 그에게 소망을 품고 계속하여 믿음으로 맡깁시다. 그리할진대 하나님께서 만지실 것이며 때가 되면 그들도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