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계(鵝溪) 묘역의 三神島?
아침 8시, 오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곳이 있겠다고 하지만 아직은 맑은 날씨다. 회원들이 전원 도착하여 차 두 대가
출발했다.
예산군 대술면 아계(鵝溪)· 李山海 墓를 향해 경부고속도로 대전에서 유성~ 당진 도로를 이용 신양에 도착하
니 비가 오기 시작하나 看山을 강행했다.
이산해(李山海, 1539년 7월 20일~ 1609년 음력 8월 23일)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이며 성리학자,
교육자, 화가이다.
본관은 한산, 자(字)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죽피옹(竹皮翁)·시촌거사(枾村居士).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李塏)의 종고손이 된다.
관직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 명종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벼슬을 한 조선 시대 학자,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친 당대의 대 문장
가이다.
1590년과 1591년, 1592년, 1599년과 1602년 세 번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다.
화가 이산보의 형이며,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은 그의 숙부이다. 시호는 文忠이다.
*李山海ㅡ 子 - 慶伯. 慶全(형조판서). 慶伸
(鵝溪 선생사당)
玄武峰에서 굴곡을 거쳐 入首到頭 혈장을 형성하였다. 아계의 號처럼 穴場을 길게 餘氣를 모아 내려왔다.
坐向은 南西向 艮坐坤向으로 靑龍 쪽 巽巳方 탐랑은 아름답다.
앞쪽의 방산저수지는 破口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나 어딘가 조금 허하다고 생각하여 연못을 파고
三神島를 만들어 보충한 것이 아닐까?.
상단 封墳 앞에 혼유석 상석이 있으며, 상석 좌 우측면에 貴石과 좌측에 묘비석이 있다. 하단 상석 전면에 향로석과
좌우에 망주석, 문인석이 대칭을 이르고 있다.
현재의 石物은 1609년 묘를 조성할 때 세웠으며 墓碑는 1856년 중수하였다.
(裨補로 만들어 놓은 三神島)
(神道碑)
아계 神道碑는 채제공이 찬하고, 전액은 허목이 글씨를 쓰고, 비문은 한호의 글씨를 집자 하였다. 높이는
325cm, 너비는 75cm, 두께는 31cm이다.
(멀리 사당과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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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鵝溪)·墓 근처에 있는 修堂 李南珪 선생 古宅에 들였다. 마침 해설사 아가씨 덕분에 자세히 설명을 듣게
되어 큰 행운이었다.
修堂 李南珪 선생의 고택은 충남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 있으며, 조선 인조시대인 1637년 건립된 이 古宅은
이만규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충남유형문화재 68호(1976. 7. 7)로 지정된 고택입니다
구한말 항일운동가이자 의사(義士)인 수당 이남규 선생은 1894년에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할 것을 요구하였다.
(李南珪 古宅)
그 뒤에도 명성왕후의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의병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1907년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아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李南珪 선생 고택의 매력은 女子가 집을 지었다는 것인데 조선 시대에 여자가 집을 짓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원형의 출입 문)
(안채)
이 古宅은 南向으로 아계 李山海의 손자 李久의 부인이 1637년(인조 15년)에 아계의 묘소 근처인 이곳에
건립하였고, 1846년(헌종 12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채와 건물 구조는 ㅁ 자형으로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6칸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는 ㅡ 자형으로 구성
되어 있다.
별채인 平遠亭은 앞면 6칸과 측면 2칸 규모인데, 앞과 뒤 칸은 모두 개방된 퇴 칸을 설치하였고 서쪽의 별당
건물인 평원채가 南向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平遠亭)
(修堂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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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를 끝내고 나니 날씨가 맑아 좋은 기분으로 대술면 이티리에 있는 은열공 강민첨(姜民瞻) 墓로 향했다.
은열공 姜民瞻은 고려 초기인 광종 14년 진주에서 원윤 벼슬을 한 아버지 강보능과 어머니 거창신씨 사이에
서 태어났다.
그가 큰 공을 세우게 된 것은 거란족이 요(遼)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무너뜨리며 위세로 밀고 내려와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 갔을 때 강민첨은 애수(隘守·현 함경남도 고원)의 진장(鎭將)으로 있으면서 군사가 흩어져
위기에 몰리게 되자 낭중(郎中), 방휴(方休) 등과 의논해 조원(趙元)과 평양을 지켜냈다고 한다.
姜民瞻 장군이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바로 1018년 8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조정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각각
임명해 지휘권을 일임받아 전장에 나아갔을 때다.
姜民瞻은 1020년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 兵部尙書)’에 올랐다가 1021년 11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 현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국사를 쉬었다고 합니다.
현종은 충남 예산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강민첨의 업적을 기리게 했고, 강민첨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하며 ‘은열(殷烈)’이란 시호를 내렸고, 진주 강씨 은열공파의 시조가 탄생한다.
추후 문종 때는 강민첨 장군의 공을 추억하여 공신각에 초상을 걸어 후대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라”는
교서를 내려 姜民瞻 장군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봉하고 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걸게 하였다고
합니다.
辰坐戌向 右水到左 坤破 正墓向. 外白虎 案山
穴場 뒤편으로 올라가니 左右龍이 완연하면서 트림을 치니 수많은 지맥이 힘을 뻗치고 있다. 그 내리뻗은
청룡 백호의 山勢가 將軍의 기상처럼 늠름하다.
坐向은 서쪽을 바라보는 辰坐戌向으로 右水到左에 坤破 正墓向인듯?. 外白虎 案山으로 아름다운 一字文星이다.
그 중간중간의 지맥은 穴場을 향하여 봉읍(奉揖) 하는 山勢로 아름답다.
둥근 金星體 下에 서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墓域은 면적 147,174㎡로 반구형의 封墳 주위에 둘레 석을 두르고,
무덤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 좌우에 묘표, 동자석, 석양, 망주석,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으며, 墓 하단에
그의 愛馬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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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墳의 둘레석도 크기와 두께도 대단하다. 다른 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이곳만의 독특한 멋
으로 꾸며 놓았는데 총 24개의 돌판 중 한 칸씩 건너뛰어 子, 丑, 寅, 卯의 12 支 글자를 새겨 넣고 꾸몄다.
坐向을 보니 風水 葬法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辰坐戌向에 右水到左로 坤破口 正養向으로 보인다.
墓 앞에는 1957년에 세운 神道碑가 있다.
(事積碑)
看山을 끝내며 墳墓의 규모나 구조는 貴賤의 신분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조선 시대의 墳墓는 주로 산에 만들었기 때문에 산소라고 부른다. 시대에 따라 高麗王陵을 보면 돌을 쌓아
단(段)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峰墳을 얻는 것이 보통이나, 朝鮮王陵은 계단을 만들지 아니하고
경사를 형성한 土段의 상부에 封墳을 얹었고, 사대부의 분형은 대개 원형이며, 일반서민의 분묘는 유형(乳形)
또는 돌형(突形)을 이루고 있다고 보인다.
시대에 따라 陰陽宅도 변화의 속도가 빠르니, 옛 풍수 경전에만 고집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오늘도 회원님들 수고 많았습니다. 건강하세요.
2015년 10월 11일 淸虛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