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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회자되고 있는 글이 한 편 있다. “욜로 타령하는 남편 골로 보내고 싶다”라는 제목의 글이다.(아래에서는 “욜로 타령”으로 줄임) 근자에 젊은이들에게 삶의 트렌드로 급부상한 욜로라는 이름아래 주책없는 일만 벌이고 다니는 철부지 남편을 거침없이 꾸짖는 내용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선명하지만, 문장도 랩 가사처럼 간간이 가벼운 욕설을 섞어가며 라임(rhyme) 형식으로 쓰여 있어서 읽는 사람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해준다. 과연 욜로는 어떤 형태의 라이프 스타일이기에 이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추종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일까? 욜로 담론이 가진 긍정적 측면은 무엇이고 부정적인 측면은 무엇이며, 과연 추구할 만한 라이프 스타일로서 욜로는 어떻게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단 한 번뿐인 인생 욜로(YOLO)는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You only live once)라는 문장의 머리글자로서, 호라티우스의 시에 나오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Carpe diem)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욜로라는 말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캐나다 출신의 인기 래퍼 드레이크(Aubrey Drake Graham)가 2011년에 출시한 앨범(Take Care)의 보너스 트랙으로 “좌우명”(The Motto)이라는 곡을 내놓으면서부터이다. 이 곡이 인기를 끌면서 욜로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급기야는 20~30대 젊은이들에게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새로운 트렌드로 부각되게 되었다. 일반적인 이해에 의하면 욜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의 관심사를 추구하며, 미래를 위한 고민 대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현재주의적 자기애’의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위에서 잠시 소개한 “욜로 타령”에 나오는 남편의 태도가 그러하다. 그런데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나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일은 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시간과 열정을 저당 잡히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사는 일이 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일까? 인생은 단 한 번뿐이지 않은가? 왜 “욜로 타령”을 쓴 아내는 자기 남편을 그렇게도 험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아래에서는 “욜로 타령”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남편의 라이프 스타일을 세 가지로 정리하여 살펴보면서, 욜로 라이프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기로 한다.
‘자기중심적 불간섭주의’로서 욜로 욜로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첫 번째 특징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만의 관심사를 추구하며 재미있게 사는 일이다. 남이 뭐라 하든 그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 일에 책임져줄 것도 아니면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질 것이니, 다른 사람들은 제발 내 일에 간섭하지 말아달라는 것이 욜로의 첫 번째 주장이다. “욜로 타령”에 나오는 남편의 태도가 바로 그러하다. 아내는 남편의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욕설과 비속어는 한글 자음으로 처리)
위에 나오는 남편의 경우처럼, 욜로 예찬자들은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기만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아내의 불만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있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같이 잘살자고 한 것인데, 남편은 주말이면 혼자 집밖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잔소리하는 아내에게 오히려 간섭하지 말라고 큰소리친다. 욜로를 삶의 모토로 여기면서 그 핵심 내용을 ‘자기중심적 불간섭주의’로 이해하는 남편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실 드레이크의 노래에서도 “누가 뭐라 하든 상관 말고”(f*** what anybody say)라는 가사를 통해 불간섭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드레이크와 “욜로 타령” 속의 남편은 각기 처한 상황이 엄연히 다르다. 드레이크는 돈방석에 올라앉은 30세의 독신 래퍼로서, 다분히 방탕하고 외설적인 노랫말을 통해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성공한 힙합 가수로서 벌어들인 2500만 달러(우리 돈으로 약 300억 원)에 달하는 부를 뽐내면서, 닥치는 대로 섹스와 대마초를 즐기며 순간적 쾌락의 즐거움을 이렇게 노래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야, 그게 나의 좌우명이지, 욜로!”(You only live once. That’s the motto, nigga! YOLO!) 독신의 힙합 가수인 드레이크와는 달리, 가정을 꾸리고 사는 ‘직딩’ 남편이 욜로를 외치면서 아내를 내버려둔 채 주말마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며 혼자만의 즐거움을 찾는 일은 그다지 잘사는 태도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불간섭을 주장하며 혼자만의 즐거움을 찾으려면 애당초 결혼일랑 하지 말고 드레이크처럼 싱글로 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이처럼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남편에게는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아마도 구약성서가 가르쳐준 것처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아내는 이렇게 맞받아친다.
충동 소비와 욜로 욜로 예찬자들은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긴다는 명목으로 때로 분에 넘치는 과소비도 주저하지 않는다. 옛날 우리네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한답시고 그리고 내 집 마련을 위해 얼마나 평생을 아끼고 쥐어짜며 근천스럽게 살아오셨던가? 조국의 근대화 시기에 근검ㆍ절약이라는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게 외우면서 살아오셨지만, 정작 내 한 몸을 위해서는 아무런 작은 사치도 누려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욜로 예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한 번뿐인데 그렇게 누추하게 살 이유가 뭐람? 아무리 쥐어짜며 저축을 해도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한 현실, 40대 후반이면 회사에서 밀려나 실업자로 전락하는 소모품 인생, 그나마 놀 수 있을 때 놀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현명한 일 아닌가? 그래서 “욜로 타령” 속의 남편은 조금 분에 넘치더라도 갖고 싶은 것을 당장 사고, 하고 싶은 일을 당장 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자 한다. 하지만 아내의 불만은 바로 이 지점을 향해 있다.
남편은 구입한 지 2년밖에 안 되는 신형 국산차를 외제차로 갈아타려고 하고 있다. 그는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모토 아래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를 행위의 준칙으로 내세운다. 아내는 남편의 이러한 주장에 맞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다시 맞받아친다.
아내에게도 인생은 한 번뿐이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서는 남편과 사뭇 다르다. 그녀는 철딱서니 없는 남편의 외제차 타령을 이렇게 타박한다.
국산차를 타건 외제차를 선호하건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건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자동차 할부 대금과 주택 구입 자금을 염려하는 아내의 태도로 볼 때, 이 부부의 경제적 여건은 300억 원대 갑부인 드레이크와는 비교 상대조차 되어 보이지 않는다. 드레이크처럼 억만장자라면 이탈리아산 최고급 스포츠카를 색깔별로 10대를 구입하든, 수영장 딸린 호화 주택을 각 주마다 50채를 사든, 그건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그는 한 번뿐인 삶을 그런 식으로 즐길 만한 충분한 재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당장 자동차 할부금을 걱정해야 하고 회사에서 지원해준 주택 구입 자금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라면, 장만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새 차를 팔아치우고 외제차로 갈아타려는 일은 아내의 말처럼 분수를 모르는 철부지의 짓임에 분명하다.
찰나주의와 ‘분별없는 자기애’ 적지 않은 욜로를 예찬자들은 머나먼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에 시간과 열정을 집중하고자 한다. 전 지구적으로 저성장 기조가 확산되고 고용 불안이 장기화되면서,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사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끼고 쥐어짜서 주택을 장만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버렸고, 고개를 조아리며 충성을 바친다고 해서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찰나주의적 행복관에 도취하도록 만든다. 각박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일단 세계 여행이나 떠나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회사를 집어치우는 사람도 있고, 스트레스 받는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새 직업을 찾기 위해 퇴사 학교를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퇴사 학교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이 무작정 직장을 집어치우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 또는 좀 더 적성에 맞는 일거리를 찾기 위해 경험자로부터 조언을 듣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욜로 타령” 속의 남편은 아무런 고민이나 숙고도 없이, 회사 다니기 싫다면서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려 한다. 아내는 철부지 남편을 이렇게 타박한다.
아내에게도 인생은 당연히 한 번뿐이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는 방법에 있어서는 남편의 방식과 사뭇 다르다. ‘지금 이 순간’은 아내에게도 인생의 소중한 한 부분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못지않게 ‘내일’과 ‘모레’ 또한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이다. 지금 이 순간이 힘들다는 이유로 당장 회사를 때려치운다면 내일과 모레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힘이 들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는 명목으로 내일과 모레의 자산을 앞당겨 쓰다가는 정작 내일과 모레에 당해서는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안락도 중요하지만 내일과 모레까지 지속적으로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의 찰나적 욕망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아내는 여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내는 ‘근시안적 자기애’에 매몰되어 있는 남편과 달리, 원시안적 안목에서 자기의 행복을 계산할 줄 아는 ‘분별심 있는 자기애’(prudential self-love)의 소유자라고 보인다. 아내는 철부지 남편의 욜로 타령을 이렇게 비판하며 글을 마친다.
바람직한 라이프 스타일로서 욜로 드레이크도 욜로를 추구하고 “욜로 타령” 속의 남편도 욜로를 추구하지만, 두 사람이 추구하는 욜로는 같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먼저 같은 점으로는, 두 사람 모두가 자기중심적 불간섭주의를 내세우며 현재적 쾌락에 탐닉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점이라면, 드레이크와 달리 “욜로 타령” 속의 남편은 가정이 있는 몸이고 경제적 여건도 그다지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남편이 자기중심적 불간섭주의를 강하게 내세우는 일은 결혼 공동체를 파탄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또한 재정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는 명목으로 분에 넘치는 과소비를 하는 일은 미래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욜로라는 라이프 스타일은 가정을 가진 사람보다는 독신자에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보다는 여유 있는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라이프 스타일인지도 모른다. 독신자와 기혼자 그리고 넉넉한 사람과 넉넉하지 못한 사람, 이 모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욜로는 가능한 것일까? 각기 다른 여건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추구할 만한 라이프 스타일로서 욜로는 어떻게 재정립되는 것이 바람직할까? 욜로 담론이 함축하는 삶의 태도 가운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지배적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의 가치관과 기준에 의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자기 지배적 삶의 태도는 자기중심적 불간섭주의가 풍기는 배타적 이미지보다는 판단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려는 ‘주체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남이 외제차를 타건 말건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다. 나는 나의 기호와 형편에 맞추어 나에게 알맞은 차를 타면 그만이다. 라캉(Jacques Lacan)이 말하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은 외부로부터 투사된 ‘타자의 욕망’일 따름이다. 외제차가 국산차보다 왠지 세련되어 보이고, 외제차를 타야만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는 선입견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그리고 상품 광고에 의해 만들어져 내 안에 투사된 허상에 불과하다. “욜로 타령” 속의 남편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추구하는 삶은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대리 욕망’하는 삶일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바람직한 형태의 욜로는 충동 소비나 과시 소비보다는 형편에 맞는 소비를 지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유’보다는 ‘향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삶이라고 생각된다. 그간 소유를 향해 전념하던 시간과 정열을 ‘소유’가 아닌 ‘향유’로 전이(轉移)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덤까지 이고 지고 가지도 못할 집을 장만하느라 은행 융자에 깔려 주택 거렁뱅이(house poor)가 되는 것보다, 집에 대한 소유욕을 줄이고 차라리 그 시간과 재화를 여가 활동과 취미 활동 그리고 그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한 번뿐인 삶”을 위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외제차나 다른 사치품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소유’에서 ‘향유’로의 전이에도 ‘분별심’이라는 제한 조건이 필요할 것 같다. 현재의 향유를 위해 내가 가진 소유를 전부 끌어다 사용해버린다면, 미래에는 향유가 아닌 궁핍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뿐인 인생을 현재와 미래의 전 시기에 걸쳐 안락하게 살기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의 여건을 계산하고, 여기에 소요되는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는 분별심(prudence)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바람직한 의미의 욜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서도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에 대비하는 일, 물질과 소유에 집착하기보다 경험과 의미를 추구하는 일,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신중하게 저울질할 수 있는 분별심과 중용의 미덕이 요청된다. “욜로 타령” 속의 아내와 남편도 바로 이 지점에서 화해와 타협이 가능하지 않을까? 필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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