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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실체를 보여주는 외적 증거(1)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시고, 그들을 식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 교회를 향해 비슷한 말로 이렇게 경고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 30).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이 영적 늑대들은 겉보기에는 양처럼 보이고, 마치 양떼에 속한 것처럼 우리 안을 활보한다. 그러나 그들은 겉보기와는 사뭇 다르다. 사실 그들의 정체는 그와 정반대다. 그들은 겉으로는 양처럼 보이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겉은 깨끗하지만, 안은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잔과 같다(마 23:25, 26, 눅 11:39, 40). 겉은 아름답게 칠을 했지만,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무덤과 같다(마 23:27). 유다서 1장 23절은 이들을 물속에 숨은 암초요, 생명을 주는 빗물을 머금지 않은 구름이요, 겉은 건강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로 묘사한다. 바울 사도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는 악인들이자 협잡꾼이다(딤후 3:13).
이 모든 말씀의 요점은 이들의 내적 실체가 겉으로 하는 고백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겉모습이나 입술의 고백은 실제와 다르다. 이들은 겉만 기독교로 위장하여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거짓으로 고백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눅 6:46). 이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다.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지만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사 29:13, 마 15:8, 막 7:6, 딛 1:16).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감추어진 실체와 그들에 의해 미혹될 위험성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그런 문제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분과 연합했다고 주장하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기독교의 핵심을 다룰 뿐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회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는 중요한 질문을 제시한다. 우리의 내적 실체는 외적 증거에 의해 드러난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가시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나고, 회심의 진정성은 삶의 열매를 통해 나타난다.
변하지 않는 진리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진리를 가르치셨다. 이는 고백의 진정성을 행위로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알지니"는 헬라어 "에피기노스코"(epiginosko)를 번역한 것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아는 지식이 아니라, 어떤 주제를 정확히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지식을 가리킨다. 이 동사에는 정확하고, 온전하고, 철저하게 이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열매"는 포도나무나 과실수의 열매를 뜻하는 헬라어 "카르포스"(karpos)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어떤 것의 산물이나 결과물을 뜻하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바인스는 열매를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능력의 가시적인 표현, 즉 열매를 만들어내는 능력의 속성을 입증하는 열매의 속성"으로 정의했다. 본문에서 "카르포스"는 사람의 인격과 그 참된 속성을 드러내는 행위나 태도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님이 "열매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신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삶의 한 가지 측면이 아닌 삶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 곧 사람의 내적 속성이 모든 상황에서 그가 취하는 행동과 태도를 통해 입증된다는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악한 성품이나 선한 성품은 쉽게 감출 수 없다. 둘 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진리의 확실성은 본문의 반복어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열매에 관한 가르침을 경고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경고의 말씀으로 마무리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분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덧붙이셨다(마 12:33참조). 의인들도 죄와 싸우면서 때로 패배를 경험하고, 악인들도 때로 선을 행하면서 의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인과 악인 모두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행위를 통해 그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진리는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흔히 가르치는 것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요즘의 복음 설교나 신앙 상담은 이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공공연히 부정하기까지 한다. 첫째, 복음주의 공동체 가운데 내적 성품과 외적 행위의 관계를 부정하는 현대 문화의 그릇된 견해를 채택한 사람이 많다. 요즘의 문화는 개인의 인격을 입증하거나 부정하는 사실들보다는 단지 말의 고백이나 감정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사실과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것을 의문시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헤치는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거짓에 많은 사람이 속고 있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은 판단을 중지하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근거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지성이나 능력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을 "악하고 육적인 사람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을 단지 그의 마음속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거나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거기에서 비롯하는 외적 행위를 통해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 20).
우리는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신앙고백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앙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편리한 거짓 주장을 근거로 행위로는 가장 악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도 마음으로는 그분을 지극히 공경한다고 말하기 쉽다. 이것이 성경 곳곳에서 알맹이 없는 고백을 강하게 경고하는 이유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에서는 물론 사역을 행하시는 내내 그렇게 경고하셨고, 바울도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일컬었다(딛 1:6). 야고보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구원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약 2:14-23). 우리는 이 책 전반부에서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삶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과 비교하여 그 고백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가르친 사실을 살펴본 바 있다(요일 5:13).
간단히 말해, 참된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인 열매를 맺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해 선택받았고, 그것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요 15:8). 때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얽매이기 쉬운 죄와 하나님의 가지치기 사역 때문에 뚜렷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분의 징계를 통해 더 많은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요 15:2, 히 12:11).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자신의 참 제자들 가운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마 13:23, 요 15:5 참조). 이 말씀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풍성한 결과가 나타날 것을 암시한다.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삼십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기 그지없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마 11:11, 눅 7:28).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원이 열매를 맺고, 그로 인해 공의가 움틀 것이라고 말했다(사 45:8).
불합리한 추론
"불합리한 추론"(argumentum ad absurdum), 즉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은 상대방의 주장이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나 불합리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논리학의 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이와 비슷한 논법으로 사람의 내적 실체가 외적 행위에 의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논박하셨다. 그분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뛰어나신 교사셨다. 산상설교는 이 사실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그분은 지혜의 화신이고, 수사학의 대가시며, 적수가 없는 토론자셨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고 증언했다(마 22:46).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감히 더 물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놀라며 물러갔다(눅 20:40).
예수님은 당시의 농경문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언급하셨다. 그분은 군중에게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겠느냐"라고 물으셨다. 자신들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을 듣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얼른 동의하며 "절대 그럴 수 없지요 그런 일은 말하는 것조차 불합리합니다.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니까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라고 비슷한 질문을 하나 더 던지셨다. 군중은 좀 더 자신 있는 투로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터무니없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범주를 벗어난 일입니다. 나무는 본성에 어긋나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신병자거나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군중은 우쭐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위대한 질문자이신 주님께 옳게 대답했다 싶어 마치 자신들이 교사이신 그분을 가르치는 듯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우쭐한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질문은 수사학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 질문은 주님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그것이 언어의 함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질문의 참된 의도를 드러내셨다. 그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을 제시하셨다.
가시나무가 포도를 맺고 엉겅퀴가 무화과를 맺는다고 믿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나의 참 제자라고 주장하면서 제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불합리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정신병자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제자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 나의 제자라고 주장한다면 정신병자거나 부도덕한 악인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약속에 한 시간 늦게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어쩌면 몇 달 전에 계획된 큰 집회의 설교자였을 수도 있다. 마침내 그가 도착하자 너무 늦었다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변명했다.
"여러분, 정확한 시간에 호텔에서 출발했지만 오는 도중에 타이어가 펑크 났습니다. 타이어를 교환하는 도중에 너트가 손에서 떨어져 혼잡한 고속도로 한 복판으로 굴러갔지 뭐예요. 아무 생각 없이 고속도로로 걸어가서 너트를 주웠죠. 그런데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순간, 목재를 실은 30톤 화물차가 시속 100킬로미터로 나를 향해 질주해 와서는 정면으로 나를 들이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늦었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설교자의 단정한 옷차림과 잘 빗겨진 머리를 보았다. 더욱이 그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정신이상자거나 거짓말쟁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런 사고를 당한 가시적인 증거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무엇이 더 위대한가? 목재를 실은 화물차인가, 하나님인가? 하물며 경차와 충돌해도 큰 상처를 입는 법인데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마주쳤는데도 인격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한 가지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신학적인 이유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이유다. 먼저 신학적인 이유는 중생이라는 위대한 교리가 한갓 인간의 결정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탄생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이 교리를 옳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실천적인 이유는 성경적인 복음이 아닌 것을 받아들여 단지 죄인의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회개의 참된 본질에 무지할 뿐 아니라, 제자도의 요구나 신앙생활의 제한적인 속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좁은 문에 들어서지 않고, 넓은 길을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 이들이 형식적인 신앙으로 양심을 묵살하고 그릇된 확신을 갖는 이유는 오늘날의 종교적인 권위자들이 참된 복음의 경고를 일깨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폴 데이비드 워셔 / 확신
첫댓글 https://youtu.be/3NjNSbH7Q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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