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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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9 05:59
37집 원고 / 정정지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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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노래를 타고 오기도 하고
밥 끓는 냄새에 섞여 오기도 하던 어머니
오늘은 노을에 실려왔다
물새 발자국이 찍힌
바닷가 해변에
가장 고운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 보는 저녁 노을
실바람처럼
백사장을 어루만졌다
우리들 등을 쓰다듬었다
노을 뒤에 어둠이 온다는 걸
알지 못했던 시절
꼬옥 잡은 엄마 손이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 포근하고 따뜻하던 손을
더듬어 잡으면
화석처럼 새겨진 그날이
물결위에 풀어져 반짝거렸다
종소리
키 큰 랠란디 나무가 사열해서
미로를 만들고 있는 미로공원
스스로 걸어 들어가 미로에 갇혔다
손녀와 함께였다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었지만
지름길인가 하고 달려가면
벽이 앞을 막는 막다른 길
이정표 없는 길을 헤매며
올려다보니 하늘이 파랬다
돌아보니
멀리는 보이지 않는 굽은 길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을 걸어
참 멀리도 왔다
미로의 끝에도 길은 열려있었다
미로를 벗어난 사람이
종을 울리고 있다
환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티눈
측백나무 늘어선 길을 걷는다
고즈넉한 길섶엔
민들레 애기똥풀 곱다
길 끄트머리 밭둑에
개 두 마리 살고 있다
살림은 단출해서
다 삭은 집과 찌그러진 밥그릇 하나
뛰어놀 공간은 목줄 반경 안
몇 달째 서 있어 퇴색한
'강아지 무료 분양'
오늘은 비 맞고 있다
눈 맑은 개 두 마리
긴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곳은
산책길 티눈이다
두 번째 직업
아파트 담벼락 앞에
한 남자가 앉아있다
그는 재봉틀 수리와 우산 고치는 일을 한다
재봉틀 가진 집이 드문 세상에
고장난 재봉틀을 만나기란
풀밭에서 네잎클로버 찾기보다 어렵다
묵묵히 앉아서 기다리는 그
기다림은 또 다른 그의 직업
닭들이 홰에 오를 시간
그가 돌아갈 채비를 한다
하염없는 기다림을 허물처럼 벗어놓고
내일이면 또 와서 앉아있을 그 남자
입동지난 계절은
겨울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안부
그의 방은
고요하고 정갈했다
한적한 산속의 찻집 같은
그곳을 자주 찾았다
문득 인기척이 사라져
내 발자국 소리만 크게 들리는
그곳을 서성이길 여러 날
찔레꽃이 피었다 지고
뻐꾸기가 울었다
침묵으로 꽉 찬
그의 방에서
자꾸만 내 말이 흘러나왔다
부부
고등어 한 손
어물전 가판대에 누워있다
큰 녀석이 작은 쪽을
덮어 안았다
넉넉한 품에 안긴
안쪽 작은 것은 따뜻하다
하고많은 고등어 중
짝이 된
안아 줄 그가 있어서
안아주는 그가 있어서
펄떡이던 혈기
소금에 절여져 삼삼해진
고등어 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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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집 원고 / 정정지/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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