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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벧후 1:20).
이 글을 쓰는 까페지기 필자는 제도권에서 신학을 전공하지 아니하였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킹제임스 신학원에서 4년 과정 중 2년까지를 수학하였으며 마치지는 않았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주석서와 책들을 통해 공부한 바 있다.
내가 어떤 성경 구절을 대하더라도 사사로운 해석을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아래의 성구를 해석의 좌우명으로 삼아 방향을 잡는 데 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은 "올바로 나누어" 읽을 때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세상 역사학 같은 학문에서도 사건의 맥락을 이야기하고 기승전결이라던가 논리성을 말하지만 특히 성경은 시대와 대상을 올바로 나누어 읽어야 한다는 대원칙이 있고 그 다음에 모든 소원칙들이 있는 책이다.
성경에는 교리적 문구가 있고 역사적 문구가 있다. 또한 교훈적 문구도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왜 이 세 가지 중에 "예언적"인 것은 없느냐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예언적인 문구는 별도로 분류된다기보다 교리와 역사, 교훈 안에도 예언이 녹아있기 때문에 굳이 분류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리인데 교리를 분간하기 위해서는 예언과 역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66권의 성경 중 어떤 책이 어느 시절에 기록되었고 그 배경과 맥락이 무엇인지 아는 기초 지식 정도가 있어야 교리 파악이 수월하다. 성경의 어떤 책은 양심 시대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고 또 어떤 책은 율법 시대, 교회 시대, 대환란 시대, 천년왕국 시대와 영원 시대를 담고 있다.
이것들과는 따로 교훈적 해석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교리적 해석이 확정된 어떤 구절을 암송이나 묵상, 연구하면서 거기서 내 개인에게, 또는 나의 회중들에게(목회자 입장이라면) 적용되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교훈적 해석이 완전히 별개는 아니며 역사적, 예언적, 교리적 부분들로부터 영향을 주고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교훈적 해석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각 성경 교사들과 성도들에게 알려주시는 바가 필요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한 구절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을 수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롬 15:4).
사실 해석 중에서 가장 폭넓은 분야가 교훈적 해석이라 할 것이다. 어떤 성도는 교훈적 해석에 특화된 은사를 가졌기에 그 방면에서 성과를 낸다. 상대적으로 그 사람은 예언에 있어서는 취약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언에는 강세를 보이지만 교훈적 해석에는 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과 저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가 되면 다른 것도 어느 정도 해 내는 것이 보통이다.
해석의 기준점이며 선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예언적 적용일 것이다.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 1:21).
벧후 1:20-21에서 "예언"은 성경을 대명사로 받는 용어로 쓰였다. 성경 자체가 일관된 하나의 계시요 예언이라는 것이 이 책을 기록케 하신 저자 성령님의 입장이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성경은 전체가 예언이며, 66권 전체에 예언이 녹아들어 있으며 거기서 역사와 교리와 교훈을 추출해 내는 것은 연구하고 주석하는 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본연적 해석>은 아무래도 예언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인 것이다. 예언은 이미 성취된 것과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예언으로 나뉜다. 성취된 것들은 역사에 편입되어 이미 일어난 과거사로 분류되지만 그것들도 어쨌건 기록 당시에는 엄연한 예언이었다.
사사로운 해석이라는 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이루어졌다고 한다던지, 대환란 시대의 구원 교리를 교회 시대에 갖다 붙인다던지, 이 시대의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한다던지, 그런 것을 말한다. 성경 해석은 사사로워서는 안되고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초림과 재림을 중심 주제로 다루는 책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성경은 두 부분 곧 신약과 구약으로 분류된다. 또한 주께서 인간들을 다루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방향에 따라 세대들이 더 나뉜다. 지금 우리는 교회 시대, 또는 은혜 시대라고 약칭 부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지금 이 시대의 특징은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하나님의 원칙인 악인은 지옥으로 보내고, 행위가 의로워야 죄를 용서해준다는 행위의 원칙이 유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단순히 대체되었다. 인간의 어떤 선행도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효력이 정지되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의 인자하심 가운데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요함을 오는 시대들에 보여 주시려 함이니라(엡 2:7).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요함"은 구약 시대가 아닌 지금 교회 시대에 보여주시는 것이며 이것은 앞으로 도래할 시대들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은혜인 것이다. 이를테면 교회 시대가 끝나면 대환란이라는 기간이 있을텐데 그때는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요함"은 볼 수 없다. 다만 악인은 벌하시고 의인은 구원하시는 주님의 "일반적인 은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천년왕국 때 주께서는 어떤 믿음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그때는 예언도 없으며 단지 산상수훈에 적시된 대로 "행함"만이 요구될 것이다. 구원이라는 은혜의 문은 대환란보다 더 협소해진 것이다. 그래서 계 20장에서 그 왕국시대의 끝에 큰 반란이 있게 되면 수많은 죄인들이 패망하고 불못에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용서함과 자비의 지극히 풍요함을 맛볼 수 있는 "은혜 시대"에 살고 있다.
크리스찬 영성 학교를 운영하는 신 목사는 다른 행위구원 종파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이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구약과 신약, 그 외 모든 시대의 구원이 똑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모든 시대의 구원이 지금 같은 "절대 은혜"라고 주장하기에 나름 오류를 자아내고 있지만 어쨌건 그들은 은혜를 저버리는 해석은 하지 않는다. 반면 알미니안 사상을 추종하는 신학자들은 모든 시대의 구원이 "절대 은혜"가 아니며 행위도 있고 믿음도 있어서 둘 다 결합하여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들 두 그룹이 다 하지 않은 것 하나가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것이다. 그들은 합쳐서는 안 되는 것을 합쳤고 그 결과 전자의 개혁교회는 언약 신학이라는 궤변을 만들었고 후자인 알미니안들은 구원의 상실이라는 이단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크리스찬 영성 학교 신 목사는 장로교파에 속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즉 그는 언약 신학을 믿었으나 그것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나름 알고서 그 의문을 풀려고 하다가 알미니안으로 미끄러 떨어졌고 결국 행위 구원으로 간 것이다.
신 목사가 주요 비판하는 항목 중 하나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과 <영접 기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 10:9-10).
신 목사는 롬 10:9-10과 일치하지 않는 구약 구절들과 히브리서, 야고보서 등의 행위 관련 구절들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는 롬 10:9-10과 히브리서, 야고보서, 구약의 주요 모순점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성령께서 해결해주시라고 청하지도 않는다. 만일 신 목사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맞다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에게 "이게 왜 이렇게 서로 다르지?" 하는 의문을 주시고 그 의문을 풀어나가도록 길도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아, 구약과 신약의 구원론이 다르구나" 하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 성급히 성경을 억지로 풀려 했었던 자기 조급함을 뉘우쳤을 것이다.
이 신 목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지금처럼 행위 구원을 가르치고 롬 10:9-10을 무시, 박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행위 구절들을 믿기 위해서 롬 10:9-10을 던져 버리고 짓밟는 행위이다. 그런 짓은 성령께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미혹된 목사와 선교사, 성경 교사들에게 시키는 멍청한 짓이다. 자기 구원의 근거가 되는 구절을 그렇게 업수이 여기고 함부로 취급한다면 누가 그 사람을 신실하다고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 목사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데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며,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리던지, 다른 하나를 억지로 해석하고 넘어가던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궤변을 끌고 나갈 수 없기에 결국 성경의 일부는 믿는다 하고 일부는 부정해 버리는 자기 모순을 자행하는 것이다.
신 목사가 믿는 이단 교리 중 또 하나는 "성령 받은 사람은 결단코 마귀들리지 않는다"는 헛소리이다. 이것이 헛소리인 이유는 정신병원에 내원하여 약을 타가는 고객들의 상당수가 마귀들린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바른 교회에서 바른 성경과 교리를 믿고 신앙 생활하지 않으면, 은사주의나 카톨릭에 들어가서 거짓 종교 놀음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정신 세계는 왜곡되고 미칠 수 있으며 마귀도 들린다. 우선 신 목사 자신도,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자이지만, 그도 교회도 다녔으며 기독교 물을 먹은 사람이기에 마귀들려서 거짓 교리를 믿는 것은 맞지 않는가? 자기 안에 있는 영이 성령이라고 착각하면서 거짓 은사도 행하고 있다. 마귀가 그렇게 기독교인 흉내를 잘 낼 수 있다면 믿는 그리스도인 안에는 왜 못 들어간다 생각하는가? 마귀는 인간의 육신을 점유하는 존재이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상관없이 누구의 육신이든 점거할 수 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거짓 목사 LA "송요셉"도 신 목사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는 신학이란 쓸데 없으며 성경 해석이나 주석이란 것도 다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모순된 사실은 송요셉이라는 자는 자기 성경 해석 전체를 피터 럭크만 박사의 주석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자신의 엉터리 해석들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해석들은 모두 럭크만 박사 주석서에서 베껴 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석, 해석, 심지어 신학교의 필요성도 깡그리 부정한다. 언행일치가 안 되는 점은 자기도 소위 "성경 학교"를 한다고 하면서 남에게 빌려온 지식으로 시도해 봤다는 것이다.
신 목사는 교단 교리의 해석을 부정하는데 교단 교리도 틀린 것이 있고 맞는 것이 있으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교단 교리와 무관하게 성경적 교리만 주장하므로 신 목사의 비판 대상도 아니다. 신 목사 자신이 장로교에 몸담으면서 칼빈주의나 언약신학 같은 모순투성이 교리를 억지로 삼키려다가 소화불량, 오바이트를 일으켜 거기서 나왔으면 바른 지식으로 물갈이를 했어야 되는데 또 다른 돼지우리 진창인 은사주의에 흠뻑 빠지면서 현재의 절망적 상태가 되고 만 것 같다.
송요셉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나지 못했으며 기독교 물을 다소 먹고 교리와 성경에 대해 잡다한 지식들을 쌓았다고 해서 자신이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결국 잡탕 교리를 내어놓고 사람들을 혼돈시키는 악역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은 해석하면 안 돼"라고 주장하지만 그 대안이 없다. 성경 해석하지 말라니, 그러면 우리더러 순전히 수동적 방임적 상태에서 너네들이 풀어대는 사사로운 썰들을 그냥 다 믿으란 소리냐? 이건 마귀의 가르침인데 카톨릭이나 은사주의가 교인들을 억압하는 것도 똑같은 사사로운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