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의 은혜만 받고 자기부인은 없는 것이 구원의 신앙인가"
— 십자가는 죄를 덮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하나님께 돌린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은혜’이며,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은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약화될 수 없는 중심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데서 끝나는가. 아니면 그 십자가가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가.
이 질문을 놓치면 기독교 신앙은 매우 이상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십자가의 은혜는 말하지만 자기부인은 사라지고, 죄 사함은 말하지만 삶의 변화는 약해지며, 성령충만은 말하지만 성령의 통치는 희미해지고, 구원확신은 강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경건은 약해질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자기부인은 자기수양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태복음 16:24
여기서 말하는 자기부인은 철학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자기성찰과 외형적으로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사람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며, 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
철학적 자기수양은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자신을 개선하려 한다. 반면 성경의 자기부인은 십자가가 먼저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사건에서 출발한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성을 완전히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자기부인은 단순히
“나는 앞으로 착하게 살아야겠다.”
라는 도덕적 결심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온 바로 그 삶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였구나.”
라는 발견에서 시작된다.
새언약 삼위일체 신학은 이 지점을 ‘그리스도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의 관계로 설명한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참된 할례는 육신의 표지가 아니라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할례가 아니라 마음을 베는 할례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을 찌르고, 그 마음의 자기중심성을 드러내며, 결국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마음의 할례로 이어지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부인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회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를 단지 자신이 저지른 몇 가지 죄를 인정하고 용서받는 것으로 이해하면, 회개는 매우 좁아진다.
거짓말을 했으니 회개한다.
화를 냈으니 회개한다.
욕심을 부렸으니 회개한다.
물론 이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의 회개는 그보다 더 깊다.
죄의 행동을 고치는 것을 넘어 왜 그런 죄가 반복해서 나오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 뿌리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이 있다.
아담의 타락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 하나를 먹었다는 행동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선택하고, 하나님 중심의 질서에서 자기중심의 질서로 옮겨 간 것이 타락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수정하는 데서 끝날 수 없다.
회개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회개와 자기부인은 서로 다른 두 신앙 행위가 아니다.
회개는 자기부인의 시작이며, 자기부인은 회개가 계속되는 삶이다.
한 번 눈물을 흘렸다고 자기중심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 안의 욕심과 교만과 두려움과 자기보존의 본능은 계속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 번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속적인 자기부인의 삶이다.
대속은 자기부인을 면제하는 은혜가 아니다
여기서 현대 기독교가 매우 조심해야 할 지점이 나타난다.
십자가의 대속을 이렇게 이해할 위험이 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담당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은혜 안에 있다.”
이 고백 자체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 신앙이 멈추면 십자가가 사람의 자기중심성을 그대로 보존해 주는 도구처럼 오해될 수 있다.
대속을 받았으니 자신의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도 되고, 죄를 반복해도 은혜를 말하며, 자기부인은 행위구원처럼 생각하는 신앙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대속은 자기부인을 면제하는 은혜가 아니라 자기부인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비로소 자신의 욕심과 자기중심성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에 우리도 자신을 부인할 수 있다.
이것이 대속이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대속은 단지 법정적인 선언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 은혜가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삶의 방향을 변화시킨다.
보혈은 자기중심을 보호하기 위한 피가 아니다
예수의 보혈 역시 죄 사함이라는 한 가지 기능으로만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잔을 가리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법이 돌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기록되는 사건이 있다.
따라서 예수의 피는 죄를 용서하는 피인 동시에 새 언약을 세우는 피이다.
그 피는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상태 그대로 두기 위한 피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를 덮어 자기중심을 보존하는 피가 아니라, 자기중심을 찔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새 언약의 피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묻는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복음은 단순히 지식을 하나 더 얻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찔렀다.
그리고 마음의 찔림은 돌이킴으로 이어졌다.
새 언약의 복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람은 십자가만 바라보는 관객으로 남을 수 없다. 십자가가 자신의 삶을 비추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지 않았는가.”
“예수의 은혜를 말하면서 자기 십자가는 피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이 시작된다.
기도가 없는 자기부인은 자기수양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기도가 중요하다.
자기부인을 사람의 의지에 맡기면 다시 자기수양으로 돌아가게 된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
“욕심을 버려야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더 겸손해야지.”
이러한 결심은 필요하지만 사람의 의지만으로 지속하기 어렵다.
성경은 신자가 자기 힘만으로 거룩해지라고 하지 않는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한다.
성령으로 육체의 행실을 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기도는 성령의 통치 안으로 자신을 계속 내어드리는 경건의 훈련이다.
기도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발견한다.
기도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다.
기도하면서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구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중심을 다시 돌린다.
그래서 기도는 자기수양이 아니다.
기도는 십자가로 드러난 자기중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성령의 통치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으며 살아가는 새 언약의 경건훈련이다.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대속의 효력을 받아 누린다는 의미로만 좁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셨던 그 마음, 자신을 내어주셨던 그 사랑,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던 그 순종이 신자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의 훈련은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조각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신의 삶 안에서 나타나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계속 내어드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한 마음과 거룩한 인격이 나온다.
기독교는 인격수양의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에는 반드시 인격의 변화가 나타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수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이 마음을 찌르고 성령께서 사람의 중심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
오늘날 교회는 대속을 많이 말한다.
은혜도 많이 말한다.
사랑도 많이 말한다.
그러나 다음 질문도 함께 물어야 한다.
그 대속이 당신의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 은혜가 당신을 자기부인으로 이끌고 있는가.
그 보혈이 당신의 마음을 찌른 적이 있는가.
회개가 단지 죄의 목록을 정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돌리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가.
성령을 구하면서도 실제 삶의 결정과 욕망은 여전히 자신이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가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시간이 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사라질 때 신앙은 매우 편안해질 수 있다.
죄는 예수께 맡기고, 은혜는 자신이 받고, 삶의 중심은 여전히 자신이 차지하는 신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가 부르는 삶인가를 성경 앞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하셨고 동시에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그 길에서 성령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십자가에서 거룩함까지
새 언약의 구원은 하나의 살아 있는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행하신 그 보혈로 마음이 찔리고 자기중심성의 죄를 발견하여 회개하며 내 마음의 할례로 자기를 부인하며 성령의 통치와 교제가 기도와 경건의 훈련이 되어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되어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길이된다.
이 과정은 사람의 공로를 쌓아 구원을 얻는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 사람의 마음과 삶에서 무엇을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이다.
은혜가 있기 때문에 회개한다.
보혈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찔린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자기부인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거룩함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모습 그대로 안전하게 보존하는 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난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돌리는 구원이다.
십자가의 대속은 자기부인을 없애는 은혜가 아니다.
자기부인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이다.
그리고 참된 회개는 죄 몇 가지를 후회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존재의 방향을 하나님께 돌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 길에서 기도는 선택적인 종교행위가 될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아내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중심을 내려놓고 성령의 통치 안에 머물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는 새 언약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믿는 신앙은 결국 십자가를 닮아가는 신앙이어야 한다.
대속을 받은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길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만든 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통치로 나타나는 선함과 거룩함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