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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시집을 읽고 스트리트뷰로 예전에 살던 동네를 보았다. 2014년, 2008년, 2007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감탄하며 본다. 새 간판을 의젓하게 단 집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강아지가 2014년의 베란다에서 난간 밖으로 코를 내밀고 있다. 2008년의 내 방 안에서 아직 아기인 우리 강아지가 창문 반토막만큼의 햇살 안에 누워 있다. 모래알이 반짝이던 2007년의 놀이터를 본다. 그토록 가고 싶던 시절에 나를 잠시간 떨어뜨려놓은 듯 울고 싶어진다. 사라지는 것에는 끝이 없다. 까닭을 모르겠는 상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말을 뿌리쳤”(「숨소리를 따라가던」)던 수많은 절망. 나무토막만큼 쓸모없는 시. 내가 나로 사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유현아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오래된 것을 오래도록 끌어안는다. 쓸모를 묻지 않아도 속속들이 멋있어! 이 시집을 읽는 분들이 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원 (만화가)
책 속으로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오늘의 달력」 전문
꼭대기로 소풍 가요
우리가 딛고 걷는 바닥은 아무 데도 없거든요
저기 교묘하게 죽어 있는 바닥들이 보이잖아요
우리의 바닥들은 바닥을 치고 위로 더 위로 올라가죠
이제 혁명의 노래도 위로 올려 보내요
이제 투쟁의 기다림도 위로 올려 보내요
이제 죽음의 상징 따위도 위로 올려 보내요
정교하지 못한 거짓말들도 위로 올려 보내요
위로 위로 올라가다보면 그곳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 위에 아마도 펄럭이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목소리들이 붙잡고 있는 깃발들이 있을 거예요
그 속에 바닥에서 올라온 것들이 숨어 있을 거예요
올라간 것들은 이제 내려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울음을 위로하는 시간만큼 견딘다면 혹시 모를까
-「소풍」 부분
오늘도 침묵이 침묵처럼 번지고 있다
거짓말들은 모여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거품처럼 달아난 목소리는 지워진 경계처럼 낯설게 오다 도망친다
저녁이 되면 희미한 빗살무늬 기억이 켜지는 그곳에 치켜뜬 눈들이 박혀 있다
완벽하게 행복해,라는 대답은 새빨간 비문이다
입에서 수많은 물이 넘쳐흘러 도시를 습하게 만들었다
그날 밤에는 별 모양 하나가 반짝이며 광장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울음을 흡수하지 못한 별의 흉터가 하나 있다
-「질문들-광장에서」 전문
시를 읽는다 한들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고
함께 해고된 내 친구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시를 듣는다 한들
어렴풋한 희망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우울의 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
쓸모없는 시 한편이 여린 눈동자를 흔들며 다정하게 물들이고 있네
흔들리는 슬픔들이 모여 하늘하늘 공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네
-「질문들-쓸모없는 시에 대한」 부분
이제 모두 본 것을 듣기로 한다
(…)
슬픔으로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다
이제 모두 함께 슬픔을 빛이라고 말하자
편지는 늘 이곳에서 왔다
잠들어도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오길 반복하는 빛
사람의 말을 이어가는 시
-「사람의 시」 부분
가스레인지에서 푸르뎅뎅한
매의 발톱이 올라와요
거뭇거뭇한 손이 창문을 두드려요
방바닥에 귀를 대고
오래된 기차 소리를 들어요
상처 입은 목소리가 들려요
마른 울음을 뱉고 있어요
거친 바람이 내 이름을 불러요
사람들이 헤어지고 있어요
수제비를 뜰 시간이에요
-「우기」 전문
출판사 서평
절망하기보다는 불타오르기를,
씩씩하고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슬픔
유현아의 시에는 “저녁이 사라진 삶”의 바닥에 “엎드려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울의 통증들”(「어느 지긋지긋한 날의 행복」)과 상실과 슬픔의 조각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차별과 억압에 짓눌려 마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금-여기’의 삶이란 폐허 속에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인은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오늘의 달력」)인 비참한 일상을 그려내며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뿐인 바닥을 들여다보지만, 그 바닥 앞에 속절없이 주저앉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바닥을 발판 삼아 “분노에서 포기로, 무기력에서 허무로 소멸하는 계단”(「안녕과 함께」)을 성큼 뛰어오르며 “절망하기보다 불타오르기를 선언한다”(「식상」).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오늘의 달력」)일 뿐, 시인은 ‘지금-여기’의 현실에 꿋꿋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강력한 투쟁이자 희망이라 여기며 하루하루 주어지는 나날들을 충실히 살아내고자 한다.
시인은 삶다운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기보다는 그저 “버티고 견디는 것이 일상이 된 사람들”(「질문들-청계천 공구 상가 앞에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씩씩하게 명랑하게 아픔을 이야기하는”(「토요일에도 일해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사라져버린 구두와 슬리퍼와 운동화의 생사 따윈”(「2년」) 아예 아랑곳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사회 구조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낸다. “노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희미한 명예만을 가지고”(「매뉴얼 스토리 2」) 기득권을 누리려는 비열한 세태에서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이 훼손되고, 자본주의 체제의 매뉴얼대로 쓰이지 않은 “진실의 서류 뭉치들은 쓰레기통에서 소각”(「질문들-매뉴얼 스토리」)되고 마는 모순투성이의 부조리한 현실을 낱낱이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인지를 물으며(「질문들」 연작), 소외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세상 앞에 잊힌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정면으로 맞선다.
삶의 구체적인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유현아의 시는 매일 출근하고 매일 퇴사를 꿈꾸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시인 자신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시인은 “출근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매일매일 “출근하면서 시를 쓰는 일은/저항을 담보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식상」)이라 말하며 자신을 다독인다. 한편으로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말을 뿌리쳤”(「질문들-숨소리를 따라가던」)던 지난날의 아픔을 떠올리며, 오늘의 현실에서 “시를 듣는다 한들/어렴풋한 희망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고/우울의 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질문들-쓸모없는 시에 대한」) 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회의에 젖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쉬지 못하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전히 “산꼭대기 같은 굴뚝”에서 “구부러진 잠을 자는 사람들”(「질문들-옹호」)이 있기에 시인은 희망과 용기의 언어를 다시금 가다듬는다.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시 한편일지라도 그 속에서 “슬픔을 빛이라고 말”(「사람의 시」)할 수 있게 되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는 단단한 위로를 전한다.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시인의 말)이라는 믿음으로 “사라지는 세상을 위한 시”(양경언, 해설)를 계속해서 써나갈 시인이 지금 우리 곁에 있어 든든하다.
작가의 말
오지 않는 꿈이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은
사라지는 곳
기억에만 있는 곳
여전히 출근하고
날마다 퇴사를 꿈꾸면서도
사라지고 있는 골목들을 걷는다
살아나고 있는 말들을 기억한다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인 걸,
오늘도 아름다움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