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11장 교리와 역사에 남겨진 발자취 4. 훈독회와 통일교 성지
훈독회는 통일교의 전통이다. '훈독(訓読)'은 글자 그대로 가르침, 즉 말씀을 읽는 모임을 말한다. 훈독회는 1990년대 중반, 문선명이 남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펼칠 때부터 시작되었다. 훈독회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997년 10월13일이다. 문선명이 북한 흥남에서 나온 날이 10월14일이기에 그 전날을 기해 훈독회를 제정했다. 그때는 우루과이에 머물면서 남미 섭리를 한창 진행하던 때였다. 신도들과 아침밥을 먹은 후 큰 붓으로 '訓読会'라고 썼다. 그날 이후 훈독회는 통일교 신도들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일과가 되었다. 문선명은 훈독회의 의미와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들려 주었다.
"훈독회라는 말을 알아요? 무슨 훈 자예요? '가르칠 훈(訓)'자예요. '훈'자는 말씀(言)가운데 '내 천(川)'을 했어요. 물은 흐르는 거예요. 높은 데서 흘러가는 거예요. 물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의 생명의 원소가 돼 있어요. 이러면서 순환운동을 합니다. 산에서 내려오던가 전부 다 샘이 터져 흘러 가지고 강이 되는 거예요. 지구 전체 몸뚱이의 피와 같은 물, 또는 몸과 같은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닷물을 통해 생수와 합해 가지고 수증기가 돼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는 거예요. 통일교회의 말씀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데는 부활이 벌어진다 그거예요. 또 그 다음에 '독(読)'자는 무슨 자예요? 말씀을 파는 것입니다. 그냥 주지 말라는 거예요. 천금만금 이상의 가치로서 자기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가치로서 전수해주라는 거예요. 그러면 통일천하가 되는 거예요. 지상천국은 틀림없이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그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훈독회로 하루를 시작했다. 큰 행사가 있는 날 아침에도, 바다에 나가기 전에도, 주요 회의가 있어도, 사적인 모임이 있어도 반드시 훈독회를 했다. 또 때로는 시간과 관계없이 훈독회를 했다. 밥을 먹기 전에, 밥을 먹은 후, 바다에서 낚싯대를 드리워놓고, 모래밭에서 파라솔로 바람을 막아놓고 훈독회를 했다. 문선명이 훈독회를 할 때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통일교 신도들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반드시 모임을 시작하기 전 훈독회를 한다. 일본에서도 하고, 미국에서도 하고, 독일에서도 하고, 콩고에서도 하고, 브라질에서도 한다.
또한 훈독회의 전통을 전 세계로 확대하기 위해 대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1998년 2월부터 3월까지 한학자 총재는 12개 지역에서 일본 훈독대회를 열었고 4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16개 도시에서 훈독대회를 열었으며, 1999년 12월에는 워싱턴DC에서 국제훈독대회를 개최했다. 이어 2000년 8월에는 국제훈독대회를 열었다. 특히 영국대회에는 전 세계 각계각층의 주요인사 500여 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외에도 시민대학 형태로 각지에서 훈독대학을 운영하고, 훈독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그때마다 문선명은 훈독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제는 전부 훈독회를 통해 가지고 이 모든 말씀이 여러분의 거울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투시해 가지고 티가 자기 자체의 눈앞에 가로 놓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말씀과 하나 되어야 돼요. 여기 내가 그것을 중심 삼고 일생 싸우지 않았어요? 싸워서 승리했으면 승리의 길을 전부 다 전통으로 이어받아야 돼요."
그런데 사실 훈독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매일 해야 하고, 그 시간도 짧지 않다. 그러기에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훈독을 하면 어떤 사람은 지루해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좀이 쑤셔 들락날락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훈독회를 시작할 때는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를 드린 후 시작하지만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면 자세가 흐트러진다. 이것을 잘 알기에 문선명은 훈독회를 편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했다.
훈독회를 하는 중간에 설교도 하고, 중요한 보고가 있으면 하도록 하고, 신도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으면 모두 함께 듣도록 했다. 또 노래도 종종 불렀다. 합창으로 찬송가를 부르기도 하고 가요를 부르기도 했다. 노래를 잘하는 신도가 있으면 혼자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문선명은 동요부터 시작해 가요까지 노래라면 다 좋아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울산 아리랑'등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를 때는 신도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합창을 한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면 또 훈독회를 하는 것이다.
문선명이 훈독회 때 세운 기록은 어쩌면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긴 시간일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훈독회 시간을 길어야 2~3시간으로 본다. 그렇게 하는 날도 많지만 5시간 이상 하는 날도 적지 않다. 어떤 때는 10시간도 넘어간다. 보통사람이라면 엉덩이가 참아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선명은 2011년 7월 여수에서 23시간 30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훈독회를 한 적도 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훈독회를 했을까? 오직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말씀을 읽음으로써 모두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통일교 신도들은 훈독회를 통해 자칫 흔들릴 수 있는 신앙을 바로 잡고 인생의 올바른 길로 변치 않고 걸어가는 것이다.
통일교 성지
통일교 성지는 문선명과 통일교의 초창기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 중 8곳을 소개한다.
● 흑석동 : 서울 동작구 흑석동 173ㅡ186번지
문선명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흑석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명수대 예수교회와 한강 건너편 백사장에 있던 서빙고교회를 다녔다.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아주 인기가 좋았다 한다. 명수대 뒤쪽의 달마산 바윗돌에 올라 밤새 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한번 기도에 들어가면 눈물콧물 범벅이 될 정도로 울며 몇 시간씩 기도에만 전념했다. 이 기도가 훗날 통일교를 만들고 세계 화합과 평화에 이바지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 범내골 : 부산 동구 범일 4동 1513번지
북한의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옥고를 치른 문선명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석방되어 남으로 피난을 왔다. 1951년 1월 27일 제자 김원필과 함께 부산 초랑역에 도착했다. 이후 곽노필(서울 흑석동 시절 친구), 엄덕문(일본 유학시절 친구)과 만나 그들 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제3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생활했다. 4월 하순부터는 제자 김원덕 집에서 20여일 머물렀다. 이곳에서 「원리원본」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5월 중순부터는 김원필과 나기야(長屋, 일제강점기 전기회사의 사택, 범냇골 입구)로 옮겨 하숙을 했고, 1951년 8월에 범내골 토담집을 손수 지었다. 이곳에서는 1953년 1월까지 1년 6개월간 살았다. 지금 토담집 자리에는 범내골기념관(범일전, 1976년 12월 23일 개관)이 세워져 그 시절을 기념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토담집에서 사용하던 램프(진품은 별도 보관), 좌식 책상, 휘호 '범일전(凡一殿)', '일도지원 일심일념(一道之源、一心一心一念)', '부원지성도 성도지복음(釜源之聖道 聖徒之福音)'등이 있다.
● 청파동 교회 : 서울 용산구 청파동 1가 71ㅡ3번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는 1954년 5월 1일 서울시 성동구 북학동 391ㅡ6번지, 일명 '세 대문 집'에서 창립됐다. 이후 성동구 홍인동 241ㅡ44번지, 중구 장충동 1가 37번지를 거쳐, 1955년 10월 7일 용산구 청파동 1가 71ㅡ3번지인 청파동에 터를 잡았다. 이곳이 통일교 신도들의 중요 성지 중 하나다. 교회는 2층으로 된 적산가옥으로 1층에서는 예배와 수련회가 진행되었으며, 1층 안쪽에는 문선명이 사용했던 방이 있다. 이곳에서 1960년 3월 27일 문선명/한학자 약혼식, 4월11일 성혼식이 거행됐다. 또한 3가정의 축복식(4월 16일), 33가정의 축복식(1961년 5월 15일), 72가정 축복식(1962년 6월 4일)도 열렸다.
● 천주청평 수련원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567번지
문선명이 처음 청평을 방문한 것은 1967년 9월이었다. 뽕나무가 있던 땅을 구입한 뒤, 1971년 6월 17일 수련소를 세우기 위해 직접 곡괭이로 땅을 골랐다. 이후 16인의 건설단이 편성됐으며 전국목사 하계수양회(28명 참가)가 열렸고, 많은 수련회가 개최되었다. 1972년 7월 8일에는 문선명이 수련소 일대의 산들에 지명을 새롭게 명명했다. 1975년 5월 1일에는 총해원식이 거행됐고, 그 해 6월 7일 여의도 구국세계대회의 강연 원고도 청평에서 준비했다.
● 파주원전(原殿) :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무건리 감골 23번지
원전은 이신실 신도가 입교하여 1960년대에 50여만 평의 토지를 기증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는 신도가 성화해도 매장할 수 있는 교회 토지가 없었다. 1970년대 초가 되어서야 파주원전으로 옮겨졌다. '원전(元殿)'이라는 명칭은 문선명이 직접 지은 이름이며, 2012년 '원전(原殿)'으로 바꾸셨다. 현재 원전에는 통일교 신도 108분(2013년)이 안장되어 있다.
● 청해가든 : 전남 여수 화양면 장수리 장등마을 313번지
여수・순천 섭리는 2002년 '제43회 참자녀의 날' 이후 해양섭리를 본격화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 전역을 조사한 결과 여수가 제1후보로 올랐다. 2003년 1월 8일 문선명은 여수(현재의 청해가든)를 방문해 인근 산에 오른 후 여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쌍합십승일, 영・호남 화합 통일대회, 화합과 통일을 위한 절대가치 선포대회, 참심정 혁명과 참해방 석방시대 개문 선포대회 등이 모두 여수에서 열렸다. 2004년에는 재한 일본인 여성을 중심으로 세계 해양지도자 40일 특별수련회가 열렸다. 문선명/한학자 부부는 청해가든과 거문도를 자주 방문했으며 2011년 9월12일 거문도에서 해양 천정궁을 봉헌했다.
● 계룡산 갑사 : 충남 공주 계룡면 중장리 52번지
일본 선교의 출발점이 계룡산 갑사이다. 1958년 5월 30일, 최봉춘 선교사(당시 33세)는 일본 선교 특명을 받고 계룡산 갑사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5월 29일 문선명과 최봉춘이 묵었던 갑사의 용천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용천각은 2개의 방과 부엌으로 돼 있는데 오른쪽 방은 문선명이, 왼쪽 방은 최 선교사가 묵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최봉춘은 온갖 고난과 고행 끝에 일본 선교의 물꼬를 텄으며 이후 전 세계에서 통일교가 가장 융성하는 나라로 자리 잡았다. 그 출발지가 갑사이기 때문에 통일교 성지로 정해진 것이다.
● 야목교회 : 경기도 화성 야목리 363ㅡ1번지 야목교회
북한에서 문선명에게 전도된 차상순 목사는 6.25전쟁으로 문선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남하 후 경기도 화성 야목(野牧)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그러다가 문선명의 근황을 듣고 120명의 신도들을 대동하고 입교했다. 야목교회는 1959년 제2차 40일 전도사 수련회 등 교육의 산실로 거듭났다. 문선명은 야목을 '제2의 정주'(문선명의 고향)라고 말하고, 앞으로 남북의 지도자들을 이곳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