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인생 별거 없더라.&김동길교수
친구야!
인생 별거 없더라.
이리 생각하면 이렇고 저래 생각하면 저렇고
내 생각이 맞는지 네 생각이 맞는지 정답은 없더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가 잘라 뭐 하고 네가 잘라 뭐 하나
어차피 한 세상 살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건데
이 세상 누구도 영원한 삶은 없다네.
화낸 들 뭐 하고 싸운 들 무엇하나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뼈에 박히고 가시가 있는 말들도
우린 씹어 삼킬 나이와 가슴이 있잖아
때로는 져주고 때로는 넘어가 주고
때로는 모른 척해주자.
그게 우리 아닌가 어차피 우린 친군데.
그게 무슨 소용 있겠나 이왕 살다 가는 세상
그 무엇이라고 안 되는 거 없고 못할 것도 없다.
여보게 친구! 어느덧 우리 인생도 이제
가을이 되었네 그려.
꽃피는 봄 꽃다운 청춘..
그 좋았던.. 젊은 날들 이제 석양에 기울었지만
고운 단풍이 봄 꽃보다 낫다네.
돌아보면 험난했던 세월 자네는 어떻게 걸어왔는가?
모진 세파에 밀려 육신은 여기저기 고장 나고...
주변의 벗들도 하나둘씩 단풍이 들어 낙엽처럼
떨어져 갈 가을 인생의 문턱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힘든 세월 잘 견디고 무거운 발길
이끌며 여기까지 잘 살아왔으니 이제는 얽매인 삶
다 풀어놓고 잃어버렸던 내 인생 다시 찾아
숙제 같은 인생 축제처럼 살자.
남은 세월 이제 후해 없이 살아가세나.
인생 나이 60~70 이 넘으면 남과 여, 이성의 벽은
무너지고 가는 시간 가는 순서 다 없어지니
부담 없는 좋은 친구들 만나 말동무하며
산에도 가고 바다도 가고 마음껏 즐기다 언젠가
나를 부르면 자연으로 흔쾌히 돌아 가세나..
- 김동길 교수의 명언 -
첫댓글 나이가 들면 / 김동길=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알고 싶은 게 많아진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이해될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해하려 애써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나이가 들면 무조건 어른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른으로 보이기 위해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게 편해질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이 공부해야 하고
더 많이 이해해야 하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끝없이 끝없이...
나이가 들면서 짙은 향기보다는 은은한 향기가
폭포수보다는 잔잔한 호수가
화통함보다는 그윽함이
또렷함보다는 아련함이
살가움보다는 무던함이
질러가는 것보다 때로는
돌아가는 게 좋아진다
정치가 이시기도하죠~
감사히 함께합니다
그러게요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정답을 주셨지요
나이가 들면 아는게 많을 줄 알았는데
이 세월에도 배워 갑니다
정답...!
양떼님
김동길 교수를 참 좋아 했는데
지금은 고인이라 안타깝네요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멋지지요
보고싶은 한 분입니다
맞아요
정말 저도 참으로 안타깝다 했답니다
좀 더 인생을 연장 하셨다면
더 많은 명언의 역사를 남기셧을 것인데 말입니다
보고 싶기도 그리운 역사의 한 분이십니다
고통없는 하늘여행 잘 하실겁니다
요즘 가을이 넘넘 멋지지요
오랜만입니다
예방 접종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독감하고 코로나를 같이 맞았어요
다음 날 목요일인데 티 안내고 율동공원까지 함께 하고
점심 먹고 헤여졌는데 집에 들어와 씻지도 못할정도였어요
겨우 세수하고 누었답니다
다음 날도 ...
오늘은 다 나았는제 입술이 부르텄네요 ㅋ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시인님
친구야 인생 별거 없더라
감사히 다녀갑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날 되세요
국민학교 "동무"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전공이 같아 자주 만나고 집안끼리도 잘 아는 "친구" 어느덧 80이 가까워진 "동지" 부모님들은 모두 하늘로 가셨고 우린 셋이 남았습니다. 친구 둘은 (부인은 피아노 남편은 바이올린) 부부입니다. 울 집에 26일동안 머물며 긴세월의 기억들을 나누다 웃고 티격태격 실갱이도 하고 비 오는날은 자주 눈물을 글썽이며 술잔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나는 미국온 지 13년째 내 악기를 열어 보지도 않고 피아노 한 귀퉁이에 모셔 놓았더니 친구가 튜닝을 하며 기암을 하는 겁니다. 친구는 지금도 연주회가 있어 울집에서도 매일 3-4 시간씩 연습을 했습니다.
모든것이 그렇듯 악기는 기술의 하나이므로 매일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용하던 집에 매일 바이올린 소리가 밖으로 들리니 주민이 물어 보기에 살짝 귀뜸만 했는데 소문이 퍼져 연주를 듣고자 여러 사람이 졸라--- 유명한 내 친구는 어느 토요일 저녁 주민들에게 3곡이나 선사했습니다. 10명의 주민들은 식사 메뉴를 짜서 서로 한두가지씩 만들어 와 우리 형제 가족까지 30명이 훌륭한 디너쇼를 했답니다.
우리는 같이 있는 동안 외식하는 끼니를 제외하곤 한식으로만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ㅋㅋ각종 국, 나물무침, 부침개 (옛날식) 잔치국수 냉면, 떡볶이.--- 여동생들도 자주 와 매일이 대식구 였습니다.돌아가신 이모하고 친하게 지내던 한국 아주머니가 매일 오셔서 일하셨는데 고유에한국 음식을(우리 청년기에 먹던 스타일) 제공하시더라구요. 요즘 젊은 주부들은 한국 음식을 거의 퓨전으로 하잖아요. 살기 좋아진 (풍부해진) 탓이겠지요.이젠 우리가 늙고 보니 수수한 우리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보기도 정갈했습니다.오이지는 50개를 담았는데 일주일만에 동이 났고 50개를 또 담아 친구가 돌아갈 때 20개를 가지고 갔습니다.
친구! 김동길 교수님 말씀에 부쳐-- 저녁노을에 당도한 친구끼리 한자락 깔 일도 없었습니다. 동무였을 때처럼 편한 매일을 열고 닫으며 즐거웠습니다. 서울에 동창 친구가 없는 막내 여동생이 우리를 몹시 부러워 했는데 돌아갈 때 공항까지 쫒아 나와 울더라구요.
몇시간 안되는 거리에 살아도 같이 모이기는 왜 그리 어려운 지 모르겠습니다. 양떼님은 여전하십니다. 건강하시기 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