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란자에서의 안거 (57)
깨달음을 이루신 후 12년, 부처님께서 사왓티에 머무실 때였다.
사업 관계로 사왓티를 방문했던 웨란자(Veranja)의 바라문왕 악기닷따(Aggidatta)가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기원정사로 찾아왔다. 수라 세나의 마두라를 지나 간다라의 딱까실라로 가는 도중에 있던 웨란자는 꼬살라국 빠세나디대왕이 바라문왕에게 봉토로 하사한 땅이었다. 황금산과 같은 부처님의 풍모와 불꽃같은 가르침에 감복한 악기닷따는 기원정사를 떠나며 부처님께 간청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과 비구들께서는 저희 웨란자로 오셔서 안거하소서.”
묵묵히 수락하신 부처님은 안거 시기가 다가오자 오백 비구와 함께 웨란자로 향하셨다. 그러나 정작 그 땅에 도착하자 악기닷따왕은 궁전의 문을 당아걸고 누구의 방문도 허락지 않았다. 안거 동안의 지원을 약속받고 찾아왔던 승가에게는 큰 낭패였다.
게다가 부처님이란 이름조차 들어본 사람이 없던 그곳에는 그해 심한 기근까지 겹쳤다.
마을로 걸식을 나선 비구들은 식은 밥 한 덩이도 얻기 힘들었다. 온 대중이 굶부림에 허덕이자 마하목갈라나가 나섰다.
“세존이시여, 쌀이 자생하는 웃따라꾸루(Uttarakuru)로 가서 제가 음식을 마련해 오겠습니다.”
부처님은 단호하셨다.
“마하목갈라나, 그대의 신통력이라면 그곳의 음식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숙세의 과보가 익어 떨어지는 것은 바꿀 수 없다. 허락할 수 없다.”
때마침 와라나시에서 말을 키우는 사람들이 넓은 목초지를 찾아 웨란자로 오게 되었다. 빈 그릇을 들고 마을에서 나오던 비구들에게 그들이 물었다.
“힘들고 피곤해 보이십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비구들은 사정을 얘기하였다. 말을 키우는 사람들이 말했다.
“스님들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어쩌지요. 저희도 가진 양식이 거의 떨어졌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사료용 보리뿐인데 이거라도 잡수실 수 있겠습니까?”
“말이 먹을 양식을 저희에게 주시면 저 말들은 무엇을 먹고요?”
“마침 풀들이 잘 자라 말들을 살찌우기에 충분합니다.”
말을 먹이는 사람들은 가져온 사료의 반을 덜어 비구들에게 주었다.
비구들은 쭉정이가 수북한 겉보리를 그대로는 먹을 수 없어 돌에 갈고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아난다는 부처님과 자신의 몫을 들고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저녁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아낙네가 절구질을 하고 있었다. 아난다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어 건너지 못한 이를 건네주고,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게 하며, 멸진(滅盡)하지 못한 이들을 멸진케하고, 태어남, 늙음, 질병, 죽음, 근심, 슬픔, 괴로움, 번민을 벗어나게 하는 분이 계십니다. 부처님이신 그분이 지금 이곳에서 안거하고 계십니다. 여인이여, 그대로 부처님을 위해 이 보릿가루로 밥을 지어주지 않겠습니까?”
여인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아난다의 말을 들은 한 여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 그렇게 훌륭하신 분의 공양이라면 제가 짓겠습니다. 힘닿는 대로 다른 분들의 공양도 제가 지어 드리겠습니다.”
여인이 지어준 밥을 들고 아난다는 숲으로 향했다. 착잡했다. 세상 누구보다 귀하게 자라신 분음을 두 눈으로 보아 잘 아는 아난다였다. 그런 분께 사람이 먹저못할 음식을 올려야 하는 자신의 손이 너무 부끄러웠다. 부처님은 발우를 받아 평상시와 다름없이 맛있게 잡수셨다. 목이 멘 아난다가 곁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아난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처님께서 미소를 보이셨다.
“아난다, 너도 먹어보겠느냐?”
부처님은 당신의 발우에서 한 덩어리를 집어 아난다의 입에 넣어 주었다. 눈물 반 음식 반으로 우물거리던 아난다는 깜작 놀랐다. 부드럽고 맛깔스러운 것이 전혀 거북스럽지 않았다. 그때서야 아난다가 환히 웃으며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오늘 한 여인에게 밥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한 여인이 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발을 지어 주었습니다.”
“밥을 지어주지 않은 여인은 마땅히 얻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었구나. 밥을 지어준 여인은 분명 전륜성왕의 첫째 부인이 되리라.”
말들의 사료를 먹으며 보낸 힘든 안거가 끝날 무렵이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물으셨다.
“자자(自恣)까지 며칠이나 남았느냐?”
“칠 일 남았습니다.”
“너는 성으로 들어가 바라문 악기닷따왕에게 전하라,그대의 나라에서 안거를 마쳤으니 이제 다른 나라로 유행을 떠나겠다고.”
아난다가 발끈하였다.
“세존이시여, 그 바라문이 부처님과 대중에게 무슨 은덕을 베풀었다고 이러십니까? 그의 초대로 이곳으로 와 이 고생을 했는데 작별인사를 하시다니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 왕이 베푼 은덕이 없다고는 하나 세상의 도리가 그게 아니다. 우리는 그의 손님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느냐? 대접이 시원찮았다고 떠날 때 주인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손님의 도리가 아니다.”
가르침을 받들어 아난다가 작별을 고하자 악기닷따왕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달려왔다. 악기닷따왕은 사 개월분의 양식을 가져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칠 일 분만 허락하셨다. 이레가 지난 후, 악기닷따는 한 줌의 곡식이 아까워성인과의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받을 일이 두려웠다. 악기닷따는 떠나는 부처님 발 앞에 남은 약식을 흩뿌리며 말하였다.
“이 곡식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한꺼번에 받아주소서.”
부처님이 제지 하셨다.
“곡식은 입으로 먹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어야 할 곡식을 땅에 부리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건 곡식을 보시하는 것도 곡식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악기닷따왕에게 부처님이 게송으로 축원하셨다.
외도들의 수행과 제사에서는
불을 공양함이 으뜸
학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이치를 통달함이 으뜸
우러러 받들 인간들 중에는
전륜성왕의 권위가 으뜸
강과 시내 모든 물에서는
바다의 깊이가 으뜸
뭇 별이 하늘 가득 펼쳐졌어요
해와 달의 광명이 이뜸이듯이
부처님에 세간에 출현하면
그에게 올리는 보시가 가장 으뜸이네
부처님께 엎드려 귀의합니다.
일화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