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지 경주지역 다큐제작 유족증언 채록현장
-일시:2023년3월6일(월)
-장소: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 당고개 학살지
-감독:구자환(레드툼.해원.태안 제작)
-안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주유족회
구자환(레드툼.해원.태안 제작)이 한국전쟁시 경주지역 민간인학살지를 방문하여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경주유족회의 안내를받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 당고개 학살지현장에서 다큐촬영하였으며 고령의 유족들을 현장에서 만나 생생한 증언을 채록하였습니다.구자환감독은 제3회 들꽃 영화상 다큐멘타리 신인감독상과
제39회 서울 독립영화제 우수작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경주피학살유족회는 2기진실화해위원회에 미신청사건을 접수하고 4차례조사관의 조사를 받아 진행하고있지만
출범 2년이 넘은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정문을 채택하지 않고있습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경주유족회
이성수 회장/ 상임대표
[1기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사건]
경주지역은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음에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경주경찰서 역시 경북지방경찰국으로부터 전쟁발발 직후 요시찰대상자에 대한 연행지시를 받았으며, 경주경찰서장이 사찰계를 통해 각 지서로 이들을 연행하라는 전통과 공문을 내려 보냈다. 연행된 주민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으며 유치장에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자 우체국 인근의 OK캬바레와 경주역사, 그리고 각 지서 유치장에도 잡혀 있었다.
이들은 인민군이 영덕에 진입하자 경주시 내남면으로 끌려가 경찰과 CIC 경주파견대에 의해 처형되거나 감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천북면처럼 지서가 중심이 되어 주민들을 직접 처형한 경우도 있었는데, 희생지는 내남면 노곡리 계곡, 천북면 화산리 계곡, 건천읍 송선리 계곡, 울산시 강동면 신명리 계곡, 감포 앞바다 등이었다.
총살에 동원되었던 경주경찰서 경비계 근무자 한씨(한신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 직후 두 차례에 걸쳐 내남면 현장에 동원된 사실이 있으며 첫 번째 동원되었을 때는 어느 날 밤이었다. 경찰서에 구금된 남로당원들을 대구형무소로 이송하는 트럭에 탑승하도록 차출되었고 실탄 50발을 지급받았는데 트럭이 도착한 곳은 대구형무소가 아닌 내남면 노곡동의 골짜기였다.
당시 현장은 사찰과장인 박용래가 지휘했으며 나에게는 5명의 여자를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나 머뭇거리고 있자 다른 동료 경찰이 그 여자들을 사살하였다. 이후 사찰계가 돈을 받고 처형될 사람들을 빼돌린다는 정보가 당시 월성군청에 주둔 중이던 CIC대장에게 들어갔고 그 이후부터 처형자에 대한 관리와 지휘는 CIC가 담당하였다. 두 번째 현장에 동원되었을 때는 낮 시간이었으며 현장에는 이미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놓은 상태였다. 당시 현장은 이북 출신의 CIC대장이 지휘하였는데 그 날 처형된 사람은 65명 정도였으며 처형자 중에는 15세도 안 되는 소녀도 있었다.
처형될 사람들 중에 일부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이 뒤로 묶인 채 뒤에서 총격을 받고 구덩이 속으로 쓰러졌으며 몸속 장기가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CIC대장은 한 차례 총격이 끝나면 ”총을 맞지 않은 사람은 부탁을 받아서 일부러 쏘지 않은 것이니 일어나라“고 하였으며 이 말을 듣고 구덩이 속에서 일어난 사람은 CIC대장이 삽으로 머리를 내리쳐 죽이기도 하였다. 처형이 끝나면 다시 마을 주민들이 동원되어 시신을 묻었는데 당시 유치장이 차면 현장으로 끌고 와 처형을 하였으며 다른 동료들도 몇 차례 현장에 동원되었다.”
경주경찰서 근무자 김씨(김상록)는 “전쟁 직후 경주경찰서 남쪽 운동장에 보도연맹원들이 집결한 채 트럭에 올라타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후 배에 실려 감포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산내면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이씨(이임출)는 “산내면 의곡 창고에 구금된 사람들의 경우 재판을 받으러 간다며 GMC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출발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이후 건천에서 산내로 넘어가는 감산재라는 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했다.
경주경찰서 근무자 최씨(최기성)는 경주역에서 보초를 서면서 감금된 100여 명의 주민들을 감시했는데, 모두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첫댓글 경주 피학살유족회 유족님들과 구자환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역사의 생생한 기록물이 될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