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촌과 홍범도
중국 길림성 화룡시 서성진 명암촌은 1910년 일제가 이 나라의 주권을 강탈한 후에 형성되었는데, 그곳으로 최초로 집단 이주한 20여 호의 사람들은 원래 함경북도 성진군(지금의 김책시) 학성면 달래동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이룬 마을을 주변 마을 사람들은 ‘예수촌’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겨레를 사랑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집회인 ‘송경회’를 해마다 가졌고, 그 자리에서 겨레의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그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겨레 사랑은 하나였다.
바로 그들의 마을에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부대가 들어오자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독립군 부대를 지원했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혹독했다. 패배한 일본군의 잔인한 보복을 받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당하고 집들이 불에 탔다. 그러나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겨레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아, 지금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신앙의 선배인 이 예수촌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과 겨레 사랑의 그 고귀한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가! 육사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려 한다는 이 어이없는 뉴스를 그 분들이 접한다면 과연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달래동에서 이주하여온 20여호는 모두 예수교의 신도들이였다. 그들은 1912년에 보진학교를 창설할 때 교회당도 함께 짓고 종교활동을 계속하였다. 때문에 당시 주변마을사람들은 이 마을을 <예수촌>이라고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이 마을명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촌명을 새로 지을 것을 의논하던 끝에 <장은평(藏恩坪>(하나님의 은혜가 깃든 평지라는 뜻)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이 촌명이 그 어떤 물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예수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명암촌>이라는 촌명이 새로 생겨나 <장은평>과 함께 사용되었다. 1932년에 괴뢰 만주국이 선후에야 비로소 촌명이 명암촌으로 고정되었다.
(중략: 인용자)
예수교 신도들은 매년 한번씩 <송경회(誦經會)>를 가지는데 평강벌의 범위에서 진행할 때에는 명암촌에 모여서 하고 연변범위에서 진행할 때에는 룡정에 모여서 하였다. 명암촌에서 진행하는 <송경회>는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집회로 되어 교인들을 단합시키고 그들을 반일투쟁에 궐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룡정에서 거족적인 반일시위운동이 일어나자 명암촌의 남녀로소는 보진학교의 학생들을 선두로 이도구와 투도구에 달려가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3.13 운동 이후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련합하여 <간도국민회>라는 반일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산하에 동, 서, 남, 북, 중 등 지방지회를 설치하였다. 화룡의 안은평, 고평, 남구, 북대지, 구세동, 명암 등 평강벌은 서부지회로 되었는데 본부를 명암촌에 설치하였다. 한윤극이 회장으로 선거되고 량형식, 량군식, 리태언 등이 골간으로 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1919년 가을 간도국민회 사법부장 최익룡은 량군식의 집에서 주숙하면서 명암촌을 거점으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연변조선족인민의 반일무장투쟁이 흥기할 때 명암촌의 청장년들은 반일부대에 참가하여 일제침략군과 싸웠다. 1920년 가을 홍범도장군이 거느린 반일부대가 투도구일본령사관을 습격하고 어랑촌 방면으로 이동할 때 명암촌 사람들은 소와 돼지를 잡아 장사들을 위로한 동시에 돈을 모아 내의를 사고 천을 사서 물감을 들여 군복을 지어 부대에 주었다. 청산리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명암촌사람들은 초신을 만들어 부대에 보내주고 우차를 동원하여 부대의 물자를 운반하여 주었다.
명암촌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제침략군은 청산리전투가 패배하자 명암촌에 달려들어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가옥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명암촌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육친들의 시체를 묻고 마을을 다시 건설하고 항일의 봉화를 높이 추켜들고 일제침략자들과 계속 싸웠다.”(별의 시인, “[광복전] 명암촌의 개척”, 연변윤동주연구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