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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과 노평구
임세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명예교수, HRD/직업교육 전공)
들어가는 말
오늘 강의 주제는 “김교신과 노평구”이다. 모두 알다시피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필진과 독자들이 모두 구속되고 검색당했다. 김교신 선생 관련 자료는 불온문서로 낙인찍혀 압수당하거나 불태워졌다. 일제 탄압으로 소실되고 흩어진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글과 일기, 회고자료들을 노평구 선생은 ‘만난을 무릅쓰고’ 하나하나 모으고 다듬어 10여 년 각고의 노력 끝에 전집을 펴냈다. 후세대에 전달하려 애쓴 노 선생의 노고로 오늘 우리가 김교신을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평구는 김교신을 어떻게 만나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왜 그렇게 간절하게 김교신을 후세대에 전달하려고 했을까? 이것이 오늘의 주제다.
노평구 선생을 중심으로 두 선생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 선생의 김교신 선생과 첫 만남, 일본 체류, 해방과 성서연구의 창간, 김교신 전집과 영인본 간행, 끝으로 노 선생이 쓴 김교신에 관한 글의 요지를 통해 노평구의 김교신 관(觀)을 살펴보는 순서로 말하려 한다. 김교신 선생이나 노평구 선생은 20세기 한국기독교사에 뚜렷한 유산을 남긴 큰 어른들이다. 나의 좁은 안목으로는 전체를 조감하고 파악할 수 없다. 다만 노평구 선생께 30년 가까이 성서를 배운 사람으로서 감수성이 민감했던 시절의 기억과 긴 세월이 만들어낸 개인적 관점이란 점을 전제한다.
나는 대학 시절 1975년 전북 순창 복흥에서 열린 성서연구 하기 집회에 참석하여 처음 노 선생을 만났다. 그 후 한 달에 한 번 열렸던 노 선생의 대전 성서집회에 참석했다. 대학원을 서울로 진학한 다음에는 매주 YMCA 성서집회에 참석하였다. 박상익, 장문강 선생과 함께 단테의 신곡 공부, 고병려 선생 희랍어반, 히브리어반에도 참석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공부 모임은 노평구 선생이 젊은이를 위해 특별히 마련하신 자리였다. 당시 60대 후반이셨는데 집회에서 열강으로 체력이 소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밥도 사주시고, 종로, 청계천, 충정로로 장소를 옮겨가며 우리를 이끄셨다. 교정을 도와줬다는 명분으로 선생은 전람회에 데려가, 보는 눈, 듣는 귀를 개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Y집회에서 요한복음 공부를 발표하고 글도 썼다. 선생의 그 사랑을 나는 잊을 수 없다.
1. 노평구 선생의 탄생과 성장기
노평구 선생은 1912년 1월 함경도 경성군 어랑에서 탄생, 2003년 9월 서거하셨다. 부친은 지방에서 이름 있는 한의사였다. 선생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함경도 산촌이었지만, 국경에 가까워 일찍 개화되었고, 마을엔 기독교 교회가 있었다. 유소년기부터 교회에 다녔고, 중학도 서울의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 배재중학교를 다녔다. 배재중 시절, 반에는 벌써 공산주의자와 민족운동자도 있어, 그는 스스로 기독교인을 자처하고 곧잘 그들과 토론도 하고, 정동교회, 중앙교회 등에 나가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1930년 2월 배재중 3학년에 재학할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200여명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 타도’등의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행진을 주도한 것으로 검거되어 1년간 수감되었다(1995. 10/11. 제463호 전집 5권: 263; 1955. 3. 제50호; 전집 1권: 295).
2. 마포 도화동 토막민촌 학교 교사 시절
노선생은 옥에서 풀려난 후 퇴학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기독교적 사회사업을 주창하고 실천한 일본인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방식으로, 두 친구와 함께 마포 도화동 산동네의 빈민들이 모여 사는 소위 토막민촌에서 수년간 사회사업을 하였다. 토막민촌이란 조선총독부가 강권(强勸)으로 단행한 토지조사사업 여파로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 살 곳이 없어 공동묘지나 산등성이에 땅을 파고 거적을 덮고 살던 곳을 말한다. 1930년대 중반 서울에는 의지할 곳 없는 빈민으로 도시에 진입하여 숭인동, 신당동, 아현동, 마포 도화동 등 산등성이 토막민촌에 사는 사람이 3~4.5만이었다. 토막민의 8할 이상은 글을 읽지 못하여 극빈 생활을 극복할 여력이 없었다.
20을 갓 넘긴 청년 노평구는 팔에 완장을 끼고 노동자를 시내로 인솔하기도 하고, 환자들을 총독부 병원과 세브란스 병원으로 안내하고, 아동교육에 열중하였다. 동네 공동변소 청소도 매일 도맡아 했다. 특별히 그가 맡은 역할은 교사였다. 2~3백 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오전반, 오후반, 그리고 야학반 교육을 담당하였다. 야학반까지 수업을 끝내고 나면 피로가 몰려왔지만, 동네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고, 보람도 느꼈다. 때로 이 일을 하다 죽어도 좋다 생각하였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속 깊이 불안이 감돌아 치는 충족되지 못한 자리”가 있었다. 그것은 “사회사업이라, 교육이라 하지만, 여아들이 가갸거겨나 일본말 배운 것이 불미한 직업에 떨어지는 원인이 되고, 수입의 증가가 성인들의 도박과 주벽을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 자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이로 인해 그 일을 그만두게 된다. 한글을 깨친 아이들이 남을 속이거나 도둑질하는 모습을 보고 ‘교육만으로는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절감한 것이다. 사회사업이란 것이 “쳇바퀴로 물 푸는 식”으로,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체험하였다. ‘인간 자체의 문제’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1971. 7. 201호; 전집 3권: 214).
3. 믿음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김교신 선생과 첫 만남(1934년)
노 선생은 토막민 사업에 열중하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번민하였고, 스스로 “양심 문제, 죄의 문제”에 봉착하여 내외로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바로 이때 종로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김교신의 성서조선지를 접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서조선에 끌려 권두문, 성서연구, 일기 등을 읽고 불안했던 마음이 깊은 위안을 받았다. 무기력에서 벗어남을 느꼈다(1949. 5. 제13호; 전집 1권: 87). 이렇게 그는 차츰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또한 성서를 공부하고자 하는 절실한 욕망이 솟았다. 성서조선을 만난 지 1, 2년이 지난 1934년 늦은 봄 어느 날 밤, 마침내 그는 양정학교 당직실로 김교신 선생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머리를 짧게 깍고 이마가 유달리 빛나는 건강한 체구의 김 선생을 만났다(1949. 5. 제13호; 전집 1권: 87). 김 선생은 보리차를 손수 부어 주며 한 시간 이상 말씀을 해주었다. 당시 활인동(현재 마포구 공덕동)에 살던 김 선생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집에서 주일마다 여는 집회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권유에 따라 주일 성서집회에 가서 만난 김 선생의 인상을 노평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새로운 희망으로 그다음 주일 활인동 선생 댁을 찾으니 흰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으신 선생께서 직접 대문을 열고 맞아 주셨다. 그때의 인상이 지금도 나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때 실로 참 조선 사람을, 아니 조선 자체에 접한 듯한 느낌이었다(1949. 5. 제13호; 전집 1권: 88).”
참 조선 사람이란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일컬어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겐 거짓이 조금도 없다(요한복음 1: 47).”하신 말과 연결된다. 그날 김교신 선생의 성서 강의를 듣고 “참 신앙, 참 기독교, 참 교회”를 발견하였고 기쁨이 넘쳤다고 한다. 그 만남이 단초가 되어 청년 노평구는 무교회와 조선을 자신의 생애를 바칠 대상으로 확정하였다.
“이에 감사와 만족은 차고 넘쳤었다. 그날부터 성서와 조선, 무교회와 조선, 이 둘이 또한 나의 생애를 바칠 대상이, 아니 실로 나의 애인이 된 것이다(1949. 5. 제13호; 전집 1권, 88).”
김교신이 연락선 갑판을 구르며 ‘아무리 해도 나는 조선인’임을 확인한 것처럼, 22세의 노평구는 무교회와 조선을 자기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았다. 어떻게 한두 번 만나고 생애를 바칠 대상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때 즉시 결단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첫 만남이 있고 2년후 일본 유학을 떠날 때 의학을 공부하라는 부친의 강권을 뿌리치고, 영혼의 의사가 되겠다며 모든 경제적 지원을 포기한 것을 보면 인생을 걸 진로 설정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결단력이 보통 사람과 다른 노 선생의 면모다.
김교신 선생 집회 참석
노 선생은 그때(1934년 늦은 봄)부터 김교신 선생의 학생대상 모임이 시내 부활사 강당으로 옮긴 후(1935년 12월) 1936년 2월 말 일본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 출석하였다. 당시 학생대상 모임이란 일반인 대상 성서집회보다 30분 일찍 시작하여 성구 암송을 점검하고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김 선생 댁에서 겨울마다 1주일 동안 열린 동계성서강습회에도 참여했다. 함석헌 선생의 교회사와 히브리서 강의도 들었다(1995. 10-11. 463호; 전집 5권: 262-270). 노 선생은 당시 김교신 선생의 성서 강의는 깊은 학식과 진실한 신앙체험이 통합된, “묵직하고 진땀이 흐르는 강의”였다고 회고하였다. 직접 강의를 들은 노 선생의 증언이다.
“선생의 성서연구, 그것은 과연 과학자이신 선생 특유의 풍부한 학식과, 깊은 생활 체험과 진실한 신앙 체험, 그리고 신구약성서 자체를 총동원한 것이었다. 그 위에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신뢰, 그리고 복음에 대한 확신과 감사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열애가 합쳐져, 성구 하나하나의 내용과 진리를 밝히려는, 실로 진땀이 흐르는 듯, 망치 소리 들리는 듯, 깊은 지심에서 광맥을 캐는 듯한 묵중한 강의였다. 그리고 대개 강의 끝에는 증명된 진리의 개인 또는 국가, 사회에 대한 응용면을 말씀하시고 끝마치셨다(1949. 5. 제13호; 노평구 전집 1권: 88).”
노선생은 김교신 선생 집회에 나간 지 2~3년이 지나 양심, 도덕적 고민으로 상담하였다. 선생은 정 그렇다면 성서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인생 고민은 성서 이외에 해결의 길이 없다, 하셨다. 그리고 일본에 가면 우치무라 문하의 선생 한 분을 찾아 일요성서연구회에 참석하여 성서를 배우는 한편, 영어, 독일어, 희랍어 공부에 열중하라고 일러주었다. 조선의 현실이 어느 부분이고 침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무슨 일이고 충분한 준비를 한 후에 착수한다면 절대 그 타개가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라 격려하였다. 기죽지 말라는 말씀이다.
일본 생활
24세의 청년 노평구는 1936년 2월 말 선생의 권유에 따라 일본 동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우연히 서점에 들렀는데, 그 서점의 주인이 쓰카모토 선생 집회를 소개해 주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내가 동경에 도착한 것은 당시 일본 군대 내에서 장교들의 소위 2.26 사건이 있었던 직후였다. 다음날이 토요일(2월 29일, 1936년 달력에서 확인)이었는데, 나는 숙소 근처였던 유명한 간다(神田) 서점가를 한나절 돌다가, 무교회 서점인 향산당에서 우치무라 선생과 쓰카모토 선생 등의 책에 접해 주인 부인에게 말을 건넸는데, 부인이 자기는 쓰카모토 선생 집회에 나간다고 해서 나도 나가보겠다고 하니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이래서 다음날 나는 동경 역전 해상빌딩 8층 선생 성서연구회에 나갔다(1973. 11. 제228호; 전집 3권: 307-309).”
노 선생은 처음 집회장에 도착하여 입구에서 청강료를 내고, 집회의 장로격인 야마다(山田) 노인의 안내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가자가 4백여 명 되는 대집회였는데 두 시간 이상 지속되는 강의에 기침소리 하나 안 들리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집회가 끝나고 안내했던 노인이 찾아와, 필기했느냐고 물으며, 자신이 그날 필기한 대학 노트 3장을 찢어 참고로 빌려준다고 했다. 노 선생은 집회 출석이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 후 10년 동안 선생의 말씀 한마디라도 빠뜨릴까 봐 조심하며 매주 필기했고, 이를 또 주내에 다시 정리하였다 한다(1973. 11. 제228호; 3권: 307-309).
노 선생은 그해 여름 가루이자와(輕井澤) 하기 집회의 고린도 후서 강의에서 천로역정의 저자처럼 ‘자신의 두 어깨에서 무거운 죄의 짐이 벗겨지는 믿음의 회심’을 경험했다. 이리하여 쓰카모토 선생을 만나고 반년 만에, 오로지 선생을 유일의 선생으로 모시게 되었다 한다. 토막민촌 일을 하며 심중에 오래 담아두었던 가가와(賀川) 씨도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쓰카모토 선생의 복음에 심취했고 만족했다.
동경 토목시험소 분소 근무
선생께 직접 들은 말씀인데, 일본 유학을 앞두고 선생은 진로 선택에 관해 부친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한의사로서 아들이 의학전문에 진학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선생은 “사람의 육체보다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고, 굽히지 않았다. 이에 부친은 그럼 “네 경제문제도 스스로 해결하라”며 지원을 단절하였다. 선생은 영혼 구원이라는 야심으로 선친의 후원을 포기했다 술회한다. 경제적으로도 독립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쓰오(松尾春雄) 선생의 추억(1979. 10. 298호; 전집 4권: 89-92)이라는 글에 노선생의 일본 생활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 대학교수였던 마쓰오 선생은 일본의 하천, 항만 전문가였는데, 1979년 9월 1일, 79세로 승천하였다. 원래 마쓰오 선생은 동경 내무성 토목시험소 기사였는데, 태평양 전쟁중 교수직에 결원이 생긴 모교 구주대학의 토목학과장으로 전임했다. 그가 동경의 토목시험소 기사로 있던 1936년에 노 선생은 야마다 노인과 함께 마쓰오 선생을 만나 잔디 깎기 일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노 선생은 김교신 선생이 동경에 오셨을 때 아카바네 분소에 들러 분소내 수리, 항만 실험장, 도로연구, 토질연구, 지진연구 실험장 등을 안내한 일이 있었다. 이 시험소에는 압록강 수풍댐의 건설, 운영 실험을 위한 모형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 모형을 보고 나서 김교신 선생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야, 노 군, 우리는 언제 이렇게 하게 되겠느냐.” 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고, 선생의 절절한 애국심을 느꼈다.
김교신 선생의 주선으로 결혼
노 선생은 일본에 체류하던 1941년 김교신 선생의 소개로 결혼하였다. 김교신 선생의 소개라면 만날 필요도 없고 바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쓰카모토 선생께 말하니, 선생은 나이가 몇이냐 묻더니, 30이나 돼서 결혼의 책임을 김 선생께 돌리려는 것으로 부당하다, 조선에 가서 보고 네가 정해라, 하는 야단을 들었다 한다(1990. 11. 417호; 5권: 137). 노 선생의 김교신 선생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엿보이는 일화이다. 결혼식은 무교회 어른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교신 선생댁 거실에서 올렸다(사진 참조), 식이 끝난 후 김 교신 선생이 할 말씀이 있다고 다음날 오라고 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갔더니, 부인께는 잠언 31장 10절 이하 말씀대로 살라고 하시고, 본인에겐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 일러주시고 바쁘니 돌아가라고 하셨다 한다(1967. 4. 제 152호; 제2권 421-428).
쓰카모토 선생 집회 시절
노 선생은 쓰카모토 선생 집회에 10년가량 참석하며 성서를 배웠다. 그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후 쓰카모토의 성서지식지 (1945. 10.)에 게재된 “종이냐 횡이냐”를 1947년에 번역하여 성서연구에 게재하며 “쓰카모토 도라지 선생은 지상에서 나의 유일한 은사”라며,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선생의 높고 건전한 인생관에 접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실로 동물에 그쳤을 것이고, 선생의 루터 이상으로 철저한 무교회 신앙에 접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신의 아들 되는 우주대의 생명의 자유와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60이 넘은 선생은 그 완숙한 인생 경험과 믿음으로 일본의 천직, 아니 신앙화에 심혈을 쏟으신다. 선생은 나에게 언제나, 자신은 일본을 스위스 같은 훌륭한 국민의 나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하셨다. 나도 또한 오직 조선의 신앙화로써 훌륭한 국민의 나라 되게 노력하려는 바이다(1947. 8. 제4호; 전집 1권: 40).”
노 선생에게 은사, 스승은 소위 학연이나 문하의 파벌적 의미가 아니다. 예수께서도 랍비라는 호칭에 하나님 외에는 존경받을 분이 없다 하셨듯이 공적인, 신앙적인 의미의 선생을 말한다. 사학자 이기백은 동경의 쓰카모토 선생 집회에서 노 선생을 만났던 기억을 더듬어 “영원한 청년 노평구 선생” 이란 글을 썼다. 이 글은 당시 노 선생이 집회에 얼마나 씩씩하고 대범하게 참여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4. 해방과 더불어 성서연구 창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던 1945년 봄 노 선생은 완전히 귀국하기 위해 김교신 선생을 뵙고자 흥남의 사택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김교신 선생 장례식을 마주하게 된다.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귀국한 노 선생은 성서잡지 간행 작업을 서둘러 준비하였다. 1946년 11월 “성서연구” 창간호가 나왔다. 성서연구는 1999년 12월 500호까지 54년간 간행되었다. 성서연구의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원동력으로서의 성서’는 발행 취지와 목표를 명료하게 담고 있다. 창간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사 의식이다.
“해방과 더불어 조선인은 지금 인류와 역사 앞에, 그리고 역사의 궁극의 섭리자인 신 앞에 제출된 독립이란 위대한 문제로 그 실력을 테스트 당하는 엄숙한 시간에 있습니다(1946. 11. 제1호; 전집 제1권: 17).”
1946년 11월, 해방 후 1년이 지났지만, 아직 군정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고대하던 그 독립을 아직 못한 것이다. 독립을 위한 민족 역량이라는 측면에 많은 부족함이 드러났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역사의 심판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성서라고 선언하였다. 인류 역사상 “성서는 기독교가 전파된 모든 국가, 사회, 민족 발전의, 그리고 모든 문화 현상의 원동력”이었던 것(1946. 11. 제1호; 전집 1권: 18)을 상기한 것이다. 선생의 안목이 얼마나 높고 장대했던지 알 수 있다.
창간사에서 노 선생은 역사속에 멸절한 이집트,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희랍, 로마 등 거대한 고대 민족과 제국을 열거하며, 그들이 멸절한 것은 성서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비해 유대 민족은 성서를 손에 쥐고 명맥을 이어왔다. 그리고 근대문명의 주역인 앵글로 색슨과 게르만 민족도 ‘성서를 손에 쥔 다음에’ 비로소 문명을 일으켰다 말했다.
“근세 문명의 2대 주역인 앵글로 색슨과 게르만 민족도 7세기부터 8세기에 이른 소위 개종기를 거쳐 그들의 손에 성서가, 종교 및 정신생활의 절대 신성한 경전으로, 또 사회생활의 유일한 법전으로 쥐어지기 전까지는, 역사가 타키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전쟁이 없는 때는 사냥이 아니면 먹고 자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 만용의 해적이었으며 사나운 야만족에 불과했던 것입니다(1946. 11. 제1호; 전집 제1권: 18).”
서구문명에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단테, 밀턴, 세익스피어의 문학, 베토벤, 바하의 음악, 미켈란제로, 밀레의 회화, 케플러, 뉴턴의 과학, 루터, 칼빈의 종교개혁, 링컨, 크롬웰의 정치 등을 제외하면, ‘육욕적이고 동물적인 부분’ 밖에 남을 것이 없으리라 말했다. 인도, 중국, 일본 등 동양 문명에 ‘적극적인 생명력’이 부재한 것도 아직 성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데 유래한다고 보았다. 결론은 ‘모든 진리의 적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다만 쉴러의 이른바 '세계 역사는 세계 심판' 이는 엄숙한 세계사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영원부동하는 성서의 진리만이 이에 견딜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조선을 이 성서의 진리 위에 세우려고 하는 바입니다. 동시에 모든 진리의 적에 대하여 싸움을 포고하는 바입니다(1946. 11. 제1호; 전집 제1권: 18).”
이 선전포고는 성서연구가 창간 후 500호(1999. 12)까지 54년간 계속된 주필의 단호하고 치열한, 그러나 고독한 전투적 삶의 예고였다. 성서연구 창간사는 애국의 마음으로 창간한다는 선언에서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 창간사와 일맥상통한다. 복음의 원천인 성서를 연구하여, 성서에 기록되고 계시된 초대 기독교 신앙에 도달하고자 전심전력한다는 무교회적 방향 설정에 차이가 없음은 말할 것 없다. 중요한 것 그 전심전력의 대상도 동일하다. 김교신 선생은 ‘최고 사랑하는 조선에 최진의 보배인 성서를 주기 위해 성서조선을 창간한다.’ 하였고, 노평구 선생은 ‘애국적 심지’로 사랑하는 조선 민족이 “역사의 심판을 견딜 수 있도록 민족 문화에 원동력을 불어넣기 위해” 성서연구를 창간한다, 하였다. 두 선생 모두 인류 보편적 잡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조선 민족을 일깨우기 위한 성서 잡지를 창간한다고 선언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첫째로 노 선생에게는 매우 강한 역사의식이 나타난 점이다. 창간사의 서두부터 결론까지 세계사에서 민족사가 지닌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멸절된다는 거시적이며 긴박한 예언자적 역사의식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다. 둘째로는 결론부의 ‘모든 진리의 적에 대하여 싸움을 포고한다.’에 나타난 성서연구에 임하는 비장하고 전투적인 태세다. 김교신 선생은‘서생의 유희’로 성서를 연구한다 하였다. 물론 사실상 김교신 선생의 나날의 삶은 전투 그 자체였음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창간사에서는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지 않았다. 노 선생의 비장함은 초상화에도 드러난다. 선생은 성서연구에 일생을 걸고, 전력투구한 전사(戰士)였다. 단테와 루터의 투사적 눈빛이 담긴 초상화를 좋아한 그는 미지근하고 안일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고, 큰 목소리로 열정을 쏟아내며 생명, 도덕, 인격을 살리라고 강연하였다. 그의 문장에는 서릿발이 서 있었다. 이 역사의식과 전투태세는 그의 생애를 일관하였다.
성서연구간행 초기에는 손정균과 함께 동인지 형식으로 발행하였다. 손정균은 경성의전을 마친 안과의사였다. 그는 양정의 김교신 선생께 지리와 박물(광물, 식물 및 동물)을 배운 학생으로서, 성서조선을 애독하였고, 경성의전 재학 시 김교신의 주일 모임에 참석하여 오랫동안 지도를 받았다. 노 선생은 신앙 잡지의 간행을 동경에서부터 고려하고 있었는데, 귀국 후 손정균과 생각이 일치하여 생각보다 일찍 시작하게 되었다 한다. 노 선생은 성서 연구 분야를 맡고, 손정균은 논설 분야를 맡았다(민경배 2011. 출간에 붙여서. 김성진 편, 2011. 노평구 신앙일기 제2권(노평구 전집 제 17권)). 창간 초기 성서연구에 노 선생은 권두언(논설)과 요한복음 연구를 게재하였고, 손정균은 “맑스주의와 기독교”라는 글은 번역하여 연재로 게재하였다. 손정균은 한 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한다(각주 8. 참조). 그러나 성서연구는 1951년 11월 제27호부터 동인지에서 노평구의 개인지로 바뀌었다. 노 선생은 “성서연구지의 성격”이라는 글에 개인지로 전환하는 것에 관한 본인의 입장을 소상히 밝혔다. 그는 성서연구는 소위 무교회 기관지가 아니다, 신앙은 개인의 주관적 영역이며,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개인의 독립이 전제되고야 협동도 가능하다고 하였다(1951. 11. 제27호; 노평구 전집 1권: 161~162).
5. 김교신 전집 간행
노 선생이 성서연구를 창간한 다음부터는 가족의 생계는 조산원을 하신 사모님이 전담하였고, 선생은 전업 ‘출판인’, 무교회주의 전업 전도자가 되었다. 성서연구 창간 이후 그를 둘러싼 환경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1947년 용산에서, 간장 공장의 2층에 세 들었다 한다. 그런데 간장 공장에서 작업 중 기름을 끓이다가 부주의로 불이 난 것이다. 글을 쓰고 있던 선생은 가재도구를 챙길 겨를도 없이 2층에서 뛰어내렸다. 이때 성경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준비해온 모든 책과 노트가 불에 탔고, 노 선생은 골절상을 입었다. 노 선생은 당시 구약의 예언서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많은 참고서를 준비하였었는데 모두 소실하여, 그에 착수하지 못했다고 많이 아쉬워했다. 그는 그해 6월에 펴낸 성서연구 제8호에 “화재의 원인”이란 글에 “이 화재의 원인은 나의 죄악에 대한 분노요, 심판이요, 징계”라고 했다. 그리고 호탕하게 “신앙 만세, 예수그리스도 만세!”를 외쳤다(1948. 6. 제8호; 전집 1권: 55-56).
선생이 당한 한국전쟁 또한 가혹하였다. 포탄 소리를 들으며 만삭이 된 부인과 어린 자녀를 손수레에 태우고 걸어 한강을 건너 용인의 지인 집에 피신하셨다 한다. 그 이후에도 성서연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몇 번의 난관을 맞았다. 마치 하나님이 “이래도 계속할래?”하고 시험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노 선생은 그때마다 스스로 물었다. “무엇이 당신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낸 뜻입니까?” 그리고 오뚜기같이 성서연구간행이 나의 소명이라는 자리로 돌아왔다. 창간 후 54년, 500호의 길을 의연하게 홀로 감당하였다. 독자가 400~500에 불과하여 구독료는 출판비에 미치지 못했고, 20~30여쪽에 이르는 성서연구에 스스로 글을 쓰고 편집과 인쇄와 배부까지 전담하였기에 전업 출판인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시련은 연단을 낳고, 집념은 순종이 되었다. 그런데 1960년대 초 이 바쁜 시간에도 틈을 내어 김교신 선생의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처음 성서조선 권두언의 글을 모은 “신앙과 인생”으로 시작하여, 산상수훈연구와 성서개론, 일기 중 글을 뽑아 만든 “김교신 문집”을 1964년 간행하였다. 문집출간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한문식 표현을 읽기 쉬운 말로 바꾸고, 한자한자 200자 원고지에 손으로 옮겨 적어야 했다. 성서조선지에서 글을 필사하는 것은 여러 독자들이 분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글을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배치하는 일은 홍순명이 맡았고, 일어를 번역하는 것은 유희세가 맡았다. 노 선생은 편집자로서 과거 김교신 선생에게 배운 분들이 깊은 “존경과 경외”의 마음으로 함께 협력해 준 것에 감사를 표시했다. 김교신 선생의 글은 민족의 높은 정신 유산이기에 “만난을 무릅쓰고 출판하였으니 널리 소개되고 읽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1964. 8. 124호; 전집 2권: 292-293). 이를 보완하여 김교신 선생의 전체 저작을 담은 전집은 1975년에 간행되었다. 그래도 많은 한자어에 세로쓰기로 편집된 이 전집은 2001년에 다시 현대 한국어로 교열하고 용어 사전까지 갖추어 도서출판 부키에서 다시 출판되어 지금 우리가 보는 책이 되었다. 노 선생은 1975년판 전집의 마지막 권인 김교신 일기 출간을 마친 소회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기 출간은) 작년 6월부터 시작했는데 지난 5월에 대충 겨우 끝냈다. 꼭 1년이 걸린 셈으로, 그 사이 본지와도 손을 끊다시피 되어 나로서는 실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편집, 교정에 최운걸 선생과 최선근 박사 외 여러분이 함께했다. 또 본 지우 여러분과 양정, 경기, 함흥농업, 송도고보 등 김 선생의 동문, 문하 제위와 재미 선생 사모님과 식구 여러분의 응원이 아니었던들 이루어질 수 없었다. [...] 비용만도 추억집 재판과 함께 3백만 원의 일이었다. 하여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나로서는 이번 일기 출판으로 부끄러운 대로 10년 만에, 즉 1964년에 손을 댄 선생 저작 전 6권의 완간을 보게 된 것을 여러분께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 나 자신은 선생 전집의 완성은 우리 민족의 종교를 위한 하나의 유산으로서 민족적인 기쁨이라고 믿는다(1975. 5. 246호; 전집 3권: 361-362).
1964년에 ‘신앙과 인생’으로 시작하여 1975년 일기 출간으로 매듭지은 것이다. 1980년 301호에 게재된 “삼백호의 반성”에서 노 선생은 김교신 전집 간행에 몰두한 것이 자신의 성서연구 저술을 펴내려는 목표에는 차질을 가져왔다고 하였다. 김교신 전집 출판이 3, 4년이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피로도 좀 풀 겸 간단히” 시작했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는 것이다(1981. 1. 301호; 전집 4: 138-139). 책에 쏟는 정성을 곁에서 지켜본 나는 출판의 지연이 노 선생의 나태나 다른 일 때문이 아니었음을 확신한다. 당시 인쇄 기술과 출판 작업이 전적으로 수공업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원고 베껴 쓰기부터 거의 10회에 이르는 교정, 인쇄용지의 선택, 제본, 사진을 위한 오프셋 판형 확인 등등 매 과정을 최선을 다하며, 최고 수준을 목표하셨기 때문이다. 김교신 선생의 글을 진심으로 민족유산이라고 여겨, 성서연구라는 자신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금도 내 서가에 꽂혀 있는 1975년 판 김교신 전집을 보면, 50년이 지났는데도 인쇄글자가 선명하고 책의 제본이 여전히 탄탄하다.
인간적인 친소관계로 보면, 노 선생이 스스로 말하듯, 양정이나 경기에서 김교신 선생에게 직접 배운 제자 중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했을 법도 하다. 노 선생은 학교의 제자도 아니고, 집회에 출석한 기간이나 성서조선 구독 기간에서도 앞선 그룹에 들지 못하였다(1977년판 종교와 인생: 497). 그러나 해방을 맞이하고, 6.25 전쟁과 정치적, 경제적 격변의 역사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해마다 김교신 선생 기념강연회를 개최하고,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전집으로 펴내어 우리에게 전승해준 사람은 노 선생이었다.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감당했다. 선생은 글은 물론 말로도 다른 분들을 비난하는 말씀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전집의 완간은 우리 민족 종교를 위한 유산으로 민족적인 기쁨이라고 하였다. 김교신 전집 편찬을 철저히 민족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한 공적 임무로 생각하신 것이다. 선생은 전집 간행 이후 다시 성서조선 영인본을 출판하였고, 김교신 시병기 등 후대에 김교신을 연구할 사람들을 위해 필요하다 싶으면 어떻게든지 글로 쓰게 하여 성서연구에 게재하였다. 노 선생이 이렇게 애쓴 이유는 진리 없이는 기독교도, 소위 에클레시아 공동체도, 사랑도 생각할 수 없기에 후세대가 무엇보다 우선해서 “신앙 진리의 체험과 생산”에 진력하길 바랐기 때문이다(79. 12. 300호; 전집 4권: 119-120).
6. 노평구가 본 김교신
노선생은 김교신 저술 출판뿐 아니라 김교신 선생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성서연구 간행 54년에 걸쳐 그가 김교신 선생에 대하여 절절한 마음을 담아 직접 써서 성서연구에 게재한 것이 모두 33편이다. 노평구 전집 1권에는 김교신 선생을 찾음(1949) 등 2편, 2권에는 김교신 선생을 생각하며(1959) 등 6편, 3권에는 김교신 선생의 애국(1968) 등 11편, 4권에는 우리의 인물 유형에서 본 김교신 선생(1980) 등 8편, 그리고 5권에는 민족의 이상(1989) 등 5편이다. 노평구 전집에 게재되지 않은 ”내가 생각하는 김교신 선생“이란 글은 ‘사상계’ 1965년 4월호에 실렸고, 1977년판 종교와 인생(496-510)에 다시 실린 바 있다. 도합 34편이다. 이 글들은 주로 매년 4월 김교신 선생이 승천하신 때를 정하여 개최된 김교신 기념강연회에서 말한 것을 정리한 것들이다. 50여 년에 걸쳐 쓴 글이다 보니 중복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관점이나 초점은 기독교의 개혁을 향한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논지에 모아지고, 해가 더해지며 점점 분량이 늘어났다.
노평구 선생의 성서연구나 다른 논설에도 김교신 선생을 인용하거나 논평한 것이 적지 않지만 직접 김교신에 관해 쓴 글 중 몇 개를 선택하여, 소개함으로써 노평구는 김교신을 누구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는 다음 7편을 연도순으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중심 주제를 조명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가. 김교신 선생 회고 - 김교신 선생을 찾음(1949. 5. 13호; 전집 1권: 87-89), 김교신 선생을 생각하며(1959. 3-4월. 제81호; 전집 2권: 50-53)
나. 김교신 선생과 성서(62년 5월 제98호; 전집 2권: 192-201)
다. 내가 생각하는 김교신 선생 (1965. 4. 사상계; 1977년판 종교와 인생: 496-510)
라. 무교회자 김교신 - 김교신 기념강연(1967. 4. 제 152호; 2권: 421-428)
마. 김교신 선생의 애국 – 김교신 기념강연(1968년 6월 제165호; 3권:63-70)
바. 김교신 선생과 한국신앙 - 김교신 기념강연(1976. 6. 제259호; 3권 421–430)
가. 김교신 선생에 대한 회고
성서연구 창간 시부터 1950년대 말에 쓰여진 “김교신 선생을 찾음(1949. 5)”과 “김교신 선생을 생각하며(1959. 3-4)”는 김교신 선생에 대한 회상이 중심을 이룬다. 앞의 글에는 김교신 선생을 처음 만나던 날, 그리고 집회에 처음 참석했던 날의 장면이 세밀화처럼 상세하게 담겨있다. 둘째 글에는 어지러운 세태에 ‘김교신 선생이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한데, 그것은 그분이 “뜨거운 마음, 높은 신앙적 이상, 학문적 진리애, 도덕적 정의감, 과학적 치밀함으로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애쓰신 분으로서, 무엇을 하든 철저히 잘하셨을 분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없어 가장 아쉬운 것은 깊은 성서 연구를 통해 “민족 신앙 확립의 길을 확실하게 앞서 안내하며 걷는 스승이 없다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1959. 3-4월. 제81호; 전집 2권: 50-53). 앞의 글은 관점이 개인적 관계를 조명하는 데 있었다면, 뒤의 글은 “깊은 성서 연구를 통한 민족 신앙 확립의 스승”에 초점을 맞추어 김교신 선생의 민족 기독교사적 의미를 부각하였다.
나. 김교신 선생과 성서
1960년대에 쓰인 “김교신 선생과 성서(62. 5.)”, “내가 생각하는 김교신 선생 (1965. 4.)”, “무교회자 김교신(1967. 4.)”, “김교신 선생의 애국(1968. 6.)”은 시간이 축적되며 글의 분량이 많아지며, 김교신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김교신 선생과 성서(1962. 5.)”의 핵심 메시지는 선생의 인품도 훌륭하고, 교육도 훌륭하지만, 그것의 원천은 성서 진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성서조선 창간사를 들며 김교신 선생이 초지일관 성서를 깊이 공부하고 해석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것을 상기한다. “기독교 신앙의 산 생명으로서의 민족적인 체험과 신앙의 확립을 위해 경전 자체, 즉 성서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학구적 노력을 하고 가신 분으로 믿고 공적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했다. 이글에는 최태용과 함석헌이 언급된다. 최태용 목사는 함께 성서의 복음 신앙으로 출발했으나 니체, 도스토옙스키 등의 사상에 의한 한국적 신학운동으로 나갔고, 함석헌 선생은 동양 제종교의 기독교적 해석을 시도하다가 십자가도 부활도 없는 합리주의로 나갔다고 아쉬워한다.
다. 내가 생각하는 김교신 선생
1965년 김교신 선생 20주기를 맞아 당시 여론을 이끌었던 『사상계』의 요청으로 쓴 “내가 생각하는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김교신 선생을 소개하는 전기적 성격의 글이다. 먼저 김교신은 정의감, 눈물이 많은 사람, 위대한 실천력, 그리고 이러한 인격적 특질을 통합하는 뜨거운 민족애를 천품으로 타고났다고 하였다. 이어서 김교신의 애국의 뜨거운 에너지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선 회심으로 정화되어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개인 구원에 머물지 않고, 민족구원을 위한 전적인 헌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끝으로 김교신 선생의 요절의 의미를 “민족의 종교신앙과 진리에 의한 도덕적인 회개를 위한 것이었고 [...] 선생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개종을 이끌 하나님의 종교개혁적인 섭리였다.” 해석하였다(1977년판 종교와 인생, p. 508).
라. 무교회자 김교신
“사자는 썩은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며, 연어는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 원천에서 산란한다고 합니다. (김교신) 선생은 민족의 진정한 신앙 소화를 위해 기독교의 원천에 올라가려 애썼습니다. 구정물이 아니고 그 첫 덕의 샘물을, 선생이 그리도 사랑한 이 민족에게 마시게 하려고 노력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구정물은 무엇이며 샘물은 무엇입니까? 샘물은 성서진리이며 이의 체험이며 복음의 구원입니다. 구정물은 신앙의 형식이며 진리의 교리화이며 구원의 의식화입니다.”
“무교회자 김교신(1967. 4.)”은 영감이 넘치는 앞의 글로 시작한다. 김교신의 무교회 신앙 전도를 “첫 덕의 샘물”을 민족에게 마시게 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글에 전율을 느낀다. 김 선생이 구태여 ‘첫 덕의 샘물’을 길어 민족이 마시게 하려 했던 이유는 시간과 문화를 통과하며 기독교가 형식화, 교리화로 혼탁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로 예수가 정결례, 안식 규례에 관해 바리새 주의와 치열하게 싸운 것, 예루살렘 성전의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낸 것 등 형식적 규례와 율법을 파기하고, 율법의 본래 의미를 완성한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바울의 할례주의자들과의 싸움, 루터의 가톨릭 교권과의 싸움, 제도, 의식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싸움을 상기한다. “첫 덕의 샘물을 길어 민족에게 먹이려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노 선생의 김교신관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노 선생은 명확하게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한다. 차가울 때는 차갑고, 뜨거울 땐 한없이 뜨겁다. 미지근한 것은 용납 못 한다. 이것이 노평구 선생이다.
마. 김교신 선생의 애국
김교신 선생의 애국(1968. 6)은 “나는 김 선생의 애국은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에 의해 민족의 도덕적인 이상과 진리의 척추를 세우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김교신의 애국의 특이성은 산상수훈의 도덕적 이상을 민족 이상으로 추구한 것으로서 이 심지가 성심성의를 다한 교육과 성서조선 간행으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김교신이 성서조선 75호에 “과학, 상공, 농업 중흥 등 모두 해로울 것은 없겠지만”, 이들을 받쳐줄 도덕적 기초가 없다면, “이들은 모두 들의 꽃과 같고 아침이슬 같아서 역사의 풍우에 견디지 못한다. 오직 구형적 조선의 밑에 영구한 기반인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켜야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세울 수 있다.”를 인용하고 다음 글로 마무리지었다.
“김 선생은 오직 이상의 제시자로서 생애 좁은 길,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 한없는 깊은 애국심으로 일제하에서 아무런 정치 운동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그 깊은 신앙으로써 아무런 교파에도 예속되지 않았으며, 10년간 교육에 종사했다고 하지만 오직 홀로 박물 교실을 지켰으며, 40만 인구의 수도 서울에 살았으되 북한산록에 은거했으며, 가정인 이였으되 안으로 열쇠를 잠근 서재에 기거하셨으며, 일요집회래야 고작 회원이 1-20명을 못 넘어 종내 '1인 상대'의 집회로 화했으며, 선생의 생애마저 2차대전 종전 직전 민족의 해방을 수개월 앞두고 45세를 일기로 끝나셨습니다(1968년 6월 제165호; 3권: 69-70).”
김교신 선생에 관한 제자들의 글을 모은 “김교신을 말한다.”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많은 사람이 김교신의 애국을 말했지만, 그 애국의 열정과 엄격한 삶의 태도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매사를 깊게 통찰하는 노 선생은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의 이름이나 글을 들어 비판하지 않았고, 깊은 성찰을 통해 도달한 김교신 선생의 진면목을 기술하였다.
바. 김교신 선생과 한국신앙
“김교신 선생과 한국신앙(1976. 6.)”은 1975년 김교신 전집 편찬 마무리 이후 처음 맞이한 기념강연 말씀을 정리한 짧지 않은 글이다. 요지는 김교신 선생이 해방을 눈앞에 두고 요절하셨지만, 선생이 남긴 글과 삶은 한국 기독교의 종교개혁적 그루터기가 된 것이란 말이다. 이 논제의 전개를 이끄는 것은 노 선생의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역사의식이다. 이글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속죄신앙으로 인간의 죄,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세태가 종교와 도덕을 천시할 뿐 아니라 기독교 자체에서까지 속죄신앙에 대한 회의와 비판의 소리가 높고, 속죄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보다 지배자, 지도자였음을 내세우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본질의 왜곡이어서, 결코 이 바탕 위에 새로운 가치와 도덕적 문명이 창조될 수 없음을 밝힌다.
“정치신앙, 철학 신앙, 윤리 신앙 정도로는 현대의 인류 물질문명, 도덕적 타락에서 인간을 구출하고 종교개혁적인 새로운 가치와 도덕적 문명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은 초대교회 이후 야곱이 수반이 되어 이끈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구약적, 율법적 형식과 의식으로, 이미 카톨릭적으로 출발, 중세 천년의 암흑시대를 초래한 것이 증거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그리스도 자신은 3년간 열한사람밖에 얻지 못한 전도를 그의 사후 베드로가 하루에, 아니 한 시간에 3천명씩 세례로써 신자를 삼아 성급히 확장시킨데서 신앙의 왜곡이 시작되었다(1976. 6. 제259호; 3권 421–430).”
초대교회에서 야곱이 이끈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이 의식화 형식화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에 따라 중세 가톨릭 천년의 암흑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것을 극복하고 서양의 근대문명이 발달한 것은 루터의 속죄 체험을 기반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울 속죄신앙의 재체험으로 복음주의에 복귀하는 계기였다. 루터는 수도원의 금욕, 근행, 의식, 독경, 절식 등의 수도로 해결되지 않는, 잠시 더 지속되면 전신이 재가 될 것 같은 고뇌로,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가는 죄에서 오로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구속되는 속죄를 체험하였다. 영적 신생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솔라 피데, 신앙만의 신앙이다. 그는 돈 받고 팔았던 면죄부의 거짓을 고발하는 95개 논제로 종교개혁을 폭발시켰다. 이것이 서양의 근대문명의 시발점이었다(1976. 6. 제259호; 3권 421–430).
속죄의 체험과 제도화의 껍데기를 벗겨내는 종교개혁은 민족, 문화 차원의 기독교 수용과 개종에 매번 요구된다. 사보나롤라와 이탈리아, 후스와 보헤미아, 쯔빙글리와 스위스, 녹스와 웨슬리의 영국과 미국, 우치무라와 일본 등 신앙사를 상기할 때, 감히 김교신과 한국 기독교를 생각한다고 하였다.
“김교신 선생이야말로 기독교 본질 이해가 되는 이 속죄신앙의 민족적인 체험을 위해 그 진지한 생애를 바친 것이라고 감히 믿습니다. [...] (공부자보다 10년 앞당겨 불유구를 외치고자 도덕적 노력을 기울였던 선생에게) 숱한 이율배반적인 양심의 고민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에 의해 이가 봄날의 얼음같이 풀려나가는 속죄신앙의 깊은 체험에 의한 회심의 때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괄호는 필자의 요약). 선생은 이때 자신의 그 도덕적인 고투의 전날을 회상하고, 그야말로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려고 했던 무모, 아니 하나님 앞에 불손이었다고 술회하고, 바울과 더불어 그리스도 앞에 무한한 감사를 바쳤던 것입니다. [...] 선생에 의해 우리(한민족)에게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생명이 되는 속죄신앙의 민족적인 체험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이점에서 우리의 신앙이 반성, 재출발된다면 우리에게도 찬란한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1976. 6. 제259호; 3권 421–430).”
이상 7편의 글을 단편적으로 소개하였다. 노 선생이 김교신에 관해 쓴 글이 34편인데 그중 극히 일부다. 노 선생 자신이 김교신에 관해 쓴 자신의 글을 가리켜 “장님이 코끼리 그리듯” 한 것이라 말했다. 생전의 김교신에게 직접 배우고, 성서조선에 실린 글을 읽고 배운 분들이 남긴 글 하나하나가 어찌 보면 각자 코끼리의 일부분을 그린 것이라 할 때, 넓게, 그리고 깊게 읽으면 완성된 코끼리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통합적 요지와 결론은 토의를 위해 열어두고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