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속을 이루셨고 바울이 기독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크나큰 오해에서 비롯된 진술입니다. 아마도 바울 서신과 초대교회에서의 바울의 역할 등을 고려하여 이런 말을 하였을 것임은 짐작코도 남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이름도 우리의 구원 받는 길에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오직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선진들처럼 바울도 하나님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치심을 위해 등장한 한 인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바울의 이름이 공로자로 거론될 이유도 없고 오직 그를 택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할 뿐입니다.
주님의 사도들과 바울의 가장 큰 차이는 주님을 얼굴로 뵙고 따랐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직접 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대제사장의 권세 아래 두고 정죄하던 자였기에 더더욱 주님의 사도들과 섞일 수도 없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모든 서신서에 자신을 주님의 사도로 증명해야만 했던 이유였습니다. 당시 주님의 사도들은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뵈었고 함께 하였고 주님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진 경험이나 경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복음의 사역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도들에게로부터 사도로서의 자격검증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주님의 사도로 증명하는 예시는 그도 다른 사도들과 다르지 않게 그가 주님을 만난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다메섹에 있는 주의 사람들을 잡아 대제사장에게 넘기려고 가는 도중에 빛 가운데 혹은 소리 가운데서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그가 물었고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답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면이었습니다. 이는 개인적 체험이었고 곁에 섰던 이들은 우레가 울었다고 혹은 빛을 보았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바울의 이런 사도 검증은 오히려 주님의 사도들에게 생소한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주님을 나사렛 예수로 만나 함께 하셨고 그분에게 직접 들었던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바울의 체험은 사도들의 것보다 오늘 우리들의 것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을 얼굴로 뵙지 못하고 오직 말씀으로 듣고 성령의 조명으로 이를 인식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체험이 사도로서의 증빙자료가 되느냐를 검증하려는 것도 아니고 복음전파와 기독교 교리체계 정립에 미친 그의 공로를 인정할 것인가를 고민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이러저러한 체험과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어가면서도 복음에 헌신하였으니 우리도 그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그도 주님의 시대 사람이었고 주를 얼굴로 뵙지 못했지만 주님의 그리스도이심과 부활하심을 만난 분으로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도마의 경우와 또 다릅니다. 즉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도 주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와의 연합의 세계가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 계시록 등을 읽으면서 요한의 인격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서신서에서는 바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열정과 고민, 주님의 양들에 대한 간절함, 물론 그도 또한 주님의 마음임에 분명합니다. 이러한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의 차이는 두 분의 성품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은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주님을 얼굴로 뵙지 못하고 주를 만난 개인적 체험과 복음을 들고 믿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더 가까운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격이나 성품이 모두 사라지고 주님의 성품이나 그 심정만 남아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말씀으로 듣고 오늘 나 자신과 연합하여 계심을 인식할 때 그 연합한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으로 남을 뿐입니다. 바울이 그러하였듯이. 주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2000년 전에 역사적으로 오셔서 한 개인의 인격과 성품을 갖고 계실 때 그를 만난 이들에게도 그러하셨고 주님을 얼굴로 뵙지 못하고 믿었던 바울에게도 그들로 하여금 가장 그들답게 하셨습니다. 이는 때로 악함조차 억제하지 아니하고 분출하게 하여 그 결국을 보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닌 치유와 회복, 충만에 이르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