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랭 드 롱 (Alain Delon,1935~ )
'장 폴 벨몽도'와 함께 1960~1970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 이름을 떨쳤던 미남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알랭 드롱'......
결손(缺損) 가정에서 불우한 유년시대를 보낸 그는, 그후 '프랑스 해병(海兵)'으로
'인도차이나 전쟁(戰爭)'에도 참전(參戰)했었고, '인도차이나 '중앙의 프랑스 선박에서
'낙하산 병'을 했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웨이터, 세일즈맨, Les Halles market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등 청년시절에 다양한 종류의 일을 했다.
그후, 프랑스로 돌아와서 배우 '장-클로드 브리알리'와 친분을 맺게 된다. 1957년
그를 따라 '칸느 영화제'에 참석했고, 많은 감독들이 특출한 그의 멋진 외모에 눈독을
들이게 된다. 그래서 그해 <Quand la femmes sen mele> 라는 영화에 처음 출연
했고, 1958년 <Christine> 에서 독일출신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의 상대역을 맡으면서
주연급 배우로 성장했다.
1960년에는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에서 가난하지만 야망으로
가득한 '톰'을 연기해 전세계 영화팬들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희생자인 친구의 돈과 연인을
인수하려고 하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타인에 대한 유치하고도 적대적인
심리를 잘 소화해내어 연기력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 Rocco e i suoi fratelli >라는 영화에서 비로소 그는 그의 연기력을
확실히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수려한 외모로, 부드러운 연인과 낭만적인
영웅의 이야기에 기용될만한 운명을 미리 점쳐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에서
'James Dean'과 함께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분위기를 프랑스 영화에서도 구체화
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Delbeau Produ ctions'라는 영화 필름 회사를 만들었고, 'Guy Gilles'에
의해 감독된 단편영화도 만들었다. 특히 프랑스 갱영화의 독특한 작가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사무라이>(1967)는 '컬트영화'가 되었고, 자폐증에 시달리는 듯한 외로운
갱스터 이미지는 후일 많은 영화들에서 차용되었다. <사무라이>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범죄자를 자주 그린 작가의 의도대로 갱영화의 전형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독한 살인청부업자 '알랭 드롱'이 한 여자를 만나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1968년 우리나라에서 <아듀 라미>로 1970년에 상영돼 흥행에 성공한
<Friend Farewell>은 프랑스 최고의 미남배우로 우수(憂愁)에 젖은 아름다움으로
정평이 나있던 '알랭 드롱' 과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남성미 넘치는 배우로 인기를
누리던 '찰스 브론슨' 이 주연(主演)을 맡았다.
프랑스의 대중 상업영화를 대표하는 듯하지만, '알제리' 전후의 암울한 프랑스 사회
분위기가 작품 전편에 깔려 있다. 특히, 우울하고 소외된 이미지의 '알랭 드롱'과
'찰스 브론슨'의 굵은 이미지 대결이 영화의 흥미를 더해준다.
1970년에, 그가 열정적으로 임했던 <볼사리노 Borsalino>에서는 삼류 갱영화들 사이
에서도 거대한 성공을 불러일으킬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같은 해 <Le Cercle Rouge / The Red Circle>은 '알랭 드롱'의 매력을 맘껏 느낄 수
있는 영화로 '장가방'이 같이 주연하였다. 은행강도의 주범(主犯)이었다가 조기 출감
해서 교도소에서 익힌 기술로 새 삶을 살려는 '알랭 드롱' 과 그를 의심하며 계속 집요
하게 쫓아 다니는 형사 '장가방' . 그에 대한 살의(殺意)를 느끼는 '알랭 드롱' 과 형사의
심리적 갈등이 우수에 찬 '알랭 드롱' 의 눈빛과 함께 비장하게 전개된다.
1971년에는 <Dirty Money> '카트린느 드뇌브'와 호흡을 맞추었으며, <The Red Circle>
(1970)에도 등장했다. '베르트랑 블리에' 감독의 <Our Story>(1984)나 ' 앤 마가렛'과
함께 출연한 '랄프 넬슨' 감독의 <Once a Thief>(1965)등도 명작 반열에 올라 있다.
<Mr. Klein>(1976)에서 불량한 이미지로 熱演한데 이어 <Un amour de Swann>
(1984)에서는 그의 부드러운 연기가 빛이 났다. 1981년에 "Pour la peau dun flic"
라는 영화를 감독하게된 '알랭 드롱'은 이전에 했던 배우라는 직업과는 전혀 다른
분야를 하면서도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 단지 열정만을 가지고 뛰어
들었던 그는 마침내 어리지만 정열적인, 자주 도덕적으로 타락되어져가는 남자를
구체화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알랭 들롱'은 수많은 추문(醜聞)에 휩싸였고, 마약과 섹스가 얽혀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었다. 1969년 '알랭 들롱' 의 보디가드가 총에 맞은 채로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던 사건은 프랑스 명사들이 얽혀든 최악의 스캔들이었다. 한 때 자신이 '바이
섹슈얼'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여론이 들끓기도 했었다.
1958년 'Romy Schuneider'와 5년간 동거 하다가 헤어지고, 'Nathalie Barthelemy'와
1964년 결혼했었으나, 1969년 이혼했고, 이 당시 'Francine Canovas'와 깊숙한 관계를
가졌다. 'Rosalie Delon' 과는 현재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장 폴 벨몽도' 와 함께 프랑스 영화 전성기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알랭 드롱' 은 22세때
처음으로 영화에 데뷔하여, 그 후 37년 동안 '장 뤼크 고다르', '루키노 비스콘티', '르네
클레망' 등 당대의 대가(大家)들과 81편의 작품을 찍었다.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
화장품 등을 관리하는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아직도 잊지않고
'알랭 드롱' 주간을 만들어 영화를 상영하였다.
단순한 한명의 연기자가 아니라, 한 시대의 분위기가 된 배우로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잡지에서 '들롱의 신비' 란 제목으로 여전히 추앙되고 있다.
"나는 서로 사랑하는 부모 사이에서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지만, 그 분들은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헤어졌죠. 하숙집에서 하숙집으로 기숙사에서 기숙사로 학교에서 학교로
옮겨다니면서 지냈고, 열 일곱살 때 군에 자원, 인도차이나 전선(戰線)에서 베트남전(戰)을
치렀죠. 나의 외로움이란, 연기생활을 통해, 혹은 연기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닙니다. 내 기억이 미치는 한, 난 언제나 외로웠습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 4월호 인터뷰. 변하는 프랑스 영화환경, 1990년대 영화계 와의
불화에대한 아쉬 움을 완곡히 표현하기위해 그는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진실한 의미에서의 영화란, 내가 영화를 떠나던 시절에 이미 죽었습니다. 내가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접어가던 1970년대 말, 그때 고유한 의미에 서의 영화란 사라지기 시작했죠.
변한 것은 내가 아니라 영화환경이었고, 내가 영화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영화가 나를 내몬
셈이지요. 물론 이것은 검증되지 않은, 따라서 일반화시킬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내 개인적인 느낌은 그렇습니다. TV가 영화의 자리를 뺏고, 은밀한 영화 공간을
찾는 관객들도 줄고…. 하지만 영화란 여전히 나의 사랑이고, 내 정열을 앗아 흡수한
그 무엇입니다.”
향수 '알랭 드롱' 등의 홍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알랭 드롱' 이 리츠 칼튼 호텔의 기자
회견에서 말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