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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귀찮은 생각이 드시드라도 아래글을 읽어보셔야 태종의 11명의 후궁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았던 신녕궁주 영월신씨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것입니다.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가 이미 4大(양녕, 효령, 충녕, 성녕)君 4공주(경순, 경정, 경안, 경선)를 낳았는데도, 원경옹후 처소의 무수리 영월辛氏에 빠진 태종은 이 信嬪辛氏에게서 3君(함녕, 온녕, 근녕)과 6翁主(정신, 정정, 숙정, 숙녕, 숙경, 숙근)를 낳았다. 총 12명의 부인에게서 무려 12남 17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 원경왕후 소생이 4대군 4공주 8명이고, 신빈신씨 소생만 3군 6옹주로 9명이였고 원경왕후가 56세로 죽은 후에는 아예 신빈을 信寧宮主로 책봉하여 내명부를 총괄하게 합니다.
원경왕후 민씨{1365(공민왕 12년)-1420(세종 2년) - 태종의 아내이자 세종대왕의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는 두 차례 왕자의 난에 친정 여흥 민씨를 동원하여 승리하게 함으로써 남편을 권좌에 올린 여걸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국가를 추구하던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방지하기 위해 네 명의 동생을 죽이고 그로 인해 아버지까지 화병으로 죽는 등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울분에 찬 말년을 보내야 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왕조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정도전 일파에 의해 제거될 운명에 놓이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적들을 일소하고 정종을 옹립했다. 그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형 이방간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정종의 양위를 받아 꿈꾸던 보위에 오른다. 이처럼 이방원이 대군에서 국왕이 되기까지에는 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의 소외와 이방석의 세자책봉, 정도전의 사병혁파를 빌미로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의 배후에는 원경왕후가 도사리고 있었다.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던 그녀는 정도전의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여 이방원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을 통해 병사와 무기를 조달해 주었다.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그녀는 재차 친정의 힘을 동원하여 이방원의 승리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면서 중전이 된 원경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이 되었지만 남편의 지독한 여성편력으로 인해 모진 속병을 앓았다. 더군다나 외척의 발호를 방지하고자 했던 태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네 명의 동생이 비명에 죽고 이에 상심한 아버지 민제까지 홧병으로 숨지면서 고려 이래 명문가였던 친정이 몰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신녕궁주(信寧宮主) -
제1차 왕자의 난, 친정의 무력을 동원하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조 이성계의 즉위와 함께 정안대군의 부인으로서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당시에는 태종과의 금슬도 원만해서 4남 4녀를 얻었는데, 1394년(태조 3년)에 양녕대군 이제, 1396년(태조 5년)에 효령대군 이보, 1397년(태조 6년) 충녕대군 이도를 낳았다. 막내아들인 성녕대군 이종은 1412년(태종 12년)에 얻었다. 양녕대군 이전에 그녀는 아들을 세 명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했다. 그녀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아픔을 딛고 일어나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의 주요 배경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에 대한 정권의 소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었다. 부차적으로 재상세력의 성장과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혁파가 도화선이 되었다. 일찍이 정몽주를 척살하여 개국의 마지막 단계를 이끌었던 이방원은 조선 창업 이후 권신들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되자 내심 불만을 품었다. 태조는 개국공신 52명에 이방과, 이방원 등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외시킴으로써 분란의 씨앗을 심었다. 그때 이방원에게 돌아온 것은 전라도지역 절제사라는 보잘 것 없는 직함이었다.
태조는 1392년(태조 원년) 8월 20일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한씨 소생 왕자들의 반발을 샀다. 분개한 이방원이 태조에게 달려가 형 이방우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장남 방우는 39세, 방원은 26세였다. 그때까지는 태조가 강건했으므로 한씨 소생 왕자들은 은인자중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6년(태조 5년) 8월 13일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방원이 정계복귀의 기지개를 폈다. 이에 경각심을 품은 정도전이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은 표전문제와 조공문제 등으로 명나라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요동정벌이란 극단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그는 우선 왕자와 공신들의 사병을 혁파함으로써 병권을 한데 모으려 했다. 여기에는 시위패로 불리는 왕자들의 사병을 제거함으로써 세자 이방석의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다지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 즈음 태조가 병석에 눕고 공신들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방원은 심복인 하륜, 박은 등과 형제들의 중지를 모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심복인 이숙번, 조영규 등과 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과 함께 은밀히 병력을 모았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당시 정도전은 태조의 거처를 옮기는 일을 논의하자며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를 궁궐로 끌어들여 척살하려 했다. 이방원은 전 참찬 이무로부터 정도전 일파의 흉계를 전해 들었지만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지를 수 없다며 형들과 함께 입궐했다. 그러자 원경왕후 민씨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종 김소근을 급히 대궐로 보내 남편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이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동생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마련한 병사와 무기를 전해주고 거사를 종용했다.
그해 8월 25일 밤, 이방원은 안산군수 이숙번 등 측근들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다. 군호는 ‘산성(山城)’이었다. 그때 정도전은 소동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습을 당하자 깜짝 놀라 근처 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피했지만 그의 밀고로 사로잡힌 뒤 참살 당했다. 이방원은 이어서 남은과 심효생, 박위 등을 죽이고 대궐로 들어가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끌어낸 다음 이방석은 궁성 서문 밖에서, 이방번은 양화도 부근에서 죽였다.
한밤의 살육전이 종료되자 이튿날 아침 변중량, 노석주 등이 태조에게 나아가 영안군 이방과(정종)를 세자로 책봉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뜻밖의 변란에 상심한 태조는 9월 이방과(정종)에게 미련 없이 보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애당초 하륜, 이거이 등은 이방원을 옹립하려 했지만 주위의 이목을 의식해 잠시 옥좌를 이방과에게 맡긴 것이었다. 정종이 즉위하자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봉해지고 의흥삼군부 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 겸 정사공신 1등으로 논정되었으며 개국공신 1등으로 추록되면서 권력을 움켜쥐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친정의 무력을 동원하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조 이성계의 즉위와 함께 정안대군의 부인으로서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당시에는 태종과의 금슬도 원만해서 4남 4녀를 얻었는데, 1394년(태조 3년)에 양녕대군 이제, 1396년(태조 5년)에 효령대군 이보, 1397년(태조 6년) 충녕대군 이도를 낳았다. 막내아들인 성녕대군 이종은 1412년(태종 12년)에 얻었다. 양녕대군 이전에 그녀는 아들을 세 명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했다. 그녀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아픔을 딛고 일어나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의 주요 배경은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에 대한 정권의 소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었다. 부차적으로 재상세력의 성장과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혁파가 도화선이 되었다. 일찍이 정몽주를 척살하여 개국의 마지막 단계를 이끌었던 이방원은 조선 창업 이후 권신들에 의해 권력에서 소외되자 내심 불만을 품었다. 태조는 개국공신 52명에 이방과, 이방원 등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외시킴으로써 분란의 씨앗을 심었다. 그때 이방원에게 돌아온 것은 전라도지역 절제사라는 보잘 것 없는 직함이었다.
태조는 1392년(태조 원년) 8월 20일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한씨 소생 왕자들의 반발을 샀다. 분개한 이방원이 태조에게 달려가 형 이방우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장남 방우는 39세, 방원은 26세였다. 그때까지는 태조가 강건했으므로 한씨 소생 왕자들은 은인자중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6년(태조 5년) 8월 13일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방원이 정계복귀의 기지개를 폈다. 이에 경각심을 품은 정도전이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은 표전문제와 조공문제 등으로 명나라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요동정벌이란 극단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그는 우선 왕자와 공신들의 사병을 혁파함으로써 병권을 한데 모으려 했다. 여기에는 시위패로 불리는 왕자들의 사병을 제거함으로써 세자 이방석의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다지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 즈음 태조가 병석에 눕고 공신들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방원은 심복인 하륜, 박은 등과 형제들의 중지를 모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심복인 이숙번, 조영규 등과 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과 함께 은밀히 병력을 모았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당시 정도전은 태조의 거처를 옮기는 일을 논의하자며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를 궁궐로 끌어들여 척살하려 했다. 이방원은 전 참찬 이무로부터 정도전 일파의 흉계를 전해 들었지만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지를 수 없다며 형들과 함께 입궐했다. 그러자 원경왕후 민씨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종 김소근을 급히 대궐로 보내 남편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이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동생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가 마련한 병사와 무기를 전해주고 거사를 종용했다.
그해 8월 25일 밤, 이방원은 안산군수 이숙번 등 측근들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다. 군호는 ‘산성(山城)’이었다. 그때 정도전은 소동에 있던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습을 당하자 깜짝 놀라 근처 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피했지만 그의 밀고로 사로잡힌 뒤 참살 당했다. 이방원은 이어서 남은과 심효생, 박위 등을 죽이고 대궐로 들어가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끌어낸 다음 이방석은 궁성 서문 밖에서, 이방번은 양화도 부근에서 죽였다.
한밤의 살육전이 종료되자 이튿날 아침 변중량, 노석주 등이 태조에게 나아가 영안군 이방과를 세자로 책봉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뜻밖의 변란에 상심한 태조는 9월 이방과에게 미련 없이 보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애당초 하륜, 이거이 등은 이방원을 옹립하려 했지만 주위의 이목을 의식해 잠시 옥좌를 이방과에게 맡긴 것이었다. 정종이 즉위하자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봉해지고 의흥삼군부 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 겸 정사공신 1등으로 논정되었으며 개국공신 1등으로 추록되면서 권력을 움켜쥐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조선의 국모가 되다
1400년(정종 2년) 1월 28일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조의 넷째아들 이방간은 왕위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우 이방원의 기세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포가 그를 찾아와 정변을 부추겼던 것이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여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런데 논공행상에서 뒤로 밀려나자 불평을 늘어놓다가 죽주로 귀양 간 상태에서 유배지를 벗어나 이방간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박포는 이방간에게 장차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말에 속아넘어간 이방간은 민원공, 이성기 등과 함께 사냥을 핑계로 개경 외곽에 사병들을 집결시킨 다음 급거 개경으로 진군했다. 우현보의 아들 우홍부로부터 사전에 그들의 계획을 전해들은 이방원은 개경 요소요소에 군대를 배치하고 대응했다. 이때 이지란, 이화, 한규, 김우 등이 호응했고 승지 이숙번과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가세했다.
이윽고 양군은 선죽교와 남산, 묘련사 고개 근처에서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방간이 동원한 사병이 잘 훈련된 이방원의 정규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이방간의 사병들은 백성들에게도 외면당했다. 결국 이방간은 대패한 끝에 홀몸으로 성균관 골짜기를 넘어 도주하다 이방원의 군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방원은 동복형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고 토산으로 귀양 보낸 다음 그를 부추긴 박포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날 아침 민씨는 무녀 추비방(鞦轡房), 유방(鍮房)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는데 모두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래도 불안했던 민씨는 이웃에 살던 정사파(淨祀婆)란 할미무당을 불러 간밤에 꾼 꿈의 해몽을 청했다.
“어젯밤 새벽녘 꿈에 신교리 옛집에 있었는데 우리 막둥이가 중천에 뜬 해바퀴 가운데 앉아있었네. 이것이 대체 무슨 징조인가?”
그러자 정사파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안공께서 마땅히 왕이 되어 이 아기를 안아줄 징조입니다.”
그때는 셋째 이도가 이방원의 막내아들이었으므로 ‘막둥이’란 아명으로 불렸는데, 어머니 민씨의 꿈에 나타나 장차 아버지가 보위에 오를 것이라는 징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당장의 전투 결과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애타게 승전보를 기다리던 정오 무렵 군사 목인해가 타고 출전했던 말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민씨는 싸움에 패했다고 여기고 남편과 함께 죽겠다며 전장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이때 시녀 김씨 등 다섯 사람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는데 노비 한기가 길을 가로막아 그녀를 가지 못하게 했다. 잠시 후 정사파가 찾아와 이방원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비로소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강인한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사건은 여흥 민씨 가문의 두 대군부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방간의 부인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이었는데 남편이 패하면서 토산으로 함께 귀양을 떠났다. 반대로 원경왕후 민씨(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민제(閔霽)의 딸)는 남편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세자빈으로서 정빈(貞嬪)에 봉해졌고, 그해 11월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靜妃)가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보위에 오른 태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원경왕후 민씨가 세운 공로를 잊지 않았다. 훗날 그는 《고려사》에 나오는 왕건의 부인 유씨의 일화를 읽고는 원경왕후가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함께 갑옷과 병기를 준비하여 거사를 치르게 한 일이 더욱 의미 깊었다고 상찬했다.
‘능히 계책을 결단하여 갑옷을 끌어서 종사의 공을 도와 이루었다.’라고 할 정도로 태종 정권 성립에 공을 세웠다. 태종은 세종에게 ‘너의 모후의 공이 유씨의 제갑(提甲)에 비교하면 더욱 중하다.’
1402년(태종 2년) 태종은 장인 민제의 집에 거동하여 잔치를 벌이고 춤추며 즐거워했다. 도중에 태종이 먼저 잠저 때와 같이 서로 대하자고 하자 민제가 선달(先達)이라고 부르자 태종은 사부(師傅)라고 화답하며 이전의 스승과 제자 사이로 돌아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종 등극 초기에 벌어진 정겨운 광경이었다.
부부 갈등이 심화되다
태종은 보위에 오른 뒤 왕권확립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면서 원경왕후 민씨와 마찰을 빚었다. 원경왕후가 친정인 여흥 민씨 일문에 일정한 권력 지분을 요구했지만 조선을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태종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녀의 여종 출신이었던 효빈 김씨의 처소만 들락거려 갈등을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 태종의 심한 여성편력이 기름을 부었다. 어느 날 태종은 원경왕후가 자신과 관계한 궁인을 꾸짖자 대노하여 시녀, 환관 20여 명을 내쳤다. 그러더니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가례색을 설치한 다음 9명의 후궁까지 들이도록 법제화하여 원경왕후의 화를 부추겼다.
당시 태종의 여성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궐내에 직첩을 받은 후궁이 6명, 직첩을 받지 못한 후궁이 5명이었는데 이 중에 한 명은 성씨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태종은 수많은 자식들을 얻었다. 효빈 김씨는 경녕군을 낳았고, 신빈 신씨는 성녕군을 포함하여 3남 6녀를 낳았다. 의빈 김씨는 정혜옹주를, 소빈 노씨는 숙혜옹주를, 숙의 최씨는 희령군을 낳았다. 직첩을 받지 못한 후궁들 가운데 안씨는 해녕군과 옹주 2명을, 김씨는 숙안옹주, 이씨는 숙순옹주, 최씨는 후령군, 성씨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소선옹주를 낳았다. 11명의 후궁을 통해 8남 13녀를 낳은 것이다. 이는 역대 어떤 국왕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그런 태종의 바람기 때문에 한때 살가운 부부이자 동지였던 부부의 갈등은 깊어졌고, 급기야 외척에 대한 경계심으로까지 이어졌다. 태종은 외척이 궁중에 들어와 일하는 것은 궁중에서 소소한 일을 담당하는 궁인들 때문이라 하여 궁궐 내의 청소를 담당하는 남자인 파자(巴只)를 환관으로 대체하고 궂은일을 도맡은 무수리를 궐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중의 일이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게 했다.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다
그 무렵 태종은 자신의 등극 과정에 크게 기여했던 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세자 이제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자는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므로 외삼촌들과의 관계가 각별했다. 1406년(태종 6년) 태종은 돌연 양위를 선언했다. 과연 그 과정에서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몹시 기뻐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대노한 태종은 두 사람을 제주도에 귀양 보낸 다음 1408년(태종 8년)에 이르러 그들을 사사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장인 민제는 자식들을 걱정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듯 졸지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자 원경왕후 민씨는 피눈물을 흘리며 무정한 남편을 원망했다.
1415년(태종 15년) 4월, 민씨의 남아있던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또 다시 태종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당시 민무회는 다른 사람의 노비소송에 관여한 죄로 하옥되었다. 그 일로 조정이 시끄러웠는데 때마침 부왕의 눈총을 받고 있던 세자 양녕대군 이제가 엉겁결에 ‘두 외숙이 자신에게 외가를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토로했던 것이다. 이는 세자가 장차 보위에 오르면 앞서 억울하게 죽은 두 형을 신원시켜 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날이 서있던 태종은 대간의 고발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의 직첩을 거두고 유배형에 처했다.
그해 12월 15일, 태종은 갑자기 의정부참찬 황희, 이조판서 박은, 지신사 유사눌을 대전으로 불러들이더니 중전과 그녀의 동생들이 과거 자신의 핏줄을 잉태한 효빈 김씨를 죽이려 했다면서 분개했다. 그는 교하에서 온 경녕군 이비의 유모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서, 경녕군이 아무리 비천한 몸에서 태어났어도 임금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인데 민씨 일가에서 여러 가지 잔꾀를 써서 죽이려 했으니 참으로 극악하고 음흉한 일이므로 마땅히 그 처분을 역사에 남겨 외척들에게 경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틀 뒤인 12월 17일부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앞 다투어 민씨 일문을 척결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12월 21일 태종은 의정부참찬 최이, 우부대언 서선을 위관으로 삼아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윤 이비 모자를 죽이고자 한 죄와 세자에게 불경한 죄를 밝히라고 명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면 관에 있는 자가 죽여서 용서하지 않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면 관에 있는 자가 죽여서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민무회 등의 죄는 비록 이것과 같지는 않으나 그 꾀에 참여한 민씨 집안의 노비를 잡아들여 국문하라.”
추상같은 어명이 떨어지자 위관들은 민씨 집안의 노비 삼덕과 화상, 상좌 세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한 다음 의금부에 가두었다. 이어서 유배지에 있던 민씨 형제를 재차 압송하여 국문했다. 한데 국문 과정에서 그들은 앞서 죽은 민무질, 민무구가 무고하다고 항변함으로써 태종의 심사를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혹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원주와 청주로 재차 유배되었다. 그렇듯 자신의 과거 행적 때문에 남은 두 동생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태종의 폭거에 저항했다. 본가의 어머니 송씨도 충격을 받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태종은 요지부동이었다.
1416년(태종 16년) 1월 12일, 의정부·공신·육조·대간이 연명으로 두 사람을 극형에 처하고 아울러 그들 형제의 처자까지 벌하여 앞으로의 후환을 없애자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태종은 의금부도사 이맹진을 원주로, 송인산을 청주로 보내 두 사람의 처결을 명했다. 이튿날 도성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민무휼과 민무회가 자결했다고 보고했다.
그 충격으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 송씨까지 세상을 떠나자 여흥 민씨는 완전히 패가망신한 꼴이 되었다. 태종은 그 참에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는 원경왕후 민씨까지 폐출하려 했다. 하지만 세자와 왕자들의 생모인지라 중신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으므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418년(태종 18년) 세자 이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에 책봉되고 충녕대군 이도가 세자에 책봉되자 원경왕후는 이를 형제간의 분란으로 보고 끝까지 반대했다. 그 해에 태종이 세자 이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민씨도 왕대비가 되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세종은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에게 효성을 다했다. 충녕대군 시절 자신이 책을 너무 많이 읽다가 건강을 해칠까봐 몇 권만 남겨두고 중궁전에 가져다놓을 정도로 사랑을 베풀었던 어머니, 동생 성녕대군이 죽은 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분, 젊은 날에는 태종을 위해 군사를 기르고 갑주와 보검을 챙겨주던 여장부였건만 나이 들어 남편과의 불화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숱하게 마음고생을 했던 그 어머니였다.
1420년(세종 2년) 5월, 세종은 어머니가 학질에 걸리자 ‘학질은 여러 곳을 자주 옮겨 다녀야 병이 떨어진다.’는 속설에 따라 5월 27일부터 43일간 무려 12곳을 전전했다. 그 동안 끼니를 잇는 둥 마는 둥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기도했다. 당시 세종은 말 한 필에 내시 두 사람만을 대동한 채 이리저리 옮겨 다녔는데, 한밤중에 길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가기도 했다. 또 탕약과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드시게 했다. 이런 아들의 정성에 냉혈한 태종도 감명을 받았는지 위독한 민씨의 손을 꼭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1420년(세종 2년) 7월 10일,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 원경왕후 민씨는 수강궁 별전에서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해 나이 56세였다. 세종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다음 맨발로 거적 위에 엎드려 통곡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을 저몄다. 당시 날씨가 무더워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자 신하들이 몰래 기름먹인 종이를 거적 밑에 깔았다. 세종이 이를 알고 몹시 노여워했다.
세종은 1422년(세종 4년) 5월 태종이 깊은 병에 걸리자 탕약과 음식을 손수 받들어 드렸다. 하지만 병환이 심해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야 했는데 세종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결국 숨을 거둔 태종은 원경왕후가 먼저 묻힌 헌릉에 합장되었다. 평생 뜨겁고 곡절 많은 세월을 보냈던 원경왕후 민씨와 태종 이방원은 죽어서야 그렇듯 한 자리에 누워 고단한 몸을 쉴 수 있었다.
첫댓글 태종은 정력이 좋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