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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못할 그림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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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슬픔은 세월이 약이었다. 6여 년이 지나간 지금, 그의 안에서 애타던 마음은 아내가 가버린 뒤로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어디론가 차츰 가버렸다. 아내가 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 자신을 추스르며 느껴왔던 아쉬움 등이 이젠 단조로워 저 그것들 마저 면역이 된 듯 무던한 나날이다. 민준은 아내와 사랑할 때의 모습들을 때때의 느낌에 따라 기억할 뿐이다. 극히 인간적 모습이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이제는 자신에게는 누군가와 만남이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날그날 필요한 뭔가를 채워가는 그의 일상에 만족해 했다. 그것에서 빠져나와야 된다는 강박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다.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렇게 녹록지는 않았다. 아무 결론도 없는 맹목적 반발만 그와 함께 했다. 혼자라는 공허함만이 그를 지배했다. 다시 시작하기엔 허전한 마음에 자꾸 밖으로 만 겉돌고 있었다.
빌딩 숲 뒷골목, 거리의 현란한 네온의 혼란을 잊은 듯 샛바람에 가냘프게 흔들리는 포장마차의 60 촉 짜리 전구는 몇 개의 간이 탁자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다. 주로 젊은 연인들의 손님들이 탁자를 꽉 채워 모나지 않은 어울림으로 거리의 혼탁한 찌듦과 비린 생선 내음이 비기 듯 상쇄하고 있다. 주인아주머니는 들어오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열심히 칼질을 하며 '어세 오세요'라고 외친다. 구석 자리에 앉은 민준은 소주병을 앞에 두고 그를 떠나간 아내 이름을 속으로 되뇐다. '정말 보고 싶다. 지민아.' 탁자 위 원형 그대로인 술 물방울에 노란 전구색이 비치어 미련을 품은 듯 아린 아픈 기억이 떠오르고 오늘도 그는 자책하며 때늦은 관념 속에 빠져버린다.
'그때 내가 운전을 했었어야 하는데……'
6 년 전, 은퇴해서 가평에 사시는 장인, 장모님이 그의 집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갈 때 작업실에 있었던 그가 일 때문에 가지 못하고 그의 아내 지민이 비 오는 밤길을 운전했었다. 아내에게서 같이 가자 전화가 왔는데도 못 간 것이다. 도시를 빠져나간 차는 국도의 푸슬푸슬 비 내리는 밤에 맞은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해 탱크같이 돌진하는 5 톤 트럭 차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뒷좌석의 두 분은 큰 부상을 당한 사고였다.
그의 아내가 대학 2 학년, 그가 복학 후 4 학년 때 만나 10 년이 훌쩍 넘게 오랫동안 열애 끝에 결혼해 9 개월이 되든 때였다. 그 슬픔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서 헤매 듯 움직임이 둔해져 자기가 해야 할 일도, 작업도 재켜둔 체 자신을 고통의 나락에 빠트렸다. 그는 세상사의 가치에서 멀어져 암담한 어두움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의 자책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오늘이 아니었고 희망과 기쁨이 있는 내일이 없었다. 그 후 그는 그냥 현실에서 떠나 모든 것에서 잊힌 사람으로만 살고 싶어 했다. 고향 근처 시골에 있다 2 년 전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도 별 활동 없이 지내고 있었다. 자신을 추스르고 이제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에 있었지만 그의 일에서만은 하찮은 껍질 속에 지내는 감상주의자처럼 아직도 혼란 속에 빠져 있다.
저쪽 자리의 연인인 듯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가벼운 스킨십을 하며 때론 웃기도 한다. 작은 소리로 소곤대는 그들이 그에게 지루함과 상관적 관계인 양 권태를 준다. 민준은 일어나서 그곳을 빠져나와 네온이 반짝이는 거리로 나와 인파에 휩쓸리듯 자신을 내맡겨 혼잡한 거리에 스며든다. 그리고 빛이라곤 전혀 낌새가 없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어두운 잿빛의 하늘을 봤다. 가혹하고도 냉정한 어두움은 추레한 그를 내려보듯 시커먼 거만이다. 그 어둠 밑 건물 전체를 은색의 형광 네온이 감싸 어두움을 밝히고 있고 옥상 광고판에서 생머리의 한 여자가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무슨 술 광고인 양 은근하게 웃으며 술병을 들고 있다. 그 웃음은 어쩌면 혼자 내동댕이 쳐진 그를 비웃는 듯, 모나리자의 알 수 없는 미소 같았다. 불쌍하고 측은하게 생각해하며 냉소를 짓는 그런 웃음? 그는 곧 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친구를 불러내 술을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중 한가운데 가정을 가진 친구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곧 가끔 술친구를 해주던 기태를 생각했다.
"기태야, 너 지금 어디냐? 괜찮으면 나랑 술 한 잔 어때."
"아! 선생님, 저 지금 무역 센턴데 친구랑 같이 있어요. 영화 보고 지금 막 나온 길이에요."
"그래…… 여긴 강남역 근천데 올 수 있나?"
"저번에 그 친군데 친구랑 같이 가도 될까요?"
예전에 같이 술을 마신적이 있고 서너 번 만났던 기태의 여자 친구도 함께, 강남역 근방 뒷골목 2 층에 있는 실내 포장마차 집에서 그들은 만났다.
"안녕,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해."
"아니에요. 선생님 저희도 어딜 갈까 고민하던 중이었어요."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기태가 어제 성호한테 들른 이야기를 했다.
"참 선생님 일요일 센터에 다녀오셨다고요. 성호 형이 그러던데 센터장님을 옛날부터 아시는 분이라고 하던데 굉장히 반가웠겠네요."
"으응… 그래, 나도 깜짝 놀랐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만나, … 그렇게…… "
"… 저도 그 말 듣고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대단한 분이던데요. 지금도 미인이지만 체조 선수였던 그 당시…… 좌우간 참 안 됐어요. 그분."
"응 체조 선수로 굉장히…… 국가대표였고, 아 그림도 잘 그렸어… 그때 한 7 개월 정도 했나? 내 기억으론 시작인데도 데생의 명암과 선이 여자답지 않게 보기 좋게 묵직했었지."
한 잔을 비운 민준은 오래전 일을 회상이라도 하듯 팔짱을 끼고 있다가 잔에 술을 부은 뒤 벽에 부착된 갓 등을 보고 잠시 침묵에 빠진다. 가장 친한 친구였고 사랑했던 아내가 가버리고 돌릴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을 가혹한 어떤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방황할 때, 죽은 아내와 분위기가 흡사한 한 여자를 보고 야릇하고 묘한 감정이 되살아난 며칠 전을 생각했다.
"참 선생님 그분 지난 3 월 서린 갤러리 그룹전에 출품도 하고 그랬다는데 아세요?"
"그래, 난 며칠 전에 만나서… 그 친구에 대해 자세한 건 하나도 몰라, 만난 지 20 년도 넘었을 걸 아마!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인터넷 프로필에 나오던데요. K 대학에서 사회 복지학 강의도 해요."
"응 바쁘게 사는 건 좋은 거야,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은 어때?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기분이… "
웃기만 하고 듣고 있던 기태의 친구 라희는 응원군을 만난 양 푸념을 늘어놓는다.
"선생님 애는 모든 게 다 나쁜데 제멋대로 하는 고집이 특히 더 나빠요. 호호"
"오호! 기태 너… 배려가 깊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본데?"
"선생님, 누군가가 간소하게 간소하게 또 간소하게 살아라 했습니다. 그냥 상황에 걸맞게 하는 행동도, 서로 편한 대로 하는 것도 이기인 가요. 내 참!"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참 좋을 때다. 티격태격하는 게 서로를 알려고 애쓰는 증거야, 관심도 없어봐 싸울 일이 있나, 그런데 남자가 조금 더 챙겨 줘야 돼. 부럽다."
"제가 충분히 배려하고 있어요. 잘하다가 하나 잘못하면 이래요. 억울해요. 선생님"
"하하 음, 내가 알기론 사랑이란… 서로의 가치를 충분히 느꼈을 때 돋보이기도 하지만, 때론 성가시게 들볶거나 또 옆에 없으면 옆구리가 시릴 정도의 허전함을 느끼는 그런 사이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서로 후회 없이…… "
8
"센터장님, 요즈음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모습이 예전 어느 때보다 밝아 보여…… 혹, 연애하세요?"
순간 경희는 얼굴이 붉혀지는 걸 느끼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을 하고 처신해야 할지 경험이 없어 난감하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지만 그냥 그와 연관되어 계속 이 상황에서 머물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 자신이 그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에서 벗어나면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억지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동안 오직 한 남자를 못 잊어 그리워하며 한 번도 사랑의 경험 없이 살아온 자신에게 후한 인심이나 인정을 베풀고 싶었다.
"김 선생님 내가 그렇게 보여요?"
경희가 웃으며 휠체어를 움직여 한쪽 탁자에 커피가 있는 곳으로 간다.
"네, 그래요. 그것도 아주 많이…… 제 경험으로 봐선 그런 것 같은데요. 호호"
"김 선생님 커피 하실래요?"
김 팀장이 마시겠다는 말을 하고 경희는 잔에 커피를 따른 후 잠깐 쉬었다 하자며 옆방에 있는 상담실로 들어가 창가 쪽으로 가 빌딩들이 보이는 창밖을 보며 말한다.
"김 선생님은 결혼을 해서 알겠군요. 아련하게 사랑……, 그런 게 다가왔을 때 느껴지는……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일까요?"
흘깃 보니 경희의 표정에서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가 보인다. 김 팀장은 탁자로 가 커피 잔을 들고 경희에게 잔을 건네고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경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차분하게 말한다.
"제 생각엔 처음에는 뭔가 모를 환희가 다가오겠지요. 항상 두근거리고 설레는, 깨어나기 싫은 애틋한 꿈같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요?"
이어 김 팀장은 굉장한 것을 갑자기 발견한 것처럼 숨 막히는 떨림 같은 감동과 흥분으로 다그치듯 재촉하며 확인하려 애쓰는 듯 재차 말한다.
"맞군요. 정말 사랑을 하고 계시군요. 맞죠?"
경희는 지금 김 팀장의 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일방적인 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앞날의 모든 것에 확신에 찬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단편적으로나마 세상을 경험할 만큼 경험했고 어느 정도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있다. 그녀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오직 한 남자에게 앞으로 드러낼 가지가지의 모습들이 어색할지라도, 속된 말로 어설픈 사랑이어서 남들이 생각하기엔 어리숙하다 할 수 있지만 그녀는 자기가 그를 사랑할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최고의 남자라 생각했다. 오래전 미술학원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 ---오직 그에 대한 막연하지만 애틋한 보고픔 내지는 사랑--- 그게 그녀의 전부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한쪽의 일방적 사랑이라도 세월이 지나 변하지 않고 확실한 의미를 담는다면 결코 단순함이 아닐 것이다. 사랑의 깊이가 진정이고 애매한 꿈이 아니라면, 막말로 재미나 오락이 아니라면 진실한 모습으로 이해하고 감싸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본모습이 아닐까? 거기엔 오묘한 뜻도, 기막힌 엉뚱함도 필요 없는 오직 애틋함으로 감싸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평화가 충만하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뭐라 하건 말건…… 경희는 솔직한 자기 생각을 김 팀장에게 전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아니에요, 김 선생님 가을이 다가오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래요. 가을은 아직 멀었는데…… 뭔가를 타나 봐요."
9
세상은 연(連) 줄로 이어지듯 얼기설기 이어진 거대한 덩어리다. 몇 사람 건너면 인척이고 친구이듯 세상은 의외로 참 좁다. 어쩌면 연은 뭔가를 이어놓듯 현실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공통분모일 수 있다. 갓 결혼한 사촌 여동생과 새신랑인 그녀의 남편이 큰댁에 인사를 왔을 때 그도 오랜만에 시골집에 내려왔었다. 그 자리에서 우연하게 그림이라는 화제 때문에 경희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녀의 그림을 소장한 매제 때문에 경희를 더 알게 됐다. 장애를 가졌는데도 그림도 그리고 장애 센터를 운영하며 학교에서 강의도 한다는 경희의 동료 교수인 매제 말을 듣고 그녀가 누구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민준 그가 우연히 20여 년 만에 전 주 일요일에 만나고 내일 볼일 때문에 다시 만나기로 돼 있다는 말에 별난 인연도 있다는 듯 그의 부모를 비롯해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도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감동과 함께 존경의 숙연함을 느꼈다. 오래된 무엇 무엇들은 세월이 지나면 자연히 잊히기 마련인데 민준과 경희의 또 다른 의미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태어나 꿈이 아닌 진지한 현실에서 축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의 삶이 우연으로 이어지는 것은 보통을 넘어서 진실과 진실의 대비이다. 우연한 관계로 맺어지는 서로의 정신(맑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묘한 연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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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는 일상사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쓰이고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은 그만큼 무언가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잠에서 깨어난 경희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오늘 만날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혹시 있을 그와 만남에서 자신에 대한 어떤 확인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혼자서 애타하던 지난 나날들이 막연하나마 현실로 다가왔을 때 자신의 모습 때문에 상대가 곤란을 받거나 도외시되는 건 그녀 자신이 못 견디는 일이다. 비록 무가치한 생각일 수 있지만 확인이 필요하지 않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를 향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와 사고 후 그에게서 멀어져 갔을 때, 그리고 그 후 우연찮게 다시 만나고 지금 그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 모든 상황들은 아무 변함은 없었다. 그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는 자기 연민이나 주저에서 당당하게 빠져나와야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오랜 기다림 속에 엉뚱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원치 않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고 미련 속에 별 볼 일 없는 감상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의 현재의 삶이 자신보다 더 어려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먼저 다가가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선생님 저 경희예요. 오늘 약속 조금 당기면 안 될까요? 그리구 제가 공원으로 나갈게요. 선생님을 거기에서 뵙고 싶어요."
뜻밖의 그녀의 전화에 민준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녀의 뜻을 수용했다.
"나야 괜찮지만 불편할 텐데 내가 데리러 갈까요?"
"아니에요. 제 차로 갈 수 있어요. 성호 씨도 같이 있을 텐데…… 제가 갈게요. 1 시쯤 어떨까요? …… 어디로? …"
"음… 우리가 잘 가는 곳은 반포 대교 근천데…… 아, 강변 주차장도 근처에 있어요. 괜찮을까요?"
"예 선생님, 거기라면 저두 잘 알고 있어요."
"예 그럼 1 시쯤 내가 주차장으로 갈게요."
잔디밭 여기저기에서는 텐트가 처져 있고 사람들은 초가을의 정취를 즐기고 있다. 농구장엔 거리 농구가 한창이고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은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내 달린다. 평화롭고 너그러운, 참으로 다정한 풍경이다. 그는 천천히 걸어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 장애인 전용 구역 앞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청량한 하늘에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고, 강 건너 빌딩 숲 저 멀리 북한산 인수봉은 힘 있게 솟아 있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강가 억새는 가볍게 흔들린다. 보이지 않는 무한의 원인을 이어가듯 강물에 반짝거리는 금빛 물결이 도미노 판이 차례대로 이어져 쓰러지듯 큰 요동 없이 출렁이고 있다. 이제 제법 솔바람이 불어온다. 2 푸로 부족도 채워진 듯 반포대교 밑 한강은 수려한 것보다 아무도, 무엇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펼쳐진 흐름의 미학으로 강가 여기저기를 늦여름의 정취로 만들어 뽐내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꽤 넓은 강물은 차가움을 느끼게 한다.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은 어떤 시 낭송회에 어울리는 조용한 칸타타와 같이 애절한 그리움이 있는 듯했다. 홀연히 떠나버린 누군가의 흔적을 다시 찾으려는 애틋함이었다.
운전석 차창을 내린 경희의 갸름한 옆얼굴이 오후의 햇살에 비쳐 호의적 느낌으로 그에게 다가온다. 왠지 낯익은 모습인 듯 친근감이 느껴진다. 민준은 손을 주차장 한쪽을 가리키며 차를 유도하고 조수석에 있는 휠체어를 펼쳐 그녀가 내리는 걸 돕는다.
"성호 씨가 안 보이네요. 어디? ……"
"아, 오늘 성혼 안 왔어요. 대학로 연극 구경 갔어요."
아침에 그가 성호의 집에 당도했을 때 이미 성호는 기태와 약속을 했다. 성호는 희극을 좋아했고 둘이 아니면 기태의 여자 친구랑 셋이서 연극 구경을 자주 갔었다. 전날 기태의 봉사 때 내일 연극 구경을 가자고 제의한 것이다. 어쩌면 민준과 경희의 만남에 심상치 않는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배려일 수도 있다. 남녀 간의 만남이 뭔지 잘 모르지만 센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둘에게 색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성호는 피붙이의 정이 뭔지 잘 몰랐지만 무엇보다 더한 형제애의 깊은 애정을 민준에게서 느끼고 그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성호는 2 년 전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늘 혼자였고 아무도 그의 옆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작년에 민준의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우연히 같이 식사를 하고 어렴풋이 민준의 내막을 알게 됐다. 성호의 티 없는 염려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아름다운 민준에 대한 우정이자 형제애 일수 있다.
순간 민준은 약간은 당황한 듯했지만 곧 편안한 그녀의 눈빛을 봤다. 경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가 잡아주는 손을 잡고 그에 의지한 채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단호하고도 차분하게 자기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성호 씨한테 고맙네요. 선생님과 둘이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
당황한 민준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금방 떠오르는 말이 없어 혹시 그녀에게 잠시라도 권태로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잠깐이나마 속수무책으로 그 분위기를 흘러 보냈다. 얼른 그녀에게 환한 웃음을 띠며 되도록 천천히 그녀가 자리에 완전히 앉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포근한 마음을 전달하려 애썼다.
"날씨 참 좋죠?"
민준은 겨우 생각해 낸 듯 짧게 말하고 휠체어를 밀어 주차장을 빠져나가 강가 산책길로 접어들었다. 그녀의 희미한 재스민 향이 바람에 실려 그의 코를 자극했다. 그를 자극했던 내음은 오래전 그에게 익숙해 있던 샴푸 향이었다. 애틋한 옛사랑과 또 애틋한 연민이 동시에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동이다. 확실히 구분이 될 듯, 안될 듯 몽롱함이 이분이 되는, 사랑과 연민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예외적 갈등? 민준은 '세상에'를 속으로 외치며 가늠이 안 되는 이런 희한한 감정을 가질 수 있나를 스스로 자문해 봤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나를 조심스레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은 지나친 생각일 수 있지만 아내에 대한 자신의 이해나 용서를 빌 수 있나를 생각해 본다. 죽은 아내도 그를 이해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준은 갑자기 앞으로 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오랫동안 보고 싶은 생각을 했지만 그는 그늘 막이 있는 곳까지 그 생각을 겨우 참았다.
"우리 저기에 앉을까요?"
"네, 조금 덥죠?"
강 한가운데 수상 스키를 즐기는 사람이 시원하게 물살을 가른다. 좌우로 퍼지는 물보라는 8 월 초 뜨거운 태양을 무색하게 하는, 시원한 맥주 광고에 나오는 장면인 듯 차갑게 비치는 정경이 활짝 트여 후련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