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수 22:21-34
https://youtu.be/wMfuI5pjuBo
1. 의심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의심이 확신이 된 자에게 무슨 말이 통할까요? 그것이 신뢰를 다 사라지게 한 구체적인 증거까지 손에 쥐게 될 때에 과연 관계가 지속 가능할까요? 동쪽으로 돌아가는 두지파 반은 보기에도 큰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을 향한 배신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 교회 목사님께서 교회를 섬기는 부사역자가 청빙한 강사 중에 북한을 찬양하는 이가 있어 무리가 일어나자 모르셨던 담임목사님은 다 내 책임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한번 씌워진 의심과 불신의 프레임은 계속 따라 다닙니다.
2. 증거, 히브리어로 ‘엣’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34절), 그리고 사람들과 당신 상이(28절)에 세우세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은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가?’란 질문은 더할나위 없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비밀’을 간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고백은 시편 44편과 오늘 본문입니다. Unfailing love, 실패하지 않으시는 사랑에 자신의 아픔과 죄조차 고백하는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구조적으로 씌워지고, 당신을 미워해도,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호와를 섬기십시오. 그런 의심이 많을수록 여호와를 섬기는 자(27절)가 되십시오.
3. 그 모든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 즉 지혜와 사랑’으로 나타나면 좋겠습니다. 두지파 반은 몰아치는 의심의 말들에 유순한 대답을 합니다. 부드러운 말, 그것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란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경지식을 포함한 이야기들을 펼쳐 번제, 소제, 화목제물로 드릴 의도가 없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인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24절)며 마음을 표현합니다. 의심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모든 자리가 여호와가 계심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