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먼저 박수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우리 3040 우리 분들한테 부탁은 했는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시도라서 조금은 마음 한 구석에 걱정이 있긴 있었습니다. 근데 뭐 별 보고가 없는 거 보니까 그냥 일이 잘 되고 있나 보다 이렇게 여겼는데 오늘 또 많이 서 주시고 또 함께해 주셔서 어쨌든 너무 감사합니다. 최근에 가장 드린 찬양 중에 가장 집중력 있는 찬양이었던 것 같아요. 젊은 세대들이 무대에 꽉 있으니까 아마 어른들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잘 이렇게 참여하셨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예배 환경이 조금 변화가 조금 더 주어질 수도 있어요. 전기 핑계 삼아서 어쨌든 젊은 세대들이 주축이 되어져 가는 예배 환경을 좀 만들어보자 이런 시도가 조금도 아마 진행될 것 같습니다.
우리 어른들 입장에서는 좀 불편할 수도 있고 왜 저럴까 왜 갑자기 연기가 나지 불난 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어쨌든 무대 장치가 조금 더 추가가 되고 그렇게 아마 여 일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여시고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한 그러한 방편이다. 또 젊은 세대들을 위한 방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이분이 참여하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전 예배가 끝난 후에 피드백을 봤어요. 청중석에 불을 끄니까 어떻던가요 했더니 첫 번째로는 주보하고 성경책이 잘 안 보여요. 이렇게 하더라고요. 어쨌든 이제 조금 보고 싶은데 이제 잘 안 보이는 뜻은 같고요. 그건 이제 제 의도하고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어떤 예배 시간에 그냥 앞에만 이렇게 집중하기를 원하는 게 제 의도였으니까
또 하나는 잠이 잘 와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왕 잘 거 편하게 주무시라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얼마나 좋아요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잘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래저래 좀 그런 코멘트가 있어서 감사하고 잘 참고해서 다음 주 하고 더 준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인 자비입니다. 자비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불교 용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자비라는 용어예요. 한글 번역본에는 이 자비를 친절 부드러움 이렇게도 번역해 놓기도 했고요. 영어 성경에는 젠틀니스 해서 우리가 젠틀맨 할 때 그 젠틀 있죠 그 젠틀니스라는 단어와 카인드니스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근데 문제가 이 자비와 함께 이 뒤에 나오는 양선 때문에 또 문제가 일어나요. 자비는 되게 쉬운 단어인 것 같은데 막상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 단어인데 이어서 바로 양선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더 혼돈이 돼요.
그럼 자비와 양선는 또 뭐가 다를까? 양선는 한글 성경에 보면 선행 선함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자비와 양선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처럼 보여지지만 그렇지 않은 단어이기 때문에 실제로 대개 구분하기가 아주 어려운 단어예요.
또 자비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또 사람 막상 설명하라고 하면 잘 못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 자비와 양선을 이렇게 구분해 놨더라고요.
잘 들어보십시오. 양선은 큰 개념에서 선하게 되는 것 선하게 대하는 것 그리고 친절은 조금 더 작은 개념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러니까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아주 작은 사소한 영역에서 이웃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 친절 그러니까 양선 자비라는 의미인 거죠.
자비 양선은 좀 큰 의미에서 이웃을 잘 대하는 것 좀 큰 의미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약간 시스템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교회가 일련의 어떤 이웃돕기 행사를 하는 것 이게 아마 양선에 속할 수 있고 친절이나 자이는 성도 개개인이 자기가 있는 집에서 연약한 사람들을 이웃을 돕고 섬기는 문제라고 이렇게 보면 좀 더 이해가 잘될 것 같아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이 성품을 기초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비라는 성품이 없다면 성경은 이 자비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렇게 규정해 놨어요.
자비라는 하나님의 성품이 없으면 용서라는 것도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용서를 받고 그러니까 죄를 죄인이잖아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에게 자비라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성품을 근거로 한 겁니다.
그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인 자비의 성품을 가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용서는 자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비가 없다면 우리가 용서받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비가 없다면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성품이 용서의 근거인 거예요.
하나님의 자이라는 성품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성령의 성품인 자비를 가질 때 또 다른 누군가를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거죠. 교회에 지은 죄, 개인에게 지은 죄를 우리가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나타내게 하는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도 풍성한 거예요. 하나님 자비라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또 용서받기도 하고, 정말 살인을 저질러도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내게 임하는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을 근거로 한 거다. 내가 늘 경험하는 십자가의 용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비라는 성품을 가져야 세상을 용서할 수 있고, 나에게 대해서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성품인 자비의 성품을 갖고 성도 개개인도 하나님의 성품인 이 자비의 성품을 성령을 통해 가지게 될 때 교회 안에는 용서와 은혜가 풍성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는 용서를 근거로 믿는 공동체잖아요.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셔서 교회가 지금 있는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해야 교회가 교회로서 세워질 수 있는 거예요. 교회 안에는 자잘한 부딪침이 많아요. 제가 아까 자비를 그렇게 설명했죠. 되게 디테일하고 섬세하고 작은 영역에 있어서의 선을 행하는 것 이걸 자비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교회는 이 자비가 있어야 사소하고 자잘한 영역에서 용서와 이해가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자비의 성품이 없으면 교회 안에서 사소한 것 때문에 삐지고 다투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비라는 성품이 되게 어려운 성품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꼭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성도가 자비라는 성품이 있어야 가정에 보면 실은 가정에도 용서할 게 되게 많잖아요. 여러분 남편이 남편이 여러분에게 용서받아야 될 게 되게 많죠. 우리 교회는 믿음이 좋나 봐요. 아마 다른 교회에서 물었으면 아멘 하고 막 소리 질렀을 텐데 아무도 아멘하지 않는 거 보니까 우리 교회 남편들은 그렇지 않나 봐요.
실제로 남편들은 아내에게 용서받을 게 되게 많은 사람이에요.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어요. 이게 근거가 돼야 가정이 건강하게 사는데 그 용서의 근거가 자비라는 성품이라는 거예요. 자비의 성품이 있을 때 사소한 영역에서 부딪혀서 오해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잘 해결하고 넘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풍성하지 않은 은혜와 풍성하지 않은 사랑은 우리에게 자비의 성품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일하심도 되게 섬세해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되게 섬세해요. 그리고 우리도 이 자비의 성품을 가져야 하나님처럼 부드럽고 친절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교회와 성도들과 세상을 섬길 수 있어요. 친절하고 부드러우면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친절하고 부드러우면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일하심도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비라는 이 성품은 이웃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섬세하게 섬기게 하는 겁니다. 자비가 섬세하게 교회와 이웃을 이렇게 컨트롤하게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작은 새끼 강아지나 아니면 강아지는 새끼가 더 크니까 새들 이렇게 아주 어렸을 때 부화된 새 보셨죠? 건드리면 막 부러질 것 같고 건드리면 막 눈이 손의 힘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이 임할 것처럼 되게 작고 막 쪼물쪼물하게 이렇게 태어나잖아요.
새들이 그러니까 자비라는 것은 그 새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요? 아주 조심스럽게 그렇게 대하잖아요. 그렇게 대한다는 개념이에요. 교회나 이웃과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섬기고 대한다는 것입니다.
자비가 섬세하게 용서하고 또한 섬세하게 이해하기도 해요. 여러분 용서도 되게 구체적이어야 돼요. 섬세해야 돼요.
나 용서했다. 나 용서해줘. 여러분 이걸로 용서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용서는 어떤 현상과 작용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아픈 영역을 잘 만졌을 때 일어나는 게 용서인 거예요. 자비의 성품이 내 안에 상처받은 나를 잘 만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방이 나에게 용서를 구할 때 내가 용서가 돼요. 그러니까 자비의 성품이 있어야 내가 용서를 구할 수도 있고 또한 용서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용서받을 때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이 자비의 성품을 갖게 되면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받을 때도 또 용서할 때도 되게 이렇게 섬세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를 안 입게 돼요. 보통 우리는 화해하다가 또 상처를 입고 용서하다가 또 상처를 입어요. 그거는 우리가 자비의 성품을 갖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자비라는 성품은 되게 어려운 주제이기도 해요. 너무 자주 듣는 말이라서 쉬운 것 같지만 모든 종교에서 다 사용해서 쉬운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개 이해하고 또 접근하기가 어려운 단어가 자비인 것입니다.
모쪼록 여러분 어려운 과제들도 잘 해내면 좋은 교회잖아요. 우리가 자비를 잘 모르지만 자비의 성품을 가지면 좋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이 자비의 성품이 잘 이 바탕에 만들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역과 또 이렇게 서로의 교재가 자비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다면 그냥 대화를 통해서 위로가 되기도 하고요. 모여서 이렇게 얼굴 보고 있어도 은혜롭기도 하고요. 또 교회 사역을 하면서 막 행복해하기도 하고 어떤 자비의 성품이 없으니까 사역하면 싸우고 대화하다가 속상해서 달아나고 뭐 이렇게 음식 먹다가 짜증 나서 막 뛰시고 막 이런 일이 벌어지잖아요. 이 근원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인 자비의 성품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해서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여러분과 저에게 이 자부의 성품이 잘 자리 잡아서 우리가 그렇게 부드럽고 섬세하게 연약한 사람들, 또 교회와 사역들을 잘 돌아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