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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 박승영 제 진경대사탑비문
39代孫 박희용
[해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는 924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찬자(지은 이)는 신라 54대 경명왕 박승영(朴昇英)이고 서자(글씨 쓴 이)는 행기(幸期)이며 각자(새긴 이)는 성휴(性休)이다. 전액(篆額)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인 최인연(崔仁渷, 일명 崔彦撝)이 썼다. 1919년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경대사 김심희(金審希)는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봉림사의 개조(開祖)로, 왕이 ‘진경’이란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경명왕이 쓴 비문에서 눈여겨봐야 할 곳은 두 군데이다. 도입부의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는 고대사 연구에서 논란되고 있는 ‘任那’란 명칭의 실제를 판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결론부의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부분은 경명왕 2년 918년 11월 4일 법회의 모습을 표현한 문장을 통해 진경대사의 법의 깊이와 함께 경명왕의 지적 수준과 정서를 알 수 있다.
신라 천 년 동안 ‘任那’는 ‘金官國‘이었다. 금관국을 초기에 ’任那伽羅’, ‘任那伽耶’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왕이 쓴 비문 그대로 진경대사 김심희는 임나 왕족, 즉 금관국 왕족으로 중시조는 흥무대왕 김유신이다. 그런데도 일본 사학계는 자기들의 사서인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여 18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任那’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모든 가야 소국들을 포함하는 지역 명칭이며, 한때 ‘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근거로 하여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경명왕이 직접 쓴 이 비문은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 날 그 법회, 진경대사의 법문을 일일이 받아 적는 젊은 경명왕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詞에서 ‘道存人去幾時迴 도(道)를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하며 대사를 그리워하고,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라 하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켜보겠다는 의지가 더욱 다졌다. 그러나 인명재천이라더니 이 비문을 봄에 짓고는 가을에 30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101년 전 39대 할아버지의 글을 후손이 삼가 첨언한다.
[원문]
故眞鏡大師碑
有唐新羅國 故國師諡眞鏡大師 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門下僧幸期奉⎵敎書⎵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
⎵⎵余製
余聞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豈若栖禪上士 悟法眞人 跨四大而遊化觀風 避三端而𡩷居翫月 遂使假威禪伯掃魔▨▨離乱之時追令 法王扶釋敎於曻平之際以至 慈雲再蔭佛日重輝 外道咸賓弥天率服持 秘印而發揮奧旨擧 玄網而弘闡眞宗 唯我大師則[其人也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음독]
고진경대사비
유당신라국 고국사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비명병서 문하승행기봉교서 문인조창대부전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최인연찬
여제
여문 고고천상 비유점광활지명 후후지의 부독칭유현지호 기약서선상사 오법진인 과사대이유화관풍 피삼단이연거완월 수사가위선백소마▨▨이란지시추령 법왕부석교어승평지제이지 자운재음불일중휘 외도함빈미천솔복지 비인이발휘오지거 현망이인천진종 유아대사즉기인야
跨 과 : 걸터앉을, 넘을, 말 탈 𡩷 = 宴 연 : 편안할, 즐길
翫 완 : 구경할, 탐낼, 익숙할, 아낄, 싫을
曻 = 昇 승 : 해돋을, 날오를 闡 천 : 열, 밝힐, 클
[국역]
고 진경대사비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국사(國師) 시호 진경대사(眞鏡大師)의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 비명(碑銘)과 서문.
문하승(門下僧)인 행기(幸期)가 왕명[敎]을 받들어 〈비문을〉 쓰고, 문인(門人)인 조청대부(朝請大夫) 전(前)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 집사성 차관)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최인연(崔仁渷)이 전액을 쓰다.
내[余 경명왕 : 박승영 917~924]가 〈비문을〉 짓다.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저 선정(禪定)에 들은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은 사람들은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노닐며 세상을 살피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지내며 자연을 즐기다가, 마침내 선백(禪伯)들에게 위엄을 빌려주어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이어서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받들게 하여, 자애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가 모두 항복하고 천하가 모두 복종하게 한다. 〈또한〉 비인(秘印)을 가지고 심오한 뜻을 드러내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 참된 가르침[眞宗]을 널리 드러내니, 오직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주해]
(1) 조청대부(朝請大夫) : 從 5품 上.
(2) 수집사시랑(守執事侍郞) : 집사성 차관. 자금어대(紫金魚袋) : 관리들이 허리에 차던 물고기 모양의 붉은 금빛 주머니 형태의 장신구로 3품 이상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하사받은 사람들만이 찰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3) 최인연(崔仁渷) : 868~944 고려 태자사부 평장사. 篆 전 : 書, 글자를 쓰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4) 余製 여제 : 내가 짓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그러나 경명왕 박승영(917~924)이 손수 지은 게 아니고, 서두의 ‘門下僧幸期奉⎵敎書(문하승행기봉교서) : 문하승인 행기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에서 보듯이 상좌인 승려 행기에게 명하여 대사의 행장기를 수습하게 한 후에 그것을 초고로 하여 비문을 지었을 것이다. 행장 이외의 문장은 최인연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보여 조언과 감수를 받았겠지만 중심 내용은 박승영의 사유일 것이다.
(5) 高高天象 非唯占廣闊之名 厚厚地儀 不獨稱幽玄之號 높고 높은 하늘의 모습[天象]이 광활하다는 이름을 홀로 차지하지 않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地儀]이 깊고 그윽하다는 이름을 홀로 일컫지 않는다 : 하늘과 땅이 베푸는 은혜는 만물만사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미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늘과 땅의 품속에서 생로병사 영고성쇠를 영원히 반복한다. 경명왕 박승영의 자연관과 인생관이 함축된 구절로서 그의 깊은 사색과 통찰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색과 통찰은 철학자의 것이지 제왕의 것이 아니다. 신라 말기 삼국이 분립하여 재통일을 다투는 이 긴박한 시대에 철학자적 소양을 갖춘 이가 왕이 되어서는 개인으로나 나라로나 득 될 게 없다. 박승영이 왕이 되지 말고 학자가 되었다면 자질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917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7년 만인 924년에 이 비문을 쓰고 난 후에 훙하였고, 아우인 위응이 경애왕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4년 만인 927년에 포석정에서 견훤의 난에 시해당했으며, 김씨족 김부가 왕위를 이어 경순왕이 되었으나 9년 만인 935년에 신라를 고려 왕건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문약은 난세를 초래하고, 무강은 난세를 극복한다.
(6) 豈若 기약 : ~~와 같은. 栖 서 : 쉴, 깃들, 어성댈.
(7) 上士 : 불교 고승. 이 당시엔 승려가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학자요 선비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8) 眞人 : 승려가 아니면서 山水에서 수도하는 사람. 도교의 도인, 도사라 할 수도 있지만, 삼국유사의 ‘포산의 두 성인인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聖師와 같은 사람. 또는 자연법칙과 인생법칙을 사유하는 사람. 또는 한국 고유의 풍월도를 추구하는 사람. 924년 당시의 신라에는 불교, 도교, 유교 등 외래 사유체계와 함께 한국인 고유의 자연 숭배를 바탕으로 한 샤머니즘 형 사유체계의 맥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 사대(四大) :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물질세계로 당시에 이미 유학과 불교, 도교 등 종교와 학문을 통해 물질세계의 원리를 깊이 탐구하고 있었다. 삼단(三端) : 조심해야 할 세 가지로 문인들의 붓끝[筆端], 무인들의 칼끝[鋒端], 변설가들의 혀끝[舌端을 말하는데, 당시에 유학이 상식으로 만연하고 있었다.
(10) 선백(禪伯) : 불교 고승. 법왕(法王) : 세속의 군주.
[원문]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 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 嘗以 坐而假寐 夢得休▨ ▨後追思 因驚有娠 便以 斷其葷血 虛此身心 潛感幽靈 冀生智子 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 誕生大師 異姿贍發 神色融明 綺紈而未有童心 齠齔而▨▨佛事 聚沙成塔 摘葉獻香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拔 발 : 뺄, 뽑을 鼇 오 : 큰 자라
鰈 탑 : 가재미 접 : 넙치 驚 경 : 놀랄, 말 놀랄
葷 훈 : 냄새 나는 채소 冀 기 : 하고자 할, 바랄
贍 섬 : 넉넉할, 줄, 도울 綺 기 : 무늬 비단, 아름다울
紈 환 : 흰 깁 齠 초 : 이 갈
齔 친, 츤 : 이 갈, 어릴 摘 적 : 딸, 들쳐낼, 움직일
[음독]
대사휘심희 속성신김씨 기선 임나왕족 초박성지 매고인병 투어아국 원조흥무대왕 오산품기 접수등정 악문부이출자상정 휴무략이고부왕실 ▨▨종평이적 영안토군지인 극봉삼조 하무진한지속 고맹상 도고장로 지모송교 수운수종기한거 조야한기무귀사 비박씨 상이 좌이가매 몽득휴▨ ▨후추사 인경유신 편이 단기훈혈 허차신심 잠감유령 기생지자 이대중구년십이월십일 탄생대사 이자섬발 신색융명 기환이미유동심 초츤이▨▨불사 취사성탑 적엽헌향
[국역]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팔경역 : 왕조가 시작되어 왕손들이 번창하였으나),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와 왕자(王子) 교(喬)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어머니 박(朴)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는데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 임신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비린내 나는 음식을 끊고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기도하며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7년(853) 12월 10일에 대사를 낳으니 남다른 모습이 많았으며 얼굴빛은 부드럽고 밝았다.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에도 철부지 같은 마음이 없었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주해]
(11) 俗姓新金氏 : 흉노족 왕자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 ~ 기원전 86년) 후손들(증손 대)이 신나라(新, 8년 ~ 23년)가 멸망하자 산동성에서 한반도 동부 경주 인근으로 이주하여 김알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주김씨가 있다. 이어서 다른 후손들이 낙동강 하류 지역에 이주하여 6가야를 형성하여 김해김씨를 형성했다. 이 시대는 김알지 계림신화 65년과 김수로왕 신화 42년과 비슷한 연대이다. 두 부족 다 황금을 숭상하는 흉노족 후손이기 때문에 金이란 성을 함께 사용했는데, 금관가야국 왕이 항복하면서 경주김씨와 구별하여 신김씨라고 하였다. 후일에 경주와 김해로 분관하였다.
그런데 이 흉노족을 우리 민족과 별개의 민족으로 봐선 안 된다. 기원 전후부터 형성된 한반도의 소국들은 알타이산맥, 몽골, 카스피해 등 서북방에서 온 씨, 부족들과 시베리아, 북만주, 연해주 등 동북방에서 온 씨, 부족들이 연합한 생활공동체이다. 넓게 보면 모두 흉노족이다. 경주김씨와 김해김씨는 몽골과 산동성 지역에서 살다가 몇 세기 늦게 한반도에 도착한 흉노족이다. 혈연이 한 뿌리이고, 말과 생김새가 같기 때문에 큰 전쟁 없이 서로 융합할 수 있었다.
신라가 532년에 금관가야로부터 항복을 받아 그 왕족을 신라 귀족으로 편입하고, 이어서 순차로 나머지 가야 소국들로부터 항복을 받음으로써 100여 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삼국통일을 도모하는 데 큰 자신이 되었다. 반대로 562년에는 끝까지 저항하는 경북 고령 일대의 대가야를 무참하게 도륙함으로써 복종의 기강을 세웠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쉽게 항복한 이유는, 김수로계 김해김씨 왕족과 김알지계 경주김씨 왕족은 김일제계 흉노족 김씨로서 뿌리가 같고, 거의 같은 시대에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망하자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와서 경주와 낙동강 유역에 각각 정착했기 때문이다. 금관가야계 왕족의 성이 김씨이기 때문에 통합되고 난 후에 신라 왕족의 성과 구별하기 위해 ’신김씨‘라고 하였다. 금관가야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이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고 대승하여 백제의 군세를 꺾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였으며, 668년 증손자인 김유신이 태대각간으로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密陽朴氏世譜上』에 보면 남해왕(4년~23년)의 비 운제왕후가 김씨이고 아우 朴忒의 配도 김씨이다. 또 한 유리왕(24년~57년)의 비 명선왕후가 김씨이다. 이것은 新나라가 쇠약해지고 망하자 철제무기로 무장한 김씨족이 고구려와 백제를 피해 만만한 서라벌 땅으로 들어왔고, 살생을 염려한 박씨족 왕 남해왕과 유리왕이 혼인동맹을 통해 왕권을 지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김알지의 탄생 이전에 이미 초기 신라 왕실과 경주김씨 세력 간에 타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타협의 바탕에는 같은 흉노족 또는 몽골조, 북방이주민이라는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다.
김알지가 65년에 계림의 금궤에서 탄생하고, 뚜렷한 이유 없이 석탈해왕의 수양아들이 되고, 왕의 신임을 받아 국상이 되는 것은 김 씨 세력이 신화 창조 작업과 왕권 장악 작업 개시한 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김씨족은 자기들의 조상이 무력을 기반으로 한 집단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박혁거세와 김수로왕의 신화를
차용하여 계림신화를 꾸몄다. 김알지 신화가 허구인 것을 『密陽朴氏世譜上』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성씨든 이제 신화가 아니라 사실을 근거로 하여 족보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나의 조상인 밀양박씨에게도 해당한다. 박혁거세 신화가 기원전 57년에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은 그보다 500년 전에 공자 등 제자백가가 세상을 횡행하면서 학문을 전파하였다. 이미 천여 년 전에 수십만 군사들이 철제 무기를 들고 벌이는 전쟁이 대륙에 빈번하였다. 그런데도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오고, 김수로왕과 아우들이 함에 든 알에서 나왔으며, 김알지가 항금 궤짝 안에서 옥동자로 나왔다는 신화를 그대로 믿고 주장하는 것은 중국에 대하여 “우리는 5백 년이나 뒤진 미개한 문명이요”라는 고백밖에 안 된다.
(12) 任那 : 고대 한반도에 있던 정치체로 그 실체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자료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드문데, 본 비문과 강수(强首)가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임을 전하는 『삼국사기』 열전, 광개토왕이 왜(倭)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러 보낸 군대가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을 함락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광개토왕릉비」 등이 있다. 반면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자료에는 임나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이외의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의 『한원(翰苑)』에는 임나가 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나라로 언급되고 있다. 본 비문의 내용은 임나가 본래 김해에 있던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의 유력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국가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이 진경대사비문이 만들어진 때가 924년으로서 임나란 명칭이 「광개토왕릉비」에 쓰이고서 약 500여 년 후이다.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등의 명칭은 편의적으로 붙인 것이고, 김수로왕 전설이 만들어진 서기 42년부터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까지 불린 낙동강 중하류 유역과 한반도 동남부 해안의 가야계 소국들의 명칭은 다양하다. 이 비문을 근거로 하면 임나가 곧 김유신 장군의 고국인 금관가야이다.
당시의 사실에 가장 가까운 사료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이다. 그 비에 각자된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을 보면 낙동강 하류 지역의 소국들이 <가야 伽耶>로 불린 때는 400년 이후인 것 같고, 그 이전까지는 <가라 加羅>로 불렸을 것이다. ’임나가라‘와 같이 앞에는 각 지역명이 있고 ’가라‘가 공통으로 붙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태종무열왕 때의 강수(强首)가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강수(强首)가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임을 전하는 『삼국사기』 열전은 오류일 수 있다. 맞다면 충주가 임나가량(任那加良)이 되어 <임나>가 충주 지역이 된다. 이 진경대사비문과는 상반된다. 그럼에도 위 [국가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자료는 『삼국사기』 열전을 검증 없이 인용하고 있다.
이어서 ’중국의 『한원(翰苑)』에는 임나가 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나라로 언급되고 있다‘고 인용하는데, 중국의 사료라고 하여 전부 믿을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이 현장에 와서 직접 보고 들은 자료가 아니라 바다 건너 수천 리 밖에서 전해오는 풍문으로 들은 것을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한원(翰苑)』은 ’임나‘와 ’‘가야’가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공통 명칭임을 모르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경대사비문에 뚜렷이 새겨진 글자대로 임나가 금관가야이므로,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자료에서 임나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 이외의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오류이다. 오류가 아니라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만든 위작이다. 『일본서기』의 주장대로 임나가 가야 지역 전체라면, 가야국들의 왕이 일왕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인데, 물론 왜가 침략하여 가야 지역 전체나 일부를 일정 기간 지배했을 수도 있다.
그 사례가 「광개토왕릉비」의 <임나가라 종발성>이다. 대규모로 침략한 왜구가 금관가야 영토의 동쪽 일부인 동래 지역의 종발성을 점령하여 신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곧 고구려군에게 쫓겨 종발성이 함락되고, 왜구는 일본 열도로 철수하였다. 이렇듯 점령 기간이 길어도 불과 몇 년 동안이었지 수십 년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과장하여 가야 지역 전체를 장기간 지배했으므로 기득권을 가지고, 그 기득권을 후세에 이어받아 한반도를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망발이 아닐 수 없다.
(13) 草拔聖枝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 임나의 왕족[任那王族]과 초발의 신성한 후예[草拔聖枝]가 대구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초발은 금관국의 시조와 관련되는 이름으로 생각된다. [한국고대사료DB]
아니다 한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이 틀렸다. ’草拔聖枝‘를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草拔‘은 임나왕족이 아니라 ’풀이 돋아난다‘, 즉 ’왕조가 시작되다‘의 뜻이다. 이어서 ’聖枝‘는 ’성스러운 자손들, 즉 왕손이 가지를 치듯이 뻗어나가다“의 뜻이다. ‘왕조가 시작되어 왕손들이 번창하였으나’라 읽어야 한다.
(14) 흥무대왕(興武大王) :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가리킨다. 흥덕왕(興德 王, 재위 826~836) 때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532년 신라에 투항한 임나-금관가야-금관국 구형왕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유신은 진경대사의 중시조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15) 오산(鼇山) : 큰 자라의 등에 얹혀 있다는 바다 가운데의 산으로, 동해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16) 접수(鰈水) : 가자미[鰈]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쪽 바다를 가리킨다(『이아(爾雅)』 석지(釋地) “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
(17) 문부(文符) : 훌륭한 문장을 가리킨다. 『시품(詩品)』 총론(總論) “若乃經國文符, 應資博古, 撰德駁奏, 宜窮往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18) 토군(兎郡) : 한(漢)이 고조선 지역에 설치한 사군(四郡)의 하나인 현도군(玄兎郡). 후대에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19) 진한(辰韓) : 삼한(三韓)의 하나로 고대 한반도 동남쪽에 있던 정치체. 여기에서는 신라를 가리킨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20) 적송자(赤松子) : 신농씨(神農氏) 때 비를 관장하는 우사(雨師)를 맡았다가, 나중에 곤륜산에 들어가 적송(赤松)의 송지(松脂)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21) 왕자(王子) 교(喬) : 주(周)나라 영왕(靈王, 재위 B.C. 571~B.C. 545)의 아들로 왕에게 간언했다 서인으로 강등되자 퉁소를 불며 방랑하다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에 들어가 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22) 대중(大中) : 당나라 선종(宣宗)의 연호로 847년에서 860년까지 사용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원문]
年九歲 徑往惠目山 謁圓鑒大師 大師-知有惠牙 許栖祇樹 歲年雖少 心意尙精 勤勞則高鳳推功 敏捷則揚烏讓美 俾踐僧▨ ▨離法堂 咸通九年 先大師寢疾 乃召大師云 此法 本自西天 東來中國 一花啓發 六葉敷榮 歷代相承 不令斷絶 我曩遊中土 曾事百巖 百嵒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 南岳則漕溪之冢子 是嵩嶺之玄孫 雖信衣不傳 而心印相授 遠嗣如來之敎 長開迦葉之宗 汝傳以心燈 吾付爲法信 寂然無語 因▨▨洹 大師-目訣悲深 心喪懇切 尤積亡師之慟 實增絶學之憂
十有九 受具足戒 旣而 草繫興懷 蓬飄託跡 何勞跋涉 卽事巡遊 訪名山而仰止高山 探▨▨而終尋絶境 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 遍謁玄關 而巡歷他方 須參碩彦 大師答云 自達摩付法 惠可傳心 禪宗所以東流 學者何由西去 貧道 已▨▨目 方接芳塵 豈將捨筏之心 猶軫乘桴之志 文德初歲 乾寧末年 先宴坐於松溪 學人雨聚 暫栖遲於雪嶽 禪客風馳 何往不臧 曷維其已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徑 경 : 지름길, 빠를, 곧을 謁 알 : 뵈올, 아뢸
鑒 감 : 거울, 본뜰, 경계할, 밝을, 비칠 栖 서 : 쉴, 새, 깃들일,
祇 기 : 편안할, 지신 地神, 클 지 : 공경할, 다만, 마침
尙 상 : 높일, 주장할, 귀할, 숭상할, 아름다울, 자랑할, 더할, 꾸밀, 배필
精 정 : 정할, 정기, 정신, 세밀할, 깨끗할, 밝을, 익숙할, 정령, 가릴
俾 비 : 더하다, 시키다, 좇다, 하여금, 유익할, 踐 천 : 밟을
敷 부 : 펼, 베풀, 흩을 曩 낭 : 지난번, 기왕(저즘께), 아래, 오래
嵒 암 : 바위, 산 우뚝할, 석굴 冢 총 : 클, 맏, 산꼭대기
嵩 숭 : 높을 洹 원 : 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 성하다, 흐를
繫 계 : 맬, 얽을, 약속할, 맺을, 이을 軫 진 : 수레뒤턱나무
桴 부 : 떼, 집마룻대 臧 장 : 착할, 두터울, 숨길 曷 갈 : 어찌
[음독]
년구세 경왕혜목산 알원감대사 대사 지유혜아 허서기수 세년수소 심의상정 근로즉고봉추공 민첩즉양오양미 비천승▨ ▨이법당 함통구년 선대사침질 내소대사운 차법 본자서천 동래중국 일화계발 육엽부영 역대상승 불령단절 아낭유중토 증사백암 백암승사어▨▨ 강서계명어남악 남악즉조계지총자 시숭령지현손 수신의불전 이심인상수 원사여래지교 장개가섭지종 여전이심등 오부위법신 적연무어 인▨▨원 대사목결비심 심상간절 우적망사지통 실증절학지우
십유구 수구족계 기이 초계흥회봉표탁적하로발섭 즉사순유 방명산이앙지고산 탐▨▨이종심절경 혹문왈 대사수비유차토 편알현관 이순력타방 수참석언 대사답운 자달마부법 혜가전심 선종소이동류 학자하유서거 빈도 이▨▨목 방법방진 기장사벌지심 유진승부지지 문덕초세 건령말년 선연좌어송계 학인우취 잠서지어설악 선객풍치 하왕불장 갈유기이
[국역]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나아가 원감대사(圓鑑大師)를 뵈니, 〈원감〉대사는 〈진경대사에게〉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나이는 비록 적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밀함을 숭상하였으니(마음과 뜻이 높고 밝았으니), 노력함에 있어서는 고봉(高鳳)이 공을 미루고(고봉보다 공이 크고, 독서를 열심히 하였고) 민첩함에 있어서는 양오(揚烏)가 명성을 양보할 정도였다. 승▨를 맡아 법당을 떠나지 않았다.
(16세인) 함통(咸通) 9년(868)에 원감대사는 병이 들어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에서 동쪽의 중국으로 왔으며, 한번 꽃이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고, 대대로 이어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내가 과거에 중국에 유학하여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계승하였는데,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맏아들로 숭령(嵩嶺)의 현손이시다. 비록 신의(信衣)는 전하지 않으나 심인(心印)은 이어받았으니,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크게 열었다. 너에게 마음의 등불로 전하니 나의 부촉을 법신(法信)으로 삼으라.” 하고서, 고요히 말을 마치고 곧 열반[泥洹]에 들었다. 대사는 임종을 지키며 깊이 슬퍼하고 심상(心喪)을 간절하게 하였는데,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욱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더욱 늘었다.
19세에(871년)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서 얼마 후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을 가슴에 품고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일을 따라 두루 돌아다녔다. 명산에 가서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을 찾아가 절경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관(玄關)을 모두 찾아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큰 스님들을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찾아뵙고 아름다운 자취를 접하였는데,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을 가지고 뗏목을 타려는 뜻을 좇으리오”라고 하였다.
문덕(文德)(888년) 초년부터 건녕(乾寧)(898년)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註에서 수행하자, 학인들이 빗방울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雪嶽)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좋지 않으며, 어찌 오직 그곳뿐이겠는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주해]
(23) 혜목산(惠目山) : 경기도 여주시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여기에서는 이 산에 있던 고달사(高達寺)를 가리킨다. 신라 말에 원감대사(圓鑑大師)가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이곳에 머무르며 선법(禪法)을 널리 폈으며, 그의 문도들이 머물러 고려 초 광종 때에는 3대 선원(禪院)의 하나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으며 진경대사의 제자인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 869~958)의 탑과 탑비의 귀부(龜趺)·이수(螭首), 원감국사의 탑으로 전하는 부도 및 석조 불상좌대 등이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24) 원감대사(圓鑑大師) : 신라 말의 대표적 선승인 현욱(玄昱, 787~868). 속성은 김씨이며 828년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로부터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지리산 실상사(實相寺)에 머물며 왕실과 지방세력가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경문왕의 요청으로 혜목산으로 옮겨 선법을 폈다. 후대에 봉림산파의 개조로 추앙되었다. 『조당집(祖堂集)』 권17 「동국혜목산화상(東國慧目山和尙)」에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25) 절[祇樹] : ‘기수(祇樹)’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줄임말로 사찰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생전에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기타(祇陀) 태자의 원림(園林)을 사려 하자 태자는 그 값으로 원림 바닥 전체를 덮을 금을 요구하였다. 나중에 석가모니에게 기진하기 위한 것을 안 태자가 원림의 나무를 기증하여 “기타의 나무와 급고독의 원림”이라는 뜻의 ‘기수급고독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정사(祇園精舍) 혹은 기원(祇園)이라고도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26) 고봉(高鳳) : 중국 후한(後漢)의 유학자. 어려서부터 배움에 심취하였고, 밤낮 쉬지 않고 독서하여 마침내 명유(名儒)가 되었다. 부인이 밭에 가면서 보리를 뜰에 널어놓고 닭을 쫓으라고 부탁하였는데, 책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 때마침 내린 비에 보리가 다 떠내려가도 알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서당산(西唐山)에서 제자를 가르쳤으며,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둔하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첨언] 고봉에 비유한 걸 보니 선보다 교를 위주로 하여 불경을 많이 공부한 듯하다. 그러나 스승인 원감대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개조로 추앙받았다.
(27) 양오(揚烏) : 한나라 양웅(揚雄, B.C. 53~A.D. 18)의 아들로 일곱 살 때부터 문장에 뛰어나 신동으로 명성을 날렸다. 불행히 아홉 살에 요절하였다.
[첨언] 양오에 비유한 걸 보니 아홉 살에서 열 두세 살까지를 말한다. 박승영이 후한의 고봉과 양오의 고사를 인용한 것을 보면, 924년경의 신라 사회에는 정통 유학에 곁들여 다양한 고사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명왕 박승영이 지은 이 비문에 쓰인 언어와 개념을 보면, 비록 외형적인 국세는 서서히 기울어져 가고 있지만 내면에는 고도로 발전한 신라문화가 맥맥히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문화가 고려로 전수되어, 일개 장수인 왕건이 세운 고려가 야만의 늪에서 벗어나 문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28) 俾踐僧▨, ▨離法堂 (비천승▨, ▨이법당) : 이 구절은 어린 사미승 (沙彌僧) 시절의 모습이다. ‘俾踐’이란 ‘시키는 대로 실천하다’이며 법당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역할이다, 9살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고봉처럼 공부하고 양오처럼 시키는 대로 민첩하게 행동한 어린 사미승 진경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俾踐僧▨ ▨離法堂’에서 결락한 첫 글자는 ‘중의 일’ 또는 “중의 역할, 소임‘을 나타내는 ‘業. 任, 務, 事, 律, 規’ 중에서 한 자일 것이고, 둘째 글자는 ‘법당에서 떠나지 않았다’, 즉 법당 청소와 관리가 임무이므로 ‘不’ 자일 것이다.
앞의 글에서 대사의 태몽이 신비하고, 이를 갈 나이에는 불사(佛事)를 하고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었으며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는 미사여구로 승려가 되는 것을 운명으로 표현했으나, 임나 왕족인 신김씨의 후예로서 본거지인 김해 지역이 아니라 아주 먼 경기도 여주에 있는 혜목사 고달사에 9살 나이로 입산한 걸 보면, 이미 오래전에 조상이 김해를 떠나 여주 지역에 이주하였으며, ‘綺紈而未有童心 비단 바지를 입던 어린 시절’은 분식문(粉飾文)일 뿐이고, 사실은 조실부모한 고아였을 것이다. (29) 서천(西天) : 인도
(30) 백암(百巖) : 원감대사의 스승인 장경회휘(章敬懷暉, 765~815). 속성은 사(謝)씨이며 천주(泉州) 동안(同安) 출신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심인(心印)을 얻었고, 808년 헌종(憲宗)의 명령으로 장경사(章敬寺) 비로사나원(毗盧舍那院)에 주석하였다. 이후 학도와 명사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이었다. 당의 권덕여(權德輿)가 지은 비문(『융흥편년통론(隆興編年通論)』 권22 수록)이 전하고,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전등록(傳燈錄)』에도 전기가 실려 있다.
(31) 강서(江西) :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을 가리킨다. 마조도일은 ‘즉심시불(卽心是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을 주창하였으며, 선(禪)의 일상화에 기여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계승한 선의 계통을 홍주종(洪州宗) 또는 강서종(江西宗)이라고 하며 조사선(祖師禪)의 개창자로 추앙된다. 속성이 마(馬)씨여서 마조(馬祖)로 일컬어진다.
(32) 남악(南嶽) : 마조도일의 스승인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속성은 두(杜)씨이고 산동성 출신이다. 육조 혜능(慧能)의 대표적 제자이다.
(33) 조계(曺溪) :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인 혜능(慧能, 638~713)을 가리킨다. 광동성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조계혜능으로 불리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중국 선종의 기본적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34) 숭령(嵩嶺) : 달마대사가 머물며 수행한 낙양(洛陽) 북쪽의 숭산(嵩山). 여기서는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菩提達磨)를 가리킨다. 숭산의 한 자락인 소실산(少室山) 북쪽에서 있는 소림사(小林寺)에서 보리달마가 9년간 면벽 수행을 하였다고 전한다.
(35) 신의(信衣) : 초기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계자에게 스승이 상징물로 옷과 발우을 주는 전통이 있었다 하는데, 그때 전한 옷을 신의(信衣)라고 한다.
(36) 심인(心印) : 선종에서는 문자와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자기 마음을 깨달을 것을 주장하며, 스승에서 제자로의 법의 계승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주장한다. 제자가 깨달았을 때 스승이 마음으로 이를 인가해주는 것을 심인(心印)이라고 하며 그것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옷과 발우[衣鉢]를 전해준다고 한다.
(37) 심상(心喪) :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제자가 지키는 상(喪). 상복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애도하므로 심상(心喪)이라고 한다.
(38) 구족계(具足戒) : 불교 교단에 출가하여 예비 승려[남성은 사미(沙彌), 여성은 사미니(沙彌尼)] 신분을 갖춘 사람이 일정한 절차를 걸쳐 교단의 정식 승려[남성은 비구(比丘), 여성은 비구니(比丘尼)]가 될 때에 받는 계율. 계율의 내용은 비구 250계, 비구니는 348계로 구성되어 있다.
(39) 계율을 지키는 마음[草繫] : 원문 ‘초계(草繫)’는 길을 가다 도적을 만나 풀에 묶였음에도 풀이 상할까 염려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초계비구(草繫比丘)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로,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마음을 의미한다.
(40) 현관(玄關) : 깊고 오묘한 이치에 들어가는 관문. 여기에서는 깊은 지혜를 갖춘 승려들을 가리킨다.
(41) 혜가(惠可) : 선종의 제2조(487~593). 속성은 희(姬)이고 본래 이름은 신광(神光)이었다. 40세 때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로 보리달마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달마는 처음 가르침을 전하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혜가가 자신의 팔을 잘라서 법을 구하려는 절실한 마음을 드러내자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는 안심문답(安心問答)을 통해 깨달았다고 전한다.
(42) 혜목(惠目) : 혜목산에서 수행하던 원감대사을 가리킨다.
(43) 뗏목을 버린 마음[捨筏之心] :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다음에는 뗏목을 버려야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수단이나 형식적인 절차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44) 송계(松溪) :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 자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선원(松溪禪院)을 가리킨다. 진경대사의 제자인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의 탑비에 의하면 찬유는 890년에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나서 진경대사가 옮겨 간 송계선원으로 가서 수행하다가 892년에 중국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年二十二, 受具於楊州三角山莊義寺. 於是忍草抽芽之後, 戒珠瑩色之初, 尙以問道忘疲, 尋師靡懈. 時本師迻住光州松溪禪院. 大師遠携筇杖, 特詣松溪, ▨▨▨▨素衷, 謝鑄顏之玄造. … 景福元年春, 適有商舶入漢者, 遂寄載而西.”.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원문]
眞聖大王-遽飛睿札 徵赴彤庭 大師 雖猥奉王言 而寧隳祖業 以脩途多梗附表固辭 可謂 天外鶴聲 早達於雞林之畔 人中龍德 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 欻離雲水 投溟州而駐足 託山寺以栖心 千里乂安 一方蘇息 無何 遠聞金海西有福林 忽別此山 言歸南界 及乎達於進禮 暫以踟躕 爰有▨▨進禮城諸軍事金律凞 慕道情深 聞風志切 候於境外 迎入城中 仍葺精廬 諮留法軑 猶如孤兒 之逢慈父 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 特遣政法大德如奐 逈降綸言 遙祈法力 佐紫泥而兼送薰鉢 憑專介而俾披信心 其國主歸依 時人敬仰 皆此類也 豈惟肉身菩薩 遠蒙聖▨▨尊 靑眼律師 頻感群賢之重而已哉 此寺 雖地連山脈 而門倚墻根 大師 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驎遊西岫 梟唳舊墟 豈謂 果宜大士之情 深愜神人▨▨ 所以 刱修茅舍 方止葼輿 改號鳳林 重開禪宇 先是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 鯉庭禀訓 龍闕馳誠 歸仰禪門 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 高演玄宗 廣揚佛道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遽 거 : 급할, 창졸, 역말수레 睿 예 : 지혜스러울, 통달할
徵 징 : 부를, 구할 赴 부 : 달릴, 다달을 彤 동 : 붉을, 칠할
寧 녕 : 어찌, 居喪할, 편안할, 차라리, 문안 隳 휴 : 무너질
脩 수 : 닦을, 공경할, 길 長 途 도 : 길 梗 경 : 막힐, 해로울
畔 반 : 밭두덕, 가 邊, 곱 邀 요 : 맞을, 구할, 부를
炎+欠 홀 : 홀연 忽, 급히 일어날, 움직일, 빠를
乂 예 : 다스릴, 정리할, 어질, 풀밸 蘇 소 : 깨어날
踟 지 : 머뭇거릴 躕 주 : 머뭇거릴 爰 원 : 이에
仍 잉 : 인할, 거듭, 후손, 그대로, 실망한 모양, 7대손
葺 즙 : 지붕 이을, 기울, 수집할 廬 려 : 풀집, 농막
諮 자 : 물을 꾀 軑 대 : 바퀴통감기 毉 의 : 의원 醫
逈 형 : 멀 형 佐 좌 : 도울 憑 빙 : 기댈, 의지할, 부탁할
俾 비 ; 하여금, 유익할 蒙 몽 : 받다, 입다, 어릴
麟 린 : 얼룩말 山由 = 峀 수 : 산구멍, 바위구멍
唳 려 : 울, 새소리, 학이 울다 愜 협 : 뜻에 맞을, 쾌할
刱 창, 비롯할, 만들 葼 종 : 가늘다, 나무휘추리
鯉 리 : 잉어, 서찰, 편지 憐 련 : 사랑할, 불쌍할, 가련할
演 연 : 멀리 흐르다, 통하다, 윤택할, 넓을
[음독]
진성대왕 거비예찰 징부동정 대사 수외봉왕언 이녕휴조업 이수도다경 부표고사 가위 천외학성 조달어계림지반 인중용덕 난요어상궐지방 ▨▨인피연진 홀리운수 투명주이주족 탁산사이서심 천리예안 일방소식 무하 원문김해서유복림 홀별차산 언귀남계 내호달어진례 잠이지주 원유▨▨진례성제군사김율희 모도정심 문풍지절 후어경외 영입성중 잉즙정려 자류법대 유여고아지봉자부 중병지우의왕 효공대왕 특견정법대덕여환 형강윤언 요기법력 좌자니이겸훈발 빙전개이비피신심 기국주귀의 시인경앙 개차류야 기유육신보살 원몽성▨▨존 청안율사 번감군현지중이이재 차사 수지연산맥 이문기장근 대사 이수석탐기 연하선승 린유서수 효려구허 기위
과의대사지정 심협신인▨▨ 소이 창수모사 방지종여 개호봉림 중개선우 선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김인광 리정품훈 용궐치성 귀앙선문 조수보소 대사심련▨▨ 의유종언 고연현종 광양불도
[국역]
진성대왕(眞聖大王)께서 급히 편지를 보내 궁궐[彤庭]으로 오라고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받듦에는 외람되지만 조사(祖師)들의 업(業)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나아갈 길이 많이 막혔다는 이유로(아직 공부할 게 많이 막혔다, 달통하지 못했다. 법력이 부족하다. 38세~44세 사이) 표(表)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가히 하늘 밖 학(鶴)의 소리가 계림(鷄林)의 경계에 일찍 닿았지만, 인간세계에서 용(龍)의 덕을 갖춘 사람을 대궐 문[象闕] 곁으로 부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대사?]는 이로 인해 연기와 먼지[煙塵]를 피하여 홀연히 〈설악을〉 떠나 떠돌다가[雲水] 명주(溟州)에서 발길을 멈추고 산사에 머물며 마음을 깃들였다. 〈이에 명주 지역〉 1,000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역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곧바로 이 산을 떠나 남쪽 경계로 갔다.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물렀는데,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凞)가 〈대사의〉 도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가르침을 들으려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마중하여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절을 수리하고 대사의 수레를 이곳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고 병자가 훌륭한 의사[毉王]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께서는 특별히 정법대덕(政法大德) 여환(如奐)을 보내 멀리서 조서를 내리며 법력을 빌었는데, 조서[紫泥]와 함께 향기로운 발우를 선물하였으며, 특별 사자[專介]를 보내 〈대왕의〉 신심(信心)을 전하였다. 나라의 임금이 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와 같았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멀리서 성▨(聖▨)의 존경을 받고, 청안율사(靑眼律師)가 여러 현자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은 정도뿐이겠는가.
〈김율희가 수리한〉 이 절은 비록 땅이 산맥과 이어지고 문은 담장 밑[墻根]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대사는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골짜기의〉 아지랑이가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것 같아서 바로 보살[大士]의 뜻에 마땅하고 신인(神人)의 ▨▨에 깊이 부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띠 집을 새로 수리하고 수레를 멈추어 머무르며 봉림(鳳林)으로 이름을 바꾸어 선문[禪宇]을 새로 열었다. 이에 앞서 지김해부(知金海府)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명의장군(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집[鯉庭]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서는 〈임금께〉 정성을 다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문에 귀의하여 〈대사를〉 받들며 사찰[寶所]의 수리를 도왔다. 대사는 마음속에 ▨▨을 가련히 여겨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뜻을 가지고서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주해]
(45) 진성대왕(眞聖大王) : 신라 제51대 임금으로 재위는 887~897년. 이름은 만(曼)이며 경문왕(景文王)의 딸이자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의 누이이다. 897년 6월 헌강왕의 아들인 효공왕(孝恭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거하다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46) 天外鶴聲 : ‘天外鶴聲’은 당나라 시인 이신(李紳)이 지은 「화정시(華頂詩)」 중에 “天外鶴聲隨絳節 洞中雲氣隱琅玕”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세상 바깥에 은거하는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킨다.
(47) 因避煙塵 연기와 먼지를 피하여 : 전쟁으로 인한 연기와 먼지의 의미로 후삼국 시기의 전란을 의미한다. 당시는 후삼국 시대였다.
(48) 명주(溟州) : 강원도 강릉의 옛 이름.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으로 신라에서는 하슬라(何瑟羅)로 불리다가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로 개칭하였다.
(49) 진례(進禮)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지역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토월동과 김해시 진례면의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에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인 진례산성이 남아 있다.
(50) 김율희(金律凞) : 신라 하대 김해지방의 호족으로 자료에 따라 ‘소율희(蘇律熙)’로도 나온다.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에는 효공왕 11년(907)에 당시 김해부지부(金海府知府)인 소충자(蘇忠子)의 동생으로서 김해지방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며, 「광조사진철대사탑비(廣照寺眞澈大師塔碑)」에는 동왕 15년(911) 무렵에 이미 소충자의 뒤를 이어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로서 김해 일원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는 많은 선승들을 후원하였으며, 진경대사를 비롯하여 낭공대사 행적(行寂), 진철대사 이엄(利嚴), 진공대사 충담(忠湛) 등이 그가 세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김해 지방에서 선문을 개창하고 활약하였다.
(51) 효공대왕(孝恭大王) : 신라 제52대 임금으로 재위는 897~912년. 헌강왕(憲康王)의 서자로 이름은 요(嶢)이다. 고모인 진성왕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52) 정법대덕(政法大德) : 승려들의 명부와 인사를 관리하는 정법전(政法典)의 일을 맡아 하는 승려. 정법전은 정관(政官)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직관지에서는 승려들에 대한 관리는 처음에는 일반 관리인 대사(大舍)와 사(史) 등이 담당하다가 원성왕 (元聖王) 때에 비로소 승려 중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 “政官 或云政法典. 始以大舎一人·史二人爲司, 至元聖王元年, 初置僧官, 簡僧中有才行者, 充之. 有故則遆, 無定年限.”). 하지만 국통(國統)을 보좌하는 승려로서 정관(政官)의 대서성(大書省)은 이미 진흥왕 때부터 임명된 사례가 보이고 있다(『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 “大書省一人, 眞興王以安臧法師爲之.”).
(53) 조서[紫泥] : 중국에서 천자의 조서를 봉할 때에 붉은 색 진흙을 인주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 말로 황제나 국왕의 조서를 의미한다.
(54) 육신보살(肉身菩薩) : 살아 있는 몸으로 보살의 경지에 오른 고승으로 일반적으로는 선종의 제6조인 혜능대사를 가리킨다. 혜능은 측천무후와 중종(中宗)로부터 궁중에 와서 설법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황실은 혜능을 위해 그가 머무는 사찰에 여러 우대조치를 취해주었다고 전한다.
(55) 청안율사(靑眼律師) : 계빈국(罽賓國) 출신의 승려 비마라차(卑摩羅叉)를 가리킨다. 무구안(無垢眼)으로도 번역된다. 불교 계율에 밝아 사방의 학자들이 찾아와 사사하였으며, 그가 구자(龜玆)에서 가르칠 때에 구마라집(鳩摩羅什)도 와서 배웠다. 406년 중국에 이르렀는데, 그에 앞서 중국에 와 있던 구마라집이 스승의 예로서 존경하였다. 구마라집 사후에는 수춘(壽春) 지역의 석간사(石澗寺)에 머무르면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율(十誦律)』 58권을 교정하여 61권으로 하였다. 이후 강릉(江陵) 지역의 신사(辛寺)에서 『십송율』을 강의하며 계율의 홍포(弘布)에 주력하다가 다시 석간사로 돌아와 머물다 입적하였다.
(56) 김인광(金仁匡) : 신라 하대 김해지방의 호족.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비문의 내용으로 볼 때 소충자와 소율희 형제 이후에 김해 방의 실권을 장악하였던 인물로 생각된다.
(57) 鯉庭禀訓 : 공자의 아들인 이(鯉)가 집안의 뜰에서 공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가정에서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원문]
寡人, 祇膺丕構, 嗣統洪基, 欲資安·遠之風, 期致禹·湯之運. 聞大師-時尊天下, 獨步海隅, 久栖北岳之陰, 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 卑辭厚禮, 至切嘉招. 大師謂衆云, “雖在深山, 屬於率土. 況因付囑, 難拒王臣.” 貞明四年冬十月, 忽出松門, 屆于▨輦. 至十一月四日, 寡人, 整其冕服, 稍淨襟懷, 延入蘂宮, 敬邀蘭殿, 特表師資之禮, 恭申鑽仰之儀. 大師, 高拂毳衣, 直昇繩榻, 說理國安民之術, 敷歸僧▨▨之方. 寡人, 喜仰慈顔, 親聞妙旨, 感激而重重避席, 忻歡而一一書紳. 此日, 隨大師上殿者, 八十人, 徒中有上足景質禪師, 仰扣鍾鳴, 潛廻鏡智. 大師, ▨▨橦擊, 聲在舂容, 曉日之暎群山, 淸風之和萬籟, 縱容演法, 偏超空有之邊, 慷慨譚禪, 實出境塵之表, 莫知其極, 誰識其端. 翌日, 遂命百寮, 詣於所止, 同列稱▨, 仍差高品, 上尊號曰, 法膺大師. 此則盡爲師表, 常仰德尊, 恭著鴻名, 以光玄敎.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祗 기 : 지신 地神, 편안할, 클, 지 : 공경할, 다만, 마침
膺 응 : 받을, 가슴, 당할, 가까울 丕 비 : 클, 으뜸, 첫째
屆 계 : 이를, 극진할 輦 연 : 연, 당겨 운전할
稍 초 : 점점, 적을, 작을 고를 蘂 예 : 꽃술,
邀 요 : 맞을 구할, 부를 鑽 찬 : 뚫을, 송곳
拂 불 : 떨칠 毳 취 : 짐승의 가는 털, 부드럽고 아름다울
繩 승 : 줄, 새끼 먹줄, 법도 榻 탑 : 자리, 긴 상
敷 부 : 베풀, 펼 忻 흔 : 기쁠
紳 신 : 큰 띠, 예복, 다발로 묶다 扣 구 : 두드릴
橦 동 : 북소리, 공격하다, 찌르다 깃대
舂 용 : 찧다, 절구질하다, 쇠북소리 暎 영 : 비치다 비추다
籟 뢰 : 피리 譚 담 : 클, 말씀, 나타날, 편안할
詣 예 : 이를, 나아갈, 학업 깊이 들어갈
[음독]
과인 기응비구 사통홍기 욕자안원지풍 기치우탕지운 문대사시존천하 독보해우 구서북악지음 잠수동산지법 ▨▨흥륜사상좌석언림중사성내양김문식 비사후례 지절가초 대사위중운 수재심산 속어솔토 항인부촉 난거왕명 정명사년동십월 홀출송문 계우▨련 지십일월사일 과인 정기면복 초정금회 연입예궁 경요난전 특표사자지례 공신찬앙지의 대사 고불취의 직승승탑 설이국안민지설 부귀승▨▨지방 과인 희앙자안 친문묘지 감격이중중피석 흔환이일일서신 차일 수대사상전자 팔십인 도중유상족경질선사 앙구종명 잠회경지 대사 ▨▨동격 성재용용 효일지영군산 청풍지화만뢰
종용연법 편초공유지변 강개담선 실출경진지표 막지기극 유식기단 익일 수명백료 예어소지 동렬칭▨(第子) 잉차고품 상존호왈 법응대사 차즉진위사표 상앙덕존 공저홍명 이광현교
[국역]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아 〈왕조의〉 큰 기틀을 계승함에, 도안(道安)과 혜원(慧遠)의 기풍을 돕고, 우(禹)와 탕(湯)의 다스림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가 당시 천하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 신라)에서 독보적 존재로서 북악(北岳 설악산)의 북쪽에 오래 머무르며 동산(東山)의 가르침을 은밀히 전수했다는 것을 듣고서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에 있지만 임금의 땅[率土]에 속한다. 더욱이 〈부처님의〉 부촉(付囑)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절 문[松門]을 나서 수도에 이르렀다.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갖추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대사를〉 왕궁[蘂宮]의 난전(蘭殿)으로 공경히 맞이하여 특별히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표하고 숭앙하는 자세를 공손히 나타내었다. 대사는 가사[毳衣]를 높이 휘날리며 곧바로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방법을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할 방책을 펼치셨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낱낱이 옷띠에 받아 적었다. 이날 대사를 따라 전각에 오른 자가 80인인데, 문도 중의 상족(上足)인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삼가 질문을 하여[扣鍾] 〈대사의〉 온전한 지혜[鏡智]를 가만히 끌어내려 하였고, 대사는 질문[橦擊]을 ▨▨함에 소리가 우렁찼다. 새벽해가 많은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이 만물의 소리에 화답하듯,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을 모두 초월하고, 분연히 선(禪)을 말씀하심에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궁극의 경지를 알겠는가.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대사가 머무시는 곳으로 나아가 함께 ▨을 칭하게 하고, 이어서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법응대사(法膺大師)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는 곧 온전히 모범[師表]이 되어 항상 존귀한 덕을 우러르며 공손히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주해]
(58) 도안(道安) : 남북조시대 초기에 전진(前秦)에서 활약한 승려(314~385). 12세에 출가하여 신이한 행적으로 유명한 서역 승려 불도징(佛圖澄)에게 배웠으며,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의 후원을 받아 불교계를 이끌었다. 얼굴이 검어서 칠도인(漆道人)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여러 경전을 수집하고 대조하여 경전 목록인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작성하였고, 경전의 번역과 해석의 원칙을 제시하고, 승려생활의 규범과 설법 형식을 마련하는 등 중국 불교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승려들이 출가 이전의 성씨를 버리고 석(釋)씨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59) 혜원(慧遠) : 중국 동진(東晉) 시대의 승려(335~417). 유학과 노장학을 공부하다가 출가하여 도안(道安) 문하에 들어가 불교를 수학하여 명성을 날렸다. 스승 도안이 전진(前秦) 황제 부견(苻堅)의 요청으로 장안에 들어가면서 독립하도록 하자, 373년 여산(廬山)에 들어가 동림사(東林寺)를 세우고 이곳에 머물며 불교 수행을 하였다. 황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아 수도에 나와 강의하도록 요청받았지만 평생 여산을 떠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한편 북중국의 장안(長安) 불교계에서 새로운 불교사상을 전파하던 구마라집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자적인 대승불교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육신과 달리 정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신불멸(神不滅)과 불교 수행자들은 세속의 권위와 법률에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문불경왕자(沙門不敬王者)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구마라집과 주고받은 서신을 정리한 『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을 비롯하여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법성론(法性論)』 등이 있다.
(60) 동산(東山) : 동산(東山)은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과 제5조 홍인(弘忍)이 머물며 수학했던 곳으로, 남종선의 시조인 혜능이 이곳에서 홍인의 법을 계승하였다. 이후 동산의 가르침은 선종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61) 흥륜사(興輪寺) : 경주 서쪽에 위치한 신라 최초의 사찰. 법흥왕 14년(527)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고, 이후 신라 불교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금당에는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10성(十聖)의 소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62) 중사성(中事省) : 신라 시대 국왕 측근의 근시기구로 국왕의 시종·문필·비서 업무를 담당하였다. 처음 세택(洗宅)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중사성(中事省)으로 고쳤는데, 혜공왕 때 세택으로 복원되었다가 9세기에 다시 중사성으로 개칭되었다. 752년에는 동궁(東宮)에도 중사성이 설치되었다. 관원은 국왕직속의 경우 대사(大舍) 8인과 종사지(從舍知) 2인, 동궁 직속의 경우 대사 4인과 종사지 2인을 두었다.(李基東,1984,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233~246쪽 참조).
(63) 내양(內養) : 중사성(中事省)에 소속되어 왕의 근시의 업무를 보던 관원. 사인(舍人) 혹은 중사인(中舍人)으로도 불렸다.
(64) 〈부처님의〉 부촉(付囑) :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면서 제자들에게 국왕의 도움을 받아 불법을 널리 펼 것을 부촉하였다고 한다.
(65) 난전(蘭殿) : 중국 남조 양(梁)나라 궁궐에 있던 전각으로 무제(武帝)가 이곳에서 보리달마를 맞이하였다고 전한다. 왕궁에서 고승을 맞이하는 전각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66) 공(空)과 유(有)의 극단[空有之邊] : 이 세상이 우리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有)의 사고방식과 이 세상 사물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허망한 것이라는 공(空)의 사고방식. 불교에서는 이러한 공과 유의 사고방식을 모두 치우친 잘못된 견해라고 비판하고 둘을 지양하는 중관(中觀)을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원문]
其後, 大師已歸舊隱, 重啓芳筵, 諭諸學於道灰, 俱傳法要, 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 忽患微痾, 猶多羸色, 大衆疑入兩楹之夢, 預含雙樹之悲. 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 告衆曰, “諸法皆空, 萬緣俱寂. 言其寄世, 宛若行雲, 汝等, 勤以住持, 愼無悲哭.” 右脅而臥, 示滅於鳳林禪堂. 俗年七十, 僧臘五十. 于時, 天色氛氳, 日光慘澹, 山崩川竭, 草悴樹枯. 山禽於是苦啼, 野獸以之悲吼. 門人等號奉色身, 假隷于寺之北嶺. 寡人, 忽聆遷化, 深惻慟情, 仍遣昭玄僧榮會法師, 先令吊祭. 至于三七, 特差中使, 賚送賻資. 又以贈諡眞鏡大師, 塔名寶月凌空之塔.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於是, 隨方弘化, 逐境示慈, 知無不爲, 綽有餘裕. 至於終世, 心牢無瞥起之情, 雖在片時, 體正絶塵勞之染. 傳法弟子, 景質禪師等五百餘人, 皆傳心印, 各保髻珠, 俱栖寶塔之旁, 共守禪林之䦔, 遠陳行狀, 請勒貞珉. 寡人, 才謝凌雲, 學非對▨, 柔翰敢揚其禪德, 菲詞希播其道風, 遽裁熊耳之銘, 焉慙梁武, 追製天台之揭, 不媿隋皇.
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 千劫流轉示後來.
心滅法流何日絶, 道存人去幾時迴.
偉矣哲人憂迷路, 生于浮世降聖胎.
慾海波高橫一葦, 邪山路險軫三材.
方忻宴坐銀花發, 忽歎泥洹寶月摧.
霜霑鶴樹悲長悴, 霧暗雞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 建.
門下僧性休, 刊字.
䞄 표 : 봉죽줄 散匹帛與三軍 痾 아 : 병 깊을
羸 리 : 파리할, 병들, 약할 楹 영 : 관괴임목, 기둥
預 예 : 미리, 참여할, 미칠, 간섭할 詰 힐 : 힐문할, 꾸짖을
宛 완 : 굽다, 구부정하다, 완연할, 작은 모양
氛 분 : 기운, 재앙, 요기로운 기운, 상기로운 기운
氳 온 : 기운, 기운 성할 吼 후 : 소 우는 소리, 범 성 내는 소리
聆 령 : 들을, 깨달을 賚 뢰 : 줄
懸 현 : 달릴, 매달릴, 멀 掛 괘 : 걸, 달, 달아둘
綽 작 : 너그러울, 많을, 더딜, 정숙할
牢 뢰 : 굳을, 견고할, 우리, 옥 瞥 별 : 얼핏볼, 눈깜짝할
髻 계 : 상투, 결 : 부엌귀신 勒 륵 : 새길, 자갈, 엄중할
珉 민 : 옥 다음가는 돌 菲 비 : 엷을, 둔할, 향기로울
希 희 : 바랄, 드물, 적을 播 파 : 펼, 날릴, 흩을, 옮길, 심을, 버릴
遽 거 : 급할, 창졸, 두려울, 군색할 裁 재 : 옷마를, 헤아릴
媿 괴 : 부끄러울 軫 진 : 수레뒤턱나무, 구를, 길 꼬불렁꼬불렁할
忻 흔 : 기쁠 洹 원 : 흐를 霑 점 : 젖을
悴 췌 : 근심할, 파리할 雞 계 : 닭
[음독]
기후 대사이귀구거 중계방연 유제학어도회 구전법요 원군생어도탄 ▨표자풍즉필 홀환미아 유다리색 대중의입양영지몽 예함쌍수지비 용덕삼년사월이십사일힐단 고중왈 제법개공 만연구적 언기기세 완약행운 여등 근이주지 신무비곡 우협이와 시멸어봉림선당 속년칠십 승납오십 우시 천색분온 일광참담 산붕천갈 초췌수고 산금어시고체 야수지이비후 문인등호봉색신 가예우사지북령 과인 홀령천화 심측통정 잉견소현승영회법사 선영조제 지우삼칠 특차중사 뢰송부자 우이증시진경대사 탑명보월능공지탑 대사 천자혜오 악강정령 현자경어영대 괘계주어식우 어시 수방홍화 축경시자 지무불위 작유여유 지어종세 심뢰무별기지정 수재편시 체정절진로지염 전법제자 경질선사등오백여인 개전심인 각보계주 구서보탑지방 공수선림지문 원진행장 청륵정민 과인 재사능운 학비대▨ 유한감양기선덕 비사희파기도풍 거재웅이지명 언참양무 추제천태지게 불괴수황
기사운
석가법부대구씨 천겁유전시후래
심멸법류하일절 도존인거기시회
위의철인우미로 생우부세강성태
욕해파고횡일위 사산험로진삼재
방흔연좌은화발 홀환니원보월최
상점학수비장췌 무암계산대일개
용덕사년세차갑신사월일일 건
문하승성휴 간자
[국역]
그 후 대사는 곧 예전에 머무시던 곳으로 돌아가, 가르침의 자리를 거듭 열어 죽은 도(道)에 헤매는 여러 학인들을 깨우치고,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건졌으며, 자애로운 바람을 베푸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시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병색이 완연하였다. 대중들은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을 알고 미리 열반[雙樹]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모든 인연은 다 고요하다. 세상에 살아감이 떠가는 구름과 다름없다. 너희는 힘써 수행하며 삼가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70세이고, 승려 나이[僧臘]는 50세였다.
이때에 하늘빛은 흐려지고 태양을 빛을 잃었으며, 산과 내가 무너지고 마르며 풀과 나무가 시들고 말랐다. 산새들은 이에 괴롭게 지저귀고 들짐승은 슬피 울었다. 문인들이 울면서 시신을 받들어 절 북쪽의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을 듣고서 깊이 슬퍼하고,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 먼저 조문하게 하고, 3·7일에는 특별히 사자를 보내 부의(賻儀)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 탑의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으로 추증하였다.
대사는 하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받고 큰 산의 정기를 받았으며, 자애로운 거울을 마음[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정신[識宇]에 두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펼치고 지역마다 자애를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굳건하여 잠시도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백여 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여 각기 계주(髻珠)를 가지고서 다 같이 〈대사의〉 보탑 곁에 머무르며 함께 선문을 지키고 있는데, 멀리서 〈대사의〉 행적을 적어 보내며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하였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대▨(對▨)이 아니지만, 여린 붓으로 감히 그 선덕(禪德)을 드러내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道風)을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을 본뜬 것이니 어찌 양무제(梁武帝)에 부끄러우며, 천태(天台)의 게송을 따라서 지은 것이니 수나라 황제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석가가 가섭[大龜氏]에게 법을 부촉하니,
오래도록 전해져 뒷사람에게 보여주었네.
마음은 없어져도 법은 흐르니 언제 끊어지며,
도(道)를 남기고 사람은 떠났으니 언제 돌아올 건가.
위대하도다 철인이여! 길 헤매는 사람들을 걱정하여,
세속에 태어나 성모(聖母)의 태속에 내려오셨네.
욕심의 바다와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못된 산의 험한 길 삼재(三材) 타고 넘어가네.
흔연히 자리에 앉아 계심에 은색 꽃[銀花]이 피더니,
문득 열반을 노래하니 보월(寶月)이 사라졌네.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안개 짙은 계산(鷄山)에서 크게 걷힐 때 기다리네.
용덕(龍德) 4년(924)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움.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주해]
(67) 곧 돌아가실 것[兩楹之夢] : ‘양영지몽(兩楹之夢)’은 공자(孔子)가 꿈에 두 기둥 사이에 자신이 앉아 있는 꿈을 꾸고서 곧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곧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68) 열반[雙樹] : 부처님이 두 그루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일에서 유래하여 쌍수(雙樹)는 부처님과 고승의 열반 혹은 죽음을 의미한다.
(69) 소현승(昭玄僧) : 승려들을 관리하는 소현시(昭玄寺)의 일을 보는 승려. 신라의 경우 소현시가 없고 정법전이 승려들을 관리하였는데, 이곳의 소현시는 정법전의 별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70) 계주(髻珠) : 원래는 전륜성왕이 상투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귀한 구슬로, 부처님의 최상의 가르침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다.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 여래의 최상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이 오랫동안 간직하였던 상투속의 구슬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71) 웅이(熊耳)의 비명[熊耳之銘] : 웅이산(熊耳山) 정림사(定林寺)에 있던 보리달마의 탑비명.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그 비명을 지었다고 전한다.
(72) 천태(天台)의 게송 : 수나라 양제(煬帝)가 평소 존경하던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를 칭송하여 지은 게송.
(73) 삼재(三材) : 천도(天道)·지도(地道)·인도(人道).
(74) 학림(鶴林) : 부처가 사라쌍수(裟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자 나무가 시들어 학처럼 희게 되었다고 하여 그 나무를 학수(鶴樹) 혹은 학림(鶴林)이라고 부른다.
(75) 계산(鷄山) : 석가모니의 상수제자(常隨弟子)인 마하가섭이 선정에 든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계족산(鷄足山)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로부터 미래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 자신의 가사를 전해주라는 부촉을 받은 마하가섭은 계족산 속에서 선정에 든 상태로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76) 용덕(龍德) 4년(924) : 신라 경명왕 8년(924)에 해당한다. 그런데 용덕(龍德) 연호는 923년 11월까지만 사용되고 동광(同光)으로 연호가 바뀌었으므로, 924년은 실제로는 동광 2년에 해당된다.
[참고자료]
1.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경내
출토지 :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지
연대 : 신라 경명왕 8년 서기 924년
찬자 : 신라 54대 경명왕 박승영
서자 : 행기(幸期) 각자 : 성휴(性休)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337㎝, 비신 높이 171㎝, 너비 99㎝. 비는 924년(경명왕 8)에 건립되었다. 비가 있던 경상남도 창원의 봉림사는 폐사된 연대가 불확실한데, 비는 오래 전에 무너졌다. 이수와 귀부(龜趺)는 상태가 좋은 편이나, 비신은 아랫부분 6자부터 절단, 분실되었으므로 보완하여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옛 탁본에 의하여 결실된 부분의 문자를 비음(碑陰: 비신의 뒷면)에 새기고, 마지막에 ‘□巳閏七月日重竪此刊(□사윤칠월일중수차간)’이라는 중수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巳’는 1797년(정조 21) 정사(丁巳)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진경대사 심희(審希)는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봉림사의 개조(開祖)로, 비문(碑文)에는 출가 후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국왕들을 귀의시킨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923년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자, 왕이 ‘진경’이란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비문은 경명왕이 직접 지었으며, 글씨는 심희의 문하승(門下僧)인 행기(幸期)가 썼다. 글씨는 자경(字徑) 2㎝의 해서(楷書)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이수(螭首: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 가운데 ‘고진경대사비(故眞鏡大師碑)’라는 전액(篆額)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인 최인연(崔仁渷, 일명 崔彦撝)이 썼다.
귀부는 머리가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뿔이 있었던 듯한 작은 구멍이 있다. 등에는 귀갑(龜甲)무늬를 새겼으며 둘레에 구름무늬를 둘렀다. 비좌(碑座) 4면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상단에는 복련(覆蓮)을 배치하여 비신을 얹었다.
이수 가운데의 전액을 중심으로 반룡(蟠龍: 승천하지 않은 용) 두 마리가 보주(寶珠)를 다투듯 구름무늬에 싸여 있으며, 모퉁이에 각각 한 마리의 용이 표현되었다. 이수 하단에는 2단의 층급을 두고 앙련(仰蓮)을 새겼고, 비신 옆면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새겼다. 이들 조각은 천각(淺刻)의 경향이 있으며, 형식화된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 양식을 보여준다.
2. 경명왕 917년∼924년 능묘 : 경주 배동 삼릉(慶州 拜洞 三陵)
신라의 제54대 왕.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신덕왕(神德王)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당시 신라는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했고, 나머지는 궁예와 견훤 등 지방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918년(경명왕 2)에는 김현승(경주김씨 경순왕 김부의 조카)의 반란이 일어나 신라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같은 해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세우자, 왕건과 손을 잡고 920년에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변방 장군 중 왕건에게 가담하는 자가 많아, 후당에 조공을 바쳐가며 국세를 회복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재위 중 여러 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금모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3. 봉림산문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7~869)의 제자인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가 효공왕 때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산에 봉림사를 창건하여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하였다.
현욱은 824년(헌덕왕 16)에 당에 유학하였으며, 837년(희강왕 2)에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실상사에 머물렀으며,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의 귀의를 받았다. 이후 840년(문성왕 2) 왕명에 따라 현욱은 혜목산의 고달사(高達寺)로 옮겼다가 입적하였다. 『조당집(祖堂集)』 권17 「동국혜목산화상(東國慧目山和尙)」조에는 현욱이 마조 도일의 제자인 장경 회휘(章敬懷暉, 754~815)의 법을 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현욱이 당에 유학하였을 때에는 이미 장경이 입적하였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로 보기 어렵다. 현욱은 13세에 불과한 제자 심희에게 심인을 전하면서 자신의 법계가 ‘조계 혜능-남악 회양-마조 도일-장경 회휘’로 이어진다고 하여 중국 남종선의 법통을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선승이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것과 달리 심희의 경우에는 유학하여 전법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남종선의 법통을 강조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심희는 9세에 혜목산에 가서 현욱에게 출가하였으며, 19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각지를 유력하였다. 그는 중국에 유학을 가지 않았고, 진성왕 때에는 송계와 설악에 머물렀으며, 경주로 오도록 한 왕의 요청에 따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김해 지역의 호족인 김인광, 소율희(김율희와 동일인) 등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를 창건하였다. 이 무렵 심희는 경명왕의 귀의를 받았으며, 918년(경명왕 2)에는 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가서 설법하기도 하였다.
심희의 문하에는 경질(景質), 융제(融諦) 등 500여 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융제는 상주 삼랑사(三郎寺)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원종대사 찬유(璨幽, 869~958)는 삼랑사의 융제에게 갔다가 융제의 지시로 심희에게 출가하였다. 찬유는 당에 건너가 투자 대동(投子大同)의 선법을 계승하고 921년(경명왕 5)에 신라에 돌아와 삼랑사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개경으로 가서 고려의 태조 왕건을 만났고, 왕건의 명으로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머물다가 혜목산에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찬유는 고려의 혜종과 정종의 후원을 받았으며, 광종 초에는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찬유는 90세로 입적하였는데, 그가 주로 머문 혜목산 고달원은 고려 초에 위상이 높았다. 심희의 제자인 충담(忠湛, 869~940)도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귀국한 후 김해에 한동안 머물다가 이후 개경으로 이동하였다.
봉림산문은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후삼국 전쟁기에 후백제가 경상도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신라,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고려 모두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율희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봉림산문이 건재하였으나,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가 본격화되면서 산문의 안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915년(신덕왕 4)에는 이엄을 비롯한 선승들이 신변의 안전을 기약할 수 없어서 다른 사찰로 떠나게 되었다. 923년(경명왕 7) 심희가 입적하고, 927년(경애왕 4)에 후백제가 경주를 침공하면서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세력이 몰락하였는데, 이로써 봉림산문은 쇠락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
2025년 1월 27일 안동 說樂然齋에서
開山八畊 朴喜鎔 쓰다
규정공 후 충정공 박숭원 14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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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박씨 조상님들께서 지으신 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경명왕 휘 승자 영자 할아버지의 <봉림사 진경대사탑비문>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를 근거로 하여 독해한 글을 올립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오나 종씨 제위께서 일독하시고 미흡한 부분을 교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휘 승자 영자 할아버지께서는 신라 왕의 신분을 초월하여 당대의 튼실한 학자로서 학문과 불법이 매우 깊었음을 쓰신 문자와 문장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박씨는 한국사에서 왕, 문신 ,무신으로 한 시대 발전과 평화에 노력하신 조상들이 매우 많습니다. 현재 할동하고 있는 박씨들도 조상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활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박씨 대대손손 후손들도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