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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迎日鄭氏)
시조 (始祖)
휘 (諱) : 습명 (襲明), 호 (號) : 東河, 滎陽(형양)
관직 (官職) : 추밀원 지주사 (樞密院知奏事)
{휘 (諱) : 극유 (克儒)
관직 (官職) : 감무 (監務)}
관향의 유래 (貫鄕由來)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迎日)은 신라(新羅)의 근오지현(斤烏支縣 : 또는 오량우현)으로, 경덕왕(景德王)이 임정(臨汀)으로 개칭하여 의창군(義昌郡 : 흥해)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초기에 연일(延日)로 고쳐서 고려(高麗) 현종(縣宗) 때 경주(慶州)에 속하게 하였다. 그 후 1913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웃 흥해군(興海郡)?청하군(淸河郡)?장기군(長?郡)을 병합하여 영일군(迎日郡)으로 고쳤다.
창씨연유 (創氏緣由)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 6부시대(新羅六部時代)의 지백호(智伯虎)로서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 32년) 경주(慶州)의 6촌(六村) 地名을 개칭(改稱)함과 동시에 각각 사성(賜姓)하였다.
당시 취산진지촌장(?山珍支村長)이었던 지백호(知伯虎)는 정씨(鄭氏)로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그의 원손(遠孫) 종은(宗殷)이 신라(新羅) 때 간관(諫官)으로 直言을 하다가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流配된 후 後孫 의경(宜卿)이 영일(迎日)로 移居하여 호장(戶長)을 지냈고, 다시 연일현백(延日縣伯)에 封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그러나 연원(淵源)은 같으면서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는 두 파(派)가 있는데 그 하나가 우리 파로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文科에 급제하여 인종(仁宗)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을 시조(始祖)로 모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이며, 다른 하나는 감무(監務)를 역임한 극유(克儒)를 시조로 모시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씨족사개요(氏族史槪要)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대표적인 人物로 습명(襲明)의 11世孫인 포은(圃隱) 몽주(夢周)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6년(서기 1337년)에 경북(慶北) 영천(永川)에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운관(雲瓘)의 아들 4형제 중 長男으로 태어났다.
圃隱의 母親 이씨(李氏)가 아름다운 난초화분을 안고 화단으로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고 깨어나 그를 낳았다고 하여 兒名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에 물걸레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의 龍이 뜰에 있는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 먹으며 웃고 있었다. 깜짝 놀라 깨어나 보니 몽란(夢蘭)이 배나무위에 올라가 용처럼 웃고 있었다 하여 다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
그 후 몽룡(夢龍)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부친 운관(雲瓘)의 꿈에 中國의 옛 賢人 주공(周公)이 나타나 이르기를 “몽룡(夢龍)은 후세에까지 이름을 빛나게 할 아이니 잘 키워라”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주공(周公)의 주(周)자를 따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그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9년(서기 1360년) 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왕(禑王) 2년(서기 1376년)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 이인임(李仁任)등이 主張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流配되었다. 그 이듬해에 풀려나와 使臣으로 구주(九州)<일본>의 지방장관(地方長官) 금천료준(金川了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락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민(高麗民)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그 후에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순충윤도동덕좌명공신(純忠倫道同德佐命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시중(守門侍中)에 올라 익양군(益陽君) 충의백(忠義伯)에 이르렀고, 일찍이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고려(高麗)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성계(李成桂) 등과 손을 잡고 국제정세에 순응하여 고려의 나아갈 길을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가 開國爲王의 뜻을 품게 되자, 이에 斷然히 결별하여 그의 마지막 一片丹心까지도 高麗를 위해 바치었다. 그 후 정도전(鄭道傳)<奉化鄭氏>?남 은(南 誾)?조 준(趙 浚) 등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혁명모의(革命謀議)가 무르익던 어느 날 밤, 圃隱은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問病)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방원(李芳遠 : 朝鮮 太宗)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圃隱의 심중을 떠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詩) 한수(首)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垣 頹?亦何如 : 혹은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혹은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하니, 圃隱은 이 詩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고 술잔을 보내며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
이것이 유명한 丹心歌이다.
이방원(李芳遠)은 圃隱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죽이기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忠節의 표상으로 남아 우리 迎日 鄭氏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는 푸른 대(竹)가 솟아나 선지교(善地橋)의 다리 이름을 선죽교(善竹橋)로 바뀌었다고 하며, 태종(太宗)은 圃隱의 관직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는 한편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벼슬을 멀리하고 오로지 學門에 힘쓰는 家風을 지켜오다가, 圃隱의 10세손 유성(維城)이 인조(仁祖) 때 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官職에 올라 호조(戶曹)?예조(禮曹)?이조(吏曹)?형조판서(形曹判書)를 지내고, 현종(顯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청빈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圃隱의 12세손인 제두(齊斗)는 현종(顯宗) 9년(서기 1668년) 文科에 급제했으나 社會의 혼란을 통탄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하고 경종(景宗) 때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잠깐씩 지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陽明學)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였으며, 존신(存信)?성학설(聖學設)?대학설(大學設)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高麗朝 奉翊大夫 典工判書 仁彦은 李成桂, 李芳遠으로부터 家門을 保全케 하였고 고려조에 文科하여 朝鮮朝에 工曹判書한 光厚와 세종(世宗) 때 死六臣과 同榜及第하여 成均館 司成으로 端宗이 손위(遜位) 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落鄕하였으며 端宗을 도운 유신(遺臣)으로 忠南 鷄龍山 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配享되어 있는 사성(司成) 종소(從韶), 壬辰倭亂 때 義兵을 일으켜 功을 세운 司成公의 玄孫 호수(湖?) 세아(世雅)<黃山道察訪,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 호수(湖?)의 族弟(10촌) 창대(昌臺) 대임(大任)<醴泉郡守,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세아(世雅)의 孫子 양계(暘溪) 호인(好仁)<牧使>, 六世孫 매산(梅山) 중기(重器)<刑曹參議>, 嶺南學脈의 巨峰인 양수(兩?)<훈수(塤?) 만양(萬陽), 지수(??) 규양(葵陽) 형제>, 산남의진(山南義陣) 大將 동엄(東?) 환직(煥直) 등이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의 대표적인 後孫이다.
감무공파(監務公派)의 人物로는 극유(克儒)의 6세손인 사도(思道)가 충숙왕(忠肅王)때 문과에 올라 공민왕(恭愍王) 때 도순문사(都巡問使)를 거쳐 우왕(禑王)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평리상의(評理商議) 등을 역임하고 오천군(烏川郡)에 봉해졌으며, 그의 孫子 진(鎭)이 朝鮮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후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에 추봉되어 世宗 때의 名臣 연(淵)과 함께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그 후에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역임했던 유침(維沈)의 아들 4형제 중 歌辭文學의 大家로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韓國詩歌의 쌍벽으로 또한 大政治家였던 송강(松江) 철(澈)은 유침(維沈)의 막내아들이다.
迎日鄭氏上系分派圖
1世 2世 3世
襲明 ─ 燮均 ─ 謙牧 ─
4世 5世 6世 7世 8世 9世 10世 11世
┬麟信─ 之泰─宗興 ┬林┬仁壽─ 裕-─云瓘 ┬ 夢周: 1파(文忠公派),경기도 용인
│ │ │ │ 過
│ │ │ │ 厚
│ │ │ └ 蹈
│ │ └ 仁彦┬光厚┬ 瑋 ┬ 文裔 : 2파(生員公派), 영천
│ │ │ │ ├ 文繼 : 3파, 영천 화산
│ │ │ │ └ 文孫 : 4파, 대구 공산
│ │ │ ├ 번 ┬ 文治
│ │ │ │ └ 文희
│ │ │ └ 瑛 ┬ 文備 : 5파(司正公派), 안강 하곡
│ │ │ │ 文達
│ │ │ └ 文彧 : 6파(樂隱公派), 경산
│ │ └元厚 ┬ 로
│ │ └ 王告
│ └ 浩 - 俊 ┬ 臣弼 ┬ 羲叔 ─ 享之 : 7파(萬戶公派), 慶州
│ │ └ 羲仲
│ └ 臣彦
└ 次延─ 師保─化龍─琦 ─ 淑瞻 ─ 谷 ─ 喬 ─ 希孫 : 8파(都事公派), 흥해
迎日鄭氏 第二派(生員公) 分派圖
11世 12世 13世 14世 15世 16世 17世 18世
文裔┬從韶┬以揮┬次諄 ……………………………………… : 沙皐公派(沙川. 大川)
│ │ ├次誠 ……………………………………… : 華隱公派(陵溪)
│ │ └次謹┬允良─世雅┬宜藩 … : 柏巖公門中(大田. 仙源.梅谷.
│ │ │ │ 慈川.大環. 愚巷. 碧溪)
│ │ │ ├維藩 … : 處士公門中(長?. 浦項. 博沙.
│ │ │ │ 古坪. 舍谷)
│ │ │ ├安藩 … : 萬戶公門中(橫溪. 大田. 新坊.
│ │ │ │ 金泉)
│ │ │ └守藩 … : 護軍公門中(石洞. 漆谷. 龜尾.
│ │ │ 仁邱. 忠孝.月淵. 魯巷)
│ │ └允恭─貴雅─寧藩 … : 奉事公門中(金海生林)
│ ├ 以僑 …………………………………: 校理公派(金泉鳳溪)
│ └ 以諶 …………………………………: 持平公派(永川. 慶山. 古道. 漆谷.
│ 迎日. 金泉)
├ 歸韶 …………………………………………: 判官公派(富溪(諸富))
├ 致韶 …………………………………………: 佐郞公派(仙花. 元堂. 道川. 庫旨. │ 明珠)
└ 依韶 …………………………………………: 訓導公派(錄田)
우리집 世系圖
1世(始祖) 2 世 3 世 4 世 5 世 6 世 7 世
襲明 ── 燮均 ─- 謙牧 ─┬ 麟信 ─ 之泰 ─ 宗興 ─-┬ 林 ───
(滎陽) └ 次延 │(版圖判書)
└ 浩
8 世 9 世 10 世 11世 12 世 13 世
┬ 仁壽 ┌ 瑋 -─┬ 文裔 -─┬ 從韶(司成) -─┬ 以揮 ───
└ 仁彦 ─ 光厚 ─-┤(司正) │ (生員) ├ 歸韶(監察) │(牧使.直提學)
(典工判書) (工曹判書) ├ 번 ├ 文繼 ├ 至韶(學諭) ├ 以僑(校理)
└ 瑛 └ 文孫 ├ 致韶(佐郞) └ 以諶(持平)
└ 依韶(訓導)
14世 15世 16世 17世 18世
┬ 次諄(沙皐) ┌ 允良 ─┬- 世雅 ─┬ 宜藩 ── 好禮(樂山)
├ 次함(無后) │ (魯村) │ (湖수) │ (栢岩) ┌ 泰安
├ 次諧(無后) ├ 允恭 │ (剛義) ├ 維藩 ─┼ 好智
├ 次誠(華隱) │ (奉事) │ │ (處士) └ 好功
└ 次謹(宣務郞)─┘ ├ 萬壽 ├ 安藩 -─┬ 好仁(暘溪)
└ 永壽 │ (萬戶) └ 好問(魚峯)
└ 守藩 -─┬ 好義(明溪)
(內禁衛將) ├ <好禮>
(副護軍) └ 好信(三休亭)─
1世(始祖)
습명(襲明) ( ? ~ 1151. 3. 21)
호(號)는 동하(東河), 형양(滎陽), 出生年度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숙종(肅宗)朝초(1096년)경으로 推定됨.公은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3代의 重臣으로 性品이 剛直, 快活하고 智, 仁, 勇을 겸비하였으며 文名과 氣槪가 높았던 直臣으로 愚鈍했던 毅宗을 文好王으로 引導해서 太平盛代를 이룩한 名臣이었다. 향공문과(鄕貢文科)에 及第하였으며 석죽화(石竹花)라는 名詩로 인하여 睿宗에 의하여 特薦되어 玉堂에 補하여 짐.
○ 1116年 (睿宗 11年 丙申) : 弱冠에 서경도사(西京都事)를 역임하고 睿宗말에는 內職으로 내시〈內侍 : 고려때 內侍府의 官員. 毅宗 이후에는 환관(宦官)들이 차지함〉
○ 1134年 7月(仁宗 12年 甲寅) : 安興亭(扶安) 부근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하여 西海島 泰安의 東側 地峽인 堀浦에 旁邑民 수천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팠으나 10여리는 굴착하고 7리를 남겨두고 실패.
○ 1135年 1月(仁宗 13年 乙卯) : 묘청(妙淸)의 亂이 일어나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水軍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적을 막았으며,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上將軍 이녹천(李祿千)등과 함께 서적(西賊 : 묘청의 반란군) 토벌을 도모하였으나 대패.
○ 1136年 (仁宗 14年 丙辰) : 國子監 司業 및 中書門下省의 起居注와 知制誥 兼任.
○ 1140年 閏6月 (仁宗 18年 庚申) :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 이중(李仲), 최주(崔奏), 최자(崔梓) 등과 함께 時弊十條를 上奏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주언(奏言)을 좇지 않는다 하여 사직.
○ 1142年 (仁宗 20年 壬戌) : 金富軾의 別第를 빌어 寓居하자(淸貧하여 私邸를 이루지 못하였음) 간관(諫官)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彈劾)을 받아 국자사업(國子司業) 기거주(起居注)職에서 파직(罷職)되었으나 곧 禮部侍郞 으로 昇進.
○ 1145年 (仁宗 23年 乙丑) : 右承宣 除授. 金富軾등과 三國史記 50권 편찬.
○ 1146年 1月(仁宗 24年 丙寅) : 禮部侍郞으로서 太子(毅宗) 사부(師傅)를 겸함.
당시 太子가 愚昧하여 廢太子 직전에 太子를 적극 옹호〈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가 毅宗 대신 둘째아들 대령후(大寧候) 경(暻)을 太子로 세우려함〉, 仁宗은 先生의 忠誠心에 감격하고 器量이 넓은 風度를 중히여겨 承宣(承旨)에 拔擢하고 겸하여 東宮의 太師로 삼아 부족한 太子의 장래를 부탁함.
○ 1146年 (仁宗 24年 丙寅) : 仁宗 臨終時에 太子와 先生을 同席시키고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언제나 鄭承宣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太子에게 이르고(治國 當用 襲明之言), 또 先生에게는 忠直한 卿이 있어 안심하고 선위(禪位)한다고 하며 아직 拔本하지 못한 잔재들이 왕의 측근에 머물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붕어(崩御)하다.
○ 1149年 (毅宗 3年 己巳) : 翰林學士, 추밀원 지주사에 제수됨.
左承宣으로 考試官이 되어 詩賦로 오광윤(吳光允), 十韻詩로 조정시(趙挺時)를 시취(試取: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함.
○ 1151年 (毅宗 5年 辛未) : 毅宗이 父王 仁宗으로부터 遺言을 받아 처음에는 公을 두려워하여 감히 放心치 못하더니 정함(鄭?)과 김존중(金存中)의 참언(讒言)에 쏠려 병중에 있는 公을 金存中으로 하여금 대신케 하였다. 公은 왕의 뜻을 알고 격분하여 藥을 먹고 자진(自盡)하였다. (김존중과 정함의 誣告가 있었다.)
東文選에 世態를 읊은 石竹花 등 3편의 詩와 2편의 표전(表箋)이 傳한다.
墓所는 失墓하였으나 祭壇을 設置(迎日縣 大覺洞 : 浦項市 大松面 南城洞)하였으니 이곳에는 많은 傳說들이 얽혀있다. 이 墓所 앞에는 近世 朝鮮까지 迎日縣 官衙가 있었음.
桑田碧海의 오랜 세월 속에서 墓塚은 廢하여 丘陵으로 化하니 世上의 耳目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후에 迎日縣의 官衙가 이 丘陵에 擇基되어 石物의 잔해는 매몰 또는 城밖에 버려졌다.
그 후에 同郡 座首 金某가 南門 城堞(성첩)下에 버려진 이 석물들로 築城을 하다가 急死하였으며 또 官員 정문창(鄭文昌)이 石片을 門前石에 놓았다가 큰 재앙을 당하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는 傳說이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官廳뒤에 규모가 큰 大塚을 일컬어 世人들은 모두 鄭陵이라 하나 子孫들은 이를 確證할 수가 없어서 20世孫인 當代의 巨儒 兩?(塤? 萬陽, ?? 葵陽)先生 兄弟분의 起論으로 南城밖에 壇을 설치하여 祭祀를 지내고 擧門的으로 墓所찾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호응하여 兩? 先生의 三從叔인 五懷堂(碩玄) 등은 巡察使 홍만조(洪萬朝)에게 迎日官廳을 撤去해 주도록 訴를 제기하였으며, 1722年(景宗 2年 壬寅)에는 역시 後孫인 晩隱(世複) 등이 新巡相 유척기(兪拓基)에게 또 呈文을 내어 드디어 1742年(英祖 18年 壬戌)에는 宿願이 貫徹되어 官廳은 撤去되고 城밖에 있던 壇所를 이곳으로 옮기고, 남성재(南城齋)를 建立하였으며 碑銘은 후일 領議政으로서 兪拓基가 撰하니 兪政丞 역시 先生의 外孫이다. 또한 一說로는 옛날 이 迎日縣에 除授된 員은 모두가 到任初夜에 原因不明으로 急死하니 그 후로는 이 고을에 發令된 太守들은 死行이라하여 棄官하매 東軒이 비어지게 되었다 한다. 이때 한 丈夫가 自願하여 到任한 初夜三更의 非夢似夢간에 古代 老宰相 두 분이 政廳에 오르므로 鄭重히 人事한즉 威嚴있는 語調로 “오늘은 膽力있는 丈夫를 맞아 기쁘도다. 君의 到任을 祝賀하네. 이 仙翁은 鄙先祖이신 高麗 知奏事 滎陽公이시고 나는 松都의 圃隱이네. 이곳은 滎陽公의 幽宅으로 人跡의 被害가 莫甚하니 官衙를 移轉하여 靈域의 不便을 덜어주기 부탁하네. 以前 守令들은 모두 心弱하여 안타깝더니 이제는 所願이 成就되리라.” 하였다. 太守는 對答을 告하고 머리를 드니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아니하매 이에 太守가 그 靈令을 좇아서 協助가 되었다는 事緣도 있다.
1588年(宣祖 21年 戊子)에는 迎日에 烏川書院을 創建하고 1613年(광해 5年 癸丑)에는 賜額이 내려져 先生을 享祀하고 있으며, 또 晋州 玉山書院에서도 先生을 享祀하였으나 1868년 훼철 후 현재는 포은 선생만 독향. 2007년 10월 30일(양력)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고려통일대전을 준공하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고려역사선양회).해마다 陰曆 10月 10日 아침 7時에 時祀(壇祭祀)를 지냈으나 요사이는 陽曆 4月 첫째 日曜日에 지낸다. 壇所 아래에 있는 南城齋는 慶尙北道 地方有形文化財 第302號 (陽曆 1998年 4月 13日)로 指定되었다. ※ 남성재 현판은 정낙용(일제 때 남작)의 子 두화가 쓰다.
石 竹 花
世愛牡丹紅 栽培滿院中
세 애 모 란 홍 재 배 만 원 중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수 지 황 초 야 역 유 호 화 총
色透村塘月 香傳?樹風
색 투 촌 당 월 향 전 농 수 풍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지 편 공 자 소 교 태 속 전 옹
세상에선 모란꽃이 제일 곱다고
화원에 심어놓고 좋아하건만
푸른 나무 우거진 산과 들에도
더 좋은 패랭이꽃이 피어있는걸
밤에는 고운 자태 못 속에 안겨
향기로움 바람 따라 풍겨주누나
산골이라 호화로운 손님이 적어
순진한 농부들께 아양 보내오
墓 壇 碑 陰 記
高麗樞密院知奏事鄭公諱襲明迎日縣人倜?奇偉力學能文以鄕貢登 第事仁宗最被知遇累轉國子司業起居注知製誥陞禮部侍郞以公久居 諫職有諍臣風深加器重使傅東宮及不豫謂毅宗曰治國當用襲明言毅 宗卽位授翰林學士進樞密院知奏事公自以先朝顧托知無不言多所匡 救王甚憚之宦者鄭?王之乳?夫也有寵于王與嬖臣金存中日夜?毁 之會公告病王以存中權代其職公?王意遂仰藥自裁自是?倖日進王 益縱恣逸遊無度嘗幸歸法寺馳馬至獺嶺茶院從臣皆莫及王獨倚柱謂 侍者曰鄭襲明若在吾豈得至此嗚呼以毅宗之輕?荒淫敗度敗禮而尙 於是時追思公者豈亦善端之乍萌而天理之猶存也歟苟使有如公者復 能左右而匡翼之則庶幾免庚癸之禍而公已亡矣於是乎公之危忠孤直 尤可見其卓然不可及而至今志士之灑涕懷仰不能忘者也家傳舊譜云 公之衣冠之藏實在迎日而古縣治官廳後松林中有大墳塋域宛然莎草 蔓生縣人謂之鄭圃隱先山父老流傳異口同辭遠近後孫蓋嘗屢行尋求 而誌碣之屬亦云昔有而今亡旣無以驗其實而?之焉則惟古有爲壇而 望祭於墓者今宜倣而爲之?今與後得有所瞻依而寓慕薦享庶幾無違於 禮遂築壇於城南潔地定以十月上旬歲一祭之而醵錢置田爲經遠之圖 刻石壇旁以?後代謂拓基亦?彌甥使述其事遂不敢辭而?記之如此
領議政 兪拓基
묘단비 음기
고려시대에 추밀원(樞密院)의 지주사(知奏事) 벼슬을 하신 정공(鄭公)의 휘(諱)는 습명(襲明) 이시고 영일현(迎日縣)에서 나신 분이다.
인물 되심이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고 기위(奇偉) 특출 하시며 학문에 힘쓰시어 문장에 능통하셔서 향공과거(鄕貢科擧)에 응시하여 급제하셨다.
고려17대 인종께 그 인격과 학행이 알려져 조신(朝臣)들 중에서 가장 후대(厚待)를 받아서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유학(儒學)을 가르치는 국자감의 종 4품 벼슬인 사업(司業)과 임금의 조서와 교서를 지어 바치는 지제고(知製誥)벼슬에 한동안 머무시다가 승진되어 6부의 하나인 예부(禮部)의 시랑(侍郞)에 제수되었다.
공은 오랫동안 간관직(諫官職) 즉 임금에 대한 자문 고문을 통해서 비정(秕政)을 바로 잡는 직책을 담당하여 직간을 서슴지 아니하여 정의를 구현하려는 충신의 풍도(風道)를 갖추셨기 때문에 임금은 깊이 그 인물이 큰 기국(器局)임을 알고 사랑하여 등용해서 높이 올려 쓰기를 마지아니하여 동궁(東宮) 곧 태자의 스승을 삼았으며 임금이 장차의 일 곧 뜻밖에 임금 자신이 단명(短命)하여 세상을 뜨게 되는 일이 걱정되어 미리 세자인 의종을 불러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마땅히 습명(襲明)의 진언(進言)을 따라 시행할지어다.”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의 비범하고 초월함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종 즉위 초에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는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에 제수되셨다가 곧 승선(承宣)의 으뜸인 왕명의 출납을 맡은 중추원(中樞院)의 정3품 벼슬인 추밀원(樞密院)의 지주사(知奏事)에 승진되셨다.
공은 선조(先朝 : 인종)로부터 신왕 의종을 잘 보필하여 달라는 친탁을 받은 고탁지신(顧托之臣)으로서 임금께 말씀 올리지 않는 것이 없으셨다. 그리하여 잘못된 것은 고쳐 바로잡는 바가 많았다.
그러나 임금은 직언을 서슴지 않는 공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하였다. 환관(宦官) 정함(鄭?)은 임금이 어렸을 때에 유모의 남편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을 기화로 역시 임금의 사랑을 받는 김존중(金存中)과 더불어 밤낮으로 임금에게 공을 참소와 모함을 일삼아서 임금 또한 그들 편으로 돌아서게 되어 공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게 되었다.
결국 공은 신병이 있어 관직을 물러나겠다는 글을 올리고 물러나시니 임금은 김존중을 임시로 그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공은 이미 임금이 바른 길로 돌아설 기미는 추호도 없음을 알고 고탁(顧托)의 중임(重任)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앙약(仰藥 : 독약을 마심)자결하시었다.
이로부터 임금에게 아첨하는 간신(奸臣)의 무리가 날로 등용이 되었고 임금은 걷잡을 수 없이 방탕과 향락에 젖어들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다.
임금이 귀법사(歸法寺 : 경기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탄현문 밖에 있던 사찰. 균여대사가 초대 주지)에 나들이를 가게 되었을 때 말을 타고 달영다원(獺嶺茶院)에까지 달려갔는데 임금을 시종(侍從)하던 시신(侍臣)들은 아무도 따르지 못하였다. 임금은 홀로 기둥에 기대어 서서 이르기를 “鄭襲明이 만약 지금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를 수 있었겠는가.”하였다.
아! 슬픈 일이다. 의종같이 행실이 경박(輕薄)하고 또 음탕하고 절도와 예의를 모르는 그런 입장에서도 살아계실 당시의 공을 추념(追念)한 것을 본다면 그것이 어찌 착한 마음의 실마리가 잠깐이나마 싹이 튼 것이어서 천리(天理)가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랴. 진실로 공과 같은 신하가 좌우에 있었다면 경계지변(庚癸之變 : 주 참조)같은 화는 면했을 터인데 그러나 공은 이미 가시었으니 이제야 공의 위충고절(危忠孤節)이 더욱 탁연(卓然)하여 누구도 따를 수 없음을 본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수많은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눈물을 뿌리고 추창한 마음을 품어 능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전(家傳)되는 옛 보첩(譜牒)의 기록에 의하면 공의 묘소가 기실 영일에 있다고 하였는데 옛날 관청의 뒤편 송림(松林)안에 큰 무덤이 있고 그 무덤의 모양이 완연하고 사초(莎草)가 무성하였지만, 그 무덤을 사람들이 정포은선생(鄭圃隱先生)의 선산이라 하였다. 나이 많은 부로(父老)들 사이에 전하는 것도 이구동성으로 그렇다는 것이었다.
후손들이 사전에 현장에 여러 번 다니면서 지갈(誌碣)이나 거기에 관계되는 것이라도 발견되지 않나 하여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역시 발견하지 못하였다. 옛날에는 있었지만 근래에 없어 졌다고 하니 이렇게 된 이상 실지(實地)를 증험(證驗)할 수 없이 묘의 위치를 표하지 말고 옛날에 단을 모으고 묘단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 것을 이제 사람들이 마땅히 본 받아서 지금 우리들과 후손으로 하여금 조상을 숭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와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드디어 성남(城南)에 묘단을 설치하고 터전을 정화하고 10월 상순에 제사(祭祀)를 처음으로 지내게 되었으며 종중에서 전곡을 갹출하여 제전(祭田)을 마련한 것은 먼 앞날의 후손에게 이어져 끊임없기를 내다보는 의도였고 비석(碑石)을 새겨 묘단 곁에 세움으로써 후대를 생각한 것이다.
나 척기(拓基)에게 이 비문을 쓰라 하니 나는 또 외손(外孫)중의 한 사람으로 고마운 마음 간절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간략하나마 이상과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영의정 유척기
※ 兪公의 本貫은 杞溪이고 號는 知守齋요, 謚號는 文謚이며 英祖때에 영의정에 이름.
※ 경계지변: 의종 24년경인(1170년)의 무신난과 명종 3년 계사(1173년)의 의종 시해사건
樞密院 知奏事先生神道碑文
我始祖高麗樞密院知奏事滎陽鄭先生神道碑成國內諸裔師來奉竪于迎日 南城祭壇之下後孫?植齋沐謹書之曰先生之詩與箋合五首俱載靑丘風雅 及東文選旣已著顯于世壇碑舊有兪相國拓基陰記昭揭事行謹倣特書不一 書之義?家譜及史傳云而補述之先生諱襲明迎日縣人倜?奇偉力學能文 睿宗朝以鄕貢登第屬內侍史傳云仁宗甲寅秋遣內侍鄭某發傍郡卒數千鑿 河于洪州蘇大縣乙卯妙淸趙匡等反據西京遣內侍祗候鄭某往西京南海島 會弓手水手以戰船入順化縣南江禦賊船庚申與郞舍崔梓宰臣金富軾任元 凱李仲崔奏等上書言時弊十條丙寅春正月王命太子引禮部侍郞鄭某講書 大禹謨毅宗三年己巳夏四月以鄭某爲翰林學士秋八月引見平章事高兆基 御史大夫文公元中書舍人王軾左承宣鄭某置酒論國事五年辛未春三月壬 辰二十一日樞密院知奏事鄭某卒初毅宗爲元子鄭某侍讀仁宗慮元子不克 負荷任后亦愛次子將立爲太子鄭某盡心調護得不廢鄭某久居諫職有諍臣 風仁宗深加器重擢授承宣使傅東宮及不豫謂毅宗曰治國當用鄭某言鄭某 自以先朝顧託知無不言毅宗憚之七年秋七月王幸歸法寺遂御玄化寺馳馬 至獺嶺茶院從臣皆莫及王獨倚柱謂侍者曰鄭某若在吾豈得至此嗚呼此蓋 先生立朝事行而出於史乘者然也後史臣之論曰知王之終不可與有爲仰藥 而死其先見之明不可及又曰幸而天誘其衷悔心萌而善端己露苟有一二忠 正之臣因其?而開導之王或稍自省悟不至於終迷不復惜乎王所之無人也 噫凡此數言者皆史家斷例也當殷紂之時比干諫而剖心箕子佯狂爲奴微子抱祭器而逃孔子特稱殷有三仁今毅宗之輕?愎悍浮於殷紂矣且諫不聽而海邦偏局亦無與國之可適矣則先生之退而仰藥其不從容審處矣乎寔曠古卓然而綽綽有萬夫不可及之操矣但急遽?攘之際能負戴歸葬於千里故山者是亦神佑之也後因士林議與十世孫圃隱文忠公奉享梓鄕烏川書院晉州玉山書院旅軒張文康公顯光淵泉洪祭酒奭周俱有常享祝其曰正色立朝直方忠純不負顧託社稷之臣又曰立朝??盡忠補闕顧託是?夷險一節於乎此果傳神之恒幹而第念人文雅渙祀典有興廢祠宇有起滅矣今此穹然崇碑永鎭隧門而屹立矣則雖山夷海竭而能可?幷箸其文章華國儒術飭身八字勵相書紳以爲念祖貽謨之資於後人云爾
檀紀四千三百八年 乙卯 月 日 二十八世孫 화植 敬撰
三十一世孫 直敎 謹書
篆及前面成均館長
昌寧 成 洛 緖 謹書
추밀원 지주사선생 신도 비문
뜻을 같이하는 국내 여러 후손들이 모두 와서 영일에 있는 남성제단(南城祭壇) 아래에 우리 시조이신 고려 추밀원 지주사(樞密院 知奏事)) 형양(滎陽)鄭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움에 있어서 후손 화식(?植)은 목욕재계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삼가 비문을 씁니다.
선생의 시문(詩文)과 글 도합 다섯 수가 모두 청구풍아(靑丘風雅)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어 이미 명문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시조의 묘단(墓壇)에는 이미 예로부터 단비(壇碑)가 있어 상국(相國) 유(兪)공 척기(拓基)께서 지으신 글이 비의 후면에 새겨져 있는데 시조할아버지께서 하신 일과 행적을 소상(昭詳)하게 다 드러내어 놓았으므로 또 다시 덧붙일 것이 없지마는 삼가 본받아서 특별히 쓴다고 하더라도 한결같지 못한 글로 의(義)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가보(家譜)나 사승(史乘)등에 전하는 여러 기록을 주워 모아 약간 보충하여 말씀하면 선생의 휘는 습명이시고 영일현에 관적(貫籍)을 두셨는데 그 인품의 활달함이 과인(過人)하시고 학문에 힘쓰시어 문장에 능통하셨다. 예종조에 향공(鄕貢: 향시) 과거에 급제하시어 내시에 임명이 되셨다.
사서(史書)에 전하기를 인종 갑인년(1134) 가을에 임금이 내시 정 모(시조 형양공을 지칭함)를 파견하여 방읍인 수천 명을 동원하여 홍주소대현(洪州蘇大縣 : 충남 태안반도)에 있는 강바닥을 파서 수운(水運)의 편리를 도모하게 하였다.
을묘년(1135)에 묘청(妙淸) 조광(趙匡)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킴에 임금이 또 내시지후(內侍祗候) 정 모를 파견하여 서경에서 남서쪽에 있는 해도(海島)에 가서 궁수(弓手)와 수병을 모아가지고 전함을 편성하여 순화현(順化縣 :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의 남강(南江)에 들어가 반란적선(叛亂賊船)을 방어(防禦)하게 하였다.
경신년(1140)에 문하부(門下府)의 관원인 낭사 최자(崔梓), 재상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凱), 이중(李仲), 최주(崔奏)등과 함께 임금에게 시폐10조(時弊十條)를 상소하였다.
병인년(1146) 봄 정월 임금이 태자에게 명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정 모에게 인도 되어 대우모(大禹謨 : 사서오경의 하나인 서경의 편명)를 배우게 하였다.
의종 3년 기사년(1149) 4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시고 추 8월(秋八月) 임금이 평장사(平章事) 고조기(高兆基), 어사대부(御使大夫) 문공사인(文公舍人) 왕식(王軾), 좌승선 정모(左承宣 鄭 某)를 불러모아 주안상을 마련하고 국사를 논의하였다.
의종 5년 신미년(1151) 봄 3월 임진(21일) 추밀원(樞密院) 지주사 정모(知奏事 鄭 某)가 돌아가셨다.
의종이 원자(세자)로 있을 때 정 모께서 세자의 시독(侍讀)으로 계셨는데 인종이 원자가 사람됨이 강열(康劣)하여 장차 왕위에 올라 그 치국안민의 막중임무를 다 잘 감당할는지 심히 우려하셨고 왕후 또한 차자를 총애(寵愛) 하시어 장차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 정 모께서 온 정성을 다하여 원자를 가르치고 그 학행을 돌보아 도리를 지키도록 인도하고 보호하여 세자를 폐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정 모께서 오랫동안 간직(諫職)에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절개 곧은 신(臣)의 풍도(風道)를 보이셨다.
인종은 鄭 모의 그 사람됨이 큰 그릇임을 깊이 사랑하여 더욱 애중히 여기어 특별히 발탁하여 승선(承宣)에 제수하였고 또 동궁시독(東宮侍讀)을 겸하게 하였다.
임금이 의종에게 말하기를 “내가 세상을 떠난 뒤라도 너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마땅히 鄭 모의 말씀을 따라야 하느니라.” 하고 또 정 모에 특별히 뒷일을 부탁하였다.
선조(先朝 : 인종)로부터 뒷날을 부탁받은 고탁지신(顧托之臣)으로서 의종을 보좌하심에 아는 것은 아는대로 말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의종은 이것을 심히 꺼려하였는데 7년 가을 7월 임금이 귀법사(歸法寺)에 행행(幸行 :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일)하였다가 현화사(玄化寺 :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었던 사찰)에 까지 어가(御駕)가 이르게 되었을 때 임금은 단신으로 말을 달려간 곳이 달영다원(獺嶺茶院)이라는 곳이었다. 모시던 신하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임금은 혼자 기둥에 의지하고 서서 거기 있던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鄭 모가 만약 아직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참으로 이것은 선생께서 조정에 서시어 하신 일들로 여러 사승(史乘)에 기록된 것을 간추린 것이다.
그 후 사신(史臣)이 鄭 모에 대하여 논하기를 임금이 끝내 혼미(昏迷)하여 보필할 수 없음을 알고 약으로써 자결하셨으니 그 선견지명은 아무도 따를 수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다행히 하늘이 임금의 속마음을 유도하여 회개하는 마음의 싹이 터서 (달영다원의 기둥에 기대어 鄭 모를 추념(追念)하는 말로써 그 선단을 나타냈을 때) 진실로 한 두 사람의 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선단(善端)의 싹을 돌보아 피어나게 인도하였더라면 임금은 혹 반성하고 깨달아 끝내 혼미한 채로 회복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애석하게도 임금은 혼미로 끝지었으니 임금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가(史家)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 왕 당시에 비간(比干)은 임금을 간하다가 할복 자결하였고 기자(箕子)는 미치광이인 체하여 남의 종노릇을 하였으며 미자(微子)는 제기를 싸가지고 도망하였는데 나중에 공자께서 은나라에 이 세 사람을 삼인(三仁)이라 하시고 특별히 칭송하셨다.
이제 의종 임금이 경조퍅한(輕?愎悍 : 성질이 몹시 좁고 경솔하여 성질을 잘 냄)하기가 은의 주왕보다 더한데다가 또 간하여도 듣지 아니한다면 저 은나라의 삼인처럼 행세할 밖에 도리가 없었으나 우리 해방(海邦)의 땅이 편소(偏小)하여 또한 나라 안에서 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니 선생께서 가실데가 없으니 마음이 편안한 신도(臣道)라고 생각하시고 결행하신 일이 아니랴.
참으로 밝고 크신 충절은 만고에 뛰어나시고 침착하고 조용하심은 만인들이 가히 미칠 수 없는 지조(志操)이시다.
이렇게 돌아가시니 그때의 상황이야말로 황망하여 경황이 없었을 터인데도 능히 천리고산(千里故山)에 운구되어 장례를 지내게 된 것도 천우신조(天佑神助)의 덕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사림(士林)이 의논하여 그 10세손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오천서원(烏川書院)과 진주(晉州)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봉향하여 모시었다.
여헌 장문강공 현광(如軒 張文康公 顯光), 연천 홍좨주 석주(淵泉 洪祭酒 奭周) 제공(諸公)이 상향(常享)에 봉독(奉讀)할 축문을 지어 갖추어 놓았는데 그 축문에 이르기를
『엄숙한 얼굴빛으로 조정에 서시어 임금을 보좌하는데는 직간(直諫)으로 하시고 광국(匡國 : 잘못된 나라를 바로 잡음)은 오직 충의(忠義)로써 하셨네, 선왕의 부탁을 저버리지 못하여 나라의 안위(安危)를 맡은 신하가 되셨네』
또 이르기를,
『바른 말씀으로 임금을 섬기시고 충성을 다하여 보좌하셨네, 선왕께 부탁 받은 중책이 있으니 어려운 일이나 쉬운 일을 오직 절의로써 하셨도다』하였으니,
아! 이것이 과연 전해지는 정신의 그 영원한 근본이라면 다만 생각하건대 인륜의 질서가 잡혀 찬란한 향사(享祀)가 장려(?勵)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우(祠宇)는 흥폐(興廢)의 변화가 있고 새로 중건(重建)하였다가도 퇴락(頹落)됨이 있는 것이지만 오늘 이렇게 크고 높은 비석을 묘단 아래 우뚝하게 높이 세워 놓았으니 비록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르는 한이 있어도 이 비석은 능히 돌의 문채(文彩)와 함께 그 문장(文章), 그 화국(華國), 그 유술(儒術), 그 칙신(飭身)의 8자는 길이 남을 것이며 우리들이 서로 힘써 시조할아버지께서 후세에 끼쳐주신 그 높은 뜻을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명심불망(銘心不忘)하여야 할 것이다.
단기4308년(서기1975년) 을묘 월 일
이십팔세손 화식 경찬
삼십일세손 직교 근서
전급전면성균관장
창녕 성 낙 서 근서
※ 화식은 迎日鄭氏 2파로 호는 東陵, 梅山公의 8세손. 한학자.
2世
섭균(燮均)
○ 官職 : 高麗朝 위위주부동정(衛尉主簿同正)
○ 墓所 : 不明(고려때는 불교가 국교이기 때문에 茶毘를 하였을지도 모름)
3世
겸목(謙牧)
○ 官職 : 高麗朝 내시주부동정(內侍主簿同正)
○ 墓所 : 不明
4世
┌ 인신(麟信)
└ 차연(次延) : 사재주부(司宰主簿) ····> 11世 希孫(8派 派祖)
麟信
○ 官職 : 高麗朝 태학박사(太學博士), 봉위동정(奉衛同正)
○ 墓所 : 不明
5世
지태(之泰)
○ 官職 : 高麗朝 주부동정(主簿同正)
○ 配位 : 기계군부인 윤씨(杞溪郡夫人 尹氏)이며 감찰어사(監察御使) 昇의 따님
○ 墓所 : 不明
6世
종흥(宗興)
○ 官職 : 高麗朝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 監門衛大護軍)
○ 配位 : 진(陳)씨로 서승(署丞) 就列의 따님이며 軍器監令 規의 손녀이다.
○ 墓所 : 不明
7世
┌ 임(林)
└ 호(浩) : 保勝郞將 ····> 11世 亨之(7派 派祖)
林
○ 官職 : 高麗朝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版圖判書)
○ 配位 : 義昌 朴氏로 副令 益의 따님이며 將軍 승합(承?)의 손녀이다.
○ 墓所 : 不明
8世
┌인수(仁壽) : 검기감(檢器監), 贈 奉翊大夫 開城尹 上護軍 ····>
│ 圃隱(文忠公)(一派 派祖)
└인언(仁彦)
仁彦(高麗 충숙왕 1315년 ~ ?)
○ 號 : 송간(松磵)
○ 官職 : 高麗朝 봉익대부 전공판서(奉翊大夫 典工判書)
○ 配位 : 烏川郡 夫人 迎日鄭氏(고려 충숙왕 1324년~?)로 宗簿令 侑의 따님이며 議郞 潤의 孫女이고 議郞 仁川 蔡惟吉의 外孫女이다.
○ 墓所 : 不明
公은 忠惠, 忠穆, 忠定, 恭愍王 4代의 重臣으로 당시 주변국가 특히 중국은 元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신흥 明나라가 세력을 확장해 감에 따라 元의 지배하에 있던 高麗는 恭愍王이 反元政策을 쓰고 또한 紅巾賊과 倭寇의 침입이 잦고 국내 사정은 조정 중신들간에 新進派와 舊貴族간, 親元派, 親明派로 갈리던 혼란한 시대였으며 특히 공민왕은 魯國公主의 死後 辛旽에게 모든 정사를 맡겨 辛旽이 마음대로 정사를 좌지우지하던 시대이며 또한 힘없는 禑王 때에는 신흥귀족인 李成桂 일파가 威化島 回軍으로 軍事·政治의 全權을 장악하고 易姓革命의 꿈을 꾸던 때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어지러운 상황에 처하자 松磵公은 나라의 保全은 從曾孫 圃隱 先生(圃隱은 신진파 중에서도 李崇仁 등과 같이 勤王主義者임)이 家門保全은 公께서 담당하니 당시 尙州牧使이던 아드님(光厚)과 함께 포은공의 子弟 兄弟들을 비롯하여 門內 젊은이들을 어디론가에 은적(隱迹)시키고 자신들도 永川 錢村<영천시 도동, 당시는 최하층 천민들이 거주하던 곳. 즉 소부곡(所部曲)이다>으로 피신하여 風前燈火 같던 우리 家門을 보전케한 先祖이다. 만약 이때 피신하지 않았다면 高麗의 遺臣이고 또한 圃隱의 從曾祖父 가정이기 때문에 易姓革命을 한 李成桂, 李芳遠 父子와 그 徒黨에게 무참히 도륙(屠戮)당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9世
┌ 광후(光厚)
├ 원후(元厚) : 漢城尹 ····> 無後
├ 朴思義
└ 朴光祐(春川人)
光厚 (判書公, 고려 충혜왕 1344년 ~ ?)
○ 官職 : 高麗朝 文科, 嘉善大夫 尙州牧使, 우리가문을 보전하기 위하여 近世朝鮮朝에 工曹判書를 하셨다.
○ 墓所 :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墓碑가 있고 묘소아래 元堂齋가 있음.
○ 配位 : 益陽郡 夫人 永川李氏(고려 충렬왕 1344년~?)로 奉翊大夫 典理判書 厚龍의 따님이며 散員 海豊 金祥의 外孫女이다. 묘사일은 10월 16일(음).
○ 墓所 : 영천시 금호읍 원제동.
○ 墓祀日 : 陽曆 4月 둘째 日曜日(배위 묘사일은 음력 10월 16일).
※ 묘비 :『工曹判書 嘉善大夫 鄭公之墓』는 書例가 맞지 않다. 이유는 李氏王朝에 工曹判書를 하기는 하였으나 나는 高麗朝에 嘉善大夫(즉 가선대부로 상주목사)를 하였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냄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李氏王朝에 벼슬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墓 碣 銘
公諱光厚系出烏川麗代名臣諱襲明八代孫也世系之有譜在詳公世于至正
甲申其等第之年易?之歲遠未詳公年四十八貫錢村云前尙州牧使某年七
十二有遺書曰工曹判書嘉善大夫某今其墓表從遺書也配益陽郡夫人李氏
典理判書厚龍女墓在郡西唐池南向之原有子三女一示載譜在今子姓之孫
百餘人知其積德之流也銘曰用識于珉告我後人公姓振振香火千春
八代孫 四勿 撰
묘 갈 명
公의 휘(諱)는 광후(光厚)요 계출(系出)은 烏川이니 고려조(高麗朝)의 名臣 휘(諱) 습명(襲明)의 八代孫이다. 世系에 대하여는 보상(譜上)에 상세히 있다. 公이 在世한 그 時代를 더듬어 보면 지정(至正) 갑신(甲申 : 1344년)에 出生하였고, 그 後에 文科에 及第한 年度나 別世한 年代는 전하지 않아서 알 수 없고 다만 四十八歲時에 전촌(錢村)에 정거(定居)했다는 문증(文證)과 前에 尙州牧使를 지낸 모(某)가 七十二歲時에 쓴 유서(遺書)가 있으니 그 유서에 기록이 있기를 「工曹判書 嘉善大夫 某」라 했으며, 지금 이와 같이 각(刻)한 그 묘표(墓表)는 유서를 좇은 것이다. 배(配)는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 李氏로 전리판서(典理判書) 후룡(厚龍)의 女로서 묘는 郡西의 당지산(唐池山 :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南向之原에 있으며 三子 一女를 두었으니, 그 事蹟은 世譜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참고 하라. 지금 그 뒤를 이은 姓孫들이 百餘人이나 되니 그 積德의 물림을 가히 알 수 있도다. 명(銘)에 가로대, 묘도(墓道)에 事蹟을 새겨 묘비(墓碑)를 세워서, 우리 家門의 後孫들에게 전하노니, 公의 자손들은 떨치고 또 떨쳐서 향화(香火 : 제사. 家門의 傳統)를 千秋에 잇게 하네.
8대손 사물 찬.
※ 四勿은 영일정씨 5파로 호조참판 三畏의 子. 호는 昆峰, 생원. 지산 조호익 문인.
鳳林대군(효종) 사부이며, 영일정씨 인조기축보(1649년)를 집필한 雙峰 克後의 형.
墓 誌 文
公諱光厚本迎日縣人鼻祖諱襲明高麗樞密院知奏事有文章經術以直諫輔毅宗卒爲讒?所構不容於朝事載國乘是生燮均衛尉注簿同正是生謙牧內侍注簿同正是生諱麟信太學博士是生諱之泰典書是生諱宗興進賢館大提學是生諱林版圖判書是生二子其長贈開城尹諱仁壽乃圃隱先生曾祖也其季典工判書諱仁彦卽公之考也居永川郡南錢村圃隱亦生於郡東愚巷自迎徙永其在判圖公以前歟?郡夫人鄭氏實異貫也公以至正甲申生於錢村之第家牒云文科而未的某某榜筮任履歷亦無由徵考今以可據者言之則洪武辛未籍曰前尙州牧使某辛未是勝國末年進通政陞嘉善政在聖朝受命之後矣曾孫從韶試券封彌曰曾祖嘉善大夫檢校漢城尹某公晩年遺書自署曰工曹判書嘉善大夫某遷除先後不可辨而嘉善判座蓋極望超擢也當是時也兩親俱無恙而圃隱殉節二弟幷戮門戶蕩殘如秋霜一葉召命去就間禍福判矣公雖不自愛豈可直行已志以陷親於大何乎公之所以屈義伸恩抑有見於程夫子可徐庶之意乎公年七十二有遺書云而未得其屬?之歲則壽算幾何亦未可知也墓在郡東元堂里卯龍酉向之原配益陽郡夫人李氏典理判書厚龍之女墓在郡西塘旨山釜池內南向之原有三男長曰瑋司正墓在益陽郡夫人
墓下次曰?次曰瑛縣監瑋生三男文裔生員敎導文繼文孫?生二男文治文?瑛生三男文備文達文彧文裔生五男長從韶司成墓在公墓白虎負艮原次歸韶次至韶學諭無子次致韶文科佐郞季依韶文繼一男隣韶文孫一男旅?文治四男夏臣繼臣隣臣末臣及文?之一男玉仝幷數世而絶文備一男卿緇文達之二男麟孫貴孫亦無后文彧三男從夏副使從殷進士?無后季從周自此漸益蕃今至四百餘人而冠冕迭不絶在玄孫察訪以揮弘文校理以僑持平以諶在五世庶尹公徵郡守公弼縣監公淸縣監允湜在六世監察昌文佐郞昌武察訪麟厚監察麟祥縣監仁?在七世察訪贈判書世雅縣監義臣郡守虎臣禁府都事湛郡守贈參判大任文科正郞三變在八世訓鍊院正應瑞生員贈承旨宜藩內禁衛將守藩獻納維藩贈正郞碩男府使信道縣監亨道府使就道主簿良弼大君師傅克後洗馬四震文縣令四溟在九世孫縣監好禮文科牧使好
仁承旨繼?縣監嗣明持平承明其餘微官小科及十三世以下煩不能盡記玆豈非積善之餘慶歟
十三世孫 重器 謹撰
묘 지 문
공의 휘(諱)는 광후(光厚)요 본관은 영일현인(迎日縣人)이니 시조는 휘(諱)가 습명(襲明)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추밀원(樞密院)지주사(知奏事)를 역임 하였으며 文章과 경술(經術 : 유가의 경서에 관한 학문)이 있었다. 성품은 곧아서 항상 곧은 말로 의종(毅宗)을 간(諫)하여 보필(輔弼)하다가 간신(奸臣)들의 참소(讒訴)를 입고서 그 참소를 벗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그 사적(事蹟)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섭균(燮均)을 낳으니 위위시(衛尉寺)의 주부(注簿) 동정(同正)을 역임 하였고 또 그 아랫대가 겸목(謙牧)으로 내시부(內侍府)의 주부동정을 역임하였다. 또 그 아랫대의 휘(諱)가 인신(麟信)으로 태학박사(太學博士)를 지냈고 또 그 아랫대의 휘(諱)가 지태(之泰)로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또 그 아랫대의 휘(諱)가 종흥(宗興)으로 진현관(進賢?) 대제학(大提學)을 역임 하였다. 또 그 아랫대의 휘(諱)가 임(林)으로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二子를 낳았으니 長子는 개성윤(開城尹)으로 증직(贈職)을 받은 휘(諱)가 인수(仁壽)로서 이는 포은선생(圃隱先生)의 증조부이니라. 그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역임한 휘(諱) 인언(仁彦)으로 이는 곧 公의 고(考)이니라. 永川郡 南에 있는 전촌(錢村 : 영천시 도동)에 살았으며 포은(圃隱)은 또 郡東의 우항(愚巷 : 영천시 임고면)에 살았으니 저 迎日에서 옮겨 온 것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의 이전이었으리라. 비(?)는 郡夫人 鄭氏이나 그 실상(實狀)은 祖가 다른 氏族이다. 公은 지정(至正) 갑신(甲申 : 1344년)에 出生하여 전촌(錢村)에서 살았다. 가첩(家牒)에 이르기를 文科할 時의 年度를 알 수 없고 官職을 시작하고 전직(轉職)한 履歷(이력)등을 고증(考證)할 길이 없다. 지금 가히 거론할만한 事蹟을 말한다면 홍무(洪武) 신미(辛未 : 1391년)년의 적(籍)에 가로대「前 상주목사(尙州牧使) 모(某)」를 들 수 있는데 辛未년은 곧 고려의 말년으로써 그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부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한 것이리라. 그때 政局은 성조(聖朝 : 朝鮮 王朝) 수명(受命 : 천명을 받음. 卽 李太祖 登極)한 後라 여겨진다. 증손 종소(從韶)의 시권(試券)에 봉미(封彌 : 과거의 답안지 오른쪽에 성명, 생년월일, 주소 등을 쓰고 봉하여 붙임)한 기록에 의하면「증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검교(檢校) 한성윤(漢城尹) 모(某)」라 자서(自署)하였다. 이는 당시에 천직(遷職)된 先後가 가히 분별할 수가 없는데 대저 가선대부에서 판서(判書)직위로 옮기게 된 것은 대개 지극한 바람으로 생각을 초월(超越)한 발탁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兩親은 다같이 無病하신데 포은은 순절(殉節)하였고 그 두 아우도 함께 격살(擊殺)되어서 家門의 잔멸(殘滅)에 대한 위기는 가을 서리를 맞고 낙엽진 나뭇가지에 일엽(一葉)이 남아 있는 모습과도 같아서 新王朝의 소명(召命)에 응하고 응하지 않는 데에서 화복(禍福)이 판가름난다. 公은 비록 그(왕명에 따라 벼슬하는 것)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마는 어찌 가히 곧게 가는, 굽힐 수 없는 뜻만으로 버틴다면 어버이가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公이 義를 굽히고 新王朝의 부름을 따른 것은 옛날 정부자(程夫子 : 송나라 철학자 程?(정이)를 높여 부르는 말)가 말한 서서(徐庶 : 끝의 주 참조)의 뜻과 같았도다. 公의 年歲가 七十二歲때에 자서(自署)한 유서(遺書)가 있으나 그 作故하신 歲는 확인할 수가 없으니 수(壽)를 얼마나 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묘소는 군동(郡東)의 원당리(元堂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두들에 있다. 配位는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 이씨(李氏 : 永川人)로서 전리판서(典理判書) 후룡(厚龍)의 女로서 묘소는 군서(郡西)의 당지산(唐旨山 :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부지내(釜池內) 南向의 두들에 있다. 三男이 있으니 장남은 휘(諱)가 위(瑋)로서 사정(司正)이요 묘소는 익양군부인의 묘소 계하(階下)에 있다. 二男은 번(?)이요 三男은 영(瑛)으로 현감(縣監)이다. 위(瑋)가 三男을 낳으시니 문예(文裔)는 생원(生員)하여 교도(敎導)를 역임하고,다음은 문계(文繼)와 文孫이다. ?은 二男을 낳으시니 문치(文治)와 문희(文?)요 瑛은 三男을 낳으시니 문비(文備)와 문달(文達)과 문욱(文彧)이다. 文裔는 五男을 두니 長子 종소(從韶)는 사성(司成)으로 묘소는 公의 묘소 백호등(白虎嶝)의 간좌원(艮坐原)에 있다. 다음은 귀소(歸韶)요 또 그 다음은 지소(至韶)로 학유(學諭)이나 무자(無子)하고 그 다음은 치소(致韶)로 文科하여 좌랑(佐郞)이다. 끝은 의소(依韶)이다. 文繼는 一男 인소(隣韶)를 낳고 文孫은 一男으로 여경(旅?)이 있으며, 文治는 四男으로 하신(夏臣), 계신(繼臣), 인신(隣臣), 말신(末臣)이 있고 문희(文?)는 一男 옥동(玉仝)이 있었으나 모두 수대(數代)를 내려가다가 끊어졌다. 文備는 一男 경치(卿緇)가 있고 文達은 二男으로 인손(麟孫)과 귀손(貴孫)이 있었으나 無后이다. 文彧은 三男이 있으니 종하(從夏)는 부사(副使)요 종은(從殷)은 진사(進士)이나 역시 함께 무후하고 끝은 종주(從周)로서 이로부터 점점 더욱 번성(繁盛)해져서 지금은 後孫이 四百餘名에 이르러 관면(冠冕 : 벼슬한 자)이 번갈아 가며 끊어지지를 않았으니 玄孫에는 찰방(察訪) 이휘(以揮)와 교리(校理) 이교(以僑)가 있고 오세손(五世孫)에는 서윤(庶尹) 공징(公徵)과 郡守 공필(公弼)과 현감 공청(公淸)과 현감 윤식(允湜)이 있다. 六世孫에는 감찰(監察) 창문(昌文)과 좌랑 창무(昌武)와 찰방 인후(麟厚)와 감찰 인상(麟祥)과 현감 인개(仁?)가 있고 七世孫에는 찰방으로서 증직(贈職) 판서(判書) 세아(世雅)와 현감 의신(義臣)과 군수 호신(虎臣)과 금부도사(禁府都事) 담(湛)과 군수로 증참판(贈參判)한 대임(大任)과 문과 정랑(正郞) 삼변(三變)이 있다. 八世孫에는 훈련원정(訓鍊院正) 응서(應瑞)와 生員으로 증승지(贈承旨)한 의번(宜藩)과 내금위장(內禁衛將) 수번(守藩)과 헌납(獻納) 유번(維藩)과 증정랑(贈正郞) 석남(碩男)과 부사(府使) 신도(信道)와 현감 형도(亨道)와 부사 취도(就道)와 주부(主簿) 양필(良弼)과 대군사부(大君師傅) 극후(克後)와 세마(洗馬) 사진(四震)과 문과현령(文科縣令) 사명(四溟)이 있으며 九世孫에는 현감 호례(好禮)와 문과목사(文科牧使) 호인(好仁)과 승지(承旨) 계주(繼?)와 현감 사명(嗣明)과 지평(持平) 승명(承明)이 있고 그 밖에도 미관(微官)과 소과(小科)등이 十三世孫에까지 미쳤으므로 그 이하는 번거로워서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어찌 적선(積善)한 여경(餘慶 : 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한 보답으로 그 자손이 받는 경사)이 아니리요.
<주> 徐庶 :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처음 劉備를 섬기다가 曹操가 그 어머니를 찾아서 人質로 삼으니, 庶는 어머니의 救命을 爲해서 유비를 하직하고 조조를 찾아서 어머니를 찾으니, 어머니는 유비를 배반함에 분노하여 자결하였다. 후에 庶는 御史中丞에까지 승진하였으나, 終身토록 조조를 위하여 한 꾀도 쓴 일이 없었다.
※ 重器는 涵溪處士 碩達의 子로 호는 梅山, 문과 형조참의. 갈암 이현일과 훈?지수 문인.
※ 판서공 증손의 世系가 원파록(인조기축보 : 1649년)에는 위와 같이 되어 있으나, 그 이후의 족보에는 文孫과 文治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며 현재의 족보상에는 문손은 二男으로 여경과 하신이, 문치는 三男으로 계신, 인신, 말신으로, 즉 夏臣이 문치의 아들에서 문손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음.
鄭 漢城 輓章
總角情親至背? 人間豈獨有陳雷 甑山共被森如昨 甘露交歡久未追白首每誇俱享壽 黃泉奄隔不勝哀 承家賴是庭蘭秀 餘慶鵬程萬里開
領議政 星州 李稷
공조판서공 휘 광후에게 한 만사
총각 때부터 절친(切親)하던 정의(情誼) 노경(老頃)에는 등을 돌리게 되었으니, 인간(人間)이란 어찌 홀로서야 우레(雨雷)를 칠 수가 있으리오. 저 시루 안에 함께 갇혀서 삼엄(森嚴)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단 이슬을 맞으면서 즐거움 나누어야 할 때부터 오래 좇지 못했도다. 이 백수(白首)가 매양(每樣)같이 오래 향수(享壽)함을 자랑삼았더니, 저 황천(黃泉)으로 문득 떠났다니 그 슬픔 이겨낼 수 없도다. 그래도 바라는 바 집을 잇는 자손(子孫)들이 빼어났으니, 양양한 앞길이 열림은 경하할 일이네.
영의정 성주 형재(亨齋) 이직
※ 李公의 본관은 星州이고 호는 亨齋요 시호는 文景으로, 李成桂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여 개국공신, 星山君으로 봉해지고 세종 때 영의정에 이름.
※ 판서공(1344~1416?)보다 李公(1362~1431)이 18세나 아래이므로 혹시 판서공의 아우 漢城尹 元厚公의 만사가 아닐는지?
10世
┌ 위(瑋)
├ 번(?) : 文治, 文?
├ 영(瑛) : 尼山 縣監 - 文備(5派 派祖), 文達, 文彧(6派 派祖)
└ 鄭 齊 : 主簿
瑋 (司正公) ※ 손자들의 방목에는 井으로 되어 있음.
○ 官職 : 돈용교위웅무시위사후령사정(敦勇校尉雄武侍尉司後領司正)
○ 配位 : 大邱 徐氏로 同正 俗의 따님. 墓所는 夫公과 같은 등선
○ 墓所 :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당지(唐旨). 墓所 아래 唐山齋가 있음.
○ 墓祀日 : 陰曆 10月 16日
墓 表 陰 記
公諱瑋字未傳姓鄭氏系出烏川高麗樞密院知奏事諱襲明事毅宗直諫而死享烏川書院事蹟載麗史世稱滎陽先生爲始祖三傳諱麟信太學博士是生諱之泰典書卽公五代祖也高祖諱宗興進賢?提學又帳籍云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曾祖諱林奉翊大夫版圖判書生二子長曰仁壽檢器監贈開城尹?圃隱公夢周之曾祖次卽祖諱仁彦號松磵典工判書考諱光厚帳籍云洪武辛未入錢村前尙州牧使檢校漢城尹逮鮮朝除工曹判書墓在元堂卯坐原 益陽郡夫人永川李氏判書厚龍女墓唐旨山釜池內南向生三子公其長歷敦勇副尉雄武侍衛司後領司正配大丘徐氏同正俗女兩墓亦在唐旨與?李氏墓同原而世代悠遠丘陵未詳故竪碣於墜外以寓追遠之誠生三男二女男文裔生員敎導文繼文孫女適李敏生縣監崔興祖直長文裔男從韶文重試司成歸韶監察至韶文學諭致韶文佐郞依韶生員自此益繁以下不能盡記顧世遠不能詳生沒踐歷玆敢略敍梗?如右
後孫 碩? 謹撰
묘 표 음 기
公의 휘(諱)는 위(瑋)요 字는 未傳이며 姓은 鄭氏요, 계출(系出)은 烏川이니 고려의 추밀원 지주사 휘 습명(襲明)은 의종을 섬기며 직간하다가 돌아가시어 오천서원(烏川書院)에서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으니 그 사적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世上에서 형양선생(滎陽先生)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우리 家門의 시조가 된다. 삼전(三傳)하여 휘(諱) 인신(麟信)은 太學博士요, 휘 지태(之泰)를 낳았으니 전서(典書)로, 즉 公의 五代祖이다. 高祖는 휘 종흥(宗興)이니 진현관(進賢?) 제학(提學)으로서 또 장적(帳籍)에 이르기를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이라는 기록이 있다. 증조는 휘 림(林)이니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二子를 낳았으니 長子는 인수(仁壽)로 검기감(檢器監)하여 개성윤(開城尹)에 증(贈)하였으며 포은공(圃隱公) 몽주(夢周)의 증조가 된다. 次子는 휘 인언(仁彦)으로 호(號)는 송간(松磵)이요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다. 고(考)는 휘 광후(光厚)로 장적(帳籍)에 이르기를 홍무(洪武) 신미(辛未 : 1391년)년에 전촌(錢村)에 들어갔으며 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역임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공조판서를 제수(除授)하였다. 묘소는 원당(元堂) 묘좌원(卯坐原)에 있다. 비(?)는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 永川李氏로서 判書 후룡(厚龍)의 따님이다. 묘는 당지산(唐旨山) 부지내(釜池內) 南向에 있다. 三子를 낳으니 公은 長子로서 돈용부위(敦勇副尉)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후령사정(後領司正)을 역임하였다. 배위는 대구서씨(大丘徐氏)로서 동정 속(俗)의 따님이다. 양묘(兩墓)도 당지산(唐旨山)에 비(?) 이씨(李氏) 묘와 동원(同原)에 있으나 世代가 유원(悠遠)하여 그 묘소를 明確하게 분간할 수 없으므로 돌을 묘소들의 밖에 세워서 추모(追慕)하는 精誠을 부치고자 한다. 三男 二女를 낳았으니 男에 문예(文裔)는 生員하여 교도(敎導)하고 다음은 문계(文繼) 문손(文孫)이요 女는 이민생(李敏生)에 出稼하니 현감하고 다음은 최흥조(崔興祖)에 출가하니 직장(直長)하다. 文裔의 아들에 종소(從韶)는 문과 중시(重試)에 及第하여 사성(司成)하고 귀소(歸韶)는 감찰하고 지소(至韶)는 文科하여 학유(學諭)하고 치소(致韶)는 문과하여 좌랑(佐郞)하고 의소(依韶)는 生員하니라. 이로부터는 더욱 번창해졌으니 以下는 다 기록하지를 못하노라. 돌아볼 때 世代가 요원(遼遠)하여 그 生卒年을 비롯 경영(經營)한 이력(履歷)을 상세하게 알기가 不能하므로 이에 감히 약초(略抄)하여 그 대개의 내용을 간추려서 右와 같이 서술하노라.
후손 석주 근찬.
※ 석주는 진주목사 暘溪 好仁의 손자. 호는 暘谷, 성균생원.
11世
┌ 문예(文裔) : 二派派祖 (우리문중) ····> 16世 世雅
├ 문계(文繼) : 三派 派祖 ····> 16世 宗誠
├ 문손(文孫) : 四派 派祖 ····> 16世 士忠
├ 李敏生 : 縣監
└ 崔興植 : 直長 (종7품)
文裔 (生員公) ※ 아들들의 榜目에는 淮衡으로 되어 있음.
○ 1402年(近世朝鮮 太宗 2年)에 生員하여 靈山儒學敎導를 지냄.
○ 配位 : 永川 李氏로 司直 玄實의 따님이며 判書 釋之의 손녀
○ 墓所 : 永川 嗚山里 三歸洞(영천시 오미동 삼귀). 墓所 아래 三歸齋가 있음.
○ 墓祀日 : 陰曆 10月 17日
○ 전촌에서 대전동(영천시)으로 이거.
○ 子·孫 兩代에 8及第가 났음.
墓 表 陰 記
烏川之鄭自麗著滎陽公諱襲明爲始祖九世而判書諱光厚移卜郡南錢村卽公祖考也?郡東元堂祖?李氏判書厚龍女?郡西唐旨考諱瑋司正?達城徐氏同正俗女兩墓亦在唐旨公娶生員李玄實女生五男曰從韶司成曰歸韶曰至韶學諭曰致韶佐郞曰依韶其後八九世文武冠冕幾四十如外孫不可勝記此非餘慶歟與李氏同原是雙墓也其下長孫察訪以揮之墓又其下五代孫郡守大任之墓又其下玄孫容之墓卽郡守考也後則曾孫允淡妻李氏墓又後火城內或云察訪淑人墓而察訪先娶吳氏後娶朴氏亦未詳其先後公自錢村又移郡北大田卽第一峰下也不肖今守舊基而世代云遠事迹無徵考擧梗?以俟後知
九代孫 碩?
묘 표 음 기
烏川의 鄭氏는 고려조의 저족(著族)이었다. 형양공(滎陽公) 휘(諱) 습명(襲明)을 始祖로 하여 九世에 判書公 휘 광후(光厚)는 永川郡 南쪽 전촌(錢村)에 옮겨가서 살았으니 곧 公의 祖父가 되느니라. 그 조부의 묘소는 郡東便의 원당(元堂)에 있고 조비(祖?) 이씨(李氏)는 判書 이후룡(李厚龍)의 女로서 그 묘소는 郡西便에 있는 당지산(唐旨山)에 있으며 고(考)의 휘(諱)는 위(瑋)로서 관직은 사정(司正)이고 비(?)는 달성서씨(達城徐氏)로서 동정(同正) 속(俗)의 女이며 이 두 분의 묘소도 당지산에 있다. 公의 배(配)는 生員 이현실(李玄實)의 女로서 아들 다섯을 생산(生産)하였으니 가로되 長男은 종소(從韶)로 사성(司成)이요 둘째는 귀소(歸韶)요 셋째는 지소(至韶)로 학유(學諭)요 넷째는 치소(致韶)로 좌랑(佐郞)이요 다섯째는 의소(依韶)이다. 그후 八九世에 文武間에 관면자(冠冕者 : 벼슬한 자)의 數가 무릇 四十餘人이나 되며 그 밖에도 外孫까지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이는 그 여경(餘慶)이 아니겠는가? 配位 李氏는 그 묘소가 夫君과 同原(영천시 오미동 삼귀리)에 있으며 쌍분(雙墳)이다. 그 계하(階下)에는 長孫인 찰방공(察訪公) 이휘(以揮)의 묘소가 있고 또 그 계하에는 五代孫 군수 대임(大任)의 묘소가 있으며 또 그 계하에는 현손(玄孫)인 용(容)의 묘소가 있으니 이는 곧 郡守의 고(考)이다. 公의 묘소後(上便)에는 증손(曾孫) 윤담(允淡)의 배(配) 李氏의 묘소이고 또 그 後山의 화성내(火城內)에는 혹 말하기를 찰방공 配 숙인(淑人)의 묘소라고 하는데 찰방공은 초취(初娶)가 오씨(吳氏)이고 후취(後娶)가 박씨(朴氏)이나 역시 그 묘소에 對해서는 그 先後를 알 수가 없다. 公은 저 郡南 전촌(錢村)으로부터 또 이 郡北의 大田里 곧 그 제일봉(第一峰)아래로 옮겨 왔다. 불초(不肖)가 지금 구기(舊基)를 지키면서 世代가 멀어서 사적(事迹)을 고징(考徵)할 길이 없으므로 대강 줄거리를 그대로 들어 後에 고구(考究)를 기다리로다.
9대손 석주 기록함.
12世
┌ 종소(從韶) : 通訓大夫 成均館 司成(종3품)
├ 귀소(歸韶) : 通訓大夫 司憲府 監察(정6품) ····> 16世 得賢
├ 지소(至韶) : 進士, 文科, 成均館 學諭(9품) ····> 無後
├ 치소(致韶) : 進士, 文科, 禮曹佐郞(정6품) ····> 16世 胤 <復齋公(湛)門>
├ 의소(依韶) : 訓導(9품) ····> 16世 大任(昌臺公)
└ 李善孫 : 生員
從韶 (司成公)
○ 자는 可貞이며 號는 정헌(靖軒)
○ 官職 : 世宗때 文科重試에서 成三問, 朴彭年, 李塏, 柳誠源 등과 同榜及第(1447년)하여 吏曹佐郞, 의성, 영주, 예천, 함양 등의 고을 守令을 지내면서 善政을 베풀고 成均館 司成(종3품)으로 계시다가 端宗이 遜位되자 落鄕. 당시 ?畢齋 金宗直이 항상 烏川 鄭先生으로 推尊하였으며 端宗을 도운 遺臣으로 忠南 鷄龍山 東鶴寺 肅慕殿에 配享되어 있음.
○ 配位 : 淑人 平山 尹氏로 參判 統의 따님
○ 墓所 : 永川市 北安面 元堂. 曾祖 判書公 묘소右麓. 墓所 아래 元堂齋가 있음.
○ 墓祀日 : 陽曆 4月 둘째 日曜日.
歸韶 (1424년 2월 ~1487년 8월 19일)
○ 字는 振玉이며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 배위는 原州元氏로 司正 華의 따님이며 묘소는 영천시 오미동 삼귀 考묘右上.
○ 주세거지 : 花山.
至韶
○ 進士, 文科, 成均館 學諭
致韶 (佐郞公)
○ 進士, 文科, 禮曹佐郞을 지내셨고 배위는 仁同張氏이며 묘소는 영천시 청통면 망지동에 있다.
○ 아랫대로는 復齋公(湛:義禁府都事, 壬辰亂倡義)이 있다.
○ 주세거지 : 도천.
依韶 (訓導公)
○ 訓導를 지내셨고 배위는 義城金氏, 繼配는 花山安氏이며 공의 묘소는 考 生員公墓 右岡艮坐, 계배묘소는 영천시 신령에 있다.
○ 아랫대로는 昌臺公(大任: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壬亂倡義)
○ 주세거지 : 녹전.
司成公 諱 從韶 墓誌
公諱從韶字可貞貫迎日縣上祖高麗樞密院知奏事諱襲明有文章經術事仁毅兩朝勁直不見容事在史氏記後六世皆登第?顯仕或至卿宰七世而有諱仁彦典工判書居永川卽文忠公圃隱先生諱夢周之叔曾祖也是生諱光厚仕我朝爲工曹判書寔公曾祖考也祖諱瑋文科司正考諱文裔生員靈山敎導有
詩名?孺人永陽李氏副司直玄實之女大田先生甫欽之姉也公生於郡北大田村第一峰下幼容姿秀朗聰明有英氣從母舅大田李公受學文藝夙暢同門者莫能及年甫舞?讀書于公山銀海寺時尹公統以傍郡太守來遊騶從冠蓋甚盛公率伴童鳴小鼓曰山堂晩到在古風有罰尹公佯怒曰汝以小?子敢侮長者若能作詩罪可贖否則當?汝矣遂占韻督賦公操筆立就語頗驚人尹公??稱奇竟以其女妻之正統丁卯春登科補成均館學諭秋捷成三問榜重試世廟方重文學此科極一時選爲搢紳所榮大田李公獻詩于敎導公以相賀成公旣爲榜首朴公彭年李公塏柳公誠源亦在榜中公遂與定交硏經籍勵名節結爲莫逆契旣去?歷敭臺府仍遷吏曹佐郞世皆以公輔器期焉乙亥端廟遜位及六臣獄起大田李公繼戮公益無意仕進而然第以親在之故恐禍延庭?緘口囚舌不敢露崖岸朝廷屢除諫憲職公輒託疾固辭及授郡符則以親命?勉赴任爲便養計而非其所樂也歷義城榮川醴泉咸陽等邑多不久棄歸而所到皆有聲績其在榮也凡所施設動合繩尺恂恂以奉上??以愛民侃侃以嫉邪不期年而政通人和於是乃以餘力增建樓院以迎使華一毫不以勞於民費於帑雖在郡朝者不知有是役又作鄕序堂每於佳節延鄕父老及大夫士行鄕飮鄕射儀與之習禮讓敦風化且聚里子弟才俊者使讀書遊藝於斯勸課不少懈仍著鄕規若干條爲永久遵行地又撰郡誌記古迹以垂後郡中翕然?畢金文忠公宗直嘗記榮之小樓曰是邑賢守表表在人耳目者惟河浩亭崙?鄭公習仁崔公元濡三人今守烏川鄭先生亦其齊驅者也觀乎此可徵公?榮之治而於義咸醴亦皆用是法其後幷見錄於各邑名宦今於輿地勝覽可考也辛卯爲全羅賑恤使從事官後除成均?司成蓋末職也宗孫漂泊家牒不傳生年卒歲無由考?前後履歷次第皆莫之詳遺文亦散逸只有詩四策二書箋跋各一?典雅有法策及健麗宏博實有經綸之具若使任宰樞登廟堂則必能做大事業垂名竹帛而不幸厄於時不得少展其所蘊庸非天歟其志潔其迹危其行苦隱忍沈晦以求無貽罹於親而顧其守於中者終始耿耿也何秉心之艱哉孔子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言中倫行中慮知此義者可以見公之心事矣葬在元堂里艮坐坤向之原卽曾祖考判書公墓右麓也淑人尹氏?上下相去十步許尹氏貫平山父統官至參判云公有三男一女男長以揮長水察訪?畢翁稱爲詞客多與之唱酬次以僑以銓郞捷重試止弘文校理次以諶文科持平女適權欽祖察訪生五男次諄直長次?次諧次誠次謹校理生五男公徵庶尹公虔僉正公弼郡守公淸縣監公藝參奉以諶生四男公英公傑公俊公亨曾玄以下寢益蕃今雲仍見存者胎至二百餘人而?墨簪冕迭不絶其名德最著者次謹之子參奉允良孫贈判書世雅曾孫贈承旨宜藩玄孫文牧使好仁公徵之來
孫統制使后亮公弼之子佐郞昌武曾孫獻納維藩公藝之玄孫承旨繼?其餘?官小科不可盡記
九世孫 重器 謹撰
사성공 휘 종소 묘지
公의 휘(諱)는 종소(從韶)요 字는 가정(可貞)이요 본관(本貫)은 영일현(迎日縣)이니 上祖는 고려의 추밀원(樞密院) 지주사(知奏事)인 휘(諱) 습명(襲明)으로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이 있었으며 仁宗과 의종(毅宗) 양왕조(兩王朝)를 섬기며 강직(强直)함을 심주(心柱)로 하여 보필(輔弼)하다가 용납(容納)됨을 보지 못하고 生을 마쳤으니 그 사적(事蹟)이 사관(史官)의 기록에 있다. 그 後 육세간(六世間) 모두 등제(登第)되고 뒤를 이은 어진 관료(官僚)들이 或은 경재(卿宰 : 재상급)에까지 이어졌다. 七世에는 휘(諱)가 인언(仁彦)이 있었으니 전공판서(典工判書)로 永川에서 살았으니 곧 文忠公 포은선생(圃隱先生) 휘(諱) 몽주(夢周)의 종증조(從曾祖)이다. 휘(諱) 광후(光厚)를 낳아 아조(我朝 : 朝鮮王朝)에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니 이 분이 곧 公의 증조고(曾祖考)가 된다. 祖의 휘(諱)는 위(瑋)로서 文科하여 사정(司正)하고 考의 휘는 문예(文裔)이니 生員하여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를 역임 하였으며 詩名이 있었다. 비(?)는 유인(孺人) 영양이씨(永陽李氏 : 영천이씨)니 부사직(副司直) 현실(玄實)의 女로 대전선생(大田先生) 보흠(甫欽)의 姉氏이다. 公은 永川郡北 大田村 제일봉하(第一峯下)에서 成長하였으니 幼年의 모습은 빼어났고 명랑하였으며 총명(聰明)해서 영특(英特)한 기운(氣運)이 있었다. 외숙부(外叔父)인 대전이공(大田李公)을 좇아서 受學하여 문예(文藝)가 일찍 창달(暢達)되어서 同門 受學者들이 公을 따를 수가 없었다. 같은 또래의 소꼽친구들과 公山의 은해사(銀海寺)에 들어가서 독서하고 있을 때에 윤공(尹公) 통(統)이 인근군의 太守로서 놀러 왔는데 그 구종(驅從) 별배(別陪)가 대단히 많았다. 公은 동무들을 이끌고 소고(小鼓)를 울리면서 말하기를 『산당(山堂)에 만도(晩到)하는 것은 고풍(古風)에 그 죄(罪)를 벌(罰)해야 한다고 했도다.』고 하니 尹公은 거짓으로 성을 내어 말하기를『너는 작은 더벅머리 어린아이로서 敢히 장자(長者)를 모멸(侮蔑)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할 것이니라. 그러나 만약 詩를 잘 지을 줄 안다면 그 죄를 용서해 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너에게 매로서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자 公은 드디어『빨리 지어볼 터이니 운자(韻字)를 부르시오』하고서 운자를 정해주자 마자 붓을 들고서 선 자세로서 詩를 지어 써 내려감으로써 보는 이마다 놀랐다. 이를 본 尹公은 크게 칭찬하며 기이(奇異)하게 여기더니 마침내 그 딸과 혼인을 시켜서 사위로 삼았다. 정통(正統) 丁卯(1447년)년의 봄에 文科에 及第하여 成均? 학유(學諭)에 보(補)해졌다가 가을에 文科 중시(重試 : 試題는 八駿圖)에서 성삼문(成三問)과 동방(同榜)으로 급제(及第)하였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바야흐로 文學을 重히 여겨서 이 文科에서 同時에 선발(選拔)된 급제자(及第者)들이 진신(搢紳 : 홀(笏)을 큰 띠에 꽂는다는 뜻으로 높은 벼슬아치나 행동이 점잖고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서의 영화(榮華)로움을 누린 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 대전이공(大田李公)은 詩를 드려서 그 妹夫인 교도공(敎導公)과 서로 축하를 했다. 成公 삼문(三問)은 이미 방수(榜首 : 壯元)요 朴公 팽년(彭年)과 李公 개(塏)와 柳公 성원(誠源)도 동방(同榜) 급제자(及第者)들로서 같은 방중(榜中)에 있었으니 公은 드디어 더불어 交友를 정하고 경적(經籍)을 동연(同硏)하며 명예와 節義를 격려(激勵)하여 막역지교계(莫逆之交契)를 맺었다. 公은 이미 成均?으로부터 집현전(集賢殿)으로 옮겨서 그 명성을 날렸고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천보(遷補)되니 世上에서는 모두가 다 公은 君主를 보필(輔弼)하는 그릇이라고 期待를 걸었다. 乙亥년(1455)년에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고 이어서 死六臣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대전이공(大田李公)도 이어서 살육(殺戮) 當함에 미치게 되자 公은 사환(仕宦)의 길에 머물러 있을 뜻이 없었다. 그러나 집에는 어버이가 계시므로 그 두려운 화(禍)가 가내의 父母에게까지 미치게 될까봐서 구설수(口舌數)를 경계하여 입을 다물고 敢히 애안(涯岸 : 물가의 단애. 남과 어울리지 않음)이 되는 行動은 노출(露出)시키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여러차례로 사헌부(司憲府)의 所任이나 사간부(司諫府)의 소임 등을 제수했으나 公은 문득 그때마다 病을 칭탁(稱託)해서 굳이 사임(辭任)하다가 군부(君府)의 소임(所任)에 맞는 外職으로 제수가 내리자 친명(親命)으로써 힘을 내어서 부임하여 부모봉양(父母奉養)에 힘을 입었으나 즐긴 바는 아니었다. 의성현령(義城縣令) 영천군수(榮川郡守 : 오늘날 영주) 예천군수(醴泉郡守) 함양군수(咸陽郡守)등의 수령(守令)를 역임했으나 모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서 곧 직(職)을 버리고 돌아갔으나 부임한 곳마다 모두 善政으로써 治績이 名聲을 남겼으니 당시 榮川郡守로 재임 시에는 무릇 시설(施設)한바 모든 동정(動靜)과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자로 잰 것처럼 해서 오직 진실하고 엄격하게 신실(信實)로서 上部를 받들고 깊은 情과 따뜻한 분위기로 百姓을 사랑하고 强直하게 질투와 비리를 물리쳐서 一年이 못되어서 民政은 바로잡혀서 백성들은 서로 平和롭게 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政事가 확립되자 그 여력(餘力)으로써 누(樓)와 원(院)을 증건(增建)하여 그 곳을 방문하는 官員이나 내빈(來賓)들을 기분좋게 맞이하게 되었으나 한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거나 그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았고 또 국고(國庫)를 축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때 조정(朝廷)의 관원이 그 郡에 와 있었지마는 이 공사역(工事役)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향서당(鄕序堂)을 지어서 좋은 名節마다 향부로(鄕父老)와 士大夫들을 맞이해서 향음례(鄕飮禮 :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향로들에게 예를 올리는 잔치)를 行하고 향사의(鄕射儀 : 고을의 한량들이 모여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룸. 酒饗을 겸함)도 開場하는 同時 더불어서 서로간에 예의를 지켜서 사양지심(辭讓之心)도 습득하게 하고 社會의 풍속敎化에도 돈독(敦篤)하게 이끌었고 또 각 마을의 子弟들을 모아서 讀書를 하여 그 재주와 人品을 기르게 해서 여기에서 유예(游藝 : 예를 배움. 예를 즐김)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進行課目에는 조금도 게으름을 짓지 않도록 권장하고 인(因)하여 향규약간조문(鄕規若干條文)을 지어서 永久히 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군지(郡誌)을 찬(撰)해서 고적(古迹)도 記錄하여 後世에 전하도록 했더니 郡中의 人心이 和合하여 저절로 한 곳으로 모여졌다. 점필재(?畢齋) 김문충공(金文忠公) 종직(宗直)이 일찍이 영천(榮川)의 소루(小樓)의 記文을 썼는데 가로되『이 읍에는 어진 郡守로서 뛰어나게 나타났던 人物로 郡民들이나 世上人들의 耳目에 남아있는 분들로는 하호정(河浩亭) 윤(崙)과 정공(鄭公) 습인(習仁)과 최공(崔公) 원유(元濡) 등 三人이 있었고 現在의 郡守 오천정선생(烏川鄭先生)도 이와 同等한 류(類)의 한 분이다. 살펴보면 公이 榮川의 守令으로 부임해서 시정(施政)한 치적이 가히 입증될 것이다. 이와같이 다스린 고을이 의성과 함양과 예천 등으로서 모두 영천(榮川)에서 베풀던 치법(治法)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그 後에 이 法을 各邑 수령들이 모두 利用했음을 記錄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도 이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면 가히 고증(考證)할 수가 있다. 辛卯(成宗2年, 1471)年에 전라도(全羅道) 진휼사(賑恤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다녀온 後에 성균관(成均?) 사성(司成)을 제수하여 역임했으니 이가 마지막 관직이었다. 종손(宗孫)이 표박(漂迫 : 일정한 주거나 생업이 없이 떠돌아 다니며 지냄)하여 가첩(家牒)의 부전(不傳)으로 인하여 生年과 졸세(卒歲 : 돌아가신 연세)를 고증할 길이 없으며 前後 이력도 同時에 모두 상세하지 못하고 유문(遺文) 유묵(遺墨)도 모두 흩어져서 잃어버렸고 단지 詩 四篇과 책(策) 二篇과 書와 전(箋)과 발(跋)이 각일편씩 傳해오고 있으며 그 글들이 모두 전아(典雅 : 사물의 준칙에 맞고 아담함)하고 유법(有法)하고 책(策)도 건려(健麗)하고 굉박(宏博)해서 실(實)로 경륜(經綸)이 구비(俱備)되어 있었으니 만약 장상(將相)을 맡았더라면 묘당(廟堂)에 올라가서 반드시 大事業의 업적을 이루어서 그 명성이 역사에 傳함이 있었을 것이나 불행히도 재앙(災殃)이 있는 時代를 만나 그 능력을 밝게 펴볼 기회를 조금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천운(天運)이 아니리오. 그 뜻은 맑았고 그 자취는 위태(危殆)로웠고 그 행로(行路)는 고(苦)되었으나 참고 견디며 어두운 세월에 깊게 잠겨서 父母에게까지 누(累)를 끼침이 없도록 중용(中庸)을 지키며 시종(始終) 근심 속에서 산 것이니 그 心中의 어려웠던 바가 어떠했으리오. 孔子가 말한『류하혜(柳下惠 : 주 참조)는 젊어서부터 줄곧 一身에 욕(辱)이 되어도 그 뜻을 굽혔느니라』했다. 『더듬어 보면 그 언론(言論) 중에 倫理가 있고 행지중(行止中)에 義理가 있었으니 그 의치(義致)를 아는 者는 가히 公의 心事를 알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별세 후 원당리(元堂里)의 간좌곤향지원(艮坐坤向之原)에 장사(葬事)를 지냈으니 즉 증조고(曾祖考) 판서공(判書公)의 묘소의 우록(右麓)이다. 숙인(淑人) 윤씨(尹氏)의 묘소는 공묘(公墓)의 위에 있으니 그 上下의 거리가 十步 가량이 된다. 윤씨는 本貫이 평산인(平山人)으로서 父 통(統)은 관(官)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公은 三男 一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이휘(以揮)로 장수도(長水道 : 영천시 신녕) 찰방(察訪)하여 점필재(?畢齋) 김공(金公)이 시객(詩客)이라 칭하여 함께 읊은 창수(唱酬)가 많다. 다음은 이교(以僑)로서 전랑(銓郞)을 역임하고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 교리(校理)로 끝났다. 다음은 이심(以諶)으로 文科하여 持平이다. 딸은 권흠조(權欽祖)에게 출가(出嫁)했다. 찰방공도 五男을 두었으니 차순(次諄)은 직장(直長)이요 다음은 차함(次?)과 차해(次諧)와 차성(次誠)과 차근(次謹)이다. 교리공도 五男을 두었으니 공징(公徵)은 서윤(庶尹)이요 공건(公虔)은 첨정(僉正)이요 공필(公弼)은 郡守요 공청(公淸)은 현감이요 공예(公藝)는 참봉(?奉)이다. 이심(以諶)은 四男을 두었으니 공영(公英)과 공걸(公傑) 공준(公俊) 공형(公亨)이다. 증손과 현손 以下는 점점 더욱 번성(繁盛)해서 지금 그 後孫으로서 연락되는 생존자 數가 거의 이백여 명으로서 詩人 묵객(墨客)과 관면(官冕)들이 代를 이어 끊어지지 않았으니 그 가운데에서 명성(名聲)과 德行이 가장 높은 이는 차근(次謹)의 子 참봉(?奉) 윤량(允良)과 손(孫)에 증판서(贈判書) 세아(世雅) 그리고 증손에 증승지(贈承旨) 의번(宜藩) 그리고 현손에 文科하여 牧使한 호인(好仁)이요 공징(公徵)의 五代孫인 통제사(統制使) 후량(后亮)과 공필(公弼)의 子 좌랑 창무(昌武) 증손(曾孫)에 헌납(獻納) 유번(維藩)이있고 공예(公藝)의 현손에 승지 계주(繼?)가 있고 그 나머지의 비관(?官 : 직위가 낮은 벼슬아치)과 小科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9세손 중기 근찬.
※ 柳下惠 :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대부로 賢者. 본명은 展獲, 식읍이 류하이고 시호가 혜이므로 류하혜라 함. 정도를 굽혀서 남을 섬길진대 하필이면 부모의 나라를 떠나야 되느냐 하였고, 더러운 임금을 섬기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였고, 작은 벼슬도 사양하지 않았음.
13世
┌ 이휘(以揮) : 牧使 ····> 16世 景禧(····> 21世 道平)
├ 이교(以僑) : 校理(정5품) ····> 16世 堯臣(····> 20世 ?)
├ 이심(以諶) : 持平(정5품) ····> 16世 復好(····> 21世 起明)
└ 權欽祖
以揮 (牧使公)
○ 字는 子健이며 官職은 長水道察訪, 通訓大夫 持平, 直提學, 楊洲牧使
○ 配位 : 淑人 昌寧 吳氏로 生 二子一女. 繼配는 淑人 春川 朴氏로 孝佃의 따님이며 縣監 農의 孫女.
○ 墓所 : 永川市 嗚尾洞 三歸(祖 生員公 墓所 階下, 配位 한분은 合?). 墓所 아래 三歸齋가 있음.
○ 墓祀日 : 陰曆 10月 17日
以僑(校理公, ?~1498년 12월 15일)
○ 字는 子美이며 號는 晩翠堂.
○ 1468년에 進士, 1470년에 別試文科하여 吏曹佐郞을 하시다가 1486년에 重試文科하여 通政大夫 司憲府掌令(정4품), 銓郞, 翰林, 弘文館校理 등 역임.
○ 戊午史禍로 함경남도 함흥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돌아가셨으며,
○ 配位는 淑夫人 安東權氏로 司直 致遜의 따님이며 繼配는 淑夫人 和順崔氏로 節制使 漢伯의 따님이다.
○ 묘소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태화동 太和山에 계배 묘소와 같이 있으나 안동권씨 묘소는 실전.
○ 주세거지 : 金山(金泉)<육군대장 昇和 門>.
以諶(持平公)
○ 字는 虞鄕이며 號는 魯山으로 1486년 仲兄(以僑)과 함께 重試文科하여 司憲府持平. 배위 묘소등은 실전이다.
○ 주세거지 : 선산.
牧使公 諱 以揮 墓碑陰記
公諱以揮字子健姓鄭貫烏川始祖諱襲明高麗樞密院知奏事五傳諱宗興進賢?提學生諱林版圖判書生二子長曰贈開城尹諱仁壽乃圃隱公曾祖次曰仁彦官典工判書峻烈乎斯道之義著有華海師全號松磵卽公五代祖也高祖諱光厚至麗末邃遁子弟而遁籍錢村逮鮮朝召命爲工曹判書遂免貫革之危亨齋李相公稷輓公曰總角情親至背?人間豈獨有陳雷甑山共被森如昨甘露交換久未追嗚呼觀於此可以知公去就之義矣曾祖諱瑋敦勇校尉雄武侍衛司後領司正祖諱文裔初諱淮衡生員歷靈山儒學敎導自錢村出郡北大田里考諱從韶文科重試官司成事端廟配肅慕殿?淑人平山尹氏參判統女生三子公其長也行長水道察訪後現初諱而恭以成化丙戌登文科官署令別提龍安縣監己亥重試辛丑進奉列大夫任司憲府持平遷吏曹轉拜直提學陞通政大夫行楊州牧使以某年九月七日卒墓鳴山里三歸洞祖考下子坐原配淑夫人昌寧吳氏繼配淑夫人春川朴氏孝佃女墓一位合?一位在西火城內不可辨位?火城墓佚而未傳悲夫有五子曰次諄直長次?无后次諧无后次誠察訪次謹宣務郞次諄子灝參奉次誠子允溫允儉皆參奉次謹子允良遺逸參奉允恭奉事灝男景禧禦侮將軍允溫男彦琛參奉彦琡无后允儉男是雅无后就雅聆雅允良男世雅進士壬亂首倡義旅鄕人推以爲將復永川城贈兵曹判書諡剛義允恭男貴雅兵侯景禧男?孝旌司僕岑孝薦副尉彦琛男應瑞武科訓練院正壬亂樹功錄宣務原從二等勳應箕就雅男之藩于藩聆雅男而藩无后汝藩訓導世雅男宜藩生員殉節于月城戰贈參判旌忠孝維藩安藩副司果守藩內禁衛將貴雅男寧藩以後益繁于今姓孫數千戶冠冕與儒行不絶玆可略噫今距公世久且遠矣其生卒?立言庸行做官履歷之不多傳勢所固然而蓋公仕在成宗晟明之世見王朝實錄當上十二年辛丑五月有上奏啓辭數十言也野史亦梅溪曺公偉所撰止止堂金公孟性詩集序云僚友鄭子健極力經紀乃克又見嘗與?畢齋金共宗直友善有唱酬諸篇於郡舍歡飮之詩曰吏部風流伯仲間悤悤爲別想應難是壬寅三月也又有金山客?之吟云積雨眞成天柱爛崩濤却向海門歸又觀漲鄕校之前峰遊曰携壺鰲背共??積雨晴來畏景長以是可測其道交之甚厚者竟至戊午禍及於畢翁遭泉壤之戮梅翁杖流於遠竄校理公以僑卒于咸興持平公以諶遁去善山三子亦?跡於沙川陵溪獐項等必悉?命涉難若枳棘之道乎惟幸繼後烏可以冀咳唾之保然百世而不可泯者揆地之三傳也至正廟後孫夏浚得公蹟於科榜目一鑽記事實淵世製行錄近者起洪照會於史廳而確認遂成公事行之實旣晦而復顯也有舊碑未遑於記陰只書面刻察訪而已方營齋長族叔淵國以門議補修于墓域與齋舍及通路將竪改碣命喜永爲陰記焉敢辭謹据史料?括而略記如右
癸亥十月 十日 十六代孫 喜永 謹記
목사공 휘 이휘 묘비음기
公의 휘(諱)는 이휘(以揮)며 자는 자건(子健)이요 성(姓)은 정씨(鄭氏) 본관(本貫)은 오천(烏川)이라. 始祖의 휘는 습명(襲明)으로 고려의 추밀원지주사 하다. 오대(五代)를 전(傳)하여 휘는 종흥(宗興)이요 진현관(進賢?) 제학(提學)하고 휘 림(林)을 낳으니 판도판서(版圖判書)하여 두 아들을 두니 長子는 개성윤(開城尹)의 증직(贈職)을 받은 휘 인수(仁壽)로 포은선생(圃隱先生)의 曾祖요 次子는 휘가 인언(仁彦)으로 官職은 전공판서(典工判書)이며 유교(儒敎)의 서릿발 치는 義理에 對한 기품(氣稟)이 준엄(峻嚴)하고 격렬(激烈)했으니 그 사적(事蹟)은 화해사전(華海師全 : 簡齋 申用羲의 사실 기록. 원천석, 원세동 등이 엮은 고려조의 사상지)에 등재(登載)되어 있다. 호(號)는 송간(松磵)이니 즉 公의 五代祖이니라. 高祖는 휘 광후(光厚)이니 고려의 末에 이르러서 그 子弟들을 깊이 숨겨두고 <가문(家門)에 닥칠지도 모를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避)하게 해놓고> 전촌(錢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가서 공조판서(工曹判書)의 발령을 받자 거부하지 않고 수임(受任)해서 드디어 적대시(敵對視)하며 우리 가문을 주시(注視)하고 있던 그 관혁(貫革 : 과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형재(亨齋) 이상공(李相公) 직(稷)이 公의 졸후(卒後)에 보낸 만서(輓書)에 말하기를 『총각 때 서로 친하던 情이 늙어서는 등을 돌리게 되었구나. 人間이 어찌 홀로 서야 벼락을 칠 수가 있으리오. 시루 안에 함께 갇혀 삼엄(森嚴)할 때가 어제 같은데 단 이슬 맞으면서 오래 좇지 못했구나』고 했다. 曾祖는 휘가 위(瑋)이니 돈용교위(敦勇校尉) 웅무시위사후령사정(雄武侍衛司後領司正)이었다. 祖는 휘가 문예(文裔)이다. 초휘(初諱)는 회형(淮衡)이다. 成均生員이 되어 영산유학(靈山儒學) 교도(敎導)를 역임한 後에 전촌(錢村)으로부터 永川郡北의 大田里로 옮겨가서 살았다. 고(考)의 휘는 종소(從韶)로 文科하여 重試를 거쳐 벼슬은 司成을 지냈다. 단종(端宗)을 섬겨서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었다. 비(?) 숙인(淑人)은 平山 尹氏로서 참판 통(統)의 女이다. 三子를 낳았으니 公은 그중에서 長子였다. 행직(行職)은 장수도(長水道 : 영천 신녕)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後世에 발현(發現)되기를 초휘(初諱)는 이공(而恭)으로서 성화(成化) 丙戌년(1466)에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서령(署令) 별제(別提) 용안현감(龍安縣監)을 지내고 己亥년(1481)에는 중시에 及第해서 辛丑년(1481)에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조(吏曹)로 옮겼다가 後에 직제학(直提學)을 거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양주목사(楊洲牧使)를 지내고서 某年 九月 七日에 卒하였다. 묘소는 명산리(鳴山里) 삼귀동(三歸洞 : 영천시 오미동) 祖父 교도공(敎導公) 휘(諱) 문예(文裔)의 묘계하(墓階下) 자좌지원(子坐之原)에 있다. 배(配)는 창녕오씨(昌寧吳氏)이다. 계배(繼配)는 춘천박씨(春川朴氏) 효전(孝佃)의 女이다. 묘소가 한 위(位)는 합폄(合?)이고 한 위는 서편에 있는 화성내(火城內)에 있으나 분별을 할 수가 없고 황차(況且) 화성내에 있는 묘소는 실묘(失墓)를 해 확인할 수 없으니 슬픈 일이로다. 다섯 아들이 있으니 가로되 차순(次諄)은 직장(直長)이요 차함(次?)은 무후(無後)요 차해(次諧)도 무후(無後)이다. 차성(次誠)은 찰방(察訪)이며 차근(次謹)은 선무랑(宣務郞)이다. 차순(次諄)의 子 호(灝)는 참봉이요 차성(次誠)의 子 윤온(允溫), 윤검(允儉)은 모두 참봉이다. 차근(次謹)의 子 윤량(允良)은 학덕(學德)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에 제수(除授)되었다. 윤공(允恭)은 봉사(奉事)이다. 호(灝)의 아들은 경희(景禧)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요 윤온(允溫)의 아들은 언침(彦琛)이니 참봉이고 언숙(彦琡)은 무후이다. 윤검(允儉)의 子 시아(是雅)도 무후이며 취아(就雅)와 영아(聆雅)가 있다. 윤량(允良)의 男 세아(世雅)는 進士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수위(首位)로 의거(義擧)했더니 향인(鄕人)들의 추대(推戴)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영천성(永川城)을 복성(復城)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강의공(剛義公)이라 시호(諡號)를 받았다. 윤공(允恭)의 男 귀아(貴雅)는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경희(景禧)의 男 억(?)은 효행(孝行)으로써 정려(旌閭)가 내려 사복(司僕)에 제수되었다. 잠(岑)은 孝道로써 전력부위(展力副尉)에 천거되었다. 언침(彦琛)의 男에 응서(應瑞)는 무과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하고 임란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이등훈(宣武原從二等勳)에 록(錄)되었고 응기(應箕)가 있다. 취아(就雅)의 男에는 지번(之藩)과 우번(于藩)이 있다. 영아(聆雅)의 男 이번(而藩)은 無後하고 여번(汝藩)은 훈도(訓導)이다. 세아(世雅)의 아들에 의번(宜藩)은 生員하여 월성전(月城戰 : 경주성 전투)에서 순절(殉節)함으로써 이조참판에 증(贈)되고 충신효자지가문(忠信孝子之家門)이라 정려(旌閭)가 내렸다. 유번(維藩)이 있고 안번(安藩)은 부사과(副司果)하고 수번(守藩)은 내금위장(內禁衛將)이다. 귀아(貴雅)의 男은 영번(寧藩)이다. 以後로는 더욱 번창(繁昌)하여 지금에 와서는 성손(姓孫)이 수천호(數天戶)이며 관면(冠冕)과 유행(儒行 : 漢學者)이 끊임이 없었으나 이에 可히 약(略)하노라. 아! 이제 公의 재세시(在世時)와는 서로의 거리가 오래되었고 또 아득히 멀도다. 그 태어나신 년대와 돌아가신 해와 함께 後世 길이 남길 校訓이나 평소의 行하던 德行이나 관직에서의 공적 또는 그 이력들이 많이 전하지 못한 사실등은 진실로 어쩔 수 없는 형편이나 그러나 대개 公이 관직에 재직할 때는 성종조(成宗朝)의 政治가 잘 다스려지던 世上이었는데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조하면 당상(當上 : 성종) 十二年 辛丑년(1481) 五月에 상주(上奏)했던 계사(啓辭) 수십언(數十言)이 있다. 야사(野史)도 매계조공(梅溪曺公) 위(偉)가 찬(撰)한 지지당김공맹성시집(止止堂金公孟性詩集)의 서문(序文)에 보면 동료(同僚)이며 친우(親友)인 정자건(鄭子健)이 극력(極力)으로 경영(經營)하여 그 뜻을 관철(貫徹)하였고 또 일찍부터 점필재(?畢齋) 김공(金公) 종직(宗直)과 좋은 친우지간(親友之間)으로서 주고 받은 詩文들이 있으니 한번은 여러 벗들이 군사(郡舍)에 모여서 환음(歡飮 : 즐겁게 술을 마심)중에 읊은 詩에 말하기를『우리들은 서로가 이부(吏部 : 중국 晉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며, 이부상서를 지낸 山濤와 酒豪인 이부랑 畢卓을 이름. 둘 다 풍류가 뛰어남)의 풍류(風流)를 즐김에 백중간(伯仲間)이었는데 이다지도 갑작스럽게 작별하기는 응당 어려웠으리』라고 했으니 이가 壬寅년(1482) 三月이었다. 또 금릉객관(金陵客?)에서 詩로서 和答하며 읊음이 있었으니 가로되『오래된 장마가 정말로 천주(天柱 : 하늘을 바치는 기둥이라는 뜻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는 도의)를 문드러지게 하고, 무너져 내리는 파도(波濤) 밀려나는 물줄기 해문(海門)을 향해 돌아가네.』또 향교 앞 산봉우리에서 회유(會遊)할 때 읊은 詩에 가로되『술병(酒壺)들고 오산에서 함께 소풍(逍風)할 때 오랜 장마 개인 날에 그 상쾌(爽快)하던 경색(景色)이여』이로서 可히 그 도교(道交)의 심후(甚厚)했음을 추측할 수 있도다. 마침 무오사화(戊午史禍 : 1498년)에 이르러서 그 화가 점필재(?畢齋)의 구천(九泉)에까지 미치고 조매계(曺梅溪)옹도 원지(遠地)에까지 장류(杖流)시켰으며 동생 교리공(校理公) 이교(以僑)는 함흥(咸興)에서 졸(卒)하고 지평공(持平公) 이심(以諶)은 선산(善山)으로 갔으며 아들 삼형제도 모두 자취를 감추어 사천(沙川 : 영천시 화남)과 능계(陵溪 : 영천시 화남)와 장항(獐項 : 영천시 자양 노항) 등으로 흩어졌으니 이는 필연코 모두 가시밭 같이 어려운 발길 오직 家門의 보전(保傳)을 爲한 길이었다. 여기에서 생각할 때 다행히도 뒤를 이으면서 어른의 말씀이나 훈계(訓戒)를 어찌 가히 바랄 수가 있었으리오. 그러나 百代를 내려가도 可히 민멸(泯滅)하지 않고 전해준 것을 살펴보면 세가지의 傳함이 있으니 그것은 정조조(正祖朝)에 이르러서 구대손(9代孫) 하준(夏浚)이 公의 행적(行蹟)을 과방목(科榜目)에서 얻었다. 이를 팔대손(8代孫) 일찬(一鑽)께서 그 사실을 기(記) 하였다.近世에 이르러서 족숙(族叔 : 15代孫) 연세(淵世)는 행록(行錄)을 찬술(撰述)하고 근년에 기홍(起洪)이 사청(史廳)에 조회 확인하여 드디어 公께서 이룩하신 行蹟이 오랫동안 숨어있다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도다. 옛날에 비(碑)가 있었으나 음기(陰記)는 없이 다만 표면(表面)에 찰방(察訪)이라는 대자(大字)만 새겨져 있을 뿐이더니 바야흐로 재장(齋長)인 족숙(族叔) 연국(淵國)은 묘역(墓域)과 재사(齋舍)를 보수(補修)하고 겸해서 통로를 개설하고 묘비(墓碑)도 개수(改竪)하기로 계획하여 문의(門議)로서 희영(喜永)에게 命하여 그 음기(陰記)를 짓게 하니 어찌 감히 사양할 수가 있으리요. 삼가 사료(史料)를 고증(考證)해서 긴요(緊要)한 部分만을 간추려서 그 대략을 앞과 같이 기술(記述)했노라.
계해(1983년) 10월 17일
16대손 희영은 삼가 짓고 쓰다.
※ 희영은 山南義陣 大將 丹吾 鎔基의 손자. 호는 笑軒, 한학자.
※ 1. 김종직(1431~1492) : 관향은 선산, 자는 계온, 호 점필재, 시호 문충.
2. 김맹성(1437~1487) : 관향은 해평, 자는 善源, 호 지지당, 세종 때 문신, 학자,
김종직의 제자, 지지당시집.
3. 조위(1454~1503) : 관향은 창녕, 자는 太虛, 호 매계, 김종직의 처남이며 문인,
시호 문장.
4. 鄭錫堅(?~1500) : 관향은 해주, 자는 子健, 호 한벽당, 현감, 지평, 이조정랑,
동부승지, 대사간, 이조참판, 김종직 문집 간행. 김종직, 정여창과 道義交.
※ 국조방목록에 以揮는 없고 而恭은 있으며 世系는 일치되나 서산정씨 而恭(繼韶의 아들)과 서로 착오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고, 즉 而恭과 而得이 방목록에는 從韶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서산정씨 족보에는 繼韶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지지당 시집 서문에 鄭子健은 해주정씨 錫堅의 字라고 되어 있으며, 점필재 문집에도 鄭致韶, 鄭子健(以揮의 字)과 鄭子美(以僑의 字)와 관계되는 시가 있고, 연령대가 비슷하나 정자건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움. 우리 족보에는 而恭과 而得이 없음.
14世
┌ 차순(次諄) : 沙皐公, 直長(종7품) ····> 21世 道平
├ 차함(次?) : 無後
├ 차해(次諧) : 無後
├ 차성(次誠) : 華隱公, 通訓大夫 平丘道 察訪 ····> 21世 斗甲
├ 차근(次謹) : 宣務郞(종6품) ····> 21世 重祿
└ 李繼世
次諄(沙皐公)
○ 字는 和甫이며 號는 沙皐이고, 官職은 直長이며 배위는 淑人 慶州金氏로 묘소는 영천시 신녕면 고현리 방동 방학산.
○ 주세거지 : 沙川
次誠
○ 字는 愼夫이며 호는 華隱이고 通訓大夫 平丘道察訪(경기도 양주)을 지내셨고, 배위는 淑人 慶州金氏이며, 공의 묘소는 영천시 신령면 대양곡 덕동이고, 배위 묘소는 영천시 신녕면 대양곡 숙현.
次謹 (宣務郞公)
○ 字 : 愼甫
○ 官職 : 宣務郞
○ 配位 : 碧珍 李氏로 培源의 따님이며 生員 恂의 孫女이고 端宗朝 生六臣의 한사람인 正言 孟專의 曾孫女.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墓所 서쪽 등에 夏泉齋가 있음.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 6남매(5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永川市 大田洞에 계시다가 戊午史禍(연산조 1498년)를 피하여 영천 자양면 노루목(노항)<영천댐으로 수몰됨>으로 오신 紫陽 入鄕祖이며 夏泉 首位이시다.
무오사화는 ?畢齋 金宗直을 몰아부친 士禍로 世誼가 깊었던 우리 가문에 미칠 화를 피하여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니 사고공은 사천으로, 화은공은 능계로, 귀소공후는 화산으로, 좌랑공후는 북안도천으로, 교리공후는 금산(김천)으로, 지평공후는 선산으로, 훈도공후는 녹전으로 각각 은입하셨다.
宣務郞公 諱 次謹 墓碑陰記
公諱次謹字愼甫高麗毅宗朝樞密院知奏事滎陽先生諱襲明之後也高祖諱瑋雄武侍衛司後令司正曾祖諱文裔生員靈山儒學敎導祖諱從韶文科重試歷銓郞後外補義城榮川醴泉咸陽等邑皆有聲績至成宗朝再起爲成均司成考諱以揮文科重試歷持平直提學牧使察訪?淑夫人昌寧吳氏春川朴氏公朴氏出也公生於大田里考牧使公?朴氏俱歿後隱迹於究理內獐項村蓋以史禍之餘波追考也因此其後?墓丘陵未詳只有口傳火城內云配星州李氏耕隱先生孟專孫培源之女生二男長允良修學于退溪先生門下逸薦參奉不就號魯村次允恭奉事墓在永川紫陽騎龍山夏泉亥坐雙墳往在孝宗甲戌寒食日刻碣文竪之檀紀四千二百九十九年丙午十月 日改立
선무랑공 휘 차근 묘비음기
공의 휘는 차근(次謹)이요 자는 신보(愼甫)니 고려 의종조(毅宗朝)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형양(滎陽)선생 휘 습명(襲明)의 후손이다. 고조의 휘는 위(瑋)니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뒤에 사정(司正)을 맡았고 증조의 휘는 문예(文裔)니 생원으로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요, 조의 휘는 종소(從韶)니 문과중시하여 전랑(銓郞 :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의 정6품 정랑과 종6품 좌랑)을 역임하고 후에 외직에 보하여 의성(義城), 영천(榮川:영주), 예천(醴泉), 함양(咸陽) 등 고을을 살았으니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성종(成宗)조에 이르러 성균사성(成均司成 : 성균관 유생들의 유학교육을 담당하는 관직, 종3품)이 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창녕오씨와 춘천박씨니 공은 박씨에서 났다. 공은 대전(大田)리에서 났으며 아버지 목사(牧使)공과 어머니 박씨가 모두 돌아가시고 후에 구리내(究理內:지금의 자양) 노루목(노항)에 은거하였으니 대개 사화(史禍)의 여파라 짐작이 된다. 이것으로 인해 어머니의 묘소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다만 입으로 전해 오기를 화성(火城)안에 있다고 말한다. 배(配)는 벽진이씨 경은(耕隱)선생 맹전(孟專)의 손자 배원(培源)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 윤량(允良)은 퇴계(退溪)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서 참봉(參奉)으로 일천(逸薦)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호는 노촌(魯村)이다. 차남은 윤공(允恭)이니 봉사(奉事)이다. 묘는 영천군 자양면 기룡산 하천(夏泉) 해좌(亥坐)에 있으니 쌍분이다. 조선 효종 갑술년 한식일에 비에 글을 새겨 세웠다. 그 후 단기 四二九九년(1966) 시월 일에 다시 고쳐 세웠다.
※ 구비의 세운 연대가 효종 갑술이라 했으나, 효종 재위 기간에는 갑술년은 없으니 연대의 착오가 아닌지?
15世
┌ 윤량(允良) : 將仕郞(종9품) ····> 21世 重祿
└ 윤공(允恭) : 奉事公 ····> 21世 重仁
允良 (魯村公, 中宗 乙亥 1515年 ~ 宣祖 庚辰 1580年 3月 13日)
○ 字 : 元佐
○ 號 : 魯村
○ 官職 : 將仕郞, 昌陵參奉
○ 配位 : 永川 崔氏(?~宣祖 戊辰 1568年 3月26日)로 奉事 德?(덕금)의 따님이며 生 一子, 墓所는 ?左 雙墳. 繼配 역시 永川 崔氏로 墓所는 公墓 四十步 乾坐.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考墓上 亥坐.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 어려서부터 효자로 불리었고 父公이 돌아가시자 그 효도의 영험으로 雪鶴大師라는 老僧이 나타나서 하천 묘터를 점지하고 사라졌다함.
○ 그후 陶山으로가 退溪 門下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와서는 紫陽 書堂을 지어 후진을 위한 學論을 폈으며 洞名 노루목을 魯巷이라 고치고 自號를 魯村이라 하셨다.
○ 1553년(明宗 癸丑) 鄕人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등과 더불어 浮來山(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圃隱 先生 書院을 創建하고 書院 규모와 편호(扁號)는 退溪 先生께 품하여 정하고 臨皐書院이라 賜額받다.
魯村公 諱 允良 墓誌銘 幷序
嘗讀高麗史至知奏事鄭公襲明事涕泣想見其爲人求其子孫十世而有圃隱先生先生曾祖仁壽有弟仁彦官至典工判書生工曹判書光厚其曾孫從韶銓曹郞嘗學於舅李大田甫欽與成朴諸公善及六臣誅而興州?屛廢丘園?畢
翁嘗稱烏川鄭先生是爲公曾祖大父諱以揮長水道察訪考諱次謹早卒?星州李氏耕隱先生孟專之曾孫生公永川紫陽里之魯巷村公諱允良字元佐自幼有器量力學不倦弱冠拜李先生于陶山講質經義退而與同門諸名流相刮磨同郡又得明山金公應生沙洞盧公遂以道義相推許而公與同里金公相與築紫陽書堂讀書養後進又就圃隱先生故里?臨皐書院以祀先生其立院規模悉稟李先生先生爲初享文歷敍三公出財敦事之義其落成又規宴用之侈而要令從簡爲久遠規黃錦溪俊良記紫陽書堂而亦稱公樂善愛士隱然有敦倫成俗之意其爲師友之所??如此公性至孝事兩親人無間言及先公卒卜葬開壙聚土自篩沙石草根有僧過視公所爲語從者曰彼棘人誠孝子也何爲舍吉地爲役者竊聽告公公步追之十餘里僧還公一山曰葬此後必多賢君子公改卜日葬之所謂夏泉原者公一弟允恭同室而居及求分異則爲之?然不樂亦擇其?土少僕以業之待宗族無間疎戚遇尊行卑下之禮甚子弟或有不如戒則嚴責之人規其違俗公曰家法始乎嚴常卒乎怠?先率之不嚴乎公舅子死不得葬地則與夏泉一麓鄕黨服其義或宗姻不相能輒相戒曰得無愧魯村公乎公天資旣厚而親炙大賢知俗學之陋敦行孝悌以興起斯文爲己任措置學舍宗祀先賢使窮鄕晩學有所觀感而成就永之彬彬多文學之士自公始朝廷聞其賢除淑陵郞復除昌陵郞俱不起常靜居以經史自樂逍遙山水間及卒?葬先公墓後六七步向巳公再娶皆永陽崔氏元配奉事德?之女?公墓左後配無後其葬在公墓西十步許公一子曰世雅中進士當壬辰難倡義復永川城讓功不居薦授黃山道察訪後贈兵曹判書諡剛義號湖?生四男二女長宜藩生員湖?公之擊東城敵力戰死之贈左承旨後贈吏曹參判旌忠臣孝子之家門次汝頌早夭次安藩司果次守藩副護軍女適張雲翼楊遇亨曾玄以下不可勝載而至今號多文學賢者忠孝之世理必如此公後孫一鐸袖諸文書致公行錄一篇于光庭曰願以此銘吾祖光庭?末後生安敢銘故長者辭之不獲則謹敍次如右銘曰古人之學非止爲身旣以自裕亦及於人有?鄭公圃老門孫旣學於師知敎之元??同志交修互倡建學祀賢斯道增光臨?翼翼夏泉蒼蒼鄭公之鄕鄭公之藏 洗馬 李光庭
노촌공 휘 윤량 묘지명 병서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읽음에 지주사(知奏事) 정공 습명(襲明)의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사람됨을 상상해 보았으며 그의 자손을 알아보니 그의 십세손에포은(圃隱)선생이 있고선생의 증조는 인수(仁壽)인데 그의 동생에 인언(仁彦)이 있으니 벼슬이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렀으며공조판서(工曹判書) 광후(光厚)를 낳았고 그의 증손 종소(從韶)는 전조랑(銓曹郞 : 이조좌랑)이니일찍이 외삼촌 이대전(李大田) 보흠(甫欽)에게 배웠으며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제공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고 육신(六臣)의 죽음과 순흥(順興)에서 이대전 등이 화를 당함에 미쳐서는 시골 동산에 은거하였다. 점필재(?畢齋)옹이 항상 공을 오천 정 선생이라 일컬었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증조가 된다. 조의 휘는 이휘(以揮)니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이요, 아버지의 휘는 차근(次謹)이니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벽진이씨는 경은(耕隱)선생 맹전(孟專)의 증손녀이다. 공은 영천 자양 노항촌에서 태어났으니 휘는 윤량(允良)이요, 자(字)는 원좌(元佐)이라. 어려서부터 기량이 있었고 힘써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약관에 李 선생을 도산에서 배알하고 경의(經義)를 강질받고 물러나서는 동문 명류들과 더불어 서로 학문을 갈고 닦았고 같은 고을에 또 명산 김공 응생(明山 金公 應生)과 사동 노공 수(沙洞 盧公 遂)를 얻어 도의로써 서로 사귀었고 공과 김공은 같은 동리에서 살면서 서로 더불어 자양서당(紫陽書堂)을 지어서 글을 읽으며 후진을 양성하였고 또 포은선생 고향마을에 나아가서는 임고서원을 창립해서 선생을 향사함에 그 서원을 세우는 규모는 모두 이선생(李退溪)에게 품의하였으며 선생(퇴계)께서 처음 향문을 지을 적에 三公(정윤량, 김응생, 노수)이 재물을 내고 일을 돈독히 한 것을 역력히 서술하였고 그 낙성에는 또 잔치 등의 사치함을 규제하되 간략함을 좇아 오래 멀리 가게 하는 법을 요구하였다. 황금계(黃錦溪) 준량(俊良)이 지은 자양서당 기문에도 또한 공을 칭찬하기를 선(善)을 즐기고 선비를 사랑하여 은연히 인륜을 돈독히 하고 풍속을 이루는 뜻이 있으니 그의 스승과 벗들의 정성스러운 바가 이와 같았다. 公의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을 섬김에 사람이 관여할 말이 없으며 그의 부친이 돌아가심에 미쳐서는 묘소터를 잡아 광중을 파고 취토하기 위하여 모래와 돌과 풀뿌리를 치고 있을 적에 스님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공이 하는 바를 보고 같이 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저 상주는 진실로 효자인데 어찌하여 좋은 땅을 버리느냐?” 하니,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이 가만히 그 말을 듣고 公에게 알려서 공이 그를 따라 십 여리나 쫒아가니 스님이 공을 돌아보고 한 산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에다 장사하면 뒤에 반드시 어진 군자가 많이 나리라” 하여 날을 다시 받아 거기에다 장사하니 여기가 이른바 하천원(夏泉原)이라.
公의 한 동생이 있는데 윤공(允恭)이니 같은 집에서 살다가 분가하기를 원하니 그를 위하여 수심에 잠겨 즐겨하지 않다가 기름진 좋은 토지와 젊은 노복과 함께 주어서 살게 하였고, 종족을 대우함에는 가깝고 멂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높은 이를 대우함에는 매우 공손한 예를 행하였으며 자제가 훈계함과 같지 않을 때에는 엄하게 꾸짖고, 사람이 그 풍속을 어김이 있으면 공이 말씀하시기를 家法이 엄한데에서 시작하더라도 항상 게으르게 마치는데 하물며 처음부터 엄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공의 외사촌이 죽음에장사할 땅을 얻지못하니 하천 한 자락을 주는 것을 보고 향당에서는 그의 의로움에 탄복하였고 혹 친척 간에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면 문득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노촌공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였다.
공의 자품이 후덕하여 성현들의 학문을 친히 익히고 속학(俗學)의 비루함을 알고는 효와 공경을 돈독히 행하여 유학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을 삼아서 학당(자양서당)을 짓고 선현을 받들어 향사하고 궁벽한 고을의 늦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느껴서 성취하는 사람이 있으니 영천 고을의 찬란한 많은 선비는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정에서 그의 어짊을 듣고 숙릉참봉(淑陵?奉 : 조선 태조의 증조모 貞淑왕후 崔氏능, 함경남도 문천군 도촌면 능전리)을 제수하고 또 창릉참봉(昌陵?奉 : 조선 예종과 계비 安順왕후 韓氏능, 경기 고양 신도읍 용두리)을제수하였으나모두나아가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히 살면서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로써 스스로 즐기며 산수간을 소요하였다.
돌아가심에 미쳐서는 아버지의 묘 뒤 육칠보 사향(巳向)에 장사하였다.
公의 두 배위는 모두 영양최씨(영천최씨)니 원배(元配)는 봉사(奉事) 덕금(德?)의 따님이니 공의 묘 왼쪽에 부장하였고 후배(後配)는 뒤가 없고 묘는 공의 묘 서쪽 십보 쯤에 있다.
公의 한 아들이 있으니 세아(世雅)인데 진사(進士)로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복성하고 그 功은 남에게 양보하였다.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 : 경남 양산시 물금)에 천수(薦授)되었다가 후에 증직이 병조판서요 시호는 강의공(剛義公)이요 호는 호수(湖?)이다. 4남2녀를 낳았으니 장남 의번(宜藩)은 생원(生員)으로 호수공(湖?公)이 경주성의 적을 칠 적에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니 증직이 좌승지(左承旨)이며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고 충신 효자의 가문이라는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차남 유번(維藩)은 일찍 죽고 삼남 안번(安藩)은 사과(司果)요 4남 수번(守藩)은 부호군(副護軍)이며딸은 장운익(張雲翼)과 양우형(楊遇亨)에게 시집갔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文學 賢者가 많다고 불리우니 충효(忠孝)의 후세는 이치가 반드시 이와 같도다. 공의 후손 일탁(一鐸)이 여러 가지문서와 공의 행장(行狀) 한 편을 이루어서 광정(光庭)에게 말하기를 이것으로 우리 할아버지명(銘)을 해 주기를 원하니 광정(光庭)이 보잘것 없는 후생으로 어찌 감히 명하겠느냐하고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삼가 차례로 서술하기를 우(右)와 같이하고 명(銘)을 지어말하기를,
옛사람의 배움은 몸에만 그치지 아니하고스스로가 넉넉하면 남에게도 미침이라. 거룩하도다! 정공(鄭公)은 포은(圃隱)의문손이라, 이미 스승에게 배움에 가르침의 근원을 알고, 저 동지(同志)에 미쳐서는 서로 닦고 부르짖어 학당을 세우고,어진 이를 향사(享祀)하니 유교의 도덕이 더욱 빛나도다. 임고 서원이 빛나고 하천 묘역이 푸르르니, 정공의 고향이요 정공의 무덤이로다.
세마 이광정
※ 李公의 관향은 原州이며 자는 天祥이고 호는 訥隱으로 조선 후기(영조)의 대문장가. 老職으로 嘉善大夫同中樞.
16世
┌ 세아(世雅) : ····> 21世 重祿
├ 만수(萬壽) : ····> 21世 海陽
└ 영수(永壽) : ····> 21世 興陽
世雅 (湖?公, 剛義公, 中宗 乙未 1535年 ~ 光海 壬子 1612年 閏11月 3日)
○ 字 : 和叔
○ 號 : 湖?, 諡號는 剛義
○ 官職 : 1558년(明宗 戊午) 進士, 黃山道 察訪,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정2품)
○ 配位 : 贈 貞夫人 一直 孫氏(中宗 己亥 1539年~光海 壬戌 1622年 6月 12日)로 比安縣監 致雲의 따님이며 參奉 世經의 孫女, 主簿 密陽 孫胤齡의 外孫女.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第一上位.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ㅇ 年譜
1. 1535年(中宗 30年 乙未) : 永川郡 紫陽縣 魯巷村(영천시 자양면 노항동) 옛 댁에서 誕生.
2. 1557年(明宗 12年 丁巳, 23歲) : 比安縣監 一直 孫致雲의 따님과 婚姻.
3. 1558年(明宗 戊午, 24歲) : 進士試 二等 二十七人에 及第(試官 趙士秀, 李浚慶)
4. 1560年(明宗 庚申, 26歲) : 長子 宜藩 誕生.
5. 1565年(明宗 乙丑, 31歲) : 僧 普雨 처단을 상소(高伯樑 應慶, 姜太蘇 雨禹等)
6. 1568年 3月 26日(宣祖 元年 戊辰, 34歲) : 母夫人 別世. 喪事와 祭禮 一切를 朱子 家禮에 따르다.
7. 1574年 5月 27日(宣祖 7年 甲戌, 40歲) : 三子 安藩 誕生.
8. 1576年(宣祖 丙子, 42歲) 겨울 : 玉山書院 文元公 晦齋先生 祠堂 參拜.
9. 1580年 3月 13日(宣祖 庚辰, 46歲) : 父公 別世.
參奉公(父公) 末年에 친구를 위하여 술놀이 하시기를 좋아하셔서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면 손님들이 집에 가득하였다. 公께서는 힘을 다하여 이바지하시고 또한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하시더니 돌아가시는데 이르러서는 슬퍼하고 상념하여 執喪을 制度에 넘게 하고 엄하고 辛苦를 감내하시니 鄕里 사람들이 孝子라고 일컫더라. 服制를 마침에 다시는 벼슬길에 응하지 아니하시고 항상 고요히 한방에 앉으셔서 書籍과 史記를 읽으시어 의리를 강구하시고 날마다 詩와 禮로써 子弟들을 가르치시되 엄하게 과정을 세우셨다. 계신 곳에 龍溪書舍가 있으니 이것은 곧 參奉公이 창건하신 바인데 더욱 닦고 다스려서 마을 안에 자제들을 모아서 글을 읽고 學業을 익히게 하여 순순하게 달래고 권유하고 이끌어 주게 하셨다. 또 紫湖에 별당을 마련하여 오며 가며 쉬시고 또한 서식하시면서 詩와 술로써 스스로 즐겨하셨다.
4月 20日 : 셋째 아드님 守藩 誕生.
10. 1585年 가을(宣祖 乙酉 51歲) : 長子 宜藩이 成均館 生員에 합격.
11. 1590年 7月(宣祖 庚寅, 56歲) : 조여수 덕기(曺汝? 德驥), 금문원 난수(琴聞遠 蘭秀)와 함께 柳汝元 汀의 송호정사(松壕精舍)에서 산과 바다로 더불어 詩를 주고 받다.
12. 1592年 4月 13日(宣祖 25年 壬辰, 58歲) : 壬辰倭亂이 일어나다.
ㅇ식구들을 거느리고 騎龍山中(聖穴庵)으로 피난.
ㅇ5月초 義擧. 아드님 宜藩에게 이르기를 “이제 임금이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이 어찌 草間에서 편안히 살 것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여 柏巖公(宜藩)이 이에 응해서 먼저 여러 형제들로 하여금 行伍를 짜고 격문을 만들어서 鄕兵을 모집. 이때 族弟(10촌) 昌臺(大任)가 그의 再從 大仁과 내방하여 선생을 뵈오니 서로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기로 결심하고 군사를 모아 도적(왜적)을 칠 일을 의논.
ㅇ鶴峰 金誠一선생 狀啓에 말하기를 ?永川 進士 鄭世雅 등이 五月中에 처음으로 結約을 하고 鄕兵을 일으켰다?고 하였음.
ㅇ향인들이 선생을 추대하여 義兵將을 삼았다. 鄭大任과 長子 宜藩이 향인 曺希益, 曺德驥, 曺珹, 李蕃, 鄭千里, 柳夢瑞 등으로 더불어 각각 스스로 정성을 다해서 군사를 모집하니 文武人 합하여 900여명이 되었다. 郡 서쪽 法淵 위에다 壇을 설치하고 선생을 추대하여 大將을 삼고 崔壁南을 中衛將을 삼다.
ㅇ15日 왜적을 郡 서쪽 朴淵(영천화산석촌)의 위에서 만나 크게 무찌르다. 이보다 앞서 鄭大任, 曺德驥, 曺珹, 李?郡, 金浩 등으로 하여금 곳곳에 복병을 설치케 하였는데 홀연히 왜적이 封庫 御使로 자칭하고 나타남에 諸將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公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반드시 거짓이다”하여 모든 次將과 西面 伏兵將 朴應麒, 新寧 義兵將 權應銖 등과 합세하여 공격, 거의 소탕하고 兵器, 錢穀, 文書 등을 노획하다.
ㅇ6月에 招諭使 鶴峰 先生에게 節制하여줄 것을 청원하다.
(초유사 : 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효유 하는 일을 맡던 임시벼슬)
<나라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도망하였다가 이제 나타나 의병을 저해하고 억제하며 兵使 朴晋이 의병을 관군에 편입시키기 때문에 흩어져 수습할 수 없으니 명령을 받을 곳과 지휘를 청할 곳이 없음을 상세히 말하다. 鶴峰 言行錄, 行狀 및 李松巖의 龍蛇日記(임진왜란을 용사의 난이라고도 함)에 나타나 있다.>
ㅇ7月初 兵使 朴晋이 선생을 義兵大將으로 삼다. 또한 招諭營에서 선생을 本郡의 義兵將에 명하다. 26일 永川城을 포위하고 27일에는 적을 섬멸시킴.
ㅇ8月 7日에도 적을 慶州 慈仁縣에서 공격하다.(鶴峰狀啓)
ㅇ8月 19日, 朴晋, 權應銖, 鄭大任 등과 경주성 토벌을 꾀하여 安康縣에 이르다.(의병, 승려, 평민 등 5천여명)
ㅇ8月 21日, 長子 生員 宜藩, 生員 崔仁濟 등 수십명 전사. 영천, 경주성 회복.
포위된 상태에서 宜藩이 父公을 구하고자 적진에 들어갈 때 그의 종 億壽에게 “군사가 패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전사한 줄 알았음) 내 장차 도적들의 손에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너는 가거라”하였다. 이에 億壽가 울면서 말하기를 “주인과 종의 구분이 군신과 부자와도 같은데 종이 주인을 놓고서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적군과 싸우다가 주인과 더불어 전사하였으니 忠僕이었다.
ㅇ宜藩의 屍身을 찾지 못하자 화살로 招魂(皐復)하여 靈筵을 집에다 설치하고 詩를 구해서 묘를 만들다. (선생께서 아드님의 시신을 거두지 못함을 슬퍼하시고 원혼이 의지할 곳 없음을 애석하게 여기셔서 원근의 친구에게 만사와 제문을 얻어 옛날 입던 의관과 함께 관안에 넣고 장사 지내니 모든 사람들이 詩塚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억수의 묘도 公의 묘 階下에 쓰다.)
ㅇ亂離事蹟에 말하기를 ?宜藩은 믿는 선비인지라 동료들이 그를 중히 여기더니 하루 저녁에 죽어버리자 그 시신을 잃어서 世雅가 宜藩과 평소에 잘 알고 사랑하던 이들에게서 詩를 구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ㅇ鶴峰선생(右道監司)이 啓를 올려 전사자 포상 증직을 청하여 11월 21일에 宜藩에게 通德郞(정5품) 戶曹正郞을 증직하고 제사를 儀禮대로 행하다.
13. 1593年 1月(宣祖 26年 癸巳, 59歲) : 長子 宜藩의 분황제를 행하다.
11월 군사를 생원 曺希益에게 예속시키고 紫陽 옛터에 돌아오시다.
14. 1594年 6月(宣祖 27年 甲午, 60歲) : 族弟 醴泉郡守 鄭大任 弔喪하다.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같이 하여 더불어 몸을 잊어버리고 국가에 순직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唐橋陣中(예천)에서 병을 얻어 돌아와서 일어나지 못했다. 선생이 애도해 마지않아서 그를 위하여 弔喪하고 喪事를 다스렸다.
15. 1596年 9月 28日(宣祖 29年 丙申, 62歲) : 원근의 동지들과 八公山에서 맹세하시다. (왜구의 재침염려. 會盟錄과 唱酬詩가 있다)
16. 1599年(宣祖 32年) : 紫湖精舍를 세워 벼슬에는 뜻이 없고 유유자적 하시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시다.
17. 1600年 9月(宣祖 33年 庚子, 66歲) : 體察使 李元翼이 紫湖亭舍로 선생을 심방하다. <체찰사 : 지방에 군란이 있을 때에 왕 대신 그 지방에 가서 일반군무를 총괄하던 軍職(재상이 겸임)>
18. 1602年 4月 18日(宣祖 35年 壬寅, 68歲) : 承仕郞(종8품) 軍資監奉事 제수 불취(不就)
ㅇ圃隱선생 書院을 道一洞(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중건하다. 賜額받다.
19. 1603年 10月(宣祖 36年 癸卯, 69歲) : 四子 守藩이 무과급제.
11月 興海 曲江에서 놀으시다.
20. 1605年 4月 16日(宣祖 38年 乙巳, 71歲) : 宣武原從功臣 3等으로 採錄되다.
7월 三子 安藩 무과급제.
겨울 : 孫子 好仁(安藩의 子)을 孫慕堂 處訥에게 보내 수학토록 하다.
21. 1607年 6月(宣祖 40年 丁未, 73歲) : 務功郞(정7품) 黃山道察訪 除授(오늘날 경남 양산시 원동면 원리 큰 驛長으로 산하에 작은 역이 13개 있었음)
同月 宣敎郞(종6품)으로 승진. 7월 承訓郞(정6품) 승진. 8월 承議郞(정6품) 승진.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역이 난리에 없어진데다 또한 동남의 요충지에 있어 지탱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께서 폐한 것을 일으키고 쇠잔한 것을 소생시켜 너그러운 정치로 어루만지시니 아전과 卒兵들이 그를 감복하고 돌아온 뒤에 비를 세워 칭송함)
芝山 曺好益, 旅軒 張顯光, 蒼石 李埈, 慕堂 孫處訥, 錦溪 黃俊良, 蘆溪 朴仁老등 여러선비들이 때때로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시면서 유유자적 하셨다.
22. 1609年(光海 元年 己酉, 75歲) : 守藩의 次子 好禮를 長子 宜藩의 養子로 삼다. 가을 芝山 曺好益 弔問하다.(輓詩가 있음)
23. 1612年 閏11月 3日(光海 4年 壬子, 78歲) : 正寢에서 別世하시다.
12月 9日 究理內 騎龍山 夏泉洞(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하천) 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24. 1614年 3月 21日(光海 6年 甲寅) : 旅軒 張선생(顯光)이 글을 지어 致奠을 올리다.
25. 1615年 1月 20日(光海 7年 乙卯) : 通政大夫 兵曹參議를 贈職.
6월 5일 :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으로 贈職.
26. 1619年 6月 29日(光海 11年 己未) :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使
五衛都摠府 副摠官 贈職. 이상 3번 증직한 것은 아드님 守藩公의 亨難功으로 追贈된 것임.
27. 1705年(肅宗 31年 乙酉) : 鄕人이 紫陽縣 日見峰 아래 祠堂을 세웠으나 얼마 후 폐하다.
28. 1732年 9月 19日(英祖 8年 壬子) : 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義禁府使 증직.
이때 柏巖公(宜藩)에게도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겸 經筵參贊官으로 증직이 되었다. 이는 五代孫 梅山公(重器)이 駕前, 즉 대가의 앞에 말씀을 올려서 이러한 증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9. 1755年 2月(英祖 31年 乙亥) : 詩塚(백암공 묘소)에 碑를 세우다. (비문은 弘文館 副提學 吳光運이 撰함)
30. 1760年 6月(英祖 36年 庚辰) : 墓門에 神道碑(경상북도 지방유형 문화재73호)를 세우다.(領議政 趙顯命이 비문을 撰함)
31. 1778年 3月(正祖 2年 戊戌) : 자손들이 環皐世德祠(영천시 임고면 선원동 대환, 민속자료 87호)에 位牌를 奉安하다. 柏巖公을 配享하다.
32. 1782年(正祖 6年 壬寅) : 實記 간행하다.
33. 1784年 2月(正祖 8年 甲辰) : 조정에서 柏巖公 忠孝를 旌閭토록 명하다.
7代孫 生員 夏濬이 선생의 시호를 청하고 아울러 백암공의 정려를 청하다.
8月 諡典을 판결해서 내리다.
9月 6日 忠孝閣을 게설(揭楔:높이 세움)하다. 判書 蔡濟恭이 “忠臣孝子 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 成均 生員 鄭宜藩의 門”이라고 쓰고 世德祠 곁에 閣을 세우고 여기에 게제(揭題)하고 충효각이라 하였다. 이때 원근에서 모인 士林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34. 1788年 6月(正祖 12年 戊申) : 剛義公이라는 諡號가 내리다.
致果殺賊曰剛이요, 즉 과단성을 이루어서 적을 죽인 것을 剛이라 하고
先君後己曰義라, 인군(人君) 즉 나라를 먼저 하고 자기를 뒤에 하는 것을 義라 한다. 判書 洪良浩가 敎旨를 쓰고 吏曹佐郞 韓用龜가 가지고 오다.
35. 1790年 初(正祖 14年 庚戌) : 紫湖精舍를 옛자리에 중건하다.
36. 1793年 5月(正祖 17年 癸丑) : 시호 내린 事蹟을 신도비에 추각(追刻)하다.
37. 1977年 3月(양력) : 江湖亭을 자양면 용산동 인구 마당지에서 영천댐 수몰로 인하여 성곡동 하절 서록으로 移建(경상북도 지방무형문화재 71호)
38.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경주 황성공원)
39. 陽曆 1998年 4月 21日 : 壬亂護國 嶺南忠義壇에 長子 宜藩, 第三子 安藩, 第四子 守藩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다.(대구광역시 동구 효목1동 망우공원내)
40. 2008年 12月 12日 : 1868年에 훼철된 世德祠를 정부에서 1차로 묘우를 복원 중건.
41. 2010년 11월 16일 : 강당 준공. 서원으로 승격코자 동·서재 등 공사 중.
事 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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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 實
公의 휘는 世雅요, 자는 和叔이니 그 선대는 영일인이시다. 고려 추밀원 지주사 휘 襲明이 곧은 도리로써 의종을 섬길 때 간하다가 죽게 되었는데 이 분이 公의 시조이시다. 덕을 쌓으므로 해서 경사가 대대로 흘러 크게 벼슬한 이가 있었다. 칠세에 휘 仁彦이 계셨는데, 관은 전공판서이시니, 처음으로 영천에 사시게 되어 그 뒤로 영천인이 되시었다. 또 휘 光厚는 이조를 섬기어 공조판서가 되시었다. 또 휘 瑋는 벼슬은 司正이시고, 또 휘 文裔는 성균 생원이시니, 생원공이 곧 公의 오대조가 되신다. 고조는 휘 從韶이시니, 벼슬은 이조 좌랑이신데, 문장이 당대에 떨쳤고 성삼문, 박팽년과 친우가 되어서 서로 명성과 절의를 격앙하였다. 병자년(1456년)에 獄이 일어나자 드디어 병을 핑계 삼아 벼슬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점필재 金公께서 그를 높이어 공경해서 항상 말하기를 오천 鄭先生이라고 하였다. 증조의 휘는 以揮이니 벼슬은 장수도 찰방을 지내었다. 조부의 휘는 次謹이시니 蔭仕로 선무랑이었다. 부친의 휘는 允良이니 창릉 참봉을 지내셨고, 일찍이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할 때 학행으로써 칭찬이 있으셨다. 어머님은 의인 최씨이시니 봉사 德?의 따님이시다. 가정 을미년(1535년)에 자양리 노항촌에서 公을 낳으셨다. 어려서 아주 뛰어난 기질이 있으셨고, 점점 자라감에 따라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근엄해서 동작함에 법도가 있어서 일찍이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언어표정에 나타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 후덕한 大人임을 알고 있었다. 참봉공이 효도하고 공경할 것을 독실히 가르쳐서 자제들이 여력이 있지 않으면 그에게 글공부를 시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늦게야 비로소 스스로 분발하였다. 새벽에 반드시 일어나서 문안드리고 깨끗한 방에 단정히 앉아서 구부려 읽고 우러러 생각하여 우연히 뜻이 만나는 곳에 이르면 문득 흔연히 식음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한지 수년에 이미 깊이 힘을 얻어 문리가 통달되고 詩 또한 깊고 맑은 지경에 이르렀고, 近古의 문장가도 때때로 傳誦하며 絶唱이라고 하였다. 정사년(1557년)에 일찍이 一直 孫氏에게 장가들어서 예로써 부모를 뵈옵고 드디어 그로 더불어 몸소 봉양할 것을 받들어서 정성과 효를 극진히 하였다. 閨門의 안에서는 항상 정정(整整:단정히 갖추어진 모양)히 규범이 있어서 집안에서도 그를 칭찬하였다. 부모님의 명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무오년(1558년)에 진사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 24세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더욱 알려졌다. 무진년(1568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심을 당하여서 슬퍼하심이 극심하셨고, 모든 상례를 한결같이 가례에 의해서 하였다. 그 때에 오히려 참봉공이 건강하셔서 친구를 불러서 술을 대접하며 오락을 즐기시는데 매양 佳節마다 빈객이 집안에 가득하였다. 모든 음식 대접하는 비용은 公이 항상 진력해서 허술하게 하는 때가 없었다. 참봉공이 이미 돌아가시자 더욱 과거볼 뜻을 버리시고 항상 고요히 사시면서 經書와 史書만 열심히 읽으시어 마음속에 익히셨다. 혹은 詩와 술로써 스스로 즐기고, 자제를 가르치심에 시와 예의 학문에 대한 과정을 날마다 두시고, 詞章(文章)과 字?에 있어서도 겸해서 공부하도록 하시고, 더욱 龍溪書舍를 보수해서 날마다 마을 자제들을 모아놓고 글을 읽히고 학업을 닦게 하여서 그들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지 수십 년이 됨에 글을 읽는 소리가 항상 그치지 아니하였다. 임진년(1592년) 여름에 平秀吉(풍신수길)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곧장 동래에 육박해서 지키던 신하 송상현은 여기에서 죽고, 이일, 신립 등 모든 軍士는 서로 계속해서 패전하여 달아났다. 이 달에 왕께서 서북으로 피난하시고, 적은 한양으로 들어오니 팔로(팔도)가 와열되고, 근왕병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公이 분연히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평상시에는 선비가 진실로 자중하여야 하거니와 이제 나라에 대란이 일어났고, 나라의 임금께서 먼지 속 피난길에 오르셨으니, 초야에 있는 자가 어찌 편안히 있겠느냐”하고 의병을 일으키고 “강약이 서로 당할 수 없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하시고 먼저 여러 자질들로 하여금 행오를 갖추고 이내 격문으로 향병을 모집하였다.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昇平(평화)한 지가 오래인지라 선비나 백성들이 적을 보고서 겁을 내어 모두가 처자식을 이끌고 새나 쥐처럼 도망쳤다가 이 격문을 보고서 서로 돌아보면서 단식해 말하기를 부자가 모두 사지에 들어갈려느냐고 하였다. 그러더니 드디어 점점 향응해 모이어서 열흘, 한 달 사이에 모인 무리가 구백 인에 이르러서 公을 추대하여 盟主로 삼고 義兵이라 불렀다. 이에 곽의사 재우는 포산에서 일어나고, 권장군 응수가 역시 신녕에서 일어났는데, 열읍이 다투어 분발한 것은 실은 삼진지의 힘이었다. 公이 詩禮의 門에서 태어나 자라서 군사에 관해서는 알 바가 아니로되, 그러나 매양 진지에 나아가 포진할 적에는 義氣가 분발해서 一軍이 용동하지 않음이 없었다. 적이 봉고어사라고 사칭하면서 용맹하고 건장한 수백 인을 거느리고 군위로부터 신녕에 달려 내려가니 公이 족제 정대임, 권응수 등과 더불어 박연의 위에 이르러서 이를 크게 격파시키니 군사의 聲勢가 더욱 떨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좌절도사 이옥은 법에 의거하여 사형을 당했고, 박진이 그 무리를 대신 거느리는데 의병이 전투에 용감한 것을 보고 자못 이것을 저해하려하니 용사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公이 이에 초유사 金公 誠一에게 글로 보고하기를 절제해 줄 것을 청하였고, 또한 말하기를 “박진이 꺼려하는 데는 다른 뜻이 있으니 장수될 수가 없고 諸鎭의 장수들은 비겁하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공이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충의가 안으로 격동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느냐하고 탄복해 마지않았다. 이 해 가을에 도적이 영천에 둔거해서 사방에 나아가 노략질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公이 정대임으로 더불어 꾀하여 말하기를 “승냥이와 범이 성을 점령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니 만약 이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그로 인하여 영남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고, “모일에 정예병사 천명을 나누어서 楸坪들에서 과시하게 하고 나는 남은 병사를 이끌고 馬峴山에 올라가 바람을 따라 모래를 날리면 적이 반드시 혼란해서 길을 잃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성 안에 모여 있을 것이다. 이제 의병 수십 인이 약속을 어겨서 마땅히 처형해야 할 것이로되 그 죄를 속죄시키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을 넘어가 불을 지르게 하면 적이 크게 겁을 낼 것이다” 하니 大任도 이르기를 내 뜻도 또한 그렇다고 하였다. 계획이 정해지자 이웃 고을에 원병을 청해서 모든 장수가 약속된 날에 모여들었다. 권응수가 앞장서 犯하고자 하니 公이 굳이 그를 막아서 이에 더불어 약속해서 사면을 아울러 진격하며 일시에 발화하니 적이 궁척(窮蹙:궁지에 몰려 위축됨)해서 동남문을 통하여 빠져 달아나 혹은 명원루(明遠樓 : 영천 조양각의 처음 이름)에서 물에 떨어졌다. 아군은 쫒아가 닥치는 대로 목을 베니 왜놈은 요행히 죽음을 면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붉은 피가 내를 이루고 피비린내가 십여 리까지 퍼졌다. 功을 논하는데 있어서 公은 이것을 부끄러이 하고 목을 베어 얻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한 것 같이 하지 아니하고, 애당초 거기에 참여한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국가에 대한 공을 기록함에 한 적병의 목을 벤 사람은 상을 의논하고 성을 공격한 자는 벼슬을 通侯로 한다고 하는데 이 役事에서 인근 의병의 내원이 비록 있긴 하였으나, 그 계책을 강구한 것은 본래 公의 손에서 나왔으니, 성을 온전케 하고 승첩케 한 공을 세운 자 公이 아니고서 그 누구이겠느냐? 그 부귀를 앞에 두고서도 이것을 저버리기를 잊어버린 듯하니, 이 어찌 너무나 청렴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公은 얼굴빛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군자는 誼를 바르게 하고, 소인은 공명을 따른다 하였으니, 내가 당초에 의병을 일으킬 적에 다만 주욕신사(主辱臣死 : 임금은 곤욕을 당하고 신민은 죽음)하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고 공명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기약했던 바가 아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신령을 힘입어서 한 번 거사하자 성이 온전했으니 이것으로 족할 뿐, 또한 다른 무엇을 바라겠느냐? 더구나 모든 將士들은 몸에 수십 개의 창을 받으면서 각각 목숨을 바치면서 싸웠는데, 내 어찌 스스로 이것을 취하여 나누겠느냐?”고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열복하였다. 영천이 이미 회복되자 영남의 각 고을의 도적들이 모두 도망하여 右路로 모아서 左界의 백성들은 조금 생기가 있었다. 팔월에 적이 크게 경주에 웅거하니 公이 병사 5,000인을 거느리고 좌절도 박진으로 더불어 溪淵에 모였다. 그 때 무리가 수만에 으르렀다. 公이 분연히 선봉이 되어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 다다르니, 아들 宜藩이 그 뒤를 따르고 생원 최인제, 김연, 이득룡, 이연근, 이지엄, 이순복, 이정분 등이 또한 그 뒤를 따라서 탄환과 칼로 용기를 내게 하고, 북을 치며 소리질러 진격하니 천지가 진동하는지라, 겨우 성밑에 육박하자 적은 과연 문을 열고 우리를 쫒아왔다.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릎쓰고 힘껏 싸우니, 적의 무리 가운데 죽은 자가 과분수나 되었다. 조금 있다가 적은 몰래 奇兵을 내어서 뒤로 우리를 습격하고 다시 精銳騎兵으로 그 복부를 쳐서 절도사가 패전하여 서천으로 도망하였다. 公은 홀로 진중에 있으면서 적과 더불어 힘껏 싸웠다. 아들 의번 등이 모두 전사하니, 公이 이에 군사를 거두어 조금 물러났다가 다시 모든 장수와 더불어 습격할 것을 획책했으나, 적이 능히 지탱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밤을 이용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朴晋이 포상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도독 이여송이 三京을 連하여 수복하고 이듬해에 왕께서 서울로 돌아오셨다. 이에 公은 거느렸던 군사를 조희익 형제에게 넘겨주고 자양 옛곳에 들어가 숨어서 溪上에 집을 짓고 스스로 江湖?라 칭하면서 드디어 벽 위에다 시를 써서 말하기를 “장년의 뜻 적장 머리 벨 것을 기약했건만, 쇠잔해진 이내 몸이 귀밑털이 셀줄이야! 오랏줄 있었지만 終軍의 청 못 이루고, 힘 없으니 부질없이 두보의 근심을 품었구나. 노쇠하고 병드니 어찌 출세길에 달릴손가? 한가로이 물러가서 청유를 구경함에 내 분수에 적합하다. 백구도 강호수를 싫어 않고 찾아주니, 靑眼이 이제부터 죽어서야 그치리라.” 라고 하면서 고기잡고 낚시질하고 휘파람불고 읊으면서 유연히 스스로 지내어 향리에서 終身할 것 같으니 선생의 風致를 부러워하고 존경하였다. 이 때에 체찰사 李公 元翼이 그 명성을 듣고서 남으로 순찰하여 郡에 이르러 林下에서 公을 만나보고 예로서 公을 대접하고 이에 조정에 천거해서 公이 처음으로 유일로 황산도 찰방 벼슬을 받으셨다. 여기 새로이 병혁(兵革 : 전쟁)을 겪었고, 또한 동남의 요로에 當해 있었기 때문에 자못 지탱할 수 없었는데, 公이 황폐하고 쇠잔한 것을 일으키고 너그러운 정치로써 어루만지니 吏卒들이 公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문을 닫고 다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 때에 師友로는 지산 조선생, 여헌 장선생, 이창석 준, 손모당 처눌 등의 제현이 공과 더불어 왕래하며 주선하여 道義交로 허락해서 매양 花朝 月夕에 주효를 가지고 서로 찾으며 즐거워 하였다. 鄭守菴 四震은 또한 선조조에 임금이 부른 선비였었다. 그가 일찍이 사람에 말하여 이르되 鄭公이 나이 많고 덕이 높아서 마땅히 우리 무리에 모범이 된다 하였다. 읍에 옛날에 圃隱 사당이 있었는데 병화에 탔었다. 公이 鄕中에 물어서 마음을 다하며 구획을 이미 이루고서 백록동 학규를 모방해서 後生을 면려시켰다. 이로부터 文風이 다시 진작되었다.
公은 성품이 효하고 우애하고 청렴하고 삼가하였다. 숙부 봉사공이 늙도록 자식이 없고 다만 딸 하나만 있어서 사랑을 쏟아 土田을 많이 주었었다. 뒤에 현감 安霽에게 시집갔으나 오래지 않아 죽으니 公이 장사비용을 대고 그 모든 재산을 안씨에게 보내었다. 安氏家에서는 그 재산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公이 슬퍼하며 말하기를 “내가 불행해서 곧 누이를 잃었는데 또 차마 스스로 그 재물을 취하겠는가”하고 드디어 그에게 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은혜를 베풀고 주기를 좋아해서 남의 궁핍한 것을 보면 곧 집에 있고 없음을 묻지도 아니하고 어려운 자를 구제하였다. 일찍이 난리 중에 公에 의해서 살아난 사람이 무려 백여 인을 헤아릴 수 있고 난리를 피난한 士族들을 衣食으로써 대접한 것이 또한 많았다. 이 때문에 집안 사정은 더욱 형편이 어려워져서 식량이 혹 떨어지더라도 公은 오히려 태연하게 여기었다. 그 宗族에 있어서는 비록 親盡되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昭穆을 밝혀서 서열을 잃지 않게 하고, 길흉과 慶吊의 예에 각각 품절이 있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한 문중이 화목을 일으켰다. 더욱 향당에 삼가서 사람을 대하는 데나 물건을 접하는데 쾌활하여 휴도(畦道 : 전답 사이의 길, 경계)가 없으시고, 또한 남의 장단을 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시비의 갈림길에 있어서는 양단을 분석하여 판단해서 칼로 베듯 하였다. 이 때문에 시골의 착한 사람은 그를 공경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두려워하였다. 임자년(1612년) 윤 11월 3일에 宅에서 돌아가시니 나이 78세였다. 군북 騎龍山 임좌 언덕의 선영묘소를 따라서 장례를 모시었다. 부인 손씨도 여기에 ?葬했다.
부인은 일직 孫씨로 比安 縣監 致雲의 따님이시다. 자상하고 은혜스러워 婦道가 있으시고 출가하신지 60년에도 행동이 어긋남이 없으시었다. 뒤에 아들 守藩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은혜를 받아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손씨는 정부인이 되었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宜藩은 生員이니 節行이 있었고 壬辰年 月城의 軍亂에 힘껏 싸우다 죽어서 正郞으로 증직되었다. 다음 汝頌은 일찍 죽고 다음 安藩은 司果이고, 다음 守藩은 副護軍이고, 따님은 張雲翼, 楊遇亨에게 시집보내었다. 宜藩은 參奉 辛德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녀가 없어서 守藩의 아들 好禮로써 뒤를 이었는데 海南 縣監이다. 安藩은 參判을 증직 받은 權克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好仁은 文科에 급제하여 晋州 牧使가 되었고 다음은 好問이고 따님은 曹盡孝와 曹?에게 출가하였다. 守藩은 生員 曹希益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는 好義이고, 둘째는 好禮이며, 셋째는 好信이다. 따님은 李鐵堅에게 시집보냈다. 내외손, 증손, 현손 남녀가 모두 300인이었다.
行 狀
行 狀
曾祖 以揮는 장수도찰방이다.
祖 次謹은 宣務郞이다.
考 允良은 昌陵참봉이다.
비는 宜人 崔씨로 奉事 德?의 따님이다.
공의 휘는 세아이고 자는 화숙이니 영일인이시다. 영일정씨는 모두 고려의 추밀원 지주사 휘 습명을 시조로 삼는다. 지주사공이 기개와 절개가 있어서 인종과 의종을 섬김에 곧은 도리로 바르게 말하다가 마침내 참언으로 인하여 돌아가셨다. 그 후에 더욱 커지고 번성해서 6세 사이에 전공판서 휘 인언에 이르러서 비로소 영천에 살게 되어 자손들이 드디어 영천인이 되었다. 전공판서가 광후를 낳으니 本朝를 섬김에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판서가 瑋를 낳으시니 벼슬은 사정이시고, 사정이 문예를 낳으시니 생원이시고, 생원이 종소를 낳아 이조좌랑이시니, 공에게는 고조가 되신다. 문장과 청렴결백과 절개로써 한 때에 뛰어나서 중히 여김을 받으셨고 성삼문, 박팽년과 더불어 親交하였더니 병자년(1456)에 이르러 옥사가 일어남에 드디어 질병을 핑계 삼아 나아가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점필재 김선생이 공을 공경하여 항상 오천정선생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공은 가정 을미년(1535) 생으로 어려서 영리하시고 특이하시어 점점 자람에 태도가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근엄해서 동작이 어른과 같았고,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얼굴빛이나 언동 중에 나타나지 않아서 식자들이 이미 공이 훌륭한 사람과 장한 德人이 될 줄 알았더라. 이로부터 효도와 공경을 도타이 행하면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닦았으니, 대개 그 아버지의 가르치심으로 그러하였다. 늦게서야 비로소 뜻을 가다듬어 독실히 공부하여 새벽과 저녁에 부모님에게 문안을 드린 다음에는 방안에 앉아서 구부려 독서하고 우러러 생각하기에 침식을 잊어버리기까지 하였다. 문리가 탁월하게 트이고, 또한 능히 시를 잘 해서 명성이 글 잘하는 사람들에 올랐다. 나이 24세에 진사과거에 오르니 이름이 이로부터 점점 나타났었다. 무진년(1568)에 모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였고, 상제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좇아 하였다. 참봉공이 만년에 친구와 더불어 술놀이를 좋아하셔서 매양 명절마다 청한 손님들이 집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힘을 다하여 이바지하는데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으며, 그 뜻에 오로지 따를 뿐이었다.
참봉공이 돌아가시자 드디어 진취할 뜻을 버리고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히 앉아서 경서와 사기를 열심히 읽으면서 의리를 강구하고 날마다 시와 예로써 자제들을 가르침에 엄하게 과정을 세웠었다. 계신 곳에 용계서사가 있는데 마을의 자제를 모아놓고 그들로 하여금 글을 읽히고 학업을 닦게 해서 순순히 이끌어 주는데 수십 년 동안을 한결같이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진년(1592) 여름에 일본이 전군을 이끌고 들어와 도적질을 해서 각 진과 읍을 연이어 함락해서 곧장 경성으로 향하여 진군하여 풍우와 같이 빨랐었다. 그래서 왕께서는 서북으로 거동하시고, 성마다 함락되고 팔로가 붕괴되어서 어느 누구도 다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이제 불행히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서 임금께서 피난을 하시는 난국에 초야에 묻힌 士夫로서 또한 어찌 안연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강약이 상대가 되지 못하나 구제를 하지 못하면 죽을 뿐이다”하고 곧 강개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일어나서 먼저 모든 아들을 시켜서 항오를 짜고 이에 격문을 만들어 향병을 모집하였다. 이 때로 말할 것 같으면 평화가 오래 계속 되었던 까닭에 백성이 군대를 보지 못하다가 졸지에 적을 만나니 모두 겁을 내어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었다. 격문을 듣고서는 감격하여 분통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원근을 막론하고 점점 향응(響應 : 산울림같이 소리를 따라 응함, 즉 공의 뜻에 응함)이 되어서 십일 삼십일 사이에 모여든 무리가 구백 인이나 되었다. 드디어 공을 추대하여 의병 대장을 삼았다. 이때에 곽망우 재우가 포산에서 일어나고 권장군 응수가 또한 계속해서 일어나서 서로 성원하였는데, 그 실은 모두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공이 유교의 가정에서 생장하여 詩書禮樂만 익히다가 하루아침에 대의에 입각하여 군사를 포진하고 기를 세우고 북을 쳐서 士卒을 위하니 선생의 그 기세 때문에 온 군사가 모두 용동하였다. 이때에 적 수백 인이 봉고어사라고 자칭하면서 군위로부터 신녕으로 달려 내려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하고 권응수와 정대임 등으로 더불어 좇아서 적을 박연 위에서 크게 싸워 대단히 많은 목을 베니 軍聲이 크게 진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좌절도 이옥이 법에 의해 처형되었고, 박진이 그 무리를 대신 거느리는데 영남의 동도에 있으면서 의병의 공적이 자기의 공적보다 우월할 것을 두려워해서 때때로 이것을 저지하고 억제하거늘 공이 이에 초유사 학봉 김문충 공에게 상서로써 절제해주기를 청원하고, 또한 박진이 꺼리는 뜻이 있어 장수될 수가 없는 것과 모든 장수가 겁이 많으니 이 모두 목을 베어 버려야 한다고 진정하니 문충공이 격절(擊節 : 무릎을 치고) 歎息하여 가로되 충의가 안으로 격동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와 같겠는가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 하였다.
이 해 가을에 영천에 적이 주둔하고 점거해서 병사를 사방으로 풀어놓아 겁탈하니 온 경내가 그 독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공이 정대임과 더불어 꾀를 도모하여 미리 방략을 설계해서 아무날에 적을 섬멸할 것을 기약하였다. 이때에 의병 수십 인이 기약을 어겼기 때문에 목을 베게 되었는데 그 죄를 속죄케 하기 위하여 스스로 전과를 내도록 하였다. 계획이 이미 정해지자 권응수에게 청원을 하니 응수가 그 병사를 이끌고 와서 드디어 응수와 정대임, 조성, 신해 등으로 더불어 합세하여 아울러 진격하고 높은 데에 올라가서 풍세에 따라 모래와 먼지를 날리니 적이 혼미해서 감히 나오지 못하고 또한 죽기를 무릅쓴 자 수십 인을 보내어 성안으로 들어가 방화케 하여 불사르고 적을 죽이기를 헤아릴 수 없이 하였다. 적이 사상자를 구출하지 못하자 과연 크게 붕괴되어 도망침에 성 밖에 복병하고 있던 아군이 또한 일어나 도망하는 자를 추종하여 베어서 도망칠 수 없게 하니 유혈이 길바닥에 파도를 이루고 시체가 언덕처럼 쌓였다.
승첩한 것을 보고하는데 미쳐서 공이 전공을 가지고 따지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서 자기의 공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았다. 혹 이르기를 “일이 선후가 있고 功은 경중이 있는 법인데, 오늘의 승첩은 당초에 대장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公의 공적을 감당할 자가 그 누구랴! 어찌해서 부귀를 버리고 취하지 않느냐? 이것은 너무나 청렴한 것이 아니겠느냐?”하니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욕을 보시니 신하된 자 죽는 것이 직분이라 생각하고 내가 의병을 일으킴을 시작할 때에 국가의 위급함에 따랐을 뿐이요 본래 공명을 도모한 것이 아니다. 하늘의 道와 국왕의 신령으로써 다행히 성을 온전케 하였던 것이니 이것으로 만족할 뿐이오. 그 밖의 또 무엇을 바라겠느냐? 더구나 모든 장수들이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진지를 함락하고 적을 물리쳐서 끓는 물과 불을 피하지 아니한 것은 다만 忠憤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니다. 또한 중한 상을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내 감히 이것을 취하여 공되게 생각하겠느냐”라고 하시니 듣는 자가 모두 열복하였다. 영천이 이미 회복되자 적들은 모두 물러가 江右道에 주둔하였다. 이때를 당해서 공이 막고 저지하는 힘이 없었던들 영남의 左道가 모두 어육이 될 것은 틀림없었다. 팔월에 경주의 적을 진격해 공격할 적에 공이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좌절도 박진의 병사와 더불어 溪淵에서 군사를 모으니 수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공이 선봉장이 되어서 말을 달려 곧장 전진하니 아들 宜藩이 공과 더불어 같이 하고, 생원 崔仁濟, 李得龍, 李榮根, 李順福, 李廷芬, 李之?, 金演 등이 또한 그 뒤를 따라서 용맹스럽게 뛰며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성문에 육박하니 적이 맞서 싸움에 우리군사도 죽을 결심을 하고 격전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그 죽은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좀 있다가 적이 북문으로부터 奇兵(기이한 꾀를 써서 불의에 적을 치는 군사)을 내어 우리 군사의 뒤를 습격하고 정예병이 그 앞을 충격해서 節度軍은 크게 어지러워져 서천으로 달아나니 공이 홀로 진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칼날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니 宜藩은 몸에 수십 군데 창을 받으면서 인제 등 16인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이 혼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이에 군사를 거두고 조금 물러나서 제장으로 더불어 다시 반격할 것을 계획하니 적은 지탱할 수 없을 것을 짐작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쳤다. 이 일이 조정에 들리어져 포상함에 다만 박진에게만 미치고 공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서 중국 장수 이여송이 대병을 이끌고 동으로 와 삼경을 克復하였다. 다음해에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시니 공이 저기의 병사를 조희익에게 귀속시키고 옛 고향 자양에 돌아와 시내위에 집을 짓고 스스로 江湖?라 호를 부르고 벽위에 시를 써서 말하기를 “장년의 뜻 적장 머리 벨 것을 기약했건만, 쇠잔해진 이내 몸이 귀밑털이 셀 줄이야! 오랏줄 있었지만 終軍의 청 못 이루고, 힘없으니 부질없이 두보의 근심을 품었구나. 노쇠하고 병드니 어찌 출세길에 달릴손가? 한가로이 물러가서 청유를 구경함이 내 분수에 적합하다. 백구도 강호수를 싫어 않고 찾아주니, 靑眼이 이제부터 죽어서야 그치리라”라고 하였다. 興은 고기 잡고 낚시질하는데 의탁하고 숲과 산림에 의지해서 편안히 장차 몸을 마칠듯이 하였다.
체찰사 李公 元翼이 공의 명성을 듣고서 남으로 순찰하여 郡에 이르러 친히 말을 타고 공의 곳에 枉臨했다가 조정에 천거하여 황산도찰방으로 임명케 하였다. 역이 병화로 지내서 거의 다 굶주리고 사망하기에 이르니 공이 진심으로 어루만지며 폐허된 것을 복구시키고 가려운 곳을 긁어서 피로하고 쇠잔한 것을 소생하도록 하였다.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아전과 병졸들이 그를 생각해서 송덕비를 세웠다. 이로부터 한가로운데 居하여 정양하고 두문불출하시고 임자년(1612) 윤11월3일에 댁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8세이다. 군복쪽 기룡산 임좌 언덕에 장사를 모시니 선영의 뒤를 따른 것이다.
공은 容貌가 정숙하시고 의기가 활달하여 억연(?然)히 丈夫의 풍이 있으시고 성품은 孝하고 삼가하고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숙부 봉사공이 후사가 없으시고 다만 따님 한 분 뿐으로 현감 安霽에게 시집보냈는데, 시집보낼 때에 토지와 종들을 많이 줄려고 하였으나 시댁에 가기 전에 죽으니 공이 그 재산을 모두 안씨에게 돌려보냈다. 안씨집에서는 그 재산을 차지할 바가 아니라 하여 사양하니 공이 슬퍼하시며 말하기를 “내가 불행해서 우리 누이를 잃었는데 어찌 내가 차마 그 재산을 취하겠느냐”하고 마침내 그 재산을 돌려보내니 재물에 대하여도 분명하시기가 이러하였다. 남의 가난한 것이나 궁핍한 것을 보시면 베풀어 주시기를 일삼으시고, 병화를 당해서 주리고 배고픈 士族들이 난을 피하여 식량을 구걸하는 자가 모두 여기에 와서 의식을 대접받음으로써 생활을 연명한 자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해서 집은 더욱 퇴락해지고 집안 식량마저 댈 수가 없으되 역시 태연히 여기시었다.
종족에 화목해서 비록 計寸을 다한 먼 친척이라도 반드시 소목을 분명히 하여 그 차례의 순서를 잃지 않게 하였다. 또 향당에 삼가서 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물건을 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성심을 보이시고 일찍이 모난 짓이 없으시고 남의 장단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하되 그 시비를 가르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명백하게 분석하고 판단해서 한칼로 양단을 가르는 것처럼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시골의 착한 자는 공경하고, 착하지 못한 자는 그를 두려워 하였다. 君子가 말하기를 절개에 분발하고 공명을 세운 것은 대개 근본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더불어 사귄 친구는 모두 그 때 명성을 떨쳤으니 유독 芝山 曺先生 好益과 旅軒 張先生 顯光과 李蒼石 埈과 孫 慕堂 處訥이 도의로써 서로 통하여 사귀어 상종함이 대단히 잦으시고 매양 佳節과 명절을 만남에 술병을 가지고 서로 찾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부러워하였다.
군에 옛적에 포은 사당이 있었는데 병란에 불탄 것을 공이 향인으로 더불어 새롭게 증축하고 그리고 또 白鹿洞學規를 모방해서 학자들을 장려시켰다. 이로부터 儒風이 다시 진작되니 문학의 선비가 많이 쏟아져 나왔다. 鄭守庵 四震은 선조의 징사(徵士 : 임금께서 직접 부른 선비)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鄭公이 나이가 많고 덕이 높아서 마땅히 우리 당의 모범이 된다고 하였다. 돌아가시자 張선생이 제문에 말하기를 “공은 천분이 뛰어나서,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서도 친하고 친할수록 널리 사랑하는 덕이 각각 그 정을 다하게 되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정의가 확고해서 가히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이럼으로써 공이 鄕閭에 있을 때에는 薄夫가 부끄러움을 깨닫고 게으른 자는 진작할 것을 생각하고 착함을 행하는 자는 믿는 곳이 있어서 일을 함에 스스로 저지받지 아니하고 악한 짓을 하는 자는 두려운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張선생의 말씀이 족히 백세에 신의를 미덥게 전할 만하니 뒤에 거론하는 사람이 어찌 여기에 구하지 아니하겠는가.
배위 一直 孫氏는 현감 致雲의 따님이신데, 유순하시고 자애하시어 婦道를 대단히 많이 지니셨다. 뒤에 아들 守藩이 귀히 됨으로써 천은을 미루어 공에게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하고 손씨는 貞夫人을 삼았다. 4남2녀를 낳으셨다. 장남 의번은 생원이니 즉 임진에 전사하신 분이라 贈 正郞이요, 다음 여송은 일찍 죽고 안번은 부사과이고 수번은 부호군이고 딸은 장운익과 양우형에게 시집갔다. 의번이 참봉 신덕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수번의 아들 好禮로써 뒤를 삼았으니 현감이다. 안번이 증참판 권극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서 2남2녀를 낳으니 남은 好仁 문과 진주목사요, 다음은 好問이요, 딸은 조진효 조완에게 시집갔다. 守藩은 생원 조희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好義, 好禮, 好信이요, 딸은 이철견에게 시집갔다. 내외증현손 남녀가 300여인이나 된다. 斗寅이 가만히 생각컨대 임진난을 당해서 변이 창졸간에 일어나자 나라 임금께서 몽진하시어 온 나라가 흔들렸으니 이는 바로 臣子가 된 자로써 몸을 바치고 목숨을 바칠 날이었다. 일시에 군사를 장악하던 장수들과 지방을 지키던 진번의 신하들이 또한 많이 적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서 움츠리고 쥐처럼 나갔다가 물러갔다 하면서 창을 잡고 사졸보다 先行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데 공은 한낱 유생으로서 홀로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솔선해서 의병을 규합하여 충의를 진동시키고 凜然히 적을 향할 계획을 세웠으니 이것은 곧 기이한 노릇이다. 그 진지에 임해서 적을 억제함에 있어서 기묘한 계교가 첩첩으로 나와서 마치 전쟁터에서 늙은 사람과 같았다. 마침내 사나운 적을 좌절시키고 온 성을 회복시켜 동남방을 차단시켜서 흉도로 하여금 그 저돌하는 기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위대한 功烈(훌륭한 공적)이야 말로 金公千鎰, 郭公再祐에 비교하건데 또한 어찌 조금이나 손색이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그 공을 사양하고 물리쳐 차지하지 아니한 것은 세상이 아는 자가 있지 아니하여 이름이 숨겨져서 일컬어지지 아니하니 이는 공이 남보다 크게 지나는 것이었다. 그 흉중에 쌓인 바를 어찌 용열한 대중들이 쉽게 알 수 있겠는가. 대개 공은 곧 포은선생의 門孫으로서 실은 포은선생의 시골에서 나고 자라서 그 가정에 전하는 忠義一脈을 받은 바가 오래였다. 그 느끼고 흥기한 것이 진실로 또한 남보다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아아, 盛하구나! 공이 하세한지 벌써 97년인데도 아직도 조정에서는 그 충성을 표창하는 은전이 있지 아니하더니 요즈음에 章甫(유생)의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함으로 인해서 특별히 사당을 세우는 청을 베풀었으니 또한 족히 다소나마 忠賢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겠다. 세상의 임금에게 의식을 받아먹는 자들이 또한 권장할 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公의 현손 重器가 그 문중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수 백리를 달려와서 나에게 그 행장을 부탁하니 내가 그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사양했으나 그 청이 더욱 간절해서 마침내 사양함을 거절당하고서 드디어 그 가첩에 의거하고 간략히 첨삭을 더해서 右와 같이 엮어둔다. 당초 월성의 役에 공의 아들 의번이 공이 포위 중에 있음을 보고 종 億壽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일이 급하다. 우리 아버지와 나는 함께 죽을 결심이 섰으나 너는 죽을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 돌아가지 아니하느냐?”하니 억수가 이르기를 “제가 들으니 종과 주인의 구분이 君臣父子간과 같으니 내 주인을 버리고서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드디어 그와 더불어 함께 죽었다. 억수는 천한 노예로되 역시 그 주인을 위하여 난에 죽을 줄은 알아서 죽는 것 보기를 돌아가는 것과 같이 생각하니 평소에 보고 느낀 바가 깊지 않으면 능히 이와 같겠느냐? 아울러 여기에 써서 이 행장 끝에 부치노라. 삼가 狀한다. 상지34년(숙종 34년, 1708) 12월 일. 영가후인 권두인은 삼가 장한다.
※ 權斗寅 : 관향은 安東, 자는 春卿, 호는 荷塘. 조선후기 문신, 문장가. 진사, 공조좌랑, 현감. 허목, 이현일 문인.
遺稿
○ 詩
與柳汝元汀 曺汝?德驥 琴聞遠蘭秀 登佛國寺影池樓 各吟一絶 得來字 庚寅
柳汝元(汀) 曺汝?(德驥) 琴聞遠(蘭秀)와 더불어 불국사 影池樓에 올라서 각각 ‘來’字 韻을 가지고 한 絶句를 읊었다. (庚寅 1590년) <詩會 참석자 22명>
좋은 친구 期約없이 찾아와서 良友不期來
누에 올라 웃으며 잔을 잡네. 登樓笑把盃
群賢들이 차례로 앉았으니 群賢次第坐
모두 다 濟世할 人才로다. 摠是濟川才
次松壕精舍韻 柳汀亭
송호정사운을 차운하다.(柳汀亭) <1590년> <경주 山內에 있던 유정의 정자>
물을 즐겨 늙은 마음 산을 또 즐겨하네 樂水翁心又樂山
仁과 智를 兼했으니 저절로 閒暇롭다 能兼仁智自言閒
노는 고기 바라보고 精神을 허비 말라 精神莫費觀魚上
일이 장차 싸움터에 벌어짐을 볼 것이다. 事業將看戰馬間
與柳汝元 曺汝? 琴聞遠 登朱砂山 見金將軍斷石痕 次汝?口號韻
류여원, 조여수, 금문원으로 더불어 朱砂山에 올라가서 金將軍이 돌을
자른 흔적을 보고서 여수가 운을 부르기에 차운하였다.
神翁이 冊을 주어 병서를 읽던 해에 神翁書授讀兵年
해를 꿰뚫는 외로운 忠誠이여 이미 하늘이 감동했네. 貫日孤忠已感天
百번이나 鍊磨해둔 龍泉의 寶刀는 돌이라도 베이리니 百鍊龍泉能斷石
萬旗로 에워싸인 城도 온전할 수 없으리라. 萬旗圍壘一無全
與柳汝元 曺汝? 琴聞遠 題望夫石
류여원,조여수, 금문원으로 더불어망부석에 쓰다.
준동하는 오랑캐가 섬 속에 있으니 蠢爾蠻夷在島中
뉘 能히 바다 건너 英雄風을 떨칠쏜가! 誰能驅海振英風
몸을 잊고 순국해서 절의를 지킨 것은 忘身殉國能全節
박제상 한 사람이 천고의 영웅이다. 堤上千年一箇雄
八公山會盟韻 丙申
팔공산 회맹운(병신 1596년)
치열한 싸움터에 둘도 없는 지모있는 장수있네. 兵場方見士無雙
순수한 높은 정성 부모의 나라로다. 斷斷危?父母邦
늙은 내가 무슨 도움이 있으리오만 如我白頭何所補
진작 兒子를 데리고 금호강으로부터 왔네. 故携兒子自琴江
※ 樂義齋 集에는 경주의병장 樂義齋 李訥이 1597년 9월 22일 팔공산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부상당한데 대하여 의병장 52명이 공적을 찬양한 詩라고 되어 있음.
荒園中 有一叢梅 埋沒 荊棘 尙未開花 見卽悽然 未免有思人之念
因題拙句, 奉呈君輔(全三益)兄弟, 辛亥
거칠어진 동산 속에 한 떨기 梅花가 가시에 묻혀 아직도 꽃이 피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悽然해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因하여 拙句를 지어 君輔(金三益) 兄弟에게 올렸다.(1611)
적막한 동산 東쪽 적막한 시냇가에 寂寞園東寂寞濱
이른 봄 비속에서 가지는 엉성하고 줄기는 이끼 끼네. ?枝苔?雨中春
가련타 올해엔 더디게 피려나. 憐渠今歲姑遲笑
西쪽 萬里 謫客을 기다리네. 應待西行萬里人
이 때 막내아들 수번이 관서에 귀양 갔었음. 時季子守藩謫于關西
余於全君勉 三省壁上, 題克閭慶三字, 而聞有生子 因寄詩以賀
내가 全君勉(三省)宅의 壁上에다가 ?克·閭·慶? 三字를 써 붙였는데 아들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詩를 지어 보내어 치하하였다.
극, 여, 경 세 글자를 그대 집 벽 위에 써 붙이고 克閭慶字書君壁
?驗있길 기대하나 도리어 虛言될까 의심터니 待驗還疑此語虛
오늘에야 득남 소식 반갑게도 들려온다. 今日得聞生貴子
비로소 알겠구나 그나마 응하여 헛되지 않은 줄. 始知綿應不歸虛
餞李太守 惟弘
李 太守(惟弘)를 餞別함
지난 해 菊秋 때에 五馬로 다니더니 去歲黃花五馬行
올해 단풍들자 한 소(牛)로 떠나느냐. 今年楓葉一牛征
돈 없음이 부끄럽구나 山翁의 전별을 하노니 無錢愧殺山翁?
淸江水 한 잔으로 늦은 길 전송하네. 酌水淸江餞晩程
和柳汝元贈韻 庚寅
류여원이 보내온 운에 화답하다. (1590년)
情과 性이 詩에 나타나니, 情性發於詩
아마도 그 사람의 奇異함을 보리로다. 其人想見奇
공부가 온전하긴 道學을 담론하는 밤이고, 工全談道夜
理致가 밝기는 점대를 쓰는 때일세. 理?借籌時
쫓겨나선 괴롭게 노래하며 읊조리고, 放逐歌吟苦
곧은 忠誠 자나 깨나 생각하네. 貞忠寤寐思
문장에 능한데다 武를 겸비하니, 能文兼武備
천만의 군사라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可禦萬千師
宜樂堂, 次曺芝山韻, 曺瓊兄弟友愛, 故芝山, 名其堂曰宜樂, 在郡南蒼水里.
宜樂堂에서 曺芝山韻을 次韻하다.(曺瓊 형제가 우애하기 때문에 그 당을
?宜樂堂?이라고 이름 하였다. 군 남쪽 창수리에 있다.)
堂名을 어찌해서 宜樂이라 하였는고 宜樂名何以
여기에서 함께 흉금을 펼침일세. 於焉共瀉襟
뜰 앞에 국화꽃은 난만하게 피어있고 黃花庭爛?
湖水 위에 백조들은 한가로이 부침한다. 白鳥水浮?
詩客들은 글쓰기를 생각하고 詩客思提筆
遊人은 벼슬길 사양하네. 遊人欲謝簪
주거니 받거니 거문고에 술의 흥취 相酬琴酒趣
누가 형제 마음 같으랴. 誰似弟兄心
八公山會中, 各以‘字’聯句, 丙申 會盟時.
팔공산의 모임에서 각기 자기의 '字'를 가지고 聯句를 지었다.
병신년(1596년) 회맹 때(32명)
堯임금의朝廷에선 和叔을 命하였고 堯庭命和叔
次獨樂亭韻 李知白山亭在圓覺
독락정운을 次韻하다.
(이지백의 산정이 원각에 있었음. 영천시 자양면 용산동 원각)
산세는 의연하게 巫峽처럼 길었는데 山勢依然巫峽長
一區의 勝地가 南方에 으뜸이라. 一區形勝擅南方
파도소리 구름에서 나옴은 千樹의 솔 濤聲出壑松千樹
옥소리 뜰에서 생겨남은 몇그루 대나무. 玉韻生庭竹數行
仲長의 田宅이 넓음이 부러울 것 없으니 不羨仲長田宅廣
요컨대 元亮의 北窓이 시원함과 같으리라. 要同元亮北窓凉
따뜻한 방 아침에 해가 떠오르도록 오히려 깊은 잠들었나니, 溫房朝日猶濃睡
손 없으니 무엇 때문에 급히 옷 차려 입을까. 無客仍何起倒裳
※ 仲長 : 중국 後漢의 仲長統을 말하며, 벼슬하지 아니하면서 자기의 뜻에 따라 유유자적하는 사상의 소유자.
元亮 : 東晉의詩人 陶淵明의字
次五梅亭韻 進士孫處訥溪亭, 在達城壽城村
오매정운을 次韻하다.
(進士 孫處訥 溪亭이 達城 壽城村<대구시 수성구 황금동>에 있음)
소쇄한 띠재실(齋室)이 좋은 이름 얻었도다. 蕭灑茅齋得美名
뜰 가에 손수 심은 五梅가 庭除手植五梅兄
霜風의 차가운 꽃술 못에 임하여 피고, 霜風冷蘂臨塘發
雪月의 찬가지 대나무 사이에 솟았네. 雪月寒梢間竹生
처마(?下) 밑엔 부질없이 공주의 이마에 붙었는데, ?下?粘公主額
늪에는 도리어 매화가 빠졌구나 澤濱還闕楚臣經
주인의 심사를 아느냐 모르느냐. 主人心事君知否
그 德과 그 梅花 한 가지 향기로다. 德與梅花一樣馨
(매화를 자화라 하기도 한다) (梅花一作玆花)
釣翁臺, 次文上舍繼朴韻, 臺在臨皐書院之東, 乃圃隱先生遊賞處也.
조옹대에서 文上舍(繼朴)의 詩韻을 次韻하다. (臺가 臨皐서원의 東쪽에 있으니, 곧 圃隱先生이 노시고 구경하신 곳이다.)
병든 눈이 登臨함에 문득 절로 밝아지고, 病眼登臨便自明
외로운 대 위에는 푸른 모래 평평하다. 孤臺臺上碧沙平
천그루 버드나무 금실을 드리웠고, 千株柳色金絲拂
한줄기 흐르는 내는 흰 베를 펼쳤는 듯. 一帶川流素練橫
고인의 낚시 취미 일찍이 사모했으니, 夙慕古人垂釣趣
오늘에 詩의 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誰知今日賦詩情
늦바람이 잔에 드니 맑은 향기 곁들이고, 晩風入?淸香襲
바위 아래 지는 매화 꽃잎을 흩날리네. 巖下殘梅送落英
次姜公德文韻, 姜, 晋州人, 乃芝山友壻, 壬辰避兵于此地.
강공(덕문)의 시운을 차운하다.(姜公은 晋州人으로, 芝山 동서이다. 壬辰年에 이곳으로 피란 왔었다.)
黃玉(文藝)을 품고서도 아직 좋은 계책 시험하지 못하였고 懷璜雖未試嘉猷
그럼에도 儒雅風은 사십년이 흘렀도다. 儒雅風流四十秋
옛 일을 기억함에 옛 낙이 없고, 舊事記來無舊樂
새 詩를 읊고 나자 새 근심이 생기네. 新詩吟罷有新愁
支離한 衰病으로 浮生이 고달프고, 支離衰病浮生困
동서로 流離하여 세월만 흘렀도다. 漂泊東西歲月流
監河의 세대와 머니 그 누가 쌀을 대주랴. 世遠監河誰貸米
고생스럽게 분주함에 쉬지를 못하누나. 辛勤奔走不能休
※ 監河 : 監河候로 西河의 현령(縣令).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움.
其二
어릴 때부터 소략하고 용렬하여 흰머리에 이르렀으니, 自少疎?到白頭
冷落한 생애가 몇 해나 되었는고. 生涯冷落幾多秋
종놈이 게으르니 田園이 거칠고, 田園荒處從奴懶
쌀독이 비는 것은 아내의 근심이라. ?石空來任婦愁
술 없이 상대함에 주인 체면 부끄럽고, 無酒共酬?我主
인정으로 돌볼 제는 그대에게 감사한다. 有情遑恤感君流
暗疎한 기주의 풍속을 일찍이 미워했더니, 暗疎曾嫉?州俗
오늘날도 詩 씀을 그치지 못함을 한하는가. 今日題詩恨不休
登紫湖精舍, 用前韻述懷.
자호정사에 올라 ‘前’운을 가지고 술회하다.
만산이 에워싸인 한 시내 머리에 萬山環抱一溪頭
두어 칸 솔 처마는 여름에도 가을 같다. 數架松?夏似秋
물리를 살피매 한가로운 가운데 시구를 즐겨 읊조리고, 觀物愛吟閑裏句
시속을 상심함에 취중의 시름 떨치기 어렵구나. 傷時難遣醉中愁
하찮은 이내 생애 구름 따라 冷落하고, 生涯草草隨雲冷
鄙吝이 가벼워져 물을 따라 흘러간다. 鄙吝輕輕逐水流
나물밥 나물국에 배불릴 수 있으리니, 蔬食只能供我飽
다시 아무 염려 없이 부생에 맡기리라. 更無思慮任浮休
其二
壯年의 뜻 적장 머리 벨 것을 기약했건만, 壯志期梟賊將頭
쇠잔해진 이내 몸이 귀 밑 털이 셀 줄이야! 殘骸驚却?邊秋
오랏줄이 있었지만 종군(終軍)의請 못 이루고, 有纓未遂終軍請
힘없으니 부질없이 杜甫의 근심을 품었구나. 無力空懷杜老愁
노쇠하고 병드니 어찌 출세 길에 달릴쏜가 衰病豈宜馳世路
한가로이 물러가서 淸流를 구경함이 내 분수에 적합하네 退閒端合玩淸流
백구도 江湖?를 싫어 않고 찾아주니, 白鷗不厭江湖?
靑眼이 이제부터 죽어서야 그치리라. 靑眼從今至死休
※ 終軍 : 漢나라 濟南 사람으로 字는 子雲이며, 使臣을 받들어 南越王을 유세(遊 說)하러 감에 긴 끈을 請하여 반드시 남월왕의 목을 매어 바치겠다고 한 사람.
靑眼 : 阮籍이 죽을 때까지 좋은 사람만 사귀겠다고 쓴 말. 완적은 三國時代 위(魏)나라 竹林七賢의 으뜸으로 老莊을 좋아하였으며 好酒家로 거문고를 잘 탔음.
陰 陵 懷 古
悲凉落日陰陵道 不滅遺?千萬古 何年一挫拔山力 敵萬奇功終未樹長程信馬睡有餘 蝶夢方?魂?? 道傍如聞泣且言 請將煩寃爲君吐自從妖艶入咸陽 ?秦化爲陽翟賈 呑周滅侯灰簡冊 政令煩苛猛於虎
江東募得八千兵 渡江誓解黎元苦 提兵所向勢破竹 渭上宮殿燒一炷草間匹夫亦雲起 奮臂且欲爭一賭 劉邦不是素有怨 約爲兄弟終無補不料中道懷貳心 先入關中封府庫 猜疑績成共立難 逐鹿多年誰作主?水鴻門??角 勢至呑滅非三五 堪嗟天意不我順 失路陰陵非自取幽?別有入骨髓 地下終難掩此怒 縞素三軍實舞許 世人皆爲非項羽那知凶計竟我蹂 悔不當年烹乃父 烏江亦從亭長言 還向江東千里土捲甲他年渡江西 沛公其逃旗下虜 終然自刎非我罪 乃知得失元有數苦語聞來睡忽驚 慘慘不覺頭髮竪 追思壯氣盖世日 豈料一夕?雄武剛强必死信不誣 始知仁義終受祜 千秋遺事付東流 聊爲興亡一揮塵山哀浦思感慨處 但見秋草鳴寒雨
음 릉 회 고
陰陵의 옛 길에 쓸쓸하고 저문 날에 當日에 끼친 寃恨 千萬古에 滅치 않네
力拔山의 威力을 어느 해나 꺾어볼꼬, 一萬 敵과 奇한 功도 마침내 못 세우리 萬里長程 믿는 말에 졸음이 남아있고, 나비 꿈을 꾸어 바야흐로 무르익어 心魂이 기뻐한다. 길가에는 듣기는 듯 울고는 또 말한다. 許多한 寃을 갖고 그대를 爲하여서 請컨대 이르리라. 妖艶한 계집년이 咸陽으로부터 ?秦이 화해서 陽翟賈가 되었도다. 周나라를 삼켜 먹고 諸侯들을 滅亡하고 詩와 書를 불사른다. 暴政과 嚴命은 煩거롭고 苛酷하기 猛虎 보다 사납도다, 江東의 八千兵을 募集해 얻어 갖고, 江을 건너 맹세해서 백성의 괴로움을 一時에 풀어준다, 軍士를 이끌고서 向하는 곳곳마다 破竹의 形勢로다. 渭水위에 宮殿들도 一炷火로 불사르니, 초간에 필부들도 구름같이 일어난다. 팔뚝을 걷으면서 한번 싸움하려 한다. 劉邦은 元來부터 怨恨이 있지 않다, 兄弟로써 約束하나 마침내는 도움 없다. 進行의 途中에서 두 마음 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關中에 먼저 들어 府庫를 封해 두니 猜忌하고 疑心함이 쌓이고 쌓여서 함께 서기 어려웠다. 逐鹿한지 여러 해에 그 누가 主人 될꼬, ?水와 鴻門에서 부질없이 ?角한다. 事勢가 危急하여 呑滅할뻔 하던 때가 三五次가 아니로다, 슬프도다! 天意시여 나를 順히 않게 한다, 陰陰에서 길 잃음은 自取함이 아니로다. 맺힌 寃은 깊이깊이 骨髓에 맺혔으니 地下에 들어 간들 이 노여움 못 가린다. 素服한 三軍들은 춤은 추나 거짓이라 모든 世上 사람 項羽가 아니어서 凶計가 마침내 우리를 유린할 줄 어찌하여 알겠는가. 當年에 그 아비를 삶지 못함 後悔한다, 烏江에 또한 亭長의 말을 따라 江東의 千里土를 돌아와 向했다가, 甲옷 걷은 後日에는 江西로 건너가면 沛公인들 그 어찌 旗下虜를 免할손가. 마침내 自決하나 나의 罪가 아니로다. 得과 失은 元來부터 運數가 있었음을 이제야 알겠구나, 괴로운 사설들을 들어옴에 잠이 깬다. 어느덧 슬프고 슬퍼 머리털 서는 것을 깨닫지 못할러라. 씩씩한 氣가 세상 덮던 그 옛날을 追思하니 하룻밤에 英雄이 꺾일 줄을 그 어찌 생각하리. 剛强하면 죽는다는 옛 말이 참으로 틀림없다. 仁義로 法을 하면 마침내 福 받을 줄 이제야 알겠구나. 千秋의 옛 일을 東流에 부쳐 두고 興亡을 한 떨기로 티끌처럼 휘두르니 山川의 슬픈 생각 慷慨하던 옛 터에는, 寒雨中에 가을 풀이 다만 우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로다.
千首詩輕萬戶侯
人生百年何草草 眼前名利同浮? 物外何人癖於詩 一日紙價增金?錦囊千篇耀宇宙 絶勝萬戶封雄州 張公本是詞客流 文字撑腸唾成珠長安三月天氣新 一區皇州春色稠 靑?高拂杏花風 聞達諸侯吾不求筆落幾多風警 日暮天低鬼?? 河海波渴泣陽候 天山玉盡愁昆丘多生綺語磨不盡 浩浩詞源三峽流 回看侯王於我何 市上徒惹黃犬愁五更待漏靴滿霜 奔走辛勤不能休 何如吟此錦繡句 得得閑閑長自由淸詞吟罷爽心神 世外塵念俱悠悠 堪笑五陵豪俠子 挾彈臂鷹馳華?蹇驢獨吟武陵春 不羨勳臣封公侯 詩中逸興老更多 白首肯作樊籠囚
繁華富貴一朝塵 千首詩傳幾千秋
천수의 詩가 만호후를 가벼이 하다.
人生 百年이 왜 이다지 草草하냐, 눈앞에 功名 富貴 물거품과 한 가지다.
物外에 어떤 이가 詩에 癖이 붙어 하루의 종이 값이 金?에 더하였다.
錦囊의 千篇詩는 宇宙에 빛나도다. 絶勝의 雄州에 萬戶侯를 封하도다.
張公은 本是부터 詞客의 무리다. 文字로서 창자 채우고 뱉으면 구슬이라.
長安의 三月에 天氣가 새로워 皇州의 一區에 春色이 무르익네.
푸른 기를 杏花村의 바람에 높이 달고, 諸侯에 알려지길 내 일찍 求치 않고
붓 끝이 떨어지자 얼마만한 비바람이 몇 번이나 놀랬더냐.
저문 날 하늘 아래 鬼神이 ??하게 얼마만큼 울었던가.
河海의 파도도 陽侯를 울렸었고 千山에 玉이 다 해 山嶽이 근심한다.
아름다운 詩語들이 계속해서 솟아나니 갈아도 끊임없고 넓고 넓은
詩의 根源 三狹의 흐름이라.
돌이켜 보자 하니 王侯라 하는 것이 나에게 相關이랴, 다만 저자 위 엔 黃犬 근심 일으키고, 五更에 환하길 기다리니 신 안에 서리가 가득하다. 奔走하고 고생하여 쉴 수가 없으련만 어찌하여 이와 같은 錦繡句를 읊으면서 自得하고 閑暇해서 어느 때나 自由런고. 맑은 詩詞 읊은 뒤에 心神이 爽快하고 세상 밖에 더러운 생각 모두가 멀어진다.
五陵의 豪俠子야 웃을 만도 하다마는 彈을 끼고 매를 잡아 번화街를 달려간다. 蹇驢(발을 저는 나귀)를 홀로 타고 武陵春에 吟詠하니 勳臣이며 功臣들이 公侯로 封하는 것 부러워 아니한다.
詩中에 逸興은 늙을수록 더욱 많아 白首에 어찌 하여 樊籠囚가 되었는가.
繁華와 富貴들은 하루아침의 티끌인데 千首의 詩句들은 幾千秋를 전하리라.
琴 臺 初試
暮靄深處蜀天? 古臺荒凉秋草無 芳草曾不共人沒 千秋可想當年娛當年娛樂者誰子 知是武陵多病夫 風流一代恣浩蕩 氣岸自與凡人殊生平壯志在題柱 卓?文章漢家儒 臨?忽赴卓家會 滿堂華筵開笙?琴中奏罷鳳凰音 韻八幽閨心暗孚 月墮雲中從此始 意態不殊苧羅姝握手欣副逐君意 于以共住蒼山隅 閑來弄絃繼吟詩 擬諸琴瑟相怡愉都忘家泛?石資 何以待子不時需 甕中新釀熟未熟 洞口春風羅玉壺翩翩白衣紛往返 門外列錢皆酒沽 半生生涯付靑? 家徒四璧曾無虞高才不憚親滌器 妙質猶堪事酒? 彈來自謂遇知音 醉後還似高陽徒
誰將此臺名以琴 千載聞風效葫蘆 士生天地豈偶然 所貴引君陣嘉猷徒將身世任放浪 若擬君子堪嗟? 桑楡廻意悼?臍 白頭一篇笑矣乎高臺今古空突兀 遠想遺跡邈而汚
금 대 초시
저문 노을 깊은 곳에 蜀天이 넓었는데 옛 臺는 荒凉하고 秋草는 거칠도다.
일찍이 芳草들은 사람처럼 죽잖으니, 千年 지난 오늘에도 當年에 즐긴 일을 생각함직 하였구나. 當年에 즐기던 者 뉘신지 알자하니 다름 아닌 武陵 안에 多病하던 그 분이라. 風流는 一代에 호탕을 방자하고 기세는 스스로 凡人보다 다르도다. 平生에 壯한 뜻은 기둥에다 써서 두고, 높고 높은 文章은 漢家의 선비로다. 臨?의 卓家모임 홀연히 다다르니, 滿堂한 華?에는 笙?가 벌여 있다. 거문고를 奏樂 함에 鳳凰曲이 흘러나니 그윽한 방안으로 韻이 점점 들어가자 마음속이 도취된다.
※ 註=司馬相如가 卓家의 딸 文君을 꾀이기 爲하여 거문고로 鳳凰曲을 타니 그 소리가 文君의 房안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달이 구름 가운데서 비치는 것과 같다는 故事
구름 속에 달이 뜨니 이로부터 시작이라. 意態는 그 옛날 苧羅의 西施보다 다를 것이 하나 없다. 손을 잡고 기뻐하며 그대를 따르리라 意思를 表하도다.
이리하여 蒼山隅에 다 함께 머물러서 閑暇로이 絃樂을 戱弄하고 그런 뒤에 詩를 다시 읊어본다. 琴瑟의 調和따라 서로가 和合한다. 집안에 쌀독이 없어진들 모두 잊네. 不時의 음식 차림 무엇으로 대접할꼬, 독안에 빚은 술이 익었느냐 안 익었느냐. 洞口 春風에 玉壺를 벌이로다. 翩翩한 흰 옷들이 紛紛하게 가고 온다. 門밖에 벌인 돈은 모두 다 술을 사라. 半生의 生涯를 靑?에 부쳐두니 四壁이 무너져도 일찍이 근심 없다. 높은 재주로도 친히 손수 그릇 씻길 꺼려하지 아니하고 좋은 才質로도 술 다루는 일들을 오히려 감당한다.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樂을 안다. 自慰하고 취하고선 도리어 高陽徒와 恰似하다. 누가 이 臺를 琴臺라고 이름한고. 千載에 聞風하고 葫蘆를 본받는다. 이 세상에 선비 남이 어찌 그 偶然하랴. 임금을 引對하고 좋은 계책 陳達함이 귀한 바 되련마는 자기의 신세로써 放浪한데 맡겨 두어 君子들이 견디어 탄식하게 하였느냐. 晩年에 뜻을 돌려 슬퍼하고 후회하나, 白頭의 한 편 글이 웃음을 질 뿐이로다. 높은 臺는 예나 이제 빈 채로 솟았는데, 遺蹟을 想像하니 아득하고 오활하다.
天 寒 諫 鑿 池 會試
土階雲寒化日遠 卑宮草沒淳風衰 滔滔後世?誇侈 興作無度生怨咨可笑靈公何太愚 天寒不恤民力疲 以民爲天昧王政 築怨罔念非其時凍雪飄?錦袍暖 那知白屋呼寒飢 侈心一啓不自? 丹詔已下開方池經營旣無周文德 不日成之安可期 況乃陰風天地閉 忍見赤子生瘡痍墮指裂膚不足說 令嚴又以鞭?隋 强把?杵瀝脂膏 顚坑?谷相枕屍滿朝麟?甘結舌 誰將藥石呈丹? 惟公蹇蹇不敢恝 ?立朝端進良規遂將?屋小民心 歷歷竟使君王知 君王歎服意忽回 片言坐令蘇疲羸愛主憂民發於情 幾度爲國心潛悲 ??能使萬姓全 罷役深恩公所施豈徒一朝解民怨 竹帛芳名遐代垂 如何叔季容悅輩 啓事暗中君欲爲千秋更續呂氏筆 景仰高風成短詞
추운날에 못파는 것을 간하다 회시
토계의 추운 날에 교화가 멀어지고, 낮은 궁은 풀에 묻혀 순풍이 쇠미하니 도도한 후생들은 부질없이 사치하기, 법도 없이 흉을 내어 원망만 빚어낸다. 가소롭다 영공(靈公)이여 어찌 그리 어리석나. 날씨 찬데 백성의 피로는 생각도 아니한다. 백성은 하늘이란 王政 일에 어두워서 알맞은 때 제 몰라서 원망을 쌓아가네. 언 눈이 흩날릴 제 비단도포 겹쳐 입고 흰 지붕 속 굶고 떨음 어찌 알고 있을 손가. 사치스런 마음자리 한번 열려 못 막으니 붉은 조서 이미 내려 연못을 파라신다. 경영이 빗나가 주문왕의 덕이 없어, 빠른 시일 이루기를 어찌 가히 기약할까. 하물며 거센 陰風 하늘을 가렸으니 어린 백성 얼부풀기 차마 어찌 바라보랴. 손가락이 떨어지고 살이 찢기우니, 그나마 억울함을 어찌 다른 말로 하랴. 거기다 엄한 명령 매질이 따르도다. 억지로 삽질하고 절구질에 기름내니, 구덩이에 쓰러지고 골짜기에 넘어져서 원통히 죽어가니 시체를 베게 한다. 만조의 신하들도 입 다물기 좋아하니, 장차 누가 임금에 충언을 아뢰리오. 오직 公이 참지 못해 조정에 나아가서, 곧은 말과 좋은 방법 낱낱이 아뢰신다. 부옥(?屋)의 얻은 인심 역력히 헤아리매, 드디어 우리 님이 그 참뜻을 알으시어 홀연히 탄복하사 내린 말씀 돌리시니, 한 말씀에 내린 영이 어린 백성 살렸구나. 임금을 우러르고 백성을 걱정하며 남모르게 슬퍼하길 몇 번이나 하였던고. 곧은 말과 바른 거동 만백성을 구해내니, 罷役의 깊은 은혜 공이 베푼 공덕이라. 하루아침 잠깐 사이 백성의 원망 풀었도다. 역사에 오른 이름 먼 후 세에 드려진다. 아첨 하는 무리들은 말세를 주름잡고, 임금의 하올 뜻을 암암리에 꾸며낸다. 천추에 살아남을 春秋筆法 이어받아 높은 풍조 우러러서 짧은 글을 이룬다.
? 만사(輓詞)
輓曺芝山 好益 己酉
조지산(호익)을 輓하다.(乙酉 1609년)
관서의 천릿길에 도로가 멀었는데, 關西千里道路脩
형제간의 생각으로 새 근심을 더하도다. 思兄憶弟添新愁
변방에 해가 지니 歸鄕心이 끊어지고, 殊方落日歸心絶
피차간에 소식 알 길이 전혀 없네. 彼此消息通無由
까닭없이 임진년에 큰 난리가 일어나, 無何壬辰遭大亂
사나운 도적들이 승승장구 해변을 유린한다. 劇賊長驅欄海?
主將들은 도망쳐서 列城들이 무너지니, 主將竄走列城崩
어느 누가 기운 내어 구원할 수 있으려나. 何人?氣能援袍
누가 일개의 白面書生, 誰知一介白面生
忠憤心이 激烈하고 奇謀가 허다함을 알리요. 忠憤激烈多奇謀
의병을 始倡하고 鄕士를 권유하니 군민이 響應하고. 倡義勸誘民響應
원수갚길 기약하고 몸을 잊고 분투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忘身奮擊期復讐
금의환향하니 눈빛이 홀연히 푸르고 빛이 나며, 錦衣歸來眼忽靑
서로 만나 악수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握手不禁雙涕流
서로 만나 한여름도 지나지 못한 것 같은데, 相逢曾未閱一夏
어느덧 병이 드니 명약이 있다한들 兄의 병은 낫지 않네. 暝眩不使兄病?
천도는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는고, 天道如何至此極
갑자기 하루 만에 유명을 달리하는구나. 奄忽此日隔明幽
이십년 품은 회포 마침내 터득치 못하고, 卄載離懷竟未攄
면면한 이 원한을 어느 때나 그치려나. 綿綿此恨何時休
와촌의 마을 안에 작은 집을 얽었으나, 瓦村村中結小廬
사방으로 통달하여 幽人이 머무를 곳 진실로 아니로다. 四通固非幽人留
저 芝山 바라보니 하나님의 아낌이라, 眷彼芝山天所?
산천이 수려하니 진실로 명승이라. 山明水麗眞名區
卜築한지 일년 花竹을 심어두니, 卜築年來種花竹
數間의 茅屋이나 견디어 놀 만하네. 數間茅屋堪優遊
마음은 청백하여 한 티끌도 더럽힐 수 없고, 心源不受一塵侵
가슴속은 灑然하여 스스로 悠悠하네. 胸次灑然自悠悠
집은 비록 가난하나 제사를 모실 제는 愛와 敬으로, 家貧奉祭盡愛敬
지성 다하니 저절로 庶羞가 갖춰지네. 至誠自然具庶羞
맑은 창에 홀로 앉아 성현의 글을 읽으니, 晴窓坐讀聖賢書
위로는 伏羲軒轅 아래로는 明道?溪 모시고 대하였네. 上對羲軒下程周
의리를 함양하여 후진을 가르치니, 涵濡義理誨後進
원근이 소식 듣고 다투어 찾아오네. 遠近聞風爭來遊
顔淵의 陋巷이요 康節의 집이로다, 顔淵陋巷邵雍窩
낙이 그 안에 있으니 무엇 다시 구하리오. 樂在其中又何求
한가한 중 때때로 학도를 이끌면서, 閒來有時携學徒
맑은 못에 작은 배로 태평하게 지내도다. 淸池小艇聊夷猶
조정에선 이런 뜻 알지 못하고, 朝廷不識這裡意
부질없이 敎旨 내려 자는 백구 놀라게 하네. ?使五馬驚眠鷗
까닭 없이 하룻밤에 백구가 날라드니, 無端一夕鵬鳥飛
하찮은 우리 일이 뜬 거품 한가지라. 草草人事如浮?
大德이 不壽하니 天理는 알 수 없고, 大德不壽理難究
伯道가 無子하니 하늘을 탓하리라. 伯道無兒天可尤
靑孀은 불쌍하나 의지할 바 없지 않고, 靑孀雖慘有依倚
뒤를 이은 양자 있어 살림 世業 지켜가네. 繼後猶能守箕?
멀리서 책을 지고 찾아 배운 金學士가, 負?遠來金學士
흰머리 긁으면서 슬피운다. 飮泣秋天搔白頭
(門人 김육이 와서 그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來治其喪故云云)
문장은 이르기를 지나는 새 같다하나, 文章縱云如過鳥
도덕은 갈리지 않고 천추를 전하도다. 道德不磨傳千秋
온 향인 보내오니 어디로 가시는고, 擧鄕祖送向何之
송청산 한줄기에 선영 언덕 그곳이라.(청송은 산이름) 一髮松靑是先丘
○ 편지(便紙)
答 孫幾道 處訥 癸卯
前者 專人致札 招意殷勤 僕往在曲江 未卽修復矣 聞享祀後 會內外族親 謀?此變後美事也 敢不樂赴 而曲江歸程 遭大風傷寒 ?未差復 玆負厚意 何恨如之 ?及榮墳事 此處時未行之 僕先往其處 於義似乖 但先達欲請于營判官 借得祭需 從?行事 君於此助奠 則似可矣 時季子守藩 中科故云
손기도에게 답서(孫處訥. 癸卯. 1603)
전자에 사람을 전인해서 편지를 보내어 부른 뜻이 은근했는데도 내가 曲江에 가 있기 때문에 답장을 못했다. 듣건대 享祀후에 內外족친들이 모여서 變을 모의했으니 아름다운 일이다. 감히 즐거이 가지 않으련마는 곡강에서 돌아오는 길에 大風을 만나 감기에 걸려서 아직껏 회복되지 못하여서 이에 후의를 저버렸으니 어찌 한스러움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先達께서 營 判官께 청해서 祭需를 빌려서 간략히 행사하고자 하니 그대가 여기에 奠을 도와주면 좋을 것 같다. (이 때에 막내 아들 守藩이 과거에 급제한 까닭에 말한 것이다)
與 孫幾道 乙巳
往來無人 音耗兩絶 卽惟雪滿山中 淸況若何 此間戀懷 無以勝喩 僕時與老妻 僅保衰病 餘何足道 孫兒江老 年歲已多 而?今未得入學 蓋吾老病故也 其父往北道時 力言送于君前受學 故送去 乞須勉力課誨 至望至望 此兒性度輕薄 讀書之暇 敎以進退之節 馴致從容尤善 夜間亦須嚴飭 勿使出遊爲可
손기도에게(乙巳. 1605)
왕래하는 사람이 없으니 소식이 모두 끊겼다. 때는 곧 눈이 山中에 가득한데 情況이 어떠하신고. 그 동안 생각하던 마음은 형용해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때때로 老妻로 더불어 겨우 쇠약한 병을 보존하니 나머지 무엇을 이를 것이 있겠는가. 손자 아이 江老의 나이가 이미 많은데 이제껏 입학을 시키지 못했으니 이것은 내가 늙고 병든 까닭이다. 그 아비가 北道에 가 있을 적에 그대에게 보내어 受學하게 해달라고 힘써 당부한 까닭에 보내노니 바라건대 부디 힘써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아이는 성품이 경박하니 공부하는 틈에 進退之節을 가르치고 조용히 길들이는 것이 더욱 좋다. 야간이라도 또한 모름지기 엄하게 감독해서 나가 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與 孫幾道 丙午
落花時節 吟況若何 尋常向戀不已 僕 時與老妻免恙 他何足道 江老如有學性 則須更勉誨 使之成就 至望至望 僕之衰懶 年來尤甚 非君用力 勢將棄之矣 史?第三四券覓送 此書盡帙誦之 則應解文理 然後誨之不難矣 大?兒曺之學 熟讀爲上 兒時所誦 白首不忘 而但此兒性躁 如不猛撻必不能勤讀 幸忘勞嚴責焉
손기도에게(丙午. 1605)
꽃 떨어지는 시절에 詩를 읊는 事情이 어떠하신가? 항상 바라보고 생각해 마지 못한다. 나는 요즘 老妻로 더불어 병이 없으니 다른 것은 무엇을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江老가 만일 배울만한 성품이 있으면 모름지기 더욱 힘써 가르쳐 주셔서 그로 하여금 성취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네. 나의 쇠퇴하고 나태함은 年來로 더욱 심하니 그대의 用力함이 아니면 사세가 그를 장차 버릴 것이다. 史? 제 三, 四권을 찾아 보내니 이 冊의 全帙을 외우게 시키면 응당 文理를 깨달을 것이니 그런 뒤에 가르치시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대개 아이들의 공부는 익히 읽히는 것이 가장 좋다. 어렸을 때 외운 것은 늙어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단, 그러나 이 아이는 성품이 조급하니 맹렬하게 종아리 치지 않으면 반드시 능히 부지런히 공부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바라건대 수고스러움을 잊으시고 엄하게 책망해 주시오.
與 曺參軍 應仁 辛亥
飽聞聲華 常以曾未一見爲恨 頃承問札 至再深感 不棄辱戚之厚意 路遠至今未得修復 自知不敏甚矣 卽惟凉秋 從仕氣味何如 遙戀實切 世雅僅保殘喘 而家豚守藩 曾配西關極邊昌州數千里之外 放還不久 猥蒙邊除 恩命極感 而此去撫夷 六十日程 且今世雅之年 七十有七 瓜朔經三年 則吾年至八十矣 人生難必者八十之壽 勢將不得相見而死 父子之情 到此際爲如何哉 欲以雙親老病呈辭 而人言非獨子 則未能得伸云 若以某也 才分不逮 北路要鎭 不可堪任 論啓則此渠實狀 或可蒙允否 本道知舊 多列臺侍 尊君相議善處如何 世雅男子 雖有?然之情 亦有寬遣之理 而荊妻老病人也 以更未相見而死 爲言涕泣 掩抑過傷懷抱 若此不已 恐添疾病 未終天年也 此雖冗?可笑 自守藩私情言之 亦甚切迫 伏惟恕諒焉
조참군(응인)에게 보낸 편지(신해. 1611)
성화를 익히 듣자옵고 항상 일찍이 한번 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옵더니 방금 문안 편지를 받자옵고 다시금 못난 姻戚을 버리지 않은 후의에 대하여 깊이 감격했습니다. 길이 멀어 지금껏 답장을 이루지 못하오니 스스로 대단히 불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凉秋에 벼슬길의 재미가 어떠하십니까. 먼데서 생각이 실로 간절합니다. 世雅는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나 그러나 집 아이 守藩이 일찍이 관서의 끝 쪽인 昌州 수 천리 밖에 귀양 갔다가 머지않아 돌아올 듯 하더니 외람되게 변방 수비를 받자오니 은혜로운 왕의 명은 극히 감사하오나 그러나 오랑캐를 진압하기 위해서 가는 곳이 60일이나 가는 길이요 또한 世雅의 나이가 77세이니 瓜滿으로 3년이 지난다면 내 나이가 80이 될 것입니다. 인생이 기약할 수 없는 것은 80의 수입니다. 사세가 장차 서로 만나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父子의 정이 이 지경에 이름에 어떠하겠습니까? 雙親이 늙고 병들었다는 것으로서 社稷을 바치고자 한들 남의 말에 의하면 독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하오니 만일 아무개가 才分이 미치지 못해서 북방의 要鎭을 감당해서 맡길 수가 없을 것이니 啓를 논하면 이러한 사정으로 혹 允許를 받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본도의 친구들이 많이 臺侍에 있으니 존형이 좋은 방법을 상의하심이 어떠하실까? 世雅는 남자인지라 비록 암담한 정이 있더라도 또한 너그럽게 지낼 수 있으나 아내로 말하면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다시 서로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여 말을 하며 울고 있으니 이처럼 지나친 상념의 회포를 억제한 채 계속한다면 아마도 병을 얻어서 제 나이에 죽지 못할 것이니 이는 비록 용렬하고 우스운 말이나 守藩의 私情으로 말한다면 또한 대단히 절박하오니 바라옵건대 恕諒하소서.
寄 安藩 守藩 乙未
邇來未知汝等好在耶, 爲慮實深, 項籍傳印出紙送去, 汝兄弟中親自入院,使南山卽爲印出, 別定奴子, 急速來傳至可, 此處旱氣太甚, 失農, 丁寧前頭生活,誠爲可慮, 汝等勿視尋常, 而勸奴輩, 力作農事, 使無餓死之患, 亦可.
안번·수번에게 부친다. (1595년)
그 동안 너희들 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깊이 염려가 된다. 항적전(項籍傳)을 찍어낼 종이를 보내니 너희 형제 중에서 친히 院에 들어가 南山으로 하여금 곧 인출하게 하라. 따로 종을 시켜서 급히 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곳은 가뭄이 너무 심해서 농사를 잃게 되니 틀림없이 앞으로 생활이 염려가 된다. 너희들은 심상히 여기지 말고 종들을 시켜서 힘껏 농사를 지어 굶주리고 죽는 걱정을 없게 하는 것이 좋겠다.
*項籍傳 : 중국 春秋五覇의 하나인 楚覇王의 이야기.
寄 安藩 守藩 庚子
近未知汝等安否, 心慮萬萬, 父自七月念後, 齒痛發作, 晝夜苦劇,且此處旱氣太甚, 民無?産, 將有流離之患, 爲守令者寧無?於心乎,嶺南則今年農何如, 漠然不聞, 爲慮不已, 今科擧無事過行耶, 邑中幾人參榜耶, 歸便詳細通視爲可, 權君何以連命耶, 如有救急之勢,顧念亦可, 細木一疋覓送, 傳給爲可.
안번·수번에게 부친다. (1600년)
근래에 너희들 안부를 알지 못하니 천만번이나 깊이 염려가 된다. 아비는 칠월 스무날부터 치통이 발작해서 주야로 고통스럽다. 이곳에 또한 가뭄 기운이 너무 심하다. 백성들이 산업이 없어 장차 유리할 걱정이 있으니 수령된 자가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영남엔 금년 농사가 어떠한고. 막연히 듣지 못하니 끊임없이 염려된다. 이번 과거는 무사히 통과했느냐. 읍중에서 몇 사람이나 참방했느냐. 돌아오는 편에 상세히 알려주면 좋겠다. 권군은 어떻게 연명하느냐. 만일 구급해야 할 사세거든 돌보아 주는 것이 또한 좋을 것이다. 세목 한필 찾아 보내니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 祭文, 輓詞
祭文
顯光得見公最晩矣 一接風儀容觀 聽其談論 則便知公非末俗中人矣 又因諸人 獲聞公行已處事 居家與鄕之節 及夫壬辰大? 則固有非庸衆人所可得以及者也 蓋公天分秀異 不由積力 而親親泛愛之德 洽然各盡其情焉 好善惡惡之義 峻然有不可撓者 所以公在鄕閭 薄夫有恥 懦夫思作 爲善者有所恃 而不自沮 爲惡者有所憚 而不敢恣 嗚呼公之爲人 豈可易得於斯世哉 顯光往來此地 屢嘗歷候而致敬 公亦辱許 或賜提壺 醉晤於泉石之間 其於談笑之際 竊有所感發者多矣 今其已矣 敦款之容 磊落之談 不可得以復接矣 敢資酒饌於諸友 奠致微誠 張旅軒 顯光
제문
顯光이 公을 뵈온지는 가장 늦었습니다. 한번 풍의와 용모를 접하고 그 담론하심을 들으니 문득 公이 末俗중에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또한 여러 사람들로 인해서 공이 行身處事하는 것과 집에서나 鄕黨에서의 절차와 壬亂당시의 대개의 일을 얻어 들은즉, 참으로 보통 사람들이 가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공이 天稟이 뛰어나시어 功力을 드리지 아니 하여도 친밀하고 널리 사랑하는 덕이 흡족하게 그 정에 맞도록 하였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의리가 峻然히 가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鄕閭에 있을 적에 薄夫들은 부끄러워하고 懦夫(나부)는 각성을 하며 착한 사람들은 믿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악한 짓을 하는 자는 겁난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公의 사람됨이 어찌 가히 이 세상에서 쉽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顯光이 이곳을 왕래함에 일찍이 여러 차례 문안을 드리고 공경을 드렸는데 공은 또한 욕되이 허여하셔 혹은 술병을 가지고 술잔을 건네면서 泉石之間에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談笑하는 즈음에 가만히 생각하니 感動해 느낀 바가 많은 것이 있었더니 이제는 다 끝이 났습니다. 敦厚하고 정성스러운 모습과 뇌락한 말씀을 다시 접할 수가 없겠습니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감히 술과 찬을 차려 치전을 올려 조그마한 정성을 이루나이다. 장여헌 현광
<손모당 만사 2수(孫慕堂輓詞二首)>
우리 고모부 돌아가시매 상여 뒤를 못 따르니, 吾叔之幽我不輓
천수 여든이 수복이라 하리랴. 天年八十福云胡
젊었을 때 붓 휘둘러 사마가 되시었고, 早時揮筆馳司馬
만년에 창을 잡아 왜적을 쫓으셨지. 晩節橫戈走醜徒
몸을 다스리고 정도를 밟으니 고을 사람 복종하고, 律身履正鄕閭服
무리에 처하여 온화함을 따르니 노소가 기뻐했네. 處衆由和少長愉
해로하는 집안에는 자손들이 번성하니, 偕老堂中雙璧耀
일생에 능한 일 공 만한 이 또 있으랴. 一生能事似公無
산하의 기운 모아 기질 자못 출중하니, 山河鍾氣氣頗厚
높고 높은 언덕 같은 당당한 대장부로세. 崖岸軒軒大丈夫
시주(詩酒)로 수작하니 풍월이 짝을 짓고, 詩酒自酬風月伴
위의는 사람들이 성현의 무리에 비겼네. 威儀人擬聖賢徒
시국을 근심하여 백발은 천 줄기로 어지럽고, 憂時華髮千莖亂
평생토록 청빈하여 네 벽만 섰을 뿐이었네. 沒世淸貧四壁孤
나를 자식같이 봐주셨으나 어버이로 못 모셨기에, 猶子視余余未父
두어 수의 만사로써 황천길을 위로하네. 只歌雙??幽都
? 敍述
鶴峯金先生 壬辰九月二十二日 狀 啓 略曰 永川進士鄭世雅等六十餘人 五月中 首先結約 倡起鄕兵 與權應銖 七月二十七日 共殲永川之賊 八月初七日 又擊賊于慶州慈仁縣 同月二十一日 赴慶州討賊 或勸其勿入 而奮然不聽 先登深入 及敗 生員鄭宜藩 崔仁濟 校生金演 李得麟 李好仁 李榮根 李順福 李之? 柳復興 田億疇 奉事李得龍 參奉韓得義 田興霽 品官孫應晛 李日將 柳元傑 李廷芬等十七人 同日被害 戰死儒生等 忠烈可嘉 無?古人 故列名啓聞 此等事 自有本道監司 臣不當輒啓 而臣亦自左道遞還 不敢不達
鶴峯 金先生이 壬辰 9月 22日의 狀에 대략 말씀하시기를, 永川進士 鄭世雅 등 60여 인이 5月 중에 가장 먼저 약속을 맺어서 義兵을 일으키고 權應銖로 더불어 7月 27日에 함께 永川의 도적을 섬멸하고, 8月 初 7日에 또 경주 慈仁縣에서 또 적을 치고 같은 달 21日에 경주에 다다라 도적을 토벌하니 或은 그를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그러나 분연히 듣지 아니하고 먼저 올라 깊이 들어갔습니다. 生員 鄭宜藩, 최인제, 교생 김연, 이득린, 이호인, 이영근, 이순복, 이지암, 류복흥, 전억주, 봉사 이득룡, 참봉 한득의, 전흥재, 품관 손응현, 이일장, 류원걸, 이정분 등이 같은 날 害를 만나 전사하니 그 忠烈이 아름다워 古人에 부끄러움이 없음으로 列名해서 啓聞합니다. 이런 일은 본도 감사가 있기 때문에 臣이 啓聞에 當치 않으나 臣도 또한 左道로부터 옮겨 왔기 때문에 감히 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寒岡鄭先生 撰鶴峯金文忠公行狀 略曰(이하원문생략)
寒岡 鄭先生이 鶴峯 金文忠公行狀을 찬하시매 대략 말씀하기를, 公이 招論使로서 江右에 계실 적에 5月 초에 招諭文을 草해서 一道에 布告하니 이때에 嶺路가 중간이 나뉘며 血脈이 江左에 통하지 아니하였고 郡과 邑이 비고 비어서 적이 꺼리는 바 없이 各各 監司守宰라 일컬어서 제멋대로 노략질하였다. 永川人 進士 鄭世雅가 나와 생원 曹希益과 前 縣令郭懷根등 60여 인이 글 수천 言을 만들어 사람을 시켜 낮에는 숨고 밤으로 행해서 公에게 와 바쳤다. 그 말에 이르기를 "左界義兵들이 명령을 받을 바가 없으니 원컨대 節制를 받자옵소서." 하고 또한 진술하기를 여러 수장들이 깊은 山中에 숨었다가 조금씩 머리를 내서 의병들을 저지시키고 억제시켜서 산만하고 난립하는 형상이라고 하였으니 公이 부드러운 말로 제군들이 범의 窟을 무릅쓰고 건너왔고 가시밭 먼 길을 드나들며 와서 서로 문안하니 忠義가 안으로 격동한 이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겠느냐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感泣하게 하였다.
又曰九月初 渡洛東 巡到大邱桐華寺 左兵使朴晋(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9月 初에 낙동강을 건너서 대구 동화사에 이르니 좌병사 박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기다려서 좌도의 의병들이 많이 병사에 저지되는 바가 있었다. 公이 晋을 보고 그 可하지 못한 것을 역설하였다. 이보다 앞서 권응수가 永陽에서 승첩한 것은 오로지 선비들이 창의해서 성공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더욱 동도로 옮겨 토벌함에 앞을 다투어 다다라 달려가서 생원 鄭宜藩과 최인제등 17인이 같은 날에 피해를 당했는데 公이 이것을 듣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200年간 북돋아 길러준 유화가 아니겠는가 하여 장계를 만들어서 모든 유신들의 충렬이 가상할만한 것을 진술하고 박진이 의병을 저해하는 뜻을 진술했다. 이에 전사한 사람들이 모두 포상을 받게 되고 의병도 또한 박진이 흔들 수 없게 하였다.
鶴峯先生譜 曰永川鄭世雅曺希益郭懷瑾等(이하원문생략)
학봉선생 年譜에 말하기를, 영천 鄭世雅, 조희익, 곽회근 등이 사람을 시켜서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서 상서하여 절제를 받들기를 원하고 또한 수장들이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었다가 의병을 沮害한다고 하는 사정을 진술하기에, 선생께서 부드러운 말씀으로 위로하고 효유시키고 전 봉사 권응수를 뽑아서 의병대장을 삼고 인하여 각 고을마다 의병장을 뽑아서 드디어 영천을 회복시켰다.
崔?齋睍 撰鶴峯先生言行錄 略曰永川進士鄭世雅(이하원문생략)
최인재 晛이 학봉선생 언행록을 찬하매 대략 말하기를, 「영천 진사 鄭世雅와 생원 조희익과 전 현령 곽회근 등 60여 인이 수천 言의 글을 지어서 강좌의 여러 장수들이 의병을 저해한다고 하는 사정을 열거하고 관군과 의병이 서로 통합되고 화합치 못해서 명령을 받을 바가 없으니, 청컨대 초유해서 절제하기를 요청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낮에는 숨고 밤으로 걸어서 선생께 알리니 선생께서 위로하고 일깨워 효유시키고 그를 보내어 말씀하기를 제군들이 시랑과 호랑이의 굴을 무릅쓰고 멀리 와서 통문하니 진실로 충의가 지극한 것이 아니면 어찌 너희들이 이와 같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又曰左道雖有義旅 多爲朴晋所沮抑(이하원문생략)
또 말씀하기를, 左道에 비록 의병이 있었으나 박진이 많이 억제해서 모두 功을 볼 수가 없어서 이에 선생이 그 불가한 것을 말씀하였다. 이보다 앞서 權應銖가 永陽에서 승첩한 것은 모두 본 군의 선비들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킴으로 해서였고 경주의 전투에서 영천 생원 정의번 등 17인이 같은 날에 피해를 당하니 선생께서 이것을 듣고 탄식해 말하기를 “이백년간에 배양하고 조화시킨 것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狀啓中에 전사한 유생들의 충렬이 가상함을 陳述해서 이로 말미암아 전사한 사람들이 모두 포상을 받게 되었다.
崔?齋上都?察使完平李相公書(이하원문생략)
崔?齋가 都?察使 完平 李相公에게 올린 상서에 대략 이르기를, 영천에서 승첩한 것은 임진 7월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온 道에 웅거해 있는 적이 경주로부터 안동에 이르기까지 장사진을 벌려서 감히 누구도 어쩔 수가 없었는데, 영천의 적이 멸망하매 軍威 義城에 주둔해 있는 賊도 풍세를 따라서 도망갔습니다. 세 고을이 회복됨에 중로가 끊기니 곧 안동과 경주의 적들이 머리와 꼬리가 연결하기가 어려워서 사세가 물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군이 회복한 연후에 일로의 나머지 백성들이 살아남을 얻었고 우리 군사의 기세도 약간 진작이 되어서 복병을 설치하고 도적을 치는 자가 곳곳마다 끊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영천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이요, 더구나 영천 고을에 의병을 일으킬 때에 의병 일으키기를 먼저 모의한 것은 바로 영천 경내의 선비들이라. 곧 온 군에 무려 500 義士나 되었습니다. 그러하되 포상을 내리는 것이 2, 3 壯士에 더했을 뿐이고, 공적이 공론에 돌지 아니하고 읍호가 州府에 오르지 아니해서 이로써 공론이 자못 억울하니, 그 당시 순찰사가 전하여 말씀드릴 때에 그 사실을 잊은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께서는 위에 계를 올려서 의사들을 포상에 기록하신다면 인심을 가라앉힐 수가 있고 공론이 한번 후하게 될 것이니, 이른바 한 사람을 상 줌에 천하가 勸勵된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崔?齋壬辰日記 略曰永川進士鄭世雅 新寧奉事權應銖(이한원문생략)
최인재 壬辰日記에 대략 이르기를, 「영천진사 鄭世雅와 신령봉사 권응수와 하양봉사 신해는 모두 군사를 모집해서 巨賊을 쳤다. 世雅는 그때 나이 58세였는데 적이 바로 성을 점거하매 世雅가 좌수 유몽서와 생원 조희익으로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서 사로잡고 죽인 것이 자못 많았다. 그 뒤에 성을 회복하고 크게 승첩한 것은 모두 世雅가 처음으로 거사한 功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本道左右都廳所撰亂離事蹟(이하원문생략)
본도 좌우도청에서 엮은 난리 사적(당초에 완평 이상공이 체찰사로써 남쪽으로부터 조정에 돌아와서 난중사적 두 권을 간략히 기록해서 어전에 바치니 上께서 다시 더 자세히 하도록 시켜서 본도에 돌려보냈다. 萬曆 癸卯(1603) 4월에 감영으로부터 이 일을 통고해서 左右도에서 도청 각 한 사람을 천거하여 甲辰 5월7일에 도청으로부터 상소의 모임으로 인해서 각 고을마다 유사를 선출해서 通文을 發하고 두루 통고해서 각처의 義兵官兵의 군사를 일으킨 날짜와 도적을 친 상태와 접전한 장소와 또 충신 의사, 효자, 열녀들이 목숨을 버리고 순절한 것으로서 표표하게 일컬을만한 것과 후세 사람들에게 이목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은 그 사실과 절차를 그들로 하여금 공정하게 올리게 해서 합하여 책을 만들어 모두 세 권으로 하였다. 이때에 관찰사 李時發과 좌도도청 宋啞軒 遠器와 우도 도청 최인재 晛과 영천 유사 成立과 鄭四象이었다.)에 대략 말하기를 「壬辰 5월1일에 영천 선비와 백성들이 의병을 분연히 일으켜서 향인 鄭世雅를 추존해 장수로 삼고 정대임, 조성, 조덕기, 이예, 김호 등으로 차장을 삼아서 곳곳마다 복병을 설치하였다. 15일에는 신령 의병장 봉사 권응수와 협동해서 封庫의 왜적과 더불어 박연에서 싸워 크게 승첩해서 병기와 돈과 곡식과 문서를 모두 노획했다.」라고 하였다.
又曰七月二十六日 永川義兵(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7월26일에 영천 의병이 권응수, 홍천뢰 등과 더불어 본 郡城의 적을 포위하니 적이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나오기에 우리 군사들이 그 선봉 수명을 쏘아 죽이고서 성중으로 난입하면서 크게 호통치며 搏戰하였다. 출전하던 왜놈들이 크게 놀라서 달아나 들어갔다. 때마침 해가 저물기 때문에 포위를 못하고 밝은 날을 기다려 다시 진격하니 적들이 성중에다 內城을 쌓아서 죽기로 항전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불을 놓아서 이것을 불사르고 드디어 內城을 함락시키니 적이 살기에 급급하여 다투어 두 창고의 곡식을 쌓은 사이에 들어가기에 그 문을 닫고서 불을 지르니 혹은 앞내 소에 빠져 죽기도 하고 혹은 그 속에서 서로 찔러 죽이기도 해서 한 명도 남음이 없었다. 城을 회복하고 크게 승첩하니 그 우도에서 벗어나지를 아니하였다. 慈仁, 慶山, 軍威의 적들이 소식을 듣고 도망쳐서 永陽의 一路가 이것을 힘입어 온전할 수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又曰正字柳宗介 進士鄭世雅(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正字 유종개, 進士 鄭世雅, 한림 김해가 인근 동지로 더불어 약속하여 모집해서 鄕兵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혹은 관군에게 협력하고 혹은 복병을 설치해서 유격하였다. 이때 의성, 의흥, 군위, 안동, 예안 등 지방 사람들이 각각 향병을 일으켰으나 형세가 외롭고 약하여 드디어 일직현의 마을 정자에 모이기를 기약하니 일직현 사람들은 소를 잡아서 그들을 대접하였다. 이때에 서쪽으로 파천한 조정이 멀리 격해있고 명령이 드물게 미쳐서 당사자들은 탈욕 하는데 습관이 되어 허다한 병졸들이 흩어지고 계통이 없었다. 이에 의병의 소리가 한번 나감에 사람들은 죽을 바를 알고 게으른 자도 일어설 줄 알고 겁내는 자도 용맹을 알았으니 이것은 그 당일의 한 쾌사이기도 하였다.
又曰八月 兵使朴晋(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8월에 박진이 경주에 주둔해 있는 적들을 토벌할 것을 꾀해서 中路의 군사 二만여명을 데리고 싸움에 임하였으나 기회를 잃고 크게 패해서 달아났다. 이때에 義士 생원 鄭宜藩과 윤취선, 최인재, 유학, 이득권 등 수십여 인이 여기에서 죽었다. 宜藩은 그 父親 世雅와 더불어 전장에 들어가서 적을 대단히 많이 사살하고 世雅는 그 말을 잃어 버렸다. 父子가 말 한 필밖에 없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을 양보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을 양보하다가 世雅가 말을 타고 겨우 빠져 나오는 중에 宜藩이 해를 입었으니 당시에 부자의 정이 어떠하였겠는가. 宜藩은 믿을만한 선비인지라 ?輩(벗)들이 자못 그를 중히 여기더니 하룻저녁에 땅에 쓰러지매 마침내 그 시체를 잃어 버렸다. 世雅가 宜藩이 평소에 알고 사랑하던 사람들에게서 詩를 구해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李松巖魯 龍蛇日記 略曰永川進士鄭世雅(이하원문생략)
李松巖(魯) 龍蛇日記에 대략 이르기를, 「영천 진사 鄭世雅 등 60여 인이 공(학봉선생)의 초유하는 소식을 듣고 수천마디의 글을 지어서 강좌의 모든 수장들이 당초에는 도망해 숨었다가 이제 머리를 들고 나와서 의병을 저해하는 상황을 역력히 듣고 또 경주부윤 尹仁涵이 府史 吏胥 악공들을 거느리고 올라가 숨어서 깊은 산에 자취를 감추니 온 府 안이 적에게 내준바 되었었고 적이 나가 도망친 뒤에도 오히려 한 번도 문 밖으로 뛰어나오지 못하면서도 도리어 의병들을 흔들고 막으려고 했던 것을 극진히 역설하고 또 병사 박진은 의병을 호령하고 관군으로 통제하고자 하니 군사들이 흩어져 수습할 수가 없었는데도 左界에서는 명을 받을 데가 없어서 公으로 하여금 지휘해줄 것을 요청하여 낮에는 숨고 밤으로 행해서 두어 사람으로 하여금 와 公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러니 公이 기뻐하고 위로하며 효유해서 그들을 보고 말하기를 제군이 범의 굴을 무릅쓰며 왔고 가시밭 지역을 드나들면서 서로 와 문안하니 진실로 忠義가 지극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케 함」이라고 하였다.
又曰慶州之戰 生員鄭宜藩(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경주의 싸움에 생원 鄭宜藩, 최인재 등 17인이 같은 날에 해를 입었었다. 公이 처음으로 이것을 듣고 크게 놀라며 탄식해 말하기를 200년 북돋아 기른 교화가 아직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하고 그 뒤에 계를 올리는 말씀가운데 朴晉이 홀로 온 도의 병권을 전단해서 의사가 분기한 것을 반드시 억제를 가하니 識者가 깊이 탄식하였었다는 것을 진술하고, 戰死 유생 등의 충렬이 가상스러워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러한 사건은 이미 본도 감사가 있어서 臣이 마땅히 계할 바가 못 되나, 그러나 신도 또한 좌도로부터 체임되어 왔기 때문에 감히 上達치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金栢巖? 爲左道安集使時 狀 啓略曰(이하원문생략)
金栢巖(?)이 좌도 안집사가 되었을 적에 장계를 올리며 대략 이르기를, 「영천에 있어서는 오직 남북 두 門樓가 있는데 臣이 남문에 올라가서 적을 섬멸한 형세를 물으니 그 용맹스럽게 진격하고 그 분개해 공격한 상황을 상상할 수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을 일으키게 할 수 있게 됐다.」고 하였다.
申悔堂元祿 師友錄曰 鄭公世雅(이하원문생략)
申悔堂(원록)이 師友錄에 말하기를, 「鄭公 世雅의 字는 和淑인데 영천사람으로 嘉靖乙未에 태어나서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뜻을 가다듬어 독실하게 공부하여서 의리를 강구하더니 임진 난리에 義兵을 일으켜 성을 온전하게 하고 功을 논하는데 있어서는 물러가 사양해서 받지 아니하고 선생(申悔堂)과 더불어 놀기를 좋아 하셨다.」라고 하였다.
贈參判崔公應泗 日記略曰(이하원문생략)
증직참판 최공(應泗)의 일기에 대략 이르기를 임진 7월29일에 본군 의병장 鄭世雅가 권응수 등으로 더불어 성을 점거하고 있는 적들에게 불을 놓아서 500여 명을 모두 섬멸하여 하나도 남음이 없다고 하였다.
贈參判崔公璧南 壬辰日記(이하원문생략)
증참판 최공(벽남)의 임진일기에 말하기를 4월13일에 왜선이 바다를 덮어 건너와서 동래 부산 울산 등을 함락시키니 병사, 수사와 모든 수령들이 모두 형세를 바라보고 도피하였다. 23일에 왜적이 本郡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모두 불살라 버려 연기가 하늘을 충천하고 또는 혹 산을 수색해서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이 수가 없었다. 5월간에 진사 鄭世雅가 강개해서 의병을 일으키니 鄕人들이 世雅를 추존하여 의병대장을 삼고 나는 中衛將이 되어 힘을 합쳐 군사를 모집해서 常人과 僧軍이 200여 명이요, 의병의 군사가 700여 명이었다. 이때에 왜적이 본군 성을 점거해서 서로 더불어 섬멸할 것을 도모하였다. 계획이 정해진 뒤에 신령 권응수에게 군사를 원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7월27일에 합세하여 진격해 포위하고 풍세를 따라서 방화하여 불살아 죽여서 남음이 없게 하였다. 8월에 경주의 적을 치고자 古村에 의병들을 모으니 여기에 이른 것이 5000여 명이었다. 21일에 행군하여 경주 진지에 이르니 곧 8郡의 군사들이 일시에 운집해서 읍내의 사방 20리 땅이 좁아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선봉 의병대장은 鄭世雅요, 나와 생원 정의번이 그 뒤를 따르고 생원 최인재, 이득룡, 이영근, 이순복이 또 그 뒤를 따르고 그 나머지 이정분, 이지암, 金演이 또 그 뒤를 따라서 드디어 서문성 밑에 다다라 적과 혈전해서 왜병의 죽은 것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조금 후에 왜적이 北門으로 나와서 후병을 엄습하여 義兵들로 하여금 크게 어지럽게 하였다. 적이 승세를 따라 추격하니 모든 의병이 와해가 되었다. 나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어 鄭 대장이 있는 곳을 알아보니 왜적의 군사가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었다. 서편 개울가에는 방위하는 列이 서로 밟혔다. 나는 곧 말을 달려 간신히 피해 나왔는데 생원 鄭宜藩, 최인재, 유학 김연, 이득룡, 이용근, 이정근, 이순복, 이지암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 얼마 아니해서 적은 밤에 서생포로 달아났다.
又曰義大將鄭世雅(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의병대장 鄭世雅가 병으로서 辭免하고 생원 曺希益이 그 군사를 대신 거느렸다. 얼마 아니해서 希益이 병으로 눕게 되니 그의 아우 목사 曺好益이 대신 거느리게 되었다.
贈承旨城隱申公? 亂蹟撰集(이하원문생략)
贈승지 성은 신공(?)이 ?난적찬집?에 대략 말하기를, 임진 7월27일에 의병장 권응수와 영천 의병장 鄭世雅, 정대임 등이 영천에 주둔해 있는 적을 공격하여 성을 온전히 하고 크게 승첩해서 500여 목을 베니 인심이 이것을 쾌하게 생각해서 뛰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이 거사는 응수와 世雅가 수훈이 되었고 본 군 군사를 수습해서 병세를 조성시킨 것은 실은 대임 등의 힘이었다. 그런데 世雅가 홀로 공을 사양하고 차지하지 아니해서 조정에서는 다만 응수에게 통정을 더해 주고 대임은 예천 군수를 삼았다.
國朝記事 略曰永川進士鄭世雅(이하원문생략)
國朝記事에 대략 말하기를, 「영천진사 鄭世雅와 신령봉사 권응수와 하양봉사 신해와 고성봉사 최강이 모두 군사를 모집해서 도적을 쳤다. 世雅는 그때 나이 58세였는데 적이 바야흐로 본군을 점거하자 世雅가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 등으로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적을 많이 베이고 그 뒤에 성을 온전히 하고 크게 승첩한 것은 모두 世雅 등이 처음으로 일을 일으킨 힘」이라고 하였다.
又曰賊自永川 稱封庫御史(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적이 永川으로부터 封庫 御史라고 말하면서 新寧, 安東을 향하니 권응수, 鄭世雅, 정대임, 조성 등이 박연에서 적을 맞이하여 크게 승첩하였다.」라고 하였다.
海東野史 南原人 號山西 趙公英男所撰(이하원문생략)
海東野史에(南原사람 號는 山西,趙公 英男이 撰한 것임) 대략 이르기를, 경상도 영천의 의병과 士卒들이 본군에 屯據해 있는 적들을 섬멸하기 위하여 계책이 이미 정해지자 권응수와 홍천뢰에게 구원을 청하니 권응수가 두어 골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鄭世雅, 신해, 정대임, 조성 등으로 더불어 楸坪 들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적을 추격하여 강변에 이르고 돌아왔다가, 이튿날에 또 이와 같이 하니 적들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 하였다. 또 이튿날에 모든 군사들이 합세하여 진격해 포위하고서 성문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날쌔게 뛰며 북을 치고 소리 질러 진격하니 적이 두려워하여 달아나 관청의 창고로 들어갔다. 이에 풍세를 따라서 불을 놓아 거의 모두를 불살라 죽였다.
趙山西雜錄 略曰慶尙道永川進士鄭世雅(이하원문생략)
조산서 잡록에 대략 말하기를 ?경상도 영천 진사 鄭世雅와 신령 봉사 권응수와 하양 봉사 신해와 고성 봉사 최강이 모두 군사를 모집하여 도적을 쳤다. 世雅는 그때 나이 58세였다. 적이 바야흐로 본군의 성을 점거하자 世雅가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 등으로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적을 사로잡고 적의 목을 벤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뒤에 성을 온전히 하고 크게 승첩한 것은 모두 世雅 등이 처음으로 擧事한 힘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朝野會通 略曰權應銖與鄭世雅(이하원문생략)
朝野會通에 대략 이르기를, 권응수, 鄭世雅, 신해, 최강 등이 향병을 거느리고 영천의 적을 칠 적에 불을 가지고 적을 공격해서 남은 적이 모두 도망갔었다. 좌도(경상도)가 온전하게 된 것은 영천의 공이었다. 鄭世雅가 당시 나이 58세였는데 위와 같이 군사를 소집하고 적을 사로잡고 목을 벤 것은 모두 그(鄭世雅)가 처음으로 일을 일으킨 공 때문이었다.
燃藜室記述 略曰鄭世雅永川進士(이하원문생략)
연려실기술에 이르기를, ?鄭世雅는 영천 進士인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적이 바야흐로 본 郡城을 점령하자 世雅가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으고 적을 사로잡고 적의 목을 벤 것이 자못 많았었다. 성을 회복해서 온전히 한 공은 모두 世雅 등의 擧事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松坡尹公聘 遺事 略曰壬辰(이하원문생략)
松坡 尹公(聘)의 遺事에 대략 이르기를, 임진년에 풍신수길이 대거 쳐들어와 도적질을 하자 진사 鄭世雅가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키니 향인들이 추대해서 의병대장을 삼고, 公으로써 中衛將을 삼아서 힘을 합쳐 군사를 모으고 新寧 권응수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7월27일에 합세해서 영천의 도적들을 진격하고 포위하여 이를 무찔렀다.
贈參判鄭公大任行錄(이하원문생략)
贈參判 鄭公(大任)의 행록에 대략 이르기를,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하고 글을 잘 읽었었고 또 朱子書節要를 좋아하였다. 자주 종형 世雅를 좇아서 자질을 取했다고 하였다.
又曰壬辰之變(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임진의 변에 州郡들이 풍세를 바라보고 달아나 도망쳐서 적은 마치 사람이 없는 지경에 들어오는 것과 같이 동래, 울산, 경주를 연거푸 함락시켰다. 公이 族弟 大仁으로 더불어 창을 잡고 활을 끼고서 족형 世雅에게 가 뵈니 世雅가 손을 잡고 통곡하고서 드디어 각각 의병을 모집하고 그 아들 宜藩과 향인 曹德驥, 曹珹, 李蕃, 鄭千里와 더불어 이웃 고을의 문무인 수백 인을 결합하여 드디어 이번, 정천리를 시켜 도망쳐 흩어져 있는 백성을 탐색해 내게 하니 열흘 보름 사이에 무리가 900여 인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鄭世雅가 덕망이 있으므로 해서 함께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다. 朴淵에서 마침 御史라고 자칭하는 왜적이 있어 軍威로부터 내려오기에 西面의 복병장 朴應騏로 더불어 합세해서 뒤를 치고, 권응수와 鄭世雅가 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거의 모두를 쏘고 베어버렸다. 이때에 적이 永川 城中에 屯據해서 낮이면 사방으로 나아가 노략질을 하고 밤이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었다. 의병장 鄭世雅로 더불어 모의하니 世雅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많으나 원래 연습이 없었으니 권응수로 더불어 일을 같이 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라 하여 곧 아무 날로써 성을 포위할 뜻을 新寧 원 韓倜, 河陽 원 曺胤申, 경주판관 朴毅長과 義興 복병장 洪天賚에게 통고하니, 곧 郡守 金潤國도 와서 뵈면서 함께 힘쓸 것을 청하였다. 기약한 날에 모든 읍의 군사들이 모두 몰래 어둠을 틈타서 모였다. 권응수도 또한 도착하였다. 이에 더불어 약속하고서 한척, 조윤신, 박의장, 홍천뢰, 권응수는 서북을 에워싸고 公은 홀로 鄭世雅와 김윤국, 이번, 정천리 등으로 더불어 먼저 동남을 침범해서 화살과 돌이 고슴도치와 같이 나가니 적이 결국 지탱을 못 하고 달아나서 담벽에 의지하였다. 全軍이 승세를 타고 사면으로 아울러 진격하니 적은 달아나 창고로 피해버렸다. 이에 불을 놓으니 적은 불을 피하여 동남으로 뛰어나가니 公이 의병으로 더불어 나오는 것을 따라서 활을 쏘아대니 적이 궁지에 몰려 달아날 길을 찾지 못하고서 明遠樓에서 물에 뛰어들어 죽은 적들이 몇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군들은 물에 들어가 적의 귀를 베고 마치 들오리가 줄을 지어서 고기를 잡는 것과 같아서 왜놈이 단 한 놈도 요행히 면하는 자가 없었다. 功을 의론하는 때에 있어서 권응수는 병으로 나오지 못하고 세 고을의 원들도 또한 나오지 못했는데 대개 각각 各陣이 왜병의 귀를 벤 것과 노획한 물건을 모두 한데 기록하였다. 당초에는 의병장에 맡겼다가 고을 원 김윤국이 이 일을 주관하였다. 公이 벤 것은 300餘 級이었는데 그중에서 100餘 級은 고을 원에게 주고, 의병이 벤 것은 마침내 보고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公에게 상을 주었어야 옳았을 일이었는데도 公은 상을 받지 못하고 다만 권응수, 朴晋, 韓倜, 曺胤申, 박의장 등에게만 상이 내려졌다. 8월에 군사를 거느리고서 밤으로 행군하여 이른 새벽에 곧장 경주의 서문을 공격하니 적은 동문을 통하여 도망하였다. 우리 군사는 우레 같이 소리치며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해가 오정이 될 무렵에 적이 또 도착하니 성중이 두려워해서 마침내 서문으로 나가니 공은 동문으로 나가서 분황사 小路에서 돌아다보니 적이 이미 西川에서 엄습해 죽여서 一郡의 충의지사가 모두 주린 범의 아가리에 약한 자가 고기밥이 되듯이 되었다. 鄭宜藩도 또한 이 禍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홀로 鄭世雅, 조성 등으로 더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껏 싸워서 震天雷를 난사하니 적은 서생포로 물러가 주둔하였다.
校理辛公敬立 壬辰日記(이하원문생략)
校理 辛公 敬立 임진 일기에 대략 말하기를,「영천인 진사 鄭世雅, 신령인 봉사 권응수, 하양인 봉사 신해가 군사를 모집해서 도적을 쳤다. 世雅는 당시 나이 58세였다. 흉적들이 성읍을 점거하자 분연히 섬멸할 것을 맹세하고 좌수 유몽서, 생원 조희익 등으로 더불어 사방으로 흩어진 군사를 모아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뒤에 성을 온전히 하고 사로잡고 섬멸시킨 것은 모두 世雅가 처음으로 거사한 功이었다.」라고 하였다.
又曰兵使朴晋 馳 啓(이하원문생략)
또 말하기를 병사 박진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응수가 당상에 올라갔는데 같이 일하던 여러 사람들에게 모두 벼슬을 차이가 있게 주었고 晋도 또한 가선대부까지 올라갔는데 홀로 世雅만이 의병을 처음으로 일으켰는데도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參奉孫公曄 壬辰日記(이하원문생략)
참봉 孫公曄의 임진 일기에 말하기를,「6월에 어버이를 모시고 죽장으로 들어갔다. 7월에 좌병사 박진이 청송 안덕에 있었다. 11월에 영천 鄭世雅가 병사를 만나 보는 일 때문에 안덕에 가면서 지나는 길에 우리 아버지를 만나보고 돌아갔다. 대개 병사가 鄭世雅로써 의병장을 삼은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7월26일에 영천 의병이 성을 에워싸고 왜적이 이튿날에 성을 복구했으나 일읍이 온 고을 안의 적을 섬멸시켰으니 다른 고을에서는 있지 못했던 바이었다. 참으로 거룩한 공이었다.」고 하였다.
李櫂英 征蠻錄 略曰(이하원문생략)
李櫂英의 征蠻錄에 대강 이르기를,「군위의 적이 봉고어사라고 사칭해서 신령에 달려 내려오니 권응수와 鄭世雅 등이 쫓아서 朴淵위에 이르러 크게 파괴시키고 머리 100여 급을 베어버리니 군사의 사기가 이에 크게 떨쳤다. 7월27일에 의장 권응수, 鄭世雅, 정대임 등이 영천의 적을 공격해서 크게 파괴시키고 목을 베어 얻은 것이 500여 급이나 되었으니 피는 흘러 내를 이루어서 江左의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었다. 8월 초2일 좌병사 박진이 모든 의병장으로 더불어 鷄淵에 모여서 경주의 적을 칠 것을 꾀하여 鄭世雅가 선봉장이 되어 성 아래로 나아가 육박하니 도적이 몰래 북문으로 나와 기병으로써 뒤로부터 엄습해서 우리 군사가 크게 붕괴되고 생원 崔仁濟, 鄭宜藩 등 17인이 힘껏 싸우다가 여기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永川郡誌 略曰鄭世雅(이하원문생략)
永川郡誌 에 대략 이르기를,「鄭世雅는 高麗名臣인 襲明의 후예이다.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또한 德望이 있었는데 嘉靖 戊午年의 司馬試에 급제하였다. 壬辰年에 義兵을 처음으로 일으키니 鄕人들이 추대해서 장수로 삼았다. 그 때에 賊이 永川을 占據하니 世雅는 장사들과 더불어 밤에 賊中에 들어가 바람을 따라서 불을 놓으니 賊이 크게 놀라 도망하니 世雅는 이에 병사를 풀어 추격하여 적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런 戰功으로 말미암아 永川은 亂을 입지 않게 되었다. 論功을 함에 있어서 世雅가 말하기를,「臣下된 사람으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도적을 토벌한 것이지 내가 功勳에 뜻을 둔 것이 아니다.」하고서 모든 功을 여러 장수들에게 양보하니 宣祖께서 그 어진 정신에 대한 내용을 들으시고 黃山道 察訪벼슬을 내리시고, 後에 兵曹參判을 贈職하였다. 英祖 壬子年에는 兵曹判書를 추가로 贈職하였고, 正宗 戊申年에 諡號를 剛義라 내리시었다.」라고 하였다.
神道碑銘 幷書
騎曹郞鄭重器 一日踵余門 拜且言曰 昔吾祖 有勞于 國今 贈秩至正卿 宜有神道刻 如令執事 與吾宗橫豁處士有舊 敢籍手以請銘 余曰諾 顯命嘗從處士遊 今亡矣 其何忍辭也 壬辰島夷之難 嶺之士 有忘憂堂郭公再佑者 起布衣 倡義擊賊 有大笑軒趙公宗道者 守孤城 抗賊不屈而死 其功名節義 至今赫然照耳目 何其盛也 烏川鄭氏之門 有父爲忘憂堂 子爲大笑軒 而其功成不居 超然遠引 則又與古之魯連先生 曠千載而同歸 豈不益可敬也 余以後生 ?聞初 未詳鄭氏事本末 囊按嶺節 請於朝 益褒顯郭趙二公 而獨不及鄭氏 今讀湖?公遺事 且見鄭寒岡 張旅軒諸先生所稱道者 然後始自訟其不敏 其於墓道之託 尤何敢辭也 公諱世雅 字和叔 鄭氏以高麗樞密院知奏事襲明 爲鼻祖 七世而有諱仁彦 典工判書 始居永川 有諱從韶 吏曹佐郞 端廟遜位 稱病不樂仕 生諱以揮 長水道察訪 生諱次謹 生諱允良 昌陵參奉 配宜人崔氏 奉事德?之女也 公以嘉靖乙未生 幼??有異質 長益端重謹嚴 有法度 少年成進士 親沒 遂隱居紫陽山中 以經史詩酒自娛 若將終焉 秀吉兵入寇 廟社西遷 公奮曰 士平時固自重 國有難則死之義也 先令諸子編行伍 爲檄募鄕兵 旬月衆至九百 當是時 郭忘憂起玄風 權應銖起新寧 相與?角爲聲援 而兵使朴晋 擁兵不戰 百計沮義兵 公密遣人 上書招諭使金鶴峯誠一 請受其節制 由是進退得自由 卒能收復半嶺云 始遇賊于朴淵 大?之 又戰于永川時 永川賊大猖獗 四出屠掠 公與族弟大任謀 又請權應銖爲援 遂耀兵于楸坪 據馬峴山 乘風揚塵沙 賊懼不敢出 乃令敢死士 踰城縱火燒之 城外伏兵 又斬其逃者 殲盡無遺類 軍聲大振 進攻慶州賊 與朴晋權應銖兵 會于鷄淵 公爲先鋒薄城 與賊大戰 賊衆死者無數 俄而賊出奇兵襲後 朴晋兵潰 賊圍公急 公之子宜藩 三出入圍中 以救公 而身被數十創 與麾下壯士十餘人 皆死之 然賊亦大挫 遂棄城走於是永川慶州皆復 而賊勢中斷 不能支 退與右路賊合 而江左獲全焉 公在鄕黨 恂恂謙厚 及臨陣輒奮勇 先登爲士卒倡 以此所向多得捷 永川之捷 議上功 朝廷 公曰此諸將士之力也 吾何有焉 且吾起兵 循國家之急耳 功名非吾志也 遂以其功與人 及聞 天兵 復三京 卽以兵屬曹希益 歸臥紫陽舊隱 自號江湖? 題詩以見志 李完平元翼 聞其賢 躬枉訪之 薦于 朝 始授黃山道察訪 未久棄歸 杜門不復出 與張旅軒曹芝山李蒼石諸名流 講論道義 以爲樂 如是者十數年 以壬子閏十一月三日終 得年七十八 葬于郡北騎龍山負壬之原 先兆之次也 夫人孫氏?焉 夫人系出一直 縣監致雲之女也 生四男二女 宜藩生員 卽戰死者也 屢 贈至左承旨 汝頌早夭 安藩 守藩 女適張雲翼楊遇亨 宜藩無子 以守藩子好禮 爲後 縣監 安藩二男二女 好仁文科牧使 好問 女曹盡孝曹?妻 守藩三男一女 好義 好禮 好信 女李鐵堅妻 內外子孫曾玄以下 多不能盡記 橫溪處士名葵陽 與其兄萬陽 篤經行 俱以薦剡 爲寢郞騎郞君 亦有文 皆爲公五世孫 而今 上辛亥 騎郞君? 駕前 贈公爲資憲大夫 兵曹判書 兼知義禁府事 始宜藩死 士大夫多爲詩以弔之 公以其詩 招魂而葬之 名其塚曰詩塚 聞者悲之 銘曰
鳥獸山林 謂公遐遁 戎馬干戈 謂公善戰 ?屈鷹騰 時則然矣 公顧何求 是行吾義 如雲出峀 以澤三農 旣舒而捲 歸于太空 月城之役 債帥鼠竄 衝圍翼公 有子殉難 父忠子孝 人紀攸賴 我詩銘石 庸告來裔 輸忠竭誠 揚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禮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原府院君 趙顯命 撰
신도비명 병서
기조랑(騎曹郞 : 형조참의) 정중기(鄭重器)가 하루는 우리 집에 와서 절하고서 말하기를 『옛적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나라에 공로가 있으셔서 이제 증직으로 정경(正卿)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신도비(神道碑)가 있어야 하겠는데 집사(執事)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종중의 횡계처사(橫谿處士)로 더불어 친분이 있으시기에 감히 손을 빌어 명(銘)을 청하나이다.』하거늘 내 말하기를 『좋다. 현명(顯命)이 일찍이 처사를 좇아 공부하다가 이제 돌아갔으니 그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임진년(1592)에 섬 오랑캐들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영남의 선비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공이 포의(布衣)로서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찔렀고,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 : 임진, 정유재란 창의. 함양군수로 황석산성에서 가등청정, 흑전장정 군과의 전투에서 전사) 공이 있어 외로운 성을 지키고 적에 대항하여 굽히지 않고 죽어서 그 공명과 절의가 지금까지 밝게 남의 이목에 빛나고 있으니 그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오천정씨(烏川鄭氏) 가문에도 아버지로서 망우당(忘憂堂)이 되고 아들로서 대소헌(大笑軒)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니 그 공(功)을 이루었는데도 차지하지 아니하고 초연히 멀리하니 이는 또한 옛적의 노련선생(魯連先生 : 중국 전국시대 齋나라 高士. 魯仲連)과 더불어 천 년을 격해서 길이 같다할 것이니 어찌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후생으로써 그때의 일을 수소문해서 듣건대 정씨(鄭氏)의 본말이 자세하지 않으나 앞서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가 조정에 곽조(郭趙 : 곽재우, 조종도) 二공을 더욱 포상할 것을 청한 것을 안찰해 보니 다만 정씨에게만 미치지 않았는지라, 이제 호수공(湖?公) 유사(遺事)를 읽어보고 또한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등 여러 선생이 칭도한 것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그 불민한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그 묘도(墓道)의 부탁을 더욱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는 세아(世雅)요 자(字)는 화숙(和叔)이니 정씨는 고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으로서 시조로 삼는다. 7世에 휘 인언(仁彦)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처음 영천(永川)에서 살았다. 휘 종소(從韶)는 이조좌랑(吏曹佐郞)인데 단종(端宗) 손위(遜位) 이후에 병을 핑계 삼아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 아들의 휘는 이휘(以揮)인데 벼슬은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이고, 그 아들의 휘는 차근(次謹)이요, 그 아들의 휘는 윤량(允良)인데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지냈으며 의인(宜人) 최씨(崔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최씨는 봉사(奉事) 덕금(德?)의 따님이다.
공(公)은 가정 을미년(嘉靖乙未 1535)에 나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고 자라남에 더욱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근엄해서 법도가 있었다. 소년에 진사(進士)하시고 어버이가 돌아가심에 드디어 자양(紫陽) 산중에 은거(隱居)하여 경서(經書)와 시(詩)와 술로써 스스로 즐기면서 장차 이같이 일생을 마치려 하였더니 수길(秀吉)의 군사가 들어와 노략질을 해서 왕과 사직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니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선비가 평시에는 자중(自重)할 것이로되 나라에 난리가 났음에는 죽는 것이 의리이다.』하고 먼저 여러 아들로 항오(行伍)를 짜고 격문(檄文)을 만들어 향병(鄕兵)을 모집하니 한 달이 되지 않아 구백 명에 이르렀다.
이때에 곽망우당(郭忘憂堂)은 현풍(玄風)에서 일어났고, 권응수(權應銖)는 신령(新寧)에서 일어나 서로 더불어 성원하였다. 그런데 병사(兵使) 박진(朴晋)은 군사를 끼고 싸우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계책으로 의병을 저해하니 공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초유사(招諭使) 김학봉 성일(金鶴峯 誠一)에 글을 올려 그것을 절제해 줄 것을 청하니 이로 말미암아 의병활동이 자유로워졌고 마침내 영남의 반(半)을 수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적을 박연(朴淵 : 영천시 화산면 석촌리)에서 맞이하여 크게 무찌르고 또한 영천(永川)에서 싸울 때에는 영천의 적이 크게 창궐하여 사방으로 나와서 노략질을 하니 공이 족제(族弟) 대임(大任)과 더불어 계책을 도모하고 또한 권응수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추평(楸坪 : 영천시 주남들)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마현산(馬峴山 : 영천시 뒷산)에 올라가서 바람을 타고 먼지와 모래를 날리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밖에 나오지를 못하였다.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병사들이 성을 넘어들어가 불을 놓아 사르게 하고 성 밖의 복병이 도망하는 적을 모조리 베어 죽여서 남은 적이 없으니 군사의 성세가 크게 떨치었다.
경주의 적을 진격하여 칠적에 박진(朴晋), 권응수(權應銖)의 군사와 더불어 계연(鷄淵 : 경주 西川)에 모여서 공이 선봉장이 되어 성에 육박해서 적과 더불어 크게 싸웠는데 적의 무리 가운데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조금 있다가 적이 정예병을 내어 우리의 뒤를 습격하니 박진의 군사가 무너지고 적이 공을 포위해서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공의 아들 의번(宜藩)이 세 번이나 포위 중에 드나들면서 공을 구출하였는데 의번의 몸에는 수십 군데나 창을 받고서 휘하 장사 십여 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그러나 적도 크게 좌절되어 드디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이에 영천, 경주가 모두 회복이 되고 적의 형세는 중단되어 지탱하지 못하고 우로(右路)의 적과 함께 후퇴하니 강좌(江左)가 온전하게 되었다.
공이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순순(恂恂 : 삼가고 삼가는 모양. 공손하고 유순한 모양)히 겸허하고 진지(陣地)에 임해서는 문득 분연히 용맹스럽게 먼저 나아가 사졸(士卒)을 위하여 창의(倡義)했으니 이로써는 가는 곳마다 승첩하는 바가 많았다. 영천의 승첩한 공을 조정에 올릴 것을 의논할 적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든 장사(壯士)의 힘 때문이었으니 내 어찌 그 공을 차지하겠는가? 또한, 내가 의병을 일으킬 적에 국가의 위급한데 좇았을 뿐이요, 공명에다 내 뜻을 둔 것이 아니다』하고 드디어 그 공을 남에게 주었다. 명나라 구원병이 삼경(三京 : 서울, 평양, 경주)을 수복하자 곧 거느린 병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넘겨주고 자양(紫陽) 옛 고장에 돌아가 스스로 강호수(江湖?)라 호를 짓고 시를 지어서 뜻을 나타내었다. 이오리 원익(李梧里 元翼)이 그 어진 소문을 듣고 몸소 왕림하여 그를 찾아서 조정에 추천하여 비로소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제수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다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장여헌(張旅軒 : 장현광), 조지산(曺芝山 : 조호익), 이창석(李蒼石 : 이준)과 같은 여러 명류(名流)들과 더불어 도의를 강론함으로써 낙으로 삼았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십수 년이 된 임자년(壬子 1613) 윤11월 3일에 돌아가시니 나이 78세였다.
군 북쪽 기룡산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하니 선영의 다음이다. 부인 孫씨도 여기에 부장하였다. 부인은 일직손씨 치운(致雲)의 따님이다. 4남2녀를 낳으니 의번(宜藩)은 생원인데 즉 전사한 분이니 여러 번 증직해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유번(維藩)은 일찍 죽고 다음은 안번(安藩), 수번(守藩)이고 따님은 장운익(張雲翼), 양우형(楊遇亨)에게 시집갔다. 의번(宜藩)이 아들이 없어서 수번(守藩)의 아들 호례(好禮)로써 뒤를 삼으니 현감(縣監)이다. 안번(安藩)이 2남2녀를 두니 호인(好仁)은 문과 급제해서 목사(牧使)이고 다음은 호문(好問이며 딸은 조진효(曺盡孝)와 조완(曺?)의 아내이다. 수번(守藩)은 3남1녀를 두니 호의(好義)와 호례(好禮)와 호신(好信)이며 딸은 이철견(李鐵堅)의 아내이다. 내외 자손과 증현손 이하는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횡계처사(橫溪處士)는 규양(葵陽)이니 그 형 만양(萬陽)과 더불어 경서와 행실이 돈독해서 모두 천거로써 침랑(寢郞 : 참봉)이 되었다. 기랑(騎郞)군도 또한 문장이 있으니 모두 공의 5세손이 된다. 그런데 금상(今上 : 영조) 신해(辛亥 1731)년에 기랑(騎郞)군이 어전(御前)에서 공의 어짊을 말씀드려 공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하게 되었다.
당초 의번(宜藩)이 죽을 적에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시(詩)를 지어 그를 조문(弔問)했는데 공이 그 시를 가지고 혼을 불러서 이것으로 장사지내니 그 무덤을 이름하여 시총(詩塚)이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그를 매우 슬피 여겼다. 명하여 말하기를,
조수(鳥獸)와 산림(山林)은 공(公)이 멀리 숨었다 하고
병마(兵馬)와 병기(兵器)는 공이 잘 싸웠다고 말하도다
자벌레처럼 굽히기도 하고 매와 같이 날기도 하였으니
그 시대가 곧 그렇게 하였도다
공이 무엇을 구했겠는가, 이에 나의 의(義)를 행하였도다
구름처럼 산 위에서 나와 삼농(三農)을 윤택하게 하고
폈다가 거두어서 태공(太空 : 까맣게 높고 먼 하늘)으로 돌아갔도다
월성(月城)의 싸움에서 장수가 쥐처럼 숨어 버리고
포위망을 넘나들며 공을 구출하다가
아들이 난리에서 순절하였으니
아버지는 충성하고 아들은 효도하였도다
사람의 도리를 의뢰할 바를
나의 시를 비석에 새겨
후예들에게 알리려 하노라.
수충갈성양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풍원부원군 조현명 찬
※ 趙公의 관향은 豊壤으로 자는 雉晦이며 호는 歸鹿. 시호는 忠孝이며 영조 때 영의정에 이름.
墓 誌 銘 幷書
海之東 嶺之南 有湖?鄭公者 蓋萬曆間偉人云 不?嘗從嶺中人 聞其名慕其風 而顧無以詳其行誼世德 則心獨嚮邇不已 壬戌春 鄭騎郞重器 袖致其宗人之書 而託以先祖幽宮之誌 意甚勤 不?謹受其行錄而寓目焉 始知公志節之高邁 事業之奇偉, 有可以欽仰感歎於累百載之下 又見其譜牒 知公爲圃隱先生旁支 益信其家學之有本 不?竊自幸託名於簡末 不敢以無文辭 謹按公諱世雅 字和叔 迎日人 麗朝直臣諱襲明之後 高祖諱從韶 吏曹佐郞 與成三問朴彭年友 丙子獄後 稱疾不樂仕 曾祖諱以揮 長水道察訪 祖諱次謹 考諱允良 昌陵參奉 遊退陶先生之門 ?崔氏 奉事德?之女 公以嘉靖乙未生 幼有異質 稍長端重謹嚴 動止有法 參奉公 篤訓孝悌 匪有餘力 不授之書 晩而始自奮 俯讀仰思 欣然忘食 以親命 擧於鄕 戊午成進士 參奉公歿 絶意擧業 隱居於紫陽山水間 以經史詩酒自娛 壬辰夏 倭酋平秀吉 擧國入寇 連陷南邊列鎭 直?京城 如風雨驟 大駕西狩 公奮曰 平世 士固自重 今 君父蒙塵 安得晏然 卽强弱不相當 有死而已 遂流涕起義 先令諸子編伍 草檄召募鄕兵 旬月間 衆至九百餘人 推公爲義兵大將 於是郭再祐權應銖兵 相繼而起 互爲聲援 公以一儒生 不閑弓馬 而一朝登壇 義氣奮發 建旗鳴鼓 爲士卒先 一軍莫不聳動 賊稱御史 終驍健數百人 馳下新寧 公?至朴淵上 大?之 軍聲益振 是年秋 賊屯永川 四出?掠 公與族弟大任 謀曰豺虎據城 自固 若縱之 是無嶺南也 某日分精銳一千 耀之楸坪 我以餘兵 登馬峴山 乘風飛沙 賊必迷亂 不敢出 今有義兵數十人 失期當誅 姑贖其罪 使之踰城 縱火 賊可大?也 大任曰諾 計旣定 與權應銖等合勢 幷進城中 火發 賊燒死無? 果大潰而遁 城外伏兵 又起隨出劒斬之 無得脫者 及其論功也 輒謙讓不居 或言其過廉 公正色曰 主辱臣死職也 始吾起兵 循 國家之急 本非圖功名 幸以得全堡障足矣 他又何望 聞者皆服 永川旣復 諸賊以次退屯江右 當此時 微公?蔽之力 則嶺以左 幾魚肉矣 八月進攻慶州賊 公領兵五千人 與左節度朴晋兵 會鷄淵 公挺身爲先鋒 馳馬直前 子宜藩 與俱進薄城門 賊迎擊 我軍殊死戰 賊大? 死者無數 賊從北門 出奇兵襲後 節度軍大亂走 獨公在陣中 挺劒力戰 宜藩死於矢石 奴億壽從死 賊亦度不能支 棄城遁 事 聞褒典 獨及晋而公不與焉 居無何 天兵克復三京 上還都 公以其兵 屬曹希益 歸紫陽舊隱 築室溪上 自號江湖? 題詩云有纓未遂終軍請 無力空懷杜老愁 以見志也 體察使李公元益 薦于 朝 除黃山道察訪 未幾棄歸 居閒養精 杜門不復出 以壬子閏十一月三日 終于正寢 享年七十八 葬郡北騎龍山負壬原 從先兆也 公容貌整肅 意氣豁達 ?然有丈夫風 孝於親 睦於族 謹於鄕黨 視財利若? 見人貧乏 施與如不及 不喜論人長短 至其是非界分處 則明白剖判 一刀兩段 君子以爲公之奮節立名 非辨於造次者云 所與友 皆一時名勝 曹芝山好益 張旅軒顯光 李蒼石埈 孫慕堂處訥 尤以道義相許 及公卒 旅軒以文哭之 曰公在鄕閭 薄夫有恥 懶夫思作 爲善者有所恃而不自沮 爲惡者有所憚而不敢恣 其所推重可知也 配一直孫氏 縣監致雲女 生四男二女 長卽宜藩 生員 壬辰戰死月城 君子以爲殉於忠孝 事聞 累贈左承旨 次汝頌早夭 次安藩 司果 次守藩 副護軍 女適張雲翼楊遇亨 宜藩無嗣 以守藩子好禮 爲後 縣監 安藩生二男二女 好仁文科牧使 好問 女曹盡孝曹? 守藩生三男一女 好義好禮好信 女李鐵堅 內外曾玄孫 三百餘人 處事萬陽葵陽 騎郞重器 皆公五世孫 處士以行治學術 屢徵不起 騎郞亦質直有文行 永川多文學士 而爲公 後承者 尤蔚然爲盛云 肅廟乙酉 永川儒生等 疏請建祠 今 上辛亥 重器以承文副正字 上言訟公功 朝廷 以故文穆公鄭逑 故監司崔睍遺筆爲可徵 特 贈公資憲大夫兵曹判書 公之義烈功績 掩抑不揚 百有餘年而至是 褒贈赫然 玆豈非顯晦有數而然歟 盖當蛇豕?食 嶺湖震? ?符擁節者 擧皆鳥鼠竄伏 而顧以一介書生 古所謂不識何狀者 投袂起義 雪涕誓衆 捐生赴難 張拳冒刃 則其志固烈矣 俎豆軍旅 所學不同 而倉卒指揮 方略如神 一捷於永川 再捷於慶州 迅掃?屯 收復江左 則其功固偉矣 及其功成捷奏 讓而不居 丹書鐵券 視若弊? 角巾還山 漁釣自娛 韜光?跡 幾乎泯然 則其節固奇矣 玆皆可以大書特書 昭示來後 不? 敢不樂爲之撰次 而係之以銘焉 銘曰生圃隱之門 居圃隱之鄕 宜公 志之烈而功之卓 于世德而增光 朝戎壇而暮漁磯 身雖?而節則芳 何慽乎?沒 何?乎表揚 騎龍之山崇三尺 蓋式此湖?公之藏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世子傅 宋寅明 謹撰
묘 지 명 병서
바다의 동쪽 고개의 남쪽에 호수(湖?) 정공(鄭公)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대개 만력간(萬曆間)의 위인이라고 한다. 불녕(不? :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기의 겸칭)이 일찍이 영남 사람에게서 그 이름을 듣고 그 위풍을 사모했으나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그 행위와 세덕(世德)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마음으로 홀로 향이(嚮邇 : 가까이 다가감)해 마지 아니 했었다. 임술(壬戌 1742)년 봄에 정기랑(鄭騎郞) 중기(重器)가 그 종인(宗人)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선조의 묘지명을 부탁하는데 뜻이 대단히 성실하였다. 불녕이 삼가 그 행록을 받아 보고서 처음으로 공의 지절(志節)이 고매하고 사업이 기위(奇偉)하심을 알겠고 가히 수백 년의 아래에도 우러러 바라보고 감탄할 수 있음을 알겠고, 또 보첩(譜牒)에 보건대 공은 포은(圃隱)선생의 방손인 것을 알겠으니 더욱 그 가학(家學)이 근본이 있음을 믿겠더라. 불녕이 그 편지 끝에 부탁한 것을 그윽이 스스로 다행히 여기고서 감히 글 못한다는 것으로써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세아(世雅)이고 자는 화숙(和叔)이니 영일 사람이시다. 여조(麗朝)의 곧은 신하 휘 습명(襲明)의 후예이시다. 고조(高祖)의 휘는 종소(從韶)이니 이조좌랑(吏曹佐郞)이신데 성삼문, 박팽년으로 더불어 친구가 되었고 병자년(丙子 1456) 옥(獄 : 단종 복위의 실패에 따른 옥사)이 일어난 뒤에는 병을 청탁해서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증조의 휘는 이휘(以揮)니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이시고 조(祖)의 휘는 차근(次謹)이시고 고(考)의 휘는 윤량(允良)이시니 창릉참봉이신데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비(?)는 최씨이신데 봉사 덕금(德?)의 따님이시다.
공(公)이 가정을미(嘉靖乙未 1535)에 나서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으시고 점점 자라면서 단정하고 무겁고 근엄해서 동작이 법도가 있으셨다. 참봉공이 자손들에게 효제(孝悌)를 독실히 가르치셔서 여력이 있지 아니하면 글을 가르치지 아니하였다. 만년에서야 비로소 스스로 분발해서 구부려 읽고 우러러 생각해서 흔연히 먹는 것을 잊으시기도 하였다. 부모님의 명으로써 향시에 응시하고 무오년(戊午 1558)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참봉공이 돌아가심에 과거 볼 뜻을 버리고 자양 산수 사이에 숨어 살면서 경사(經史)와 시주(詩酒)로서 스스로 즐겨하시다가 임진년 여름에 왜놈의 괴수 평수길이 온 나라에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도적질해서 남쪽의 모든 진을 연하여 함락시키고 곧장 서울로 옮겨서 바람과 소나기같이 달려와서 대가(大駕 : 임금이 탄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하시니 공이 분연히 일러 말하기를 “평소에는 선비가 진실로 자중하는 것이거늘 이제는 나라 임금이 몽진하시니 어찌 안연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 비록 강약은 서로 감당할 수가 없더라도 죽음이 있을 뿐이라” 하고서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의병을 일으키되 먼저 모든 아들들로 하여금 항오(行伍)를 짜고 격문을 초하여 향병을 모집하니 한 달 사이에 무리가 900여 人에 이르러서 공을 추존해서 의병대장을 삼았다. 그래서 곽재우(郭再祐), 권응수(權應銖)의 군사가 서로 계속해 일어나서 성원하였다.
공은 일개 유생으로써 활이나 칼을 쓸 줄 몰랐으나 그러나 일조에 등단해서는 의기가 분발하고 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면서 사졸의 앞에 서서 온 군이 용동(聳動 : 기쁘거나 즐거울 때 몸을 솟구쳐 춤추듯이 함)하지 않음이 없었다. 적이 어사(御使)라고 사칭하면서 날쌔고 건장한 수 백인을 거느리고서 신녕(新寧)으로 달려 내려가니 공이 뒤밟아서 박연(朴淵)지방 위에까지 이르러 이것을 크게 격파시키니 군사의 형세가 더욱 떨치게 되었다.
이해 가을에 적이 영천에 주둔해서 사방으로 나아가 노략질하니 공이 족제 대임(大任)으로 더불어 꾀하여 말하기를 “시랑과 범이 성(城)에 웅거해서 스스로 굳게 지키니 만일 이것을 놔두면 이것은 영남을 포기하는 일이라 아무 날 정예병 1,000명을 나누어서 추평(楸坪)들에서 과시하고 나는 남은 군사로써 마현(馬峴)산에 올라가서 바람을 따라 모래를 날릴 것이니 그러면 적이 반드시 혼란해서 감히 나가지 못할 것이요 또한 이에 의병 수십 인이 약속을 어기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성을 넘어서 불을 놓게 하면 적은 크게 겁낼 것이라” 하니 대임이 말하기를 그렇다고 여겨서 계획을 세워서 응수(應銖) 등으로 더불어 합세해서 성중에 함께 진격해서 발화하니 적이 불에 타서 죽은 것을 헤아릴 수가 없고 과연 크게 붕괴되어 도망치거늘 성 밖의 복병들이 또 일어나서 나오는 것을 알아 칼로 베어 버려서 도망한 자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공(功)을 논하는데 있어서 문득 겸양하고 차지하지 아니하니 혹은말하기를, “그 너무 청렴하지 않으냐”고 하니 공이 정색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는 것이 직분이거늘 당초에 내가 의병을 일으킬 적에 국가의 위급한 데에 따른 것일 뿐이요, 본래 공명을 도모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 온전하게 보전할 수가 있었으면 족한 것이니 다른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라고 하니 듣는 자가 모두 복종하였다.
영천을 이미 회복함에 모든 적들이 차례로 물러가서 강우(江右)에 주둔하였다. 이 당시에 만일 공의 막은 힘이 아니었던들 곧 영남의 좌도가 거의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다.
8월에 경주의 적을 공격하여 칠적에 공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서 좌절도 박진(朴晋)의 군사로 더불어 계연(鷄淵)에서 모으고 공이 선봉장이 되어서 말을 달려 곧장 앞서니 아들 의번(宜藩)이 더불어 함께 성문에 진격해 육박하니 적이 맞이하여 반격하였다. 우리 군사도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서 적이 크게 무너지고 죽은 자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적이 갑자기 북문으로 정예 군사를 내어 우리 군사의 후미를 습격하니 절도사(節度使)의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 달아나고 공은 홀로 진중에서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다. 그런데 의번(宜藩)이 화살과 돌에 맞아 죽고 종 억수(億壽)도 따라서 죽었는데 적도 또한 능히 지탱할 수 없는 것을 알고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사실이 조정에 들리자 포상할 적에 다만 박진(朴晋)에게만 미치고 공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 아니 되어 중국 군사가 삼경(三京)을 극복하고 왕께서 환도하시니 공은 그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귀속시키고 자양(紫陽)의 옛 고장으로 돌아가서 시내 위에 집을 짓고 스스로 강호수(江湖?)라고 이름하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갓끈은 있으나 마침내 종군(從軍 : 중국 漢나라 때 사람)의 청을 이루지 못하고 힘이 없어서 두로(杜老 : 중국 당나라 시인 杜甫)의 근심을 부질없이 생각한다.”라고 해서 뜻을 보였다.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천거해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제수하시고 얼마 아니해서 버리고 돌아와서 한가로이 거하며 정신을 길러서 다시 두문불출하시다가 임자년(壬子 1612) 윤11월 3일에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78세였다. 군(郡) 북쪽 기룡산(騎龍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례모시니 곧 선영(先塋)이시다.
공이 용모가 정숙하고 의기가 활달해서 억연(?然 : 덕이 높음)히 장부의 풍도가 있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겨레에게 화목하고 향당에서 공손하고 재리(財利)를 보는 데에는 더럽힐까 두려워하고 남의 궁핍한 것을 보고서는 베풀어 주기를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남의 장단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서도 그 시비의 판단에는 명백하여 한 칼로 양단을 가르듯 하니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공이 분연히 절의에 분발하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잠깐 사이에 판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더불어 사귄 친구는 모두 한 때의 유명한 좋은 벗으로서 조지산(曺芝山) 호익(好益)과 장여헌(張旅軒) 현광(顯光)과 이창석(李蒼石) 준(埈)과 손모당(孫慕堂) 처눌(處訥)이 더욱 도의로 서로 허여하였다.
공이 돌아가심에 장여헌(張旅軒)은 글을 가지고 조상하여 말하기를 “공이 향당에 계실 때에는 경박한 자가 부끄러워 할 줄을 알고, 게으른 자가 진작할 줄을 알고, 착한 자는 믿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저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악한 자는 꺼리는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게 했으니 미루어 그 무거운 바를 알 수가 있겠다.”라 하였다.
배위(配位) 일직손씨(一直孫氏)는 현감 치운(致雲)의 따님이신데 4남2녀를 낳으시니 장남은 곧 의번(宜藩)인데 생원(生員)으로서 임진란에 월성에서 전사하여 군자(君子)들이 말하기를 “충효에 순절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들려져 여러 번 증직해서 좌승지에 이르렀다. 다음은 여송(汝頌)이니 조졸하고 다음은 안번(安藩)이니 사과(司果)요, 다음은 수번(守藩)이니 부호군(副護軍)이요, 따님은 장운익(張雲翼), 양우형(楊遇亨)에게 출가하였다.
의번(宜藩)이 아들이 없어서 수번(守藩)의 아들 호례(好禮)로써 뒤를 삼았는데 현감이다. 안번(安藩)이 2남2녀를 낳았는데 호인(好仁)은 문과로 목사(牧使)요 다음은 호문(好問)이요, 딸은 조진효(曺盡孝), 조완(曺?)의 아내이다. 수번(守藩)이 3남1녀를 낳으니 호의(好義), 호례(好禮), 호신(好信)이고 따님은 이철견(李鐵堅)의 아내이다. 내외 증현손이 300여 인이나 되었다.
처사 만양(萬陽), 규양(葵陽), 기랑(騎郞) 중기(重器)는 공의 5世손인데 처사는 학술을 행하고 다스렸다는 일로써,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기랑은 또한 자질이 곧고 문행이 있었다. 영천에 文學士가 많은데 공의 뒤를 이으려는 자가 울연히 성하였다고 한다.
숙종 을유(乙酉 1705)에 영천 유생 등이 상소해서 祠를 세울 것을 청하고 금상(今上 : 영조) 신해(辛亥 1731)에 중기(重器)가 승문부정자(承文副正字)로서 공(公)의 공(功)을 말해 올렸다. 조정에서는 고(故)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와 고(故) 감사 최현(崔晛)의 유필(遺筆)로써 증거 할 만하다 해서 특별히 공에게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를 증직하였다.
공이 의열과 공적이 눌려서 드날리지 못한 채 100여 년 만에 이제에 이르러서야 빛나게 포상하고 증직하니 이 어찌 밝고 어둠이 때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오랑캐의 침식함을 당하여 嶺 ? 湖가 진탕이 되자 지켜야 할 수령들이 모두 새와 쥐새끼처럼 숨어 버리는데도, 돌아보건대 일개 서생으로 옛적에 이른바 어떠한 모양인지 아니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소매를 걷고 의병을 일으켜서 눈물을 씻고 무리에게 맹세하고 생명을 버리고 난리에 뛰어 들어서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무릅썼으니 그 뜻이 진실로 뛰어나다. 예절과 군사는 배우는 길이 같지 아니하건만 그런데 창졸간에 지휘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신(神)과 같아서 영천에서 한 번 승전하고 경주에서 두 번 승전해서 신속하게도 주둔한 적들을 쓸어버리고 강좌(江左)를 수복하였으니 그 공이 진실로 컸었다. 그 논공 하는 데는 사양하고 차지하지 아니하여 단서(丹書 : 임금이 붉은 글씨로 공신에게 써주던 증표) 철권(鐵券 : 정부 공무서철) 보기를 헌신짝처럼 생각하고 각건(角巾)으로 산속에 돌아가서 고기 잡고 낚시질하여 스스로 즐겼다. 빛을 감추고 자취를 거두어서 거의 세상에 숨으려 했으니 그 절개가 진실로 기이하였다. 이 모두가 족히 대서특필해서 후세에 밝게 전해야 할 것이로되 불녕(不?)이 감히 즐겨 그를 위하여 찬차(撰次)하지 못하고 이것을 이어서 명(銘)하노니 명(銘)에 말하기를,
포은(圃隱)선생의 댁에서 낳으시고 포은선생의 시골에서 살으시니
마땅히 공은 뜻이 장렬하고 공(功)이 높으시다.
세덕에 빛을 더할 것이요 아침에는 군진에 나아가고
저녁에는 고기를 잡으니 몸은 비록 굽었으나 절개는 곧 꽃다웁다.
이 어찌 인몰(?沒)된 것을 슬퍼하며 어찌 드러남을 기뻐할 것인가.
기룡산(騎龍山)에 석 자의 무덤을 어찌 아니 공경할쏜가.
이 호수공(湖?公)의 무덤이시다.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송인명(宋寅明)은 삼가 찬한다.
※ 宋公의 관향은 礪山으로 자는 聖賓이며 호는 藏密軒. 시호는 忠憲. 영조 때 좌의정.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됨.
壙 記
公 諱世雅 字和叔 系出烏川 高麗翰林學士襲明之後也 其後移居永川 曾祖諱以揮 長水道察訪 祖諱次謹 隱德不仕 考諱允良 昌陵參奉 ?永陽崔氏 奉事德?之女也 公生於嘉靖乙未 容貌儼然 意氣豁如 有長者風 戊午秋中進士 時年二十四 壬辰之變 公首倡義擧 鄕人從之 推以爲將 永川全捷之功 大抵皆出於公 公猶謙退不自居 悉歸之諸將 曰爲臣子者 但當奮義殲賊 不可貪?功爵 自爲身謀耳 凡義兵斬獲 皆不轉聞 以故 人 莫知之 李相國元翼 見而悅之 薦爲黃山道察訪 未久棄歸 居家以詩酒自娛 無意於仕宦 ?石屢空 意晏如也 待人諄諄然致其款 而人莫不敬畏 其寬而栗 類如此兵?之中 人民飢餓 公盡傾家儲 以賑親故之流莩 賴而生活者 無慮百餘人 人知其必有餘慶焉 壬子閏十一月三日 以疾終 享年七十八 是年十二月九日 葬于郡北騎龍山壬坐丙向之原 在先塋後幾十步 己未以子守藩貴 贈公爵爲兵曹參判 娶一直孫氏 比安縣監致雲之女也 生四男二女 長子宜藩 以乙酉生員 從公討倭 戰死慶州 特 贈正郞 娶寧越辛氏 無嗣 以弟守藩次子好禮 爲後 次子汝頌 娶興陽李氏 早卒 女適聞韶張雲翼 生一女 次適中和楊遇亨 生三男二女 男景洙景泗景汶 次子安藩 萬戶 娶花山權氏 生二男二女 長好仁進士 次好問 次子守藩僉知 娶夏城曺氏 生三男一女 長好義 次好禮 次好信 嗚呼 公以雄偉之器 恢弘之量 若將大有爲於斯世 而下焉不尊 豈命也歟 嗚呼哀哉 銘曰 秋月襟懷 春風氣像 萬古芳名 高山可仰 西岡 全三省
광 기
公의 諱는 世雅요, 字는 和叔이니 系統이 烏川이시다. 고려 翰林學士 襲明의 후손이니, 그 뒤에 永川으로 옮겨 살았다. 曾祖 휘 以揮는 長水道 察訪이시고, 祖의 휘 次謹은 숨어 벼슬하지 아니하시고 考의 휘는 允良이시니 昌陵參奉이시고, ?는 永陽崔氏 奉事 德?의 따님이시다.
公이 嘉靖 乙未년(1535)에 나셔서 용모가 儼然하고 意氣가 활달해서 長者의 풍도가 있으셨다. 戊午년(1558) 가을에 進士에 參榜하시니 이 때 나이가 24세였다. 壬辰의 變에 公이 처음으로 義兵을 일으키니 향인들이 그를 따라서 추존하여 將을 삼았다. 영천이 온전하고 승첩한 功은 대개 모두 公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公은 오히려 겸손하게 물러가서 스스로 그 功을 차지하지 아니하시고 모두 諸將들에게 功을 돌려보내며 하시는 말씀이, "臣子 된 자는 마땅히 의리에 분발하고 적을 무찌를 것이요, 가히 功이나 벼슬을 탐할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 몸을 위해서 꾀할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다. 무릇 의병이 베이고 노획한 것을 모두 전하고 알려주지 아니한 까닭에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李相國 元翼이 와서 보고 기뻐해서 천거하여 黃山道 察訪을 삼았으나, 오래지 않아서 버리고 돌아와 집에 居하면서 詩와 술로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仕宦에 뜻이 없으셨다. 식량이 가끔 떨어지되 마음은 태연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는 순순하고 관곡(款曲 : 매우 정답고 친절함)하심으로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너그럽고 엄한 것이 이와 같았다. 兵火 가운데 사람들이 주리고 배고파하니, 공은 집의 모든 저축을 기울여서 친척과 친구들을 구제하니, 그것에 힘입어 살아난 사람들이 무려 백여 인이나 되었다. 남들이 "그 분이 반드시 뒤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壬子년(1612) 윤 11월 3일에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이 78세였다. 이 해 12월 9일에 郡 北쪽 騎龍山 壬坐丙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先塋後의 몇 10보 되는 곳이었다. 己未년(1619)에 아들 守藩이 귀하게 된 까닭에 公의 벼슬을 贈職해서 兵曹參判을 삼았다. 一直 孫씨에 장가드시니 比安縣監 致雲의 따님이시다. 4남 2녀를 낳으시니 장자 宜藩은 乙酉년(1585)에 生員을 하여 公을 따라 왜적을 토벌하다가 慶州에서 전사해서 특별히 正郞을 贈職하였는데, 寧越辛씨를 맞았고 자녀를 못 두었기 때문에 아우 守藩의 차자 好禮로서 뒤를 삼았다. 차자 汝頌은 興陽李씨에게 장가들어서 일찍이 돌아가고 따님은 聞韶 張雲翼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다음은 中和 楊遇亨에게 출가해서 3남 2녀를 낳으니, 男은 景洙, 景泗, 景汶이다. 차자 安藩은 萬戶인데, 花山權씨에게 장가들어서 2남 2녀를 낳으니, 장은 好仁 進士요, 차는 好問이다. 다음 守藩은 僉知이니 夏城曺씨에게 장가들어서 3남 1녀를 낳으니, 맏은 好義요, 차는 好禮요, 다음은 好信이다.
아아! 公이 웅대한 器局과 넓은 아량으로서 만일 장차 크게 이 세상에 할 일이 있을 분인데, 낮추어서 높이지 않으시니 어찌 命이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銘에 가로대 가을 달 風彩이고 봄바람의 氣像이다. 만고에 꽃다운 이름 높은 산과 같이 우러러보도다. 서강 전삼성.
※ 全公의 본관은 龍宮으로 증참판 夢龍의 子, 지산의 高弟. 임란창의. 明溪공 好義의 장인, 즉 호군공 사돈.
<손모당 만사 2수(孫慕堂輓詞二首)>
우리 고모부 돌아가시매 상여 뒤를 못 따르니, 吾叔之幽我不輓
천수 여든이 수복이라 하리랴. 天年八十福云胡
젊었을 때 붓 휘둘러 사마가 되시었고, 早時揮筆馳司馬
만년에 창을 잡아 왜적을 쫓으셨지. 晩節橫戈走醜徒
몸을 다스리고 정도를 밟으니 고을 사람 복종하고, 律身履正鄕閭服
무리에 처하여 온화함을 따르니 노소가 기뻐했네. 處衆由和少長愉
해로하는 집안에는 자손들이 번성하니, 偕老堂中雙璧耀
일생에 능한 일 공 만한 이 또 있으랴. 一生能事似公無
산하의 기운 모아 기질 자못 출중하니, 山河鍾氣氣頗厚
높고 높은 언덕 같은 당당한 대장부로세. 崖岸軒軒大丈夫
시주(詩酒)로 수작하니 풍월이 짝을 짓고, 詩酒自酬風月伴
위의는 사람들이 성현의 무리에 비겼네. 威儀人擬聖賢徒
시국을 근심하여 백발은 천 줄기로 어지럽고, 憂時華髮千莖亂
평생토록 청빈하여 네 벽만 섰을 뿐이었네. 沒世淸貧四壁孤
나를 자식같이 봐주셨으나 어버이로 못 모셨기에, 猶子視余余未父
두어 수의 만사로써 황천길을 위로하네. 只歌雙??幽都
祭文
顯光得見公最晩矣 一接風儀容觀 聽其談論 則更知公非末俗中人矣 又因諸人 獲聞公行已處事 居家與鄕之節 及夫壬辰大? 則固有非庸衆人所可得以及者也 蓋公天分秀異 不由積力 而親親泛愛之德 洽然各盡其情焉 好善惡惡之義 峻然有不可撓者 所以公在鄕閭 薄夫有恥 懦夫思作 爲善者有所恃 而不自沮 爲惡者有所憚 而不敢恣 嗚呼公之爲人 豈可易得於斯世哉 顯光往來此地 屢嘗歷候而致敬 公亦辱許 或賜提壺 醉晤於泉石之間 其於談笑之際 竊有所感發者多矣 今其已矣 敦款之容 磊落之談 不可得以復接矣 敢資酒饌於諸友 奠致微誠 張旅軒 顯光
제문
顯光이 公을 뵈온지는 가장 늦었습니다. 한번 풍의와 용모를 접하고 그 담론하심을 들으니 문득 公이 末俗중에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또한 여러 사람들로 인해서 공이 行身處事하는 것과 집에서나 鄕黨에서의 절차와 壬亂당시의 대개의 일을 얻어들은즉, 참으로 보통 사람들이 가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공이 天稟이 뛰어나시어 功力을 드리지 아니하여도 친밀하고 널리 사랑하는 덕이 흡족하게 그 정에 맞도록 하였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의리가 준연(峻然)히 가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이 향려(鄕閭)에 있을 적에 박부(薄夫)들은 부끄러워하고 懦夫(나부 : 겁많고 게으른 사람)는 각성을 하며 착한 사람들은 믿는 바가 있어서 스스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악한 짓을 하는 자는 겁난 바가 있어서 감히 방자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公의 사람됨이 어찌 가히 이 세상에서 쉽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顯光이 이곳을 왕래함에 일찍이 여러 차례 문안을 드리고 공경을 드렸는데 공은 또한 욕되이 허여하셔 혹은 술병을 가지고 술잔을 건네면서 泉石之間(자연 속)에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談笑하는 즈음에 가만히 생각하니 感動해 느낀 바가 많은 것이 있었더니 이제는 다 끝이 났습니다. 敦厚하고 정성스러운 모습과 뇌락한 말씀을 다시 접할 수가 없겠습니다. 친구들의 주선으로 감히 술과 찬을 차려 치전을 올려 조그마한 정성을 이루나이다. 장여헌 현광
※ 張公의 본관은 仁同으로 자는 德晦요 호는 旅軒, 시호는 文康. 조선 중기 학자로 효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됨.
鄭世雅의 兵曹判書 贈職敎旨
17世
┌ 의번(宜藩) : 柏巖公(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 21世 重祿
├ 유번(維藩) : 處士公 ····> 21世 弘九
├ 안번(安藩) : 萬戶公 ····> 21世 萬陽
├ 수번(守藩) : 護軍公 ····> 21世 復陽
├ 張雲翼
└ 楊遇亨
宜藩(明宗15年 庚申 1560年~1592年 8月 21日)
○ 號 : 柏巖, 字는 衛甫
○ 官職 : 1585年 가을에 成均館 生員에 합격.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종2품).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湖?公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永川城을 복성하고 慶州城 전투에서 적에게 포위된 아버지를 구하시고 자신은 장렬히 殉節하셨다. 그러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옛날 입던 衣冠과 詩를 묻어 장사를 지내니 이를 일러 詩塚이라 한다. 父公과 함께 世德祠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때의 전공을 인정받아 1784년 2월(정조8년 갑진)에 忠孝 旌閭(충신 효자 가문이라는 정문)가 내렸다. 슬하에 후사가 없어 동생 守藩의 次子 好禮를 양자로 들이시다.
○ 配位 : 贈 貞夫人 寧越辛氏(명종 경신 1560년~정축 1637년3월28일)로 參奉 德麟의 따님이다.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父公 호수공묘 계하.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 父公, 동생 守藩과 함께 경주 임란의사 창의단비(경주 황성공원).
維藩(處士公)
○ 처음 諱는 汝頌
○ 配位 : 興陽李氏로 習讀 天授의 따님.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安藩(萬戶公) (1574年 5月 27日~1630年 4月 13日)
○ 字 : 寧甫
○ 官職 : 武科, 禦侮將軍(정3품 당하관) 龍?衛副司果, 임진왜란시 의병활약.
○ 配位 : 淑人 花山(安東)權氏로 參議 克立이 따님.
○ 墓所 : 경남 울산 청량면 덕하리(화정리). 묘소아래 德下齋가 있음.
○ 墓祀日 : 陰曆 10月 1日.
守藩 (宣祖13年 庚辰 1580年4月20日 ~ 光海13年 辛酉 1621年7月27日)
○ 字 : 貞甫
○ 官職 : 武科, 內禁衛將, 副護軍(종4품)
○ 配位 : 淑夫人 昌寧曺氏(선조5年 壬申 1572年~선조41年 戊申 1608年3月14日) 로 生員 希益의 따님이며 允愼의 손녀이고 正郞 孝淵의 증손녀이다. 外祖는 永川 尹元佐. 슬하에 3남1녀를 두었으나 둘째 아드님(好禮)은 큰아버지 백암공 후로 양자 가시다.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父公 호수공묘 계하.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 主世居地 : 永川(石洞, 龜尾), 漆谷, 大邱.
○ 13세 때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아버지 호수공과 형님 두 분(의번, 안번)은 의병으로 출전하시고, 형님(유번)과 함께 병약하신 어머니(일직손씨)를 모시고 영천시 자양면 기룡산 성혈암(聖穴庵)에서 피난하시다가 양식이 떨어지자 백여 리나 떨어져있는 대구 황천동(지금의 대구 황금동)외가에 내왕하며 쌀을 지고 와서 식구들의 생계를 맡았으므로 세인(世人)들은 모두 그 지극한 효성을 칭송 하였다.
○ 1603년에 武科에 壯元으로 급제하고 상감(선조)께서 어서(御書)로써 성명을 기록하여 벽상에 괘방(掛榜)하고 원사(遠射)한 화살의 무게가 6량으로서 170보(步)나 되는 원거리에 달하였으므로 후일 크게 등용의 조짐을 보인 끝에 제포만호(薺浦萬戶:진해)에 제수 되는 등 여러 곳의 萬戶 등을 거쳐 副護軍으로 승진하여 內禁衛將에 천거 되었다.그러나 큰 뜻을 펴지 못하고 42세에 병사 하였다.
○ 年譜
1. 1580年 4月 20日(宣祖 13年 庚辰) : 영천 자양 노항촌에서 출생
2. 1592年 4月 13日(宣祖 25年 壬辰 13세) : 임진왜란 발발
父公(湖?公)과 백숙형은 창의하고 대구 황청동(현 황금동) 외가에서 살을 짊어지고와서 노모와 식구들을 봉양하다.
3. 1594年 1月 15日(宣祖 27年 甲午 15세) : 義陣에 참가하여 彦陽에서 慶州로 들어오는 길목인 楊川 성 밖을 지키다가 왜적과 전투를 하다.
4. 1597年 7月 21日(宣祖 30年 丁酉 18세) :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父公과 叔兄 安藩과 더불어 火旺山 會盟에 참가
5. 1603年(宣祖 36年 癸卯 24세) : 別科로 실시한 武科殿試에 壯元及第
6. 1605年(宣祖 38年 乙巳 26세) : 甘浦萬戶에 임명. 薺浦萬戶로 전임
7. 1611年(光海 3年 辛亥 32세) : 撫夷萬戶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님께서 노령이므로 부임하지 아니함.
8. 1612年 윤 11月 3日(光海 4年 壬子 33세) : 父公 별세
9. 1615年(光海 7年 乙卯 36세) : 忠佐衛後部將에 임명되고 亨難原從功臣一等에 錄勳. 龍?衛副司果로 전임
10. 1616年(光海 8年 丙辰 37세) : 鹿島萬戶 임명(家狀 끝의 註 참조).
11. 1619年(光海 11年 己未 40세) : 봄에 포상으로 副護軍으로 특진하고, 여름에 內禁衛將으로 천거. 겨울 慶尙左道 巡察使의 요청으로 慶尙左兵營으로 전임
12. 1621年 7月 27日(光海 13年 辛酉 42세) : 達成兵營에서 등창으로 별세
ㆍ10월 4일 : 영천 자양 기룡산 하천壬坐에 장사
13. 1751年 10月(英祖 27年 辛未) : 묘비 세움.
14. 1998年 4月 21日 : 壬亂護國 嶺南 忠義壇에 위패 봉안(대구 망우공원)
15. 2000年 7月 22日 : 영천 鳴山里 石洞에 公을 추모하기 위한 衛社齋를 창건
○ 家狀(원문 생략)
公의 諱는 守藩이고 字는 貞甫이며 그 本貫은 迎日縣 사람이다.
시조는 高麗 樞密院 知奏事 휘 襲明이니 毅宗의 스승으로서 바른 말로 忠諫한 사적들이 국사에 나타난다. 그 후손들도 벼슬과 큰 선비들이 빛나게 대대로 이어져서 十一대 아래에 司成인 휘 從韶가 있었으니 그 문장과 節行이 뚜렷이 세상에 모범이 되었으니 ?畢齋 金宗直이 항상 烏川 鄭先生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 아랫대의 휘가 以揮이니 長水道察訪을 역임하였고 그 아랫대가 휘 次謹으로 일찍 돌아가셔 벼슬을 하지 않았고 그 아랫대의 휘가 允良이니 昌陵參奉으로 이분들이 공의 高祖, 曾祖, 祖가 된다.
아버지는 휘가 世雅로 黃山道察訪을 역임하였으며 이후에는 공의 錄勳으로 인하여 兵曹參判에 贈職되었다. 어머니는 貞夫人 孫氏로 比安縣監 致雲의 따님이며 靖平公 洪亮의 후손이다.
公께서는 萬曆 庚辰(1580) 四월 二十일에 永川 紫陽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수의 재목으로 타고나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점점 장성하면서 힘이 세고 용기가 남달랐으며 그 체격은 능히 큰 호랑이와 같으면서도 일찍부터 한 번도 얼굴에 怒氣를 띄는 것을 못 보았고 벗들과 놀 때에는 번번이 손을 모아잡고 모습을 바로잡으니 보는 이들이 자못 敬重하게 여겼다.
壬辰(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그 아버지 湖?公께서 倡義하셔서 義兵陣을 이끌고 왜적을 토벌하실 때 백형 柏巖公 휘 宜藩도 從軍해 가시니 공은 근심스러운 모습을 지으며 말하기를 "부형께서는 결사적으로 군중에서 힘쓰시며 사사로이 身邊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니 걱정할 바는 늙은 어머님이 계시니 지금 왜적들이 성중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성 밖에 나와 창과 칼을 사용하여 노략질하기 위해서 멀리까지를 누비니 어찌 이 땅에 그들의 창끝을 피하여 용하게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골짜기를 알아서 찾아낼 수 있으리오."하고 貞夫人을 받들고서 피난할 곳을 정해서 仲兄 安藩과 같이 숨어 있으면서 어머님을 봉양하는데 비바람을 무릅쓰고 비록 난리 속에서 세상이 어수선한 속을 누비면서도 끼니를 한 번도 거른 바가 없었다.
이 때 이미 남쪽에서는 영천성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성을 회복했으나 湖?公께서는 功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재물을 털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혀 날마다 수십 명 씩을 겪어내었다. 그러다보니 이 가문에도 땔나무와 식량이 바닥이 나서 종종 불을 지피지 못할 때가 있었다. 공은 더욱 힘을 써서 좌우에 한결같이 처리하고 어버이의 뜻을 순순히 복종하고 받드는데 힘써서 공은 일찍부터 백리밖에 가서 쌀을 지고 겨우 돌아왔으나 온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서 곤란을 받고 있어 풍족하게 먹을 수 없으므로 부득이 공은 손수 죽을 묽게 끓여서 먼저 아버님께 드리니 아버지께서는 빽빽하게 둘러선 가족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오늘 저녁을 먹는데는 저가 여기 와 있어야 먹겠다고 하시고 그제야 그를 마시게 되었다.
전쟁의 餘波로 公私間이 매우 빈곤하여 士大夫 가문이라도 짐승이라도 잡아서 내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번번이 굶어 죽는 판국이었으나 공은 그 인품이 우뚝 솟아나서 한 모퉁이에서 한 나그네를 만나더라도 노인이면 부축을 하고 어린이면 잘 이끌고 와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출해 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효성이 깊고 정성이 지극한 느낌을 준다."라고 했다. 성인이 된 후부터는 慷慨하는 마음으로써 책을 읽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詩經과 書經을 궁구하다가 때로는 갑자기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大丈夫라면 당연히 임금이 하사한 도끼를 들고 단에 올라 백만 군을 지휘하는 곰이나 사나운 짐승같은 장군을 즐겨 본받아야지 선비 무리에 국한되어 글이나 읽고 글씨나 쓰는 데에만 머리를 움츠릴 수 있으랴?" 하고는 드디어 선비의 길을 다 버리고 孫子兵法이나 黃石公의 병법에 대한 책을 취하여 머리를 숙이고 六機諸說을 열심히 읽어 요긴한 병법을 암송하여 해득하니 비록 군대에서 늙은 사람이라도 모두가 여기에는 미치지를 못했다.
癸卯(1603)년에 別科로써 보인 殿試에 나아가 壯元에 올랐는데 이 때의 나이가 二十四세로 宣祖께서 들으시고 손수 공의 성명을 써서 벽에 걸고 또 그 활을 멀리 쏜 보수(걸음수)까지를 기록하고 말씀하시기를 "奇才로다! 기재로다!"를 연발하시니 듣는 사람마다 축하하며 장차 크게 쓰일 것이라 하였다.
乙巳(1605)년에 甘浦萬戶를 제수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바야흐로 나라 변방의 수비가 대단히 소홀한데 여러 武士들 중에서 鄭某가 날쌔고 건장하고 또 奇略이 있으므로 만약 지금 다시 轉補를 시켜서 북쪽 변방으로 부임하게 한다면 이 한 사람으로서 능히 백 명의 무사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허락해서 다시 의논이 진행되었으나 또 말하기를 "그의 형 安藩이 지금 북변 수자리에 갔으니 형제가 같이 북변에서 수고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결론이 내려져서 이 일로 말미암아 북변 행을 면하게 되고 薺浦萬戶에 제수되었다.
국가에서는 대란이 종식되고 오래지 않아서 바닷가의 여러 성에 무기들이 허물어지고 헤졌으나 공께서 부임하자 일률적으로 補修해서 완벽하게 비치했으며 戰艦도 파손된 것은 다시 보수하도록 영을 내려 매양 元帥에 점검하게 하니 薺浦가 가장 군비가 완비되었다. 무릇 수선에 있어서는 병졸들에게는 수고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능한 솜씨로 모두 이루어졌다.
壬子(1612)년에는 撫夷萬戶에 제수되었으나 즐겨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부모님께서 집에 계시는데 어찌 차마 한 薄俸官吏로 어버이 곁을 멀리 떠나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당국에 轉補해 줄 것을 요청했더니 이해 겨울에 호수공께서 별세하셔서 공은 슬퍼하면서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면서 몸에 병이 나지 않는 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본 성품이 그러하였다.
乙卯(1615)년 봄에 服을 벗자 忠佐衛 後部將을 제수하였다가 얼마되지 않아서 조정에서 공훈을 기록하는 일이 있어서 공이 原從一等勳에 올라서 龍?衛 副司果에 승진되었다가 丙辰(1616)년에 咸鏡道 鹿島萬戶를 제수하였더니 섬의 풍속과 인심이 추악하고 모질어서 공의 전임자나 후임자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그 島民들과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데 속수무책으로 날만 보내곤 했으나 공이 부임하자 한결같이 먹줄처럼 법을 시행하여 士卒들이나 도민들의 곤궁하고 어려운 처지를 곧 구제하여 힘과 위안을 주니 그들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좋아했다. 또 兵器의 備置를 정미롭게 정비하여 폐기된 모든 병기들을 수선하고 보수해서 복구시켜 놓으니 그 곳 함경도의 觀察使가 표창하고 또 조정에 알리어 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서 특별히 內禁衛將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했으니 그 때가 光海 己未(1619)년의 봄이었다.
공은 비록 射擊術로써 拔身했으나 일찍부터 권력의 문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한 번 조정으로 들어가서 궁전에 있은 후로는 항상 고요하게 지내며 말하기를 "지금과 같이 三綱이 무너진 때에 내가 어찌 벼슬길을 원하겠는가. 다만 문을 닫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것으로써 만족하게 여긴다."하더니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왔다.
이 해 겨울에도 본도 巡察使가 공이 兵務에 능통하다는 소식을 듣고 공을 본도 병영에 와서 도와주도록 청원서를 조정에 올려서 마침내 발령장이 당도했으나 공은 病을 핑계해서 가지 않으려 했더니 순찰사가 장차 이를 군법에 부쳐 부임하도록 강청하니 마침 어머님(貞夫人)께서 순찰사의 말을 들어 부임하도록 명함으로써 부임하였지마는 공의 본 뜻은 아니었다. 매양 하는 말이 "일은 무엇이든지 可否가 없다. 오직 다만 대답할 따름이니라." 하였다.
天啓元年 辛酉(1621) 七월 二十七일에 등창을 앓아서 達成兵營(대구)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겨우 四十二세였다. 이때에 慶尙左道水使는 "병기 설비에 이제 결함이 생겼도다. 남방의 대비가 걱정이 되노라." 하였고 文武를 겸한 장수 재목을 천거하도록 의논에서 광해군은 벽면을 돌아보면서 "鄭某는 지금 어디 있는고. 이 글씨는 先王께서 일찍이 손수 쓴 것이로다. 즉시 특별히 발탁하여 政院에 불러들이려고 했더니 그만 죽었다고 기별이 올라왔구나." 하며 광해군은 슬퍼하였다. 그 해 十월 四일에 영천군 북쪽 기룡산 임좌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이는 선대의 계하를 쫓은 것이다.
配 淑夫人은 曺氏로서 成均生員 希益의 따님이며 芝山先生 好益의 형의 따님이다. 夫人은 詩禮의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책이나 경계하는 글을 눈으로 익히면서 자라나 시집와서 군자를 섬기는데 그 행지에 어긋남이 없었고 노복을 거느리는데 법으로써 다스려서 中門 안에는 언제나 질서가 정연하고 자리가 반듯하였다.
壬申(1572)년에 나서 戊申(1608)년에 별세하시니 묘소는 공과 한 곳이나 穴은 다르다.
슬하에 三남 一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好義로 文詞는 여러 차례 首座에 올랐으나 과거에서는 그 결과가 좋지 못하여 남들이 모두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次子 好禮는 海南縣監을 지냈으며 백부의 뒤로 出繼하였다. 三子는 好信이며 딸은 李鐵堅에게 시집갔다.
好義는 五남 一녀를 두었으니 長子는 時欽이고, 다음은 時楷, 다음은 時永, 다음은 時炯, 다음은 時垣이다. 딸은 孫鉉에게 시집갔다. 好禮는 三남 一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時相이요, 다음은 時僑요, 다음은 時諶이니 大護軍이요, 딸은 呂爾和에게 시집갔다.
好信은 三남 一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時羽이니 副司果이고 다음은 時喜이고, 다음은 時贊이다. 딸은 權凞에게 시집갔다.
李鐵堅은 一남을 두었으니 仁耉이다. 內外 증손과 현손은 모두 백여인이 있다.
공은 일찍이 愛妾이 있었으나 공이 돌아가시자 머리를 깎고 죽을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고 貞節을 지켰으니 이는 공께서 가정을 예로써 다스린 효과이다. 郡 官衙에서 아름답게 여겨 복호(復戶:충신, 효자, 열녀가 난 가문에 국가에서 부역을 면제 해 주는 일)하였다.
아! 공의 英名이 早達(조달)하여 임금께서 들으시고 궁전의 벽에 그 이름을 써놓은 것은 아마도 장차 인재를 골라낼 때에 공을 기억하려고 한 것인데 공의 人品을 다 시험해 보기도 전에 옥황상제의 부름으로 가시고 말았도다. 때는 혼탁한 조정의 말기로써 음흉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서 무릇 크고 작은 관직에 등용되는 것이 御命이 아니고서는 제수할 수 없는 직위까지 썩어버린 두엄풀 같은 아랫배에 살찐 사람들을 문득 내었으니 이것이 모두 공이 부끄러워하는 바이고 갑자기 또 그 색을 들어서 돌아갔다면 마땅히 공은 여기에서 그쳤을 것이리라. 세상에서 다만 공의 사적을 볼 때는 그 활과 칼의 실력은 적은 자랑거리가 아닌 남쪽 고을의 무사로 그쳤다고 할 것이고 공을 아는 사람들은 오직 그렇게만 말하겠는가! 大丈夫가 立身할 때에는 節行을 우선으로 할 뿐 저 勳業을 논한다는 것은 비루한 처사니라. 이 같은 丈夫에게 재주는 있었고 命은 없었다는 것은 하늘이 공에게 어찌 壽를 인색하게 하였는지!
이로써 줄거리로 잡아 대강을 기록하니 붓을 잡은 군자께서 바로잡아 주시기를 기대하노라.
崇禎후 七十년 丁丑(1697)년 十二월 상순
從玄孫 葵陽 謹狀
※ 녹도만호 - 함경도에 녹도는 없고, 경흥군 두만강에 鹿屯島가 있으나 조산포만호 관할이며, 충남 보령 오천에는 녹도가 있으나 함경도이므로 조산포만호가 아닐는지?
墓誌銘 幷書
公諱守藩字貞甫貫迎日縣人麗朝樞密院知奏事襲明十六代孫赫世蟬聯爲東方茂族中移于永川高祖諱以揮長水道察訪曾祖諱次謹宣務郞祖諱允良學行薦昌陵參奉考諱世雅登進士有德行李相國元翼薦爲黃山道察訪以公功臣號贈兵曹參判?一直孫氏比安縣監致雲之女以萬曆庚辰四月二十日生公公雄豪夙成力能?鼎年十三遭壬辰之亂察訪公傾資産擧義旅以此渾家亦隨而飢餓先夫人在堂不能起公與其兄安藩不避風雨負米於百里之外奉養生活人皆稱其誠孝篤至及冠業武尤長於遠射癸卯登第赴壯元御書姓名于壁上且記所射六兩一百七十步擬後日大用也乙巳除甘浦萬戶以一當百遞任將赴北會兄安藩以新恩己戍北故得免而卽授薺浦萬戶瓜滿遞來辛亥除撫夷萬戶親老辭不就乙卯爲忠佐衛後部將參亨難原從功臣一等遷秩龍?衛副司果丙辰除鹿島萬戶時列鎭兵備解弛公獨奮意鍛鍊居職三年器械精備事聞于朝己未春褒陞副護軍夏薦內禁衛將冬本道巡察使以公?練兵務啓請佐幕辛酉七月二十七日以腫疾終于達成幕下享年四十二以十月四日葬于郡北騎龍山先塋下壬坐丙向之原配夏城曺氏生員希益之女有婦德生三男一女男長好義娶龍宮全氏次好禮娶順天朴氏次好信娶昌寧成氏女適李鐵堅生一男嗚呼天之生公也骨格之秀異孝誠性之誠一?力之絶倫武藝之卓越?略之神奇初若有意乎斯世而降年不永齎志就汲嗚呼哀哉銘曰排山勇力盖世義氣供職家庭親極甘旨蜚英天關常目姓字曰薺鹿兵精器備功懋懋賞崇爵自至庶展?步長城萬里天不可悖龍藏豹死邦國不幸痛惜曷己不朽者存名百祀兮
西岡 全三省
묘지명 병서
공(公)의 휘(諱)는 수번(守藩)이요 자(字)는 정보(貞甫)이며 본관은 영일현인(迎日縣人)이니 고려조에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역임하신 휘(諱) 습명(襲明)의 16대손으로서 승세(承世)한 대대로 혁혁(赫赫)한 공적이 있어 자자(藉藉)한 명성이 이어져 우리 동방에서 성대(盛大)한 벌열(閥閱)로 꼽히며 중세(中世)에 영천(永川)으로 옮겨 왔다.
고조(高祖)의 휘(諱)가 이휘(以揮)로서 장수도(長水道) 찰방(察訪)을 하고 증조는 휘(諱)가 차근(次謹)으로서 선무랑(宣務郞)이요 조(祖)는 휘(諱)가 윤량(允良)으로서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을 제수(除授)되었고 고(考)는 휘(諱)가 세아(世雅)로 진사(進士)에 올라 덕행(德行)이 있었으므로 이상국(李相國) 원익(元翼)이 천거하여 황산도(黃山道)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공은 공신(功臣)으로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贈)해 졌고(後에 兵曹判書로 加贈되고 諡號가 剛義로 贈해짐) 비(?) 일직손씨(一直孫氏)는 비안현감(比安縣監) 치운(致雲)의 따님이며, 만력(萬曆) 경진년(庚辰 1580) 4월 20일에 공이 태어나니 나면서부터 천부적(天賦的)으로 영웅(英雄)의 기상(氣像)과 호걸(豪傑)의 기풍(氣風)을 타고나서 숙성(夙成)하니 그의 능력은 이미 사직(社稷)을 수호(守護)할 장재(將材)의 자질이 보였다.
연기(年紀)가 13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니 부공(父公)이신 찰방공(察訪公)께서는 가산(家産)을 기울여서 자본(資本)으로 하여 거의(擧義)를 해서 의진(義陣)을 이끌고 구국항쟁(救國抗爭)의 길에 나가시고 나니 이에 따라 가정도 어려워져서 기아(飢餓)에 허덕이게 되니 선부인(先夫人)께서는 당상(堂上)에 계시면서 능히 일어나시지를 못하시니 공은 형 안번(安藩)과 같이 불피풍우(不避風雨 : 비바람을 피하지 아니함)하고 100리 밖 외가(대구시 황천동, 현 황금동)에까지 내왕하면서 쌀을 지고 와서 모친을 봉양하며 생계를 맡았으므로 세인(世人)들은 모두 그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다.
성년(成年) 이후에는 무예(武藝)를 더욱 힘쓰면서 그 중에서도 원사부문(遠射部門)에 특출(特出)하더니 계묘(癸卯 1603)에 무과(武科) 과거에 올랐더니 장원(壯元)에 뽑히고 상감(上監)께서는 어서(御書)로서 공의 성명(姓名)을 기록하여 벽상(壁上)에 괘방(掛榜 : 시험 합격자의 이름을 써 붙임)하고 또 원사(遠射)한 화살의 무게가 육량(六兩)으로서 170보나 되는 원거리에 달했으므로 후일에 대용(大用)의 조짐(兆朕)을 보인 끝에 을사(乙巳 1605)에는 감포만호(甘浦萬戶)의 제서(除書)가 내려서 일당백으로 비유가 되더니 체임(遞任)에 있어서는 장차 북으로 가서 북변경비(北邊警備)를 치르고 돌아와야 할 처지였으나 마침 한 가정 출신인 형 안번(安藩)이 무과급제(武科及第)한 후 초임(初任)으로서 이미 북변 수자리를 제수(除授)하고 있는 관계로 북변 수자리를 면제받는 특혜를 입고 곧 제포만호(薺浦萬戶 : 경남 진해시)를 제수하여 그 임기를 채우고 교체(交替)되어 와서는 신해(辛亥 1611)에는 무이만호(撫夷萬戶 :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 현 은덕군 하회리)를 제수되었으나 양친(兩親)께서 노령이신 관계로 사임하고 취임(就任)하지를 아니하였다.
을묘(乙卯 1615)에는 충좌위(忠佐衛) 후부장(後部將 : 全羅道 南原 鎭管 部將이었으나 部將만은 都城에서 勤務했음)을 역임하면서 형난원종공신일등(亨難原從功臣一等)에 녹훈(錄勳)되었다가 용양위(龍讓衛) 부사과(副司果)로 전임되었다.
병진(丙辰 1616)에는 녹도(鹿島 : 녹둔도, 함경북도 경흥군 두만강에 있는 섬. 조산포만호 관할. 家狀에 함경도로 되어 있음. 녹도는 충남 보령 오천)만호를 제수받고 부임했더니 당시에 각진(各鎭)의 병기(兵器), 비품(備品)이 해이(解弛)해졌었는데 공은 홀로서 이를 개탄(慨嘆)하고 분발(奮發)해서 단련(鍛鍊)하여 재직하는 임기 3년 동안에 모든 병기를 정미(精微)롭게 완비하였다.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려져서 을미년(乙未 1619) 봄에 포창(褒彰)하는 뜻으로서 부호군(副護軍)으로 특진했다가 여름에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천거(薦擧)되었다. 겨울에는 본도(本道 : 慶尙左道) 순찰사(巡察使)가 공의 실력을 알고서 병무(兵務)의 훈련(訓練)을 위하여 공을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으로 전임시켜 줄 것을 원하는 품신(稟申)을 해서 뜻을 이루었더니, 신유(辛酉 1621) 7월 27일에 종질(腫疾)로서 달성감영(達成監營) 아래에서 향년 42세로 별세하여 그 해 10월 4일에 군북(郡北 : 永川 자양) 기룡산(騎龍山) 선영하 임좌병향지원(壬坐丙向之原)에 장사지냈다.
배(配)는 하성(夏城 : 昌寧의 古號) 조씨(曺氏)로서 생원(生員) 희익(希益 : 지산 조호익의 형)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다.
슬하에 3남1녀를 두었으니 男은 長子에 호의(好義)로 배는 용궁전씨(龍宮全氏)요, 다음에는 호례(好禮)로 배는 순천박씨(順天朴氏)요, 다음에는 호신(好信)으로 배는 창녕성씨(昌寧成氏)이며 딸은 이철견(李鐵堅)에게 출가하여 1남을 낳았다.
오호(嗚呼)라! 하늘이 공을 낳으실 제 체격(體格)이 빼어났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여력(?力 : 체력)이 절륜(絶倫)하였고 무예(武藝)가 탁월하였고, 병술(兵術)이 신기(神奇)하였으니 처음에는 이 세상에 뜻이 있어서 태어나게 하신 것 같사오나 그 뜻을 펼 연기(年紀)를 오래지 않아서 몰세(沒世)를 취(就)하게 하였으니, 아! 슬프고도 서러운 일이로다.
명(銘)에 가로되,
태산을 물리칠 용력(勇力)이요 세상을 덮을 의기(義氣)로다. 사명(使命)과 도리를 갖춘 가정에서 어버이의 뜻과 몸을 극진히 길렀도다. 원사(遠射)의 특출(特出)함이 상감(上監)에 인식(認識)되어 성명과 자를 벽서(壁書)해 두고 짙게 하여 제포만호(薺浦萬戶)를 역임하고, 녹도만호(鹿島萬戶)를 역임하며 병기(兵器)를 정비(整備)하고 병력을 훈련시켜 그 힘쓴 공로를 포상(褒賞)하여 높은 작위(爵位)까지 좇아 이르러 무릇 장성만리(長城萬里)를 힘차게 활보(?步)하더니,
아! 하늘도 가(可)히 믿을 수 없도다. 용(龍)이 숨고 대호(大虎)가 숨을 거두었도다.
국가(國家)의 운수가 불행하노니 원통(寃痛)하고도 애석(哀惜)하오나 어찌하리오. 그래도 이지러지지 않고 남는 것이 있는 법이니 그 명성(名聲) 백 세 후에라도 전할진저!
서강 전삼성
○ 輓詞
태어난 곳이 어찌 심상(보통)하리요 墜地豈尋常
남아(男兒)로써 사방에 뜻을 펼 징조로다 桑弧志四方
가정에서는 정성스러운 효성이 지극하였고 家庭誠孝至
임금께서 쓴 성명이 과거장의 벽에 향기 나네. 御壁姓名香
정녕 이 사람은 천인을 대적할 만하기에 定是千人敵
장차 국가의 한 면을 담당하리라 기대했는데 將期一面當
참으로 저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도다. 難諶彼蒼者
세상 일이 이미 해가 서산에 기울었구나. 世事已山陽
西岡 全三省
아! 우리 고종 동생이여 嗚呼吾外弟
하늘이 반드시 때를 위해서 태어나게 했는데 天必爲時生
봉후의 뜻 펴지 못하고 未展封侯志
어찌 먼저 긴 성이 허물어졌는가 何先毁長城
백발인 어머님께서는 원통하게 울부짖으시며 萱當鶴髮泣
원통한 옥사에 황급하게 놀랐도다 寃獄??驚
황천 밑에서 천추의 밤을 泉下千秋夜
그대는 응당 눈을 감지 못하리라 君應目不瞑
과혁(?革)의 큰 계략이 뭇사람보다 뛰어났는데 ?革雄圖拔出群
어찌하여 벼슬이 중군에 그쳤는가 如何天祿止中軍
분명히 저승에서 우레 같은 공귀(公鬼)되어 分明化作雷公鬼
장한 기운 바람 타서 더러운 티끌 쓸어내리라. 壯氣乘風掃穢芬
慕堂 孫處訥
※ 孫公의 관향은 一直이요 자는 幾道, 호는 慕堂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 임진왜란, 정묘호란 창의(대구).
호수공의 처질, 즉 호군공의 외사촌.
장군께서 대성인 오천에서 태어나서 將軍大姓出烏川
충의의 가풍이 대대로 전해졌네 忠義家風有自傳
힘은 다섯 장정을 지나서 팔방의 길을 놀라게 했고 力邁五丁驚八路
가슴에는 만갑을 간직하여 삼변을 진압했네 胸藏萬甲鎭三邊
정성은 깊게 나라에 보답하여 경영하는 날이며 誠深報國經營日
뜻은 간절히 어버이를 영화롭게 봉양하는 해로다 志切榮親奉養年
사업은 지금같이 끝을 내지 못했으니 事業如今終未了
공을 위한 비통함이 한갓 이것뿐이겠나. 爲公悲痛豈徒然
進士 孫瀣
※ 孫公의 관향은 一直이요 호는 月山. 太學博士. 정묘호란 때 창의. 孫宇男의 子.
곰같은 모습 표범같은 기질로 영걸스러운 대장부라 熊姿豹質丈夫雄
가정에서 모범됨은 오히려 어른의 풍도가 있었도다 家範猶存長者風
기운은 보통보다 뛰어나서 온 세상에 떨쳤으며 氣出尋常跨瀚海
활을 삼백 번 당겨 공동(?? : 전설상의 산)에 기대었네 弓彎三百倚??
신기로운 꾀의 변화는 지금의 제갈량이요 神機變化今諸葛
기묘한 계산이 종횡하니 뒷날의 강태공이네 妙算縱橫後太公
서쪽 성의 요상한 기운 쓸어내지 못하고 西塞妖氣嗟未掃
슬프다 장수별이 옛무덤에 떨어졌네. 將星墜落古塋中
進士 孫沆
※ 孫公의 관향은 一直이요 호는 月峰. 진사. 손해의 동생.
북궐에서 일찍 남쪽 근심 나누었고 北闕曾分南顧憂
천균(3만근)을 들 수 있는 여력(체력)은 만인에서 뛰어났네 千鈞?力萬夫優
영혼과 장한 체백 지금은 어디 있나 英魂壯魄今何在
백암산과 인구에서 옛날에는 놀았는데 栢石寅丘昔日遊
기러기 우는 낙양성의 조각달 밑에는 ??洛城殘月下
학발의 어머님께서 바람머리 저물었네 鶴悲萱草暮風頭
나라를 지킬 사람 이로부터 없어지니 藩邦從此無人守
늙은이 눈물만 하늘 서쪽 나라 위해 흐르네. 老淚天西爲國流
縣監 全三益
※ 全公의 관향은 龍宮이요 증참판 夢龍의 子. 무과. 봉화 현감. 임란 창의. 원종공신. 전삼성의 형.
ㆍ祭文
惟靈
拔山之力蓋世之豪 將期大用玉帳靑油 以靖邊?以衛社稷邦何不幸五丈星落 執?哭奠靈應昭格陶谷 朴宗祐
생각하니 영령께서는
산을 뽑을 수 있는 힘과 세상을 덮을 수 있는 기운이라
장차 크게 쓰임을 기대했고 장수의 장막에 푸른 기백 있어서
변방과 궁궐을 잘 지켜 사직을 호위했네
나라가 어찌 불행하여 별이 오장원(제갈공명이 오장원의 진중에서 사망한 것을 비유)에 떨어졌도다
상여줄을 잡고 곡하여 전드리니 영혼께서는 응당 밝게 이르리라.
도곡 박종우
※ 朴公의 관향은 順天이요 호는 陶谷. 사육신 박팽년의 7세손. 武科 司果. 증 참의 次子 好禮의 장인
惟公
河嶽之精熊豹之略 不世英材有關邦國 天何不?奪我斯速
失此干城人百莫贖 聊斟一觴慟非爲私 魂兮歸來庶幾歆思
生員 綸庵 孫宇男
생각하니 공께서는
황하수와 오악의 정기와 굳세고 거룩한 지략으로
세상에서 드문 영특한 재목으로 나라에 큰 공이 있었는데
하늘이 원하지 않았는데 어찌 우리 공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느냐
이러한 간성을 잃으니 백사람과 바꿀 수 없도다
애오라지 술 한 잔을 드리니 비통함이 사사로움이 아니로다.
혼이여 돌아와서 흠향하기 바라나이다.
생원 윤암 손우남
※ 孫公의 관향은 一直이요 호는 綸庵. 生員. 芝山 曺好益 문인.
嗚呼公之歸其不返乎 公其不復爲斯世事乎 北塞妖塵期將掃之
南海警濤期將靜之 此志未?遽爾奄忽 地下之目那能暝歟
嗚呼咫尺高堂鶴髮如銀 千里圓門隻雁抱寃 執謂今日載?我公
興言至此地塞天昏 一奠菲薄?盡哀情 惟靈不昧庶幾歆止
進士 巷瓢 楊景泗
아, 공께서 가시더니 어찌 돌아오지 않는고
공께서 어찌 다시 이 세상일을 하지 않으려 하느냐
북쪽 변방의 요상한 티끌을 쓸어버리기를 기대했고
남쪽 바다 놀란 파도 고요하게 하기를 기대했더니
이 뜻을 펴지 못하고 갑자기 문득 떠났으니
땅 밑에서 눈인들 어찌 감을 수가 있겠는가
아, 지척의 어머님은 백발이 은빛 같은데
천 리 둥근 문에 짝 잃은 외기러기 원한만 품고 있네
누가 오늘날 그대가 무덤 속에 들어갔다고 하겠나
말이 여기에 이르렀다고 하니 천지가 캄캄하네
비박한 한 잔 술로 어찌 나의 슬픈 정을 다하리오
오직 영혼께서 아시거든 흠향하기 바라도다.
진사 항표 양경사
※ 楊公의 관향은 淸州요 호는 巷瓢. 생원. 대사헌 熙止의 5세손. 문장으로 이름남.
18世
┌ 호의(好義) : 明溪公 ····> 21世 復陽.
├ <호례(好禮)> : 樂山公(海南公), 通訓大夫 海南縣監 ····> 21世 重祿
├ 호신(好信) : 三休公 ····> 21세 重周
└ 李鐵堅(永川人)
好義(1602年 1月 1日~1655年 4月 10日)
○ 字는 子方, 號는 明溪. 曺芝山 好益, 孫慕堂 處訥 門下에서 공부하셨다.
○ 官職 : 蔭職으로 承議郞(정6품). 병자호란(1636년) 倡義.
○ 配位 : 宜人 龍宮全氏(1598年 3月 8日~1661年 2月 26日)로 西岡 全三省의 따님.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石洞에 亭亭亭이 있음.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 주세거지 : 석동, 칠곡, 칠포.
好禮(1604年 1月 7日~1672年 2月 27日)
○ 字는 子立, 號는 樂山.
○ 伯父 宜藩의 후로 양자드시다.
○ 官職 : 武科, 通訓大夫(정3품 당하관) 海南縣監.
○ 配位 : 淑人 順天朴氏(1604年 8月 22日~1662年 6月 17日)로 司果 宗祐의 따님.
七代祖는 死六臣인 參判 彭年. 繼配(?), 繼配 慶州崔氏(1640年 11月 8日~1702年 3月 19日)는 通政大夫 山龍의 따님.
○ 墓所 : 永川市 紫陽面 聖谷洞 騎龍山 夏節. (계배 두 분은 영천시 임고면 선원)
○ 墓祀日 : 陽曆 4月 셋째 日曜日.
○ 병자호란(1636년)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에 어가를 호위하셨다.
○ 주세거지 : 대전, 선원, 매곡, 대환, 자천, 우항, 벽계.
好信 (선조38年 乙巳 1605年 11月 4日 ~ 인조27年 己丑 1649年 11月 13日, 45歲)
○ 字 : 德基
○ 號 : 三休亭
○ 官職 : 蔭職으로 承訓郞(정6품). 병자호란(1636년) 倡義. 張旅軒, 孫慕堂 門人.
○ 配位 : 宜人 昌寧成氏(선조38年 乙巳 1605年 7月 16日~효종4年 癸巳 1653年 6月 23日)로 察訪 以直의 따님이며, 立의 손녀이고 都事 復齋公 鄭湛의 외손녀.
○ 墓所 : 永川市 古鏡面 草日洞. 쌍분(?右). 묘소 아래 楚谷齋가 있음.
이 묘소는 仲氏 海南公이 정하셨다.
○ 墓祀日 : 陽曆 4月 넷째 日曜日.
○ 영천 鳴山里에서 태어나시고 4세의 어린 나이로 어머니를 사별하고 祖母 一直孫氏의 보육을 받으며 백씨(명계공)를 의지하여 살며 西岡 全三省과 진외숙 慕堂 孫處訥(鄭寒岡의 門人) 문하에서 공부하셨다.
○ 조부 호수공께서 소영하시던 자양 귀미에 터를 잡아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시며 사셨다.
○ 문집 상화집이 있으며 특히 삼휴정 號詩가 유명하다.
○ 三休亭(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75호)과 삼휴종택(74호)은 1974년 영천 자양댐이 건설되어 귀미에서 하절로 이전되었다.
○ 귀미 건너편 인구 뒷산에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양력 1994년 10월 7일 건립)
○ 댐 건설로 인하여 자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나 하절 묘사날과 초일 묘사일에는 전국에서 묘사에 참사하기 위하여 많은 자손들이 모여 과거 우리 조상과 자손들이 누리던 영화를 이야기하며 숭조사상과 족의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있다.
三休亭 號詩
芳辰賞花 花落則休
방신상화 화락즉휴
꽃피는 좋은 때에 꽃을 보고 즐기다가 꽃이지면 다음 꽃필때까지 쉬고
良宵對月 月傾則休
양소대월 월경즉휴
밝고 좋은 밤하늘의 달과 함께 즐기다가 그 달이 기울면 다시 달뜰 때 까지 쉬고
閑中得酒 酒盡則休
한중득주 주진즉휴
한가한 가운데 술을 얻어 즐기다가 그 술이 다되면 다음 술 생길 때 까지 쉬노라
(꽃은 1年이요, 달은 한달이요, 술은 日時 이니라. 그리고 또 花는 性理의 境地요,
月은 生活의 哲學이며 酒는 物理의 本道이니라)
墓碣銘?序
公諱好信字德基姓鄭氏迎日縣人高麗時有諱襲明其鼻祖也以樞密院知奏事事毅宗直言被讒死事在列傳知奏事六世後有版圖判書諱林有二子長曰仁壽圃隱先生之曾祖也次曰仁彦典工判書是公之先系也典工生光厚始仕本朝爲冬官長是生諱瑋司正是生諱文裔生員是生諱從韶與成承旨三問同重試歷天官郞及端廟遜位遂稱疾不求進歷三世有湖?公是公之王父父也諱世雅早中司馬壬辰之難首倡義旅有永慶全捷之功而自?不錄完平李相公元翼聞其賢訪于林下薦爲黃山道察訪後贈兵曹判書考諱守藩龍?衛副護軍?夏山曺氏生員諱希益之女也萬曆乙巳十一月四日生公於永川郡北鳴山里第生而俊邁異凡兒稍長從伯兄明溪公受學于西岡全公三省讀孜孜不少懈長老皆異之始公以父兄命從事科擧旣而?晩不成則曰命也不復應擧從表叔慕堂孫公處訥師事之慕堂卽寒岡鄭先生之門人也得聞其所學淵源自是識見益該于時旅軒張先生來往立巖公亦是往來以質疑問辨嘗得心經一部欣然有得熟讀精思遂爲小說題其後其說曰心者身之主也不操則無以養其性又何以爲修齊治平之本乎操之之要一箇敬而已云公之先庄在紫陽洞湖?公棲隱之地也公愛其山水卜築于洞裏虎溪之上逍遙觴詠以自適名其居曰三休亭平居不治産業惟對案整襟?閱聖賢書由是家益貧或至屢空而不以爲憂遇宗族處鄕黨一主忠信而至於事是非關係處不少沮撓堂堂有不可奪之節鄕人敬服己丑冬有感疾以十一月十三日屬?于正寢享年僅四十五葬于郡東淸景山楚谷辛向之原宜人成氏?于西畔因地形也成氏系出昌寧桃源道察訪諱以直之女也生於乙巳歿於癸巳得年四十九生三男一女長曰時羽副司果次曰時喜季曰時贊女適權熙時羽五男碩玄碩咸碩謙碩升通德郞碩臨進士一女權慶祉時喜二男碩恒碩憲二女鄭奎徵崔南鳳時贊一男碩寬二女崔南衡全尙鼎曾玄以下多不能悉錄公雖隱淪巖壑不自章顯於世而公之從曾孫故?議重器狀公之行詳焉?議公學邃而言文可信而徵玆敢?其所錄?刻于石系以銘曰不汲汲於富貴不戚戚於貧窮其聞陶靖節之風乎忠孝堂構詩禮家傳曰惟湖?公之孫乎景山之?楚谷之窈嗚呼三休處士之墓
冶城 宋履錫 謹撰
묘갈명 병서
공의 휘는 호신(好信)이고 자(字)는 덕기(德基)이며 성은 정씨(鄭氏)이니 영일현(迎日縣) 사람으로 고려때 휘 습명(襲明)이 그 시조로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서 의종(毅宗)을 섬겼는데 바른말을 하다가 참소를 당해서 돌아가시니 그 일이 열전(列傳)에 나타나 있다. 지주사 6세 후에 판도판서(版圖判書)가 있으니 휘는 임(林)으로 두 자제를 낳으니 장남 인수(仁壽)는 포은선생의 증조이며 차남 인언(仁彦)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공의 선계(先系)이다. 그 아랫대 광후(光厚)는 처음 조선조(朝鮮朝)에 벼슬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이며 그 아랫대 휘 위(瑋)는 사정(司正)이고 그 아랫대 휘 문예(文裔)는 생원(生員)이며 그 아랫대 휘 종소(從韶)는 승지(承旨) 성삼문(成三問)과 같이 문과(文科)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천관랑(天官郞 :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단종(端宗)이 위를 물러남에 병을 핑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三대를 지나 호수공(湖?公)이 있으니 이분이 공의 조부이다. 휘는 세아(世雅)이고 일찍 진사(進士)가 되어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영천(永川) 경주(慶州) 양성(兩城)을 회복한 공이 있었으나 스스로 양보해서 기록되지 않았으며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대감이 그 어짊을 듣고 공이 은거한 산골에 찾아와 천거하여 황산도 찰방이 되고 후에 증직이 병조판서(兵曹判書)이다. 부친의 휘는 수번(守藩)으로 용양위 부호군(龍?衛副護軍)이고 모친은 하산조씨(夏山曺氏 : 昌寧曺氏) 생원 희익(希益)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 11월 4일에 영천군 북쪽 명산리(鳴山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걸출하고 뛰어나서 보통 아이들과는 매우 달랐으며 백형 명계공(明溪公 : 好義)을 따라 서강(西岡) 전공(全公) 삼성(三省)에게 수학했는데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른들이 모두 기특하고 특이하게 생각하였다.
처음 공이 부형의 명령으로 과거(科擧)보는데 힘썼으나 조금 지나서 늦도록 이루지 못하니 운명이라 하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고 종표숙(從表叔 : 진외종숙) 모당(慕堂) 손공(孫公) 처눌(處訥)을 스승으로 섬기니 모당은 곧 한강(寒岡) 정구선생(鄭逑先生)의 문인이니 그 배운바 근원을 얻어들으니 이로부터 보고 아는 것이 더욱 넓어졌다. 이때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이 입암(立岩)을 내왕하니 공도 또한 그때 왕래하면서 의심나는 것을 묻고 분변하니 심경(心經) 한부를 얻어 즐겨 익숙하게 읽고 정미롭게 생각하여 드디어 소설(小說)을 지어 그 뒤에 적어서 말하기를『마음이란 것은 몸의 주장이 되니 잡지 않으면 그 성품을 기를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 몸을 닦고 집을 추스르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근본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잡는 긴요함은 한낱 경(敬)일 따름이라.』고 말하고 공의 선고장(先故庄)은 자양(紫陽)동에 있으니 호수공(湖?公)께서 서식(棲息)하고 은거(隱居)하신 땅이라 공이 그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그 동리 호계(虎溪 : 자양 삼귀동 아랫귀미와 인구 앞 시내. 현재는 댐으로 수몰)가에 집을 짓고 시를 지어 읊으면서 마음이 가는대로 유유히 생활하며 그 집을 삼휴정(三休亭)이라 하고 평소에 거처함에 산업은 다스리지는 아니하고 오직 책상을 대하고 옷깃을 가다듬어 성현들의 글을 두루 읽으니 이로부터 가정은 빈궁해져서 여러 번 양식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으나 근심하지 않았으며 종족을 대우함이나 향당에 처신함에는 한결같이 충성과 신의를 주장하며 시비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조금도 의지가 꺾이지 않고 당당하여 감히 빼앗을 수 없는 절개가 있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기축년(1649) 겨울 병으로 11월 13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겨우 45세였다. 군 동쪽 청경산(淸景山) 초곡(楚谷 : 영천시 고경면 草日洞)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하고 의인(宜人) 성씨(成氏)는 서반(오른쪽)에 부장하니 지형(地形) 때문이다. 성씨(成氏)는 관향이 창녕(昌寧)이고 도원도 찰방(桃源道察訪 : 도원도는 오늘날 경기도 개풍군 장단. 휴전선 이북) 휘 이직(以直)의 따님이니 을사년(1605)에 나서 계사년(1653)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四十九세이다. 三남 一녀를 낳았는데 장남 시우(時羽)는 부사과(副司果)이고 차남은 시희(時喜)이며 끝은 시찬(時贊)이고 따님은 권희(權熙)에게 시집갔다. 시우(時羽)는 五남 一녀이니 장남은 석현(碩玄)이고 차남은 석함(碩咸)이며 三남은 석겸(碩謙)이고 四남 석승(碩升)은 통덕랑(通德郞)이며 五남 석림(碩臨)은 진사(進士)이고 딸은 권경지(權慶祉)에게 시집갔다. 시희(時喜)는 二남 二녀이니 男에는 석항(碩恒)과 석헌(碩憲)이며 女는 정규징(鄭奎徵)과 최남봉(崔南鳳)에게 시집갔다. 시찬(時贊)은 一남 二녀인데 남은 석관(碩寬)이고 여는 최남형(崔南衡)과 전상정(全尙鼎)에게 시집갔다. 증손(曾孫) 현손(玄孫)이하는 많아서 기록하지 못하다.
공은 비록 산골에 은둔하여 스스로 세상에 빛나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공의 종증손 고(故) 참의(參議) 중기(重器)가 공의 행장(行狀)을 자세히 하였으니 참의공은 학문이 깊어서 말한 글을 가히 믿고 징험할 수 있어서 이에 감히 기록한 바를 엮어서 비석에 새기게 하고 명(銘)하여 말하기를,
부귀(富貴)에는 서두르지 아니하고 빈궁(貧窮)에는 근심하지 않았으니
그 듣던대로 도연명(陶淵明 : 전원의 유유자적한 은둔생활 비유)의 기풍일진저!
충효당(忠孝堂)을 세웠으며 시례(詩禮)의 가문을 전했으니
생각컨데 호수공(湖?公)의 손자일진저!
청경산(淸景山)의 우뚝함과 초곡(楚谷)의 그윽함이여!
아! 여기가 삼휴처사(三休處士)의 무덤이로다.
야성 송이석 근찬(冶城 宋履錫 謹撰)
※ 宋公의 관향은 冶城이요 호는 南村. 진사.
三 休 公 遺 蹟 碑 文
저 永川땜 南岸의 山기슭 至今은 이미 물속에 잠겼지만 그 地脈은 雲住山의 秀麗한 西峴雄脈이 北으로 용틀임 치며 내리쏜 묏부리가 푸른 벼랑으로 둘러싸인 龜甲같은 山자락에 永之洛陽이라 불리던 古色蒼然한 마을이 있었으니 이가 곧 迎日鄭氏家門의 由緖깊은 世傳之鄕이던 紫陽의 龜尾里로 그 入鄕祖는 仁祖朝 儒學者 三休公 諱 好信이다.
始祖는 高麗 直臣 襲明이요 麗末에 郡南 錢村에 隱居한 判書公 光厚의 後裔로 世宗朝에 郡北 大田里로 옮겨서 그 子與孫 兩代에 文科八及第를 輩出한 敎導公 文裔는 公의 七代祖이다. 高祖 次謹은 宣務郞으로 戊午史禍 때 이곳 紫陽으로 隱入했고 曾祖 允良은 陶山에 修學하여 學薦으로 내린 除授를 不就하고 生鄕 노루목을 魯巷里로 고쳐서 自號를 魯村이라 했으며 明山 金公과 더불어 講道하던 書堂을 紫陽이라 命名한 性理學者였다. 祖 世雅는 곧 湖?先生으로 弱冠에 進士한 後 一生을 學問探究에 바치던中 壬辰倭亂을 當하자 冊을 덮고 일어나서 鄕兵을 모아 永慶兩城을 다시 찾은 永川 義兵將이었으나 功을 辭讓하고 暫時 遺逸薦으로 黃山道 察訪을 다녀온後 紫湖精舍에서 張旅軒 孫慕堂 李蒼石 諸賢을 맞아 學問을 討論하며 餘生을 마치니 後에 贈至兵曹判書하고 剛義라 諡號가 내렸다. 考 護軍公守藩은 武科하여 御書로 榜에오른 將相材였으나 中軍으로 早世하고 ? 夏城曺氏는 生員 希益의 女로 宣祖乙巳에 生公하니 天資가 俊邁하였으나 四歲에 母夫人이 棄世하고 父公도 出仕로 不在家함에 伯兄 明溪公을 따라 일찍부터 全西岡 三省門下에 가서 晝夜로 勤讀하니 모두가 기렸다. 長成하여 從表叔 孫慕堂에 師事하고 張旅軒先生에게도 執贄하여 心經說 等을 이루었다. 그 心境은 언제나 自然을 벗삼아 泉石之間을 逍遙하다가 이 龜尾山水를 絶讚하고 이곳에 집을 지어 考槃之所로 삼아서 優遊自適하며 芳辰賞花타가 花落則休요 良宵對月타가 月傾則休요 閑中得酒타가 酒盡則休라 하여 이 三休로 懸板을 걸어 自號로 삼으니 그 休中에는 動靜의 機가 있어 그 思索은 이미 事物을 超脫한 道의 境地였다.
享年 四十五歲이며 先世蔭으로 承訓郞에 補하였다. 配 昌寧成氏는 察訪以直의 女로 墓는 郡東 楚谷 辛向原에 雙墳이 있다.
그로부터 三百數十年 後孫은 蕃衍하여 이곳 龜尾를 비롯 仁邱 章田 月淵 日見 忠孝 魯巷 梅湖 山底 諸里에 分布되어 詩禮와 文翰으로 代를 이으며 마을마다 글소리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無齋公의 無爲儒名 五懷堂上의 孔懷之懷 四宜堂中의 ?華之樂 月松齋와 忍齋公 父子로부터 縮窩公과 雲西公 雲菴公 三叔姪 그리고 雲潭公과 靖山公 父子에 이어진 生員 進士 雲窩公의 詩名은 東方의 杜甫요 韓末의 都察使 東?公과 丹吾公 兩世는 山南義帥의 盟主로 連다라 殉國하여 地名까지 忠孝로 고쳐졌다.
이와 같은 고장에 一九七四年 봄 댐이 되므로서 故鄕을 잃은 後孫들은 四方으로 흩어져 갔다. 아! 山紫水麗한 先?의 이 樂土가 一朝에 龍宮이 되어 鶴이 놀던 古原에는 갈매기 떼 우지진다. 떠나간 後孫들은 故鄕이 그리울 때마다 이 언덕으로 찾아와서 사라진 옛 모습 그려보며 鄕愁를 달래더니 올 봄 位?에서 遺跡碑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龜尾는 앞으로 人跡이 닿기 어려우므로 그 祖考湖?先生께서 逍遙하던 仁邱 後原에 터를 잡아서 三休亭이 섰던 遺墟를 건너다 볼 수 있게 하고 喜永에게 顯刻辭를 委囑하니 是可敢乎이나 亦不可辭矣라.
이 고장을 지나가는 길손마다 걸음을 멈추고 滄桑의 風浪속에 사라져 버린 史蹟을 追考할 수 있도록 삼가 그 줄거리를 짓고 돌아보니 하염없는 슬픔 옷깃을 적시도다.
蘭生幽谷에는 遺香이 遠播하고 長松高原에는 淸風이 自生이라 떠나간 姓孫들의 다시 찾는 발길 저 日月과 더불어 永遠히 끊지 않으리.
一九九二年 壬申 八月 日
十一世孫 喜永은 삼가 글을 짓고
十二世孫 炳旭은 삼가 글씨를 쓰다.
※ 참고문헌
1. 迎日鄭氏 族譜(1981년간), 2. 湖?先生實記, 3. 臨汀春秋(鄭喜永 찬), 4. 南城齋誌
5. 韓國史(진단학회), 6.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한국정신문화연구원)
7. 國史大事典(학원출판공사), 8. 忠義孝烈誌(택리지간소), 9. 高麗史, 10. 東國通鑑
11. 破閑集, 12. 東文選, 13. 靑丘風雅, 14. 迎日鄭氏文獻錄, 15. 止止堂 詩集(金孟性),
16. ?畢齋 詩集(金宗直), 17. 國朝榜目錄, 18. 樂義齋集(李訥)19. 壬辰戰爭(권오상),
20. 慶州府의 壬辰抗爭史(崔孝軾), 21. 壬辰戰亂史(李烱錫)
첫댓글 좋은 자료를 실었네요!
영일정씨 상계분파도에 11세 파조의 위치가 같아야 하는데 혼선이 되었고. 17세 의번 4형제분의 위치, 우리집세계도의 혼선이 되었으니 고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