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단의 여러 어른들이 열반하시는 것을 보고 깊은 슬픔에 젖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가까이 인연이라도 잘 맺어놓을 걸 하는 후회도 든다. 하지만 다들 평소 법열로 충만해 계셨으므로 오나가나 이 회상에서 함께 불국토를 만드시는 일에 매진하리라고 생각되어 마음 한편의 허전함에 다소 위로가 된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통해 원불교의 생사문제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사실 인생에 있어 죽음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 대종사님이 천도품 1장에서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요훈품 44장에서 "육도와 사생의 세계를 널리 알지 못하면 이는 한 편 세상만 아는 사람"이라고 하신 말씀은 죽음의 문제가 총제적인 삶의 비중과 맞먹고 있음을 알려주고 계신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은 많은 문제와 관련이 있다. 넓게는 현대문명이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몰두하고 집착하여 정열을 쏟아 붇는다. 하지만 이는 단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도피처일뿐 죽음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악순환 위에 세워진 문명이 영속적이라는 환상 속에 자신을 의탁하고 오직 쾌락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인간의 욕망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는 이러한 인간육신의 불멸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과 죽음의 심각한 관계 속에서 원불교는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일반론에 비추어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죽음교육에 관한 일이다. 1960년대 퀴블러 로스나 손더스에 의한 호스피스 운동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수 십년이 지난 오늘날 이제 한국에도 본격적인 죽음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죽음교육의 핵심인 임종학은 그러한 면에서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원불교는 천도법문과 천도품, 생사편 등의 법문이 죽음에 대한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어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보다 면밀한 연구와 이를 바탕으로 한 바람직한 임종론의 정립을 구체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엔 자살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대책도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림대 오진탁 교수를 필두로 많은 국내의 전문가들이 이에 대한 예방작업을 벌이고 있지만 다양한 원인을 가진 자살을 막을 길이 요원해 보인다. 더욱이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은 사회에 하나의 아노미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모방자살인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여 더욱 걱정이 앞선다. 웰빙에 이어 웰다잉에 대한 논의가 이제 사회적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추세에 원불교의 생사관은 대중들로부터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 외에도 성개방의 확대로 인한 낙태문제와 같은 고도의 윤리적인 문제와 전쟁과 같은 반문명적인 대량타살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올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촉발된 안락사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화두다. 이러한 것을 죽음교육의 범주에 넣고 원불교 죽음학의 정립을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본다.
둘째는 장례와 관련된 문제다. 화장은 이미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넘어가 국가가 나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이제 화장은 하나의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사후 유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사자(死者)를 추모하는 형식과 관련해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수목장이 인기를 끌고는 있지만 한국적인 정서에는 아직은 거부감이 있는듯하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향수가 머지많아 자연장에 대한 인기를 끌 것으로 본다. 또한 장례문화는 전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통과의 조화를 어떻게 이루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허례허식의 폐지위에 성립된 원불교의 상장례절차는 이미 주위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장례산업과 관련해 부연한다면, 이미 국내의 여러 학교가 장례관련 학과를 세워 장례산업에 대한 이론 및 실기를 체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국대의 경우도 내년부터는 생사의례학과를 중심으로 장례사 자격제도를 두기로 했다. 실제 교화현장에서 많은 죽음과 만나는 교역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상장례에 대한 교육을 이제는 하나의 과정으로 확립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재가교도들이 죽음에 앞서 모든 절차를 교당에 맡기고 안심입명할 것으로 본다. 또한 이미 가톨릭에서 실시하는 상조모임을 활성화하는 방안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많은 상조회사가 현대적인 상장례를 개발하고 산업화하고 있음에도 눈을 돌려, 바람직한 상장례 문화를 어떻게 선도할 것인가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는 천도 및 사후와 관련된 문제다. 천도에 대한 것은 장례와 결부되지만 그 외에 죽음을 맞이한 영혼을 천도함에 있어 육도윤회라고 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전통적인 불교의 윤회관 위에 원불교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완전한 해탈천도는 육도윤회를 벗어나 다시는 세상에 나지 않는 열반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전한 해탈천도를 바라면서 인도수생하기를 바란다면 무언가 앞뒤가 하나 빠진 듯한 것이 있음을 느끼는 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물론 선연을 만나 다음 생에 성불제중을 이루기 위한 길로서 인도를 말하지만 다양한 한계상황을 지닌 인간의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생사의 자유를 얻어 현실계를 초월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문제는 전통적인 왕생극락이라고 하는 염원을 교법이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력없는 중생을 이끄는 민중지향의 천도설법을 개발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 사후 문제는 보다 넓고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사후생에 대한 연구는 윤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후문제를 대중에게 어떻게 납득시키고 자연스러운 이치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대중교화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영원불멸한 영혼의 문제는 이생이 다가 아니고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으로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중요한 관념이다. 기독교 문화에 바탕한 서구문명이 직선적인 역사관을 통해 생의 끝을 말한다면 영원한 생을 통해 문명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순환적인 역사전개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불교학은 물론 역사, 철학, 종교학과 같은 여러 인문학과의 깊은 교감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모든 문제는 죽음의 철학자 장켈레비치가 말한 제1, 2, 3인칭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경험할 수 없는 나의 죽음인 제1인칭의 죽음은 임종관의 정립에 달려있지만, 너의 죽음과 그의 죽음인 제2, 제3인칭의 죽음은 그 외 모든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후자인 제2, 3인칭의 죽음의 문화를 제1인칭인 나의 죽음으로 보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 원불교 죽음학을 정립하는데 함께 힘을 모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