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1. 북한 특수부대 출신인 일부 탈북자들이 5.18 광주민주화 항쟁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하였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풍경2. 합천군에서 군수의 주도로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공원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풍경3. 태권V의 이후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만화 <V>에서 5.18에 대한 묘사가 나오자,
모 신문의 기자는 ‘태권V가 운동권이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라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 풍경4. 정부는 5.18 진압에 대한 무공훈장에 박탈을 결정하였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대부분은 훈장을 반납 안 하고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 27주년, 6월 민주 항쟁 2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5.18이 폭동이라는 매도를 벗고 국가의 공식적인 기념일이 된지도 오래지만,
아직도 그 날을 모욕하지 못해 안달 난 인간들이 존재한다.
사실 외국에도 네오 나치니, 스킨헤드니, KKK니 하는 미치광이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도 학살행위를 오히려 예찬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할 건 없다.
진짜 이상한 것은 외국에서 그런 인간들은 보통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그런 작자들이 정통 보수 행세를 하고 다녀도 먹혀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보수인 ‘척’하고 다니는 것뿐이지, 절대 보수가 아니다.
보수고 진보고 싸워도 일단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싸우는 것이다.
즉 일단 민주주의를 인정해야 기본적인 보수의 요건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를 짓밟던 자들을 미화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던 분들을 모욕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보수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지들이 민주 수호 세력이라고 우기고 다니니, 기가 막힌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가짜 보수 세력들이 5.18을 모욕할 때 하는 말들의 허구성을 조금이라도 살펴보고자 한다.
착시현상: 얼핏 보면 사람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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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5.18 희생자들은 가장 많은 사인은 무엇일까?
5.18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대담 내용을 실은 <한국논단> 11월호에서,
그 잡지를 발행하는 이도형 한 말 중 하나에 이런 게 있다.
▲이도형 : 그 광주사태 직후에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내가 잘 아는 장군으로 광주지구 계엄사령부 참모였던 사람인데
희생자들 屍身彈痕(시신탄흔) 조사를 했어요.
1백68구인가 그랬는데 그 당시 국군은 모두 M16을 갖고 있었거든요. 칼빈이나 M1은 그때 국군에게 없었어요.
그런데 탄흔 조사를 하니까 약 3분의 2가 칼빈에 맞아죽었더래요.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소위 봉기군 시민군 그 사람들의 총격에 맞아 죽은 것을 의미한단 말입니다.
자기들 끼리 쏘아죽인 것이란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것은 전후맥락을 다시 따져 봐야 되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북한이 광주에 커밋트(commit)했다는 사실이지요.
그 계엄사 참모라는 분이 누구신지는 몰라서 출처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씨 말로는 그렇다.
이걸 봤는지 5.18 관련 기사에 달리는 덧글에도 “당시 죽은 사람 중에
카빈에 맞아 죽은 사람이 제일 많은 건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역시 출처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의 덧글들도 달리곤 한다.
이 말들을 바꾸어 말하면, M16으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다면
그건 계엄군의 만행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럼 당시 희생자들을 가장 많이 죽인 총은 M16인가, 카빈인가?
여기서 필자는 확인 가능한 출처로 이 사실을 따져 보겠다.
1996년 <신동아> 1월호는 5.18 항쟁 직후「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라는 제목으로
광주 지방검찰청이 작성한 문서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부검을 담당한
황적준 교수의 자문을 받아 보도하였다.
5.18 직후 정부기관이 작성한 문서인 만큼, 5.18 희생자들에게 유리한 왜곡은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럼 이 내용 중 일부를 보자.
검찰이 작성한 이 자료에 의하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165명 중 카빈으로 사망이 26명, 어느 나라 산수에서 이게 3분의 2라고 가르치고 있나?
사망자 중 가장 많은 숫자는 M16에 의한 총상이며,
그 밖에 당시 남아있는 사진이나 영상자료 등에서 나오는 곤봉이나 개머리판에 의한 구타를 보면
총상 이외의 사망자들도 대부분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카빈에 의한 사망자가 가장 많다는 소리는 헛소리에 불과함이 증명되었다.
최근 자료도 아니고 11년 전에 나온 자료인데도, 철없는 네티즌은 그렇다 쳐도 잡지 발행인이라는 자가
카빈 사망이 3분의 2라고 지껄이고 있다니, 산수를 다시 배울 것을 권하고 싶다.
---▶ a89 주) 지만원은 칼빈에의한 사망이 70%라고 했다지요 (지만원이 올린 글 있음)
여기서 그래도 카빈에 의한 사망이 26명이니
이 사람들의 죽음에는 다른 음모가 있지 않겠냐는 사람도 있을까 싶어 이 점도 짚고 넘어가겠다.
그 때 <신동아>에서는 담양에 거주하다가 교도소에서 날아온 계엄군의 초안에 맞아 돌아가신 분들의 사인도
‘카빈 총상’이라고 기록된 점, 그리고 역시 카빈에 맞아 죽은 걸로 기록된 또 다른 희생자도
대검에 의한 자상이 잇다는 점을 들어 카빈에 의한 사망이 맞는 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 a89 주) 칼빈에는 대검결합이 불가능, M16소총에 대검결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M16에 의한 사망도 마찬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M16과 대검, 개머리판 등 계엄군에 의한 사망이 가장 많다는 사실은 광주시민은 물론
계엄군 출신으로 그 당시를 참회한 분들의 증언이나
독일 기자 힌츠페터, 미국 침례교 목사 아놀드 페터슨 등
당시 광주에 있던 외국인들이 남긴 자료나 증언과도 부합하므로
정확한 사인에는 오류가 있어도 계엄군에 의한 사망이 가장 많다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시민군은 왜 광주 교도소로 향하였는가?
5.18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기자회견에서도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교도소를 습격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폭동이 맞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말이 맞다고 맞장구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럼 시민군들이 광주 교도소를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광주교도소 홈페이지에 있는 약도다. 이걸 살펴보자.
교도소 옆에 있는 길이 담양 방면이라고 친절히 가르쳐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 시민군이 교도소로 향한 이유가 있다.
당시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봉쇄당하여 외부로부터 고립 당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시민군들은 그 고립을 풀기 위하여 외부로 나가고자 하였다.
담양 역시 시민군들이 나가려던 곳 이었기에 시민군들을 담양으로 향하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목에 교도소가 있었고,
교도소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담양으로 가려던 시민군들을 공격하였다.
정리하자면, 단지 담양으로 나가는 길에 교도소가 있었을 뿐이지
처음부터 시민군들은 교도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과정들은 싹 무시해버리니 ‘시민군은 교도소로 갔다.
그러니까 폭도 맞다.’라는 단순무식한 논리가 탄생한 것이다.
참 어이없는 주장이다.
셋째, 5.18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을까?
1980년이 정치적 격변기였던 만큼 북한이 새 정권에 대한 정보수집차원에서라도 공작원들을
예년보다 더 많이 침투시켰다거나 5.18이 일어나자 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는 일 같은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북한에 갑자기 쿠데타라도 일어나면 우리 군도 경계를 강화하고
대통령은 긴급국가안전보장회의라도 소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하였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과연 이 주장이 믿을만 할까?
그렇다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우선 그 당사자의 주장이 통일되지 않는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으로 이 주장을 주도한 탈북자 임천용은 <한국논단>에서는 450명을 주장하다가
기자회견에서는 600명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가서 그 내용을 요약한 지만원의 글을 보면 어찌된 일인지 700명이라고 돼 있다.
이들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거 같지만 미국의 인터넷 교포신문이라고 하는 홈피에서는
2개 대대 2천 명설을 얘기하고 있다.
-- a89주) <한국논단> 2006년 11월호 (임천용 인터뷰) --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되었다
-- a89주) 2006.12.20. 북한군인연합 임천용 기자회견 -- 북한군 특수부대 투입되었다
-- a89주) <한국논단> 2007.3월호에 임천용의 반박글 게제 --
도대체 몇 명이 침투했는지부터 통일이 안 된다.
그리고 <한국논단>에서는 3분의 2가 미귀환인데,
기자회견에서는 3분의 2가 귀환이다. 뭐가 계속 달라진다.
기자회견 기준으로 6백 명이라고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있다.
이 기자회견에서 3백명은 남포항에서 배수량 1천 톤의 트롤선을 타고 침투하였으며,
이들을 마중 나온 배가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3백 명은 동해안 잠수함 기지에서 출발하여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중 4백 명이 서해를 통해 남포로, 70여 명은 휴전선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그 특수부대원 중 한 명만 생포, 아니 시체만 확보해도 5.18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고
확실히 못 박을 수 있는데 전혀 그러지 못 했다.
그러니까 3백 명이 한꺼번에 해상침투하고 4백 명이 빠져나가는 데도
당시 한국군은 이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 했다는 소리다.
그것도 1969년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이후 후방 게릴라전에 대한 역량도 강화되고
계엄 중인데도 말이다.
당시 군이 엄청나게 무능했거나 군 수뇌부에 간첩이 있었거나,
이 주장 자체가 날조라는 소리다.
이 주장이 빈약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증거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북한과 접촉해도 알기 어려울, 어디 초대소에 있는 기록 같은 것들뿐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은 북한에서는 대부분 아는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5,6공 당시의 탈북자 중에도 이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고,
프리존뉴스가 인터뷰 다른 북한 특수부대 출신인 이덕남에 대한 인터뷰에서
5.18에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을 묻는 질문에 아는 바 없다고 답한 사실을 봐도
북한 사람들은 다들 안다는 말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시민군들이 들던 피켓 중에는 ‘김일성은 오판마라’라는 것도 있었다.
이 사실은 심지어 갑제옹 마저도 2005년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사실이며,
갑제옹은 여기에 덧붙여 그러니 북한이 조정했다는 주장은 잘못됐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 볼 때 5.18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라는 주장은,
주장이 아니라 매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아직 이런 매도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래서 일해공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공원도 생기고 말았다.
이제 며칠 있으면 5.18이다.
그리고 뒤이어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다. 5.18을 다룬 영화도 올 여름 개봉예정이며,
강풀 원작 만화 <26년>도 영화화가 추진 중 이다. 한 쪽에서는 518을 기념하고 기리는 분위기이지만
한쪽에서는 모욕하는 분위기이다.
부디 전자의 분위기가 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
절대 그 날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 날을 모욕하는 인간들은 잊혀지기를 소망한다.
2005년 5월, 김평용의 묘 앞에 놓인 종이학.
김평용은 5.18 당시 17세, 고등학교 2학년이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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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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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칼럼] 5월 광주를 모욕하지 마라 --- 황적준 출처를 찾다가 발견 했습니다 --- 1996년 <신동아> 1월호는 5.18 항쟁 직후「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라는 제목으로 광주 지방검찰청이 작성한 문서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부검을 담당한 황적준 교수의 자문을 받아 보도하였다
잘 보았습니다. 80년 5.18당시의 모습을 북한이 생중계했다는 소리도 하고 있습니다. 생방송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장비가 필요한데... 유언비어도 너무 터무니 없으니까 전혀 믿음이 가지를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