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미관01
I. 정체성
1. 우리 미술
1984년, 장인경은 전시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한국의 광목이나 기저귀를 내 그림에서 쓰고 있다. 한국 역사에서 광목은 삶과 죽음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 한국의 광목은 날마다 일용에, 또는 종교적 목적이나 전통 장례의식에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광목에 먹으로 그림을 그린다. 나는 그 자연적인 촉감과 상징적인 느낌을 좋아한다. 그것은 나를 나의 조국으로 데려다주고, 젖먹이처럼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만들어주며, 한국무당처럼 신들린 춤으로 나를 이끌어 준다.”
로스 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교포화가들의 고향을 향한 마음이 이 글에 담겨 있다.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한, 세계의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성을 갈지는 않는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 여우가 죽을 때는 자기 굴쪽으로 머리를 둔다 하던가. 세계에서 가장 귀향본능이 강하다는 한국인이 창조하는 미술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미술이 세계미술의 큰 흐름이기 위해 어떠한 것이 필요할 것인가. 먼저 세계화라는 말이 떠오른다.
한국 미술의 세계화, 그 가능성은 작가와 작가군의 의식이 세계화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의식은 자신의 확고한 작품 세계, 투철한 제작 의지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먼저 작품에 얼마만큼 심도를 부여할 수 있는가, 작가의 의도와 작품에 쏟는 집념이 어떤 형태와 감동으로 보는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시의성, 역사성, 조형성에서 볼 때 조형성과 아울러 보는 사람에게 공감을 유발할 수 있는 이른바 전달성의 문제였다.
한 작가가 예술의 세계에서 설정할 수 있는 많은 방향이 있다. 시의성時宜性, 역사성歷史性, 조형성造形性은 일반적으로 작가들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되는 방향들이다.
시의성이란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과 호흡을 이끌어 나가느냐 그 흐름 속에 휩쓸리고 파묻히느냐를 따진다. 역사성이란 미술사의 문맥에 변화와 개혁 혹은 계승과 진보의 업적을 남겼느냐를 본다. 조형성이란 시의성과 역사성을 관통하는 심미적 성취를 의미한다. 따로 분리하였으되 이들이 별개인 것은 아니다. 함께 섞여 나아가되 어느 쪽이 비교적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 이러한 요소들이다.
시의성-역사성-조형성을 만족한다는 작가 개인의 지적 충만감과 예술적 갈망을 바탕으로 하는 제작의지를 딛고 정체성이 자리한다. 쉬운 이야기로 이 땅에 태어나 이 문화에서 사춘기의 감수성을 형성했으며 이 사회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환원한다면 그것이 바로 정체성이 아닌가 한다.
사실 그렇다.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어디 석굴암이나 하회탈춤처럼 정형화한 것 뿐이겠는가. 아리랑의 구절을 듣고 가슴이 뭉클한 것도 한국적 감수성이요,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푸대접 받는다는 사실에 역정이 나는 것도 한국적 감수성에 바탕한 정체성이다.
문제는 미술에서 어떠한 정체성으로 나타나느냐, 또는 나타나야 하는냐 하는 것이다. 세계 무대에 나서기에 우리의 세대는 충분히 성숙했는가. 우리의 문화권은 독자적이면서도 주도적인 정신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가.
작가들은 고민한다. 걸려 넘어진다. 세계에 내어 보일 수 있는 우리의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걸림돌이다. 작가들을 좌절케 하는 이 화두는 의외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보인다. 젊은 혈기는 한국의 피끓는 작가들을 세계로 몰아세운다. 뉴욕에서, 파리에서 그들은 좌절을 거듭한다. 불행의 시작이다. 크게는 한국을 멀리하고 작게는 전공을 포기한다.
이 비극이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심약한 화가들의 탓인가. 교육의 탓인가. 아니면 서발 장대 휘둘러 거치적거릴 것 없었던 가난한 우리의 국력의 탓인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정체성의 부재에서 온다. 우리의 문화적 잠재력과 원형에 대한 신념의 부재, 우리의 문화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심어 왔던 지정학적인 요인 등이 이러한 정체성의 부재를 불러온다. 그러나 정체성 부재라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무관심이다.
서구에서 한국을 아는 평론가들은 한국미술이 서구미술과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한국을 버리고서 얻은 보편성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들 서구인들 역시 회의적이다. 심지어는 동양의 회화에 반대하려는 노력과 부정하려는 시도들 때문에 혼동스럽다고 불평까지 한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충고를 곁들인다. 개성을 통한 보편성을 획득하라고-. 그리고 그 개성이란 전통에서 나온다고-.
그래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숲에 비유한다. 숲을 불태운 도깨비는 갈 곳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숲을 불태운 도깨비는 다른 숲 도깨비들의 텃세속에서 불태운 숲을 통탄하게 될 것이다. 전통이란 거기에서 시작하여 거기에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자연이다. 또한 무진장한 소재와 영감을 담고 있으며 꺼내도 꺼내도 비지않는 화수분과 같은 것이다.
왜 그런 사실을 일찍 깨닫지 못할까. 왜 이 땅의 도깨비들은 자기 숲을 태우지 못해 안달했을까. 그리고 그 당연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꼭히 불태운 숲을 떠나 이국정서의 현장과 제도와 공기속에 떠돌며 확인하게 될지라면 그것은 얼마나 비싼 낭비일 것인가...
작가적 아이덴티티
작가로서의 성취, 하나의 이즘을 위한 의지,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어떤 것인가, 우리에게 중국이나 일본, 미국이나 유럽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한국미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미술을 말할 때 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디자인이라는 순서를 매겨준다. 그만큼 동양화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 동양화를 한국화로 부르자는 운동이 이제는 정착된 느낌이다.
우리가 말하는 동양화란 일본이 만들어낸 말이다. 식민치하의 미술을 말하면서 조선미술-대만미술을 인정할 수 없기에 중국미술까지 은근 슬쩍 끼워 넣어 동양화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림의 원형이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한가. 이름만 바꾼다고 정체성이 살아날 것인가. 동양화라는 이름 아래서 한국화를 구분하기도 힘든 상황이 아닌가.
중국화는 확실한 분야라 할만하다. 아예 수묵화나 문인화-산수화 등이 중국화의 종속개념이 되어 있다. 일본화는 나름대로의 변별력을 획득하고 있다. 우끼요 에浮世畵나 에도 판화 등은 서구사회에서도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미술은 중국 미술사의 말미에 한국 그림 두어 개를 끼어 넣고서 동양화로 분류된다. 해외에서 발간되는 동양미술사의 집필순서는 언제나 중국-일본-그리고 한국이다. 홧김에 동양미술학자들에게 전화해서 푸짐하게 욕이나 해줄까? 그러지 않는 것이 만번 좋다. 아예 그들은 계륵鷄肋, 즉 버리기는 아깝고 먹을 것은 없는 닭 갈비같은 한국미술을 동양미술에서 빼 버리고 말 것이다.
서양화나 조각의 분야는 더욱 심하다. 한국화라 부르는 그림은 그래도 동양화라는 이름으로 큰 줄기는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제작한 서양화나 조각은 그만한 자리도 없다. 굳이 비집고 들어가자면 제3국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유럽이나 미국의 분류기준이 아니다. 제3국이란 세계미술의 주류라는 콘텍스트에서 비춰보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한참 떨어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양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를테면 유럽에서 떨어진 유럽과 서아시아와 미국에서 떨어진 중남미-남미 등의 예술이 그러하다.
우리가 남미나 서남아시아의 미술품을 보면서 저급하게 느끼는 것과 같은 시각과 이유로 서구사회는 우리의 미술에 차등을 두어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간극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외부에서 본 시각만이 아니다. 나아가 미국인이 회화painting & drawing라고 부를 때 한국인은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작가들이 먼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 예술적 세계나 심미안이나 철학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분류와 범주에 따른 정체성의 문제라고 할만하다.
이런 원초적인 제약의 위에서 작가들은 어떠한 작업을 하더라도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딜렘마에 빠진다. 이미 재료와 기법과 세계와 사상은 ‘노루친 막대 삼년 울거먹기’ 라고 진액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이다.
나아가 우리가 서양화와 조각을 한다면 그것은 서양의 흉내, 동양화를 한다면 중국이나 일본의 흉내밖에 되지 않는다는 배부른 고민도 있을 수 있다. 그럼 어떻허란 말인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아니, 길이 있다. 우리의 내면에 그 해법이 있다.
자생적 미술이라는 말을 쓴다. 그것은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이 감수성의 이름으로 시각화한 미술의 양상을 일컫는 말이다. 손쉬운 예로 원형과 전통을 다루는 작가들의 경우라면 자생적 미술의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평면으로, 입체로, 나아가 행위나 설치 등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한국의 미술에서 자생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시각이다. 어떠한 시각에서 우리의 것을 보느냐 하는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 소재를 도입하는 것이다.
하미혜는 전통을 그린다. 목안木雁과 곡옥曲玉과 태환太環 혹은 세환細環의 귀걸이 등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장신구 혹은 의례용품 등은 하미혜에게 따지고 보면 손때를 묻힌 화면과 다를 바 없다. 조상이 손때를 묻힌 것을 자신의 손때가 묻은 조형으로 만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것이었는가.
Yahoo! JAPAN
李朝時代 木造 木雁 奠雁 朝鮮民芸 婚礼品 祭器 キロギ ①
¥1,000 JPY*· In stock
商品サイズ・状態 サイズ(約cm):20 時代の汚れや傷みがあります。 お支払いについて かんたん決済 発送詳細 仕事の都合で発送地が変わる場合がありますので 一律¥1500円とさせていただきます。 (送料の値引きはご遠慮下さい。) 同梱発送は可能ですが、商品の性質によりお断りする場合もあります。 ...
목안은 기러기를 본 따 만든 것이다. 한나라 소무가 흉노에 잡혀갔을 때 기러기의 발에 편지를 묶어 소식을 전했다 하여 믿음을 뜻하고 암수가 동고동락한다 하여 부부금슬의 상징이었다. 곡옥은 시베리아 수렵민족이 부적으로 사용했던 멧돼지의 이빨을 모방하여 옥으로 만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연화문이나 동심원 등의 문양은 중국이거나 인도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하미혜는 중국이나 시베리아의 유품을 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과연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서 우리의 것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논리라면 사실 우리의 것이란 없다. 마찬가지 논리로 본다면 동양화는 중국의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그 소재들은 우리 한민족이 중국의 상고시대와 신 시베리아 문화권-알타이어족의 깊은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유품들이다. 마찬가지로 귀걸이 등의 장신구에서 보이는 도상과 상징은 우리의 문화, 그 중에서도 상고시절 신화의 발상과 발원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우리의 것이며 그것도 우리에서 비롯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가장 편리한 척도는 편리함이다.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을 다시 궁구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왜 중국의 것으로 알려진 전통적인 물건이나 문양 등이 우리에게 편하게 느껴질까. 그것을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라 불리는 미술이 위세를 떨친 때가 있었다. 1960년대에 자리를 굳히고 70년대를 거쳐 80-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미술의 굳건한 흐름으로 군림해왔던 미술의 한 양상이었다. 서구적 개념으로는 작가나 관중, 혹은 작가와 관중이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서 일정기간의 프로세스process 즉 경과의 양상을 보여주는 형식의 미술이라고 정의된다.
미니멀 미학을 이어받은 설치미술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은 관중이다. 관중이 참여할 때 작품은 완성된다고 까지 의미를 외연한다. 그러나 외관상의 입체적 모습에도 불구하고 설치미술은 발생과 전개에 있어서 다분히 회화적인 양상을 띤다. 즉,
화면에 부착되거나 화면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대상의 주장력이 극대화한 공간 혹은 환경에서 최종적으로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마무리되는 분위기를 자연발생적으로 펼쳐보이는 형태의 미술
이라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설치미술이란 회화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미술의 양상이다. 애당초 화면 위에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봤자 실물을 붙이는 것만큼 그 실물을 재현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진다. 그것이 마치 조각처럼 온통 전시장과 야외를 장악했다.
조각 역시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장악했다. 당연히 장르나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질 법도 한데 그런 투쟁이나 자리다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조각이 관대했거나 회화가 무관심했거나 한 시대를 풍미하기에 족한 미술의 양상이었다.
Usa ART newS
A Massive Wooden Wave Surges From a Gallery Floor in an ...
그 설치미술이 한국에서는 전형적인 정의보다 다른 각도에서 정의된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1990년에 「동방으로부터의 제안」 도쿄전의 세미나에서 나는 그 점을 아키타입으로 정의했다.
“5천년 농업국가의 아키타입과 신화를 배경으로 성숙되어지는 원형Archetype 지향적인 미술”
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설치미술은 “신화와 아키타입에서 바탕하는 민족적 체취의 자기주장력이 공간과 환경에서 극대화하는 형태의 미술” 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아키타입은 원형原型이라고 번역된다.
신화와 아키타입
신화는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에서 중심개념이었다. 문명의 관습에는 원시적이거나 원초적인 부호 시스템이 집단무의식의 과정을 통해 읽고 쓸 수 있는 구조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것을 운반하는 수단이 신화라는 주장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해와 달을 해님-달님이라 한다. 왜 님일까. 해놈-달년이라고 하면 동티라도 날까 두려운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신화시대 태양신과 태음신의 신화적 위력이 우리의 뇌리에 원형의 형태로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과 사회적 관습화한 행태는 우리의 마음속에 개방회로적인, 즉 입출이 가능한 형태로 부호화하여 저장되어 있다. 그것이 신화라는 이름의 묵계, 또는 논리적으로 분류가 가능한 개념의 성격으로 인간의 환경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Ancient Origins
The Legendary Founder of Korea, Dangun Wanggeom | Ancient Origins
다시 예를 들자면 하느님이라는 것이 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의 가사를 쓴 사람은 그 하느님이 결코 땅밑이나 바다 속에 있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 신화를 보자. 신화란 국적이 없는 공감대이다. 신화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게 하는 동인이 바로 집단무의식이다. 그것은 전통과 관습, 국민성이나 민족성 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인류의 마음에 바탕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마샬 맥루한이 지칭했던 지구촌이라는 말보다는 우주촌이라는 이름아래 논의되어야할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신화에 담겨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너무 범위가 넓지 아니한가. 어떻게 방향을 지워 추구할 것인가. 원심적인 방향, 구심적인 방향이 먼저 떠오른다.
우리의 것을 세계화하는 것이 원심적이라면 인류의 신화라는 그릇에서 시작하여 우리에게로 수렴하는 것을 구심적이라 할 수 있다. 말을 달리하여 한민족의 아키타입적인 행태와 정신의 원류를 문화사적 시각에서 모색-검증하여 보편적인 시각언어화하는 것을 원심적인 방향이라 한다면 인류공통의 의식을 담은 신화나 의례-집단무의식 등의 관점에서 비롯하여 민족과 작가 자신에로 귀착되는 방향이라면 구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원심적인 방향이 되어 세계로 펼칠 수 있는 소재라면 우리의 전통과 혈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전되는 신명-신바람 등의 체질적 요소와 두레-품앗이 등의 공동체 의식-벽사나 기복 등의 의례-신화나 전설 등의 집단무의식-한 철학 등의 추체험적 요소의 시각적 현현 및 세계화를 위한 노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구심적인 것이라면 샤머니즘-토테미즘 등 인류공통의 원시 신앙이나-의사고고학적-의사인류학적-종교적 접근과 추구의 시각화를 통한 민족적 검증과 수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반되는 방향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소를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방향이다.
이렇게 호환성있는 두개의 방향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물론 객관화한 주관의 주체인 작가이다. 작가에게 원심적이거나 구심적인 것은 확실한 방향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원심적이거나 비교적 구심적이지만 그것조차도 경향성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70퍼센트의 원심력을 보여준다고 하면 30퍼센트는 구심적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융통성있는 접근방식이 필요한 것이지만 시각적 구조물에 인류 공통의 부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시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 신화는 초월적 대상성을 가진 자족적인 오브제이다. 말을 바꾸자면 신화는 초자연적-비논리적 개념의 세계 속에 깃들이면서도 일상의 상식 및 논리와 공존할 수 있으되 나름대로의 언어구조와 완결된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신화의 범주와 개념이 인류라는 중심점을 향한 구심적-원심적 방향의 작품에서도 적용되려면,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체질적-체험적 완성에서 비롯될 필요가 있다.
신화와 신화의 주체를 알면 세상이 보이고 자신이 보이는 것이다. 좀더 넓은 시각에서 미술을 보면 거기에 우리의 원형이 보인다. 그리고 원형에서 바라보는 시각에는 장르의 구분이 없다. 서양화-동양화-조각 등의 장르는 나타난 양상을 기준으로 미술사라는 콘텍스트를 적용시켜 분류한 것이다. 원형은 표상과 분류 이전의 개념이다.
2. 중국의 국체
한국의 서양화가 일본의 영향권을 벗어나는데 무려 1세기가 걸렸다. 물론 일본에서 배운 화가들이 선전과 국전을 통해 세력을 떨쳤고 국립현대미술관 등 소장품의 대세인 만큼 영향력이 전혀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반세기 전의 일본풍 서양화는 미술관이나 도록-혹은 회고전 등에서 옛 영화를 반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세대교체는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동양화라는 이름의 그림의 운명은 좀 더 비극적이다. 우리의 원형이라는 각도에서 일단 한국화-혹은 동양화라는 그림에서 접근해 들어가 보자.
한국의 동양화라는 의미에서 한국화라는 말을 쓴다. 한국화라는 말은 한국의 작가들이 만든 말이다. 단지 일본이 만든 동양화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쓸 수 없다는 단순한 반발심리였을 것이다. 그만큼 설득력있는 명칭은 아니었다. 이즘을 이야기하는 것도, 정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국인이 그리니까 한국화라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 미술전람회를 만들면서 동양화라는 말을 썼으니 그 말 대신 한국화를 쓰면 일제 잔재를 몰아내는 일이라는 단순 논리에서 비롯한다. 부질없는 일이다.
오늘날 서구인의 시각에서 보아 한국화와 동양화는 구별되기 힘든다. 한국인인들 동양화와 한국화를 구분할수 있을까. 사실 미술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이라도 어떤 범주를 설정할 수 없을 만큼 그 개념은 모호한 바 있다. 또한 그만큼 이념이나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단순한 지정학적인 분류개념이 한국화였다.
그러니 중국과 일본의 미술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서구의 학자들조차도 한국의 미술은 도대체 구분할 수 없다고 힘들여 고백한다. 그럴 때 양식과 명칭은 의미가 없다. 정체성 Identity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서구의 미술 사가들은 중국의 화원 제도와 화풍을 받아들인 중국풍의 한국 미술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지정학적인 불가피함에서 온다.
한림도화원은 중국의 궁정에서 화원을 양성하고 그림을 관리하던 곳이다. 당나라 때 시작되어 오대의 후촉과 남당에서 제도화되었다. 북송에 이르러 진종 때 관직이 확정되고 승진이 보장되었다. 휘종의 화원개혁으로 화원의 처우가 확립되고 원체화의 범본이 만들어졌다. 세계에 알려져 있는 중국화란 이 원체화를 말함이다.
한국은 신라의 전채서典彩署-고려의 한림도화원-화국畵局 등을 거쳐 조선에 이르러 도화서가 되었다.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땄다. 그리하여 한림도화원의 제도 뿐 아니라 중국인들의 기질에서 만들어진 원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블로그 - 네이버
조선시대 도화서와 화원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이를테면 조선의 도화서에서는 임금의 어용御容즉 초상화와 풍경화-삽화-도자기 그림-능원도陵園途 등을 그리고 고서화를 모사한다고 했다. 이 모든 활동들이 중국이라는 범본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것이 궁정의 법도요, 왕공귀족의 취향이었다.
한가지 예외가 있었다. 세화가 그것이다. 정월초하루에 대문에 붙이는 호랑이 그림이나 문배그림-단오부채에 그리는 금강산 그림 등은 도화서의 화원이나 화공이 그렸음에도 규제받지 않았다. 그래서 민화라고 부르지만 여태까지 정통 한국화의 입장에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동양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구인의 눈에 한국의 그림과 중국의 그림이 구분이 될까. 그러고 보면 중국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세계가 바라보는 중국의 그늘에서 사는 우리에게 중국이란 수양산 그늘 정도라는 것이다.
수양산 그늘에 강동 팔백리를 갈망정 우리는 수양산의 고사리 한 줄기 캐먹지 않았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수양산 주민이라고 부르면 화가 나지 않겠는가. 솔직한 말씀으로 중국의 고사리는 질기고 맛없는 것이 영양가도 없는 중국의 문화를 닮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본다. 중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제는 조심스레 중국이라는 허상과 그림자를 헤칠 때가 되었다. 허상이라는 것은 실제의 모습이 없다는 말이다.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먼저 중국이라는 무대를 생각하자. 목청 큰 놈이 대장이고 눌러 앉으면 주인이었다. 데릴사위라는 말도 있다. 장가오는 놈마다 땅을 붙여주곤 떠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토록 거대한 나라가 되었다. 그 데릴사위들이 누구인가. 중국인이 오랑캐라 불렀던 신시베리아 문화권의 몽골계 알타이어족이었다.
알타이와 한국
몽골인종은 2만 5천년에서 일만년 전쯤 시베리아에서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몽골반점-광대뼈-아래로 처진 윗눈거풀 등이 시베리아의 격렬한 추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중에서 우리가 속한 것은 새 시베리아족Neo-Siberians이다. 핀Finns-사모에즈Samoyeds-몽골Mongols-투르크Turks-퉁구스Tungus 등이 있다. 이들은 우랄 알타이어족의 교착어-모음조화-공통 조어祖語의 특징을 공유한다. 곰 숭배-샤머니즘 등의 동일한 원시신앙을 갖고 있다.
박시인은 알타이어족의 계보를 이렇게 정리한다.
퉁구스 어족
만주· 한국 어족, 일본 어족
몽고· 티베트· 중앙아시아의 몽고어족
알타이어족 아쿠우트 어족
중앙아시아, 타탈 어족 터키 어족
우랄 어족 헝가리 어족
핀 어족
이들이 만든 문화가 화이론, 즉 황하문명론을 위협하고 있다. 황하를 중심으로 화하족의 선진문명이 주변의 미개지역으로 파급되었다는 주장에 강력한 반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요녕이나 산동에서 황하문명보다 이르거나 비슷한 시기에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중국문명이라는 텍스트는 주변문화라 불리는 원전을 번안한 모자이크 문화라는 표현도 가능해진다. 그 모자이크에서 형상을 담당한 종족이 넓은 의미에서 알타이어족이었다. 그럼 배경은 누가 맡았을까.
제 1기는 선진시대이다. 진나라 통일 이전의 상고시대였다.
Nature
The lineages of the first humans to reach northeastern Siberia and ...
왕신은 산동-소북-안휘-강회의 중간지역과 회북-예동-요동반도 남부 등 이른바 동북지구는 기후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했으며 하상주 시대에 대체적으로 이인夷人의 영역이었다고 “동이문화와 회의문화연구”에서 적고 있다.
제2기는 진 한으로부터 남북조까지를 이른다. 화하족이라는 큰 흐름 속에 흉노-선비-갈-강 등의 종족이 흡수되어 수 당시대의 화하족은 거대 종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도 중국인이라는 뚜렷한 의식은 없었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말보다는 종족이 어울린다.
제3기는 수 당으로부터 원말까지 거란 여진 몽고 등이 융합하여 명대의 중국인을 형성한다.
제4기는 만주가 중국 국경으로 편입되면서 많은 소수종족이 중국화한다.
이러한 시대구분의 중요한 분기점은 소수종족의 융합이었고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바 중국문명의 저력이었다. 이를테면 아시아포럼 2005에서 전 중국 문화부장관이었던 왕몽王蒙은 ‘한족을 주체로 한 중국의 문화는 그 유구한 역사 속에서 외부의 간섭없이 고유하고 찬란한 고대문명을 창조하면서 국내의 소수민족들과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 대해 거대한 친화력과 흡인력을 과시했다’ 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국내의 소수민족과 주변국을 친화하고 흡인하지 못하였다면 찬란한 고대문명이 창조되지 않았으리라는 가정도 가능할 것이다.
비유컨데 중국이란 하나의 호수이다. 작은 물이 모여 호수를 이룬다. 그러나 고인물은 썩게 마련이다. 가끔 큰물이 호수의 썩은 물을 교체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민족의 찬탈이바로 그 큰 물에 해당된다. 몽고족에 의한 원나라-만주족에 의한 청나라 등은 대표적 큰물이다. 호수의 비유는 중국인의 국민성에 대한 비유이다.
화하족은 근본적으로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합리적인 민족이다. 그 민족의 풍토에서 종교철학이나 문화예술이 싹튼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들은 현세적이다. 중국인 역시 그 점을 통감한다.
장태염은 ‘중국 국민의 습성은 일용적인 일을 살피고 농공상에 힘쓴다. 그 뜻은 삶에서 다하고 말은 실증할 수 없으면 하지 않는다’ 라 했다. 그래서 이 말을 인용한 하신은 ‘중국인은 철학상 추상적인 사변을 아주 좋아하지 않는 민족이다. 신화는 민족 의식의 창조물이어서 당연히 민족문화와 사유 유형의 기본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고 말한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중국문화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속이 보인다. 중국이 세계화의 초석을 다졌다고 자랑하는 불교는 인도에서 수입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중국의 신화는 누가 만들었더란 말인가.
다시 비유하자면 호수가 썩지 않게 하는 것은 호수의 생성 이전부터 줄곧 호수에 유입되어온 상수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수원에 알타이어족-신시베리아 문화권-그리고 동이족이 있었다.
중국문명과 동이
동이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형성 이전부터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그 신선함이 오늘날 중국이라는 큰 호수의 상수원이라는 말이다. 박시인은 춘추전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움직인 종족이 알타이어족의 동이라 적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동이의 후손들이 최소한 오천년 이상 동이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왜 동이가 우리의 선조인가. 우리도 동쪽 오랑캐라 부르지 않는가. 상수운桑秀云이 쓴 “동이와 조선과의 관계東夷與朝鮮的關系”에서는 그 구체적인 논증자료가 실려 있다.
먼저 인용한 것이 일본학자 팔목상삼랑八木狀三郎의 구동이舊東夷와 신동이新東夷라는 분류기준이다. 구동이는 진나라 이전에 산동-강소 안휘 등 회수와 연해주일대에 살던 이족이다.
진한 이후에 구동이는 화하족에 동화되었고 만주-조선-일본-유구 등의 이족을 동이라 불렀는데 일러 신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pub조선
우리를 오랑캐의 후손으로 가르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조선pub(조선 ...
이러한 편이적인 분류 이전에 구이九夷가 있었다. 즉 황이黃夷-우이于夷,방이方夷-폐이吠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의 자료에 의하면 하나라와 상나라 때 구이가 방문하거나 구이를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후한서에는 구이가 하나라에 예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 상과 구이는 다른 종족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종족구분이란 오늘날 행정구역 정도의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풍속통의에 기록된 구이를 보더라도 오늘날 경기도 강원도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풍속통의에는 현도玄菟-낙랑樂浪-고려高驪-만식滿飾-부경鳧更-색가索家-동도東屠-왜인倭人-천비天鄙를 구이라 했던 것이다.
죽서기년에는 구이에는 속하지 않지만 회이淮夷와 남이藍夷가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구이란 동이를 말한다. 동쪽에 사는 이족이라 할 때는 동이라 불렀고, 종족의 숫자를 말할 때는 아홉 이족이라, 구이라 했다는 것이다.
지역은 회수와 사수의 중간-황하지류와 조선서북의 요동반도-산동과 강소 안휘 등 연해주일대 등으로 학자들마다 견해가 약간 다르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화하족에 의한 중국이라는 개념 이전에 중국을 움직인 종족이 구이였으니까. 이런 기록은 많다.
일주서逸周書 제공편祭公篇에는 주위에 이인들이 많으니 바로 상나라의 무리들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서경의 주서周書에는 주임금에게 억조의 이인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이 구이 즉 동이가 우리와 어떤 관계인가를 살펴보자. 상수운은 하 상 주에 이르는 화하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이를 가리킨다.
동이는 하 상 주를 지나면 진한시대에 이르러 해외로 이주한다. 그 중에 조선으로 들어간 동이가 오늘날 한국인의 선조가 되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난생설화와 상백尙白-편두偏頭이다.
난생설화는 태양신화와 같다. 상백이란 흰 것을 숭상한다는 말이다. 태양의 색을 희게 본 것이다. 태양을 누렇게 본 것은 황사 속의 중국인이었다. 편두는 납작머리를 말한다. 일부러 머리를 납작하게 만드는 풍속이다.
최근에 산동 강소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지와 묘지에서 편두가 발견되었다. 용산문화와 대문구문화의 정자애 유지에도 두골인공변형의 습속이 있었다. 산동곡부에서 발견된 서하의 유지에서 남여 각10구의 두개골이 나왔다.
그 중에 남자는 5개가, 여자는 10개 모두 일부러 눌러 변형한 자국이 발견된 것이다. 동이의 습속은 조선에서도 관찰된다. 마한-진한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돌로 눌러 머리를 납작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서도 습속이 전해졌었다.
왕신王迅은 대문구문화, 용산문화와 북신北辛문화를 이룬 종족은 하상주 시대 동이인의 조상이라고 밝히고 있다. 태호족과 소호족은 이 지역에서 흥기한 동이족이라 했다. 태호족은 태양을, 대문구문화를 주도했던 소호족은 봉황을 토템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문구문화는 화하족의 문화와 뚜렷이 구분된다고 적고 있다. 손진기는 동북지역의 석붕문화와 요동지방의 청동단검문화가 모두 동이문화라 했다.
왕신과 상수운, 그리고 손진기의 주장은 관례적으로 중국인과 동이족을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중국인인가.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동이족과 화하족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하물며 동이와 회이로 나누어 앙소-용산-대문구 문화는 동이-악석-두계태-이리두 문화는 회이의 문화로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의미를 찾으려면 이러한 문화가 하 상 주에 이르는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일 것이다.
동이족에 의한 문화의 원류라는 관점은 오늘날 한국의 뜻 있는 학자들에 의해 천착되고 있기는 하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경원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5천년 한국의 역사는 바로 불신과 왜곡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이족에 의한 중국 역사의 원형은 중국학자들의 견해에서 찾아내야만 하게 되었다. 북경이나 대만의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동이관계 자료는 엄청나다. 오늘날 중국의 학자들은 동이를 편견없이 본다.
애써 찾아낸 동이 관계 논문과 자료를 한국 학자에게 아무 조건없이 넘겨준다. 그 자료들이란 때로 중국문화와 문명의 정체성까지 건드릴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자료는 십중팔구 사장된다. 왜곡과 불신의 역사의 악순환이다. 악순환의 역사는 이러하다.
사마천과 공자가 동이의 신화와 역사를 왜곡했다. 반도의 사대주의자들이 역사를 찌그러트렸다. 일본의 식민사관이 비틀었다. 반식민사관을 표방한 민족사관이 그나마 민중의 가슴 속에 전해 내려온 피의 약속을 짓밟았다. 남은 것은 좁디 좁은 땅덩어리에 영문모를 상징과 해독할 수 없는 신화 뿐이다.
최초로 화하족이 동이족의 역사를 왜곡했다. 사마천은 고대에서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130권의 사기를 쓰면서 엄청난 분량의 서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 책들에는 분명히 동이의 신화와 원형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사기는 제왕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술한 책이다. 기전체라는 중국인의 실리적이고 실제적인 기술 양식으로 동이족의 신화를 다룰 수가 없었으리라는 추측이다. 공자는 괴력 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 했다. 현실 속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유교의 교리에서 신화와 전설은 괴이한 것이었고 태양신이나 천상계는 어지러운 신들의 세계였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공자가 동이족이라 한다. 이유는 그가 뜻을 펴지 못하자 ‘구이에 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동이족이라는 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종족개념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나라에 동이족의 신화와 역사가 만연했다는 증거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실제 공자가 편찬했다고 하는 삼경, 즉 시경 서경은 동이가 가장 활발히 움직였던 하 상 주 시대의 역사와 철학과 제의이다.
시경은 하 상 주의 민요와 시가이며 서경은 그 역사이며 주역은 치수 신화에서 비롯한다. 하도 낙서가 주역의 원전이다. 낙서는 홍범구주와 팔괘의 중심 사상이 된다. 그 신화와 전설 시대가 동이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화에 강륜문자도가 있다.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라 봉건농경시대의 소박한 윤리를 그림으로 그린 일종의 계몽용 시청각교재이다. 중국의 영향권 아래 만들어진 것이라 거의 대부분 중국의 소재가 등장한다. 소재 몇몇을 점검해보자.
예禮자 그림에는 낙서洛書와 서책을 등에 멘 거북이가 등장한다. 하도 낙서는 우임금 치수때 낙수에서 발견된 거북의 등에 그려졌다는 도상이다. 홍범구주의 기원이 되었다 한다. 구주는 기자가 무왕의 물음에 대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가지의 대법을 말한다.
제弟자 그림에는 시경 소아 상체편의 척령鶺鴒 즉 할미새와 상체, 즉 산앵두나무가 그려진다. 할미새는 걸어갈 때 꼬리를 흔들고, 날아갈 때 운다. 형제가 급할 때 서로 구한다는 의미가 있다.
산앵두나무는 꽃받침이 함께 모여 환하게 핀다. 역시 형제 우의가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등장하는 소재가 심상챦다. 조선시대의 민화에 등장하는 소재에 왜 중국인들도 동이의 세계라고 분류하는 상고시대의 신화와 시가의 내용이 들어 있을까? 그런 의문은 오늘날 한국작가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황학만은 나비와 칼을 그렸다. 나비와 칼은 파도치는 바다 위의 하늘에 떠있다. 그 칼은 상고시대의 청동 검이다. 청동의 검은 실용보다 제의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칼이다. 물론 상고시대 제의의 대상은 하늘이고 하느님이었다.
그 역사의 흔적과 기원의 원형을 황학만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역사의 흔적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보여진다. 동검이나 신구 神龜등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낡은 빗장, 연기에 그을린 나무, 세월에 의해 마멸된 나무조각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왜 20세기 한국의 작가가 그런 소재에서 신비와 힘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을까?
두 번째 반도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역사는 축소되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물론이거니와 삼국유사의 일연조차 중국의 역사를 기초로 해서 삼국의 역사를 기술했다. 이미 중국에서 기득권을 기정 사실화하였던 영토와 역사와 원형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6세기 위서에까지 수록되었던 우리의 역사지만 그나마 단군신화 주몽신화 등의 신화라도 건질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관행은 고려사나 조선왕조 실록에서도 철저히 추수되었다. 대국 중국이라는 절대 지상의 과제에서 한국은 재해석되었다.
세 번째로 일본에 의해 한국의 역사는 왜곡 은폐 축소되었다. 삼국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반도에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들은 그들의 신천지에서 대부분 반도의 치욕스런 기억을 지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일본서기에는 반도의 영향이나 반도와의 연관이 철저히 배제된 사실이나 신화가 수록된다. 때로 그것은 일본의 자생적인 문화 문물로 왜곡되거나 한국의 중심적인 역할은 축소되었다.
왜곡 은폐 축소의 역사 속에서 반도는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들어내어 세계에 노출시킨 20세기 중반까지 은폐된 나라였다. 그것을 좋은 말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 라 했을 것이다.
일제 36년은 결코 36년으로 끝나는 단발성 지배가 아니었다. 상고 시대 도래인의 역사에서부터 은폐와 왜곡과 축소로 일관해 온 그리고 호시탐탐 반도 침탈을 일삼아 온 그들의 반도에 대한 모든 사상은 식민사관이란 말로 요약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뿌리 없고 줏대 없고 자립의 능력이 없는 한민족을 일본의 지배에 두어야 한다는 대의 명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의 합리화를 위해 그들은 한국의 역사를 단군신화에서 시작하고 있다. 식민사관에서 단군신화는 허구의 역사였다.
하늘에 사는 신이 아들을 내려보내 곰과 교접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후손이라니 그것이 인간이겠는가. 식민사관은 그렇게 시작된다.
식민사관은 다시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으로 연결된다고 했다. 기자는 중국인이다. 그래서 반도는 애당초 중국의 속국으로 운명 지워졌다 했다. 이어 한사군을 펼친다. 최초의 식민 정치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식민지로 만든들 그것이 무슨 치욕이겠는가 하는 것이 역시 식민사관이었다.
기자는 은나라 탕왕, 즉 무왕이 조선왕으로 봉했다고 했다. 또 은나라가 쇠퇴하자 조선으로 가서 백성에게 예의 전잠田蠶 직작織作을 가르쳤다고도 했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기자는 은말 주초의 제후였다.
상나라가 영토를 확장하자 압박감을 느낀 황이가 해외로 진출할 때 경쟁적으로 조선에 이주했다는 것이다. 황이는 오늘날 서해를 황해로 부르게 했을만큼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던 이족으로서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간 고구려인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어떠한 형태건 기자가 중국식민지의 총독쯤으로 생각될만한 구절은 없다. 오히려 문맥에 따라서는 은나라의 제후가 은나라와 같은 종족이 살고 있는 땅으로 가서 조직적으로 통치를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
손진기는 중국의 상주시대BC. 11세기에 요동지방에 살던 동이가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말한다. 상의 귀족이었던 기자가 조선을 세웠다는 것은 이러한 이주의 사실을 역사서에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식민사관에서는 이어 비교적 자상하게 고구려의 역사가 기술된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으로 왜곡한 광개토왕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반도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조작이 그것이다.
신라의 역사는 그나마 신라 천년에 이어 고려 조선을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상도의 세력이 유지되어 오는 바람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는 삼국 중 가장 형편없는 나라로 묘사되었다. 아예 흔적도 없이 말살된 문화였다.
중국 대륙이 백제의 무대였다거나 백제의 문화가 일본 문화의 뿌리라는 사실은 섬나라 일본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것이다.
그 백제의 비극은 ‘의자왕의 오류’ 로 집약된다. 의자왕은 해동 증자라 불릴 만큼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신라의 미후성 당항성 등 요지를 공략한 용맹한 왕이고 고구려와 화친을 도모하는 등 지모가 뛰어난 왕이기도 했다. 말년에 성충 등의 충간을 듣지 않더니 이윽고 패망했다.
의자왕의 오류는 기본적으로 패망한 마지막 왕에 대한 비난이 극도로 과장되어 있다. 그 과장은 한마디로 ‘삼천 궁녀’ 로 집약된다. 삼천 궁녀라, 삼천 명의 여자를 말한다. 의자왕이 하루에 한 여자를 데리고 잔다고 칠 때 첫날밤의 여자는 10년 후에 다시 왕과 동침하게 된다.
의자왕의 삼천 궁녀는 의자왕이 황음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아 멸망했다는 이야기를 우화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다. 후세의 집권자들은 이전의 집권자들의 실정과 하늘의 뜻을 저바린 패덕을 빌미삼아 하늘의 대의 명분을 찾아낸다. 그것이 식민사관에서 찾아낸 역사 왜곡의 단순 논리였다.
그래서 고려는 불교에 의해 망했고 조선은 당쟁에 의해 망했다고 식민사관은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 조선의 ‘짚신’ 들은 종교로도 구제할 수 없고 학문이나 정치로도 가르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민족으로 낙인찍었다.
그리하여 임나일본부를 통해 이미 식민의 경력이 있는 일본이, 중국에 이미 종주국의 예를 바치고 있는 종의 나라 반도를 병합하는 것이 어찌 죄가 될 것이며 어찌 그들에게 수치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식민사관이었다.
그 식민사관이 오늘날 우리 역사관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후유증은 반식민사관이라는 새로운 식민사관에 의해 오늘날까지 민족폄하의 동인이 되고 있다.
이른바 반식민사관은 식민사관의 범주에서 시작한다. 반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존재인 단군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중국에 사대의 예를 바치다가 일본의 지배에 들었다는 사관이 식민사관이라면 단군에서 시작하되 중국의 통치를 받은 일이 없으며 중국을 섬기는체 했다 하더라도 민족정기는 살아 있었고, 임나일본부는 일본의 조작이므로 식민통치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류의 항변이 반식민사관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의 체념적 역사관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식민사관이 설정한 테두리를 벗어나 우리의 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몇몇 역사학파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다. 피가 끓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7천이 넘는다는 전쟁을 겪으면서도 한국은 자의건 타의건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범해 본 일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요, 국민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국가와 민족이 반도라는 이유만으로 대륙과 섬나라 사이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울분에 이어 이번에는 이 나라 안에서도 대륙에 남겨진 선조의 발자취를 찾겠다는 의식적인 흐름이 그토록 철저히 차단되었는가 하는 울분이 피를 끓게 하는 것이다.
광장(廣場) - 티스토리
동이(東夷)
그러나 우리는 그 울분의 역사를 차분히 광정할 수 있는 민족이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단일민족에 의한 단일 문화를 오천년 이상 간직한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 역사와 신화와 원형으로 돌아가서 우리 민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짐작되려니와 한국의 역사는 동이족의 역사에서 비롯한다. 넓게 말하자면 그것이 중국 역사의 기원이고 원형이며 동양 정신의 본체이다.
동이족라는 말을 오늘날의 민족개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예를 들면 사기 주본기에는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치하하러 왔다고 했다. 그럼 숙신은 동이가 아니던가. 이 때의 동이는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간 종족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같은 동이라 하더라도 구이가 되기도 하고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 어려울 때 통칭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을 지탱하고 있는 한족, 혹은 화하족華夏族에 의한 중국이 전 중국 역사의 모든 것은 아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에서 보듯 우둔하리만큼 둔중한 엉덩이의 무게이다. 우공이 자손 대대로 산을 파헤쳐 길을 만들자니 기겁을 한 지신地神이 산을 옮겼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의 중화, 그 나머지는 주변의 종족들에 의해 유도되었던 것이 중국의 역사였다. 주변의 종족들이란 선비 저 갈 강이나 거란 여진 몽고 등이다. 근대에는 일본 제국이 만주족이라 불렀던 민족이 중국으로 포용되었다.
이들 주변 종족들은 신 시베리아 문화권, 혹은 알타이 문화권에 속한다. 인종학적으로 몽고족이다.
넓게 보아 동이족은 기원전 2만 5천년에서 1만년 경 형성된 몽골족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북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 오늘날 한민족의 조선祖先이다. 그 다음 중원을 거쳐 산동반도로 들어온 몽골족이 동이족이라 불린다.
동이족은 중국서부를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하던 화하족에 밀려 오늘의 한반도로 들어온다. 반도를 선점한 몽골족과 합세한다. 그리하여 형성된 것이 한민족이다. 오늘의 한국인이다.
여기서 먼저 반도를 선점한 것은 알타이에서 스키타이 문화로 연결되는 문화로 볼 수 있다. 앝타이 문화의 흔적은 알렉산드로폴의 황금보관-예니세이의 샤먼의 관-신라와 고구려의 왕관으로 연결된다.
장승의 문화 역시 알타이 문화를 따라 이 땅에 내려왔다. 알타이 문화는 유럽의 터키와 스칸디나비아반도-아랍-인도-중국-시베리아는 물론이고 베링해를 건너 북남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파급된 문화였다.
또 하나 오늘날 한국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인도 동남아를 통해 들어온 이른바 해양문화이다. 죽세공과 목면 등의 문물은 때로 일본과 중국을 통해 가공된 형태로 이 땅에 들어왔을망정 그 원류는 인도와 동남아에 있다.
김병모는 지석묘가 남방 아시아에서 기원하여 북상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발해연안에 이르고 동북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었다는 것이다.
그 세 개의 문화 중에서 특히 동이를 지목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문화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미술에서 동이의 문화는 그 어느 문화의 틀보다 접근적으로 그 본질과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 중국문화의 시발이요, 동양의 사상-철학-예술의 모든 정신이 동이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II. 동이세계
1. 동이의 정신
화하족의 조상숭배에 대하여 동이와 회이는 자연신을 제사지냈다. 그것이 왕신이 말하는 팔신八神이다.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사시주四時主가 그것이다. 천지 일월 음양 사시 그리고 병兵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양이었다.
조류숭배
알타이 신화는 칼-닭-태양으로 연결된다. -- 사상의 변천이다. 모두 하느님 사상과 통한다. 구석기시대 희생을 제사지내던 칼이 숭배되었다. 혹은 곰이라기도 한다. 신석기 시대에는 신으로 바뀐다. 철기시대에는 하느님으로 불리게 된다. 그 하느님이란 하늘에 있는 절대자이다. 태양 혹은 태양신이 되기도 한다.
은 곰이다. 곰은 곰熊이다. 환웅의 웅雄과 같은 발음이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환웅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를 거짓 취하여 환검 즉 단군 왕검을 낳았다 했다. 그 곰이다. 상고 시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곰 사상이 신화화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환웅이 세운 선진 배달국이 곰을 토템으로 모시는 원시 부족의 웅녀를 신부를 맞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견강부회 적인 감이 없지 않다.
곰은 곰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아이들이 곰 인형을 안고 자는 것도 이 곰 사상이 원형일 것이다. 박시인이 만든???도표를 보면 아이누와 신무-단군-우-아르카스의 곰에 대한 신격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Ainu 神武化熊出爪 檀君 禹 Arcas
天- kamui熊 金鷄 桓熊天帝子 祝融羽山 Zeus天神
河- 寡婦 化熊 熊熊女 鯀化爲黃熊 Kalisto熊女
그러나 곰 검으로 일체화하는 검 사상은 다른 각도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검은 칼을 의미한다. 생사여탈권을 뜻한다. 제사장이 왕이었던 제정 일체의 시대에 사람을 죽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검의 권능이었다.
은 구석기시대의 권위였다. 은 신석기시대의 권위였다. 은 닭이자 새이다. 새를 숭배하는 것은 동아시아 특히 시베리아 문화권의 공통 습속이었다. 새는 의지하는 바 없이 하늘을 난다. 태양도 하늘을 난다. 그래서 태양새였다. 태양숭배사상이 조류숭배사상과 같은 이유이다.
그 닭은 동이족의 신화에서 옥계-금계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옥계는 옥의 새이다. 고대에는 옥玉=왕王이었다. 그러니까 왕새였다. 금계는 금의 새이다. 금은 알타이어로 알Alta-Altan을 의미한다.
금 자체가 누런 색의 황금-그 황금빛 나는 태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은 또한 알 태양알-우주알을 의미한다. 그래서 옥계나 금계는 바로 태양이자 우주의 새임을 알 수 있다.
태양은 삼족오三足烏이다. 세발까마귀이다. 남자의 권위이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진입한 증좌다. 까만 새는 설을 낳았다. 은나라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현조玄鳥 즉 까만 새의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 했기 때문이다.
Three-legged bird
Three-legged bird: Three-legged bird/ sundial(三足烏는 해시계)
까만 새는 까만 솥과 일체화한다. 솥은 양쪽에 들기 좋도록 귀가 달려 있다. 아래에서 불을 때면 까매진다. 그래서 까만 귀를 가진 솥-그것은 제물을 삶는 솥이였다. 상나라의 솥은 삼족정三足鼎이라 했다.
제물을 선택하는 것은 제사장이었다. 태양신의 제사에는 희생을 바쳤다. 죄수나 포로일 수도 있었지만 잉카나 마야 등의 예를 보면 경기의 우승자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까만 귀의 솥-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까마귀는 생사여탈권을 지닌 제사장의 권위이다. 그렇게 까만 귀는 까마귀가 되어 태양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세발이었을까.
그리고 삼라만상이라는 말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듯이 3은 세계를 의미한다. 노자는 도덕경 하편 12장에서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이라 하였다. 풀이하자면 도는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온다. 둘에서 셋이 나오나니 그 셋에서 만물이 비롯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길만하다. 왜 도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지 않고 셋으로 만물의 시원을 삼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알고 보면 음양사상의 원형으로서 노자의 곡신 사상과 대를 이루는 개념이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_’ 을 직역하자면 ‘곡신은 죽지 않으니 그것을 현빈이라 하며 현빈의 문은 천하의 뿌리이다’ 가 된다. 다시 곡신은 골짜기처럼 생긴 암컷인데 까만 문은 천하의 뿌리가 된다 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것은 손쉽게 자궁이라는 개념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 곡신의 속성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대하는 개념이 3이라 했다. 그렇다면 3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남자를 의미한다.
수렵시대를 지나 목축시대와 농경시대로 넘어오면서 모계사회는 부계사회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를 왕중부王仲孚는 “대우와 하나라 초기의 전설의 해석을 시도한 글”에서 순임금과 우임금의 사이로 보고 있다.
요임금부터 순임금 이전에는 부계가 밝혀지지 않은 채 감천感天하여 태어났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순임금과 우임금은 아버지가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임금의 하나라는 17왕 중에서 2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계상속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우씨가 도산에서 제후를 모았을 때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 조회했다는 기사로 보아 단군조선에서도 부계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렵시대만 하더라도 공동수렵을 위해 필요한 구성원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자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목축에 의한 정착생활과 노동집약적인 농업에서 여성의 생리 및 출산은 남성의 전천후 노동력을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가족제도는 여성의 노동력 대신 노동력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에 훨씬 큰 효용을 두었고 혈연의 순수성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남자와 동등하거나 우월한 지위를 박탈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남자처럼 생긴 여자 혹은 남자보다 힘이 세거나 억센 여자의 인위도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오늘날의 여성상일 것이다.
굳이 지적하자면 많은 사람이 성욕을 느낄만한 요소를 보다 많이 가진 여성이 출산을 위해 노역과 위험에서 격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혈통의 보존과 여자로서의 행복이라는 명목아래 여자의 운신 폭을 좁혀 설정되었던 사회규범에 적응하였던 세월이 오늘날의 여성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자의 남과 여는 이러한 문화적 성징에 대한 고대 동양인의 관념을 잘 보여준다. 즉 여 女는 임신을 한 모습-남 男은 밭에서 힘써 일하는 모습을 상형한 것이다. 상고시대에 이러한 관념은 실질적인 의례로 전해져 오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씨앗을 뿌리고서 밤중에 남자가 벌거벗은 채 밭을 가는 흉내를 낸다는 류의 의례가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 3이라는 숫자를 다시 떠올려 보자. 3이 세발 달린 남자를 의미한다는 것이 매우 쉽게 연상되지 않는가?
그것이 단군신화에서 왕검이라는 남성이 조선을 건국한 내역이며 단군이라는 이름의 제사장이 남성인 이유이다.
오늘날 한국의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소재 중의 하나가 새요, 삼족오이다.
이지연은 새를 그린다. 새는 인류의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고대문화사를 보면 새가 상징하는 것은 우주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가 알의 모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어니와 그것은 곧장 우주알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당연히 우주알을 만든 우주새의 존재가 원형적인 것으로 숭배되었다. 우주새는 다시 새끼를 까고 그 새끼들은 우주의 공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태양은 상고 아시아에서 새로 표상 되었다. 즉 세개의 발을 가진 까마귀, 즉 삼족오가 바로 그것이다.
동국세시기에 가정마다 새해에 세화를 붙인다 했다. 닭-호랑이-용을 그렸다. 형초세시기에는 초하루날 닭을 그려 문에 붙인다고도 했다. 닭의 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는 새해의 첫 유일을 닭의 날로 정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닭의 그림이 그려진 계이鷄彝는 종묘제사 때 강신 즉 신이 내릴 때 쓰는 술잔이다.
닭은 확대 해석하면 새가 된다. 난생설화로도 연결된다. 활에 새털을 달고 화살에 명적鳴鏑을 붙이는 풍습, 그리고 샤만의 옷에 쓰이는 새 날개모양의 장식, 금관총 관모의 새 날개 장식 등 역시 새 숭배사상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금관의 새는 샤만의 창조주인 독수리 즉 토존Aiy Tojon의 모습에서 온 것이라고 김열규는 “동북아 맥락 속의 한국신화”라는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새 중의 새는 우주새이다. 동이식으로 풀이하자면 봉황이다. 산해경의 남차산경에는 봉황이 있어 태평성대에 나타난다고 했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멸몽조-광조-명조-맹조-난조 등 모두 봉황과 같은 신격을 가지고 있다.
닭 같은데 오색의 무늬가 있다. 머리의 무늬는 덕을-날개의 무늬는 의를-등의 무늬는 예를-가슴의 무늬는 인을-배의 무늬는 신을 나타낸다고 했다. 그런 새가 어디 있을까. 최소한 생물학적인 새는 아니라는 단서가 여기에 있다.
봉황은 원래 황이었다. 후세에 암컷은 봉-수컷은 황으로 고착되었다. 黃=光=滉=皇=凰으로 연결된다. 햇빛의 본색은 황색이며 해가 운행하는 길은 황도라 한다. 왕중의 왕은 황제이다. 금문에서의 황자는 태양이 비치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했다.
太陽=太陽새=黃帝=太昊라는 지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태양이 나타나지 않으면 세상에 재앙과 흉년이 든다. 태양이 있는 세상이 태평성대이다. 또 봉황이 나르면 뭇새가 따라 나른다 했다. 아침에 태양이 솟으면 모든 새들이 이슬 내린 나뭇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래서 봉황은 태양이라 한다. 그것은 동쪽 나라에서 떠오른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이의 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전설의 새이다. 우리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봉황은 그러므로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그림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조류숭배사상은 신 시베리아 문화권의 공통소였다. 신 시베리아 문화권은 알타이 문명에서 비롯한다. 시베리아와 요녕을 거쳐 한반도로 건너온 북방문화는 알타이문명-신 시베리아 문화의 지류인 것이다.
그 중에서 동이족은 신 시베리아 문화권의 종주국이며 그 정통적인 흐름은 배달국 조선 등의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민족의 자랑스런 유산이기도 하다.
진서 숙신전에는 새와 관련된 혼속婚俗이 보인다. 손진기는 장차 가취할 때면 남자는 깃털을 여자의 머리에 꽂아주고 여자가 화답을 하면 데리고 돌아온다고 했다. 그런 연후에 예식을 올리고 초빙을 한다는 것이다.
새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은 것으로 옛 사람들은 생각했다. 천상의 영혼과 육신의 세계를 내왕하는 영적인 존재로 생각되기도 했다.
새가 태양과 같이 생각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알이다. 난생설화는 태양신화와 같다. 은상의 시조 강림의 신화가 고구려-백제-신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은의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은 제비의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
원래 현조玄鳥라 했는데 중국인이 제비라 고쳤다. 제비의 알은 태양을 의미한다. 우임금의 어머니 수기修己는 의이薏苡 혹은 신주神珠라는 구슬을 삼키고 우임금을 낳았다고 했다. 모두 태양을 뜻한다.
동이의 나라 중 하나인 서나라 언왕의 궁녀가 낳은 알은 신라 시조들의 난생설화와 같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다. 석탈해의 어머니는 왜국의 동북 일천리에 있는 나라에서 칠년만에 알을 낳았다.
바다에 띄었더니 금관국 김해에 닿았다. 김알지는 시림의 나무에 걸린 금궤에서 나왔는데 아래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닭 역시 태양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까치는 까마귀와 같다. 역시 태양의 의미를 가진다.
나아가 해부루-수로-청태조 애친각라에 이르기까지 난생설화의 계통은 요연한 바 있다. 가락국기에 서술된 바로는 수로왕을 위시한 6가야의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알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다시 박시인의 책에서 ??? 도표를 인용하자.
脫解 首露 朱蒙 金蛙 天契
天 神鵲集啼 天繩天垂 解慕嗽天帝子 解夫婁解慕嗽子 玄鳥墜卵
河 赤龍 龜旨峰褉浴 柳花熊女 大石相對流淚鯤淵 簡狄行浴
金閼智 赫居世 東明王 愛親覺羅淸太祖
紫雲垂地金櫃 電光垂地紫卵 天氣鷄子 神鵲墜界
白鷄始林 白馬羅井 索離侍妃呑卵有娠 彿古倫行路
알이 태양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 것은 알타이 문화의 공통소였다. 몽고어에서 금金은 알타Alta 또는 알탄Altan-양陽을 아라야Arya라고 발음한다. 금빛-혹은 볕이 태양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증거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울주 반구대에 새겨진 동심원이나 경주 미추왕릉의 155호 고분에서 나온 달걀은 분명히 태양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나아가 남미에서 발견되는 푸에르토 알터Puerto Alto라는 지명, 은나라의 갑골문의 새사람 등 역시 알타이 어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태양숭배
태양신太陽神 숭배崇拜는 알타이 문화권의 공통소였다. 신강新疆의 나포뇨이羅布淖爾신석기 묘지墓地에서 발견된 태양신太陽神 상징의 말뚝-사천四川 공현珙縣의 암각화에서는 십자형 태양과 다른 양식의 태양이 그려진 것이 그러한 예이다.
만리장성 북쪽을 점거했던 흉노-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던 인디언의 태양신 제사-마야 아즈텍 잉카문명의 태양신 숭배도 그 예가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일출맞이 제사는 매우 상징적이다. 밤이 되면서 소나무로 둘러 쌓인 공터의 정중앙에 나무를 세운 거대한 기둥에 불을 붙인다. 중국 고대에 있었던 요체爎禘의 제사와 흡사하다. 요체란 섶을 태워 하늘에 고하는 제사였다. 인디언은 새벽이 가까워오면 전신에 백토를 바른 사람들이 나타나 일출을 경축한다.
언어를 통해서도 알타이의 태양숭배 사상은 확연히 드러난다. 수메르어로 팔pal 발bal 은 빛난다-비친다는 뜻이다. 유구말 피루는 태양이다. 일본어의 히루ヒル역시 태양을 의미한다. 또 수메르 어로 팔-바라는 신궁 왕성의 뜻이다. 은나라 서울 박亳은 부락 동산의 뜻이다. 우리말
微文庫
求索西域:王炳華先生與新疆考古_北京大學中國古代史研究中心- 微文庫
에서 밝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박朴. 爀과 벌伐. 原. 國이다. 태양과 밝음과 넓은 들이라는 뜻이다.
태양숭배 사상을 제의로 연결한 것이 동이족이었다. 동이족의 나라인 상나라에서 발견된 은허의 복사에는 태양신에 점치고 제사지내며 희생을 바친 기록이 있다. 그 전통은 오늘에도 이어져 온다.
지금의 대종교는 부여에서 시천교侍天敎-고구려에서 경천교敬天敎-삼한에서 천신교天神敎-신라에서 숭천교崇天敎-발해에서는 진종교眞倧敎-고려에서 왕검교王儉敎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주족은 주신교主神敎-요금遼金에서는 배천교拜天敎라고 했다. 모두 알타이 족이었다.
중국 고대 문화 유적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암각화에 동이족의 제단화일 것이라고 중국인이 추측하는 태양의 도상이 나타나는 것이 우연일까. 그 의문을 푸는 열쇠가 고대 한국어와 상고사에 있다.
은 밝이다. 밝은 것이다. 밝은 알이다. 하느님은 큰 알이다. 그래서 알님이다. 알 중에서 제일 큰 알이다. 태양이자 우주알이다.
은인殷人은 상백이라 했다. 은나라 사람은 흰색을 숭상했다는 말이다. 사기의 은본기에는 탕임금이 역법과 옷의 색깔을 고치고 흰색을 숭상했다고 되어 있다. 역법과 복색-그리고 흰색이 태양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중국 학자인 서량지는 중국의 역법이 동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은허의 복사에 보면 빈일賓日-출일 등의 말이 나온다. 태양신 숭배를 뜻한다.
산해경에 나오는 백민의 나라의 사람들은 몸빛이 희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다는 구절에 대하여 안재홍은 백을 맥貊=밝으로 본다. 또 사람들이 흰옷을 입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백민의 나라를 숙신의 남쪽에 있다거나 해외 36국 중의 하나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황동경의 백민소성白民銷姓이라는 구절을 백민이 구려句驪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소銷=소消와 같은 뜻이다.
구려의 소노부消奴部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대표성을 가졌다는 해석이다. 구려는 부여-고구려-옥저-예-맥-한 등의 나라와 함께 후한서 및 삼국지에 수록된 한국인의 조상들이다.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발해의 황해 건너편 만주와 한반도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또 백민이 제준-즉 순임금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다. 순임금을 동이라는 견해를 따른다면 당연히 백민이 지금의 한국인의 선조일 가능성이 짙다.
신라와 부여에서도 흰색 옷을 숭상했다. 부여는 밝음의 뜻이며 자신들의 부족을 밝족이라 했다. 예맥 역시 동쪽과 밝음의 뜻이다. 상수운은 고구려에서도 왕은 오채의 옷을 입었는데 백라百羅의관과 백피白皮의 띄를 둘렀다 했다. 하신何新은 “신神의 기원起源”에서 은나라는 동이족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밝은 우리말로 광명-불-국토 혹은 벌의 뜻이다. 최남선은 밝 또는 발칸을 백白 또는 불함不咸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불함문화권이라는 것을 설정하기도 했다. 단군신화의 환인은 그 밝음의 근원이었다.
역사적으로 환인신화-즉 태양신화는 유서가 깊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제1권의 조판기肇判記에는 태고에 음양이 갈라지지 아니하고 홍몽한 채 닫혀있을 때 상계에 문득 하나의 큰 신이 있었다 했다. 가장 높은 하늘에 앉아 있으니 있는 곳은 수만리나 떨어진 곳이지만 언제나 환하게 빛난다 했다. 환인桓因은 밝음의 근원으로 해석한다.
인도의 인드라Indra신-즉 제석帝釋의 단순 의역이라 했다. 그러나 환인이 인드라를 있게 했을지언정 인드라가 환인이 된 것은 아니다. 환인은 하늘-하느님이라는 우리말에서 온 것이며 삼국유사를 엮은 일연스님이나 보주자補註者 무극無極의 윤색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양주동에 의하면 하天의 원어는 한大光明. 大國原 이다. ㅂ- -ㅇ형 음전에 의해 한-한-한로 전음 된다. 한은 하大의 연체형이다. 은 광명 국토의 뜻이다.
고사에 발 벌 불 불 불 부여 부리 화 원 평 평 평 혁 소 명發.伐.弗 沸 不 夫余 夫里 火 原 枰 評 平 赫 昭 明 내지는 백 백 백 맥 박 박 호百 伯 白 貊 泊 朴 瓠 등으로 국명 지명 인명 등에 차자借字되었다 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하늘 님이다. 가장 높은 분이면서 태양이다. 위서를 비롯한 삼국유사의 시조신들은 이 사상에서 성립한다.
해부루는 해+불을 합한 말이다. 즉 “부여왕 해부루의 해는 우리 고어 개=일日> ㅣ=해=일日 의 한자표기로서 태양의 뜻이다. 오늘날도 이 말은 어저께-그저께 등의 형태로-일본어의 미까みかー三日 등으로 남아 있다.
부루는 불> 부루의 한자표기인데 불은 밝-붉赤과 어원을 같이하는 것이다. 불은 태양을 뜻하는 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해부루는 같은 뜻인 해와 부루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고어의 뜻을 잊어버려서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해나 부루는 다 태양신에 대한 우리고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김정학은 “한국상고사연구”에서 주장한다.
다시 박혁거세는 밝은 태양의 뜻이다. 박혁거세朴赫去世-朴赫去西에서 혁은 밝을 혁이며 밝은 광명-즉 태양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 의 한자표기이며 세世 또는 서西는 사이시옷이다. 그리고 = 처음이므로 박혁거세는 밝은 처음이라는 뜻이 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삼국유사를 찬한 일연이 박혁거세는 향언이며 혹은 불거내왕이라고 했으니 그 말도 역시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태양왕이라는 뜻이 된다. 홍기문은 “조선신화연구”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혁은 뜻으로 읽고 거居는 음으로 읽는다. 불거가 된다. 세世를 뜻으로 읽으면 내內의 음에 해당된다. 합하면 뉘 즉 요즘말로 밝은 세상이 된다는 뜻이 된다.
온조는 해의 정기日精으로 해석된다. 속일본기에 백제의 원조를 도모왕추니-동명으로 적고 일정에 감하여 낳다, 또는 백제태조 도모대왕자 일정이 강령하여 부여에 이르러 개국하였다 등으로 적혀있다. 모두 모두 태양신에 의해 태어났거나 태양신의 후손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동이의 세계는 새와 태양의 세계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만의 것이라는 방증이 필요하다.
2. 동이의 사상
삼신사상
이제 단군 이야기를 하자.
단군은 하늘과 태양에 제사지내는 제사장이다. 천부인 세 개와 삼천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아비 웅과 태양신인 할아버지 환인을 합하여 삼신이다. 펼치면 셋이요, 모으면 하나이다. 태양이 불덩어리와 화염과 빛으로 구성된 것과 같다. 그런데 왜 삼일까.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에서 보듯 3은 특히 동양에서 최고의 숫자로 숭배되었다. 천지인天 地 人은 삼재三才 혹은 삼극三極이라 했고 해 달 별은 삼광三光이라 했다. 조정에는 삼공三公과 삼경三卿이 있었고 인간의 운명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삼신三神이었다.
단군신화 역시 3의 사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군은 식민사관이 지적하듯 실체가 없다. 즉 단군이라는 고유명사는 없다. 단군檀君은 천군天君이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사장이다. 단군은 그러므로 대명사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베리아 문화권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신관을 일컫는 공통적인 이름이었다.
단군 당그리 리 텡그리Tengri-천구天狗 팅그리Tingri-탕그리Tangri-탕가라Tangara 등이 모두 하느님-신성-일광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이 용어들은 신 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멀리 터키에까지 단군이라는 이름의 제사장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오늘날 선왕당仙王堂-선왕당先王堂-천황당-산신당-국사당 등은 단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삼성사三聖祠는 환인 환웅 환검을 모시지만 그 내막은 단군 사당이다.
또 하나 삼신이 있다. 삼신 할매가 그것이다. 한국인을 점지하고 낳아서 길러준다. 그 삼신이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되었을까.
삼신의 원형은 환인 환웅 환검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삼신 후보가 있다. 서왕모西王母이다. 서왕모-산신-삼신-삼신할매가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서왕모는 산해경에서 가장 개성적인 신이다. 상나라의 갑골문에는 서모라 표기된다. 서왕모는 곤륜허 또는 옥산에 산다. 곤륜=옥인 까닭이다. 책상에 기대어 있는데 머리 꾸미개를 꽂고 있다. 사람같이 생겼는데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하고 휘파람을 잘 분다 했다.
중국인은 서왕모를 동물신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호랑이가 휘파람을 분다? 아마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휘파람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서왕모가 하늘의 재앙과 오형을 주관한다고 했다. 곤륜산 요지의 반도를 지킨다. 반도는 굽이굽이 삼천리를 뻗는 복숭아 나무이다. 삼천년마다 열리는데, 하나를 먹으면 삼천년을 산다는 복숭아다.
雪花新闻
山海经》中西王母的真身是个妖怪,来到人间,是为了祸害人类? - 雪花新闻
그것을 지키는 것이 신도와 욱루라는 호랑이 신이다. 나쁜 귀신을 왼새끼로 꼬아 죽인다. 현실적인 해석도 있다. 오행 중에서 생명이 있는 것은 나무이며 동쪽의 복숭아나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날마다 태어나는 태양을 반도복숭아라 했고 해가 뜨면 귀신이 맥을 못추니 귀신을 쫓는다 했다는 말이다.
그 남쪽 혹은 삼위산에 삼청조가 있어 서왕모를 위해 음식을 나른다 했다. 음식이라. 파랑새가 무슨 음식을 나를까? 요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면 샛길로 빠지게 된다. 삼청조는 아마도 독수리같은 거대한 새일 것이다.
산해경에서는 치鴟라는 새를 소개한다. 이곳의 어떤 새는 머리가 하나에 몸이 셋인데 생김새는 목이 붉은 수리같다고 했다. 그 새가 가져다주는 음식이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였을 것이다. 그래야 호랑이 신인 서왕모가 먹을 것이 아닌가.
서왕모는 후대에 신선사상의 영향으로 이목이 수려한 미인으로 그려졌다. 그것이 중국인들이 신화를 각색하는 패턴이었다. 옥산-곤륜허 등으로 거처가 불확실하던 서왕모에게 도교가 곤륜산 요지를 처소로 정해주었다. 도교수행자에게 강림하여 가르침을 준다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서왕모가 왜 삼신의 후보라고 말했을까.
단군신화에서 추론해보자. 여자가 되게 해달라고 왔던 범과 곰이 있었다. 환웅이 쑥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 했다. 범은 튀쳐나가고 곰은 여인이 되었다. 웅이 웅녀를 취해 단군을 낳았다 했다.
거짓 취했다고도 하고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한 다음 박달나무의 신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왕검이라 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기술은 삼국 유사에서 볼 수 있다. 삼국유사만 하더라도 이미 중국의 춘추 필법이나 기전체 사초에 영향을 받고 있다.
설령 곰이 여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태양의 아들과 어찌 동침하여 인간을 낳을 수 있는가. 그래서 일연은 환웅이 거짓 화하여 웅녀와 동침하였다 라고 얼버무리고 있다.
하여튼 곰은 여자가 되었다.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던가. 동굴을 뛰쳐나갔다. 왜 그랬을까. 뛰쳐나간 호랑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반항을 했던 영웅적인 여성상일 수 있다.
그렇다면 호랑이는 서왕모西王母-하후개夏候開-하후도-신도神筡 와 욱루郁壘로 연결되는 호랑이신, 나아가서는 달의 신과 연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서왕모는 달의 신이기도 하다. 반도를 관리한다. 그것이 불사약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서왕모는 동이의 장군인 예에게 불사약을 준다. 천상의 선녀였던 예의 아내가 항아였다. 혹은 상아-상희라고도 한다. 친정에 가고 싶어서 항아는 두 사람 분의 불사약을 혼자 마시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천제의 노여움이 두려워 잠시 달에 들렀다가 두꺼비가 된다. 그래서 항아는 달의 신이 되었다. 그럼 서왕모는 어떻게 되었나? 서왕모도 달의 신이다. 불사약을 사이에 두고 두 신격이 결합되었을 것이다.
신화란 그런 것이다. 불사약을 준 서왕모와 불사약을 마신 항아가 함께 달의 신이 되는 것이다. 달 토끼는 오해의 산물이다. 원래 菟토였다. 호랑이를 의미한다. 그것이 토끼의 토兎로 읽혀져 오늘날 불사약을 찧고 있는 토끼의 모습이 결합되었다.
서왕모가 호랑이면서 달의 신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남녀를 짝 지운다는 월하노인도 달의 신이다. 서왕모는 그래서 중매쟁이도 된다.
서왕모는 곤륜산에 사는 신이다. 그러므로 산신山神이다. 단군 왕검이 산신이었다. 그래서 겹쳐진다. 산山은 산産자와 연상결합한다. 그래서 산신山神이 산신産神이 되었다. 서왕모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출산은 할머니의 몫이었다. 그래서 산신 할매, 그리고 삼신 할매로 불리웠다는 추론이다.
민화에서는 이런 변천의 과정을 볼 수 있다. 몸통이 호랑이처럼 보이는 여신이 시녀 셋을 거느리고 있다. 시녀는 삼청조였을 것이다. 여신이 호랑이와 분리된다. 여신이 할아버지로 바뀐다. 시녀들은 때로 둘로 줄거나 시동으로 바뀐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산신 그림이다. 중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의 민화 이야기이다. 또 있다.
그 서왕모가 조선의 강륜문자도 신信자 그림에 그려진다. 사람 얼굴에 새 몸통의 이른바 새사람이 편지를 물고 있는 장면이다. 한무고사에 의하면 칠월 칠일 무제의 궁전에 청조가 날아왔다. 동방삭이 말하기를 서왕모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입니다 했다. 그래서 언약-믿음의 상징이 되었다. 서왕모신앙이 조선에 뿌리내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산악사상
환인이 보매 그의 아들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이룩할 만하였다.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세상으로 내려보냈다. 웅은 무리 삼천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었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 명 병 형 선 악 등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역사의 하루 - 티스토리
단군, 고조선의 국조
환웅이 내린 곳은 태백산이었다. 큰백산이다. 백산白山은 산이다. 태양산이란 뜻이다. 신산 성산이라한다. 태양의 아들이 내려 큰 밝산이라 했다. 백두산을 위시하여 한국의 산에 유독 백산이 많은 것은 이 태양사상의 반영이다.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었다 했다.
신단수神檀樹는 신의 박달나무이다. 박달은 태양 나무이다. 밝달=알이 된다. 이렇게 추론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달나무 단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응제시주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으로, 삼국유사에서는 터 단壇자를 쓴 것도 표기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오류이다. 그렇다면 박달나무는 그 자체로서 큰 의미가 없다. 태양나무의 번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양나무는 무엇일까. 성주풀이에서는 소나무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성주는 성조成造 혹은 상량신上樑神이라 풀이한다. 특이한 해석으로는 성주星主라고도 한다. 별의주인이라, 태양을 연상케하는 풀이다.
성주신의 근본과 솔씨의 근본은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으로 읊어진다. 제비원이라니 현조를 생각나게 한다. 현조는 까만 새-까마귀-세발까마귀-태양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개념이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신성한 나무이자 민족 자체라 할 수 있을 만큼 비중이 높다. 소나무 아래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고 할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것이 소나무이다.
마을을 수호하는 동신목-산신당의 소나무는 신성한 존재이다. 하늘에서 신들이 하강할 때는 높이 솟은 소나무 줄기를 택한다고 한다.
소나무는 벽사의 존재였다. 정월대보름 전후에는 소나무 가지를 문에 걸어 잡귀를 막는다. 동지 팟죽을 삼신과 성주에게 올릴 때 솔잎으로 뿌린다. 아기가 아프면 삼신할머니에게 빌기 전에 바가지의 맑은 물을 소나무 가지에 적셔 뿌린다.
강원도 명주군에는 단옷날 산멕이기를 한다. 한해동안 부엌에 매달아 두었던 산을 왼새끼로 꼬아 꽂아두었다가 단옷날 소나무에 묶어놓고 제물을 올려 가족의 안녕과 소원을 빈다.
왼새끼는 귀신을 묶는 새끼이다. 신도와 욱루-그리고 호랑이 신이 연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의 호랑이는 태양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왼새끼는 동제를 지낼 때, 금줄을 칠 때 모두 쓰인다. 금줄은 숯-고추-백지-솔가지 등을 끼운다. 오방색과 연관이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고 소나무였다. 어느 나무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신성한 나무였다. 그래서 태양의 나무일 것이라 추측한다. 태양의 나무라면 태양신의 아들이 그 아래서 신시를 열고 한국인의 조상을 낳았던 나무이다.
태양신은 태양이다. 태양의 아들이 무엇인가. 햇빛이다. 환인이 환웅을 세상에 내려보냈다는 구절을 상식적으로 바꾸어 보자. 태양이 햇빛을 지상에 비친다 가 된다. 고대인에게 햇빛은 가장 높은 산에 먼저 닿았다. 그것이 바로 천하제일 산이었다. 천하제일 산은 곤륜산이고 태산이라 알려졌다. 물론 중국식의 발상이다.
곤륜산은 곤륜허라고도 한다. 혼돈 혹은 카오스라는 의미를 가진다. 초기에는 천상계에 있는 천제의 지상궁전이 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감숙성 주천 남방에 있는 산을 곤륜산이라 믿었다. 오늘날은 신강성에 있는 쿤룬산맥을 곤륜이라 부른다.
이렇게 좌충우돌-우왕좌왕하는 나이롱 산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말해 곤륜산이란 태산일 수도 있었고 백산-밝산-백두산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모두 태양산이라 부르는 산이기 때문이다.
곤륜을 태산으로 본 것은 태양을 숭배한 황제족이 태산지구에서 기원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신은 보고 있다. 황제족은 태산을 신산-천산으로 모셨다. 오늘날 중국인이 뼈라도 태산 아래 묻히게 되어 혼백이나마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품는 것이 태양숭배사상의 영향이라는 말이다.
그 태산泰山은 고대에 태산太山이라고도 썼다. 고대에는 태=대=천太=大=天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므로 태산泰山=태산太山=대산大山=천산天山이었다. 곤륜崑崙은 고대에 천天의 호칭이었다고 하신은 주장한다. 고대에 옥玉=왕王=군君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임금 왕자를 구슬 옥변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왕산=군왕산이다. 그리고 천산이 된다. 그러므로 다시 곤륜은 태산이 될 수 있었다. 하신의 말을 들어보자.
“태산은 산이 높고 구름이 많으며 구름의 모양이 혼돈과 같아 옛사람들은 구름이 바로 하늘의 몸이라 여겼다. 이것이 태산. 곤륜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또 다른 원인일 수 있다. 구름은 색이 희어 옥과 같으므로 고인의 전설 속에 태산과 곤륜산의 별명은 옥산이었다. 아울러 두 산속에는 옥이 많다고 전해진다. 금일의 태산 옆에는 장백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그리고 곤륜산의 별호는 군옥산이다”
초사楚辭에 의하면 곤륜은 제帝의 하도下都로서 마루턱의 현포縣圃를 통하여 하늘과 통한다. 구하九河의 발원지이며 아홉 문이 있는데 문에는 개명開明의 짐승이 지킨다. 하신이 쓴 “신의 기원” 의 대목을 보면 곤륜의 위상 및 구조는 이러하다.
“대지에는 곤륜산이 솟아있고 그 위에 건목이 구중천을 받치고 있다. 다시 대지는 지주로 바다 위에 땅을 떠받들고 있으며 바다의 동쪽에 부상-탕곡에서 해가 떴다가 매곡-세류가 나 있는 엄산으로 해가 진다. 곤륜산의 높이는 1만 1천리-동서 땅의 길이는 2만 8천리-남북 땅의 길이는 2만 6천리-바다의 깊이는 3천6백리 -하늘에는 8주가 있고 땅에는 4주가 있다.“
곤륜산이 어떤 특정한 산이 아니라 이상화된 산임을 알겠다. 그러므로 그 산은 어떤 특정한 산이 아닐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떤 산이건 곤륜산이 될 수 있었다. 더욱이 항공촬영 등의 계측이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제일 높거나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우면 그것이 곤륜산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곤륜산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거기에는 천제의 궁전이 있다. 산꼭대기에는 네모난 광장이 있는데 주위에 경옥의 난간을 둘렀다. 사방에는 구석구석 9개의 우물과 아홉 개의 문이 있다. 문을 지나면 거기에 천제의 궁이 있다는 것이다. 더 들어가 보자.
궁전은 다섯 개의 성곽이 쌓여 있으며 열두 개의 높은 누각으로 꾸며져 있다. 누각의 오른 쪽에는 새의 깃털도 가라앉는다는 약수가 있다. 왼쪽에는 요지가 있다. 서왕모가 주 목왕을 초청해서 연회를 벌였다는 곳이다.
누각의 동 서 남 북에는 주수 옥수 선수가 자란다. 봉황새와 난조가 거닌다.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새들이다. 사당수-낭간수-문옥수-불사수 등과 맑고 찬 예천-기화요초들이 가득찬 곳이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제 곤륜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 속의 천체가 사는 곳이다. 그리고 그 천제는 인격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궁전의 꾸밈새는 태평성대 성군이 사는 호화로운 별궁으로 묘사된 것이다.
태양신 숭배는 산악 숭배로 연결되어 신선 사상을 낳는다. 그 신선 1호는 단군이다. 단군은 구월산에서 산신이 되었다. 신선이다. 사람이 산에 들어가야 신선이 된다. 그것이 신선 선仙자의 의미이다. 신선은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귀천歸天이라 했다. 풀이를 하자면 사람의 죽음이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하늘로 돌아감이다.
태양의 빛이 처음 도착한 곳이 높은 산이다. 백산-밝산-천산-옥산-곤륜산-왕산이 모두 하늘산-그리고 태양산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백두산이 천산이고 곤륜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알타이 문화의 태양신 숭배가 만들어낸 정신의 고향이 태양산이다.
천산天山은 하늘 산이다. 칸텡그리라 한다. 칸은 한汗이다. 크다는 말이다. 텡그리는 텡그리Tengri-탕그리Tangari. 탕가라Tagara 등으로 표기된다. 우리의 단군檀君에서 비롯한 말이다. 단군은 리-당그리 단골 등의 우리말이다.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단군이 되었다.
단은 박달나무 단이다. 박달은 이다. 밝은 알이다. 알 중에서 가장 밝은 알-즉 태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은 태양신을 의미한다. 동시에 태양신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국어로는 천군天君이라 한다. 하늘의 임금이라는 말이다.
하늘의 임금-태양일 것이다. 그러므로 천산은 하늘 산이고 칸텡그리는 큰 하늘 산이 된다. 태양산-산이 되는 것이다. 태양신이 내려온 곳이 태백산이다. 높은 백산이라는 뜻이다. 밝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즉 신산神山-성산聖山의 뜻이다.
3. 동이의 신화
신선설화
옛 사람들은 백두산에 오른다 하지 않고 든다 했다. 천지에 내린다 했다. 그것이 신선 사상-그리고 태양신 사상과 연관이 되어 있는 신선사상이다. 마치 태양이 백두산으로 들어가고 하늘에서 신성한 존재가 천지에 내린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가.
또한 삼신산-즉 봉래 방장 영주 산 역시 반도에 있다고 해석될 만한 전거는 많다. 사기 봉선서에는 봉래산이 바다 한가운데 있다고 했다.
주에 의하면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해 중에 있으며 여러 선인들 및 불사약이 멀리 그 곳에 있고 온갖 새와 짐승들이 다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는데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다고 했다.
발해란 바닷가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바다란 연제해빈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의 서해를 말할 것이다.
신선 사상은 연제해빈에서 만들어졌다. 그것이 산악설이다. 곤륜산이 중심이다. 전국의 초나라에서 융성했고 진시황 시대에 극성을 이루었다. 후세에 주의 위왕-선왕 이하 한 무제 때부터 시작되는 해상설-후한 말에서 위진시대 즉 도교 시대의 천선설과 지선설은 산악설의 후편이다.
그런데 연제해빈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는 해변이다. 동이족의 무대이다. 전국 초나라는 상족으로 이루어졌다. 상족은 대부분 동이족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초나라는 태양신과 조상신을 제사지냈다.
신선설은 세 단계를 거쳐 발달했다. 제 1기는 전설시대-제 2기는 신선가시대-제 3기는 도교시대라 할 수 있다.
제 1기는 전설시대로서 산해경이 대표경전이다. 심산-대해 등 자연의 신비를 의인화한 자연신화를 바탕으로 하며 인간의 인격을 이상화한 초인신화 등과 구분하게 된다. 산악설로 불리며 곤륜산을 중심으로 하며 초사-장자-산해경 등이 산악설을 대표한다.
제 2기는 주말-제의 위왕-선왕 때부터 시작되는 신선가시대를 이룬다. 제의 위왕 선왕 이하 한무제 등이 구한 해상의 신산이 대표적이다. 진시황은 이 시기에 신선의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서복을 파견했다. 서복 혹은 서시는 제나라 사람이다.
제 3기는 도교발생이후의 도교시대를 말하며 후한 말에서 위진에 걸친다. 천선설은 한대 이후의 설로서 3기가 극성이었다. 이 시기에 지선설도 완성되었다.
산해경은 고대의 신화와 지리에 관한 책이다. 산맥과 하천과 산물 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책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기이한 이야기가 많아 소설류에 넣기도 하는 책이다. 편찬자는 백익이라고 하나 주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누군가가 기술하고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23권이라고 하나 남아 있는 것은 18개경이다. 진나라 곽박-명나라 왕경-양신-청나라 오임신 등이 주와 그림을 첨가했다.
그런데 이 산해경의 국적이 문제가 되었다. 조선-개국-숙신국-맥국 등 고대 한국과 관련되는 나라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원가를 비롯한 많은 신화학자들이 순과 예를 동이계의 신화로 본다. 손작운은 아예 산해경 전체를 동이계의 고서로 간주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많은 신수와 괴수가 있다. 그 원형이 산해경에 있다. 한국에는 이미 백제 때에 일본에 산해경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삼국시대 이전에 산해경이 읽혔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삼황오제
신선설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의 신화는 다분히 동이적인 요소가 많다. 동이계의 신화라는 주장만을 취합하여도 중국 신화의 뼈대가 성립될 정도이다. 먼저 신화시대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시작한다.
하나라 이전에 삼황오제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일정치 않다. 삼황을 복희 여와 신농이라거나 혹은 천황 지황 인황이라는 등 다르다. 신화시대는 가상설에 의하면 나중에 덧붙여졌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황제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의 오제 이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 예에 속한다. 사기에는 은나라 하우씨-요임금-순임금과 황제의사적까지를 기록했지만 연대표에서는 서주까지도 빼버렸다는 홍기문의 주장도 있다.
태호 복희씨는 포희庖犧라고 한다. 주방을 제물로 채운다는 뜻이다. 천지창조의 신이며 팔괘를 만들었으며 그물을 발명하여 고기잡는 법을 가르쳤다고 기술되어 있다. 태호 복희씨를 수렵목축민의 대표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팔괘는 우임금이 치수할 때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적힌 49개의 점에서 왔다. 한대의 위서에는 화서가 뇌택에서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서 복희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자에는 사람 머리에 뱀의 몸통 호랑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태양을 섬긴 태호족과 봉황을 섬긴 소호족 및 그 일파인 고요족은 동이족이다. 소호족은 대문구문화를 주도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강상희는 팔괘를 ‘훔쳤다’고 표현한다. 작품에서 팔괘는 강신降神의 무구가 꽂혀 있는 신성한 지역의 앞쪽에 놓여있다. 작가가 알고 있는 팔괘란 중국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의 도상과 사상을 훔친 것이 된다. 그럴까. 왜 한국의 조각가가 중국의 것을 훔쳐서 작품에 넣고 싶을
博客- 新浪
三皇五帝夏商周引言_豹云天_新浪博客
만큼 강렬한 자기화의 욕구를 느꼈을까. 그러면서도 무속의 신구는 훔쳤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 것이기 때문이란다.
여와는 와황이라고도 한다. 뱀의 형상을 한 반인반수의 신이며 복희씨의 누이동생이다. 회남자에 의하면 공공과 전욱이 왕위를 두고 다투다가 돌지않는 산-즉 불주산不周山에 부딫쳤다. 그때 하늘을 받치던 네 개의 기둥이 무너지고 땅의 들보가 끊어지면서 대홍수가 났다.
그래서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지고 해와 달이 자리를 옮겨 돌게 되었다. 이때 여와는 오색돌로 하늘을 깁는 한편-거북의 다리를 짤라 기둥을 세운 후 갈대를 태워 그 재로 땅의 물을 빨아들였다.
복희와 여와는 뱀의 신이다. 동이의 태호-소호-축융 족의 토템이었다.
염제 신농씨는 몸체는 사람인데 머리는 소나 용이라 했다. 삼재도회三才圖繪나 성군현신상화책聖君賢臣像畵冊 등에서 대체로 풀옷을 입고 풀을 맛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백성에게 농사와 양잠-저자를 세우고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쳤지만 풀을 맛보아 의술을 체계화한 공로를 크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신농씨를 농경민의 대표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이의 신화에서는 고시례高矢禮 혹은 고시내高矢乃로 불리는 신이 있다. 고시례는 단군신화의 농신이었다고 했다. 이를 신농씨와 같은 신격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고시레를 부르면서 한 숟갈 떠서 던지는 습속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의원에서 신농씨 초상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왜 한국인이 고시레를 찾고 신농씨 초상을 벽에 걸었을까.
황제 헌원씨는 염제 신농씨를 판천에서 싸워 물리치고 동이의 전쟁신으로 추앙받는 치우의 난을 탁록에서 평정한 후에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황제는 의복 집 배 수레 활 화살 등을 발명하고 문자 음률 역법 등을 제정했다.
전국시대 말기 오행설에 따라 신화 전설이 집성되어 형성된 신격이다. 그러므로 시경이나 서경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황제를 태양신으로 보아 환인과 같은 신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도가에서는 노자의 앞에 황제를 두어 황로학파를 만들었으며 후한 이후에는 신선사상과 도교 등이 결합하여 신격화하였다. 예를 들면 임청하의 “천도오의天道奧義”에서는 천도의 계통을 이렇게 도식화하고 있다. 황제 헌원-요-순-우-탕-문왕-주공-노자-공자-증자-자사-맹자가 그것이다.
박시인이 황제의 후손을 도표로 그린 것이 있다. 황제부터 순 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이 같았다는 말이 된다. 순임금이 동이라 했으니 동이의 성을 가진 것이 되겠다. 나아가서는 알타이어족이 중국 땅에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박시인의 도표를 보자.
지
현효-교극-곡3-요4
설은의 시조
1황제 후직주의 시조
창의-전욱2궁선-경강-구망-교우-고수-순5
곤-우6하의 시조
오제는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이다. 소호 금천씨는 동이족이다. 치우의 구법을 익혀 쇠를 단련하여 철기문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금천씨라 이름했다. 전욱은 황제의 손자이다.
황제는 환인과 동격이라 했다. 요임금은 제곡의 아들이다. 순임금은 요임금의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 순임금이 동이족이라 했다. 맹자의 이루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요임금은 치수를 하면서 곤의 도움을 받는다. 큰물이 하늘까지 넘처 흐르자 곤은 천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천제의 식양토-즉 저절로 자라는 흙으로 큰물을 막았다. 천제가 축융을 명하여 우산의 들에서 곤을 죽였다. 곤의 배 안에서 우가 생겼다. 순임금의 뒤를 이었다.
순임금은 제준帝俊이라고도 한다. 태양신이라는 뜻이다. 순이 농사를 지었던 곳은 역산이며 수양산-박산이라고도 한다. 수양산은 해가 처음 나오는 산-박산은 밝산-즉 태양산이다.
순의 아버지 고수瞽叟가 재혼하여 상象을 낳았다. 고수를 암흑신으로 보기도 한다. 순이 희화와 혼인하여 열 개의 해를 낳았고 상아에게서 열두개의 달을 낳았다는 신화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순의 아비와 후처가 상만을 사랑하여 순을 죽이려 했다. 지붕위에 올라가게 하고선 불을 지르고 우물에 들어갔을 때는 흙을 덮었으나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복궐제舜服厥弟라-부모를 섬기고 아우에 순종했다.
그 덕행으로 요임금의 두 딸에 장가들고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비二妃가 된 아황 여영은 순임금이 구의에서 죽어 창오에 묻힌 줄도 모르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비보를 듣고 소상의 군산에서 동정호에 빠져죽었다. 그때 흘린 피눈물이 소상의 반죽이 되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한국의 판소리-단가-민화 등에서 심도있게 다루어진다.
춘향가에는 춘향이 꿈에 만고정절 이비를 만나는 장면이 소상히 소개된다. 이비가 왜 한국의 판소리에 그토록 비중있게 실렸을까. 단가 소상팔경과 민화 소상팔경도 역시 한국에서 그토록 열렬히 불려지고 그려졌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요순을 비롯하여 전설 시대라 하는 하夏나라와 그 후의 은殷왕조 B.C.1500-1100 이전의 신석기 시대 즉 B.C.2000년경 화북의 황토 층에서 일어난 농경 문화 역시 동이족과 연관이 많다.
이를테면 산동으로부터 발해만 연안에 분포했던 앙소仰昭문화 B.C.3000-2500년경와 산동성 역성현 성자애 유적에서 재구성한 용산龍山문화B.C.2000-B.C.1500등이 동이족에 의한 문화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왕신은 하대 상대 이인의 문화로서 악석岳石문화를 내세운다. 용산문화의 전통과 선상先商문화의 영향하에 형성된 청동문화를 말한다. 두계태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리두문화와 조기청동기문화를 흡수했다고 했다.
우임금은 하우씨夏禹氏라고도 한다. 하나라의 우임금이라는 뜻이다. 하나라는 요순과 은상의 사이에 있는 신화적 왕조이다. 우임금은 도산에서 장가들고 태상의 들에서 부부가 되었다. 장가든지 나흘만에 다시 홍수를 다스리러 갔다.
도산씨와의 사이에 계啓를 낳았다. 계는 연다는 뜻이다. 곰으로 변한 우임금을 보고 부끄러워 돌이 된 도산씨에게 아들을 돌려보내라 했다. 돌이 깨지면서 나온 아들이 계다. 이것은 태양신화를 각색한 것으로 본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고대한국어이다. 계=개=해라는 것이다.
우임금은 동이집단과 합작으로 치수를 했고 삼묘를 정벌했다. 묵자는 우가 삼묘를 정벌할 때 사람의 얼굴과 새의 몸을 한 신이 정벌을 도왔다고 했다. 동이의 새사람일 것이다. 새의 분장을 한 일관 혹은 무당이라는 말이다.
시경에 보면 우임금은 방패와 새깃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했다. 동이와 시베리아 문화권의 조류숭배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임금은 황제가 만든 역법을 개량했다.
그런데 황제의 역법이란 왕중부에 의하면 선조들의 장기간 경험이 누적된 결과라 했다. 결과적으로 황제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선조들의 집단이라는 말이 된다. 그 선조들이 누구인가.
우는 어진 신하 우익 혹은 백익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아들인 계가 우익을 죽이고 우임금의 자리를 차지했다. 백익은 동이 부족 중에 비중이 큰 영수였다. 계의 아들은 태강으로서 가항에서 예에게 죽었다.
예는 요임금의 명령을 받고 10개의 태양 중에서 아홉 개를 떨어뜨렸다. 백성을 괴롭히는 착치와 봉시를 활로 쏘아 죽인 영웅이었다. 서왕모의 불사약을 받았다가 그의 아내 항아가 훔쳐먹고 달로 날아가 두꺼비가 되기도 했다. 한착에게 죽었다기도 하고 봉몽에게 죽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예 한사람에게 혼동될 만큼 다양한 신화가 연결된 것은 예가 대명사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이 중에서도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예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이와 연관된 신화를 연결하고 보면 동이의 활동시대와 활약상이 중국신화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뿐이랴. 문화와 철학-그리고 예술에서도 동이의 영향력은 막강했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형성되기 이전에 중국의 문명을 일으킨 종족 중에 동이가 있었다. 신화시대와 전설시대-그리고 역사시대의 여명에 동이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순임금이 동이족이라 했고 상나라를 세웠던 일만개 부족 중에 구천의 부족이 동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분명히 동이가 중대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 동이족이라 불리웠던 종족 역시 자신들이 동이라 불릴 것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이전의 구석기 시대 황하 유역에 살았던 북경인류나 신석기시대의 인류에는 종족의 개념이나 종족의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중국이라는 땅에 살고 있었던 종족을 손진기는 화하족-동이족-북융족-원시 돌궐족-원시 몽고족-원시 퉁구스 족-고아시아족 등으로 나눈다. 그 중에서 어느 쪽이 제일 우리와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동이라는 말이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이다.
III. 도덕경
오늘날 한국이나 일본에서 동이는 그다지 환영받는 개념은 아니다. 동쪽의 오랑캐로 불려왔던 오랜 세월의 잔재일 것이다. 상고시대 종족이 오늘날 그대로 동이민족이나 동이국가로 발전하여 계승된 일이 없으니까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후손이 애써 챙길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동이의 사상은 곳곳에서 손쉽게 발견된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동이의 사상은 중국문명을 업고 동양사상으로 정착되었지만 오히려 중국인에게 그 원형을 발견하기보다는 한국인에게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그런 것임을 역시 쉽게 알게 된다.
이를테면 동양화라 부르는 그림이 있다. 먹이나 붓 벼루 등의 문방제구-물이나 수성안료라는 재료-종이라는 재질-그리고 그 위에 그려지는 수묵-채묵이 있다. 나아가 동양화라는 이름으로 그려지는 소재들 중에서도 문인화 사군자 산수화 인물화 등의 장르가 모두 동이의 철학에서 비롯되거나 직접-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이러한 원형적인 탐구는 비단 동양화뿐만 아니라 서양화라 부르는 그림-조각-공예 등 시각예술이 전 분야에 통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범주를 제공한다. 논지의 특성상 동양화를 중심으로 전개하면서 공통분모를 가진 서양화-조각 등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도덕경道德經에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도덕경은 초나라 사람인 노자의 사상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도덕경은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예술을 설명할 때보다는 한국의 경우에 보다 폭넓은-그리고 심오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상을 담고 있다.
중국인이 도덕경을 신비화하여 도교를 만들었던 것은 그들의 정신을 담은 사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에게 너무나 당연히 생활 속의 지혜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서술적 문장이 그들에게는 신비적인 주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뿐이랴. 실제로 동서양화-조각-공예-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도덕경은 적절한 텍스트 구실을 해준다.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라 했다. 초에는 굴원과 노자가 있다. 굴원은 초사를 썼다. 동이족의 경전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산해경의 시적 변용이자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굴원이 그토록 산해경에 정통할 수 있었던 것은 초나라에 동이의 사상이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초나라에 산해경 류의 문화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신의 주장에 의하면 초나라는 상나라와 동족이고 상족은 동이족이라 했다. 그래서 같은 태양신 제사를 지낸다. 그것은 동이와 회이의 사이에서 고루 영향을 받은 축융문화를 흡수한 결과로 보여진다. 그 나라에서 주나라의 관리였던 노자가 도덕경을 썼다.
道德經與名家校注: 歷代權威名家校注,還原老子《道德經》本意 (Traditional Chinese Edition)
還原老子寫《道德經》本意是本書與以往版本的《道德經》最大不同之處,本書通過歷代權威名家校注,深刻理解《道德經》的哲學。 《道德經》,春秋時期老子(李耳)的哲學作品,又稱《道德真經》、《老子》、《五千言》、《老子五千文》,是中國古代先秦諸子分家前的一部著作,是道家哲學思想的重要來源。道德經分上下兩篇,...
주나라 역시 동이의 정신이 이어져 온 나라였다. 그러므로 도덕경에 동이의 정신이 깃들일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성숙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한국의 작가에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임현락의 여백은 도덕경의 이 희 미를 연상케한다. 이夷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희希는 귀에 들리지 않음이다. 미微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흐리멍덩하지만 존재한다. 언젠가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임현락은 이 여백을 미완의 공간으로 본다. 미완이기에 오히려 충실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공간을 밖으로 확산시킨다. 배경이 그리하여 표현의 주체가 된다. 실제 임현락의 인체는 그 여백에서 시작했다.
여백이 있고서 형상이 있었다. 그래서 인물이나 토르소를 그린다고 할 때에도 여백은 보조언어가 아닌 당당한 조형언어로서 화면에 자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도덕경의 이 희 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에서 그것은 임천고치의 한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곽희는
‘먼 산에 주름이 보이지 않고 먼 곳의 물에 파도가 없으며 멀리 있는 사람의 눈이 그려지지 않음은 없어서가 아니라 없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遠山無皴-遠水無波-遠人無目-非無也-如無耳’ 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없어 보이는 것, 이를테면 무용의 용이 여백이었다. 그 여백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인일 것이다. 이러한 여백의 정신은 비단 동양화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서양화가 김한은 조형의 여유를 잘 아는 작가이다. 그는 동양화의 여백이 형체를 받치고 있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작가들의 노력과 정신을 쏟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서의 여백은 때로 한지를 찢어 이어나가는 작업을 통하여 시점의 확산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신은 고요함의 성취이다. 찢은 한지를 더덕더덕 붙여나가고 먹줄을 튀겨 선을 그으면서도 거기에서 고요함을 얻어내려고 한다는 작가의 태도는 아무래도 서구적인 미학의 세계보다는 동양적인 것, 그 중에서도 다분히 노자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지연의 그림은 바느질 자국이 없다. 이를테면 천의무봉天衣無縫처럼 보이는 화면은 무위자연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와 나뭇잎, 영혼을 응시하는 또는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트레이싱 페이퍼에 실크스크린으로 찍힌 후에 캔버스 위에 붙여지기도 한다.
그 후에 이미 그려진 그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 역시 서구미학으로 해석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서구미학이라면 피카소와 브라크가 시도했던 빠삐에 꼴레거나 데페이스망 정도의 해석이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빠삐에 꼴레는 화면에 종이를 붙여나가는 작업을 말한다. 데페이스망은 이질적인 상황에서 느껴지는 생소함이라는 뜻이다. 화면위에 엉뚱한 것을 붙여 싱숭생숭하게 느끼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 해석에서 어떻게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인간과 태양의 상징인 새를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인가.
상고시대, 주민등록도 없었던 노자의 출신성분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먹 붓 벼루 물 종이 수묵 채묵 등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잘 설명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것들을 중국의 문화와 문명, 국민성과 정체성에 비쳐보면 쉽게 연결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도덕경의 사상을 동이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이를테면 신선산수-청록산수-금벽산수-누각산수 및 은일사상 역시 그 배경에 화하족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동이의 신선사상 쪽이 가깝다. 신선산수는 신선이 등장하는 산수화-청록산수는 푸른 산과 시원한 물을 배경으로 하는 산수화다.
금벽산수는 고운 색채의 청록으로 그려진 그림에 금니金泥의 준을 부연한 산수화이다. 누각산수는 산수와 누각을 함께 그린다. 모두 신선사상-은일사상과 연관이 있다. 은일이란 세속을 피해 숨어 한가롭게 노닌다는 말이다.
어디에 숨더라? 산에 숨는다. 산신이나 신선이나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상의 밑바탕에 노장사상이 있다. 도덕경은 그 원전이라 할만하다.
도덕경의 사상은 요점을 추리자면 무위자연無爲自然-무용지용無用之用-유능제강柔能制剛의 사상을 담고 있다. 무위자연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무궁무진한 조화가 있다는 말이다.
무용지용은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쓸모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유능제강은 부드러운 것이 뻣뻣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들 사상은 한국인의 문화 예술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을 제공한다.
1. 무위자연
SlidePlayer
노자(老子):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철학을 주장 - ppt download
무위자연無爲自然은 풀무의 비유가 제격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커다란 풀무 같구나. 비었으나 다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天地之間은 其猶橐籥탁약乎인저, 虛而不屈하고 動而愈出이니라 라는 말이 무위자연의 정수를 잘 설명한다.
비유가 어려우면 다음 시를 읽어보자.
가없이 푸른 하늘 구름 일고 비가 온다
사람 없는 텅빈 산, 물 흐르고 꽃이 핀다
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
무위자연은 현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문방구 중에 먹이 있다. 먹은 검은 것이다. 검은 것은 현玄이다. 만물의 시작이다. 현빈玄牝은 검은 암컷이다. 자궁을 말한다. 생명이 나오는 문이라 천지의 문이라 했다. 그것이 곡신, 즉 골짜기의 신이다.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데 만물이 골짜기에서 생겨나 자라되 마르지 않는다. 무위자연이다.谷神不死하니 是謂玄牝이니라. 玄牝之門이여 是謂天地根이니라. 綿綿若存하여 用之不勤이니라.
먹
또 현지우현이라 했다. 이 말은 도덕경이 첫머리에 나온다. 도와 명은 한 갈래에서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한다. 현묘하고 현묘하니 온갖 묘함이 나오는 문이다同出而異名하니, 同謂之玄이니라. 玄之又玄하니 衆妙之門이니라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는 이름이 없는 것,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미로 본다. 그것이 하나로 일관된 경지, 바로 먹의 사상일 것이다.
그 먹을 가는 바탕이 벼루이다. 벼루는 돌이다. 먹이 일이면 물이 둘이다. 벼루가 셋이어서 만물이 여기서 나온다. 그래서 벼루는 도가 된다. 물을 부어 먹으로 갈아 먹물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작업이다. 충기를 조화롭게 하는 일이다. 바로 도의 세계이다.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의 세계이다.道生一하고, 一生二하고, 二生三하고, 三生萬物이라. 萬物은 負陰而抱陽하고, 沖氣以爲和니라
종이와 자연
종이는 자연이다. 소이위현헤란 공자의 이야기이다.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다. 그 바탕이 예라 했다. 심성을 말한다. 심성은 자연적으로 타고난 성품이다. 그 종이를 만드는 것은 무위이다. 자연은 무위를 근본으로 한다.
곡신의 세계를 잘 표상하는 것이 장지이다. 화선지나 화지처럼 매끈한 종이가 아니다. 화사한 느낌도 없다. 그것이 한국인의 심성이었고, 그 심성이 선택한 것이 장지였다.
장지가 곡신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그 수더분함에서 온다.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받아들이는 겸허함에 있다. 기댈 수 있는 편안함, 공기가 통하는 삶의 향취, 허허롭지만 자연스런 짜임새가 그들의 운치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원형적 정신이다.
우상기의 화면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된다.
조용한 중용의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화면의 뒤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화면은 아크릴 칼라와 분체粉體 안료의 치열한 각축장이다. 아크릴 칼라는 착색은 좋으나 방수막을 형성한다. 그래서 먹으로 눌러지지 않는다. 하여 착색용으로 물러난다.
이르자면 양의 세계이다. 분체 안료는 가루는 좋으나 접착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표현용으로 화면 밑에 깔린다. 이들을 조화시켜 평안한 화면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은 골짜기의 바람을 닮았다.
정회남의 그림에도 추급 推及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촤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담혜, 사혹존 挫其銳하여, 解其紛하고, 和其光하여, 同其塵하니, 湛兮하여, 似或存이로다.
라는 말이다.
도의 근원적인 성격을 논하면서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풀며 빛과 함께 하거나 먼지와 함께 하거나 간에 맑고 맑아 존재하는 듯하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정회남의 그림에서 형상을 향한 붓과 나이프의 궤적을 살펴보면 곧 이해가 갈만한 대목이다.
형상을 묘사한 날카로운 선묘를 덮는 몹시 빠른 붓자국과 우둔하게 보일 만큼 의뭉스런 나이프의 움직임은 아무리 제멋대로 휘둘렀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화면질서의 궁극적인 흐름인 것이다.
그렇게 환칠한 붓이나 나이프의 난무에도 불구하고 맑고 투명한 대기와 산하가 이토록 극명하게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내재율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 내재율이 이를테면 무위자연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이렇게 쾌도난마적인 터치에서만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자율적인 질서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내장하고 있다. 사실 제멋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이 무서워 작가들은 그토록 다듬고 어루만져 완성된 화면에 사인을 하도록 길들여지는 법이다.
무위자연의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인간이 인간률에 의해 접근하는 자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인간중심의 판단을 중지하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림에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느니 그림 자체가 스스로 형성되고 생육하는 과정을 지켜봄만 못하다는 생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사실 그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이다. 인간이라는 소우주가 인간의 탈을 쓰고서 노닐 수 있는 나름대로의 우주인 것이다. 그 우주를 인간의 시각에 의해 규정하지 말라는 뜻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2. 무용지용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수레바퀴에서 시작된다.
每日頭條
悟◎莊子的無用之用- 每日頭條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거지용,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요, 천호유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고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三十輻共一轂이나, 當其無하여 有車之用하며, 埏埴以爲器나, 當其無하여 有器之用하며, 鑿戶牖以爲室이나, 當其無하여 有室之用이니라. 故로 有之以爲利는, 無之以爲用이니라고 했다.
도덕경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뜻을 풀어보자.
서른 개의 바퀴 살이 바퀴 하나를 이루지만, 살과 살 사이가 비어 있기 때문에 수레를 수레답게 사용할 수 있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나, 그릇의 안쪽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 쓰일 수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나,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벽으로 둘러 쌓인 빈 공간이다. 그러므로 수레와 그릇과 방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바퀴사이와 그릇의 안과 벽 사이의 방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라 번역된다.
미국인에게 무용의 용Useful Uselessness는 이를테면, 못쓰게 된 자전거를 거꾸로 집 앞에 걸어놨더니 친구들이 집찾기에 편하다 하더라는 류의 실용적인 쓸모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듯한 사기 그릇의 안벽에 바람에 스치운 듯한 귀얄무늬의 분청을 떠올려보라. 그 차제가 자연이기에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자연을 보는 푸근함과 경이로움을 담을 수 있는 빈 공간이 되지 않겠는가.
먹과 물
비유컨대 동양화의 기본인 먹을 가는 작업은 그 자체가 무용지용의 사상을 보여준다. 벼루에서 먹이 갈리는 부분은 벼루도 아니고 먹도 아닌 그 중간의 세계이다. 이를테면 수레바퀴와 같고 그릇 안의 빈 공간이기도 하고 벽으로 둘러 쌓인 방이기도 하다. 무용지용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도와 같아서 텅 비어도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으니 깊고 그윽함이 만물의 근원이다
도충이용지혹불영, 연헤사만물지종-道沖이나 而用之에 或不盈하니, 淵兮하여 似萬物之宗이로다라는 노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먹은 시간을 고정한다. 먹은 또한 시간을 가불한다. 배접이 되면 마른 그림보다 젖은 그림을 잘 살려준다. 그림에 배어 들어가는 발묵은 사람을 빨아들인다. 천의 얼굴을 가진 먹의 농도만큼 시간은 먹 안에서 풍요로운 셈이다. 그리고 그 먹의 효용은 먹과 벼루와 물에서 만들어져서 종이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
이은경의 작품은 대관적大觀的스케일, 유능제강의 발묵과 선염, 당당한 여백으로 특징지워진다. 보는 사람들은 그 성취와 가능성의 배경에 어떤 사상과 이념이 자리하는지 깊은 관심을 보인다. 즉 작품이 관중을 빨아들인다.
이은경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초점 심도가 낮은 사진 즉 먼 곳에 있는 집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앞쪽의 나무를 흐리게 찍은 사진을 연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은경은 이러한 효과를 위해 사진 기교를 이용하지 않는다.
사진은 정보 기록의 수단으로 사용될 따름이다. 오히려 기운생동을 담은 스케치와 그녀의 심상이 빚어내는 풍경이 그녀의 방향이다. 과감한 발묵과 대담한 생략 그리고 의식적인 감정표현의 절제를 통해 그려지는 부드러운 나무가 뻣뻣하게 보이는 집들을 대비 및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노자의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뜻을 풀이한 듯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여백
임현락은 형상을 자아로 치환한다. 주변 공간은 사회 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물질문명 속에서 야기되는 내면의 갈등이 바로 회화의 맛이 되는 셈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하는 군형君形즉 으뜸이 되는 형상이 임현락에게 여백이 된다. 회남자의 신사神寫는 정신의 닮음이다. 그렇다면 여백이 정신적 닮음이 된다.
또한 고개지의 이형사신以形寫神 역시 여백으로 환원된다. 이형사신은 형상을 소재로 사용하여 정신을 그린다는 말이다. 인물화를 그릴 때 정신을 전하는 것이 눈동자라 했다. 그런데 임현락에게는 여백이었다. 여백이 어떻게 정신을 전하는 가장 정채있는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이기에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역시 무용지용에 통하는 이야기이다.
여기까지가 무용지용이라면 임현락은 더 나아간다. 추상적인 사의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입의立意의 재료, 의재필선意在筆先의 재료로 먹을 내세운다. 입의란 뜻을 세운다는 말이다. 장언원에게는 용필이었다. 의재필선은 뜻이 붓끝에 있다는 말이다. 천상묘득遷想妙得즉 생각을 옮기어 오묘함을 얻는 길이 붓끝인 셈이다. 여백의 새로운 변용이라 할 것이다. 이르자면 무용지용의 새로운 가치창출이라고나 할까.
동양화의 여백은 이러한 무용지용의 절대적인 반영이다. 온 세상을 덮고 있는 기를 표상하기 위해서, 그리고 산수의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비워둔 공간이었다. 그렇게 여백을 살린 그림이 등장한 것이 10세기였다.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마하파의 변각경은 여백 사상의 적극적 운용이라 할 수 있다. 변각경이란 화면의 중요한 부분을 공백으로 처리하여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기법이다. 남송의 마원 하규가 정형화했다.
그렇게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이 노자의 사상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귀기근歸其根이라 했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고요함이니 귀근왈정歸根曰靜이요, 그것을 명으로 돌아간다 일컫는다. 시위복명是謂復命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다시 복명왈상復命曰常이라 했으니 그 명으로 돌아감이 바로 영원함, 즉 상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백이 무용지용의 사상을 구현하는 시각적 표상일 뿐 아니라 본질환원을 향한 접근방식임을 알겠다.
3. 유능제강
세 번째의 사상은 유능제강柔能制剛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이다.
천하지유 치빙천하지견 무유인무간, 오시이 지무위지유익,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天下之至柔는 馳騁天下之至堅하고 無有는 入無間하니, 吾是以로 知無爲之有益이니라. 不言之敎와 無爲之益은, 天下希及之니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단단한 것을 마음대로 부린다.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데까지 들어간다. 억지로 일을 꾸미는 것이나 말로서 가르치는 것보다 자연에 매끼는 것이 이익인데도 천하가 이에 달하는 것이 드물다
는 말이다. 주검이 뻣뻣하고 강한 나무가 꺾여지는 반면 어린아이의 살은 부드럽기 그지없고 풀은 강풍에도 부러지지 않는다. 또한 부드럽고 약한 것처럼 보이는 물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듯 삶의 부드러움과 약함이 진정한 강함이 된다.
유능제강의 대표적인 개념은 물이다. 동양화와 서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물이다. 물로 녹이고 갈고 씻는다. 물은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경에는 최상의 선이라 한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아니하고, 뭇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상선약수 수선리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오 고기어도-上善은 若水니라. 水善利萬物而不爭하고 處衆人之所惡니라. 故로 幾於道니라.
노자의 사상에서 몇 구절만 들어보아도 동양화라면 수묵화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배경을 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묵화는 수운묵장水暈墨章의 준말이라고 한다. 형호의 필법기에 나오는 말이다.
농담 변화의 먹의 무리를 운暈, 깊은 표현을 장章이라 한다. 발묵이나 파묵으로 그 깊이와 변화를 만든다. 발묵은 먹물의 기운이 가득한 것, 파묵은 젖은 종이의 먹위에 겹쳐 그리는 것이다.
동양화는 물의 미학이다. 물로 그리고 물로 녹이고 물로 씻는다. 따지고 보면 동양의 화가들이 근본적으로 아크릴 칼라 등의 화공 안료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동양의 정신을 몸으로 체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한국의 정신일 것이다.
이상국은 유럽의 풍광을 그리되 수묵화의 의지와 여백의 미학을 담아 그린다. 흑과 백의 세계에 바탕한 단순화한 색채와 포름을 지향하기 때문에 더욱 수묵화같은 느낌을 준다. 그 화면에 나이프 터치가 중심이 되는 의도적인 치기와 이겨붙인 물감에서 오는 투박한 느낌, 기름기가 돌지 않는 안료가 탄탄히 자리잡는다. 그 질박하고 거친 물감 덩어리 사이로 투명한 빛과 숨쉬는 공기가 보인다.
결국 한국인에게 수묵이란 화선지 위의 물과 먹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이 기름과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그리더라도 그 정신이 수묵화라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붓과 물
동양화의 붓은 부드러움의 극치이다. 그렇게 부드럽기 때문에 힘이 나온다. 현판을 쓰는 사람
壹讀
水暈墨章| 荊浩- 壹讀
을 시기해 사다리를 치웠다. 그러나 사람이 붓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 했다. 정신이 가는 곳에 힘이 있는 법이다. 붓은 부드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뻣뻣한 것을 이긴다.
붓을 뻣뻣하게 하는 것은 물이다. 가장 약한 것과 약한 것이 모여 강한 것이 되는 것이다. 붓은 언제나 부드럽게 유지가 된다. 그래서 물로 붓을 빤다. 필요한 때 먹을 머금어 가장 강한 글씨나 그림을 만들어 낸다.천하 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 막지능승 이기무이역지-天下에 莫柔弱於水로되, 而功堅强者는 莫之能勝이니, 以其無以易之니라 했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 매가 나무에 앉아 졸다가 쏜살같이 먹이를 채듯, 잔잔한 물위로 잉어가 뛰어오르듯 정중동靜中動의 여유는 그렇게 생겨난다.
IV. 중국의 예술
1. 중국세계
이제 노자의 도덕경이 왜 우리의 미술을 그토록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것뿐일까.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더 많은 것들이 우리의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우리의 입장이라 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 내 논에 물대기로 남의 논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돌리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인들이 내논으로 들어오도록 터 놓은 물꼬를 거부하지는 말자는 이야기이다.
채묵과 오채
수묵을 이야기하는 것은 채묵의 반대개념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수묵의 경우 짙은 채색보다
는 담채 정도로 그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채묵은 먹보다 짙은 색이 쓰인다. 오채는 오방사상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오채는 한국인에게 너무나 편한 색의 조합이다.
장상의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오채는 무당의 오방색이나 동양화의 오채라기보다는 장상의의 색이고 혈통이고 전통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선조들에게서 내려오는 피의 약속이다. 왜 그런가. 그녀는 아크릴 칼라를 쓰지 못한다.
아크릴 칼라를 쓰면 붓에게, 종이에게 미안하다 한다. 나일론 헝겊을 보면 피부병이라도 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단다. 그것이 그녀의 체질이었다. 오채는 그러면서도 화면에 확실히 자리잡았다. 우리의 원형이자 체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오채속에서 살아왔다. 색동이 그러하고 금기가 그러하다. 금기란 잡인 잡귀를 멀리하기 위해 치는 새끼줄이다. 새끼줄은 노란 색이다. 왼 새끼로 꼬는 것은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서이다. 도삭산의 반도복숭아를 지키고 있는 신도와 욱루가 그랬다.
그 사이에 파란 솔잎-하얀 종이-빨간 고추-까만 숯을 끼운다. 그리하여 중황에다가 동청 서백 남주 북흑이 더하여졌다. 그래서 오채가 되지 않는가. 오늘날 우리가 오채의 금기 속에 산다는 것은 5천년 너머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산수와 신선
산수화는 이름 그대로 산과 물의 그림이다. 산이 먼저고 물이 따른다. 북방에서 쓰는 산천이라는 말 대신 산수가 통용된다. 산과 시내가 아니라 산과 산의 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산은 신선이 사는 산이다. 산수화의 초기 형태는 신선 산수였다.
진 한 시대에는 신선이나 영수가 살고 있는 곳을 그렸다. 육조에서부터 운무 빗긴 산이나 고원 산수가 독립하여 그려진다. 역시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 깃들인다. 이후의 화북 산수는 보통 속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으로 그려진다.
산은 신선이 있는 곳이고 하늘 민족이 하늘로 향하는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하늘사다리라,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같다. 하늘민족이 이 땅에 내려와 살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길이 하늘사다리였다.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쓴 북송의 곽희郭熙는 「산수훈」에서 산수화의 진정한 뜻은 임천의 뜻을 살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초월적 경지를 펼쳐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월적 경지란 무엇일까. 산수가 주는 것이 자연이라면 임천의 초월적 경지는 인간을 넘어선 경개일 것이다.
Daum 블로그
춘심고수녹성위(春深高樹綠成幃)
청록산수靑綠山水는 인간의 산수가 아니었다. 나아가 금니의 준을 곁들인 금벽산수金碧山水는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청록과 금니는 신성한 것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선도의 하나인 영산도는 대개 청록산수로 그려진다.
육조시대의 종병宗炳도 숭산嵩山 화산華山 등의 신선이 머무는 영산의 묘법을 그의 저서인 「화산수서」에 정리했으며, 후대의 미불米芾-황공망黃公望-석도石濤 등은 도교적 산수화를 그린 화가들이다.
영주신선도瀛州神仙圖 봉래산도蓬萊山圖 등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여산도廬山圖 촉산도蜀山圖 화산도華山圖 등의 경관은 사실 인간의 풍경이 아니다. 산수 속의 누각을 그린 황학루도黃鶴樓圖 등 누각산수樓閣山水는 다분히 신선산수나 신화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신선산수라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이 상서로운 구름이 떠돌고 학이나 거북 등이 노니는 누각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곤륜산 요지에서 살고 있다는 서왕모가 주 목왕을 맞아 벌였다는 요지연회가 그 전형으로 생각되었음직도 하다. 곤륜산이 천제의 지상궁궐이라 했으니 그 장엄함이 오죽했겠는가.
신선산수는 분명 신선사상에 기초하여 그려지는 그림들이다. 그러나 많은 도교적인 삶과 은둔 사상을 담고 있는 화제 역시 신선 사상과 노장사상에 기인한다.
은일사상을 담고 있는 그림이 있다. 기우도騎牛圖는 소를 타고 가는 목가적인 그림이다. 노자나 고사가 그려지기도 한다. 두자미기려도杜子美騎驢圖처럼 두보가 당나귀를 탄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은둔사상의 예로는 채지도採芝圖가 있다. 고사리를 뜯는 장면을 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백이숙제 그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고사리는 은일사상-청렴사상을 대변한다.
도교적인 삶을 그린다.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는 하남성 영보현에 있는 함곡관을 지나는 노자를 그린다. 조원도朝元圖는 노자의 묘인 현원묘에 참례하는 그림이다.
신선경을 그린 그림으로 괴석도怪石圖와 태호석도太湖石圖는 신선경에서 볼 수 있을 괴석을 그린다.
신선경을 본 사람도 화제가 된다. 유완천태도劉阮天台圖는 유진劉晨과 완조院肇가 천태산에 들어가 반년 지나고 돌아오니 10세가 지났더라는 고사를 그린다. 도원도桃源圖는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그린다. 동진의 어부가 세속을 잊고 사는 도원경에서 환대받은 이야기를 담는다.
신선이나 신선풍의 사람을 그린다. 노동전다도盧仝煎茶圖는 소실산의 고사였던 노동이, 육우팽다도陸羽烹茶圖는 초계에 숨어살며 차를 좋아해 다경茶經까지 저술했던 육우가 차를 끓이는 그림이다. 연단도煉丹圖는 장생불사약의 단약을 만드는 모습을 그린다.
신선의 그림도 있다. 하마철괴도蝦蟆鐵拐圖 등은 물론이고 팔선도八仙圖나 열선전집列仙全集처럼 신선을 망라한 그림도 있다.
3. 문인화와 원체화
“중국회화이론사”를 쓴 갈로는 사의화寫意畵거나 공필화工筆畵에 관계없이 문인의 심미안과 정취를 표현한 것은 모두 문인화라고 했다. 아마도 갈로는 중국적인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화가의 주관적 심미안을 중시하는 사의화와 대상의 형상을 숙련된 솜씨로 정치하게 표현하는 공필화와는 다르다. 쉽게 말하자면 순수회화와 산업디자인 정도의 차이라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중국적인 회화와 중국적이 아닌 회화로 구분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사군자
사군자四君子는 문인화의 대표 개념이다. 군자의 기상을 말하는 것으로는 이아二雅 삼우三友 사군자四君子 오청五淸이 있다. 이아는 매죽, 삼우는 송죽매, 사군자는 매난국죽, 오청은 송죽매에 국화와 수석을 더한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적인 식물이 아니다. 화사하고 기름기가 도는 것이 모란 파초 불수감 등에서는 중국냄새가 난다. 그런데 군자식물은 담담하다. 남산골 딸깍발이같이 청빈하면서도 지조있는 선비를 연상케 한다.
서원아집도西院雅集圖에서처럼 조식의 정원에 모여 술 마시며 시 읊고 그림 그리는 이공린-황정견 등 소인묵객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지극히 담담해서 때로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인에 의해 군자식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매화는 봄샘 추위에도 꽃망울을 터뜨린다. 난초는 여름 산중에서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향기를 풍긴다. 국화는 가을 서리 속에서도 꽃향기를 뽐낸다. 대나무는 눈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모두 은근함과 매운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들이다.
매화는 백이 숙제의 고사를 연상케 한다. 동이족의 고죽국 왕자인 이제의 정절이 매화에 비유된다. 송백은 시경에 논의가 되었다. 시경은 동이가 활약하던 하상주시대의 시가를 모은 책이다. 난초는 공자 시대에 이미 향과 고귀함이 찬양의 대상이었다.
공자의 이상향이 동이 세계였음을 생각한다면 역시 우리의 정서와 연결되었다 봄직하다. 국화가 포박자 등에서 신선의 꽃으로 생각되었던 근저에는 역시 신선사상이 자리한다. 신선사상의 원전은 산해경이고 사상으로 승화한 것은 도덕경이다. 대나무는 시경의 위풍에 이미 군자로 지칭되었다.
매난국죽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군자의 기상을 대표하는 것이 소나무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있다. 1844년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어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간다. 당시 청나라에 가 있던 역관 이상적이 추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잘 지켰다. 추사는 감탄하여 그림을 그렸다.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구절을 땄다.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야라,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늧게 시듦을 알겠구나 하는 뜻이다. 담백하면서도 당당한 필의, 극도로 절제된 필선, 본질을 증득하는 필세와 아울러 여백의 적절한 포치로 이루어진 세한도는 가이 문인화의 표상이라 할만하다.
한족의 문인들은 지조와 절개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군자를 그렸다고 했다. 정사초는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렸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서러움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국의 슬픔을 담고 있다고는 하면서 은일한 식물들이 등장할까.
더욱이 시적 정취가 담긴 그림의 의취詩情畵意에 의해 그려지는 문인의 이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중국인의 취향은 아니다.
문동은 대나무 그리는 일을 일컬어, ‘도는 배웠으되 아직 이르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중국인에게 은일 정서는 흥 풀이 정도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니 동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중국인의 정서에 대나무는 폭죽과 더 친하다. 이전이라는 중국인이 산귀山鬼가 무서워 아침마다 대나무를 불에 넣었다. 뻥뻥 소리에 귀신이 도망갔다. 폭죽의 기원이다.
인물화
인물화는 신성함의 표상이다. 고대의 인물화에 태양신-황제 등의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인물화의 동기가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화제는 인물화의 신성 동기를 합리화한다.
복희伏犧-신농神農-황제黃帝 등의 삼황 그림, 태호 복희씨의 딸 복비를 그린 낙신부도洛神賦圖 하늘 땅 물의 세 신을 그린 삼관도三官圖, 굴원과 그의 제자 송옥 등이 지었던 초사의 화제를 그린 초사도楚辭圖. 신선의 단약을 만드는 연단도煉丹圖 산수 속의 신화나 역사 인물을 그린 고사산수故事山水 등이 인물화의 중요한 화제들이었다.
인물화는 중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북경의 대명사라 할 수 있을 천안문에 세계가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모택동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인간을 그리는 것이 이토록 신격화된 것은 국가적 사업의 일부였다.
중국인은 제왕이나 공신의 기념비적 현창상顯彰像을 그려 전각에 모시기 위해 화공을 육성했던 것이다. 전한의 소제로부터 수 양제까지 13인의 역대 군왕을 그린 염위본의 제왕도帝王圖,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촉으로 피신하는 현종을 그린 명황행촉도明皇幸蜀圖처럼 군왕의 행차를 그린 출행도出行圖 등이 왜 그토록 진지하게 그려졌을까.
분명 고대의 태양신이나 신화 인물들의 위광암시를 원했던 제왕과 그것을 요구했던 중국인의 국민성이 신성 인물화를 그려내었을 것이다.
3. 화제와 화론
그래서 우리는 다시 중국인이 즐겨 그렸을 법한 화제를 구분하게 된다. 이를테면 고사 등의 객관적 묘사와 행장 등의 현실적 묘사의 그림들이다. 이런 그림은 아무래도 객관적 사실묘사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한 시대상황 등의 묘사에서 정형화될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고사재현
고사의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과 질펀한 술자리가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그린 그림으로 문희귀한도文姬歸漢圖는 후한 때 흉노에게 12년간 잡혀있던 문희가 두 아이와 헤어지는 슬픈 광경을 그린다.
출새도出塞圖는 전한 원제 때 흉노의 왕비로 한나라를 떠나는 왕소군의 행렬을 그린다. 복생수경도伏生授經圖는 분서갱유 때 벽 속에 책을 숨겼던 복생이 조착에게 상서 20편을 물려준다.
모임에는 시가 있었고 그리고 술자리가 있었다.
구로회도九老會圖는 당나라의 백거이가 낙양의 아홉 노인친구를 만난다. 금곡원도金谷園圖는 서진의 석숭이 손님을 불러 시 짓기에서 떨어진 자에게 벌주 세 되를 마시게 했다. 도리원도桃李園圖는 이백의 춘야원 도리원서라는 글을 그림으로 옮겼다.
복숭아 오얏꽃이 흐드러진 정원에서 술 마시며 시 짓는 문인들 그림이다. 십팔학사도十八學士圖는 학사들이 시와 음악과 그림-바둑을 즐긴다. 술과 음식이 거나하다.
행장묘사
행장에는 옛과 오늘의 현장을 그린다. 태진승마도太眞承馬圖는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양귀비가 말 타는 장면이다. 사녀도仕女圖나 열녀도 등의 사대부 부녀 그림 역시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여사잠도女史箴圖는 장화의 여사잠을 그린 고개지의 그림이 있다. 한궁춘효도漢宮春曉圖 후궁의 침실이나 화장-놀이 등 생활상을 그린다. 경직도耕織圖는 권농을 위한 계몽도이다. 그리고 청명상하도가 있다.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는 청명절 도성의 인파를 그린 장택단의 그림 등의 객관적 묘사가 전한다. 포토 리얼리즘을 연상케하는 치밀한 묘사가 혀를 내두르게 하는데 나아가서는 소주 부근의 불특정 시가지를 표집으로 한 점포배열-세부도안까지 정형이 있었다 했다. 그런 현실적, 객관적 정신이 우세하기에 오늘날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연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4. 화원과 화공
객관적 사실묘사는 특히 동양의 그림에 있어서 화원이라기보다는 화공의 영역이었다. 사의보다는 공필이 강조되는 일종의 기능공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그림이라 할 때 먼저 머리에 공필화가 떠오르는 것은 중국인의 현실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미술사의 주류로 상찬받는 사의화는 중국의 화가들이 이룩한 업적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뒤에 깃들인 화론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다분히 중국적이 아닌 요소들을 추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화론이란 중국인에게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한 각고의 심사를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화론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원체 하품이 나올 만큼 진부한 이론이 화론이다. 중국인의 화론이기에 더욱 지루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생동하는 광채는 중국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 미술과 화론은 좁게 말하자면 화원과 화공의 각축이라 할 수 있다. 화원은 궁정의 원화를 그리는 화가이지만 때로는 화공에 비해 신적인 우월성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당대에 화원 제도는 당나라 오대를 거처 남당에서 제도화된다. 북송 초기에 이르러 내시성하에 화원을 설치하였고 휘종에 의해 원체가 확립되었다.
화공은 그림을 직업으로 하는 직공이다. 민간에서는 단청사부丹靑師傅라고 했다. 중국 민족 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공의 그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천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과도 흡사하지만 한국의 이름 없는 화공이 신기를 발휘하여 불화나 청자를 남겼다면 중국의 이름 있는 화공은 장식 도안 등 공예적 그림을 그려 왔다. 그것이 아마 민족성의 차이일 것이다.
중국 미술에서는 극구 부인하겠지만 원체화는 다분히 화공의 기예가 중심이 되는 그림이다. 그것은 초월적 정신이 전제가 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예를 닦을 수 있다는 중국적인 사상이 원체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자원화보 등의 미술교습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양미술의 고전으로 군림한다는 사실을 중국화, 또는 중국인의 동양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원체화는 그러므로 문인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범주의 정신을 가진다. 따지고 보면 중국 화론의 각축이란 문인화와 원체화의 투쟁이며 중국적 현실주의와 비중국적 초월주의의 다툼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와 원체화
문인화와 원체화의 투쟁은 오파와 절파에서도 재연된다. 절파는 명대 초기에 대진과 오위를 중심으로 하는 원체화 취향이다. 원대의 전통을 버리고 남송의 마하파, 즉 마원과 하규를 배웠다.
마하파의 화풍은 변각경邊角景이다. 잔산잉수殘山剩水를 화면의 아래쪽에 붙이고서 중앙이나 윗부분에 만든 여백을 통해 시적 정서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반하여 심주, 문징명의 오파는 원대의 전통을 이어 문인화를 재건한다. 동기창에 의하면 문인화는 왕유-동원 거연 이성 범관으로 이어져 원 사대가인 황공망 왕몽 예찬 오진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이사훈파에서 비롯하는 마원 하규 이당 유송년 등을 배우지 말라 했다.
진계유가 평했듯 이사훈파는 새긴 듯이 자세하여 사기가 없고 왕유파는 맑고 온화하며 조용하고 한가롭다고 했다. 문인화의 장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의 체질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자연물의 모사에 익숙한 중국인에게 자연물의 미를 통해 작가의 ‘정’을 표현한다는 운격의 주장은 곽약허가 사기모似氣貌 즉 귀하고 천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 했던 주장과 같다. 자연과 인간을 통해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논의는 오도자의 신사에 대한 이야기에서 실마리가 풀릴 듯하다. 재론하면 “뜻이 그림에 있지 않아 그림을 얻었다” 는 것이다. 뜻이 그림에 있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형상이나 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적인 것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화론을 뒤집어 살펴보자. 거기에 중국의 숨은 얼굴이 있다.
화론의 뿌리
“좌전左傳”에 “백성으로 하여금 신령스러움과 사악함을 알게 한다使民知神姦” 라는 말이 나온다. 상주 시대 청동기에 새긴 도철 문양 등에 대한 계몽적 ,효능적 해설이다. 도철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사람의 독으로 자신도 죽게된다는 이야기이다.
농경시대 대가족제도에서 과식을 경계하였다 한다. 정치적 도덕 논리라 할 수 있을 이러한 류의 회화 해설은 모연수나 조식-육기-장언원 등에서 거듭 강조되고 있다. 초점은 중국인들의 현실적 정치논리가 제의와 사상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육기는 회화의 효능이 시경의 아송雅頌같은 명성을 가지는 것에 있다고 했다. 결국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이상이 담긴 요순과 하상주 시대의 사상과 현상에서 중국인들이 찾아낸 것이 현실적 정치논리였다는 것이다.
또,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요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함은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을 칠한 뒤에 하는 것이며 문文과 질質을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맑은 거울은 모습을 살피게 해준다明鏡察形” 즉 요순과 주공 그리고 걸주를 비춰 오늘을 살피도록 해주는 것이 그림이라는 이론 등은 공자의 이론 뒤에 숨은 신화시대를 느끼게 해준다.
공자가 시를 배워야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시는 모시毛詩, 즉 시경이었다. 결국 요순, 시경과 신화시대가 화론의 뿌리였던 것이다.
한국의 작가들에게서 소이위현혜란 화면의 굳건한 물리적 기초에서 비롯하되 심미적 안정감과 질서와 연결된다.
이를테면 박순옥의 “대지의 노래” 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극도로 절제된 화면의 질서이다. 화면 위에는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항구도시의 불빛처럼 명멸하는 빛의 점들이 깔리지만 이들은 까만 바탕을 온통 뒤덮고 있으면서도 바탕의 질서를 훼손하지는 아니한다.
그리고 먼 바다의 불빛처럼 전체화면의 포름을 감싸고 있는, 끊일 듯 이어지는 색띠나 대담하게 거친 터치로 그려지고 그 원래의 선禪적인 갈피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무리 된 삼각형들도 기실 화면 전체의 질서를 깨뜨리지는 아니한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이토록 강력하게 화면을 통제하는 질서의식은-. 그것은 오로지 화면을 통제하는 금욕적인 절제와 그에 반하여 화면의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외골수적인 추구의 자세가 상충하지 않고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손쉽게 유추될 수 있는 개념이 소이위현혜 素以爲絢兮의 경개이다. 즉 바탕이 있고 난 다음에 그 위에 꾸며진다 할 때의 바탕에 불과하다. 그 바탕이라 실체가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화면의 절대적 통일이라는 믿음으로 심어진다는 것이다.
원시시대 예술은 생산과 수렵을 위한 공리적 수단이었다. 동양에서 자연경관이 나타나는 것은 상 주시대에서 한 대로 본다. 인간과 귀신과 신화가 섞여 있는 자연이 무대였다. 동이족의 정신이 만연한 노나라에서 공자는 물의 쉬지 않음, 송백의 절개 등을 논했다.
상족이 주도하던 초나라에서 굴원은 초사를 지었다. 산해경과 초사는 신화 인물 신선산수 누각 등의 계화의 사상적 바탕을 제공한다. 노자는 수묵화, 문인화 등의 정신적 지주였다.
V. 기운타령
화론에서도 역시 동이의 정신을 유추할 수 있다. 기운생동 신사 임자연 의고의 정신이 그러하다. 고개지의 전신론-사혁의 기운생동-형호의 기운사경필묵-유도순의 육요-황휴복의 신묘능일-이개선의 6요-황공망의 일묵-전선의 사기론-추일계의 활탈론은 이를테면 기운타령이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기운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타령은 없는 사람의 한탄이다. 기운을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제도가 준다고 생각한 중국인의 기운타령이다.
예술충동과 자유정신은 타고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다는 말이다. 태생이요. 천생이다.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천재라는 말이 생겨났다.
기운은 초월적 정신이다. 하늘 사상이다. 하늘에 뜻을 두고 몸이 이 땅에 있으니 그 기운이 하늘에 미친다는 사상이 기운생동이다. 중국인이 그토록 기운타령을 한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기운이 없는 민족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염불은 성불하고자 하는 자가 하는 것이고 타령은 얻고자 하는 것이 있는 자가 하는 것이다.
한국의 동양화 혹은 한국화에는 가진 자, 얻은 자의 여유가 보인다. 임현락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경쾌함과 중후함의 양면성은 다분히 유도순의 6장六長이 연상된다. 탄탄한 회화 수련의 결과일 것이다. 유도순은 송조명화평宋朝名畵評』에서 예술 형식미의 대립과 통일에 대해 썼다.
“거칠고 치졸한 데에서는 필법을 구하는 것粗鹵求筆이 하나요, 궁벽하고 껄끄러운 데에서는 재기를 구하는 것僻澁求才이 둘이요, 자세하고 교묘한 데에서는 힘을 구하는 것細巧求力이 셋이요, 미친 듯하고 괴이한 데에서는 이치를 구하는 것狂怪求理이 넷이요, 묵이 없는 데에서는 채색을 구하는 것無墨求染이 다섯이요, 평범한 그림에서는 심장함을 구하는 것平畵求長이 여섯이다.”
임현락의 6장은 이러하다.
유장한 붓놀림을 갖추었기에 화선지의 부드러움 대신 거친 장지를 선택한다. 갈필의 거친 붓자국은 습필이나 선염 혹은 배채로 조화를 이룬다. 보는 사람이 소재와 주제를 눈 여겨 볼만한 곳에서는 재빨리 시선을 추상적인 구성으로 이끈다. 형상과 표상이 주제를 설명하지 못할 때 화면은 차분한 추상 화면으로 탈바꿈한다. 주제로서의 나무나 인물이 묵으로 그려지는 경향인데 반해 여백은 대부분 채색으로 이루어진다.
나뉜 여섯을 합치면 중도와 중용이 된다. 그러나 가운데 서서 저울질을 하라는 중도가 아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씨름할 일없이 팔짱을 끼고 있으라는 중용도 아니다. 중도와 중용의 양쪽을 동시에 화면에서 구현하되 치우침이 없으라는 가르침이다. 화면에서는 저질러 놓고 수습하는 것이다. 깊이와 무게는 그렇게 더해진다.
그리하여 중도의 평안함을 가지는 화면이 만들어진다. 소재로서의 나무나 인간은 하나의 굳건한 회화적 질서 속에서 통합된다. 새로운 생명으로 탈바꿈한다. 여백의 너그러운 공간에서 회화는 무르익는다. 그것이 여유이고 가진 자의 평온일 것이다.
한국인 작가는 기운 그 자체이다. 김병종에게 기운생동이란 가슴으로 배어 오는 생명력이다. 자연과 물과 내가 일체가 되어 생명의 노래를 대 합창하는 것이 그의 생동이다. 생동하는 기운이다. 그래서 그는 화면으로 돌진한다. 먼저 호흡을 조절한다.
고함을 지르며 달려간다. 쏟아 붓는다. 큰 붓으로 한 획을 긋고 나가 떨어진다. 화면에는 생동하는 기운이 가슴으로 번져 온다. 기운을 모으고 쏟아 붓고 화면으로 돌진하는 정신을 미쉘 누리자니는 활의 시위를 당기는 것으로 비유한다.
자신의 의지를 자기 자신으로 긴장시킨다 했다. 활의 시위, 참 좋은 비유이다. 그 후 정확하면서도 의식이 없는 것 같은 붓놀림에 모두 손을 맡겨 버린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누리자니는 생명력의 본질을 잘 파악한다.
1. 신사
고개지는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린다” 했다. 고개지가 사람을 그리면서 몇 년간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누가 물으니“전신사조傳神寫照가 눈동자에 있다”고 대답했다. 눈동자가 내면의 신을 전하는 경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그림에는 인간 내면의 정신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김병종은 부점목정不點目睛에 덧붙여 익삼모益三毛의 경개를 시각화한다. 부점목정은 인물을 그리되 점안을 하지 않는다 했다. 말을 바꾸면 눈에 점을 찍음으로서 인물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이니 눈을 그려 넣지 않고서도 정신을 드러나게 하겠다는 말이다.
이 경개는 김병종의 그림에서 민화 풍의 나비나 연꽃 등으로 나타나 상징의 샘을 풍요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되 익삼모益三毛라 했 다.
고개지가 배해裴楷를 그린 초상화의 뺨 위에 터럭 세 가닥을 더 그린 것은 인물의 정신이 화가의 정신적 접근방식에 의해 극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김병종의 그림에서 익삼모의 가능성은 <봉천동 파랑새>라는 그림이 제목처럼 제목이 메시지의 기능까지 덧붙여 나타난다.
봉천동은 얼마 전까지도 달동네의 대명사였다. 파랑새는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이라는 생태계의 깡패”에 의해 파괴되는 환경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일 수 있다. 그러므로 봉천동의 파랑새는 인간이 파괴하는 환경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생각해보면, 초상화에 눈을 그리느냐 않느냐의 문제에서 한걸음 비켜 정신적 접근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작가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한정수는 형상을 빌려 정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화면에 그려지는 돌은 종래 대립과 피의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으로 응축된 음악으로 자리했다.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을 가진 둔중함, 그것이 돌에서 느껴지는 물성이었다.
화면에서 돌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화음 속으로 빠져든다. 고속 촬영으로 포착된 우유 방울의 왕관 효과처럼 한정수의 돌은 자연과 시간과 공간이 이루는 화음의 어느 순간에 얼어붙는다. 선분들이 돌의 소리를 이끌고 화면에 등장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이형사신以形寫神이다. 한국화가 김병종은 한정수의 조형 언어에 대하여 ‘돌이라는 형상을 빌어 이형以形함으로써 시간의 본체를 사신寫神하려는 의도를 들어낸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회남의 작품에는 전기가 흐른다. 전신傳神적인 것이다. 전신, 즉 신기 神氣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기라는 말이 되겠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인 작품의 또 하나 특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회남의 그림에서 형상과 무관히 발라지는 나이프 터치와 뭉뚝한 붓 터치 사이로 몸부림치듯 진저리치듯 화면을 파고드는 나이프의 자국이 바로 그러한 전신의 흔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 그것은 여러 겹으로 발라진, 그리고 공들여 쌓아올린 중층구조를 파괴한다는 의미가 있고 때로는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 그 본질을 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캔버스의 바탕에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정신의 율동, 그 흔적과 궤적은 바로 이 작가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신의 흐름, 전기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전기라거나 혹은 신기가 아니라면 화면의 심리적 크기는 물리적 크기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운생동
고개지의 전신론을 이어받아 사혁은 고화품록에서 6법을 제시했다. 육법에서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골법용필骨法用筆이 중국화의 예술 형식미의 큰 줄기라면 그 나머지인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傳移模寫의 이론들은 부수적인 응용이라 할 수 있다.
壹讀
沒有深厚書法功底繪畫難氣韻生動- 壹讀
사혁의 기운은 고개지의 신神이라는 개념이 전승된 것이다. 기운생동은 대상의 생명을 그려내는 것, 골법용필은 탄탄한 숙련으로 대상의 뼈대를 필선으로 그리는 것이다.
기운과 골법이 큰 줄기라는 이야기는 중국인에게 그것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대를 물려 그것이 강조되는 것은 중국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점으로 들릴 수 있다.
응물상형은 실제 모양을 사실적으로 그리라는 것이다. 수류부채는 고유색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다른 색을 칠한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과 묘사가 강조된다. 중국인에게 객관적 리얼리즘은 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운생동과 골법용필의 뒤에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경영위치는 화면상의 구도와 위치를 잡는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접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전이모사가 있다. 옛 그림을 모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옛 그림이라 했다. 누가 그린 것인가. 그 옛 그림의 처음 범본이 누구의 것이었을까.
이렇게 의문을 던지면 이제 입이 달싹거릴 것이다. 옛 그림이란 적어도 사혁이 6법을 주장했던 5세기까지 그려진 그림들이다. 또는 중국인들이 가지지 못한 기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상고시대의 그림을 말할 수도 있다.
원론과 응용이 교차되는 것은 형호의 기운사경필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릇 그림에 여섯 가지 요체六要가 있으니, 첫째는 기氣요 둘째는 운韻이교, 셋째는 사思요, 넷째는 경景이요, 다섯째는 필筆이요, 여섯째는 묵墨이다”라는 것이다.
기란 마음의 붓을 따라 움직여 상을 취하는 것, 운은 필적을 숨기고 형체를 갖추는 것, 사란 생각을 응축하여 대상을 그리는 것, 경은 자연에서 정수를 찾아내는 것, 필은 붓놀림의 법도를 따르는 것, 묵은 온갖 색이 갖추어진 것처럼 먹을 쓰는 것이다.
기와 운은 그림의 정신을 의미한다. 사경은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필묵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이렇게 정신과 대상과 방법이 동격으로 미술 이론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국인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송의 유도순劉道醇이 “성조명화평聖朝名畵評” 에서 그림을 이해하는 요결은 먼저 육요를 아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기운겸력氣韻兼力 격제구노格制俱老 변이합리變異合理 채회유택彩繪有澤 거래자연去來自然 사학사단師學舍短이다. 역시 기운이 함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먼저 내세워지고 있다.
황휴복이 익주명화록益州名畵錄에서 당대의 비평 기준인 신神-묘妙-능能-일逸에서 일逸을 신묘능의 앞에 놓은 것은 바로 이러한 기운생동의 세계일 것이다. 신이란 자연과 합일한다,
묘는 묵이 현묘하다, 능은 생동감이 표현된다 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분히 규격적인 기준이다. 그 앞에 일격을 두었다.
이렇게 자유로운 예술 표현이 통상적 의취를 벗어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원체화의 법도를 따르자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체화란 중국 궁정의 화원회화체를 줄인 말이다. 궁체 혹은 궁정풍이라고 한다.
일종의 아카데미즘이라 할 수 있으며 지배계급의 귀족취미에 따라 형성된 미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화원의 창의와 표현이 제약을 받아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제약에 따라 그려진 그림이라면 당연히 필묵이야 정련되어 있겠지.
그러나 자유로운 예술표현과 법도를 넘어선 그림, 즉 일품이 되기 위해서는 기운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황휴복의 일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개선의 6요가 있다. 그 6요에서 맨 먼저 내세운 것은 신묘한 필법이었다. 그 다음으로 맑은 필법-노숙한 필법-굳센 필법-살아 있는 필법-윤택한 필법이 따르게 된다. 신묘한 필법은 기운을 상정한 것이지만 나머지는 한결같이 숙련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은 절파를 높이 평가하고 오파를 낮추기 위한 것이지만 기운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다.
황공망은 “바위 구멍 하나, 돌 하나를 그리더라도 마땅히 일묵으로 시원하게 쳐서 선비다운 풍격이 있어야 한다” 라 했다. 서위가 그림을 평가하면서, 자연물의 특징을 빌어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나 화법과 상관없이 기운을 중시하는 것, 또는 용묵에서 먹을 많이 쓰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동하는가 아니한가를 따지는 것 역시 기본적인 착안점은 기운에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전선의 사기론士氣論은 조맹부의 서화동필동법론書畵同筆同法論과 같은 맥락에서 서법의 기운찬 용필로 세속을 벗어난 청한함을 표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기운찬 용필이라, 역시 기운타령은 계속된다.
추일계鄒一桂의 활탈론活脫論은 형사를 중시하긴 했지만 사생에 있어서의 생동과 화격의 초월적 완성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활이란 뜻과 붓과 색이 하나같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고 탈이란 화면 위의 질서를 통어하는 정신의 자율적 흐름에서 그림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6기를 벗어난 곳에 살아 있는 붓과 뜻과 색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피하는가. 그것은 소산화보小山畵譜에서 제기된 대로 1. 시골 여자의 화장 같은 속기俗氣. 2. 교묘한 손끝 장난인 장기匠氣 3. 붓끝 장난인 화기火氣 4. 조잡하고 야한 초기草氣 5. 휘청거리는 선으로 그린 규각기閨閣氣 6. 격식 없이 함부로 창작하는 축흑기蹴黑氣를 벗어난 기운이라 일컫는다. 어떤 기운인지 짐작이 갈 일이다.
일러 기운 타령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기운생동이라는 것은 화가의 기운이 대상이나 화면에 나타난 바를 생기 있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예술 충동과 자유 정신을 말한다. 그런데도 추일계의 활탈론이나 곽약허의 삼병에서 용필을 상론하고 잡기를 그토록 경계하는 이유는 중국인의 기질을 경계한 것이다.
추일계의 병적인 6기는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 에 보이는 삼병, 즉 판版 · 각刻 · 결結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이 경계해야 할 병으로 지적되었을 것이다. 판이란 운필이 약하고 억양이 없어 그림을 그려도 납작하게 보이는 병이다.
입체적이지 않으니 그려진 것이 천박하여 원혼圓渾한 맛이 없다. 각은 너무 모가 나게 붓을 떼는 병이다. 운필이 조화를 잃어 과장하거나 모나는 것이니 그림을 그릴 때 어지럽게 보인다. 결은 성급한 병이다. 나갈려 해도 나갈 수 없고 흩어져야할 때에도 흩어지지 않아 붓이 뻣뻣하게 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병들은 자신의 언어와 어법을 찾지 못한 초심자의 것이거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중국인의 기운타령을 보노라면 한국 작가들의 세계는 그 타령과는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우상기는 회화의 정수가 기운에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작가이다. 우상기에게 표현이라는 것은 언어와 같다. 그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테크닉이다. 그러니까 확실한 테크닉의 바탕 위에 표현이 가능하고 그 표현의 위에 정신이 반영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리고서 그 테크닉은 버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기는 삼병三病이 그의 원형을 훼손한다는 것을 잘 아는 한국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삼병은 중국인인 곽약허가 중국인 화가에게 내리는 응급 처방이다. 우상기는 밑그림 즉 하도 下圖를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하도를 베낄 때 생생한 감정이 걸러질 뿐 아니라 운필이 안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체질이었다. 하도를 보고서 베끼려 하면 운필이 되지 않는 체질, 그것이 이른바 기운생동의 세계일 것이다.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에 이상으로 삼았던 기운의 세계는 한국인에게 체질 그것이었다.
기운비사
신사는 중국인의 기질인 형사에 대한 반성이다. 한비자의 형사-소식의 신사-회남자의 군형-종병의 창신-고개지의 전신사조-곽약허의 기운비사 역시 신명이 깃든 신사의 정신을 체질화할 수 없는 중국인의 정신이 빚어낸 것이다.
기운은 초월적 정신이다. 하늘 사상이다. 하늘에 뜻을 두고 몸이 이 땅에 있으니 그 기운이 하늘에 미친다는 사상이 기운생동이다. 하느님 사상을 천제로 바꾼 것은 중국인이다. 하늘에 있는 제왕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비유하자면 하느님은 하늘에 있는 초월적 존재이고 천제는 인간이 설정한 초월적 존재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초월적 기운을 천제의 인간적 기운이 당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사와 마찬가지로 노자의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기운생동을 기운이 생동함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기운은 기운이 아니라고 내팽개쳐 둔 곳에 있다. 생동은 시들고 병적인 곳에 있다. 이를테면 무용의 용에 그 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도자는 “뜻이 그림에 있지 않아 그림을 얻었다”라 했을 것이다. “무릇 생각을 움직여 붓을 휘두를 때에 스스로 그리는 것을 의식하면 곧 더욱 그림을 잃게 된다. 생각을 움직여 붓을 휘두를 때에 뜻이 그림에 있지 않아야 그림을 얻을 수 있다” 고 했을 것이다.
또한 힘찬 발묵과 파묵이 힘이 있음은 그 힘의 소용돌이 바깥에 의도하지 않은 갈필과 비백이 받쳐 주기 때문이다. 무위자연에 묘가 있다. 침전되고 축적된 체질적 원형적인 기운이 의도하지 않는 가운데 세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유능제강에 묘가 있다. 정신이 기교를 이끄는 것은 형상이 없는 것이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사란 정신의 닮음이다. 형사의 반대 개념이다. 형사는 형태를 닮게 그리는 것이다. 한비자의 형사에 대해 소식은 신사를 논했다. 소식의 신사는 형사를 포함한다. 전한 시대의 회남자淮南子에는 그림에 으뜸이 되는 주체 즉 군형君形 을 상정한다.
“터럭에 힘쓰다 모습을 잃는다謹毛失貌 라는 말은 군형을 중요시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사神寫 즉 정신의 닮음을 강조한다. 형상에 비해 심미 능력이 강조된다. 신사는 정신의 닮음이다. 그것이 어떻게 기교를 배워 따라 그린다고 되겠는가.
종병은 산수화에서 정신의 펼침 즉 창신暢神을 찾았다. 또한 “그림의 정이 산수에 강림한 것이 신명神明이라” 했다. 그런데 신명은 원래 태양이라 뜻풀이된다. 태양신이고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지신명이시어 일월성신이시어 라고 우리네 어머니는 비손을 하면서 주문처럼 신명을 찾았다. 신사는 신명 사상에서, 신명 사상은 태양 사상에서 비롯한다. 기운생동이 신사와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소이이다.
춘추시대의 형사론은 동진의 고개지에서 전신론으로 나아가 신사론이 중요시된다. 전신이란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말한다. 대상의 정신과 의태를 그림으로 전한다는 것이다. 고개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리면서 가끔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정신이 눈동자에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중국인이 정신의 가능성에 대해 눈뜨게 된다는 의미처럼 들리지 않는가.
곽약허郭若虛는 기운비사氣韻非師라 했다.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니 교묘한 재주로도 알 수 없고 세월로도 이룰 수 없으며 말없는 가운데 마음으로 깨달아 그러한 줄 모르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란다.
마음으로 깨달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 즉 자연률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일 것이다. 개자원화보를 눈감고도 베낄 만큼 그릴 수 있으되 기운을 배울 수 없는 민족이라는 체념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동양화가들에게서도 개자원화보는 화가가 되기 위한 필수과정이었다. 그러나 과정은 과정이었다. 개자원화보는 1679년 청초에 발간된 중국화 실기의 집대성이다. 명 말기의 화가 이유방李流芳이 옛 명화들을 모아 “산수화보山水畵譜” 를 만들고 왕개 王槪가 증보 편집했다.
每日頭條
郭若虛《國畫見聞志》三篇- 每日頭條
산수 인물 누각 사군자 초충 영모의 묘법을 비롯하여 화사 화론 화가 화인 채색 등 중국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개자원화보를 한국판으로 자신이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작가들은 많다. 그만큼 기능에서 철저히 닦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또 야심이라면 야심일 것이다. 그 야심은 개자원화보가 자신을 포함한 화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원이라는 인식에서 우러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몇천년 전의 잣대로 오늘을 볼 수 있는가. 또는 그렇게 정형화된 형사의 기법으로 어떻게 오늘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인식이었을 것이다.
다시 아이들 입씨름 같은 신사의 논의는 계속된다. 북송의 소식蘇軾은 “형사로써 그림을 논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견해와 같다” 고 했다. 북송의 황휴복黃休復은 육법을 논하면서, “오직 형사와 기운의 두 가지를 먼저 내세워야 한다.
기운은 있는데 형사가 없으면 바탕質이 무늬文를 앞서게 되고, 형사는 있는데 기운이 없으면 화려하지만 내용은 사라져 버린다고도 했다.
신사에 깃든 신명의 정신, 그것이 체질화될 수 없는 중국인이기에 정신을 전하여 모습을 그리는 것 즉 전신 사조가 그토록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2. 임자연 任自然
원시시대 예술은 생산과 수렵을 위한 공리적 수단이었다. 동양에서 자연경관이 나타나는 것은 상 주시대에서 한 대로 본다. 인간과 귀신과 신화가 섞여 있는 자연이 무대였다. 동이족의 정신이 만연한 노나라에서 공자는 물의 쉬지 않음, 송백의 절개 등을 논했다. 상족의 초나라에서 굴원은 초사를 지었다. 신화 인물 신선산수 누각 등의 계화의 사상적 바탕을 제공한다.
임자연은 노자의 사상에서 비롯한다. 장자의 해의반박-종병 왕미의 산수화론-왕리의 화산도서, 모두 자연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 자연을 배우는 것이 인간을 그리는 것보다 높
은 것으로 생각되었을까.
해의반박
노자의 사상을 이어 장자는 자연을 따를 것任自然을 주장했다. 창작에 있어 세속적인 사고와 회화 법칙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해의반박解衣般礴을 주장했다. 옷을 늦추고 다리를 뻗은 채 앉는다는 말이다. 한말의 채옹은 장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마음 속에 쌓인 것을 풀고 느끼는 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해야한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고인과 자연
동진과 남조에서 자연미는 신화적인 것에서 벗어나 신선사상과 은일 사상의 무대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종병과 왕미는 산수화론에서 자연이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고양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정신이 그림의 정수가 된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는다. 산수에서의 공간을 파악한다는 접근 방식은 형상을 담는데 그림보다 좋은 것은 없다는 사상으로 연결된다. 명대의 왕리는 ‘화산도서華山圖序“에서 고인과 자연, 즉 자연을 배워야한다는 전제하에 융통성있게 고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인과 자연... 많이 듣던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그 고인은 고대인은 아니다. 자연은 신선의 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분히 고형태와 원형을 추구하라는 이야기로 들리게 마련이다.
3. 의고 擬古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발전의 기틀로 삼는다는 태도는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서 그 태도를 볼 수 있다. 사혁의 고화품록에서도 그 여섯 번째 규범은 전이 모사이다. 바로 옛 그림의 모사를 말한다. 전대의, 선배의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 원형은 무엇인가.
古文学网
解衣磅礴- 古文学网
곽약허는 고대와 근대에 그 우열이 있는 분야가 있다 했다. 도석道釋-인물-사녀仕女-우마는 고대가 우수했다. 그러나 산수-임석-화죽-금어禽魚는 근대가 낫다는 것이다. 이 비유 자체는 기교와 정신의 우열이겠지만 우리는 그 배경에 원형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
즉 도석은 신선-인물은 신화와 전설상의 영웅이나 신-사녀는 신화 상의 여신이나 여신선을 그리기 위하여 애당초 그려졌을 것이다. 우마는 은일 사상과 팔준마로 연결될 수 있는 소재들이다. 노자는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났다.
기우도는 중국화에 있어서 불변의 전통이었다. 서왕모의 요지연에 참석했던 주 목왕의 수레를 끌었던 것이 팔준마였다. 따지고 꿰매고 보면 모두 신화시대, 또는 우회하여 동이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
조맹부는 복고풍으로가 아니라 고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바 있다. 옛 사람들이 기법과 풍격이 고전이라 했다. 명대 초기에 대진과 오위 등은 원대의 전통을 버린다. 그리고 남송의 마하파, 즉 마원 하규의 풍격을 배운다.
가까운 시대를 버리고 먼 시대를 배우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중국 미술은 고삐와 같다. 말뚝을 중심으로 반경 이내에서 노닌다는 말이다. 언제나 말뚝으로 회귀함도 같은 뜻이다.
사왕
청조에 들어 왕원기-왕시민-왕감-왕휘 등 이른바 사왕四王에 의해 선양된 의고사상은 명말의 의고 사상의 발전적 형태이며 청초화단의 정통사상이었다. 고인의 화적을 닮지 못함을 한탄한다 했으니 옛 그림을 베껴 자신의 스타일을 삼았던 것이다.
의고사상은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창신創新사상과 대립된다. 석도와 양주팔괴 등의 창신은 자연을 배우는 원칙을 지키면서 예전 사람들의 예술기교를 계승한 기초 위에서 혁신하자는 것이다. 결국 옛 것을 배우자는 데는 의고-창신에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자연에서 배울 수 없는 그들의 체질적 절망을 반영한다. 사실 고인의 필묵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스스로 구속을 자처하는 일이다. 생동감을 죽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중국 미술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절망한다. 결국 우리가 중국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중국인의 중국에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석도
석도石濤의 일획은 무법無法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이다. 그 무법이란 법이 없음이라기보다는 태고적에 천지만물이 혼연일체였기 때문에 법이 없었던 상태를 말한다. 법이 있으면 변화가 있다. 거기에 형태를 통한 표현의 수단을 부여하는 것이 일획이었다.
블로그 - 네이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청대화승 석도(石濤) 필 <十六나한응진도>(4 ...
김병종은 석도의 혼돈에서 김병종의 법을 이끌어낸다. 석도는 석도화어록에서 필과 묵이 만나 자욱한 상태가 된다. 이 자욱한 상태가 구분되지 않은 것이 혼돈이다. 지혜로운 자는 이 혼돈을 피하여 산은 신령스럽게 물은 생동하게 숲은 생기 있게 사람은 뛰어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병종의 그림에서 필묵이 혼돈 되는 것은 석도의 신령과 생동과 생기의 모습이다.
혼돈 속의 만물을 다스리는 일획이라는 법을 운완, 즉 붓을 움직이는 운필의 이론이자 붓잡은 팔을 움직이는 운완법의 이론에서가 아니라 화면을 가로지르는 초월적인 일획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김병종의 법이 되었다. 그렇게 한국인 작가들은 옛 사람들의 법을 빌려오되 자기 자신의 법으로 만들어 나간다.
석도가 “나는 나의 법을 사용한다我用我法”라고 호언한 것은 고인이 법을 세울 수 있다면 나도 법을 세울 수 있다는 조심스런 발상이자 추론이다.
석도에게 법은 그림이었다. 예술적 실천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이다. 유법필유화有法必有化의 뜻이 그러하다. 그 변화를 만드는 것이야 다름 아닌 ' 나' 아닌가. 그래서 석도는 아용아법 我用我法이라 했다.
나는 나의 법을 쓴다라는 말이다. 김병종은 그 '나의 법'을 ' 법이 있으면서도 법이 없는' 세계로 승화한다. 그것은 정신의 닮음이다. 석도가 말한 " 닮지 않은 닮음不似之似이 그것이다. 이렇게 신체언어와 무법의 언어가 초월적인 기상으로 화면을 채우면서 화면은 완성된다.
그것이 한국인 작가들이 말하는 ‘나의 법’이었다. 일획으로 나타나는 자신 만의 법이었다.
예술가의 한획, 그것은 돌발적이되 오랜 침잠과 명상의 결과이다. 그럴 때 예술 행위는 하나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사실 그것이 화면을 향해 돌진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제하가 “유자약전”에서 지적했던 바, 연속극에서 화면을 돌진하는 화가란 제한된 화면 속에서 예술가의 이미지만 부각될 수 있도록 조작되고 연출되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림에서 한 획을 긋는 것은 긋는 행위에서 보아서는 한 획이다. 그러나 그 한 획이 나오기까지는 한 인간의 모든 세월과 인류의 모든 진화가 배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대가의 회고전에서 볼라치면 그 평생의 그림이 마치 마지막 그림의 한 획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림의 완성이란 바로 인간의 완성 아니던가. 인생의 석양에서 손이 떨리고 필획이 어눌해도 그 마지막 한 획을 긋기 위해 작가는 평생을 바쳐 왔을 것이다. 그것이 중국인에게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살피기 위해 논형을 예로 든다.
중국인의 화론 혹은 그림을 통한 초월적 정신의 펼침에 대한 관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왕충王衝의 “논형論衡”일 것이다. 신화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멸실된 신화를 잘 보존했다고 평가되는 논형에서 왕충은 미술의 공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미술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늘날의 미술이 옛 화상석이나 충신 효자상보다 낫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신선이나 귀신을 선양하는 허황된 그림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회화에는 교육적인 요소가 없으니 문자에 의한 저술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신화는 창작이므로 허망한 형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도 신화의 소재는 현실적인 것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형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왕충의 주장은 매우 건실하다. 현실적이고 공리적인 논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이 중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형사를 통해서만 정신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화론의 요체에서, 그 중국 미술의 절망으로 우리는 귀결한다. 그래서 다시 우리의 것으로 돌아간다. 파랑새처럼 그것은 바로 우리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말하거니와 장르라는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옹골차게 자리잡은 우리의 원형이었다.
2020미관01